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au입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숲은 차가웠다. 한 겹, 한 겹 눈이 아이의 주변을 온통 하얗게 덮었다. 몰아치는 바람이 귀 옆을 지나갔다. 겨울은 씨앗과 같단다. 꽁꽁 싸맨 몸으로도 춥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를 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부모님이 해준 말이었다. 부모님을 삼켜버린 매서운 땅에도 새순이 돋을까? 더 단단한 봄이 찾아올까? 아이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싹이 트는 소리를 상상한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긴 어둠이 남았다.
눈꽃이 소복하게 피어난 마른 가지들 너머에 얼음에서 돋아났다는 성이 있다. 주인보다도 나이가 많고, 그가 눈을 감은 뒤에도 숲의 고목으로써 제자리를 지킬 과묵한 구조물이었다. 살결을 벨 듯한 바람이 사시사철로 성의 주변을 에워싸고 성벽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투명하게 얼어서 조각조각 부서진 서리가 되어 뽀얗게 달라붙었다. 그런 성에서 조잘대는 새소리처럼 맑은 콧노래가 들렸다. 숨죽인 울음소리마저도 게걸스레 집어삼키던 눈이 내리는 숲이었지만 설렘과 즐거움은 그 무게가 가벼웠는지 눈의 손을 피해 공중으로 퍼져갔다. 한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트리를 꾸미던 딕은 마무리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별을 등에 짊어진 천사인형을 맨 꼭대기에 바르게 걸었다. 인형과 나무가 서로 어긋나지 않았는지 살핀 딕은 폴짝 뛰듯 사다리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발을 앞으로 붙였다 뒤로 멀리 물렸다, 실눈을 떠보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여보기도 하면서 자신이 완성한 장식들을 혼자서 시도할 수 있는 온갖 관점들을 동원해 눈에 담아보았다. 휘유, 딕이 당차게 휘파람을 한 번 크게 분 뒤 함빡 웃었다. 마을 광장을 자리하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성탄일이다. 주인의 성미를 닮아 무뚝뚝한 외관은 물론이고 내부에마저도 방어적으로 가시를 세운 성은 이 시기 즈음만큼은, 적어도 딕이 지내기 시작한 후로는, 빨강과 초록이 경쾌한 대비를 이루는 장식들로 살갑게 꾸며졌다. 성탄절 트리 장식은 이 성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돌보는 집사가 “장식을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리처드 도련님께서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다정하게 제안해준 후로 다섯 번의 성탄이 오기까지 항상 딕의 몫이었다. 딕은 알프레드와 저의 손을 거쳐 새파랗게 질린 듯 얼어붙어있던 성 안이 알록달록하게 빛이 나는 것을 보는 게 퍽 좋았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이번만큼은 성처럼 무뚝뚝한 그도 한마디쯤은 이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까, 하는 반사적인 바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트리 장식을 끝낸 딕은 겨우살이가 선명한 붉은 리본으로 묶여서 다발을 이루는 장식을 챙겨들었다. 진주 같은 하얀 열매가 박혀있고 잎새가 만들어내는 모양새가 탐스러워서 딕이 눈여겨보고 따로 챙겨두었던 장식이었다. 살짝 뜀을 뛰는 가뿐한 걸음으로 또 한군데 전적으로 딕이 장식을 맡고 있는 곳으로 향해 갔다. 성 곳곳이 성탄에 맞춘 구색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 한 곳 이 성 주인의 방만큼은 어떤 장식도 걸리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이 침중했다. 그러다 딕이 이곳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의 성탄일이 되던 날부터 딕은 그 방문 앞에 무언가 하나 장식을 걸어놓기 시작했다. 폴짝 문 앞에 다다른 딕은 까치발을 들고 굳게 닫힌 문의 한쪽에 겨우살이를 걸었다. 몇 번 비뚤어지지 말라고 장식을 다잡던 딕이 만족스럽게 손을 떼니 이번에는 가지하나가 뭉치에서 유독 삐져나온 것을 발견했다. 한두 번 정도는 그냥 지나칠까하다가 자꾸만 마음에 밟혀 딕은 결국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장식에서 튀어나온 잎사귀와 열매 세 알이 붙은 가지를 꺾어냈다. 딕의 어린 주먹에 작게 겨우살이가 들어찼다. 잠시 그것을 확인한 딕은 뜯어낸 겨우살이를 제 주머니 안에 담았다.
딕이 이곳에 발을 딛게 된 건 봄이 점점 피어올라 추위가 서서히 옆으로 비켜가던 3월의 끝자락이었다. 딕의 생일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플라잉 그레이슨즈는 그만 성급하게 땅위로 떨어졌다. 입에서 비명이 나오기보다도 빠르게 시간은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갔다. 서커스단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에 누운 엄마아빠가 땅의 품으로 들어갔다. 막 생명이 바쁘게 움터 오르는 봄의 땅 속에서 딕의 부모님만이 다시 삶을 환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딕은 홀로 세상에 남았다. 방문 밖에서 몇몇 어른들이 앞으로 딕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말을 나누고 있었지만 딕의 귀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딕과 외부는 분리되었고, 심지어 딕의 몸과 마음마저도 괴리된 듯 삐걱거렸다. 이상하고 이상해서 기분 나쁜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아 딕은 숨마저 죽이고 그저 가만히 제 침대에 앉아서 천천히 덮이던 흙의 냄새와 창백한 두 개의 묘비의 의미를 생각했다. 때 아닌 낙엽이 저무는 것처럼 부모님이 떨어지던 순간과 그저 잠이든 듯 눈을 감고 관속에 들어간 엄마아빠의 얼굴을 확인했던 장면이 교차하면서 딕의 머릿속은 서툴게 표백된 듯 모호했다. 늦은 저녁, 요란한 음악과 함께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부모님은 언제나처럼 가뿐하게 공중그네를 뛰었다. 그리고,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가. 천막 어디에선가 기어 나온 그림자가 사각사각 부모님이 타고 있는 밧줄을 갉아냈다. 딕은 자신이 헛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그리고. 쿵! 쿵! 딕은 한밤 내내 뜬 눈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영상들을 지켜보았다. 다음날의 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떠올랐을 때, 딕은 서커스단의 소품 중에서 단검 하나를 품에 챙겨든 다음 상실의 숲을 향해 갔다.
1년 내내 싸늘한 겨울을 두르고 있는 상실의 숲은 세상의 온갖 험상궂은 것들이 숨어있는 곳이라 악명 높았다. 신의 영광된 나라가 저 하늘 위에 있다면 땅 아래에는 사탄의 옥좌가 있는 것처럼 상실의 숲은 아주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원죄와 같이 그곳에 있었다. 숲의 아주 깊은 곳에는 얼음에서 돋아난 성이 있는데 그 성의 주인은 심장이 없는 지독한 마법사라고 했다. 성은 숲의 온기를 훔쳐 모든 활기를 앗아가 버렸다. 숲속에서 겨울을 지어낸 마법사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바깥마저 저와 같이 만들려 했고, 허기진 숲은 상실을 퍼뜨렸다. 땔감이 부족한 때에도 누구 한 사람 그 숲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조차도 주어오지 않았고 어른들은 혹여나 아이들이 호기심에 숲으로 발을 디딜까 갖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들로 아이들을 을러놓았다. 직접 보지 못한 이들에게 숲은 대대로 내려오는 오싹한 징크스였지만 그림자를 발견한 딕에게 그것은 당장의 현실이 되었다. 딕은 의문을 품었다. 왜? 어째서?
메말라 죽어가는 나무들 몇몇을 지나 계절을 잊고 하얗게 번지는 제 숨을 눈에 담으며 딕은 묵묵히 걷고 걸었다. 딕이 어느 정도 안쪽에 다다르자 하얀 눈이 송이, 송이 떨어지고 땅 위에는 낙엽이 아닌 발자국 없는 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딕의 머리에 얕게 눈이 쌓여갔다. 품에 안고 온 칼이 타오르듯 차가웠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숙이고 땅만을 보며 걷던 딕의 식은 이마에 방향이 혼자 다른 찬바람이 안쳤다. 잘게 부서지는 바람에 딕이 얼굴을 들면 눈앞에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새하얀 눈이 얽어져 만든 순록이 끄는 썰매 위에 있었다. 후드의 그림자에 가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새삼 성큼 다가오는 냉기에 딕은 썰매를 모는 그가 성의 주인이라고 확신했다. 딕의 가슴이 다급하게 쿵,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환호보다도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딕의 머릿속에 온통 차올랐다. 그런 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의 주인은 느리게 팔을 뻗어 하얀 손끝으로 숲의 어느 방향인가를 가리켰다. 조금은 봄이 묻어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었다. 그런 뒤 그는 얼마 간격을 두지도 않고 바로 손을 거두어 미련 없이 순록의 고삐를 잡았다.
“기다려요!”
두근, 두근. 여전히 심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딕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딕에게서 관심을 돌린 것처럼 보이는 성의 주인은 일단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딕은 마른 목으로 힘겹게 버석한 침을 삼킨 다음에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데려가요.”
굳게 제 발 아래를 다잡았다. 만일 그가 거절했을 때 덧붙일 이야기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면서 딕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썰매에 오르면, 딕은 바로 품에서 칼을 꺼내 성의 주인을 죽일 생각이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부모님을 앗아가서는 안됐다. 어째서, 왜. 수많은 물음표들을 붙여보아도 결국 딕에게 남은 것은 부당함과 불합리함이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들을 부모님에게로 보낸 성의 주인을 제 손으로 없애자. 벌겋게 뜬 눈으로 깜깜한 밤을 지나 붉게 밝아오는 이른 아침을 지켜본 딕이 내린 결론이었다. 죄가 있다면, 마땅히 벌을 받으라. 그게 봄에 어울리지 않는 죽음보다도 훨씬 자연스러웠다. 소리 없는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갔고 그때마다 딕이 가지고 온 칼은 점점 무거워져갔다. 추위에도 무감각하던 몸이 긴장한 탓에 떨려오기 시작했다.
달칵, 그때 말없이 썰매의 옆문이 열리며 위로 오르는 층계가 드러났다. 그는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허락의 뜻인 것 같았다. 딕은 조용히 깊은 숨을 마시고, 주먹을 다잡으며 한 발 한 발 차분하게 썰매 안으로 들어섰다. 성의 주인 옆에 가까이 다가가자 바짝 마른 겨울 내음이 바투 끼쳤다. 딕이 완전히 썰매에 오르자 열렸던 문이 닫혔다. 주인은 손에 쥔 고삐를 가볍게 휘둘렀다. 순록은 아까 남자가 딕에게 가리켜준 방향과 반대쪽을 향해 달려갔다. 성의 주인은 한 번도 딕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딕은 옷 너머에서 더듬더듬 단검의 손잡이를 확인하며 곁눈으로 적당한 때를 가늠했다. 남자가 두르고 있는 망토는 생각만큼 두꺼운 것이 아니었고, 목 부분에 달려들어 칼을 찔러 넣으면 될 것 같았다. 딕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순록을 모는 성의 주인에게 언젠가 딕의 부모님이 칭찬해준 적 있는 재빠른 동작으로 달려들어 품에서 꺼낸 날이 새파란 칼을 꽂았다.
“아.”
조각조각.
서슬 퍼런 날은 깨어지고 부서져서 고운 눈이 되어 훅하고 딕의 얼굴의 스쳐 지나갔다. 잘 버려졌던 칼이 한순간에 눈보라로 변해 칼자루만 남긴 채 저 뒤편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때 딕은 처음으로 성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딕의 칼끝에서 시작된 작은 눈바람에 성의 주인이 쓰고 있던 후드가 너풀거렸고 그 아래에 숨었던 그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선이 선명해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딕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오로지 그의 눈동자였다. 쪼개질 듯 시린 파란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고 시선에 닿는 순간 딕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새하얗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딕의 망막은 얼음가시에 찔린 듯 투명한 눈동자가 들어박혀서 시렸다. 어쩌면 그가 눈으로 바꿔버린 자신의 칼이 채 눈으로 녹지 못하고 남아 딕을 스쳐지나가던 때에 한 조각이 눈으로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딕은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딕을 가만히 바라만 보던 남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 걸로는 죽일 수 없다.”
얼어붙은 강 밑바닥에서 묵묵하게 흘러가는 무거운 찬물처럼 낮은 목소리에 딕이 퍼뜩 그의 몸에 매달린 팔을 풀어 바닥 위에 발을 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에 딕이 꼭 잡고 있던 칼자루를 떨어뜨렸다. 성의 주인은 마치 딕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듯 다시 입을 다문 채 딕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리를 잃었던 심장과 호흡이 다시금 그 짧은 간격을 벌충하듯 세차게 몰려왔다.
딕이 괴롭게 입을 열었고, 아, 아아아!! 겨울이 거대한 경계를 이루는 숲 한가운데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흰 눈 속으로 고요하게 잠길 비명이 울음과 분노를 대신해 뚝뚝 눈꽃들을 떨어트렸다. 식은땀이 채 가시지 않은 손으로 다시 주먹을 꽉 쥔 딕은 무작정 남자의 몸을 때렸다. 차가운 겨울 냄새가 딕의 주먹질에 따라 피어올랐고 딕은 그게 시리고 시려서 결국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뺨을 쓸고 지나는 눈물이 그대로 딕의 얼굴에 붉게 얼어 따가웠지만 딕은 그것을 닦아낼 생각도 못하고 그저 울며, 때리며 외쳤다. 어째서, 왜. 절규는 문장보다는 단어에, 언어보다는 외침에 가까웠다. 회색빛 구름이 견디지 못하고 제가 품고 있던 눈들을 몽땅 쏟아냈다. 딕의 외침이 하나하나 그 속에 담겼다.
딕은 울다 지쳐 쓰러졌다.
“브루스!”
성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딕이 저 끝 어둠에서 한 발 한 발 밖으로 나오는 인영에게 밝게 외쳤다. 딕은 성큼 달려 브루스 앞에 섰다. 그러다 성벽에 걸린 등 아래에서 확인한 그의 차림새에 약간 웃음이 누그러졌다. 딕을 보고 브루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걸음은 멈추어 세웠다. 어둠 속에 녹아드는 망토를 두르고 있는 브루스는 벌써부터 순찰을 나갈 셈인 거 같았다. 비록 성을 둘러싸고 있는 숲은 일 년 내내 겨울이었지만 그 너머에서는 흐름에 맞춰 제각각의 계절들이 차례로 지나갔고 해가 짧아지는 겨울철에는 특히 밤의 어둠을 틈타 활동하는 브루스의 일이 더 이른 때부터 시작되었다. 거기다 성탄절은 브루스가 한 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예민하게 살펴보는 날이었다.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껏 부푼 마음으로 한 다음에 브루스 앞으로 튀어나갔던 딕은 자신의 설렘이 부끄러워서 잠시 말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브루스는 여전히 겨울을 박아놓은 눈으로 딕을 바라볼 뿐이었고 딕은 힐끗 그 눈동자를 확인했다 파드득 시선을 돌리듯 겨우 말을 틔웠다.
“알프레드가 뷔슈 드 노엘을 만들었대요.”
“그래.”
열없는 딕의 말에 브루스는 심드렁해 보일 정도로 심상하게 답했다. 하지만 딕은 이제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서 금방 녹아 없어지는 살얼음만큼이나 흐릿한 호선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대답을 한 브루스는 무언가 생각하듯 조금 더 멈춰있었지만 결국 딕을 스쳐 지나며 성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딕은 그의 뒤를 따라 그가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브루스는 후드를 뒤집어썼고 망설임 없이 앞에 펼쳐진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어둠을 두른 그를 숲은 쉽게 감추어냈다. 굵은 눈이 흩날리는 숲은 그렇게 브루스를 집어삼키고 이내 그를 마을의 그림자 속으로 토해낼 것이다. 그것이 이 숲 너머에서는 제 형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브루스가 마을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딕은 한동안 브루스가 사라진 까만 숲의 풍경을 보았다. 차가운 눈이 내리고 어둠이 자욱한 가운데 저 밖에서는 성가와 함께 오늘 태어난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겨울을 잊고 맑게 떠들 것이다. 그리고 브루스는. 딕은 문득 제가 주머니 속에 넣어둔 겨우살이가 생각이 났다. 그는 자신의 방문 앞에 겨우살이를 보았을까. 딕이 주머니에서 작은 가지를 꺼내 그를 놀랬다면 그의 파란 눈동자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딕은 이유도 모르고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뷔슈 드 노엘은 그가 돌아오고 내일 날이 밝으면 그때 그와 함께 먹기로 혼자 약속했다.
울다가 피로에 지쳐 잠이든 딕이 눈을 뜬 것은 성 안이 파랗게 식어가는 노을에 물들었을 때 즈음이었다. 하루를 꼬박 잠들었던 딕은 처음 보는 풍경에 잠시 눈만 껌뻑이다가 이내 바쁘게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살펴보면 딕이 이때껏 구경해보지 못한 호화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딕이 덮고 있는 이불도 부모님이 덮어주던 솜을 넣은 누비이불과는 달리 동물의 털이 들어가 있어 훨씬 든든하고 무게 있었다. 이곳이 어딘가를 생각하던 딕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는 딱 하나 뿐이었다. 바로 상실의 숲, 그 안쪽에 위치해있다던 성이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성은 딕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아늑해서 딕은 바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게 제일 그럼직해보였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딕이 문득 까끌까끌한 목 때문에 켁켁 기침을 했다. 때마침 방의 문이 열리고 깔끔한 차림을 한 나이 지긋한 집사가 도자기로 된 주전자와 컵을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이곳이 어딘지 짐작을 해놓은 딕은 경계어린 눈초리로 그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세모꼴이 된 눈을 한 딕이 머쓱해질 만큼 집사는 친절하고 상냥했다. 꿀을 듬뿍 넣은 데운 우유를 한 잔 딕에게 조심스럽게 건네면서 집사는 자신을 알프레드라고 소개했다. 딕은 소문으로 들었던 성의 주인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사근사근한 집사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잡혀 오신 거예요?”
한껏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딕에게 알프레드는 느긋한 눈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주인님을 따라 온 겁니다.”
우유를 조심히 마시던 딕은 집사의 대답에 입에서 잔을 떼며 다시 입을 길게 꾹 다물었다. 딕이 괜히 힐난하는 눈빛으로 알프레드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책망하듯 딕이 물었다.
“어째서요?”
“주인님을 낯선 곳에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요.”
알프레드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딕이 어떤 경유를 거쳐 이곳에 이르렀는지 집사가 아는 지 어떤지는 몰랐지만 알프레드는 딕에게 편하게 지내시라 말한 뒤 얼마 간격을 두지 않고 딕이 있는 방으로 따뜻한 음식을 가져왔다. 딕은 먹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동시에 뱃속에서 꾸르르 하고 근 사흘간 굶주린 위가 길게 울어 창피해져서 뺨을 붉혔다. 하지만 집사는 지적하지 않고 침대 옆 탁자에 따끈한 김이 오르는 음식들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내키시면 드세요. 하지만 따뜻할 때가 가장 맛있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 밖을 나서면서 알프레드는 해가 진 뒤라 숲이 위험하니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 바로 마을로 모셔다드리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집사가 나간 뒤 잠시 뚱한 표정으로 그가 차린 식탁을 바라본 딕은 마지못해 음식에 입을 댔다가 깜짝 놀랐다. 음식이 전부 너무나도 맛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처음으로 딕이 제대로 기억하는 식사였다. 텅 빈 뱃속이 따듯해질수록 깊이 담아두었던 응어리가 녹고 있는지 이상하게 눈동자도 뜨거웠다.
딕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집사는 내일이면 성 밖으로 딕이 나갈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했지만 혼자가 되어버린 딕에게 중요한 건 마을로 돌아가고 말고가 아니었다. 딕의 부모님은 그림자 때문에 돌아가시게 되었고 딕은 그에 대해 복수를 하려고 했다. 이 성의 주인을 죽이고자 했다. 그가 그림자를 부리는 이일 테니까. 왜 그는 자신을 죽이려한 딕을 이 성에 묵게 한 걸까. 그냥 내버려뒀으면 추위에 딕은 분명 죽었을 것이다. 집사는 왜 딕에게 친절한 걸까? 왜 집사는 이곳이 ‘낯선 곳’이라고 이야기한 걸까? 사악한 거짓말일까? 딕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져서 딕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성을 둘러보고 나면 무언가 결론이 나지 않을까. 딕은 조용히 제 방에서 나와 어둠이 깔린 복도로 나왔다.
드문드문 벽에 걸린 등불이 있었지만 어둠속에 잠겨있는 성 안은 춥지 않고도 으스스했다. 벽이나 기둥에 비명을 지를 듯한 가고일이나 튀어 올라 날아갈 것 같은 박쥐 장식들이 곳곳에 있었다. 장식들은 전부 정교하고 적확해서 생김새가 결코 촌스럽지는 않았지만 악취미인 것만은 확실했다. 성의 바깥이면 몰라도 어째서 안쪽을 이런 것들로 꾸며놓았는지 딕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의 방으로 보이는 곳까지 다 둘러보고 딕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아 내려갔다. 그때 딕은 저 앞쪽에서 쾅하고 급하게 열리는 문소리를 들었다. 소리에 놀란 딕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었고 난간 사이로 빼꼼히 내려다보았다. 눈이 휘몰아치는 바깥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것의 걸음걸이는 느렸고 무언가에 뒤를 잡히듯 발을 끌었다. 온통 새까매서 딕은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이름을 모르고 헤매다가 저것들이 한 덩어리가 아닌 여러 가지의 것들이 한 덩이처럼 엉켜있는 것이라고 분간해냈다. 부모님을 해쳤던 것과 같아 보이는 그림자들이 잔뜩 엉켜서 커다란 형상을 그리며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주먹을 쥐고 입술을 꾹 물면서 딕은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으며 검은 형체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형체는 마치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힘겨운 걸음으로 느리게 성의 중앙에 바닥 아래서부터 솟아나서 마치 전시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수정 쪽으로 향했다. 수정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의 움직임은 더더욱 더뎌졌다. 저쪽에서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등불은 든 알프레드가 나타났다. 집사는 놀란 기색 없이 그저 바쁜 걸음으로 검은 형체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브루스 도련님.”
알프레드가 간절한 어조로 주인을 부르며 자신이 들고 온 등불을 검은 형체 앞으로 바짝 가져다 댔다. 누군가를 꽁꽁 동여맨 그림자들이 빛의 접근에 진저리를 치듯 등 뒤로 커다란 어둠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서 등불을 향해 손이 튀어나와 불길에 달구어졌을 유리면을 쥐었다. 집사는 그 손을 제 빈 손으로 마주잡고 서서히 그를 수정이 있는 곳으로 이끌며 계속 말을 걸었다. 형체는 멈춰있던 발걸음을 간신히 움직이며 이제 손을 뻗으면 수정에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검은 형체에서 다시 다른 쪽 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손은 앞에 있는 수정에 닿았다. 끼이익, 하고 등골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성 안에 메아리쳤다. 형체를 이루던 검은 그림자들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수정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검은 그림자에 칭칭 감겨있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가 드러났다. 남자는 등불을 붙잡았던 손을 떼고 양손을 수정에 가져다대며 제 몸에 붙은 그림자들이 전부 수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끈질기게 남자의 손목을 휘감았던 그림자마저 전부 떨어져나가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남자는 손을 물렸다. 그리고 남자는 그대로 몸이 무너져 내렸다. 소름끼치는 비명이 가시고, 돌풍이 멈춘 실내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사위가 이상하게 더 추워진 것 같았고 성 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도 더 거세진 것 같았다. 알프레드는 등불을 내려놓으며 팔 한쪽에 가져온 모포를 급하게 남자에게 둘렀다.
“...아이는.”
한참 적막이 있은 후에 남자가 알프레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괜찮습니다. 방에 계세요.”
“그래요.”
짧게 대답한 남자를 집사가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저보다 한참 커다란 남자의 보조를 도우며 집사는 주인을 자신이 등불을 들고 나왔던 방향으로 데리고 갔다.
그림자는 세상 어느 곳에나 있다. 사람의 마음이 생겨난 것과 함께 생을 시작한 그들은 삶 뒤에 숨어서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서 사람들은 불행해졌고, 시험에 들기 쉬웠으며 나약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너무 자신들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낯선 것으로 분류하고, 기분 나쁜 악몽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인양 생각했다. 그 겨울이 오기 전 아이에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아주 오래 전 아이는 가족과 함께 밤길을 걷다가 부모님을 잃었고 그 속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아이의 삶의 등불과 같던 부모님이 허무하게 제 눈앞에서 스러져가는 것을 보면서 아이의 마음속에서 빛이 사그라졌다. 지나치게 추워서 땅이 꽁꽁 얼었던 계절에 아이의 세상이 어두워지고 부모님은 영영 아이를 떠났다.
겨울은 씨앗과 같단다. 그렇다면, 봄이 오는 날에 부모님은 다시 아이의 곁으로 돌아올까? 부모님을 집어삼킨 땅만을 끝없이 바라보던 아이가 소원을 빌었다. 뭐든 하겠노라고, 다시 봄을 틔워낼 수만 있다면. 부모님의 죽음 앞에 짙은 어둠이 눈에 박힌 아이가 점점 식어가는 의식 속에서 끈질기게 생각했다. 그러던 때에 아이에게로 성이 나타났다. 창백하게 얼어버린 시간이 아이의 앞에 커다란 구조물이 되어 들어섰다. 브루스는 주저 않고 성의 주인이 되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왔지만 딕은 잠을 자지 않고 뒷정리를 하는 알프레드를 도우면서 브루스를 기다렸다. 매년 점점 더 심해지는 바람이 성을 차게 스치고 간다. 졸음을 떨치려 딕은 일부러 알프레드와 떠들썩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쾅,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딕은 미리 준비해둔 등불을 들고 먼저 바쁘게 뛰어나갔다. 성 안으로는 세상 속에 숨어있던 그림자들을 잔뜩 붙들어 맨 브루스가 한 걸음 한 걸음 수정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보통 때보다도 몸집을 크게 부풀린 그림자 덩어리에 딕은 눈을 홉떴다. 성탄일 즈음에는 축복을 시기하듯 특히 많은 수의 그림자들이 세상에 널리지만 그래도 이것은 그 이상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브루스를 향해 달려드는 그림자들은 더 집요해졌다. 알프레드가 말하기로 원래는 브루스가 등불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그림자들을 봉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브루스가 알프레드나 딕이 가지고 온 등불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딕은 브루스를 빼내기 위해 제가 들고 온 등불을 그에게 가까이 대면서 연거푸 브루스를 불렀다. 브루스에게 둘러줄 모포를 챙기고 나온 알프레드도 브루스를 다급하게 불렀지만 그는 좀처럼 등불이 있는 곳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딕은 문득 브루스가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광경이 생각이 나 가슴이 선뜩해졌다.
어느 날인가 오늘처럼 브루스가 그림자 속에서 쉬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딕은 무심코 브루스의 손을 잡아끌기 위해 그림자로 손을 뻗었다가 브루스에게 크게 혼이 났었다. 브루스를 휘감았던 그림자가 딕의 존재를 알아채고 딕에게로 옮아붙을 듯 달려드는 광경에도 놀랐지만 그보다도 딕에게 뻗어지던 그림자를 휘어잡으며 급하게 그림자를 수정 속에 가둔 뒤 브루스가 자신에게 크게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더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커다란 감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게 화라는 사실에. 잔뜩 의기소침해진 딕에게 알프레드가 따뜻한 차를 쥐어주며 브루스가 격하게 반응하는 건 예전에 알프레드도 브루스를 도우려다 그만 그림자에 의해서 몸이 산산조각 난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을 성에서 지내오면서 브루스의 시간은 점점 굳어져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브루스를 따라 이곳에 왔던 알프레드는 노쇠해서 세상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주인을 혼자 남겨둘 수 없던 집사는 자신의 마음을 흙인형 속에다 담아두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알프레드의 몸은 오랜 세월 움직이면서 한결같이 브루스를 돌볼 수 있었지만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에는 취약했다.(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딕은 마을에 나갈 일이 있을 때도 웬만해서는 알프레드의 손을 빌리지 않게 되었다.) 알프레드는 그럼에도 브루스가 혼자 분투하다 영영 그림자 속에서 하나로 굳어져버릴까 무서웠고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등불이었다. 불을 비추면서 브루스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 정도가 알프레드와 브루스가 타협해서 만들어낸 선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브루스가 빠져나오지 않자 딕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알프레드가 말릴 틈도 없이 등불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새까맣게 그림자들이 딕에게 달려들어 삽시간에 시야는 어둠에 잠겼고 주변의 소리가 멎었다. 딕의 머릿속으로 온갖 눅눅한 아우성들이 제멋대로 들어찼다. 흐느끼다가, 저주를 퍼붓다가, 헐뜯다가, 심지어 미친 듯이 웃기까지 하는 갖갖이 목소리들이 어둠 속에서 음침하게 떠올랐다. 딕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브루스를 찾았다. 그림자들 속에서 가장 안전하게, 그러면서 스스로는 그림자를 감시할 수 있는 어둠에 몸을 감추고 있을 브루스를 찾아 딕은 브루스를 불렀다.
“ !”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불렀다.
“ !”
“ !”
“ !”
그러다 겨우야,
“브루스!”
딕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을 때 딕의 손끝에 형체 없는 그림자가 아닌 또렷한 인기척이 잡혔다. 손이었다. 딕은 주저 없이 그것을 붙잡고 자신이 다른 손으로 잡고 있는 등불 쪽으로 이끌었다. 딕이 꼭 손에 잡고 있는 브루스에게서는 피냄새가 났다. 어둠 속에 섞여드는 브루스의 등을 지켜볼 때면 딕은 무서웠다.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그가 그림자들에게로 나아가는 재물처럼 보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그도 어느 날인가에는 땅 속으로 끌어내려질까. 저를 찾지 못한 그가 그림자들을 따라 수정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이 성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참 불안함에 가슴이 답답할 즈음 딕이 붙잡은 손에서 악력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파랗고 시린 눈동자. 어둠 속이지만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눈물이 났으니까. 차갑고 차가워서, 이렇게 계속 눈에서 눈물이 나니까.
딕과 브루스는 무사히 그림자들을 해쳐 나왔고, 브루스는 자신이 짊어지고 온 그림자들을 전부 수정안에 잘 봉인했다. 다시 확인해보니 브루스의 망토는 여기저기 찢어져있었고 후드 아래 얼굴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딕이 그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무릎걸음으로 다가갔지만 브루스는 제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망토를 여미고 후드를 더 깊게 눌러썼다.
“딕을 방으로 데려가요.”
브루스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알프레드에게 말했다. 피냄새가 나는 주인의 몸을 찡그린 눈으로 지켜보던 알프레드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쉰 뒤 딕을 부축했다. 짐짓 태연한 발걸음으로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상비하는 약과 치료도구들이 있는 부엌으로 향해 갔다. 딕은 오랫동안 그 뒷모습을 눈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나 나가요."
짐은 꾸려져서 이미 준비된 지 오래다. 벌써 이야기는 세 달 전에 끝이 났지만 딕은 오늘의 새삼스러운 일인 양 말을 꺼냈다. 남자는 무엇을 하는지 그저 등만 보인 채 답이 없었다. 대신, 끼이- 딕이 닫고 들어온 문이 조심히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기척에 딕은 뒤를 돌아보았고, 하, 가볍고 날카로운 웃음을 뱉었다.
"하긴. 난 여기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브루스. 뱀의 발인지를 알면서도 딕은 기어코 모난 소리를 덧붙이고 만다. 브루스는 끝내 한마디의 말도 돌려주지 않았다. 원망도, 후련함도, 슬픔도, 격려도 그 어떤 것도 브루스는 표하지 않고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딕은 애꿎은 입술만 질근 씹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성 밖으로 나가는 딕을 배웅하면서 알프레드는 얼굴에 한가득 쓸쓸함과 걱정을 담으며 딕에게 여러 가지 주의사항들을 늘어놓았다.
"불편한 일이 있으시면 꼭 연락 주세요."
"걱정하지 마요, 알피."
딕은 빙긋이 웃으며 알프레드를 달래며 작별을 나눴다.
성문의 앞에는 눈 순록과 그가 끄는 썰매가 바깥으로 나갈 딕을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딕은 순록의 이마를 조심히 쓰다듬어보았다. 비록 서늘했지만 녹지 않는 고운 눈이 꼭 짐승의 솜털처럼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얽혔다. 순록은 순하게 딕이 썰매에 오르기를 잠잠히 기다렸고 딕은 피식 허탈하게 웃으며 잠시 내려놓았던 짐을 썰매에 실은 뒤 자신도 그 위에 올랐다. 받아들이는 게 쉬우면 내보내는 것도 쉬울까. 순록은 지체 없이 마을로 향하는 길을 따라 작은 눈보라를 흩날리며 달려 나갔다.
쿵!
"윽."
꿈속에서 한참 시선 옆으로 흘러가는 새하얀 숲을 바라보던 딕은 침대에서 딱딱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 뒤로 갑자기 끼쳐온 통증에 딕은 끙 하니 신음을 흘리며 피로로 뻑뻑한 눈을 겨우겨우 떠보았다. 느리게 돌아가는 머리만큼이나 둔하게 끔벅끔벅 가늘게 떠지는 눈꺼풀을 여닫으면 눈부신 햇살이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딕은 지금 해가 꽤 높이 떠오른 것을 알았다.
"헉!"
그리고 딕은 숨을 급하게 삼키며 일어났다. 더듬더듬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어 정리하면서 딕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상에 놓인 탁상시계를 보았다.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오전 수업이 시작하는 때에서 벌써 10분 정도가 지나있었다. 한순간에 피곤도, 꿈의 여운도 날려버린 딕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나뭇잎이 노을처럼 물들기 전 가장 푸르게 빛나는 계절에 도시로 나온 딕은 이제 벌써 두 번째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 일 년 내내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숲을 떠나온 뒤 딕이 느낀 것은 잔인하기도 하고 공평하기도 한 세월의 흐름이었다. 물론 성에서 지냈을 적에도 필요한 경우에는 마을로, 도시로 나오기는 했지만 직접 세상 속에 들어가 그 시간을 겪고 변화하는 사람들과 풍경들에 섞여 있는 것은 피부에 와 닿는 정도가 달랐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후로 첫 봄을 맞았을 때 집어삼킨 공기에서는 달큰한 꽃의 내음과 소란스러운 생기가 가득 돌았다. 낯설어서 설레기도 하고 아주 오래되어서 그리운 것도 같은 냄새를 딕은 의식적으로 들이키고는 했다. 이따금 차갑고 메마른 공기가 기도를 시리게 했던 감각이 아른거릴듯하면 더더욱 딕은 자신이 밟고 선 세상을 가슴에 담았다. 그럴 때마다 딕은 새삼 이곳이 자신이 원래 지내왔던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엄연히 말하자면 이런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을 테고, 기숙학교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할 서커스단 단장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 역시도 탁월한 단원의 한 사람으로서 대중들 앞에서 화려한 쇼를 선보일 입장이겠지만 어쨌든 상실의 숲에서 지내는 것보다야 법률과 역사, 경제를 배우고 있는 지금이 분명 현실적이긴 했다. 이 선명한 현실감을 딕은 분명 없는 것인 양 감추며 살아갈 수 없었을 테고 그 깐깐한 숲의 주인이 모른척할 리도 결코 없었을 테다. 결국 딕은 그 성 안에는 계속 있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딕이 브루스를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그림자의 내부로 비집고 들어갔던 그 성탄절 이후, 브루스는 딕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시작은 식사시간이었다. 아침에는 잠이 들고, 밤에는 그림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브루스는 못해도 점심만은 꼭 딕과 함께 먹고는 했었다. 설령 브루스에게 그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라하더라도, 브루스가 별 살가운 말을 하지는 않는다하더라도 딕이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으며 브루스는 꼬박꼬박 딕과 한 식탁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딕이 브루스와 먹기 위해 남겨두었던 뷔슈 드 노엘이 몽땅 딕의 뱃속으로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브루스는 더는 딕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거기다 브루스는 딕이 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자신을 기다리지 못하도록 알프레드를 시켜 정해진 시간이면 딕을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그리고 봄이 오자 딕에게 여러 학교들에 대한 설명서를 건네기 시작했다. 이제 몇 해가 지나면 금방 성인이 될 딕에게 고등교육이든, 전문교육이든 일련의 사회화가 필요한 것은 당연했고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이 제안이 성탄일 이후에 브루스가 딕에게 데면데면하게 얼굴을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나온 점이라는 게 딕의 신경을 건들었다. 거기다 브루스가 제시하는 학교들은 하나같이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어차피 이 성의 주민으로 있는 이상 학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기숙사에서 지낼 수밖에 없긴 했지만 이런 타이밍에 브루스가 직접 그것을 종용하는 듯하자 그 의미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고담 아카데미에 갈게요."
딕이 짓씹어 뱉듯 이야기했다. 그저 바라보는 게 아니라 매섭게 노려보듯 자신의 눈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파란 눈동자를 브루스는 덤덤히 마주하면서 대꾸했다.
"보다 나은 교육을 받으려면 메트로폴리스가 좋다. 굳이 고담을 고집할 이유가 있나?"
딕이 경찰이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브루스는 더더욱 고담보다 그 너머에 있는 도시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른 도시가 훨씬 적합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사실일지도 몰랐다. 짧지만 어린 시절 딕이 겪어온 고담은 분명 그렇게 유쾌한 도시는 아니었고(특히 상실의 숲이 고담의 영역 내에 존재한다는 점이 가뜩이나 흉흉한 도시를 더욱 음침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밖에 나가면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딕은 한사코 거부했다. 딕은 브루스가 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설령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일지라도, 관여할 수 없는데 브루스가 아무렇지 않게 딕의 거처에 대해서 입에 담는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였다.
"당신은"
딕은 으르렁거리듯 이를 갈며 브루스에게 또박또박 못을 박았다.
"내게 어디 가라 말할 자격 없어요."
조용히 딕을 바라보고 있던 브루스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듯 입을 살짝 열었지만 곧 다물어버리면서 작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해, 학기가 시작되는 9월. 딕은 고담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담 어디에 거주하는지는 모르지만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괴짜(혹은 유령) 매치스 말론의 피후견인으로서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딕의 서류상 통과는 수월했다. 가끔씩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 딕의 배경에 호기심, 또는 의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이도 몇 있기는 했지만 워낙 활달하고 여타 학생들과 별 다름없는-거기다 성적은 상위권에 드는- 딕을 보고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거두었다. 딕은 낮에는 정말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고 평범하게 다른 아이들과 어울렸다. 성에서 지낼 적에 알프레드로부터 기본 교양에 대해서 바탕을 가지게 된 딕은 공부진도를 따라가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고, 자신이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오거나 혹은 자신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먼저 말이 건네 오는 일이 처음에는 신선하다 못해 낯설었지만 본래 딕의 성격이 사교적인 덕에 금방 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딕은 학교생활에 훌륭하게 녹아들었다.
한편 밤이면 딕은 그림자를 추적하는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브루스에 대한 반발심에 더불은 단순한 실험이었다. 성을 떠나기 전 딕은 성의 중앙으로 돋아난 수정의 뿌리가 자리 잡은 지하로 내려가 거기서 수정 일부를 캐냈다. 브루스가 아주 오래전 몸이 숲 밖에서도 온전할 수 있던 적에는 스스로 그림자가 되기보다도 수정을 분리해서 마을에서 직접 봉인을 했었다는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딕은 짐 속에 얼마쯤 떼어낸 수정을 가지고 나왔다. 딕을 곁에서 떨어뜨리고 싶어 하는 듯한 브루스에게 딕은 어떤 식으로든 반박하고 싶었다. 경찰이 되고자 한 것은 브루스가 아무리 그림자를 가둬둔다 하더라도 인간 본연이 가지고 있는 욕망으로 인해 결국 범죄는 끝나지 않을 테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은 사람 그 스스로가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딕이 성 밖으로 나와서 브루스가 하는 일을 거들 수 있다면 딕의 고사리 손 따위야 필요 없다는 듯이 구는 브루스에게 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길고양이들을 벗 삼아 밤길을 배회하면서, 때로는 험악한 인물들을 따돌리기도 하고 함정에 빠뜨려 경찰서 앞으로 던져놓기도 하면서 거의 맨땅에 머리를 박듯 딕은 그림자를 추적했고 기어코 발견해낼 수 있었다.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맨몸 인간인 딕이 가지고 나온 수정으로 그림자를 봉인하는 것은 가능은 하나, 적절한 장비가 없다면 권장하지는 않음이었다.
수정 안에 그림자가 봉인되는 순간 수정은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고 맨손으로 그를 잡고 있던 딕은 손바닥에 날카로운 동상을 입고 말았다. 그건 그나마 두터운 가죽장갑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름 해결할 수 있었지만-점집과 더불어 주술 관련 물품들을 파는 허름한 가게에서 구매한 불도마뱀의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장갑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성능이 좋았다- 그 다음 발생한 문제는 그림자를 담아둔 수정의 보관이었다. 하나, 둘쯤을 봉인 했을 때는 별 문제 없었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서 제가 가둬놓은 음기를 분산하지 못한 수정은 자신이 보관된 딕의 방 안을 거의 냉동고 수준으로 얼려놓고 말았다.
"딕. 너 방 라디에이터 고장 난 거 아니야?"
같이 형법 수업을 듣는 바바라가 딕을 따라 잠시 딕의 방에 들렀다 이를 닥닥 부딪치면서 경악에 차서 외쳤다. 그나마 날씨가 추운 겨울이라서 딕은 대충 저기 멀리 보이는 숲을 가리키며
"북풍이 들어서 그러나 봐."
하고 궁색한 변명이나마 붙일 수 있었다. 하얗게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본 바바라는 코트를 단단히 여미며 사감에게 당장이라도 찾아갈 기세였지만 딕은 자신을 마음써주는 바바라를 달래고 달래서 겨우겨우 말릴 수 있었다. 다들 명절을 맞이해 자신의 가족들을 찾아 집으로 향했을 때 딕만은 마을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인적이 드물면서 수정을 몰래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겨우 박쥐 몇몇이 이미 둥지를 틀고 있던 입구는 좁지만 내부는 꽤 넓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 안에 수정을 보관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도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수정이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리는 탓에 딕은 주기적으로 성으로 돌아가 새로운 수정조각들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잔뜩 무거운 것 같은 수정 속에 술에 취에 너부러진 노숙자의 머리맡으로 스멀스멀 기어가려는 그림자를 딕은 여느 때처럼 붙잡으려고 했지만 봉인이 이루어진 후 수정에 금이 가더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면서 잡아뒀던 그림자들이 전부 바깥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매서운 바람과 온갖 아우성으로 가득 찬 어둠이 딕을 휩쓸고 마을의 어디론가로 퍼져나갔다. 마치 기분 나쁜 악몽을 보고난 후처럼 딕의 등이 식은땀으로 푹 젖고 말았다. 새로운 조각을 얻기 위해 성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딕이 캐냈던 부분은 새로운 수정이 돋아나 있었다. 아마도 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수정은 드러나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부터 똬리를 틀고 계속 자라면서 압력을 견디고 있는 듯했다. 처음에 단순히 수정을 일부 가져올 생각으로 캐냈을 때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가 찬찬히 성 아래에 자리한 수정을 살펴보자면 저 한참 깊은 곳에 하얀 빛이 뿜어지는, 마치 핵으로 보이는 지점을 짚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정에 봉인된 그림자는 핵 속으로 붙들리듯 빨려 들어갔다. 그 핵이 깨지지 않는 한 성에 자리 잡은 수정이 어디 손상이 간다 해도 봉인이 전부 풀린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핵에서 분리된 조각은 봉인은 가능하되 계속 그를 붙잡고 있을 힘이 없어서 결국 일정량이 넘어가면 산산조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딕은 수정을 캐오고, 어느 정도 봉인이 끝나면 다시 성으로 돌려놓고 그걸 대신할 새로운 수정을 캐오는 일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딕이 이런 일을 하는 사실을 공연하게 아는 것은 우선 알프레드뿐이었다. 알프레드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리처드 도련님. 이런 일은 역시 주인님께 말씀드리는 게..."
"삐졌거든요."
딕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알프레드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지는 것을 보고 죄책감에 가슴이 따가웠지만 딕은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브루스한테는 절대 비밀이에요."
브루스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딕이 학교로 나온 이후 성에 돌아가 보아도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딕은 자신이 브루스에게 완벽하게 비밀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다 그의 성미를 미루어보았을 때 엄연히 그의 영역에 들어선 일에 손을 뻗은 딕에 대해 그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별 반응이 없었고, 심지어 얼굴조차도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딕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딕은 먼저 손을 뻗을 이유도, 기회도 가지지 못했다. 그저 딕은 브루스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딕이 직접 그림자를 추적하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되는 것도 있었다. 보통 그림자들은 일정 패턴을 가지고 활동했다.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저들과 동화되기 쉬운 타깃을 찾아다녔다. 타깃이 약한 경우 해당 인물을 거대한 감정의 흐름 속에 가두어 생명을 갉아먹었고 보다 강할 경우는 숙주가 가진 감정, 욕망의 힘을 역으로 이용해 조종하여 불행을 퍼뜨리는 식이었다. 가끔 자신이 무슨 일을 한 줄도 모르고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바로 이 후자에 속했다. 브루스가 그림자로 화해서 이들을 사냥에 나서기로 결심했던 것도 그림자가 되면 브루스가 지닌 감정을 미끼로 그들을 끌어들이고 동화되기 쉬워 성으로 붙잡아 오기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딕은 한 가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사건을 하나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딕의 부모님이 겪은 사고였다. 그때 서커스장 안은 요란한 불빛들과 사람들의 함성, 기대와 두려움, 설렘에 찬 환호로 가득했다. 그런 찬란한 광경 아래 그림자가 밧줄을 끊는 것 같은 섬세한 작업을 한다는 건 그들 본래가 보이는 행동과는 유형이 달랐다. 그리고 딕은 과거에 몇몇 뚜렷한 원인을 알지 못하고 그저 사고로써 종결된 일들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거기서 주술사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단순한 감정과 욕망의 덩어리로 사람을 휘젓거나 휘두르는 그림자에게 특정 인물을 공격하게 하거나 마치 사령처럼 부릴 수 있게 조종하는 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딕은 그 중 '토니 주코'라는 이름을 도출해냈다.
주코. 딕은 이 이름에 희미한 기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서커스가 공연을 하기 하루 전, 저녁에 단장인 부모님에게로 배가 불룩한 사내가 부하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둘과 함께 찾아와선 소란을 부렸다. 지독한 시가 냄새를 풍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주코의 옆에서 부하들은 발길질로 소품들이 담긴 상자나 동물 우리를 걷어차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도발에 만약의 소동이라도 나면 그것을 빌미삼아 이 마피아의 잔챙이들이 골치 아픈 일들을 벌일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엄마는 단원들을 달래면서 딕을 자신의 뒤로 감추었다. 주코가 자신 앞에 마주선 아빠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자릿세를 내라는 게 어디 내 어거지인줄 알아? 이 바닥 룰이라고, 룰!"
"당신에게 이 땅에 대한 법적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잖소. 난 이미 시에 허가를 받았고 당신에게 별도의 비용을 지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소."
"하, 법!"
남자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아빠는 그저 담담하게 침을 튀기며 소리 지르는 주코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코는 마치 저주를 퍼붓듯 을렀다.
"진짜 법이 뭔 줄 모르나 보군. 좋아, 어디 신나게 하늘을 날아보시라고. 고명하신 단장 나리."
주술사 주코는 나름 뒷세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외적으로는 일개의 일수꾼에 불과하던 주코가 제법 커다란 대부업에 뛰어들고 거기서 능력을 인정받아 마피아의 잔당으로 한축을 잡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것으로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주코와 관련해서는 불운의 사고들이 그의 행적을 따라 죽 이어졌는데 부모님의 사고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이야기가 딕이 그림자를 추적하는 중 보게 된 사고들과 상당부분 겹치고 있었다. 한참 지난 사고지만 아픔이 가시지 않아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노부인께 사정하여 그날의 목격담을 듣기도하고, 방학 때는 나이를 속여 뒷골목에 위치한 바에서 웨이터와 바텐더 일을 하기도 하면서 딕은 주코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골자는 한낱 잔챙이에 불과했던 주코가 나름의 영향력을 지니고 거들먹거릴 수 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섬뜩한 재주 때문이었고, 그 재주 때문에 원래 망령들의 주인인 저 숲의 마법사에게 저주를 받아 주코는 지금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딕은 주코가 머물고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밤마다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증명을 하지 못했다 뿐이지 엄연하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그저 숨어 있는 걸로 용서를 받는다는 건 딕은 납득할 수 없었다. 처음 찾아낸 장소는 이미 비운 지가 한참은 넘은 폐허였다. 몇 년 전부터 대부업에서 은퇴를 하고, 거기다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 때문에 정보를 잡아내는 게 더 힘들어진 탓에 딕이 주코가 있는 초라한 거처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세 달이 지난 후였다. 그림자가 되어 움직이는 브루스야 길거리건 누군가의 집안이건 들어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사람인 딕은 나름의 장비를 챙겨야 주코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술사 주코가 아직도 그림자를 부릴 가능성에 대비해 수정조각을 챙기는 것은 물론 침입에 필요한 장비며, 호신 무기에 복면이 있는 옷을 챙기고 그것들을 죽 늘어놓고 보니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고 좀도둑의 몰골이라 그 와중에도 딕은 헛웃음을 지었다. 딕의 생일을 하루 앞둔 금요일.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경비를 서고 있는 덩치 커다란 건달들을 따돌리거나 기절시키며 딕은 나름 순순하게 저 끝에 주코의 집이 있는 좁고 냄새나는 골목을 지나올 수 있었다. 서커스단 시절에 부모님께 '로빈'이라는 애칭까지 받으며 보였던 날렵한 동작은 이런 일에도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누추해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집은 나름 단단하게 방어되고 있었다. 어떻게든 틈새를 찾아 집 안으로 침입하는 중 딕은 브루스를 생각했다. 브루스가 주코를 알았을까?(분명 알았을 테지.) 알았다면 왜 자신에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을까. 다짜고짜 자신을 죽이겠답시고 상실의 숲까지 와서는 칼을 겨누었던 아이가 어떤 심정인지, 브루스가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그런 아이를 브루스가 조사 하나 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자신의 일에 대해서까지 이렇게 굳게 함구할 수 있는지 딕은 브루스에게 화가 났고, 분했고, 슬펐다.
문이 열리고 어둑한 실내가 드러났다. 서재였다. 금고가 보였고, 음산한 박제 몇몇과 값이 꽤 나갈 것으로 보이는 골동품, 보석 몇몇 개와 돈 자루도 보였다. 성의 주인이 브루스임을 아는 이상 딕은 주코가 저주를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말 따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단단히 걸어 잠근 문 뒤로 그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끌어 모았을 재산들을 숨기고 있는 것을 맨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새삼 화가 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멀쩡하게 살아있고, 경비를 고용할 돈씩이나 가지고 있지 않은가. 엄마와 아빠는 벌써 한참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는데.
"너, 너, 너, 넌 뭐야!"
달칵, 어두운 전등이 켜지며 새된 남자의 외침이 들렸다. 딕은 창백한 얼굴로 자신에게 총을 겨누며 소리 지르는 남자를 찬찬히 뜯어본 뒤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코."
와들와들 떨리는 손목을 향해 딕은 챙겨온 작은 부메랑을 날려 주코의 손에서 총을 떨어뜨렸다. 으, 악. 뚝뚝 끊어지는 소리를 뱉으며 남자는 떨어진 총을 주우려고 몸을 답싹 낮추며 바닥을 더듬었다. 딕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총을 발로 밟은 뒤 저 멀리로 치워버렸다. 번들번들 땀을 흘리며 딕을 올려다보는 주코에게 딕이 물었다.
"그레이슨 기억해? 서커스단 단장, 플라잉 그레이슨즈."
작은 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홉 뜨이는 것을 딕은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주코는 정신없이 고개를 휘저으며 산발적으로 외쳤다.
"나, 난 몰라! 나와는 관계없어! 난 이제 손 뗐어! 그 악마가!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전부 악령들의 짓이야! 난 죄 없어!"
비틀비틀 일어난 주코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책상 너머에 있는 책장이 있는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딕은 이를 악 물고 더 짙게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말 이 놈이다. 딕의 머릿속에서 다시 부모님이 거짓말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고 연둣빛의 온갖 싹들이 돋아나는 흙 아래에 나란히 묻혀 영원히 딕의 옆을 떠났다. 주코는 신경쇠약이 걸린 듯 제 결백을 부르짖었고, 체격도 딕이 기억하기보다는 분명 해쓱하니 형편없었지만 어쨌든 그의 알량한 재산과 함께 이곳에 있지 않은가.
감히, 모른다고. 죄가 없다고. 저 한심한 작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딕은 처음에는 그저 주코의 방을 뒤져 장물을 찾던, 장부를 찾던, 관련된 증거품이라도 찾아내던 해서 그걸 빌미로 그를 고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저렇게 살아서, 제 죄를 모르고 자신의 손은 더럽지 않다며 부르짖는 남자를 눈앞에 두고 나니 딕의 머릿속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뇌리 한켠에서 킬킬킬킬 웃으며 분노하는 목소리가 이번에야 말로 복수를 할 수 있다며, 그것이 정의라며 미친 듯이 환호하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딕을 피해 뒷걸음질 치는 주코는 힉, 힉 숨이 넘어가는 신음을 흘리며 잔뜩 몸을 웅크려서 책장을 더듬더듬 훑으며 제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둘 주위로 검은 그림자가 몰려들었다. 어둑하게 켜졌던 전등이 어느 새인가 전구가 나갔는지 어땠는지 꺼져버렸다. 숨 막히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때 주코가 책장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피스톨을 꺼내 들었다. 주코의 한걸음 앞으로 다가선 딕도 호신용으로 가지고 왔던 칼을 쥐었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탕!
매캐한 화약 냄새, 새카만 어둠 속에서 지나치게 밝은 섬광이 한 번 터져 나왔다. 딕은 어둠 속에 갇혔다.
흑, 흑... 숨죽인 흐느낌을 멀게 들으며 딕은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뜬 건가? 사위는 아주 까맸고 또 조용했다. 제 몸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다만 계속 소리를 눌러 죽이는 듯한 어린아이의 울음만이 들렸다. 딕의 의식이 하릴없이 그 유일한 인기척을 따라 흘러갔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진주알 같은 눈이 하나, 하나. 알알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딕이 고개를 내리자 그 아래에는 자그마한 아이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아이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작게 속살거리듯 우는 소리가 들렸다. 딕은 한참, 꽤 한참 아이를 지켜보았고 문득 반짝하고 머릿속에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브루스?"
머리와 어깨에 눈이 소복이 쌓인 아이는 딕의 목소리에 반응한 건지 어떤 건지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얼굴에 딕이 오래전에 자신의 가슴 속에 새겨 넣었던 희푸른 겨울 하늘이 두 개 박혀 있었고 거기서 토독, 토독 투명한 눈물이 커다랗게 방울져서 흘러내렸다. 아이는 딱히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고 그저 고요하게 눈물을 쉼 없이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시린 눈동자가 딕을 담지 않고 먼 허공을 향했다. 딕은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아이와 시선을 맞추어보았다. 손을 뻗으려고 해도 자신의 손이 어디에 달린지 몰라 딕은 그저 안타깝게 목소리를 냈다.
"왜 이러고 있어요? 왜 울어요. 누가―"
브루스는 무언가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담은 채 품에 안고 있었다. 딕은 오래전 알프레드로부터 언뜻 들었던 브루스의 과거가 떠올라 아이의 작은 손에 들어있는 것이 그때에 관계된 무언가일거라고 흐릿하게 추측했다. 한참 허공을 보며 울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열어 제가 담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딕은 파란 새를 보았다. 파란 깃털을 지닌 작고 작은 새가 아이의 하얀 손안에서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딕."
한숨처럼 가늘고 연기처럼 덧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마치 딕의 머릿속에 직접 울려퍼지 듯 선명하게 들렸다. 아이는 숨을 불어넣듯 다시 포갠 자신의 손 위에 입술을 붙이며 도로 작게 몸을 웅크렸다. 여전히 아이의 몸 위로 차가운 눈이 송이송이 떨어진다. 이러다 아이가 눈 속에 파묻힐 것만 같았다. 딕은 어디 있는지 모를 제 손을 아이를 향해 억지로라도 뻗어보았다.
"브루스!"
목이 아프게 외치며 딕이 눈을 떴을 때, 내뻗은 손 너머에 있는 것은 작은 브루스도, 어두운 공간도 아닌 나무로 된 천장이었다. 이곳은 딕이 머물고 있는 기숙사 방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꿈이지? 딕이 혼란스러워 주변을 마구잡이로 둘러보면 아직 해가 고개를 내밀지 않아 사위는 푸르스름했다. 딕의 복장은 주코에게 향했을 때와 꼭 같았지만 총상은 없었다. 딕은 생리적인 이유로 흐른 건지 아니면 감정이 치솟아서 흐른 건지 분간이 어려운 눈물을 새게 훔쳐내며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자꾸만 누군가를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책상 위에 무언가가 파란 새벽의 어스름을 반사하며 놓여있는 게 보였다. 딕이 몸을 기울여 딕의 기억에는 없는 사물에 시선을 주면 그것은 은으로 만들어진 펜던트였다. 자꾸만 힘이 풀리는 손으로 펜던트를 들어 올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뚜껑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딕의 부모님이 나란히 웃고 있는 흑백 초상화가 들어있었다. 딕이 책상 위에 있는 전등에 불을 붙여 다시 확인해보아도 분명 그건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었다. 예전에 딕이 자신의 부모님 사진이라며 브루스에게 건넸던 그 사진이, 정교하게 축소되어 장식 안에 담겨있었다. 딕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숲을 보았다. 사시사철 눈이 오는 숲, 상실을 겪은 이가 제 과거 속에 붙들려서 얼어붙어버린 그곳. 화가 날정도로 과묵하고, 슬플 정도로 투명한 눈을 가져서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남자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딕은 서둘러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상실의 숲에는 여전히 눈이 오고, 땅에 내려앉고서 녹지 않는 채 계속 소복이 쌓이기만 했다. 차가운 공기가 익숙하게 딕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고 그 통증을 더 한가득 들이며 딕은 그립다고 생각했다. 딕은 벌써 3시간 째 차가운 눈 위에 봄철에 맞는 얇은 차림새로 드러누워 있다. 잿빛 하늘과 마른 가지가 탁 트인 시야에 걸렸다. 딕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인내와 시간밖에 없어서 여유롭게 그 풍경들을 조각조각 쪼개어 보았다. 그리고 딕은 눈꽃이 걸려있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오돌토돌 돋아난 눈을 보았다. 한 번 눈에 들어오고 나니 제법 많은 눈들이, 꽃눈일수도 있고 잎눈일 수도 있는 생명을 담은 눈들이 죽은 줄 알았던 나무들 가지 여기저기에 튀어나와 있었다. 눈은 꼭 알을 품은 새처럼 그런 눈들을 소중히 덮어 보호하고 있었지만 이 기세면 마냥 보호하고만 있는 건 이미 늦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날인가는, 그 먼 어느 날인가는 파란 싹이 돋고 꽃망울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멀리서 순록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딕은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추위로 잠이 들었던 딕은 폭신한 침대 위에서 정신이 들었다. 감각이 없던 손과 발에 따듯한 혈액이 힘차게 돌고 있었다. 아직 뜨지 않은 눈 뒤로 낯익은 냄새가 나서 딕이 폭 숨을 쉬었다. 상실의 숲 한복판에 있는, 심장이 없는 마법사가 살고 있다 일컬어지는 성이 이렇게도 포근한 향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마 사람으로서 아는 것은 딕이 유일할 것이다.
"오랜만이죠?"
딕은 가볍게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 딕은 개의치 않았다.
"거기 있는 거 알아요."
또 한마디도 안할 건가요? 딕이 눈을 감은 채 짐짓 짓궂게 말을 이었다. 그러자면 저만치쯤에서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인기척이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느리게 딕이 누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마른 겨울의 냄새가 자신의 곁에 가까워졌을 때 딕은 비로소 눈을 떴다. 차가운 눈동자가 딕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딕은 오히려 눈가에 걸린 웃음을 더 깊이 하며 무표정한 브루스를 마주했다. 반면 브루스의 인상은 그때 바로 매서워졌다.
"얼어 죽을 작정이었나?"
"그렇게라도 안하면 당신을 만날 수 없잖아요. 브루스가 어디 좀 독해요?"
"굳이 나를 만나야할 이유가 있나?"
"당신이 굳이 날 구할 이유는 있고요?"
딕의 말에 화가 났는지 브루스의 앙다문 턱에 더더욱 굳은 힘이 들어가는 것을 딕은 보았다. 그 고집이 안쓰러워서 딕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브루스는 그보다 먼저 몸을 돌리며 딕의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딕이 급하게 일어나 저만치로 가려는 브루스의 팔을 붙잡았다.
"브루스, 주코를 언제부터 알았어요?"
딕이 말했지만 브루스는 그저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만 했다. 딕은 그때마다 다시 브루스를 잡았고 한 몇 번쯤 그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딕은 브루스가 마음만 먹으면 정말 자신을 내치고 이 방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아예 먼저 앞서 나가서 제 방 문을 걸어 잠갔다. 등으로 문을 막아서듯 선 딕은 손을 뒤로 돌려 브루스가 마법으로도 문을 열지 못하게 문고리를 단단히 쥐었다.
"주코를 찾아갔었죠? 그가 뭘 했는지 알고 있었죠? 브루스, 내가 왜 이 숲에 온 건지 알았잖아요. 그런데 왜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주코가 총을 발포한 순간, 딕은 살의로 가득차고 주코는 공포에 질려있던 그 순간에 그림자들은 둘의 기류를 눈치 채고 사냥감을 향해 빠르게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브루스가 딕을 감싸서 총알을 막아냈고 머무는 기숙사로 조심히 돌려놓았다. 딕은 그때 브루스의 내부에 있는 감정에 동화되어 그가 품고 있는 풍경을 생생하게 보았다. 작은 아이가 새를 품은 채 섧게 울었다. 브루스는 그 광경을 결코 없는 일로 할 수 없다. 그렇게는 딕이 둘 수 없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 줄 아는 물음들을 죽 입에 담던 딕이 계속 입술을 꾹 물고 있는 브루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무섭게 했나요?"
고집스러운 시선이 드물게 짧게나마 떨렸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굳어선 무감각하게 마치 먼 옛날의 감정도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 사실을 나열하듯 말을 지었다.
"내가 틀렸다고 할 생각인가?"
주술사를 찾아가선 겁에 질린 놈이 쏜 총에 맞을 뻔한 네가? 날선 눈동자가 이어지지 않은 뒷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문고리를 단단히 잡고 있던 손을 풀며 딕은 브루스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차가운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은 딕의 손길에 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딕은 혼자서 그의 손바닥에 있는 손금을 따라 그릴 뿐이었다.
"당신이 옳아요."
브루스가 주코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면 저주는 아니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일을 했으리란 사실은 굳이 기민하게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뻔했다. 그럼에도 딕은 주코를 법 앞으로 세워 정당한 심판을 받게 하고 싶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에서 통용되는 적절한 절차를 통해서였지 결코 그를 살해한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제 죄를 인정하지 않고 모진 목숨을 보전하려고 발악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런 인물의 몇 푼 안 되는 재산 따위 때문에 부모님은 목숨을 잃고, 그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은 상처를 입고 슬픔에 빠져야했던 건지 어처구니가 없어 화가 치솟았다. 그 분노를 그림자들은 예민하게 알아냈고 그것을 말미암아 딕의 머릿속으로 잠식해 들어갔다. 브루스라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스스로 상실의 숲으로 들어와서, 성의 주인이 되어버린 이 사람이라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럼 알 거 아니에요. 당신은 날 떼어놓아서는 안 돼, 나한테는 브루스가 필요해요."
"네가 아픔을 떨치는 데 나는 필요하지 않아."
"당신이 나를 구했어요."
"넌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목숨이었다. 살아야할 운명이 살아가는 건 당연한 이치야."
당연이란 말이 브루스의 입에서 들리자 너무나도 낯설게, 지독하게도 독선적이게 들렸다. 하지만 딕은 담담히 그의 말을 받으며 되물었다.
"그럼 나를 버릴 수 있어요?"
브루스가 한 번 숨을 급하게 삼켰다.
"당신 입으로 말해줘요. 날 버릴 수 있나요?"
"...그만."
"당연히 살아가야할 아이가 당연하게 살아서 여기에 있어요. 그럼 당신은 당연하다며 날 버릴 수 있나요? 다음번엔... 내가 죽게 내버려둘 수 있어요?"
"그만!"
브루스가 단단히 잡힌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하며 고개를 모로 돌린 채 외쳤다. 소중한 이의 죽음을 지켜보고 그것을 내면에 깊이 담아둔 브루스가 상실에 대해 얼마나 겁을 내고 있는지 딕은 자기 일처럼 알고 있다. 어둠 속에 흩어지는 브루스의 등을 지켜보면서 딕은 내일은 해가 떠오르는지 같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에조차도 쉽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딕은 놓쳐버린 손을 몇 번이고 계속 잡으며 그를 잔인할 정도로 놓아주지 않았다. 딕의 눈앞에는 지금 감정의 맨살을 드러낸 브루스가 있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반사적인 공포로 치솟은 분노도 아니고, 어쩌다가 우연히 딕이 보게 된 브루스의 내면도 아닌 그동안의 브루스가 쌓고 쌓았던 딕에 대한 마음이 지금 딕의 앞에 아픈 진피를 드러내며 벗겨지고 있다. 브루스는 딕을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지만 오히려 딕의 방안으로 더욱 향하게 될 뿐이었고 그나마 가던 걸음도 침대 끝에 부딪혀서 그 위에 그대로 걸터앉고 말았다. 비단 당황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딕은 어딘가 둔한 움직임을 보이며 소극적인 반항을 하는 브루스가 어제든, 그보다 전이든 언젠가에 큰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추측했다. 그걸 기회를 삼는 자신이 지독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자신이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이기를 버리고 숲 밖에서는 그림자로서만 존재하기로 선택한 이의 손에서 자라났다 생각하면 수긍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버릴 수 없으면 밀어내지 말아요."
도망칠 길을 대신해서 자꾸만 시선이라도 비껴나가려는 브루스를 딕이 그의 차가운 뺨을 잡아 세우며 도장을 찍듯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딕의 손을 떼어내려는 듯 손목에 손을 걸친 브루스의 움직임이 뚝 멎고 말았다.
"너는"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괴롭게 말을 뱉는 브루스의 얼굴은 분명 아팠는데 딕은 저도 모르게 또 그런 브루스의 얼굴 위에 입술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브루스는 질끈 입술을 짓씹고, 멈춘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나처럼 되어선 안 돼. 저 바깥이 네 세상이란다. 모르겠니? 여긴, 이런 곳은 망령의 허상일 뿐이야."
"당신처럼 되는 건 세상 그 누구도 못해요. 딕 그레이슨이 어떻게 브루스 웨인이 돼요."
"말장난 하지 마렴. 바로 들어."
"말장난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난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은 내가 딕 그레이슨인걸 막을 수 없어요. 내가 결국 바보 같은 짓을 한 걸 보면 알잖아요."
딕이 브루스와 이마를 마주 대며 소곤소곤 작게 이야기했다. 차갑기만 하던 뺨에 열꽃이 피어나는지 희미하게 익숙하지 않은 온기가 돌았다. 시린 눈동자 속에 그와 사뭇 다른 온도를 띤 파란 눈 한 쌍이 숨김없이 비춰지고 있었다. 딕은 제 눈을 브루스가 더 똑바로 봐주기를 바라서 자신을 자꾸만 파헤쳐 보였다.
"나에 대해서 혼자 걱정하고 보호할 생각 그만 둬요. 당신이 나를 버릴 수 없다면, 포기해요. 날 옆에서 떼어놓지 말아요."
당신 곁에 있게 해줘요. 딕이 말을 잃은 입술 위에 접했다. 희미한 온기와 꿈도 꿔보지 못한 부드러운 감촉이 금방 녹아버리는 싸락눈마냥 아주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딕의 가슴은 그것만으로도 쿵, 쿵 튀었다. 한동안 말을 삼키던 브루스가 한숨처럼
"...어째서."
하고 앞뒤가 분명하지 않은 단어를 입안에서 끌어냈다. 딕은 찡그려 웃었다.
"어째서일까요."
딕은 그저 그 옛날 자신의 망막 저 너머에 아로새겨져버린 브루스의 눈동자를 마주볼 뿐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본 그의 눈은 투명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들지 않았기에 보이는 공허가 아니라 온갖 시간들이 겹치고 겹쳐서 만들어진 결정이었다. 분명 딕은 이 눈동자 안에 또 하나의 상처를 새겨 넣어 더 날카로운 가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걸 딕은 지금에야 알았다. 목에 팔을 두르며 딕이 브루스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으며 사실 제일 먼저 브루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입만 겨우 달싹이듯 속삭였다.
"...미안해요."
아주 한참이 지난 후에야 브루스의 손이 딕의 등 위로 겨우 닿을 듯 올라왔다.
성 바깥은 매서운 겨울이 흩날리고, 그럼에도 숲은 그 사이사이로 수줍게 아직 순도 제대로 돋지 못한 봄을 품고 있다. 오래전부터 겨울이 봄을 꿈꾸었을 때 아이는 제 품에 씨앗을 안고 결코 놓지 않겠노라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얼어붙은 저 아래에서 싹이 돋아나는 소리를 들었다. 언젠가의 봄이 오는 소리였다.
-쓰고 싶었던 장면1) 밤에 잠깐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딕이 커다란 창의 밑의 틈을 통해 그림자가 세어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고, 그 그림자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낮은 달빛에 닿는 순간 꼭 알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하얀 몸으로 바뀌어감. 그리고 얼마 후에는 창틀의 그림자를 짊어지며 숨을 몰아쉬는 알몸의 브루스를 알프레드가 나타나서 옷을 둘러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쓰고 싶었던 장면2) 아예 브루스는 겨울의 주인 같은 거고, 딕은 봄의 영토 끝자락에서 자는 주민이라 조금 요정? 스러운 건데 딕이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는 나무가 피워낸 꽃(매화?)을 가지와 함께 꺾어서 조르르 브루스에게 가져가는 것. 그러면서 딕은 자기가 브루스에게 그렇게 낯선 존재가 아니라고, 또 자기는 봄의 끝에서 나서 매서운 추위쯤에야 강하다고 하면서 브루스 주위를 맴맴 도는 것. 딕의 이야기에 브루스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돌려보내지만 브루스는 이때 받은 꽃가지를 매우 소중히 보관해 둠.
-쓰고 싶었던 장면3) 눈의 여왕au 스럽게 해서, 딕의 입맞춤에 얼음가시가 녹아 톡, 톡 무표정한 얼굴에서 눈물만 흘리는 브루스. "봐봐요, 브루스는 여전히 브루스잖아요."하면서 그 모습을 보고 딕이 울면서 웃음.
-그렇다고 합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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