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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쥐의 이름으로

[아울뱃] 박쥐의 이름으로(2/?)

※형아 토마스가 나옵니다. 대학생 브루스는 마법소녀? 비슷한 기작으로 배트맨을 합니다.(근데 별로 설정을 살리지 못하는 글러먹은 글러)

※원작 뽀샤뽀샤, 생각 안 하고 글씁니다.

 

 

어른에게도 무서울 수 있는 일을 어린아이가 그저 어른의 말을 믿고 감당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정기적으로 고담의 보육시설들을 방문하여 예방접종을 하고 있는 레슬리를 돕기 위해 따라온 브루스는 아이가 무서워하거나 울먹이면 옆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서성이다 쫓겨나서 아이들이 차례로 줄을 서게 돕거나 레슬리가 지시한 물품을 가져다주거나 의료폐기물들을 몰고 온 차의 트렁크에 싣거나 하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잠시 멈추었다. 자기 순서가 된 아이들은 잔뜩 표정을 구겨보기도 하고, 닭똥 같을 눈물 흘리며 펑펑 울기도 하고, 오히려 정해진 운명을 맞이하는 듯 한 투사처럼 결연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그 중에 몇 번 인가 어물쩍 다른 아이에게 제 순번을 떠넘기면서 제 차례를 미루던 찰리는 결국 왼팔에 주사를 맞고 입술을 앙 다문 채 아이들이 없는 저쪽 구석으로 도도도 달려 나가버렸다. 쭈그리고 앉은 찰리의 곁에 조심스럽게 다가간 브루스는 마찬가지로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나직이 이야기했다.

 

"용감한 친구한테는 맛있는 거 주지요."

 

차륵차륵, 한 손에 알사탕을 잘 감싼 노란 포장지의 꼬리 한 쪽을 잡고서 빙글빙글 돌려보면 세상 모든 부조리를 마주한 것처럼 찰리는 눈썹을 꾸욱 찡그려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브루스 바보! 내가 무슨 꼬맹인 줄 알아?"

 

그러더니 식식 성난 듯이 콧김을 뿜으며 찰리는 벌떡 일어나 저만치서 서로의 팔에 붙은 밴드에 어떤 캐릭터가 있는지 비교중인 친구들의 곁으로 다부지게 나아갔다.

 

"아이 다루는 게 쉽지는 않지?"

 

머쓱함에 멍하니 앉아있는 브루스에게로 웃음기를 숨기지 않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마지막 아이의 접종까지 마친 레슬리가 눈에 짓궂음과 다정함을 담고서 브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는 그래도 레슬리가 주는 사탕은 잘 받아먹었다고요."

 

입술을 작게 비죽이며 툴툴하다 브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 시절 자신의 건강을 돌봐주고 크라임 앨리에서의 사건 후로는 카운슬링을 맡아주기도 했던 그가 자신보다도 작다는 사실은 브루스에게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브루스는 들고 있던 사탕을 그대로 레슬리에게 내밀었다.

 

"자일리톨이 든 비타민C예요."

 

어깨를 으쓱한 레슬리는 브루스가 준 사탕을 건네받고서 포장을 풀어 레몬냄새가 풍기는 사탕을 입에 물었다. 레슬리가 빈 사탕봉지를 손에 쥐자 브루스가 그걸 빼내어 제 주머니에 담았다.

 

"나야 덕분에 편하다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거니?"

"성묘는 아침에 다녀왔는걸요."

 

도르륵 사탕알을 입 안 반대쪽으로 굴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레슬리에게 지레 찔린 브루스가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설마 저보고 토미랑 사이좋게 지내야 된다고 말씀하려는 건 아니죠?"

"그거야 너희 문제고."

 

픽 웃으며 레슬리가 브루스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였다. 잠이 부족한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청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레슬리는 새삼 웨인 부부가 세상을 떠난 후로 13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레슬리의 전공은 정신외상과는 거리가 있어서 부모님의 사망 장면을 지켜본 어린 브루스가 자신이 아닌 이 분야에 능통한 이에게 치료를 받길 원했지만 사건 이후 본래의 수줍은 성정보다도 훨씬 심하게 낯을 가리게 된 브루스와 일대일로 마주할 수 있는 인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또 브루스는 사건 이후에도 행동이나 태도에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는 제 형인 토마스가 신경 쓰였는지 자신이 부모님의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내비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브루스는 마음의 병을 머리가 아프다거나 배가 아프다거나 하는 식으로만 둘러 설명하고는 했다. 마사와 토마스, 혹은 알프레드의 손을 잡고 자신을 보러 왔던 개구쟁이가 의젓한 행세를 하며 제가 느끼는 것을 절제하려 드는 것이 레슬리는 너무나 염려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무심하게도 또는 감사하게도 이렇게 흐르는 것이다. 레슬리는 약간은 해쓱하지만 그게 오히려 청초하게 보이는 헌칠한 젊은이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네 학년이면 시험이 한창 많을 때 아니니?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못 잔 모양인데... 운전이야 내가 할 수 있으니 넌 먼저 돌아가 보지 그러니."

"저 낙제해도 여차하면 레슬리네 심부름꾼으로는 쓸 만 할 걸요?"

"난 자격도 없는 아마추어는 쓸 생각 없다."

"치."

 

농담에도 얄짤없는 레슬리의 즉답에 브루스가 부러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다 레슬리는 지난번 고담 컨벤션 센터에서 열렸던 학회에 같이 참석한 휴고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물었다.

 

"스트레인지 선생님이 너보고 같이 연구하자고 안 하던?"

"아..."

 

브루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떨떠름하게 제 뒷목을 문질렀다.

 

"그 교수님, 좀 미친... 연구 분야가 흥미가 안 가서요."

 

일전에 스트레인지 교수의 배트맨 분석 인터뷰에 딱히 앙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커다란 안경을 쓰고서 한껏 인자한 얼굴을 만들어내는 그가 영 내키지 않는 마음이 들어 브루스는 문득 튀어나온 본심을 곱게 돌려 다시 말했다. 학년이 학년인 만큼 학부 내 교수에 대한 흉흉한 소문 하나 둘 정도야 따라붙는 것이지만 아캄 병동의 총책임자로도 거론되는 그 교수는 브루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어딘가 오싹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다만 브루스는 자신이 느끼는 이 꺼림칙함이 직감적인 것이길, 죄악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만 바라며 레슬리에게 늦은 점심으로 팟타이를 먹으러가자고 말을 돌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세상의 숱하고 하다한 불행 중 어린 아이가 제 눈앞에서 부모님을 잃는 일은 어쩌면 그리 드문 일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고 가업에 충실하지 못한 막내에게 세간에서 코멘트 하듯이 그 재력에 이 시간이면 적극적인 치료 상담이든 뭐든 받아서 멀쩡해져야 하는 것이 맞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적어도 상처가 있음을 드러내며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나 말던가 말이다. 실제로 13주기인 오늘, 토마스 주니어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대강당에서 파크로 재건을 위한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브루스는 여전히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두 발의 총성이 가져온 공포를 잊지를 못 했고 그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타르같이 끈적이는 분노를 치워버리지 못 했다. 그런 감정들을 '치유'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손에 이끌려 그 밤, 그 골목을 거닐게 된 부모님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졌고, 졸지에 나란히 고아가 되어버린 토마스에 대한 배반인 것만 같았다. 남들이 뭐라고 위로하건, 아니라고 말하건 브루스에게는 정말 그랬다. 그런 브루스에게 다른 존재로 의태할 가능성을 배트마이트가 보여주었다. 다른 세계에도 있는 배트맨의 존재를 들었고 브루스는 자신이 길고 긴 터널에서 겨우야 해답을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들었었더랬다.

회장에 설치된 도청기를 통해 브루스의 한 쪽 귀로 토마스의 여유로운 농담과 사람들의 호의적인 웃음과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더러운 악마새끼!"

"죽여! 죽이라고!!"

 

그런 브루스의 반대쪽 귀로는 범죄자들의 욕설이 들려온다. 암거래를 훼방 받은 이들은 처음에는 박쥐의 심장을 향해 총을 냅다 쏘다 어느 정도 경험이 붙어 몸통보다는 머리를 노리려든다. 브루스는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에 날을 세워서 그런 치들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거나 인중을 가격했다. 카데바의 내부를 살피기 위해 개복하여 뼈를 들춰내는 것과 같으면서도 다른 감각이 든든한 가죽장갑 너머에서도 생생했다. 배트마이트와 만난 뒤로 배트맨이란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행동이 뒷골목에서 나돌 총 한 정을 줄이고, 마피아와 정치인의 연결을 조금이나마 주춤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레슬리나 하비, 토마스가 그리고자 하는 새로운 고담에 보탬이 된다면 언젠가는 사라져야할 배트맨의 존재가 브루스는 아무것도 못 한 채 감정의 무게에 꺾이는 것 보다야 기꺼운 것이라고 소름으로 굳어지는 근육을 다잡는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아직 어리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은.

 

[이 사업은 그저 그럴싸한 부동산을 양산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고담의 미래에 필요한, 유용한 기반 시설을 확보하고 어떤 사람이든 이용 가능한 양질의-]

 

퍽 하고 묵직한 타격이 브루스의 오른쪽 옆머리에 와박힌다. 가까스로 팔을 들어 건틀렛으로 방어해서 골이 조금 울리는 정도로 끝이 났지만 팔뼈에는 금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반짝반짝하고 신경의 비명소리가 터지지만 브루스는 아랑곳없이 그래플링건을 천장의 낡은 조명에 감아 힘을 주어 끌어내려 놈의 머리위로 떨어뜨렸다. 이제 얼마 없으면 승인받지 않은 자경단을 쫓는 고담시경이 이쪽으로 출동할 테니 배트맨은 여기서 몇 블록 지나 근사한 클럽을 가장한 소돔의 지하에 있을 연락책을 족쳐서 경찰들이 쉽게 체포할 수 있도록 포장을 해놓으면 될 것이다.

그때 브루스의 귀로 강화유리가 맥없이 와장창 산산조각이 나며 파편이 어지러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아니 한참 멀리서.

 

[으아아아아악!!]

 

브루스의 어질어질한 머릿속으로 음원이 이 곳에서 한참 먼 곳에 있는 비명과 소란이 귀에 장착된 장치를 통해 바투 들려온다. 잡음들 사이로 [-법정이 심판-] 같은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소란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브루스는 자신에게 겨누어지는 총을 보고도 잠잠하던 심장이 급격하게 쿵, 쿵 뛰기 시작했다.

 

[회장님! 웨인 회장님! 911! 구급차를 불러!!]

 

루시우스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린다. 배트맨의 행동이 일시에 하얗게 굳어버렸고 [집중해!] 그런 그에게 배트마이트가 어디선가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답하다는 듯이 경고했다. 가고일상처럼 굳어버린 박쥐의 망령이 무감각하게 주먹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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