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au 입니다.
전에 있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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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두터운 장막을 내릴 즈음 도시의 후미진 곳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야시장이 열린다. 사실 말이 좋아 야시장이지 이때 이루어지는 거래의 내역들을 살펴보자면 독초는 예사이고 저주받은 유물이나 혹은 저주 그 자체, 인격체를 포함한 온갖 생물들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그러니 말을 바로하자면 야시장이 아니라 암시장인 셈이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더더욱 본능에 거침없어지는 건지, 아니면 빛이 그나마 두려움을 되새겨주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고담이 낮이라고 해서 안전한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밤의 도시와 비교하자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방금 전 사람의 손바닥만 한 요정들을 유리병에 가두어 눈요기 혹은 주술의 재료로 판매하던 가판대를 본 배트맨은 상인을 붙잡아 으른 다음 꽁꽁 묶인 그의 코앞에 악에 받친 요정들을 풀어줬다. 모든 생명과 친화력이 높은 종족인 만큼 극단적인 일을 하지는 않지만 그게 그들이 자신들이 당한 수모에마저 너그럽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니 얼핏 들려온 비명으로 짐작하기에 상인이 한 며칠정도는 몸을 사리게 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배트맨은 언제나 그렇듯 그가 목표로 한 사냥감을 찾아 그 자신이 그림자가 되어 어둠 속을 헤집고 다녔다. 얼마쯤 그러고 다녔을까 이제 막 청년의 티가 나기 시작한 소년을 붙잡고 잔뜩 눈을 부라리며 억지로 독초 한 움큼을 들이밀며 팔려고 하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의 허름한 옷에 달린 주머니 한쪽이 두둑한 것을 보면 오늘이 월급날이거나 수당을 받는 날인 모양이었다. 배트맨은 그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가 제 그림자를 부풀리며 남자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한참 남자에게 잡혀 협박 섞인 호객을 받고 있던 소년은 그런 박쥐의 등장에 먼저 눈치를 채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강한 힘으로 남자를 뿌리쳐 그의 집을 향해 냅다 도망쳤다. 그제야 수상한 기척을 알아차린 남자는 조금 굳은 동작으로 느리게 살금살금 뒤를 확인하더니 히끅, 딸꾹질과 비슷한 소리로 숨을 삼킨다.
“약쟁이 조지.”
사내의 두려움을 밝히기에는 아직은 턱없이 모자란 달빛마저 감추며 길바닥으로 내려앉는 무거운 안개 같은 목소리가 조지의 발목을 휘어잡는다. 목뒤로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속이 울렁거려서 조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잘 말린 환각버섯을 한 움큼 입 안에 쑤셔 박고 싶어졌지만 그도 이 바닥에서 한두 해 일을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물 여물로 위를 위장하고 아래에는 온갖 독초가 있는 짐수레를 그를 지켜보고 있는 박쥐에게 내던져 버리고-정말 귀한 독초들은 그의 품속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는 바람 소리를 닮은 가죽의 펄럭임이 바투로 들린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신이시여, 놈에게 날개를 달아주다니 댁은 정말 미친놈임에 틀림이 없다! 조지는 끈질기게 뒤에 따라붙는 커다란 박쥐의 기척에 쫓겨 그저 정신없이 내달렸다. 피가 빨릴지, 가죽이 벗겨질지, 눈알이 뽑힐지, 가고일 탑에 거꾸로 매달릴지 알 수 없지만 박쥐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이상 평온한 잠자리는 글렀다. 달리면서도 자꾸 힐끗힐끗 뒤를 바라보며 확인한 박쥐는 조지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커다랗게 보여서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다 조지는 박쥐로부터 벗어나기에 급급해 지향 없이 달린 나머지 막다른 골목의 끝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벽돌담에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조지는 아연한 얼굴로 기어 올라갈 구석도 보이지 않는 높다란 벽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악귀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박쥐가 있다.
“저, 저리,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주, 죽, 죽일 거야!”
조지는 비틀비틀 벽에 딱 붙은 채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비하면 한없이 빈약해 보이는, 그러나 날만은 산소리처럼 서있는 칼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움켜쥔 채 애원하듯 을렀다. 하지만 박쥐는 오히려 한 발 더 그의 앞으로 다가온다.
“지난 밤, 네놈이 달그림자를 팔았다더군.”
“모, 몰라. 나는, 나는 아무것도. 나, 나는 기분 좋아지는 잡초들을 캐서 아픈 사람들을 돕, 돕고 있―”
벽에 철썩 붙어-그 와중에 벽이 무너지기를 바라는지 칼을 쥐지 않은 한 손으로 계속 돌을 긁으면서- 조지는 덜덜 떨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배트맨을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 조지의 손목을 내리치며 칼을 떨어트린 뒤 멱살을 틀어잡았다. 배트맨은 조지의 얼굴에 바짝 자신의 그림자를 대며 낮게 말했다.
“‘달그림자’ 말이다. 네놈의 공급처인 허수아비도 모른다더군. 누구에게 받았지?”
“몰라! 모른다고!!”
조지는 고개를 바쁘게 도리질하며 발버둥 치면서 소매 안쪽에 숨겨둔 송곳을 그림자에 뒤덮여 형체가 분간이 가지 않는 박쥐의 몸에 냅다 꽂았다. 조지는 날붙이가 박쥐의 몸 어디엔가는 분명하게 박혀 들어가는 감각을 손끝으로 느끼며 안도와 희열에 차 고개를 들어 괴물 같은 박쥐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박쥐는 동요도, 흔들림도, 고통도 없이 그저 조지를 노려보며 오히려 무어가 재밌는지 비죽 입가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조지의 얼굴에서 핏기가 아주 가셨다.
“일을 어렵게 만드는군.”
낮은 목소리가 어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리고 조지는 멱살을 잡힐 채 그대로 맨땅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아악! 땅에 박혀있던 제법 커다란 돌멩이가 등에 박힐 듯이 부딪혀서 조지는 큰소리로 꽥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물론 그의 비명을 듣는다 해서 고담의 누군가가 조지를 도와주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웨인! 웨인의 온실이라고 했어!”
“누가―”
아까전의 타격으로 피를 튀겨가며 헐떡이는 조지가 비명처럼 외쳤지만 배트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멱살을 더 단단히 틀어쥐며 그의 목을 바짝 들어 올려 물었다. 그때, 어두운 밤하늘 저편 어디선가 푸르른 바람이 불어 조지를 낚아챘고 사내는 갑작스럽게 찾아든 속도감에 정신을 잃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손에 들린 찢긴 윗옷자락을 보다 그것을 바닥에 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골목의 끝에 자신과 비슷한 덩치의 누군가가 굳건하게 서있는 것을 본다.
“그는 경찰서 앞으로 보냈어. 주머니에 독초가 들었으니 증거도 그거면 충분하겠지.”
슈퍼맨이 어둠을 가르고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브루스는 안 그래도 송곳이 박힌 옆구리에서 나는 피와 조지가 얼굴에 튀겨댄 피로 후각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상태라 성대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지만, 바로 이것이 알프레드 교육의 힘이랄지 점잖게 그 충동을 꾹 내리 눌렀다. 실은 상대할 가치도 마음도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브루스는 슈퍼맨을 그대로 지나쳐 새로운 단서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런 브루스를 슈퍼맨이 가로막아 섰다.
“...당신, 다쳤어.”
클락은 흐릿하게 밤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피 냄새와 그 냄새의 근원지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려면 이런 모습으로 고담의 밤거리를 들쑤시고 다니는 인물의 몸이 성할 거라고 이 순진한 작자는 생각했던 건가. 브루스는 웃음도 나오지 않아 그대로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슈퍼맨을 지나쳐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슈퍼맨이 손으로 브루스의 팔을 붙잡았다. 거기서 인내심이 바닥나고만 브루스는 그의 팔을 붙잡아 그를 바닥에 힘껏 업어 쳐서 내던졌다. 하지만 슈퍼맨이 땅바닥으로 던져지는 중에 브루스를 붙잡고 끌어내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브루스는 슈퍼맨의 몸을 방패삼아서 최대한 몸에 오는 충격을 덜어냈다.
“그간 당신 하는 걸 지켜봤어.”
“착하군. 계속 지켜보고만 있지 그랬나.”
“당신이 하는 일은 지나쳐.”
브루스는 한쪽 무릎으로 슈퍼맨의 가슴을 짓누르며 어느 때보다도 내리깐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내 단서를 그렇게 뺏어다 던져두었나?”
“조금만 잘못했으면 그는 허파를 다쳐서 죽을 뻔했어.”
“죽이진 않아.”
“계속 그렇게 내버려두다간 죽을 수도 있어! 거기다 당신 사람들을 고문하잖아!”
쯧, 박쥐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클락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우선 박쥐의 발목을 잡고 일어서서 그의 균형을 무너뜨려 움직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일단 박쥐도 옆구리에 송곳이 박힌 부상을 입고 있다. 클락으로부터 도망가거나 계속 이 도시를 활보하게 두었다가는 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고담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리 클락의 움직임을 눈치 챈 박쥐는 남은 다리로 클락의 턱을 걷어차려고 했다. 잘못하면 그의 뼈가 으스러질 수도 있어서 클락은 할 수 없이 그를 놓아주었다. 클락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상당한 몸으로도 용케 매끄러운 공중돌기를 하고 땅위에 조용히 착지한 박쥐는 금세 곧은 자세로 선다.
“나를 방해하지 마.”
“당신이 도시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어. 도시민들이 겁에 질려있다고”
“죄를 지었으면 두려워해야지. 허튼짓을 하고서 발 뻗고 자기를 바라는 게 가당한가?”
“범죄자들뿐만 아니야! 당신이 정말 누군지 모르는 선량한 사람들은 박쥐가 그저 미치광이인지, 이종족인지, 몬스터인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다고. 언제 자신들도 공격받을지 모른다고 말이야.”
“슈퍼맨이면 사람이 멋대로 품는 불안도 거두어갈 수 있는 모양이지?”
브루스가 비아냥거리자 슈퍼맨의 얼굴이 좀 더 매섭게 굳었다. 시간낭비군. 그렇게 판단한 브루스는 재고의 여지없이 빨리 이 골목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 브루스에게로 골목 벽에 부딪혀서 반향이라도 하는 건지 어딘가 더 크게 들리는, 그러면서도 매우 낮은 슈퍼맨의 목소리가 성큼 다가온다.
“당신이 하는 건 그냥 힘으로 억누르는 것뿐이야. 이런 건 끝이 없다고. 거기다 영주는 당신을 수배하고 있어. 그냥 잡겠다는 게 아니라 죽이고 싶어 해. 당신의 의도가 어떤가는 상관없이 도시가 당신을 적으로 본다고. 그래도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울 거야? 그러다 당신의 힘에 미치지 않는 일이 생기면 그땐 어쩔 생각이지? 계속 이러다가 당신은 죽고 말아. ‘웨인’.”
그가 말을 하건 말건 발길을 돌려 나가던 박쥐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본 그는 클락에게 비스듬하게 웃으며 툭 던지듯이 이야기한다.
“살아있는 건 결국은 죽어.”
비웃음이라지만 어쨌든 미소 진 얼굴로 뱉는 말치고 어떤 색도 온도도 없는 무기질적인 대꾸가 클락은 기가차서 허, 하고 헛웃음을 치고 만다.
“당신에게는 웨인이라는 자리가 있잖아. 그 자리는 보통의 사람들이 있는 곳과는 달라. 힘을 가지고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자리라고. 정작 그런 자리는 비워두고서 이런 일을 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당신은 국왕의... 다이애나의 신뢰에 이런 식으로 답할 생각이야? 당신의 부모님이 이뤄온 것을 전부 방기하고 박쥐가 될 셈이냐고.”
클락이 물었다. 웨인의 얼굴에서는 이제 비죽한 웃음조차 남지 않고 어둠과 닮은 침묵만이 떠올랐다. 완전히 등을 돌린 그는 아무 감정도, 심지어 분노마저도 들어있지 않은 목소리로 툭 말을 던진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여기서 나가.”
그리고 그는 홀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신을 돕는 게 내 일이라고.”
클락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미 그의 말을 듣지 못할 상대에게 토로한다.
"정말... 내가 가도 괜찮을까?"
클락은 테이블 위에 있는 밀랍으로 봉인된 봉투를 바라보며 어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슈퍼맨이 받은 의뢰에 대해서 몸을 사리는 법이 없는 클락이기 때문에 다이애나는 조금 신기한 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길드에서 연락을 받고 왕의 서재로 들어온 클락은 자신을 부른 것이 '고담'이라는 특수한 지역이라는 데 놀라면서도 주저하고 있었다.
"의뢰인은 당신을 지목하고 있어. 물론 싫다면 억지로 보내지는 않겠지만."
"싫은 건 아니야. 그냥... 아버지, 조엘의 서고에서 읽은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
"'용은 고담에 다가오지 말지어다'?"
클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애나는 준비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다음 이야기했다.
"그 지역은... 정확히는 '공간'은 여러모로 불안정하거든. 용이 나타나면 거기에 서식하는 생물들이 겁먹고 얌전히 있지는 않겠지."
"그럼..."
"하지만 클락, 당신은 용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반룡이야. 당신이 마나 조절이 뛰어나다는 건 내가 보증하지 않아도 클락 켄트 당신 그 자신이 증명하고 있고 말이지."
"박쥐의 소문은 아주 예전부터 듣고는 있었어. 근데 왜 지금 슈퍼맨에게 의뢰가 온 걸까?"
"그걸 당신이 알아봐줬으면 좋겠어."
다이애나는 잠시 눈을 내리깐 다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의뢰서가 담긴 봉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을 골랐다. 클락은 자신의 몫으로 준비된 차를 마시며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요즘 고담이 이상해. 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어.”
“웨인은 뭐라고 하는데?”
“아무 말도. 그는 필요하다 여길 때 외에는 입을 열지 않거든. 하지만 의회에서 파워스 백작이 굳이 새삼스럽지 않은 몬스터 습격 이야기를 꺼내든 걸 보면 무언가 그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북돋는 건 분명해. 거기다 이상한 살인들도 있었고.”
“추정시간이나 방식은 전부 같은데 장소가 한참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는 그?”
다이애나가 가볍게 고갯짓으로 동의해주었다.
“그는 신하로서는 듬직하지만 친구로서는 서운한 사람이라서 말이야. 곧 죽어도 앓는 소리는 안할 사람이거든.”
다이애나가 봉투를 클락의 앞으로 밀었다.
“당신이 그를 도와주었으면 해.”
“...돕는다고 해도 말이지.”
클락은 한숨을 푹 쉬며 손에 들고 있던 크래커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으로 클락은 식당이면서 맥주와 간단한 안줏거리도 팔고 있는 메리의 프라이팬에서 맥주 한잔과 크래커를 주문했다. 아직 식사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 안은 한산한 편이라서 클락은 테이블자리에 앉아 특유의 알싸한 냄새가 나는 맥주를 꼴깍 들이켰다. 알코올이 클락의 몸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클락은 발효된 곡물과 홉의 쌉쌀하고 미묘하게 향긋한 매캐한 냄새가 이따금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거기다 어딘 가에서는 맥주를 ‘마시는 빵’이라고도 부른다 하니 취하지 않는 클락으로서는 식사로 생각하고 마셔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부러뜨린 크래커를 클락은 우물우물 씹으면서 지금까지의 일들을 곱씹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클락은 파워스 백작의 의뢰를 받고 고담에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클락이 고담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다이애나의 의향이 크게 작용했다. 애초에 의뢰서를 다이애나가 직접 건네는 것도 드문 일이었고 JL에 고담과 관련된 의뢰가 들어오는 일은 더더욱 드문(클락이 알기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이애나는 고담에서 느껴지는 낌새는 물론이거니와 웨인에게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 박쥐도 한참 좇는 중인 듯한 달그림자의 유통에 대해서 번번이 ‘웨인’의 이름이 나오는 게 다이애나의 걱정은 역시 괜한 기우는 아닌 듯싶다. 뭐, 어찌됐든 바쁘게는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다이애나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 클락은 아주 조금 더 기분이 울적해졌다. 클락은 또 다시 한숨을 쉰 다음 맥주를 한입 들이킨다.
분명 이 도시는 어딘가 이상하다. 단순히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진 지형이라는 특이사항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고담의 땅 아래서는 마치 무언가가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클락은 이따금 목덜미를 서늘하게 하는 음습한 기운이라던가 클락의 예민한 감각을 설핏 스쳐지나가는 현기증, 이 왕국의 어느 곳보다도 크고 흉포한 몬스터 등을 보면 고담에 얽힌 불경한 전설이 진실은 아닐지라도 괜히 나오는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고담은 분명 다른 도시와는 이질감이 드는 공간이었다. 거기다 오늘 아침에 다녀온 의원에서 클락은 달그림자로 인한 중독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이 ‘아주 오래된 검은 용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부랑자, 떠돌이, 종족에 관계없이 환자를 돌보며 아직 아침인데도 벌써 조금 피로한 기색이 보이던 레슬리 톰킨스라는 이름의 의사는 “토마스가 잡초를 뿌리 뽑은 후 첨은 있는 일”이라며 염려 섞인 한숨을 쉬었다.
검은 용이라. 클락은 크래커를 입에 넣고 씹는다. 바삭바삭 소금기가 있는 잘 구워진 밀가루 반죽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그저 들으면서 클락은 다시 꿈에 대해 생각한다. 어머니, 어머니의...
“안녕하세요.”
불쑥 클락 앞으로 작은 인기척이 멈춰 섰다. 약간 오래된 것 같은 망토를 입고 있는 아이는 클락을 보며 붙임성 좋게 인사를 했다. 클락은 잠시 아이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안녕?”
하고 대꾸했다. 클락의 반응에 아이는 방긋 웃으며 클락이 앉은 테이블의 빈 앞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앉아도 돼요?”
클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짊어지고 온 가방을 테이블 귀퉁이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둔 뒤 반듯하게 앉아 클락을 마주보았다. 클락은 잠깐 무언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씀바귀 비슷한 풀을 보았다.
“나는 딕이에요. 리처드 그레이슨인데 대부분은 나를 딕이라고 불러요.”
“음... 그렇구나. 나는―”
“알아요! 슈,”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신나서 말을 꺼내려던 아이는 급하게 합 하고 두 손으로 자기 입을 꼭 가리더니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려 좌우를 살폈다. 그 다음 아이는 다시 말을 했다.
“여행기고가 클락 켄트 씨죠? 클락이라고 불러도 돼요?”
딕은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클락은 얼굴이 굳어서 다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삐그덕삐그덕 동작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모습으로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 미안해요. 클락은 날 처음 보겠네요. 음, 아! 이러면 알겠어요?”
흠흠, 아이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마치 휘파람을 불듯 가볍게 휫휫 하고 작은 새의 소리를 냈다. 긴장으로 잔뜩 굳어있던 클락의 얼굴이 이번에는 놀라움으로 번졌다.
“그때 봤던... 파란 새.”
“빙고!”
딕은 손가락을 튕기며 밝게 외쳤다. 클락은 반사적으로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빼며 이제야 편안하게 마주 웃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도시에 들어온 다음 이렇게 순수한 환대를 받는 것은 또 처음이다. 클락은 그 사실에 기뻐하면서 웨인과 안면 내지는 친분이 있을 것 같은 아이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이 한편 안도가 들었다. 클락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린 것을 예민하게 지켜본 딕은-딕은 어설픈 어른을 대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가 트였다- 이제 클락의 앞에 놓인 반쯤은 빈 맥주잔과 거의 먹고 사라진 크래커 접시를 보았다. 딕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클락, 그거 점심이에요?”
“응.”
“뭐 좀 더 시키지. 여기 샌드위치 진짜 맛있어요.”
“이거면 괜찮아. 그리고 난 고기를 안 먹거든.”
“고기 안 먹어요?”
클락이 고개를 끄덕이자 딕의 커다란 눈이 더 크게 뜨이며 구슬마냥 동그래졌다.
“근데 그렇게 커요? 우와...”
딕은 순수하게 감탄한 듯 탄성을 뱉었다. 클락은 쑥스럽게 자신의 콧등을 긁었다.
“그럼 고기 빼고 먹어요. 계란이랑 우유 같은 건 괜찮아요?”
“응? 응. 그건 괜찮은데―”
“주문이요!”
만류하려고 입을 떼는 클락을 꿋꿋하게 무시하면서, 이런 면을 보면 아이가 정말 박쥐의 지인인 듯싶다. 클락은 처음 고담에 도착한 밤의 일을 잠깐 떠올려보았다, 종업원에게 주문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클락의 앞에는 고기를 대신해 담백한 양념이 된 버섯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바나나 라씨가 차려져 있었다. 딕에게는 햄이 듬뿍 든 클럽샌드위치와 망고 라씨가 놓였다. 클락은 음식들로 북적해진 테이블을 눈만 껌뻑이며 바라보았다.
“알피가 손님이 그렇게 가버렸다고 진짜 진짜 아쉬워했거든요.”
“그렇지만...”
클락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살피는 딕의 기색을 보고서
“맛있게 먹겠습니다.”
하고 꾸벅 식사 인사를 했다. 그제야 딕은 얼굴을 환하게 밝아지며
“잘 먹겠습니다!”
따라서 인사했다. 딕은 붙임성도 좋고 밝고 명랑한 아이인 것 같다. 클락은 어젯밤 봤던 박쥐를 떠올리며 지금 딕의 성격이 환경에 의한 것보다 그의 본래 성정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짐작했다. 한동안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버섯이 질기거나 물컹거리지도 않고, 채소도 아삭아삭 신선했다. 빵도 푸석하지 않고 갓 구워서 나온 것처럼 맛있었다.- 클락은 딕으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 고담에서 여행자가 특히 조심해야할 장소라던가 가고일 석상 사이에 숨어 있던 진짜 가고일 이야기, 딕이 생각하기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고담의 멋진 장소에 대해서 들었다.
“클락은 책을 쓰죠? 여기저기 다니면서요. 그... 아, 바위산맥의 골렘 이야기! 진짜 재밌게 봤어요.”
“내 책 읽었어?”
클락은 반가운 심정에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딕은 고개를 크게 몇 번이고 끄덕이면서 답했다.
“네. 엄청 생생해서 글자를 읽는 데 꼭 직접 가서 보는 기분이었어요. 위치 설명도 잘 돼 있고 지형이나 유적의 유래나 역사적 맥락도 적절히 섞어서 서술해서 장소를 이해하는 데 엄청 도움이 돼요. 거기다 해마다 개정판도 나오잖아요. 브루스도 지리는 클락이 쓴 책으로 수업하기도 해요.”
“브루스면... 웨인?”
조르륵, 빨대로 음료를 마시던 딕이 클락의 갸우뚱한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라씨를 꼴깍 삼킨 다음 물었다.
“설마... 통성명도 안했어요?”
“음.”
클락은 멋쩍어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이름 물어볼 정신도 없었구나 싶다. 딕은 한숨을 푹 쉬며 조금 과장스럽게 한탄하듯 중얼거린다.
“맙소사. 요 근래 계속 삐쳐있길래 얘기라도 좀 나눈 줄 알았는데...”
삐쳐? 클락은 딕의 혼잣말 같은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서슬 퍼렇게 어둠 속에서 상대를 바라보던 박쥐의 얼굴이 생각났다. 클락은 단어와 떠오른 이미지의 부조화가 당황스러워 고개를 갸웃하니 기울였다.
“음... 어젯밤에 얘기를 하기는 했어. 참, 심하게 다쳤었는데 그는 괜찮아?”
“괜찮아요. 적어도 브루스 말로는요.”
딕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언가 생각하는지 딕은 입을 다물고 빨대로 휘적거리던 라씨를 다시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클락도 따라서 새콤한 요거트와 부드러운 바나나, 몇몇 향료가 섞인 음료를 마신다. 얼마간 그러다가 클락은 불현듯 딕이 등장했을 무렵부터 신경 쓰였던 것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딕, 네 가방에 든 그 풀들”
“아, 달그림자예요.”
딕이 가방을 툭 건들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달그림자는 고담에서만 나는 특유의 풀로 먹으면 마치 광대버섯처럼 환각, 환청, 구토, 마비 증세를 유발한다는 독초였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도 유통이 금지되고는 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전대의 웨인이던 토마스 웨인은 보다 강경하게 이 독초의 자생자체를 박멸하려고 했다. 레슬리는 토마스가 그것을 위해 사람에게 적대적인 식물의 주인에게 직접 찾아가기도 했었다고 했고 결과적으로 토마스는 달그림자를 고담에서 뿌리 뽑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게 갑자기 약 한 달 전부터 모습이 나타나서는 요즘에는 암시장에 퍼지기 시작하더니 고의든 실수든 이 풀을 복용한 사람들이 중독 증세로 의원을 찾아들고 있었다. 웨인의 동향을 지켜보자면 그가 지금 이 독초의 행방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독초의 유통에 웨인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 때문일 수도 있지만, 레슬리는 그럴 일은 없다며 잘라 말했다, 그게 단순히 가문의 명예나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상황이 이런 중에 영주는 슈퍼맨에게 박쥐에 대해 의뢰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판매는 물론 재배조차 단단히 금지된 독초를 가방에 한가득 담고 있는 딕을 보고 클락은 눈썹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이런 위험한 일을 시키는 거지? 그런 클락의 변화를 눈치 챈 딕은 클락의 앞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그의 주의를 환기한 뒤 싱긋 한 번 웃어보이곤 입고 있는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러자 클락의 눈앞에는 파란 눈이 장난기로 명랑하게 반짝이던 어린아이가 아닌 등이 살짝 굽은 작은 덩치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매부리코의 노인이 나타났다.
“보호마법이 걸려있어요.”
후드를 벗자 노인의 목소리가 아이의 목소리로 변하면서 동시에 다시 딕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클락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 딕은 어쩌면 클락은 제법 브루스와 죽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생글거리던 얼굴을 진지하게 고쳐 이야기했다.
“나는 브루스의 파트너예요. 훈련도 받고 있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고 있어요.”
아이는 어른스럽게 말했지만 클락은 그래도 영 시원치 않았다. 딕이 못미덥다는 게 아니라 결국 딕은 아직 많이 어린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딕이 워낙 단호한 얼굴을 해서 클락은 아이를 설득하려 들기보다 다른 화제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새로 변하는 것도 네가 한 거야? 다른 생물로 변하는 건 꽤 어려운 기술인데.”
“브루스가 그러지 못하면 성에 있을 수 없다고 했거든요.”
딕은 이제는 비어버린 유리잔 안쪽을 빨대로 긁어대다 무언가를 회상했는지 빙싯 웃었다.
“물론 내가 진짜 해낸 걸 보고서는 깜짝 놀랐지만요. 브루스는 마법을 쓸 수 없어서 내 독학이었거든요. 아마 브루스는 나를 블러드헤이븐에 위치한 기숙학교로 보내고 싶었던 거 같아요. 거기가면 마법이랑 다른 공부도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고... 난 제법 재능이 있거든요.”
딕이 조금 가슴을 내밀며 뿌듯한 듯 당차게 말했다. 클락은 가볍게 웃었다.
“학교가 좀 더 네 나이에는 어울리지.”
“브루스 원래 계획도 그랬을 거예요. 내가 혼자가 되고 다음날 웬 커다란 사람이 덜컥 찾아오더니 나를 돌볼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난 팔자에 없던 도련님이 되었는데... 뭐, 브루스가 날 발견한 덕이었죠. 브루스는 그냥 도시 구석에 유폐된 가문의 가주인양 하면서 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될 때까지 보호하다가 안전한 학교로 보내고 싶었던 거 같아요. 나는 마법사가 될지도 모르고, 기사가 될지도 모르죠.”
그리고 잠깐 말을 멈춘 딕이 클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딘가 자신을 보고 있다기보다 훨씬 그 너머, 다른 무언가를 보듯 강렬하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도 같은 모호한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박쥐를 보았어요.”
순간 시간이 뚝 멈춘 것만 같은 폐쇄감과 견고함이 클락의 숨을 멈추게 했다. 얼마동안 그런 침묵이 이어진 뒤 클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쥐가 고담에 필요하다고 생각해?”
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네.”
해가 저물고 어김없이 밤이 찾아온다. 그리고 밤이 드리운 어둠 속에는 오늘도 역시나 박쥐가 있다. 이 시간 즈음이면 종탑에 서서 산맥이나 강가에서 흘러드는 무언가는 없는지, 도시에서 특별하게 소란스러운 곳은 없는지 먼저 확인하는 박쥐의 일과를 클락은 어느 정도 꾀고 있다. 가만히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의 뒤로 클락이 조심히 내려앉자 낮은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말한다.
“슈퍼맨도 참 한가하군.”
“어린아이를 너무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거 아니야?”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던지는 가시 돋친 말에 클락도 덤덤히 자신이 할 말만 하는 식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내용이 좋지 못한 탓일까, 줄곧 도시 쪽으로 향했던 박쥐의 몸이 급선회 하더니 클락을 한 팔로 종으로 밀어붙였다. 뎅- 묵직한 금속이 울었다. 박쥐는 이를 갈며 사납게 말했다.
“너, 그 아이에게 접근했나?”
뒤집어쓴 카울의 눈가로 보이는 서슬 퍼런 눈동자가 클락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클락은 별 동요 없이 그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오히려 눈썹을 구부려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식당에서 만났는데... 딕이 밥을 사줬어.”
너무 오래 있었다며 딕이 먼저 허둥지둥 바깥으로 나간 다음 얼마 없이 클락도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기 위해 계산서를 찾았지만 없었고 종업원은 이미 계산이 끝났다고 말했다. 급하게 가게 밖을 살피며 딕을 찾았지만 아이의 모습은 벌써 온데간데없었다. 그러고 보면 딕이 가방을 올려둔 위치가 정확히 계산서가 놓여있다는 점을 떠올린 클락은 가게로 돌아가 멋쩍게 웃으며 팁만 두 푼 정도 통에다 담고 밖으로 나왔다.
“...딕이?”
클락의 목을 단단히 압박하던 팔에서 순식간에 힘이 풀리면서 박쥐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클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하고 순순히 답해주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잠잠해진 웨인은 코로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클락을 놓으며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고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기... 딕이 좋아하는 거 뭐 있을까? 답례를 하고 싶은데...”
등을 돌린 박쥐에게 클락이 말을 걸었지만 박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자리를 바로 떠나려거나 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아까 전 날을 세웠던 것과 다르게 크게 기분을 상하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클락은 한줌의 용기를 가슴에 담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딕이 당신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어.”
딕이 식당을 떠나는 길에 남긴 말을 그대로 하자면 “브루스를 좋아하는 건... 힘들겠지만 너무 미워하지는 마요.”였지만 클락은 조금 각색해서 이야기했다. 웨인은 여전히 클락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예민한 청력을 지닌 클락의 귀에 “그 녀석.”하고 한탄인지 한숨인지 가볍게 뱉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얼핏 타박하는 것도 같았지만 그간 적의에 가득 차있던 그의 말을 들어왔던 클락으로서는 그 말이 그런 것들과 다른 부드럽고 다정한 질감을 가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웨인.”
“배트맨이다.”
박쥐, 배트맨은 단호하게 클락의 말을 정정한다. 클락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다시 이야기 했다.
“배트맨. 나는 아직도 왜 당신이 웨인을 저버리고 이런 활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외지인인 내 이해가 당신에게 필요 없는 건 알아. 그리고... 이 도시에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물론 박쥐로 인해 고담은 겁에 질려있지만 그러는 중 누군가는 어둠 속에 있을 박쥐를 떠올리며 새우잠이나마 그럭저럭 청할 수 있다는 사실도 클락은 알고 있다. 그저 클락은 그가 하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았고 또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그에 따른 결과에 만족할 수도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도시에서 자신은 외지인일 뿐이다. 그건 어떤 가치판단을 담은 평가가 아니라 엄연한 사실에 불과하다. 클락은 자신의 한켠에 자리했던 고집을 인정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적어도 내가 영주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을 줘.”
“성실하군. 처음부터 의뢰를 거절하지 그랬나.”
“그가... 백작이 당신이 죽기를 바라는 걸 알았으니까. 난 그걸 무시할 수 없어. 웨인이든 박쥐든... 당신은 이 도시의 일부이고, 그리고 당신에게는 당신을 지켜보는 사람도 있잖아. 살아있는 건 결국은 죽지만... 그게 당신이 위험에 내던져진 채 있어야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침묵이 내려앉고 종탑의 기계가 작동하면서 종이 뎅, 뎅, 뎅 하고 무겁게 예배시간을 알렸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클락이 배트맨의 곁에 한 발짝 다가가며 물었다.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던 배트맨은 후 하고 긴 한숨을 쉰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클락을 마주보았다.
-별일 없으신가요. 언제나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딕의 할아버지 변장(마법?)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온 남자아이가 하던 그 변장을 떠올리면서 썼습니다. ...음 떠올렸다기보다 그냥 그대로 가지고 왔네요.
-이 글의 처음 소재가 흡혈귀 뱃으로 숲뱃 뽀뽀가 보고 싶었던 것에서 시작된걸 떠올리면 저는 왠지 자꾸만 조커처럼 펑펑 웃고 싶어지는 겁니다. 하하하!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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