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숲은 강물의 냄새가 짙게 밴 안개로 덮여있다. 풀벌레들조차 제 울음소리를 삼가는 숲은 달이 나오지 않은 밤의 장막 속에서 적막하다. 클락이 마른 잎과 떨어진 나뭇가지를 파스락파스락 밟을 때마다 걸음걸음이 유독 도드라졌다.
클락이 강을 건너 고담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저문 지 한참은 지난 때였다. 클락은 머릿속에서 길을 떠올리며 도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나루터에 있는 단 하나뿐인 여인숙의 입구 앞 의자에 삐딱하니 앉아있는 용병과 입씨름을 하던 주인이 클락을 불러 세웠다. 들어와 보라는 그의 손짓에 따라 클락은 길도 확인할 겸 여인숙으로 들어섰다. 잠시 바닥에 짐을 내려놓은 클락은 제 주머니 안에 구겨져 있던 지도를 꾸물꾸물 펴고 어둑하게 밝힌 실내 촛불 아래서 그것을 짚으며 주인에게 제가 가고자하는 길을 물었다. 뺨에 기다란 흉터가 있는 주인은 클락의 말을 성대하게 비웃고는 말했다.
"아서요, 아서. 형씨가 이 밤에 무슨...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금 받을 테니 오늘 밤은 묵고 가쇼."
"길을 서두르고 있거든요... 잠깐, 두 금이요? 1박에요?"
주인의 제안을 거절하던 클락은 문득 그가 부르는 금액에 놀라 되묻고 말았다. 도통 이런 규모나 위치의 여인숙에서 부를 법한 금액이 아닌 탓이었다. 왕성 근방에 웬만한 여관도 한 금정도면 이틀은 묵을 수 있었다.
"오늘 같은 삭일은 그러우. 문 앞에 용병까지 고용했는데 우리도 남기곤 살아야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용병은 지금 술에 취해서 아까전만해도 여인숙 주인과 말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클락이 못미덥다는 듯 말을 흘리자 주인이 혀를 쯧 차고 "빌어먹을 팽."하고 욕을 했다. 왠지 자신이 다시 두 사람의 분쟁에 2차로 점화를 한 것만 같아 클락은 어색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클락은 힐끔 주인이 등지고 있는 벽을 보았다. 여관의 방 열쇠들이 걸려있는 판에는 그래도 꽤 많은 열쇠 자리들이 비어있었다. 여행의 속도나 비용의 합리성보다도 안전을 꽤하는 여행객들이라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기에는 그 머릿수가 어느 정도는 되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고담의 밤은 역시 녹록하지 못한 모양이다. 클락이 다시 짐을 어깨에 짊어 멨다.
"이봐요. 두 달 전에 형씨가 가려는 숲길에서 잘나가던 기사학교 출신 애송이가 죽었소. 정 그러면 한 금에 다섯 푼 받을 테니 묵었다 가쇼."
"고맙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빨리 도심에 가보고 싶거든요. 길은 이렇게 가면 맞나요?"
"서둘러 간다 해도 이 밤에는 움직여줄 마편도 없을 텐데 숲길을 통하겠다고? 걸어서?"
성의 없이 힐끔 지도를 확인한 주인이 콧방귀를 섞어 말하자 클락이 하하, 하고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주인은 삭일 밤이면 불법으로 독초나 몬스터를 채집하여 암시장에 내놓아 두둑한 가격으로 돈을 버는 상인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런 치들의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은 제 젊음이나 능력 따위를 믿고 이런 밤에 바깥을 나다닐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들이 대부분이곤 하다. 그도 아님 목숨보다 돈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야심가던가. 눈앞의 남자는 어수룩한 얼굴로 순하게 웃고 있었지만 글쎄, 사람은 겉보기로는 모르는 법이니까. 주인은 더 이상 참견은 말기로 하고 흥하고 날카롭게 웃으며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무가 베인 길로만 가쇼."
"고맙습니다."
클락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요즘에는 삭일에도 사건사고가 벌어지는 일이 그나마 덜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고담은 언제 그 사람의 객기가 찢겨지거나 토막 난 시신으로 결론 날지 모르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이런 변방에서는 용병도 제대로 구하지 못해 술꾼 팽을 고용해야할 지경이니까. 저 덩치 좋은 형씨가 여간 못미덥게 수그린 어깨를 하고 얼굴은 꼭 책만 뒤적이는 샌님마냥 너부데데한 안경에 수더분한 인상을 가지고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내일 아침은 다시 오랜만에 사람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숙박비를 두 금에 다섯 푼이나 세 금 쯤으로 올려도 한동안 불평하는 사람은 없을 테다. 주인은 괜히 불편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킁 하고 코를 씰룩였다.
여인숙 주인이 밖으로 나가는 자신의 등에 대고 혀를 끌끌 찬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클락은 그래도 굳이 숲길로 나아갔다. 귀동냥으로 들었던 고담을 둘러보기에 밤은 제격이었고 그것이 또 삭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문 앞에 보초로 서있던 용병은 퇴역군인 쯤으로 보였고 일반인보다야 위험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그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한도에서이지 누군가를 보호해줄만한 여력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을 아무리 여행객들이라지만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이 고담을 목적지로 오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런데도 사람들이 두 금 혹은 한 금 반씩이나 지불하고 발을 멈추어 투숙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왕국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고담은 산맥에서부터 내려온 숲과 동쪽 대륙으로 향하는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영지다. 예로부터 자연이 사납고 몬스터의 공격이 빈번하기로 유명한 고담에 대해 교과서나 지리서에서는 환경적인 요건 때문에 그렇다고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빈약한 텍스트보다도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오래된 전설을 더 신뢰했다. 내용인즉 처음 이 고담을 제 영토로 배분받은 초대의 영주가 자신의 공에 비해 별 볼일 없는 영지를 받은 데에 반발하여 영원한 부귀를 약속받고 고담의 땅을 악마에게 팔아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엄연히 왕국에 국교가 존재하고, 지방은 영주들이 돌보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왕이 모든 땅인 주인인 왕국에서 이런 불경하다 말할 수 있는 소문이 신빙성을 얻고 입에 오르내리는 데에는 고담이 '롱할로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대축일은 성인들이 신의 영광을 증명하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와 순례한다는 성스러운 날이었다. 그리고 그 전야는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새벽에 세상은 가장 어둡다는 옛말을 따라 정화된 날이 밝아오기 전 악귀들이 맹위를 떨친다는 할로윈이다. 고담은 마치 365일이 그런 할로윈과 같이 음산한 도시였으므로 롱할로윈이라고 불렸다. 오죽하면 근래 소문에는 이 고담을 지키는 것이 사제도, 헌터도, 치안병사들도 아닌 제 영역을 지키려고 날뛰는 몬스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달빛조차 없어 몬스터들의 기세가 더 왕성한 삭일에 숲길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소속원들이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해결사 길드에서 익히 들은 이야기들로 클락은 그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클락은 의뢰인에게 가기 전 고담을 꼭 둘러보고 싶었다. 혹시 클락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안전한 밤이 될 수 있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정도 숲길에 들어서자 클락의 뒷목이 따끔따끔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검은색의 농도차로만 분간되는 숲속에서 무엇인가가 클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간 걷던 걸음을 멈추면 그도 따라서 움직임을 멈추었고 느리게 걸음을 옮기면 그만큼 따라서 천천히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클락은 지금이 한밤이라는 점과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다는 점에 안심했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클락이 슈퍼맨으로 변하지 않은 채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힘을 이용해도 그것에 주목하고 의아하게 여길 사람은 없을 테니까. 최근에 들어서는 다이애나 프린스가 왕좌에 앉으면서 조금씩은 이종족에 대해서도 마냥 적대할 것이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공존해야한다는 논조가 나오고 있었지만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차별이나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클락은 혼혈이라고는 해도 용족의 피를 받은 하프 드래곤이었다. 지금이야 역사서 속 앞장에나 짤막하게 실린 이야기지만 인간과 한 번은 전쟁을 치르고 거기다 마계로 봉인된 대표적인 이종족인 용이 혼혈이라지만 버젓이 살아서 자신들의 사이를 돌아다닌다고 하면 좋아할 인간이 몇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클락은 보통은 어수룩한 여행 기고가 클락 켄트로서 지냈고 길드의 일을 할 때만 슈퍼맨의 모습으로 짧게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안경과 머리모양, 옷차림의 차이였지만 그래도 클락은 꽤 훌륭한 연기자라고 양어머니, 마사가 즐겁게 클락의 등을 두드려줬으니 클락은 자신의 행동에 용기를 가졌다.
얼마간 무언가의 염탐을 받던 클락은 제대로 길이 난 땅을 살짝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조용히 마나를 방출했다. 한 생물체가 자연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담은 마나는 몬스터나 이종족 사이에서는 서열의 지표로써 작용했다. 클락은 출생의 이유로 강한 마나를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고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종종 이런 일에 써먹고는 했다. 클락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서 어떤 경우에는 소모적인 싸움을 피할 수 있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저보다 강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웬만한 몬스터라면 한동안 얌전하게 제 둥지에서만 머물기 때문에 효과적이었다. 다만,
"그르릉."
모든 것이 숨을 죽인 가운데 낮게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락은 자신을 단지 지켜보고만 있던 시선이 살기를 담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그저 시선 때문에 따끔했던 뒷목이 이제는 얼음가시에 찔리는 것 마냥 싸늘했다. 아직 본능이 서열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어린 존재이거나 아니면 제법 그 자신도 강한 힘을 지녔을 경우에는 이런 일이 생겼다. 클락이 짐작한 바로 지금 자신을 따라오는 존재가 어릴 것 같지는 않았다. 클락은 어째서 그 고담의 숲이 이렇게도 고즈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숲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길목에 어둠을 틈타 활개를 치고 싶을 존재들을 기죽일 만큼 거대한 지배자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자기 영역 의식을 지닌 존재라면 그 취급이 조금은 더 까다로웠다. 마냥 날뛰고 공격적인 몬스터는 힘으로 저지하면 그만이었지만 영역을 지키는 존재는 물러섬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클락이 저를 지켜보고 있을 존재의 위치를 가늠한 뒤 조금 더 마나를 풀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새까만 무언가가 클락에게 덤벼들었다. 마치 밤하늘이 클락에게로 뛰어든 것만 같았다. 밤눈이 밝아 어둠 속에도 사위를 분간할 수 있는 클락의 눈앞을 그야말로 칠흑처럼 새까만 무언가가 뒤덮었다. 클락이 몸을 피하는 바람에 땅 위로 곤두박질친 무언가는 능숙하게 발을 땅에 디디며 클락을 노려본 채 자세를 낮추고 마주했다.
처음에 클락은 그가 검은 가죽을 피부로 지닌 가고일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차분히 그를 마주하니 그는 가죽과 같은 재질의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얼굴에는 험상궂은 카울을 뒤집어써서 유일하게 입가만 맨살을 드러낸 인간이었다. 목에서 내는 소리나 옷으로 감싼 체격으로 보았을 때 그는 남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위협적으로 울었다. 대치상태로 그를 관찰하던 클락은 그가 흡혈귀임을 짐작했다. 거대한 밤 짐승처럼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외형에는 큰 변형이 없었고 반면 얼핏 드러난 그의 송곳니는 짐승의 엄니처럼 뾰족하게 날이 서있었다. 무엇보다 불균형을 이루는 마나의 모양새가 흡혈귀의 종속자에 속하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것이었다. 삭일이 되면 원형에 의해 흡혈귀가 된 종속자들은 그의 피에 새겨진 자신의 것을 넘어선 마나에 의해 이성을 잃고 또 그것을 나눠 담을 여분의 그릇을 마련하기 위해 흡혈이라는 기행을 했다. 원형으로 하여금 주를 풀게 하면 보통의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흡혈귀가 흡혈귀라고 불리며 사람들로 사냥되고 제거되어야할 존재로 인식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몇 십 년 전 인간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종족에 대한 숙청이 한창일 당시에는 종속자를 이용해서 원형을 찾아내는 대대적인 흡혈귀 사냥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주를 풀기 전에 원형이 죽어 그의 대를 이어 원형이 돼 버린 종속자들 역시도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피의 사냥이 있던 이후로 흡혈귀와 관련된 사건은 드물었고 그만큼 헌터들 사이에서도 흡혈귀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과 마주한다면 이 흡혈귀는 바로 사냥될지도 모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이런 숲에서, 저런 차림으로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 같았다. 이성을 잃을지언정 얼굴은 그 자신 그대로일 테니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괴물인척 검은 옷을 뒤집어썼을 거라고 클락은 추측했다. 그래도 나름 이런 일에 대해 일정의 지식은 있는 이인 것 같았다.
"위험하니까 날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클락은 뻔히 그가 듣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차분하게 말했다. 역시나 역효과로 흡혈귀의 목울음만 더욱 날카로워졌을 뿐 그는 진정하지 않았다. 인간이었다면 벌써 발이 얼어서 주저앉았을 법한 살기를 덤덤히 받으며 클락은 고민했다. 인간보다도 짐승에 가까운 상태인 만큼 지금 그는 못해도 클락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존재임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저와 각을 세우고 클락이 틈을 보이기를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점이 클락은 자신의 친아버지, 학자 조가 남긴 서적과 클락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던 흡혈귀-종속자에 대한 것과는 조금 맞지 않아 의아했다. 거기다 단순히 그가 흡혈을 위해 클락을 노리고 있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것도, 그리고 클락이 마나를 방출한 다음에야 살기를 품기 시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처음 클락이 짐작했던 대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흡혈귀가 어떤 영토에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참을 서로를 마주보고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상태가 답답했는지 결국 흡혈귀는 다시 클락에게 달려들었다. 목을 향해 검은 손이 불쑥 뻗어져 나왔다. 장갑에 날붙이가 부착되어 있었던지 서늘한 무언가가 클락의 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아마 날이 닳아버렸겠지만. 클락이 뻗어진 손을 붙잡아 급한 대로 기절이라도 시켜볼 요량으로 명치를 노려 최대한 힘을 조절해서 그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흡혈귀는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클락의 어깨를 잡고 팔을 꺾으며 클락의 등을 발로 차 클락이 붙잡은 팔을 빼냈다. 정말 이성이 없는 건가? 순간 의심이 들 정도로 능숙한 대처였다. 그리고 흡혈귀는 다시 클락에게 달려들어 등 뒤에서 단단한 팔로 클락의 목을 조였다. 피 보다도 클락을 죽일 생각이거나 못해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목숨이 위험할 상황이었지만 클락은 침착하게 흡혈귀가 제 목을 조르게 내버려두고서 자신의 손을 세게 깨물었다. 찝찔한 액체가 비릿한 냄새를 풍기고 느리게 솟아나기 시작하며 손목을 타고 흘렀다. 이제 피 냄새까지 마주한 흡혈귀가 아주 난동을 부릴 거라고 예상하며 그가 제 손에 매달릴 거라 생각했던 클락은 오히려 그가 몸을 굳히며 반대로 클락에게서 멀어지려하자 더더욱 의아해졌다. 아니, 일단 그건 나중에 고민할 일이고. 팔에 힘을 풀고 뒤로 주춤 발을 빼는 움직임을 귀에 담으며 클락이 몸을 돌려 그대로 나무줄기에 흡혈귀를 몰아붙였다. 클락의 손은 벌써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클락은 제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그를 단단하게 붙잡고 한손으로 그의 턱을 억지로 고정시켜 입을 벌리게 했다.
"미안해. 하지만 협조해줘."
공격성이 절제되고 이만큼 통제되어 발현할 수 있다는 건 그가 이성을 잃은 후에 무언가를 공격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증거일 것만 같았다. 그가 숲에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익명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런 맥락에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더더욱, 클락은 이 흡혈귀를 도와야만했다. 클락의 팔뚝을 움켜쥔 흡혈귀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그의 장갑의 손가락 끝에 달린 뾰족한 날들이 서서 마치 짐승이 발톱을 세우듯 사납게 클락의 맨살을 파고들었다. 클락이 주먹을 꾹 쥐어 자신의 피를 흡혈귀의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고개를 도리질 치며 거부하려하자 클락은 죄책감이 들면서도 그의 목을 더 단단히 붙잡고 그가 그 액체를 삼키는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꼴깍 흡혈귀의 목울대가 울리고,
"잠들어."
클락이 자신의 피를 마신 흡혈귀에게 혈주(血呪)를 걸었다. 맞붙은 다리를 움직여서 어떻게든 클락을 차내려고 몸부림을 치던 흡혈귀에서 힘이 주욱 하고 빠져나갔다. 혈주는 오랜 옛날 조가 고안해낸 주술이었지만 근원은 흡혈귀가 어떻게 종속자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주술을 흡혈귀에게 걸고 있자니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마나를 혈액을 통해 직접 생물체에게 주입해서 그의 의지를 훼손하고 다루는 주술이었기 때문에 효과가 빠르고 강하다는 점은 좋았지만 클락은 이런 강제적인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잘 쓰지 않았다. 입술 끝에 클락의 피가 맺힌 흡혈귀를 조심히 안아서 나뭇잎으로 폭신한 땅 위에 잘 눕혀 놓았다.
이제 어떻게 한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다지만 이렇게 잠이 들어버린 상태의 흡혈귀를 숲 속에 방치해두었다간 영역을 노리고 있었거나 굶주린 몬스터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벌써 흡혈귀가 잠이 든 것을 알았는지 숲 속에서는 하나 둘 소심한 주민들의 울음소리가 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런 수상한 차림새를 한 이를 들쳐 업고 마을로 갔다가는 둘이 나란히 고발되거나, 사제에 의해 가슴에 말뚝이 박혀서 살해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클락이 이 고담으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의뢰인인 고담의 영주가 '박쥐'에 대해 언급해서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영주의 의뢰는 밤이면 나타나는 커다란 박쥐 때문에 도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조사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고담에는 이미 그의 으스스한 전설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감시탑이 있으므로 이 의뢰가 왜 자신에게 왔는지는 모르지만 떠도는 소문과 영주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감시탑은 쓸모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왕은 딱히 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어서 클락은 그들의 평가를 전부 믿지는 않았다.
오늘은 노숙을 해야 하나... 잠깐 별만이 멀리서 빛나는 하늘을 본 뒤 흡혈귀 옆에 털썩 주저앉은 클락은 자신이 잠재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러나 있는 턱선이 반듯해서 그것만으로도 클락은 그가 굉장히 잘생긴 얼굴일거라고 생각했다. 내일 아침이 밝으면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 우선 이른 아침이 되면 도심 입구 정도까지 그를 옮겨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것을 가장한 뒤 그에 대해 몇 가지 묻고 난 후 의뢰인을 만나고 슈퍼맨으로 그의 문제를 돕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짧게 아침의 일정을 생각하는 클락에게 가볍고 작은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휫휫, 피르르"
마치 휘파람 소리처럼 클락의 눈앞에서 새가 울었다. 클락은 그 작은 새의 깃털이 푸르다는 것을 알았다. 새는 잠깐 제자리에서 포르르 작게 날갯짓을 하다가 클락에 잘 눕혀 놓은 흡혈귀의 위로 다가가 그의 주위를 몇 번 빙글빙글 돈 뒤에 다시 날아올라 휫휫, 맑게 울면서 숲 속 어디론가 날아갔다. 작은 새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클락은 그저 눈만 껌뻑였다. 한참 그러고 있자니 그림자 속에서 파란 새가 재차 튀어나와 이번에는 클락의 머리를 콕콕 쪼았다.
"따라오라는 거야?"
이 사람을 데리고? 클락이 엉거주춤하게 흡혈귀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묻자 피르르 새가 대답하듯 노래했다. 아무리 클락이 이종족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는 해도 그렇다고 그게 다른 생물체와 대화마저 통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클락은 자그마한 날짐승이 가질 법하지 않은 응축된 마나를 두른 이 새가 아무 의미 없이 그와 흡혈귀의 앞에 나타난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먼저 날아가지 않고 새는 클락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를 기다리듯 그 자리에서 있었다. 클락은 땅에 눕혔던 흡혈귀를 들쳐 업었다. 잘 단련된 몸이 제법 묵직했지만 클락에게는 별 짐이 되지 않았다. 클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새는 어딘가로 앞장서서 날아갔다.
밤의 어둠을 가르며 나아가는 도중 새는 클락이 저를 잘 따라오는지 묻듯 간간히 휫휫 하고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클락은 반사적으로 "가고 있어."하고 답을 했다. 그러기를 얼마간, 새까맣기만 하던 시야가 조금 탁 트인다 싶더니 클락의 앞에 커다란 성이 나타났다. 영주의 성은 고담 도심에 위치해있었고 어느 귀족의 별장이라기에는 설마 이 숲 속에 집을 지을 배짱 좋은 인물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클락은 지금 자신이 다다른 성이 고담의 감시탑, 바로 웨인의 성임을 알았다. 클락은 잘 걷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흡혈귀를 데리고 이 밤중에 고담 대대로 헌터를 종사해온 웨인에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전대의 웨인부부가 불운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뒤 감시탑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않으며 그들의 외동아들도 종종 행방불명이 되기 일쑤인 방랑벽 있는 철부지라고는 듣고 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웨인이었다. 흡혈귀를 보고 바로 제거하겠다고 덤벼들면 어떡하지? 그리고 이 밤에 잠이 든 흡혈귀를 업고 숲에서 불쑥 튀어나온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하면 좋지? 클락은 당황해서 한참 벽돌 하나하나에 끼인 이끼마저 위엄 있어 보이는 성을 멀거니 보았다. 그때 갑자기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야옹."
한참 성을 올려다보던 클락이 갑자기 새어나온 빛에 놀라 고개를 내려 보니 성문 앞에서 배에는 하얀 털을 가진 검은 고양이가 신기할 정도로 단정한 자세로 앉아 차분하게 울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작은 몸집의 고양이가 저 커다란 성문을 소리 없이 연건지 클락은 알 수 없었지만 혹시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한 새와 저 고양이는 웨인이 감시 임무를 맡긴 사역이 아닐까 싶었다. 역시 소문보다는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멍하니 서있는 클락에게 고양이는 한 번 크게 꼬리를 휘저으며 다시 야옹하고 울었다. 들어오라는 뜻일까? 그의 뜻을 짐작한 클락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망설이는 클락을 바라본 고양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하게 클락의 발치로 다가왔다. 그리고 클락의 어깨 아래로 늘어뜨려진 흡혈귀의 검은 망토를 고양이는 제 작은 앞발로 톡톡 두드린 뒤 다시 클락을 보며 괜찮다고 호소하듯 야아옹 하고 또박또박 운 다음에 성문을 향해갔다. 성문 앞에서 클락을 쳐다본 채 서있는 고양이를 보며 클락은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클락의 근처에서 날고 있던 파란 새가 클락의 머리를 콕콕 쫀 다음에 고양이에게로 날아가 그의 머리 위에 앉아 클락을 바라보았다.
에라. 클락이 결국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만약 저 둘이 웨인의 사역이라면 어찌되었건 클락과 이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가 웨인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어차피 웨인과는 이 고담에 온 이상 한 번쯤 대화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예정보다 그와 대화할 주제가 많아지기는 했지만 어쩌면 이걸 계기로 그의 인품이나 성향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왕국의 왕이자, 클락의 친우인 다이애나는 웃으면서 언젠가는 결국 그와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가 이 흡혈귀를 공격하려 든다면 클락이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도 클락의 선택에 한 몫을 했다. 클락은 조심조심 성문 안으로 들어섰고 클락이 현관 문턱을 넘자 뒤에서 조용히 문이 닫혔다.
"실례합니다."
일렁이는 횃불들로 밝은 성 안에 클락의 목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성 내부는 역시 커다랬고 오래된 장식품들이 죽 길목에 나열되어 마치 고급스러운 화랑 같았다. 그리고 많은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특히 젊은 부부의 초상화가 많았다. 지금의 웨인은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아마도 전대의 웨인부부일 것이다. 다만 젊은 부부의 초상화와 그들과 함께 있는 어린아이의 그림은 있어도 이제는 성인이 되었을 웨인 본인의 초상은 보이지 않아 조금 의아했다.
새를 머리에 얹은 채 망설임 없이 쭉쭉 나아가는 고양이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난 클락은 어느 방에 다다랐다. 침실이었다. 그것뿐이라면 모를까 지금 방의 위치나 규모, 내부 인테리어 등을 고려했을 때 이 방은 그냥 방이 아닌 주인의 침실이었다.
"어..."
클락이 황망한 얼굴로 고양이를 보았지만 고양이는 아랑곳 않고 커다란 침대 위에 겁도 없이 폴짝 뛰어올라 제 꼬리로 포근해 보이는 이불을 탕탕 두드렸다. 파란 새도 침대 헤드 장식에 올라서서 피르르 맑게 울었다. ...웨인의 사역이 아니라 흡혈귀의 친구였던 건가? 클락은 웬 어린아이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둘의 행태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아무리 평범한 동물이 아닌 것은 알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순순히 숲에서 만난 새와 성 앞에서 마주친 고양이의 말... 이 아니라 행동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가 있을까? 작은 혼란에 휩싸인 클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냐아―"
고양이는 그저 태평히 길게 울 뿐이었다. 역시 주인 방은 좀 그러니까 어디 적당한 방이라도 직접 찾아가는 편이 나을까. 하지만 지금 방을 나갔다간 왠지 눈앞에서 저를 담담히 보고 있는 고양이가 한밤 내내 토를 달 것만 같았다. 도대체 저 작은 동물이 기껏 한다 해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클락은 이상하게 묘한 확신이 들었다. 클락은 작게 한숨을 쉰 뒤, 어차피 주인과 마주칠 거라면 괜히 숨어 있던 것처럼 마주하기보다 정면에서 마주치는 게 나을 거라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궁색한 이유를 붙이며, 솔직히 조금 뭐에 홀린 듯 떠밀린 기분으로, 고급스런 침대 위에 흡혈귀를 눕혔다. 한참 클락이 어깨에 들쳐 멘 채 있던 흡혈귀를 안정된 자세로 자리에 눕히자 고양이는 만족한 듯 야옹, 하고 작게 울더니 마치 흡혈귀에게 잘 자라 인사하듯 앞발로 톡톡 그의 가슴을 두드리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새도 휫휫 울며 몇 번 통통 제자리에서 뛰면서 흡혈귀를 내려 보더니 다시 고양이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무척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익숙한 동작이었다.
맙소사. 클락은 혹시 어쩌면 방랑벽이 있는 웨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이들이 이 성을 점거한 것은 아닌지 하는 황당무계한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어쩐지 피로가 몰려들어 클락은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바닥으로 내려온 고양이는 이제 클락의 정강이를 톡톡 두드린 다음 문 밖으로 향했다. 제 친구를 재운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고양이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경쾌해보였다. 아마도 클락더러 따라오라는 뜻인 것 같았지만, 무려 클락에게 다른 방을 안내해주려는 모양이었다, 클락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이제 클락은 의심 없이 고양이가 제 말과 동작을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여기 있을게."
혹시라도 도중에 돌아온 주인에게나 아침이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면 분명 당황할 흡혈귀에게 누군가는 설명을 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다. 클락은 침대 옆에 있는 제법 커다란 소파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잠깐 클락을 바라보던 고양이는 작은 머리를 자신의 머리 위에 앉은 새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한 번 꾸벅 숙여 보이고는 단정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과 곤한 숨소리만 내는 흡혈귀를 번갈아 바라본 클락은 한숨을 푹 쉰 뒤 어기적어기적 소파로 걸어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혈주는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 끝이 난다. 클락은 흡혈귀가 저 고양이나 새에 대해 아는가 모르는가는 둘째로 클락의 존재에 대해서 경계할 그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하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삭일에 있던 일에 대해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테니 클락의 정체를 어떻게 생각하기보다도 자신이 평범한 사람과 지금 같은 상태에서 마주쳤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할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닐까 불안해할지도 모른다. 종속자가 된 것이 그의 잘못이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클락은 자기 스스로가 너무 감정적으로 속단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종족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소 깊이 파고들어 생각하는 건 클락의 오랜 버릇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웬만한 여관의 짚과 가축의 털로 만든 침대보다도 훨씬은 폭신한 소파에 누우니 문득 클락은 1박에 두 금을 받던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과 지금 웨인 성에 있는 주인의 방에 놓인 소파에서 한숨을 자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더 편안한 밤일지 궁금해졌다.
"잘 자."
클락은 그의 습관대로 인사를 했다. 역시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클락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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