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au 입니다.
전에 있었던 이야기)
1/6 http://sowhat42.tistory.com/58
네 어머니의 피를―…
클락은 움칫 어깨를 털며 선잠에서 깬다. 아직 눈을 뜨지 않아 시야가 눈꺼풀로 덮여있지만 아침이 제법 밝은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제 이른 공기는 퍽 싸늘해서 클락은 반사적으로 소파 위에 누운 몸을 바짝 웅크렸다. 추위도, 더위도 딱히 클락에게 위협이 되는 요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클락이 기온의 변화에마저 둔감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클락은 다른 어느 생물들보다도 섬세하게 그런 변화들을 감지하곤 했다. 그리고 그에 적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클락이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갖추어온 생활의 양식이었다.
자, 이제 날이 밝았으니 어쩌면 좋을까. 설명해야하는 것도 있었고 감추어야할 것도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동이 떠오른 이후로 부쩍 잠잠해진 침대 위에서는 아직까지 (신기할 정도로) 별다른 기척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고 흡혈귀는 계속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클락은 계속 눈을 감은 채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 전개될 일들을 가늠하며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이런 식으로 늦장을 부리는 것은 클락이 드물게 피곤할 때면 보이는 습관이었다. 어쩌면 보통의 사람들은 평소에도 으레 그러는 일상적인 것이 클락에게는 매우 드문 빈도로 일어나는 탓에 ‘습관’이라고 새삼스럽게 명명되는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몸을 많이 움직여서 발생한 피로라면 굳이 잠을 자거나 별도의 휴식을 취하거나하지 않아도 햇빛이 말갛게 모습을 드러내기만 한다면 금방 회복되지만 이번 밤처럼 몸이 잠이 든 중에도 지치지도 않고 클락이 걸어놓은 혈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리는 흡혈귀의 마나를 달래거나 그의 부재로 어수선해진 숲의 기척들을 살피거나 하는 일종의 마나 노동은 반은 용의 피를 타고난 클락이라도 피곤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그에 따른 적당한 휴식을 필요로 했다. 그런 중에 아주 잠깐 들었던 선잠마저 근래 매번 꿈마다 찾아드는 흐릿한 속삭임으로 방해받은 클락은 약간 머리에 둔한 두통이 들기까지 했다. 클락이 어느 날부터인가 보게 된 꿈은 그저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같은 꿈을 계속 보는 것 정도의 일이라면 클락이 굳이 스스로가 그것을 상기하려 하지 않겠지만 문제는 특별한 형체도 영상도 없는 꿈에서 유일하게 두드러지는 낯선 음성이 조합해낸 언어가 이 세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 아닌 용언이라는 점이었다. 어렴풋이 용언이라는 사실만 알았던 문장은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해져서 ‘어머니’라는 단어를 클락은 확실하게 분간해낼 수 있었다. 맥락상 따져보았을 때 꿈이 지칭하는 어머니는 스몰빌에서 약초밭을 일구고 있을 마사 켄트가 아닌 클락의 생물학적 어머니인 라라를 뜻하는 것 같았다. 이 꿈은 무언가 ‘용족’으로서 클락의 무의식에 남아있는 흔적 같은 걸까? 그렇다면 그간에 한 번도 본적 없는 내용이 이제 와서 매일 클락에게 상기되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나저나 역시 유서 깊은 가문의 성이라지만 그만큼 해를 먹은 탓일까, 물론 밤에 클락이 언뜻 본 바로는 흠잡을 곳 없이 정갈한 성이었지만, 어딘가의 틈새로 외풍이 드는 지 클락은 뒷덜미가 선득해서 등받이 쪽으로 파고들듯 몸을 좀 더 웅크렸다. 그러다 클락은 불현듯 뇌리에 찾아든 위화감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잠은 잘 주무셨나?"
클락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날선 검을 겨누고 있는 남자를 멀거니 보기만 했다. 아침 햇빛에 번뜩이는 칼날만큼이나 서늘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비꼼이 섞인 인사를 나긋하게 건네며 무뚝뚝한 얼굴로 클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락은 잠시 자신이 이제까지 감지하고 있던 감각과 지금의 상황이 잘 연결이 되지 않아 애꿎은 자신의 모습과 방 안 광경을 몇 번씩이고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다 주인 방의 침대가 비어있는 것을 세 번째로 확인한 다음에서야 번쩍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자신의 양손을 들어보였다.
"아, 안―녕, 하세요."
급한 대로 입에 담은 인사말은 중간에 화자의 동요를 담아 말과 말사이가 어긋나서 클락은 귀에 들려온 제 말소리에 양쪽 볼이 살짝 뜨뜻해졌다. 그렇게 클락이 수선스럽게 당황하는 중에도 남자는 표정 없는 얼굴을 유지하며 클락의 목가에 칼을 겨누었다. 아까 클락이 갑작스럽게 몸을 크게 움직인 터라 보통이라면 본의가 아니더라도 약간쯤은 칼의 날과 살갗이 닿을 법도 했지만-그게 클락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예외로 하고- 아직까지 남자가 클락에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아슬아슬한 거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미동 없이 살기만 내리깔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다면 순수하게 감탄할 법한 솜씨였다.
"아, 저기... 제가 처음 와봐서요. 길을... 길을 잘못 들었어요. 급하게 걷다보니 어쩌다가... 저, 절대 다른 목적은 없어요! 아, 이건... 제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인데..."
클락은 떠듬떠듬 이야기하며, 중간에 자신이 한 말 중 길 잃은 사람이 집을 발견했다고 덥석 주인 방을 차지하고 있는 건 말이 되는가에 대해 고심하면서, 자신의 옷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진 다음 그 중 낡은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메트로폴리스 중앙에 위치한 왕국에서 가장 대표가 되는 서적 편찬소이자 그 어느 곳보다도 빠르게 최신의 정보들이 모이는 서점이기도 한 데일리 플래닛 인장이 박혀 있는 정보유통인 증명서를 내어보였다. 중앙의 도시 외에서는-가끔은 도시에서조차도-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기보다 방랑객들의 입과 입을 거친 풍월 내지는 설화처럼 전해지는 일이 많아서 과거에는 이러한 정보의 격차를 이용해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거나 선동을 일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몇 년 전 왕국에서는 데일리 플래닛을 필두로 직업적으로 정보의 유통을 맡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클락은 여행기고가였지만 동시에 그 내용의 신뢰도를 인정받은 정보유통인이기도 했다. 클락은 방문하게 된 지역의 특색처럼 여행에 필요한 정보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중요 현안이나 왕국에서 의논이 필요한 사건 등에 대해서도 최대한 사실을 뽑아 전달했다. 얼마 있으면 페리가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소식지를 만들겠다고 했으니 슈퍼맨의 일뿐만 아니라 클락 켄트로서도 클락이 할 일이 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남자의 파란 눈이 아주 잠깐 클락이 내미는 보존 마법이 걸린 양피지를 힐끗 살핀 뒤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클락은 남자의 귓불에 박혀있는 그의 눈동자 색과 꼭 닮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귀걸이를 보았다. 눈과 어울리는 보석과 그 귓불 아래로 어이지는 턱뼈의 모양이 꽤나 인상적이라고 클락은 이 와중에 생각했다. 바로 그때 피식, 웃음소리가 났다.
"'고담'을 여행지로 보나? 취미가 고약하군."
"그... 워낙 소문이 많아서... 사실을 제대로 확인해야 사람들도 안심하고 고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숱한 죽음과 사건, 사고들이 그저 뜬소문이라고 생각하나? 외지인이라지만 지나치게 긍정적이군. 거기다 '웨인'의 사유지에 함부로 발을 들인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도 모르는 양반이 이 도시를 무사하게 순회할 수 있을 거라 믿나?"
"죄송합니다... 정말, 길을 잃어서..."
어느 가문의 성에 함부로 들어온 것부터가 이미 클락에게는 변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가시 돋친 남자의 말에 그저 궁색한 변명을 계속 입에 담는 것밖에는 수가 없었다. 모양이야 궁색하지만 클락 나름 평화롭게 일을 해결하고자하는 염원이 담긴 노력이었다. 클락은 눈썹을 휘며 최대한, 정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무고하고 무해한 얼굴을 만들려고 애를 썼다. 한편 자리에 누울 때도 클락 켄트의 경우 안경을 쓰고 잠이 드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게 이제와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밤에 보았던 고양이와 새를 찾아 이들의 말을 들었다고 털어놓고 싶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봐선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클락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 남자는 한발 더 가까이 다가오며 클락에게 더더욱 칼을 바짝 대며 속삭이듯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모습에 클락은 머릿속에 한 가지 기시감이 찾아들며 지금 상황을 설명할 가설이 떠올랐다. 다만 클락이 찾아든 깨달음에 기뻐하는 것보다 호의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남자의 말이 더 빨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지인에게 손을 빌릴 정도로 고담은 녹록하지 않아. 이후 얽히고 싶지 않다면 이 말, 명심하도록. '슈퍼맨'."
이번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클락이었다. 클락은 이제껏 만난 적 없는 남자를, 이 성의 주인을 살피며 어떻게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웨인은 분명 소문처럼 정신이 나가 나사가 빠졌다거나, 방랑벽이 있는 탕아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 지금 그가 칼을 겨누는 자세나 클락조차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기척을 조절할 수 있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삭일 밤에 있던 일까지 기억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클락이 기억하기로 웨인과는 클락은 어떤 접점을 가진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그와 양부모님이 면식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외에 클락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이애나가 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클락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할 리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웨인은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던 걸까? 길드에 내려온 의뢰는 기밀에 붙여지기 때문에 외부인인 그가 슈퍼맨의 방문을 알고 어림잡을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웨인과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이 대치상태는 문제가 아니었다. 클락이 마음만 먹는다면 남자가 들고 있는 쇠붙이 따위야 가볍게 무시하고 그를 따돌리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온전히 인간에 의한 통치와 통제를 꿈꾸는 메트로폴리스 영주 알렉산더 루터가 보다 끈질기게 슈퍼맨의 정체를 파고들려는 요즘 같은 때에 클락은 도무지 가벼운 기분으로 웨인을 마주할 수 없었다. 슈퍼맨으로서야 잃을 것 없이 어떻게든 모든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고 클락은 나름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해 자신하고 있지만 그래도 클락은 어디까지나 클락 켄트였다. 클락 켄트는 반룡인 자신이 정체를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 아니라 세상에 나고 보니 우연히 반은 용이었을 뿐일 평범한 이 세계의 주민에 불과했다. 클락은 조나단과 마사가 좋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양쪽 직업에 만족하고 있으며, 부모님이 믿음으로써 지켜주고 클락이 일구어낸 지금의 아이덴티티가 좋았다. 클락이 이 세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건 클락 켄트 덕분이었고 그 클락 켄트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것은 슈퍼맨과 클락 켄트 사이에 놓인 가름막 덕분이었다. 클락은 단순한 이종족이 아니라 과거 이 세계를 걸고 지금의 세계를 이룬 선조들과 싸움을 벌였던 용의 후손으로서 자신이 가진 힘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이들이 사실에 도달했을 때 어떤 파장을 자신에게 불러오게 될지 짐작한 바가 몇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클락 켄트와 슈퍼맨은 반드시 완벽하게 유리된 존재여야만 했다. 어떻게 웨인은 자신의 정체를 알았을까? 혹시 루터도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정체를 파헤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박쥐'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겠지? 웨인, 당신은 지금 곤경에 처해있어. 영주가 당신을 잡고 싶어 한다고."
클락이 냉랭하게 말했지만 웨인은 그저 흥하고 별스럽지 않은 듯 콧방귀만 칠뿐이었다. 물론 클락의 감지를 피해 기척을 죽이고 검을 겨누는 그가 보통의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님을 알지만 그래봐야 인간, 그나마도 삭일 밤이 되면 제 이성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종속된 흡혈귀였다. 클락은 웨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도 기억해 둬."
클락은 손을 들어 웨인이 겨눈 칼날을 맨손으로 잡은 다음 가볍게 휘어버렸다.
"다음에 날 협박할 때는 더 좋은 걸 가져오는 게 좋을 거야."
웨인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클락의 호승심이 불러일으킨 착각일까 어째 그의 눈동자가 파랗게 불타는 것만 같았다. 비죽, 짧은 미소를 띤 웨인은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짓씹듯 얘기했다.
"여기서, 당장 꺼져."
불청객이 밖으로 나가고 브루스는 형편없이 휘어진 검을 감흥 없는 눈길로 살피다 그것을 저만치에 던지며 코웃음 쳤다. 어차피 듣지도 않을 무기라는 것쯤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달갑지는 않았다. 그나마 마나의 응축 정도를 조작해서 남자가 느낄 원근감을 교란시킨 덕에 그가 제 목에 칼이 들이밀어질 때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깨어서는 놀랐다는 것 정도가 위안이 될까 말까였다. 지난밤의 기억은 당연히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브루스는 단 하나의 감각만은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머릿속마저 붉게 물들이는 것 같은 비릿한 냄새, 바로 피에 대한 기억이었다. 지금도 그 불쾌한 쇠 냄새를 떠올리면 구역질이 나는 것 같았다. 토마스와 마사가 목숨을 잃었던 날의 밤, 부모님의 주검 옆에 쓰러져서 그 역시도 반쯤 목숨을 잃어가던 브루스는 누군가의 농간으로 종속된 흡혈귀가 되었다. 그 밤 이후 자신이 흡혈귀가 된 것을 안 브루스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그런 자신을 통제하기위해 노력했다. 제일 바랐던 것은 흡혈귀의 마나를 아예 봉인해버리는 것이었지만 브루스가 가진 마나를 쏟아 부어 그것을 제압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역효과만 났기 때문에 브루스는 어찌할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은 젖혀두기로 하고 그에 따른 증상을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연구했다. 브루스는 훈련을 했다. 사람이 아닌 보통의 동물, 몬스터라 해도 생물의 피를 원하게 되거나, 그것을 눈앞에 할 경우 몸에 충격을 가해 반사적으로 흡혈을 원하지 않도록 브루스는 이성을 잃은 자신을 학습시켰다. 동물이 반복된 훈련을 통해 재주를 부릴 수 있고, 몬스터도 같은 덫에 여러 번 걸리는 일은 좀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실험이었고 다정한 집사가 표현하기에도 "그나마 도련님 몸에 난 상처가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라고 했으니 결과는 그럭저럭 만족할만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런 대비 없이 흡혈귀인 자신을 방치하기에는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삭일 밤에는 숲에 몸을 숨기고 대신에 날뛰는 몬스터들을 제압하며 고담을 덜 위험하게 하는 방향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말이다. 브루스는 자신의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 많은 서적들을 뒤졌고 '혈주'라고 불리는 오래된 마법사가 고안해낸 주술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나의 덩어리와도 같은 슈퍼맨-피-얌전히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있던 자신을 연결지어보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쯤은 뻔했다. 감히 자신에게 혈주를 건 그 거만한 남자는 자신이 그를 환대하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아아! 브루스가 손님을 내쫓았다!"
작은 인기척이 도도도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린아이의 쾌활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마치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명량하고 유쾌한 기가 서린 아이의 외침에 브루스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고개만 살짝 돌려보면 아이는 정말 작은 새처럼 통통 튀어 브루스에게로 폴짝 다가오고 있었다.
"알프레드한테 이를 거예요! 안 그래도 지금 오랜만에 온 손님이라고 알피가 엄청 공들여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브루스는 입술을 꾹 다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시야에는 커다란 창문이, 그 너머에 성 밖으로 나가는 이방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브루스의 코가 살짝 씰룩였다.
"또 막 인상 쓰면서 꺼지라고 했죠? 에이, 나 슈퍼맨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인사라도 하게 해주지... 치사해."
"딕."
"그리고 이번 일은 전하께서 정하신 일 아니에요? 슈퍼맨이 다른 의도로 온 것도 아닐 텐데 뭘 그렇게 까칠하게 대해요. 안 그래도 브루스, 평판도 안 좋은데."
"딕..."
"아, 알았다! 혹시 그래서 더 무섭게 대한 거예요? 전하께서 우리 고담에 다른 사람을―"
"딕 그레이슨, 숙제는 다 했니?"
브루스가 몸을 돌려 뒤에서 열심히 조잘거리던 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말을 잘린 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별다른 표정 없이 굳어있는 브루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파악하는 중인지 재잘거리던 입을 조가비처럼 꼭 다물었다.
"달그림자와 씀바귀의 차이에 대해서 논술하라는 약초학 리포트는 다 쓰고 지금 여유를 부리는 거겠지?"
어제 냈던 숙제에 대해서 말을 하는 브루스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질적이고 딱딱했지만 딕은 거기에서 한 가지를 추론해낼 수 있었다. 자신은 브루스의 정곡을 찔렀고, 브루스는 그것을 매우, 매우매우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딕을 쏘아보는 브루스의 눈에는 평정을 가장한 심술이 가득했다. 딕이 아차 싶어서 브루스에게 장난이었다고 너스레를 떨어보려는 차에
"아침식사 후에 검사하지."
브루스는 그런 딕을 휙 하니 지나치며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 버렸다. 멍하니 브루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딕은 벌써 사라지고 없는 브루스의 등에 대고 볼멘소리로 외쳤다.
"내가 숙제 못한 거 뻔히 알면서!"
웨인의 감시탑을 뒤로한 후로 클락은 줄곧 우울한 얼굴로 이번 일의 의뢰인인 파워스 백작의 성에 도착했다. 외관부터 화려하고 고풍스럽게 장식된 성을 올려다보며 클락은 슈퍼맨 특유의 푸른 제복을 입고 붉은 망토를 두른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벌써 몇 번째쯤 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조금 꺼트렸다. 환대까지는 바라지 않았어도 이렇게 누구는 칼을 겨누고, 누구는 그 칼을 망가뜨리는 식의 실랑이가 오갈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이나저나 이번 의뢰 때문에라도 다시 한 번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상대에게 자신이 제대로 싸움을 걸고 말았다는 사실이 클락을 아주 조금 더 우울하게 했다. 물론 몇 번을 곱씹어보아도 아침의 실랑이는 쌍방과실이었지만, 자신마저 그렇게 험악하게 분위기를 이끌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본인의 의사에 어긋나게 함부로 혈주를 걸었던 것에 대해서도 사과하지 못했고 말이다. 이 왕국의 통치자인 다이애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군주이지만 아무래도 그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던 그녀의 말은 틀릴 듯싶었다. 아니면 그녀의 말이 감히 틀린 말이 되도록 자신이 일조했던가. 클락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문을 지나 호화로운 장식들로 가득 차 들어오는 이의 기를 죽일 것 같은 내부로 들어서니 마치 새의 부리처럼 뾰족한 코를 가진 사내가 불편한 다리를 느릿하게 끌고 와서 조금 비굴해 보이는 미소를 띠며 클락을 맞이했다. 백작의 집사, 아니면 비서로 보이는 남자는 지나치게 공손한 몸짓으로, 그 행동 하나하나가 남자가 의도한 건지 불가피한 건지는 조금 애매했지만, 클락의 앞을 걸으며 2층에 있는 백작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어딘가 엄숙한 화랑처럼 보이던 웨인의 성과 대조적으로 파워스의 성은 밝고 화사한 분위기라서 보다 귀족의 성 다운 느낌이었지만 정도가 지나쳐서 잘 꾸며놓은 장식장 같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잠시 발을 멈춘 남자는 클락에게 손짓으로 잠시 기다려달라는 표시를 한 뒤 콩콩, 가볍게 노크를 했다.
"JL의 슈퍼맨님께서 오셨습니다."
슈퍼맨에 '님'자가 붙는 것은 어딘지 조금 과한 느낌이 들어 클락은 슬쩍 자신의 볼을 긁었다. 남자가 말을 마치자 바로 문 뒤에서 매끄러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들어오게."
클락을 안내한 남자가 문을 조용히 열자 집무실치고 크고 기다란 실내가 펼쳐지며 그 끝에 책상에 앉아 있는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클락에게 두 손으로 클락이 걸어갈 곳을 가리켰고 클락은 가볍게 남자에게 인사한 뒤 백작에게로 다가갔다. 서류들을 훑어보던 백작은 고개를 들어 클락에게 그 앞에 놓인 접객용 의자를 가리켰다.
"코블팟 자네는 물러가게."
"예."
안내가 끝난 후에도 백작이 달리 시킬 심부름이 있는지 필요한 것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클락의 뒤에서 얼마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 들어온 남자, 코블팟에게 파워스가 이야기하자 아마도 깊이 절을 했는지 땅으로 푹 내리 꺼지는 대답을 남긴 뒤 그는 다리를 살짝 끌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저래 봬도 제법 실력 있는 남자네."
걱정스럽게 집무실 밖으로 나간 코블팟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클락을 눈치 챘는지 백작이 이야기했다.
"마법도 능통하고, 작위가 있지만 그보다도 어떤 선에 서서 처세해야하는지 아는 융통성도 있지. 그의 모친이 세이렌이기는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파워스는 어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요즘이 어디 그런 것을 따지는 때인가. 능력 있는 자는 수단을 찾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야지. 그러니 그렇게 염려할 필요는 없네. 물론 '슈퍼맨'에게는 그든 나든 동정의 여지가 충분하겠지만 말이야."
"아니요, 아닙니다."
클락은 조금 거북해져서 고개를 내저었다. 파워스는 대수롭지 않게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군말이 길었군. 의뢰내용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긴말은 않겠네. 박쥐를 처리해주게. 생사 여부는 묻지 않네만,"
클락이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살짝 입을 열자 파워스는 한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후 말을 이었다.
"길드의 행동은 왕의 위신과 관련되니 궂은일까지 부탁하지는 않겠네. 박쥐를 내 앞으로 잡아오게. 자네도 알겠네만 고담은―"
백작은 짧게 차가운 웃음을 짓는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비록 내가 이 도시의 영주이네만 군권을 가지고 있지 않네. 물론 치안을 위해 경찰이 있지만 지금 경찰을 이끄는 고든 경은... 조금 성격이 물러서 말이네. 도시의 안전을 책임지는 영주로서도, 그리고 왕의 신하된 도리로서도 도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박쥐의 만행을 그저 손 놓고 볼 수만도 없네. 사례금이라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를 생각이네. 우선은 선금이네."
짤랑, 한 가득 속을 채우고 있는 가죽주머니를 백작은 클락과 가까운 책상 가 쪽에 올려놓았다.
"저는 돈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도 소식으로 들어 알고 있네. 자네 호의는 이 왕국에 있어 참으로 고마운 일이네만 돈이 오가는 것만큼 일이 확실해지는 건 없지.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 기다리겠네."
백작은 이미 그가 전하고 싶은 용건이 끝났는지 짧게 나갈 문을 향해 손짓한 후 다시 자신 앞에 펼쳐진 서류들을 잠깐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정말 녹록지 않은 도시로군. 클락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겉보기에도 묵직한 가죽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클락의 말에 파워스가 고개를 들었다.
"백작님께서 이렇게 저 같은 심부름꾼을 직접 찾으실 정도면 사안이 까다롭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럼... 웨인에게는 연락을 넣어보셨습니까? 고담에는 특별하게 도시를 몬스터나 다른 존재로부터 보호하는 감시탑이 있는 걸로 압니다. 그에게 말을 넣으시는 편이 일이 더 빠르게 해결되지 않습니까?"
"웨인 말인가?"
"네."
사인을 위해 깃펜을 집었던 백작은 잠시 아무 말 없이 클락을 바라보다가 펜을 놓으며 별안간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자네는 정말 외지인이로군!"
그러고도 다시 파워스는 계속 웃다가 얼마쯤 후에야 멈추고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올려 미소 지었다. 백작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하지만 조금 빠른 어조로 이야기했다.
"고담을 팔아먹은 자의 후손을 믿으란 말인가? 이 도시의 지위를 지금의 위치로 떨어트린 작자를? 난 더 늦기 전에 왕께서 그 가문에 주어진 특혜를 모두 박탈하시길 바랄 뿐이네. 애당초 그가 지금 이 도시에 있는지 여부도 불투명하지 않은가. '웨인'이야말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구시대적인 이름이지."
"...그렇습니까."
클락은 애매하게 맞장구를 쳤다. 머릿속에서 클락에게 당장 꺼지라고 얘기하던 웨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말을 쏟아낸 백작은 어딘가 유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이것은..."
"선금이니 가지고 가게."
"의뢰하신 일은 성심껏 해결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백작님께서 원하시는 결말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정 보수를 치르시고 싶으시다면 일이 모두 끝난 후면 어떠신지요."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건가?"
"의뢰는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 요는 '박쥐'의 존재가 문제이지 않습니까."
잠시 클락의 얼굴을 지켜보던 백작은 작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것을 긍정으로 해석한 클락은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왜인지 온몸의 피부가 따끔따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성이 솔직한 편이라 숨거나 몸을 사리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은 클락은 밤을 틈타 조용하게 움직이는 박쥐를 어색한 기분으로 조금은 먼 치에서 지켜보았다. 지금은 재정신의 인간일 웨인은 어젯밤과 같은 복장으로 숲 속이 아닌 도시에서 이곳저곳을 오가며 마지 제 영역을 관리하는 짐승마냥 활보하고 있었다. 그가 상대하는 것은 도시로 잘못 흘러든 몬스터만이 아니라 이종족이든 인간이든 관계없이 모든 생물들이었다. 박쥐는 이 도시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을 좇으며 그들을 위협하고 을러대며 필요할 때는 무력을 쓰기도 했다. 지난 밤 이성이 없던 그와 잠깐 난투를 벌였던 클락은 의식이 있는 지금의 그가 보이는 움직임이 얼마나 정교할지 짐작해보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왔다. 누군가는 그런 박쥐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고 또 누군가는 그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웨인은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클락은 웨인의 성에 걸린 초상화에서 전대 웨인이었던 부부가 각각 귀 한쪽에 똑같은 모양의 보석으로 만들어진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두 개는 모두 지금 웨인의 귀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웨인의 증표와 같은 것이었고 동시에 왕이 웨인에게 보내는 신뢰의 표시였다. 클락은 얼마 전 다이애나로부터 받았던 짙은 파란색의 브로치를 떠올리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자, 이제 어쩐다. 슈퍼맨은 자리를 옮기는 박쥐의 뒤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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