떠돌이 별(http://sowhat42.tistory.com/71)에서 이어집니다.
※18.07.27) 2편부터는 책을 구매해주신 분들께만 공개합니다.
[경로 이탈, 경로 이탈]
상아빛 선내에 깜빡깜빡 빛이 점멸할 때마다 규칙적으로 경고음이 퍼졌다. 겨울 하늘의 희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우선 요란스럽게 번쩍이는 경고등을 끄고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제거했다. 한동안 조종 패널 위 이곳저곳을 오가면서 다시 본래 목적으로 하는 궤도에 들기 위한 시도를 해보았지만 전부 불발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옆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둥근 안경 너머에서 가지각색의 상황등으로 화려해진 계기판을 살피며 결함을 분석하는 남자는 얼굴과 머리카락 곳곳에 연륜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나이든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젊은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고 어깨만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우주선 자체의 결함은 아니라는 건가. 행동으로 대신한 짤막한 소견을 들은 남자는 비상착륙을 위한 임시 항로를 설정하고 목적지를 수정했다. 뭐, 본래 가려고 했던 차원의 것이 아니다 뿐이지 결국 향하는 곳은 두 사람에게 익숙한 환경이 조성된 지구라는 행성이었다. 멀쩡하게 노란 태양이 존재하고 있고, 대기 역시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젊은 남자는 자신이 착륙을 위한 준비를 하는 모습을 잠잠히 지켜보는 남자에게 그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어깨를 으쓱해준 뒤 좌석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당황할 것은 없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지정된 목적지가 아닌 다른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쯤이야 별난 일도 아니고, 끔찍한 사고도 아니다. 공황에 빠지지 말고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더라도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급하게 경로가 수정되어 운행방향을 바삐 선회한 선체는 시공의 마찰로 인해 심하게 덜컹거렸지만 전직 소련의 슈퍼맨과 집안 재산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는 어디까지나 평온했다. 아직 푸르름이 가시지 않은 낮의 밝은 상공에 희미한 별똥별을 그리며 우주선은 지구 위로 착륙했다.
브루스와 칼이 13년 만에 다시 우주로 나와 항해하기 시작한지 2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의 일이다.
아직 노을도 내리지 않은 오후, 정체불명의 유성이 떨어졌다. 국방부나 나사 측의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아 이에 대해 관측한 것은 자나 깨나 자신의 고향도시에 정신이 팔린 배트맨 정도인 듯싶었다. 한동안 드물게도 화창하게 갠 날씨를 보이는 고담의 텅 빈 상공에서 성층권을 지나 대류권의 어느 매쯤을 통과한 후에야 관측이 된 그것은 대충의 형체로 가늠해 보았을 때 우주선이었다. 몇 번인가 배트맨은 그 정체모를 비행체를 향해 통신을 시도해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우주선의 감속상태가 비교적 규칙적으로 안정된 것을 보아 ‘착륙’이라는 행위 자체는 의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목적으로 한 지점은 웨인 매너 사유지 내에 있는 공터였다. 비록 배트맨이라고 하면 세간에서는 쉽게 밤을 떠올리고, 주무대로 삼는 배경 역시도 그런 통념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시간대였지만 고담의 범죄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만큼 배트맨의 근무 역시 따지고 보면 24시간 연중무휴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수상한 우주선이 고담 하늘에 출현했다면 배트맨은 진상규명을 위해 출동할 수밖에 없다.
배트모빌은 도심으로 향하는 다리로 이어지는 곳에서 정반대편으로 나있는 숲이 우거진 길을 통과하며 달려갔다. 웨인이 고담에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고 미국 내의 유력가문으로써 성장해 나갈 무렵에는 매너 안의 우거진 숲에서 여우사냥이 개최되기도 했었다. 브루스가 알기로 웨인의 사유지가 제3자에게 개방이 되었던 일은 그 정도이다. 물론 자선 파티다 뭐다 해서 저택에서 행사가 있는 날도 있지만 손님들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딱 그 정도 선이었다. 더구나 쉽사리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또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이중생활을 하는 주인이 못해도 ‘집’에서만큼은 벌거숭이 꼴로도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웨인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사안은 보안이다. 그런 곳에 듣도 보도 못한 비행체가 착륙한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속적으로 크립톤언어까지 포함해서 여러 방식의 메시지들을 보내봤지만 전달을 받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를 하는 건지 답이 없었다. 자유분방하게 자라난 풀들과 성을 감싸는 든든한 벽처럼 자라난 나무를 지나 곧 배트맨의 시야에 착륙한 우주선이 들어온다. 화재가 발생하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분명 지금의 착륙은 의도적이다. 내부를 미리 파악하고 싶었지만 외부 파장이 차단되었는지 적외선 감지가 되지 않았다. 직접 내려서 확인해보는 수밖에는 없는가, 배트맨의 뒷목이 반사적으로 찾아든 긴장으로 살짝 뻣뻣해졌다. 차를 근처에 세우고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안전벨트를 풀고 배트모빌에서 내리려던 때였다. 착륙한 뒤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우주선에서 문이 열리며 그 안에 있던 인영이 바깥으로 나타났다. 배트맨은 잠시 자신의 동작을 멈추고 우주선에서 나온 이가 누구인지, 인원은 어떻게 되는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눈이 크게 뜨였다. 얇은 코트를 걸치고 양복차림을 한 인물의 얼굴은 배트맨에게는 낯이 익기도 하고, 설기도 했다. 그 인물은 우주선에서 내려 어딘가를 열어보면서 이것저것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자동차의 보닛을 열어 확인하듯 우주선을 살피던 남자는 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지 열려진 입구로 얼굴을 향하며 무어라 말을 건넸다.
“항로를 급하게 바꾼 탓에 조금 손상이 생긴 듯한데 큰 문제는 아닌 것 같구나. 이탈 원인은 알겠니?”
“파장 간에 간섭이 있던 것 같아.”
“그 말은―”
“왜 그래?”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배트맨은 배트모빌 안에서 대기 중이었지만 저만치에 있는 나이든 슈퍼맨(복장으로만 보자면 클락과 가깝지만)의 얼굴이 이쪽을 향해오자 더 이상의 염탐은 그만두기로 하고 차에서 내렸다.
“배트맨.”
사박, 무거운 부츠가 풀 위를 밟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남자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배트맨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주시했다. 이번에는 무슨 소동이지? 시간 왜곡이라도 진행되는 건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차원으로부터의 간섭인가? 평소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닮은 인물을 눈앞에 두면서도 그가 자신이 아는 이와 어디가 어떻게 어느 정도 다른지 알 수 없는 만큼 배트맨은 전혀 모르는 인물을 대할 때보다도 오히려 더 날카롭게 경계했다. 그러다 불쑥 그 인물의 어깨를 짚으며 등 뒤에서부터 또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선내에 있던 인물인 것 같았다.
“뭐, 배트맨? 진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오고 발원지를 향해 눈을 돌린 배트맨은 하루 안에 연달아 2번씩이나 놀란다는 드문 이변을 겪었다. 슈퍼맨 뒤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무려, 지금의 자신보다 적어도 십 년쯤은 어려보이는 브루스 웨인이었다.
지금 세 사람이 연출하고 있는 광경은 꽤 웃겼다. 한쪽에는 우주선, 다른 한쪽에는 배트모빌을 세워두고 두 남자는 그저 멀뚱멀뚱 서있었고 무리 중 가장 어린 남자는 시꺼먼 복장을 한 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배트맨은 한 가지 확신을 얻었는데 적어도 지금 눈앞의 이들이 시간 패러독스를 일으킬 존재들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서른 몇 평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렇게(연기를 제외하고) 방정맞았던 적이 있던가, 배트맨 카울의 머리 위로 돋아난 편의상 흔히 귀로 불리는 구조물을 손에 쥐어보며 이상한지 신기한지 모를 표정으로 관찰하는 새파란 나이의 자신을 노려보면서 브루스가 한 생각이었다. 못해도 자신과 시간의 연장선상에 놓인 인물이라면 다짜고짜 이런 행동을 할리는 없다. 일행이라면 뭐라도 한소리 해줬으면 싶어서 힐끗 나이가 든 슈퍼맨 쪽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눈썹만 휘어진 채 어린 브루스의 움직임을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으되(비록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의 얼굴이지만) 아무리 다른 차원의 인물이라지만 도통 자신과는 매치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배트맨은 내심 당황하며 동시에 무척이나 성가셔 하고 있었다. 우주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런 인물들이 이 지구를, 그것도 웨인의 사유지를 찾아들었단 말인가. 이쯤 되면 언제 한 번 우주 내에 산재한 차원들 간에 테이블을 만들어서 서로의 차원에 대한 간섭은 삼간다는 내용의 협정이라도 맺어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온통 새까맣네. 여름엔 고생깨나 하겠는걸.”
우와, 망토 역시 무거워. 브루스는 케이프 자락이 이리저리 살피면서 감탄인지 비꼼인지 애매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것을 들으면서 배트맨 카울의 미간에 본래 잡혀있는 위협용 주름 외에 다른 깊은 골이 새롭게 하나 더 새겨졌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안경 쓴 남자가 입을 연 것은 그때쯤이 돼서이다.
“브루스, 그가 당황하잖니. 그쯤으로 하렴.”
참으로 빠르고 신속한 대응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몸 여기저기를 또 다른 자신에게 실컷 관찰당한 배트맨은 나이든 슈퍼맨의 사려 깊은 대처에 황송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맙소사 하늘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지금 제가 다른 지구의 저를 슈퍼맨이 조율하는 광경을 보고 안도하고 있는데 이게 현실입니까 하고 뜻 모를 참담함도 찾아들었다. 슈퍼맨의 부름에 살짝 그를 돌아본 나이 어린 브루스는 배트맨에게 제 양 손을 들어 보이며 마치 자신이 무해한 사람임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빙긋 웃으며 뒷걸음질로 멀어져 갔다. 거기다
“말로만 듣던 배트맨이라 신기해서.”
변명이던 진담이던 브루스 자신의 입에서 나올 말로는 생각하기 힘든 지극히 사교적인 해명까지 덧붙이고 있었다. 배트맨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경로를 거쳐 튀어나온 조합이지 짐작이 가지 않는 두 사람을 노려보면서 한참 뒤에야 자신의 온갖 심경과 의구심을 실은 물음을 던질 수 있었다.
“뭐냐.”
앞뒤 다 잘라먹은, 지금까지 일련의 흐름들을 보았을 때는 생뚱맞을 정도로 짧고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이 말에 포함된 의미는 다양했다. 문장의 생략된 부분에는 그들의 정체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지구에 온 저의에 대한 궁금증, 왜 하필 웨인 매너의 사유지에 착륙해서 이러고 있는가, 도대체 또 다른 자신은 왜 저리도 어수선한가, 둘의 차림새가 평상복인 것은 어떤 위장인가 아니면 정말 공적인 일이 아닌 건가 등등 아주 많은 질문 항목들이 죽 들어있다.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깜빡깜빡 움직이면서 배트맨을 멀뚱하게 보다가 서로를 보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어... 나랑 생김새가 다른가? 아니면 내가 아니야?”
“아니, 그는 너는 아니지만 브루스 웨인이란다.”
이 대목에서 힐끗 자신을 보는 슈퍼맨의 움직임에 카울 너머를 투시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배트맨의 심사가 더욱 뒤틀렸다.
“그럼 칼을 처음 보나?”
“아마 그는 맥락을 알지 못해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구나. 너라도 갑자기 다른 네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놀라지 않겠니.”
“뭐야, 그럼 말을 하지. 얘가 항로를 이탈해서 여기로 비상착륙했어.”
브루스는 자신의 뒤에 있는 우주선을 손짓하며 명랑하게 말했다. 누가 들으면 꼭 길을 가다가 도중에 내비게이션이 고장이 나서 옆동네로 잠시잠깐 방향을 잘못 들었다고 하는 것만 같은 가볍고 별스럽지 않은 투였다. 하기에 이 우주에 들어선 경이가 하나, 둘로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인데 차원쯤이야 넘나들 수 있고 그러는 중 불시착이 일어나는 것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었지만 배트맨의 과거 경험 상 다른 차원의 자신들과 마주쳤을 때는 영 유쾌한 적이 없었다. 다짜고짜 죽어줘야겠다면서 달려들거나, 너희의 가치관은 틀렸다며 서로 사상검증에 들어가거나. 배트맨의 표정은 여전히 엄하게 굳어서 두 미지의 인물들을 의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해봐야 그쪽 손해일 텐데... 정말 말 그대로야, 우린 길 잘못 든 여행객이라고.”
“너무 책망하듯 말하지 마렴. 그가 더 기분이 상하면 어쩌려고.”
“무슨 소리야. 수상한 우리를 보고 지금 한창 고민 중일 이곳의 내가 불쌍해서 이렇게 말해주는 건데.”
자신의 친절을 몰라주는 게 야속하다는 듯 어린 브루스의 말은 살짝 볼멘 상태다. 배트맨과 함께 했던 로빈들이 지금 저 브루스보다도 한참 어렸을 적에조차 이보다는 훨씬 의젓하지 않았나 싶은데. 브루스는 문득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특히나 그 남자가 같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하릴없이 피곤이 몰려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한손을 들어 둘의 대화를 저지했다. 다행히 둘은 서로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다시 배트맨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쉰 배트맨은 평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여행객이라고?”
“응.”
정말 무구한 대꾸다. 하, 배트맨이 결국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웃었다. 그런 배트맨의 반응에 브루스는 불만인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입을 열었지만 그보다 옆에 있던 슈퍼맨이 그런 브루스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한 발 앞으로 나와 제안했다.
“정 의심이 간다면 검사라도 해보겠나? 원한다면 우주선을 수색해도 상관없네만.”
둥그런 안경알 너머에서 유하게 푸른 바다가 잔잔히 웃고 있었다.
“손 봐야할 부분이 생겨서 잠시 체류할 것 같은데... 하지만 언제고 이런 우주선을 허허벌판에 두고 있을 수도 없지 않겠나. 그렇다면 차라리 배트맨 자네가 감시할 수 있는 곳에 있는 게 우리에게도 자네에게도 납득할만한 방법 아닌가?”
차분하게 말을 끝낸 남자를 배트맨은 한동안 바라만 보았다. 렌즈 너머에서 남자의 의중을 가늠하는 한편 이 지구의 그도 이정도의 나이가 되면 이런 의뭉스러운 구석이 생기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온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나이든 슈퍼맨과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 표정이 솔직하기 이를 때 없는 나이 어린 자신을 앞에 두고 후, 배트맨은 다시 한숨을 뱉었다.
“들고 따라오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아무리 배트윙보다 조금 큰 정도의 우주선이라지만 굳이 시동을 걸어서 이동하는 것보다 차라리 슈퍼맨이 들고 날아오는 것이 시간으로 보나 에너지로 보나 합리적일 것이다. 배트맨의 대꾸에 두 사람 모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걸음을 돌려 우주선 쪽으로 향해갔다. 배트맨은 슈퍼맨을 따라 움직이는 브루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넌 저기 타.”
배트맨이 배트모빌을 가리키며 말했다. 파란 눈이 깜빡이며 배트맨을 마주 보았다. 그때 바로
“브루스도 내가 데리고 갈 수 있네만.”
슈퍼맨이 말했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얼굴을 한 번씩 확인한 브루스는 “아!”하고 탄성을 뱉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브루스가 슈퍼맨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인질 비슷한 건가봐.”
그리고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더니 성큼성큼 배트모빌 쪽으로 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슈퍼맨이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 되는 것을 보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배트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슈퍼맨의 말에 순순히 배트맨에게서 떨어지던 것보다야 차라리 이편이 훨씬 납득이 간다. 결국 어느 지구건 뛰고 날아봐야 슈퍼맨은 배트맨의 고집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차원에 걸쳐 두루 통용되는 공리 비슷한 것이다.
첫 대면에서 워낙 부산스러운 모습을 봤던 터라 배트맨은 자신이 합승을 요구하고서도 혹시 브루스가 배트모빌의 이것저것을 함부로 건들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어쩌면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팔짱 낀 자세로 조수석에 탄 브루스는 여기저기를 눈으로 훑어보기는 했지만 곧 심드렁한 얼굴로 창밖 흘러가는 풍경을 살펴볼 뿐이었다. 그러다 불쑥 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하늘은 원래 감시하는 거야?”
“고담의 하늘은.”
“발견한 건 우리 뿐?”
그 말은 무언가 다른 게 더 있다는 건가? 배트맨은 입을 다물고 브루스가 보다 더 다른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브루스도 그것을 끝으로 케이브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의 이야기도 덧붙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이 자리하고 그 위를 묵직한 엔진음이 무마하듯 뒤덮었다.
이 지구의 배트맨이 동굴로 들어선 브루스와 칼을 대상으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그들이 정말 보이는 그대로의 인물들이 맞는지에 대한 확인이었다. 신체에 특이점이 없어 보다 빠르게 검사가 끝난 브루스는 조용히 동굴 곳곳을 기웃거리며 여러 장비들을 둘러보았다. 그 동굴을 이런 식으로 쓰는 법도 있군. 브루스는 오래전에 보았던 다락 하나를 떠올리며 굳이 둘 중 어디가 더 납득이 가느냐를 따져본다면 개인적 성향으로는 동굴 쪽이 더 어떤 기지로써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브루스가 배트맨에 대한 정보를 접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일차적으로 칼의 입을 통해서였다. 소비에트의 지배자로서 군림하던 슈퍼맨에게는 그에게, 정확히는 슈퍼맨을 위시한 소련의 특정 세력에게 반기를 드는 반동분자가 있었고 그의 이름은 배트맨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슈퍼맨의 죽음으로 붕괴한 체제를 바로 잡고 질서를 세워나간 이들도 그 배트맨의 뒤를 이은 또 다른 배트맨들이었다고 한다. 칼은 신기했고 동시에 궁금했다고 했다. 자신의 눈에는 그저 그럴싸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도구의 힘을 빌려 잔재주를 부리면서 혼란을 초래하는 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존하고 그 의지를 이어갈 수 있던 건지, 눈앞에서 죽은 그를 보았을 때 왜 그 당시에는 그것에 별 감흥을 받지 못했는지, 자신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였어야 했고 그는 정말 자신을 붉은 태양광이 내리쬐는 공간에 유폐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칼은 차원 곳곳에 존재하는 ‘배트맨’이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몇몇의 사례들을 통해 그 인물이 그리는 일정 패턴을 읽어냈다. 브루스가 배트맨에 대해서 들은 것은 그 패턴이었다. 브루스가 비상착륙을 할 때 지구 내의 자세한 위치를 고담 외각 즈음으로 잡았던 것은 세세한 부분 모두가 눈에 익은 것은 아니지만 대강의 지형은 알고 있는 웨인 매너이기 때문에도 있지만 그보다 배트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칼이 이야기했던 특성을 지닌 인물이라면 분명 낯선 정보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테고 어쩌면 브루스가 원하는 정보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브루스는 커다란 모니터에 바쁘게 흐르는 정보의 흐름을 그저 구경하는 양 조용히 살피고 서있었다.
“뭔가 알아냈니?”
평소보다 조금 불안정한 자세로 비틀비틀 날아서 제 옆으로 오는 칼을 보며 브루스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어지러워?”
“붉은 태양광 아래 있다 보니... 괜찮아, 금방 나아질 거란다.”
칼이 가볍게 웃어보였다. 보통의 기구들로는 크립토니안인 칼의 몸을 조사할 수 없어 배트맨은 그를 붉은 태양광을 쬘 수 있는 공간으로 데려가 검사를 했다. 붉은 태양광 아래서 칼이 크립토나이트를 앞에 뒀을 때처럼 심하게 쇠약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들어 브루스는 칼이 대답을 한 후로도 한참 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땅 위를 딛고선 칼의 발밑이 단단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섭해온 파장이 뭔지 알았으면 했는데 딱히 단서는 보이지 않아.”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떠니?”
“현재로썬 이곳의 배트맨도 달리 알고 있는 사항은 없을 거야. 어떤 일과 관련해서 우리를 의심했다면 신원조회 같은 게 아니라 목적이라던가 소지품에 대해 더 관심을 가졌을 테니까.”
브루스는 여전히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는 여러 무기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런... 괜히 시간을 지체하게 한 거니?”
“그건 아니야. 사실 요행을 바란 것도 있어. 혹시 우리랑 중첩된 파장에 대해 여기 배트맨이 관측한 게 있지 않은가 했거든. 또 저쪽은 우리를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괜히 숨어서 뒤를 밟히는 것 보단 아예 내키는 대로 조사하게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브루스가 피식 웃으며 칼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그때 저만치서 도르르 작은 바퀴가 단단한 바닥 위를 굴러오는 소리가 났다. 바짝 브루스 옆에 서있던 칼이 살짝 브루스와 간격을 두었고 둘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조용한 소음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트레이 카트를 밀고 온 단정한 연미복 차림의 나이든 집사였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그는 온화한 얼굴로 가볍게 허리 숙인 인사를 보내며 준비해온 차를 조심스럽게 잔에 따라 담은 뒤 그것을 건네기 시작했다.
“손님께서 오셨는데 정식으로 대접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집사의 얼굴을 본 브루스는 그 순간 모든 표정, 동작, 생각이 전부 굳어버렸다. 브루스의 시각에 집사의 생김새, 몸이 그리는 자세, 얼굴의 표정, 주름의 변화 모든 것이 세세하게 그리고 급하게 침투했다. 코끝에 집사가 건네는 홍차의 맑은 냄새가 났지만 그 유쾌한 감각은 인지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노인의 어조와 말투, 그 속에 담긴 뉘앙스가 빼곡하게 분석되어 브루스의 머릿속에 가득 자리 잡았지만 정작 브루스는 자신이 돌려줘야할 반응을 무엇 하나도 보이지 못한 채 그저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손님?”
“아, 고맙소. 이쪽에서 예고 없이 찾아든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칼이 빙긋 웃으면서 집사가 건네는 찻잔을 대신 받아들며 브루스에게 전해주었다. 입을 꼭 다문 브루스는 작게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눈을 한 집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웃는 얼굴을 한 칼이 브루스를 감싸듯 살짝 가로막자 곧 반듯한 인사를 남기고 바깥을 향해갔다. 가는 도중 자신과 스쳐 지나는 주인에게 “교류관계가 드무신 주인님께서 손님을 모셔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만 접객은 되도록 저택 안에서 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브루스 주인님?”하고 한마디 하는 것을 들었다. 집사의 등장은 나름 배트맨의 검사 합격 증서였던 모양이다.
“브루스?”
칼이 브루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브루스는 한동안 찻잔에 담긴 홍차의 수면을 바라보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차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신원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얻은 배트맨이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었다. 브루스는 가벼운 일상 얘기를 건네듯 물었다.
“당신 외동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랐는지 배트맨은 잠시 답이 없었다. 그리고 후에 느리게 말했다.
“그런 셈이지.”
경비가 삼엄한 배트케이브는 의외로 그가 믿을 수 있는 이들에 한해서는(본인 입으로는 믿는 이가 없다고는 하지만 일단 타인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런 형태의 교류를 하는 사람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니 편의를 위해 그런 세간의 표현을 따르기로 하자.) 급한 대로 곧장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된 틈들이 있다. 슈퍼맨이 배트맨의 그런 심리적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정말, 정말 많은 염탐과 입씨름과 심하게는 주먹다짐 그리고 생사의 고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본디 포기를 모르는 맨 오브 스틸에게 있어서는 삶에 한 번 쯤 도전해볼 법한 과제였다.
“브루스.”
동굴 내에 완전히 진입하기 전부터 클락은 크게 브루스의 이름을 불렀다. 브루스의 이름은 발음이 매끄러워서 부를 때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을 이유로 문제를 잠시나마 회피하기 위해서 통신이 아닌 방문이라는 수단을 택한 지금 같은 경우 더더욱 브루스의 이름이 가진 효력은 대단하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는 새에 몰래 다가가 남들은 좀처럼 하지 못할 배트맨을 놀랜다는 남모를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이번에는 바로 이야기를 나눠야할 사안이 있기 때문에 그런 소소한 장난까지는 참기로 했다.
“브루스, 지금 같이 와치타워에―”
어라, 손님? 언뜻 보이는 낯선 인영에 잠깐 움직임을 주저한 클락은 시야에 들어온 면면을 보고 잠깐 사고가 일시정지하고 말았다. 배트케이브에서 배트패밀리가 아닌 다른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그 인물들의 옆에 찻잔이 있는 것을 보아 무려 알프레드의 접객을 받은 나름 검증된 손님들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면면이 누군가를 확인하려고 보니 이게 또 눈에 익지만 익지 않은 그런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훌쩍 나이가 들어버린 자기 자신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지금의 브루스보다 몇 년쯤 어린 브루스였다. 이 둘은 슈퍼맨과 배트맨이 보이리라고 클락이 짐작할 수 있는 범위 안에는 없는 낯선 연령대의 조합이었다. 잠시 공중에 붕 뜬 채로 생각의 끈을 찾아 헤매던 클락은 평소보다 더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 쪽을 향해 얼굴을 든 브루스에게 고개를 갸웃하고 클락이 최선으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을 했다.
“―이번에는 무슨 연구야?”
그러면 브루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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