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품에 안은 숲은 차가웠다. 한 겹, 한 겹 눈이 아이의 주변을 온통 하얗게 덮었다. 몰아치는 바람이 귀 옆을 지나갔다. 겨울은 씨앗과 같단다. 꽁꽁 싸맨 몸으로도 춥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를 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부모님이 해준 말이었다. 부모님을 삼켜버린 매서운 땅에도 새순이 돋을까? 더 단단한 봄이 찾아올까? 아이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싹이 트는 소리를 상상한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긴 어둠이 남았다.
눈꽃이 소복하게 피어난 마른 가지들 너머에 얼음에서 돋아났다는 성이 있다. 주인보다도 나이가 많고, 그가 눈을 감은 뒤에도 숲의 고목으로써 제자리를 지킬 과묵한 구조물이었다. 살결을 벨 듯한 바람이 사시사철로 성의 주변을 에워싸고 성벽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투명하게 얼어서 조각조각 부서진 서리가 되어 뽀얗게 달라붙었다. 그런 성에서 조잘대는 새소리처럼 맑은 콧노래가 들렸다. 숨죽인 울음소리마저도 게걸스레 집어삼키던 눈이 내리는 숲이었지만 설렘과 즐거움은 그 무게가 가벼웠는지 눈의 손을 피해 공중으로 퍼져갔다. 한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트리를 꾸미던 딕은 마무리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별을 등에 짊어진 천사인형을 맨 꼭대기에 바르게 걸었다. 인형과 나무가 서로 어긋나지 않았는지 살핀 딕은 폴짝 뛰듯 사다리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발을 앞으로 붙였다 뒤로 멀리 물렸다, 실눈을 떠보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여보기도 하면서 자신이 완성한 장식들을 혼자서 시도할 수 있는 온갖 관점들을 동원해서 눈에 담아보았다. 휘유, 딕이 당차게 휘파람을 한 번 크게 분 뒤 함빡 웃었다. 마을 광장을 자리하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성탄일이다. 주인의 성미를 닮아 무뚝뚝한 외관은 물론이고 내부에마저도 방어적으로 가시를 세운 성은 이 시기 즈음만큼은, 적어도 딕이 지내기 시작한 후로는, 빨강과 초록이 경쾌한 대비를 이루는 장식들로 살갑게 꾸며졌다. 성탄절 트리 장식은 이 성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돌보는 집사가 “장식을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리처드 도련님께서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다정하게 제안해준 후로 다섯 번의 성탄이 오기까지 항상 딕의 몫이었다. 딕은 알프레드와 저의 손을 거쳐 새파랗게 질린 듯 얼어붙어있던 성 안이 알록달록하게 빛이 나는 것을 보는 게 퍽 좋았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이번만큼은 성처럼 무뚝뚝한 그도 한마디쯤은 이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까, 하는 반사적인 바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트리 장식을 끝낸 딕은 겨우살이가 선명한 붉은 리본으로 묶여서 다발을 이루는 장식을 챙겨들었다. 진주 같은 하얀 열매가 박혀있고 잎새가 만들어내는 모양새가 탐스러워서 딕이 눈여겨보고 따로 챙겨두었던 장식이었다. 살짝 뜀을 뛰는 가뿐한 걸음으로 또 한군데 전적으로 딕이 장식을 맡고 있는 곳으로 향해 갔다. 성 곳곳이 성탄에 맞춘 구색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 한 곳 이 성 주인의 방만큼은 어떤 장식도 걸리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이 침중했다. 그러다 딕이 이곳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의 성탄일이 되던 날부터 딕은 그 방문 앞에 무언가 하나 장식을 걸어놓기 시작했다. 폴짝 문 앞에 다다른 딕은 까치발을 들고 굳게 닫힌 문의 한쪽에 겨우살이를 걸었다. 몇 번 비뚤어지지 말라고 장식을 다잡던 딕이 만족스럽게 손을 떼니 이번에는 가지하나가 뭉치에서 유독 삐져나온 것을 발견했다. 한두 번 정도는 그냥 지나칠까하다가 자꾸만 마음에 밟혀 딕은 결국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장식에서 튀어나온 잎사귀와 열매 세 알이 붙은 가지를 꺾어냈다. 딕의 어린 주먹에 작게 겨우살이가 들어찼다. 잠시 그것을 확인한 딕은 뜯어낸 겨우살이를 제 주머니 안에 담았다.
딕이 이곳에 발을 딛게 된 건 봄이 점점 피어올라 추위가 서서히 옆으로 비켜가던 3월의 끝자락이었다. 딕의 생일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플라잉 그레이슨즈는 그만 성급하게 땅위로 떨어졌다. 입에서 비명이 나오기보다도 빠르게 시간은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갔다. 서커스단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에 누운 엄마아빠가 땅의 품으로 들어갔다. 막 생명이 바쁘게 움터 오르는 봄의 땅 속에서 딕의 부모님만이 다시 삶을 환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딕은 홀로 세상에 남았다. 방문 밖에서 몇몇 어른들이 앞으로 딕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말을 나누고 있었지만 딕의 귀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딕과 외부는 분리되었고, 심지어 딕의 몸과 마음마저도 괴리된 듯 삐걱거렸다. 이상하고 이상해서 기분 나쁜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아 딕은 숨마저 죽이고 그저 가만히 제 침대에 앉아서 천천히 덮이던 흙의 냄새와 창백한 두 개의 묘비의 의미를 생각했다. 때 아닌 낙엽이 저무는 것처럼 부모님이 떨어지던 순간과 그저 잠이든 듯 눈을 감고 관속에 들어간 엄마아빠의 얼굴을 확인했던 장면이 교차하면서 딕의 머릿속은 서툴게 표백된 듯 모호했다. 늦은 저녁, 요란한 음악과 함께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부모님은 언제나처럼 가뿐하게 공중그네를 뛰었다. 그리고,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가. 천막 어디에선가 기어 나온 그림자가 사각사각 부모님이 타고 있는 밧줄을 갉아냈다. 딕은 자신이 헛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그리고. 쿵! 쿵! 딕은 한밤 내내 뜬 눈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영상들을 지켜보았다. 다음날의 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떠올랐을 때, 딕은 서커스단의 소품 중에서 단검 하나를 품에 챙겨든 다음 상실의 숲을 향해 갔다.
1년 내내 싸늘한 겨울을 두르고 있는 상실의 숲은 세상의 온갖 험상궂은 것들이 숨어있는 곳이라 악명 높았다. 신의 영광된 나라가 저 하늘 위에 있다면 땅 아래에는 사탄의 옥좌가 있는 것처럼 상실의 숲은 아주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원죄와 같이 그곳에 있었다. 숲의 아주 깊은 곳에는 얼음에서 돋아난 성이 있는데 그 성의 주인은 심장이 없는 지독한 마법사라고 했다. 성은 숲의 온기를 훔쳐 모든 활기를 앗아가 버렸다. 숲속에서 겨울을 지어낸 마법사는 그거로도 모자라 바깥마저 저와 같이 만들려 했고, 허기진 숲은 상실을 퍼뜨렸다. 땔감이 부족한 때에도 누구 한 사람 숲에 떨어진 나뭇가지조차도 주어오지 않았고 어른들은 혹여나 아이들이 호기심에 숲으로 발을 디딜까 갖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들로 아이들을 을러놓았다. 직접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숲은 대대로 내려오는 오싹한 징크스였지만 그림자를 발견한 딕에게 그것은 당장의 현실이 되었다. 딕은 의문을 품었다. 왜? 어째서?
메말라 죽어가는 나무들 몇몇을 지나 계절을 잊고 하얗게 번지는 제 숨을 눈에 담으며 딕은 묵묵히 걷고 걸었다. 딕이 어느 정도 안쪽에 다다르자 하얀 눈이 송이, 송이 떨어지고 땅 위에는 낙엽이 아닌 발자국 없는 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딕의 머리에 얕게 눈이 쌓여갔다. 품에 안고 온 칼이 타오르듯 차가웠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숙이고 땅만을 보며 걷던 딕의 식은 이마에 방향이 혼자 다른 찬바람이 안쳤다. 잘게 부서지는 바람에 딕이 얼굴을 들면 눈앞에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새하얀 눈이 얽어져 만든 순록이 끄는 썰매 위에 있었다. 후드의 그림자에 가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새삼 성큼 다가오는 냉기에 딕은 썰매를 모는 그가 성의 주인이라고 확신했다. 딕의 가슴이 다급하게 쿵,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환호보다도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딕의 머릿속에 온통 차올랐다. 그런 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의 주인은 느리게 팔을 뻗어 하얀 손끝으로 숲의 어느 방향인가를 가리켰다. 조금은 봄이 묻어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었다. 그런 뒤 그는 얼마 간격을 두지도 않고 바로 손을 거두고 미련 없이 순록의 고삐를 잡았다.
“기다려요!”
두근, 두근. 여전히 심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딕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딕에게서 관심을 돌린 것처럼 보이는 성의 주인은 일단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딕은 마른 목으로 힘겹게 버석한 침을 삼킨 다음에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데려가요.”
굳게 제 발 아래를 다잡았다. 만일 그가 거절했을 때 덧붙일 이야기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면서 딕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썰매에 오르면, 딕은 바로 품에서 칼을 꺼내 성의 주인을 죽일 생각이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부모님을 앗아가서는 안됐다. 어째서, 왜. 수많은 물음표들을 붙여보아도 결국 딕에게 남은 것은 부당함과 불합리함이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들을 부모님에게로 보낸 성의 주인을 제 손으로 없애자. 벌겋게 뜬 눈으로 깜깜한 밤을 지나 붉게 밝아오는 이른 아침을 지켜본 딕이 내린 결론이었다. 죄가 있다면, 마땅히 벌을 받으라. 그게 봄에 어울리지 않는 죽음보다도 훨씬 자연스러웠다. 소리 없는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갔고 그때마다 딕이 가지고 온 칼은 점점 무거워져갔다. 추위에도 무감각하던 몸이 긴장한 탓에 떨려오기 시작했다.
달칵, 그 때 말없이 썰매의 옆문이 열리며 위로 오르는 층계가 드러났다. 그는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허락의 뜻인 것 같았다. 딕은 조용히 깊은 숨을 마시고, 주먹을 다잡으며 한 발 한 발 차분하게 썰매 안으로 들어섰다. 성의 주인 옆에 가까이 다가가자 바짝 마른 겨울 내음이 바투 끼쳤다. 딕이 완전히 썰매에 오르자 열렸던 문이 닫혔다. 주인은 손에 쥔 고삐를 가볍게 휘둘렀다. 순록은 아까 남자가 딕에게 가리켜준 방향과 반대쪽을 향해 달려갔다. 성의 주인은 한 번도 딕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딕은 옷 너머에서 더듬더듬 단검의 손잡이를 확인하며 곁눈으로 적당한 때를 가늠했다. 남자가 두르고 있는 망토는 생각만큼 두꺼운 것이 아니었고, 목 부분에 달려들어 칼을 찔러 넣으면 될 것 같았다. 딕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순록을 모는 성의 주인에게 언젠가 딕의 부모님이 칭찬해준 적 있는 재빠른 동작으로 달려들어 품에서 꺼낸 날이 새파란 칼을 꽂았다.
“아.”
조각조각.
서슬 퍼런 날은 깨어지고 부서져서 고운 눈이 되어 훅하고 딕의 얼굴의 스쳐 지나갔다. 잘 버려졌던 칼이 한순간에 눈보라로 변해 칼자루만 남긴 채 저 뒤편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때 딕은 처음으로 성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딕의 칼끝에서 시작된 작은 눈바람에 성의 주인이 쓰고 있던 후드가 너풀거렸고 그 아래에 숨었던 그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선이 선명해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딕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오로지 그의 눈동자였다. 쪼개질 듯 시린 파란 눈동자가 앞에 있었고 시선에 닿는 순간 딕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새하얗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딕의 망막은 얼음가시에 찔린 듯 투명한 눈동자가 들어박혀서 시렸다. 어쩌면 그가 눈으로 바꿔버린 자신의 칼이 채 눈으로 녹지 못하고 남아 딕을 스쳐지나가던 때에 한 조각이 눈으로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딕은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딕을 가만히 바라만 보던 남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 걸로는 죽일 수 없다.”
얼어붙은 강 밑바닥에서 묵묵하게 흘러가는 무거운 찬물처럼 낮은 목소리에 딕이 퍼뜩 그의 몸에 매달린 팔을 풀어 바닥 위에 발을 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에 딕이 꼭 잡고 있던 칼자루를 떨어뜨렸다. 성의 주인은 마치 딕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듯 다시 입을 다문 채 딕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리를 잃었던 심장과 호흡이 다시금 그 짧은 간격을 벌충하듯 세차게 몰려왔다.
딕이 괴롭게 입을 열었고, 아, 아아아!! 겨울이 거대한 경계를 이루는 숲 한가운데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흰 눈 속으로 고요하게 잠길 비명이 울음과 분노를 대신해 뚝뚝 눈꽃들을 떨어트렸다. 식은땀이 채 가시지 않은 손으로 다시 주먹을 꽉 쥔 딕은 무작정 남자의 몸을 때렸다. 차가운 겨울 냄새가 딕의 주먹질에 따라 피어올랐고 딕은 그게 시리고 시려서 결국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뺨을 쓸고 지나는 눈물이 그대로 딕의 얼굴에 붉게 얼어 따가웠지만 딕은 그것을 닦아낼 생각도 못하고 그저 울며, 때리며 외쳤다. 어째서, 왜. 절규는 문장보다는 단어에, 언어보다는 외침에 가까웠다. 회색빛 구름이 견디지 못하고 제가 품고 있던 눈들을 몽땅 쏟아냈다. 딕의 외침이 하나하나 그 속에 담겼다.
딕은 울다 지쳐 쓰러졌다.
“브루스!”
성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딕이 저 끝 어둠에서 한 발 한 발 밖으로 나오는 인영에 밝게 외쳤다. 딕은 성큼 달려 브루스 앞에 섰다. 그러다 성벽에 걸린 등 아래에서 확인한 그의 차림새에 약간 웃음이 누그러졌다. 딕을 보고 브루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걸음은 멈추어 세웠다. 어둠 속에 녹아드는 망토를 두르고 있는 브루스는 벌써부터 순찰을 나갈 셈인 거 같았다. 비록 성을 둘러싸고 있는 숲은 일 년 내내 겨울이었지만 그 너머에서는 흐름에 맞춰 제각각의 계절들이 차례로 지나갔고 해가 짧아지는 겨울철에는 특히 밤의 어둠을 틈타 활동하는 브루스의 일이 더 이른 때부터 시작되었다. 거기다 성탄절은 브루스가 한 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예민하게 살펴보는 날이었다.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껏 부푼 마음으로 한달음에 브루스 앞으로 튀어나갔던 딕은 자신의 설렘이 부끄러워서 잠시 말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브루스는 여전히 겨울을 박아놓은 눈으로 딕을 바라볼 뿐이었고 딕은 힐끗 그 눈동자를 확인했다 파드득 시선을 돌리듯 겨우 말을 틔웠다.
“알프레드가 부쉬 드 노엘을 만들었대요.”
“그래.”
열없는 딕의 말에 브루스는 심드렁해 보일 정도로 심상하게 답했다. 하지만 딕은 이제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서 금방 녹아 없어지는 살얼음만큼이나 흐릿한 호선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대답을 한 브루스는 무언가 생각하듯 조금 더 멈춰있었지만 결국 딕을 스쳐 지나며 성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딕은 그의 뒤를 따라 그가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브루스는 후드를 뒤집어썼고 망설임 없이 앞에 펼쳐진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어둠을 두른 그를 숲은 쉽게 감추어냈다. 굵은 눈이 흩날리는 숲은 그렇게 브루스를 집어삼키고 이내 그를 마을의 그림자 속으로 토해낼 것이다. 그것이 이 숲 너머에서는 제 형체를 유지할 수 없는 브루스가 마을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딕은 한동안 브루스가 사라진 까만 숲의 풍경을 보았다. 차가운 눈이 내리고 어둠이 자욱한 가운데 저 밖에서는 성가와 함께 오늘 태어난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겨울을 잊고 맑게 떠들 것이다. 그리고 브루스는. 딕은 문득 제가 주머니 속에 넣어둔 겨우살이가 생각이 났다. 그는 자신의 방문 앞에 겨우살이를 보았을까. 딕이 주머니에서 작은 가지를 꺼내 그를 놀랬다면 그의 파란 눈동자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딕은 이유도 모르고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부쉬 드 노엘은 그가 돌아오고 내일 날이 밝으면 그때 그와 함께 먹기로 혼자 약속했다.
울다가 피로에 지쳐 잠이든 딕이 눈을 뜬 것은 성 안이 파랗게 식어가는 노을에 물들었을 때 즈음이었다. 하루를 꼬박 잠들었던 딕은 처음 보는 풍경에 잠시 눈만 껌뻑이다가 이내 바쁘게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살펴보면 딕이 이때껏 구경해보지 못한 호화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딕이 덮고 있는 이불도 부모님이 덮어주던 솜을 넣은 누비이불과는 달리 동물의 털이 들어가 있어 훨씬 든든하고 무게 있었다. 이곳이 어딘가를 생각하던 딕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는 딱 하나 뿐이었다. 바로 상실의 숲, 그 안쪽에 위치해있다던 성이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성은 딕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아늑해서 딕은 바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게 제일 그럼직해보였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딕이 문득 까끌까끌한 목 때문에 켁켁 기침을 했다. 때마침 방의 문이 열리고 깔끔한 차림을 한 나이 지긋한 집사가 도자기로 된 주전자와 컵을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이곳이 어딘지 짐작을 해놓은 딕은 경계어린 눈초리로 그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세모꼴이 된 눈을 한 딕이 머쓱해질 만큼 집사는 친절하고 상냥했다. 꿀을 듬뿍 넣은 데운 우유를 한 잔 딕에게 조심스럽게 건네면서 집사는 자신을 알프레드라고 소개했다. 딕은 소문으로 들었던 성의 주인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사근사근한 집사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잡혀 오신 거예요?”
한껏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딕에게 알프레드는 느긋한 눈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주인님을 따라 온 겁니다.”
우유를 조심히 마시던 딕은 집사의 대답에 입에서 잔을 떼며 다시 입을 길게 꾹 다물었다. 딕이 괜히 힐난하는 눈빛으로 알프레드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썹 하나 변하지 않고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책망하듯 딕이 물었다.
“어째서요?”
“주인님을 낯선 곳에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요.”
알프레드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딕이 어떤 경유를 거쳐 이곳에 이르렀는지 집사가 아는 지 어떤지는 몰랐지만 알프레드는 딕에게 편하게 지내시라 말한 뒤 얼마 간격을 두지 않고 딕이 있는 방으로 따뜻한 음식을 가져왔다. 딕은 먹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동시에 뱃속에서 꾸르르 하고 굶주린 위가 길게 울어 창피해져서 뺨을 붉혔다. 하지만 집사는 지적하지 않고 침대 옆 탁자에 따끈한 김이 오르는 음식들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내키시면 드세요. 하지만 따뜻할 때가 가장 맛있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 너머로 사라지면서 알프레드는 해가 진 뒤라 숲이 위험하니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 바로 마을로 모셔다드리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집사가 나간 뒤 잠시 뚱한 표정으로 그가 차린 식탁을 바라본 딕은 마지못해 음식에 입을 댔다가 깜짝 놀랐다. 음식이 전부 너무나도 맛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처음으로 딕이 제대로 기억하는 식사였다. 텅 빈 뱃속이 따듯해질수록 깊이 담아두었던 응어리가 녹고 있는지 이상하게 눈동자도 뜨거웠다.
딕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집사는 내일이면 성 밖으로 딕이 나갈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했지만 혼자가 되어버린 딕에게 중요한 건 마을로 돌아가고 말고가 아니었다. 딕의 부모님은 그림자 때문에 돌아가시게 되었고 딕은 그에 대해 복수를 하려고 했다. 이 성의 주인을 죽이고자 했다. 그가 그림자를 부리는 이일 테니까. 왜 그는 자신을 죽이려한 딕을 이 성에 묵게 한 걸까. 그냥 내버려뒀으면 추위에 딕은 분명 죽었을 것이다. 집사는 왜 딕에게 친절한 걸까? 왜 집사는 이곳이 ‘낯선 곳’이라고 이야기한 걸까? 사악한 거짓말일까? 딕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져서 딕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성을 둘러보고 나면 무언가 결론이 나지 않을까. 딕은 조용히 제 방에서 나와 어둠이 깔린 복도로 나왔다.
드문드문 벽에 걸린 등불이 있었지만 어둠속에 잠겨있는 성 안은 춥지 않고도 으스스했다. 벽이나 기둥에 비명을 지를 듯한 가고일이나 튀어 올라 날아갈 것 같은 박쥐 장식들이 곳곳에 있었다. 장식들은 전부 정교하고 적확해서 생김새가 결코 촌스럽지는 않았지만 악취미인 것만은 확실했다. 성의 바깥이면 몰라도 어째서 안쪽을 이런 것들로 꾸며놓았는지 딕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의 방으로 보이는 곳까지 다 둘러보고 딕은 가운데에 난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아 내려갔다. 그 때 딕은 저 앞쪽에서 쾅하고 급하게 열리는 문소리를 들었다. 소리에 놀란 딕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었고 난간 사이로 빼꼼히 내려다보았다. 눈이 휘몰아치는 바깥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것의 걸음걸이는 느렸고 무언가에 뒤를 잡히듯 발을 끌었다. 온통 새까매서 딕은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이름을 모르고 헤매다가 저것들이 한 덩어리가 아닌 여러 가지의 것들이 한 덩이처럼 엉켜있는 것이라고 분간해냈다. 부모님을 해쳤던 것과 같아 보이는 그림자들이 잔뜩 엉켜서 커다란 형상을 그리며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주먹을 쥐고 입술을 꾹 물면서 딕은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으며 검은 형체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형체는 마치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힘겨운 걸음으로 느리게 성의 중앙에 마치 전시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수정 쪽으로 향했다. 수정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의 움직임은 더더욱 더뎌졌다. 저쪽에서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등불은 든 알프레드가 나타났다. 집사는 놀란 기색 없이 그저 바쁜 걸음으로 검은 형체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브루스 도련님.”
알프레드가 간절한 어조로 주인을 부르며 자신이 들고 온 등불을 검은 형체 앞으로 바짝 가져다 댔다. 누군가를 꽁꽁 동여맨 그림자들이 빛의 접근에 진저리를 치듯 등 뒤로 커다란 어둠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서 등불을 향해 손이 튀어나와 불길에 달구어졌을 유리면을 손에 쥐었다. 집사는 그 손을 제 빈 손으로 마주잡고 서서히 그를 수정이 있는 곳으로 이끌며 계속 말을 걸었다. 형체는 멈춰있던 발걸음을 간신히 움직이며 이제 손을 뻗으면 수정에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검은 형체에서 다시 다른 쪽 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손은 앞에 있는 수정에 닿았다. 끼이익, 하고 등골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성 안에 메아리쳤다. 형체를 이루던 검은 그림자들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수정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검은 그림자에 칭칭 감겨있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가 드러났다. 남자는 등불을 붙잡았던 손을 떼고 양손을 수정에 가져다대며 제 몸에 붙은 그림자들이 전부 수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끈질기게 남자의 손목을 휘감았던 그림자마저 전부 떨어져나가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남자는 손을 물렸다. 그리고 남자는 그대로 몸이 무너져 내렸다. 소름끼치는 비명이 가시고, 돌풍이 멈춘 실내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사위가 이상하게 더 추워진 것 같았고 성 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도 더 거세진 것 같았다. 알프레드는 등불을 내려놓으며 팔 한쪽에 가져온 모포를 급하게 남자에게 둘렀다.
“...아이는.”
한참 적막이 있은 후에 남자가 알프레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괜찮습니다. 방에 계세요.”
“그래요.”
짧게 대답한 남자를 집사가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저보다 한참 커다란 남자의 보조를 도우며 집사와 주인은 알프레드가 등불을 들고 나왔던 방향으로 향해갔다.
그림자는 세상 어느 곳에나 있다. 사람의 마음이 생겨난 것과 함께 생을 시작한 그들은 삶 뒤에 숨어서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서 사람들은 불행해졌고, 시험에 들기 쉬웠으며 나약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너무 자신들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낯선 것으로 분류하고, 기분 나쁜 악몽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인양 생각했다. 그 겨울이 오기 전 아이에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아주 오래 전 아이는 가족과 함께 밤길을 걷다가 부모님을 잃었고 그 속에서 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아이의 삶의 등불과 같던 부모님이 허무하게 제 눈앞에서 스러져가는 것을 보고 아이의 마음속의 빛도 사그라졌기 때문인지 그림자는 아이를 살려두었다. 지나치게 추워서 땅이 꽁꽁 얼었던 계절에 아이의 세상은 불이 꺼지고 부모님은 영영 아이를 떠났다.
겨울은 씨앗과 같단다. 그렇다면, 봄이 오는 날에 부모님은 다시 아이의 곁으로 돌아올까? 부모님을 집어삼킨 땅만을 끝없이 바라보던 아이가 소원을 빌었다. 뭐든 하겠노라고, 다시 봄을 틔워낼 수만 있다면. 부모님의 죽음 앞에 짙은 어둠이 눈에 박힌 아이가 점점 식어가는 의식 속에서 끈질기게 생각했다. 그러던 때에 아이에게로 성이 나타났다. 창백하게 얼어버린 시간이 아이의 앞에 커다란 구조물이 되어 들어섰다. 브루스는 주저 않고 성의 주인이 되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왔지만 딕은 잠을 자지 않고 뒷정리를 하는 알프레드를 도우면서 브루스를 기다렸다. 매년 점점 더 심해지는 바람이 성을 차게 스치고 간다. 졸음을 떨치려 딕은 일부러 알프레드와 떠들썩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쾅,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딕은 미리 준비해둔 등불을 들고 먼저 바쁘게 뛰어나갔다. 성 안으로는 세상 속에 숨어있던 그림자들을 잔뜩 붙들어 맨 브루스가 한 걸음 한 걸음 수정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보통 때보다도 몸집을 크게 부풀린 그림자 덩어리에 딕은 눈을 홉떴다. 성탄일 즈음에는 축복을 시기하듯 특히 많은 수의 그림자들이 세상에 널리지만 그래도 이것은 그 이상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브루스를 향해 달려드는 그림자들은 더 집요해졌다. 알프레드가 말하기로 원래는 브루스가 등불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그림자들을 봉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브루스가 알프레드나 딕이 가지고 온 등불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딕은 브루스를 빼내기 위해 제가 들고 온 등불을 그에게 가까이 대면서 연거푸 브루스를 불렀다. 브루스에게 둘러줄 모포를 챙기고 나온 알프레드도 브루스를 다급하게 불렀지만 그는 좀처럼 등불이 있는 곳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딕은 문득 브루스가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광경이 생각이 나 가슴이 선뜩해졌다.
어느 날인가 오늘처럼 브루스가 그림자 속에서 쉬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딕은 무심코 브루스의 손을 잡아끌기 위해 그림자로 손을 뻗었다가 브루스에게 크게 혼이 났었다. 브루스를 휘감았던 그림자가 딕의 존재를 알아채고 딕에게로 옮아붙을 듯 달려드는 광경에도 놀랐지만 그보다도 딕에게 뻗어지던 그림자를 휘어잡으며 급하게 수정 속에 가둔 뒤 브루스가 크게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더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커다란 감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게 화라는 사실에. 잔뜩 의기소침해진 딕에게 알프레드가 따뜻한 차를 쥐어주며 브루스가 격하게 반응하는 건 예전에 알프레드도 브루스를 구하려다 그만 그림자에 의해서 몸이 산산조각 난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을 성에서 지내오면서 브루스의 시간은 점점 굳어져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브루스를 따라 이곳에 왔던 알프레드는 노쇠해서 세상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그때 집사는 자신의 마음을 흙인형 속에다 담아두었고 이렇게 계속 움직이며 자신의 주인을 돌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딕은 마을에 나갈 일이 있을 때도 웬만해서는 알프레드의 손을 빌리지 않게 되었다. 알프레드는 그럼에도 브루스가 혼자 분투하다 영영 그림자 속에서 하나로 굳어져버릴까 무서웠고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등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브루스가 빠져나오지 않자 딕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알프레드가 말릴 틈도 없이 등불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새까맣게 그림자들이 딕에게 달려들어 삽시간에 시야는 어둠에 잠겼고 주변의 소리가 멎었다. 딕의 머릿속으로 온갖 눅눅한 아우성들이 제멋대로 들어찼다. 흐느끼다가, 저주를 퍼붓다가, 헐뜯다가, 심지어 미친 듯이 웃기까지 하는 갖갖이 목소리들이 어둠 속에서 음침하게 떠올랐다. 딕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브루스를 찾았다. 그림자들 속에서 가장 안전하게, 그러면서 스스로도 그림자를 감시할 수 있을 어둠에 몸을 감추고 있을 브루스를 찾아 딕은 브루스를 불렀다.
“ !”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불렀다.
“ !”
“ !”
“ !”
그러다 겨우야,
“브루스!”
딕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을 때 딕의 손끝에 형체 없는 그림자가 아닌 또렷한 인기척이 잡혔다. 손이었다. 딕은 주저 없이 그것을 붙잡고 자신이 다른 손으로 잡고 있는 등불 쪽으로 이끌었다. 딕이 꼭 손에 잡고 있는 브루스에게서는 피냄새가 났다. 어둠 속에 섞여드는 브루스의 등을 지켜볼 때면 딕은 무서웠다.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그가 그림자들에게로 나아가는 재물처럼 보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그도 어느 날인가에는 땅 속으로 끌어내려질까. 저를 찾지 못한 그가 그림자들을 따라 수정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이 성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참 불안함에 가슴이 답답할 즈음 딕이 붙잡은 손에서 악력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파랗고 시린 눈동자. 어둠 속이지만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눈물이 났으니까. 차갑고 차가워서, 이렇게 계속 눈에서 눈물이 나니까.
딕과 브루스는 무사히 그림자들을 해쳐 나왔고, 브루스는 자신이 짊어지고 온 그림자들을 전부 수정안에 잘 봉인했다. 다시 확인해보니 브루스의 망토는 여기저기 찢어져있었고 후드 아래 얼굴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딕이 그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무릎걸음으로 다가갔지만 브루스는 제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망토를 여미고 후드를 더 깊게 눌러썼다.
“딕을 방으로 데려가요.”
브루스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알프레드에게 말했다. 피냄새가 나는 주인의 몸을 찡그린 눈으로 지켜보던 알프레드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쉰 뒤 딕을 부축했다. 짐짓 태연한 발걸음으로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상비하는 약과 치료도구들이 있는 부엌으로 향해 갔다. 딕은 오랫동안 그 뒷모습을 눈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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