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날조가 완연한 중에 배트맨 비욘드의 리턴 오브 더 조커의 내용이 스포됩니다.
성인글 버전) https://znfnxh2.postype.com/post/1388742
두근 두, 근 두근. 미세한 엇박자를 예민하게 귀에 담은 클락은 바로 몸을 일으켜 숨을 다잡는 브루스에게 약과 물 한 컵을 건넸다. 상기된 얼굴로 통증인지 전까지의 여운인지를 잇새로 삭이며 브루스는 클락의 손을 곁눈질 하다가 조금 난폭하게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알약을 감싼 물이 부드럽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고, 두근두근두근 고동은 다시 제 박자를 찾아간다, 후우 길게 내몰아 정리하는 호흡의 소리가 들린다. 클락은 브루스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에 귀를 기울이며 침묵을 지켰다. 그런 클락을 힐끗 알아차리고 브루스가 쯧, 짧게 혀를 찼다. 브루스는 침대 한구석으로 덩어리져서 밀려난 이불을 끌어다가,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굳이, 클락의 감각으로부터 숨듯 제 나신을 덮고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클락은 손을 뻗어 헝클어진 하얀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안 찜찜해?”
그렇게 감추면 닦을 수도 없어하고 클락은 무슨 대단한 밀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속닥였다. 그게 제대로 심기를 거슬렀는지 브루스는 시린 눈을 치뜨면서 성대하게 코웃음 친다. 지금 거기가 잔뜩 충혈 돼서 난장이 난 게 누구인데 저딴 소리를. 브루스는 제 몸 사정이야 어떻고 간에 온화한 얼굴을 지어낸 남자 때문에 이를 악물었다. 그마저 “이, 상해.”하고 클락은 조심스럽게 턱을 어루만지면서 난감한 듯, 사랑스러운 듯 이야기한다. 정말 같잖았다. 심술을 달래려 클락이 이불 밖으로 드러난 어깨를 쓰다듬고 주무르며 브루스의 귓가에 쪽쪽 입을 맞췄다. 브루스는 눈썹을 찌푸리고 신랄하게 말했다.
“마음껏 안지도 못할 몸이 뭐가 좋다고. 질리지도 않나?”
“전혀. 엄청 좋은데?”
클락이 더없이 깔끔하게 잘라 대답하자 브루스의 눈매에서는 이제 겨울바람이 불 지경이다. 웨인저택에 있는 주인의 침대는 넓기가 그지없어서 봄과 겨울이 한데 어우러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슈퍼맨. 브루스는 속으로 제 곁에 있는 외계인에게 욕을 퍼부었다. 옆머리가 세고, 얼굴에도 분명 깊은 주름이 잡혔지만 그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이상적으로 완벽해서 얄밉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도 얼굴에서나 찾을 수 있는 세월의 흔적이다. 아래로 내려가 클락의 벗은 몸을 보면 반듯하게 꽉 짜인 근육과 그것을 유연하게 덮은 강건한 살결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주조하고 있어서 도무지 나이를 찾아낼 수 없다. 그러는 중에도 크고 단단한 손이 자신의 몸 위를 어떻게 오가는지 보자면 그것에 깃든 노련함이 분명 그도 이 지상의 시간 속에서 자신과 함께 걸어온 것임은 확실했다. 정말, 정말 고까웠다. 시나브로 병색이 깃들기 시작한 제 가슴이 어째서 클락에 대한 감정을 포기하지 않고 여직 간직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다.
“브루스.”
슬금슬금 브루스가 덮은 이불을 알몸 위에서 밀어내면서 클락은 어깨, 뒷목, 등, 옆 골반 순으로 입술을 댔다. 코끝에 닿은 브루스의 피부에서는 약간 쌉쌀한 백단향과 같은 냄새가 난다. 살갗에서 클락이 짧은 들숨을 쉬자 간지러웠는지 앵돌아진 자세를 하고 있는 브루스가 몸을 살짝 떨었다. 클락은 자신이 잔뜩 어질러놓은 몸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부드러운 가슴과 색이 볼록 솟은 유륜, 늑골의 사이사이, 골반이 잡고 있는 단단한 윤곽, 샅에 있는 여린 살, 민감한 오금을 뻔뻔하게 침범하며 한참동안 감각을 쫑긋 세웠다. 심장은 별다른 노이즈 없이 정상치를 유지하며 대신에 다른 이유로 조금 박동을 빨리했다. 고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간하고, 보다 섬세해진 몸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꼼꼼히 파악하기에 좋을 만큼 예리한 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자신이 크립토니안이라는 사실이 클락에게는 퍽 유익했다. 브루스의 몸을 다 닦고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손바닥을 붙이고 있던 클락이 속으로 우쭐대어 보았다.
식어 있던 열이 다시 부유하면서 브루스는 그런 자기 몸의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눈을 꾹 감으면서 미간에 더 오목한 주름을 잡았다. 계속 끈질기게 뻗대던 브루스가 후, 길게 한숨을 쉰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브루스는 못마땅해서 건성건성 클락의 팔을 붙잡았다. 브루스가 작은 목소리로 아니꼬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깐보지 말고 제대로 해.”
클락은 빙긋 웃으면서 심술로 퉁퉁 불어난 입술에 뽀뽀했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렸다.
새벽 어스름에 물든 상대를 더더욱 꽁꽁 감싸며 클락은 자꾸 자신의 체온을 넘겨주었다. 갑갑하지도 않은지 브루스는 순순히 클락의 품에 얼굴을 묻으면서 새근새근 간지러운 숨을 뱉어냈다. 브루스는 자신이 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주 예전에 클락이 브루스에게 그만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 맞았다고 입증해주는 흔하지 않은 증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물론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배트맨의 활동을 테리에게 맡겨두고 있는 지금 브루스의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는 일은 아주 많이 드물어졌다. 평생을 부어도 완벽하게는 지워지지 않을 흉들이 시간을 먹고 조금은 형태가 보다 둥글고 희미하게 과거의 것으로 굳어져갔다. 대신에 클락이 남기는 흔적은 이전의 것이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울혈이 생겨난다. 브루스 몸에 남은 자국들 모두를 하나하나 지켜보면서 클락은 결국 끈질긴 이가 마지막에는 웃는 것 아닌가하고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선천적인 성향인지, 아니면 후의 경험과 필요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브루스는 자존심이 강하다. 온갖 메타휴먼들이 있는 가운데서 특별한 능력 없이도 자신의 지략과 체술, 도구들로 여타 히어로들과 어깨를 견주고 그들을 이끌며 저스티스 리그를 꾸려나가던 배트맨이 두르는 아우라는 분명 웬만한 마음가짐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너무 스스로를 난폭하게 다루는 브루스가 못마땅해서 “그 장난감들이 참 믿음직스럽긴 한가봐, 그치?”하고 떠보듯 이야기했더니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이 필요한 때에 적절한 도구를 쓰는 게 뭐가 그렇게 책잡힐 일이라고 시비지?”라며 신랄하게 되물어 왔다. 긁어 부스럼이었구나, 클락이 후회했을 때는 이미 배트맨의 행보가 보다 대담해지고 거칠어진 뒤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 실오라기 하나 없는 몸으로 자신의 곁에 있다. 과거 수많았던 순간보다도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브루스가 클락에게 육체관계까지도 허락한다는 건 클락이 생각하기에는 의미가 컸다. 이따금 클락에게 조심스럽게 손끝이 아슬아슬 닿을 듯 말 듯 뻗어지면서도 그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잠잠히 지켜보는 브루스의 눈매가 살짝 세모꼴이 되는 것을 보면 아무리 클락이라지만 브루스가 자신과 클락의 차이에 분해하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게 뭐? 이러저러한 가설과 가정을 늘어놓고 브루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클락이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섬세한 작업은 슈퍼맨의 몫이 아니었다. 습관대로, 과거 브루스가 클락이 그렇게 해도 괜찮게 만들었듯, 클락은 자신의 직관에 따라서 움직였다. 브루스는 심장이 약해졌다. 그건 단순히 노화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거쳐 온 과거가 조금씩 조금씩 삭여놓은 상흔이었다. 그렇게 유약해진 브루스가 직접 그것을 보이고도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렇다면 클락은 자신이야말로 브루스의 곁에 있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클락에게 ‘마음껏’이란 어차피 이 지구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보다 백 배, 천 배, 몇 만 배는 연약한 세상을 살았고 살고 있는 클락은 물리적, 생리적인 이유로 모든 것과 ‘적당히’ 접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클락이 얼마나 주먹을 꽉 쥘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제 손에 무엇을 담고자 하는가, 그를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이다. 클락이 정말 배려심이 가득했더라면, 어쩌면 브루스와의 관계를 그저 한줌 포옹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어른스러운 연인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브루스 웨인을 앞에 두고 플라토닉적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만큼 클락은 성인(聖人)이 아니었다. 그러니 브루스가 “안 돼.”를 말하지 않는다면 클락이 새삼 몸을 사릴 이유는 없었다. 잠깐 세상을 떠났다가 홀연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게 반갑다며 인사하는 클락을 심드렁하게 마주한 브루스는 그간의 공백 따위 없던 것처럼 태연하게 손을 뻗는 클락이 관성처럼 자신들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 대해 ‘클락 켄트’의 이름을 부르며 묵인해주었다. 확답은 아닌 만큼 지금의 관계는 말하자면 과거로부터 유예된 잔여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시간은 브루스가 클락에게 허락한 것이고, 브루스를 사랑할 수 있는 일각이었다.
“클락.”
늦은 밤. 클락의 귀에 차분한 목소리가 발음하는 자신의 이름이 닿았다. 그간 들려오는 소식들 때문에 초조하게 귀만 세우고 있던 클락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의 부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바로 응했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이지만 발코니의 커다란 유리 너머에서 빛이 스미어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럭저럭 사물을 분간할 만큼은 밝았다. 브루스는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에이스의 머리와 목을 꼼꼼히 긁어주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발코니를 통해서 저택 내부로 들어오는 클락을 브루스는 그저 한 번의 눈길로 확인하고 만다. 클락은 잠깐 동안 그런 브루스를 조금 떨어진 발치에서 살폈다. 달리 확인되는 부상 없음, 바이탈 이상 없음, 조커 독으로 인한 안면근육의 경련이나 그밖에 후유증은 보이지 않음, 등등 모든 항목을 조용히 체크한 다음에야 클락이 브루스에게로 다가갔다. 브루스의 손길 아래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에이스는 클락의 등장에 검은 눈을 반짝 떴다가 클락이 브루스에게 가까워지자 세모난 귀를 바짝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막 경계 태세에 들어가려는 개에게 브루스는 “착하지.”하고 낮은 목소리로 달래며 윤이 나는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 괜찮아?”
클락의 물음에 브루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은?”
“정밀검사에서도 이상은 없었어. 칩도 완전히 사라졌더군.”
“그럼 조커는, 진짜로 더 이상 없는 거야?”
클락의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한편 어딘가 답을 재촉하는 듯 초조한 기색이 묻어났다. 반면 브루스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고갯짓만 두어 번 할 뿐이다. 브루스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짧게 숨마저 죽이던 클락은 마치 호흡을 터뜨리는 것처럼 “그렇구나...”하고 맞장구를 쳤다. 덩어리졌던 공기가 뱉어지고 나자 요 며칠간 싸르르하게 술렁이던 가슴이 비로소 진정되기 시작했다.
조커는 슈퍼맨에게도 퍽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루터와 손을 잡아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일도 그렇고, 그가 일으킨 폭탄 소동에 저스티스 리그 전원이 여기저기 바쁘게 동분서주했던 전력 때문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조커와의 일이 있고나면 브루스가 어딘가 이상해지기 때문이었다. 분명 한참 전에 사라졌다고 했던 조커가(그 대신에 추종하거나 모방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광대들이 범죄를 저질렀지만) 갑자기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클락은 초조하게 제자리를 맴맴 돌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브루스가 화를 내건 말건 속 시원하게 참견질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조커 문제에 있어서는 브루스의 가족이 깊이 연관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브루스가 자기 입으로 그렇다고 한 적은 없었어도 조커가 사라졌던 사건 이후로 배트패밀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브루스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그 정도 추측은 간단하게 할 수 있었다. 사실 줄곧 걱정이 돼서 신경이 자꾸만 고담 쪽에 쏠렸던 클락이지만 이렇게 브루스가 자신을 불러준 게 기쁘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항상 브루스와의 일은 이정도 간극이 있던 것 같다. 완전히 끼어들지 못하고 전부를 내보이지도 않지만, 어떻게든 한발은 내딛고 결국은 한끗 정도 양보해준다. 그게 지금까지 이루어온 클락과 브루스의 관계였다.
클락을 앞에 두고 브루스는 한참동안 에이스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클락은 브루스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 후 얼마 뒤, 브루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클락.”
“응?”
“고담이 보고 싶어.”
갑작스러운 브루스의 주문에 눈을 깜빡이던 클락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익숙하게 방안에서 담요를 세 장 꺼내 와서 브루스를 거의 칭칭 감을 듯이 감쌌다. 억척스러울 정도로 꼼꼼하게 브루스의 몸을 담요로 두르는 손길에도, 고치가 되어버린 브루스를 가볍게 안아 올리는 행동에도 브루스는 잠잠하게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귀여워해주던 주인을 클락에게 뺏긴 에이스는 우우 하고 불만과 걱정이 섞인 소리로 울면서 코를 킁킁댔다. 클락은 충직한 그레이트데인에게 빙긋 웃으면서 “잠깐 다녀올게.”하고 양해를 구했다.
브루스를 안고서 발코니로 나온 클락은 자신과 브루스를 붙든 중력을 가볍게 차냈다. 찬바람이 브루스의 머리에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를 품에 묻어 놓은 클락은 저택 아래에 있는 배트맨의 도시를 향해 날았다.
“많이 변했네?”
마천루 꼭대기에 튀어나온 철골 구조물 위를 조심히 디디면서 클락은 발밑으로 펼쳐진 도시를 훑었다. 밤을 맞이해 잠이든 주택가나 빛이 새어나오는 몇몇 사무실, 낮처럼 요란한 유흥가, 도시의 상하좌우를 오가는 빨갛고 파란 사이렌 소리, 그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만치의 높이를 브루스는 좋아했다. 클락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브루스는 클락의 품에 안긴 채로 역시 도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비록 배트맨으로서 이 도시를 누비는 일은 이제 없지만 그래도 브루스는 언제나 고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기업의 문제든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든 그의 도시를 방문해야할 일이 있으니 그에게 고담이 이제 와서 신기해보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고담이 보고 싶다고 한 건 단순히 그러고 싶다거나 새삼 호기심이 일어서가 아니라 이 광경이 그에게는 가장 친숙하고 또 누군가와 나누기에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클락은 생각했다. ...그런 것치곤 브루스가 너무 열렬하게 고담을 내려다보아서 조금 심통도 나지만 그 정도쯤은 이제 웃으면서 지켜볼 수 있다. 어쨌건 이만하면 제법 데이트 같지 않은가.
“가고일이 없어.”
“도시 미관 상 음침하다며 치워버리더군. 네오 고담이라지 않나.”
브루스를 잘 감싸 안으며 자리에 앉은 클락이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험상궂게 생긴 석상(배트맨의 지정석)을 찾으며 이야기하자 브루스가 덤덤하게 설명해주었다.
“예전보다 제법 밝아지지 않았어?”
저기나 저기, 또 저기. 클락이 한손으로 도시에서 빛이 새어나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고
“그림자도 더 짙어졌지.”
저기, 그리고 저기와 저기. 브루스는 턱 끝으로 클락이 짚어낸 이면에 잠긴 도시를 찾아냈다. 이따금 요란한 음악소리와 날카로운 웃음이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건물에서는 색이 시시때때로 바뀌는 조명이 인도에까지 새어나왔다. 깊이 잠이 들었거나, 밤을 잊었거나, 그 속에서 싸움을 하거나 어떤 이유에건 간에 자신들의 일로 가득 찬 도시의 사람들은 결코 건물 위에 깃든 과거의 월즈 파이니스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브루스에게 눈에 띄는 것들에 대해 묻고 그에 대해 조곤조곤 답을 듣는 중에 클락은 아래서 일어나는 몇몇 소동을 눈과 귀에 흐릿하게 담았다. 큰 소동은 아니었고 순찰하던 경찰에 의해 금방 정리되는 그것들을 목격하면서 옛날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 지금의 고든청장 역시도 나날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클락은 굳이 나서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얼마쯤은 무책임해지는 법을 배운 탓에도 그렇고 이곳이 고담이기 때문에도 그랬다. 대신에 클락은 둘러놓은 담요가 조금 불편했는지 바즈락바즈락 움직이는 브루스를 고쳐 안는다. 도시 위에서 구름을 휘저은 바람이 둘을 스치고 지났다.
“메트로폴리스도 많이 변했어.”
클락이 소곤소곤 말했다.
“데일리 플래닛 그 행성 있잖아, 자꾸 떨어져서 위험하다고 홀로그램으로 바꾸었어. 메트로폴리스 진입도로에 젊을 때 내가 되게 느끼하게 웃으면서 손 흔든다? 센테니얼 파크에서 인간 자주 해방 집회가 열려. 가끔씩 시청이나 저스티스 리그 본부로 행진을 하기도 하는데... 음, 이건 어제오늘 일은 아닌가.”
“기술이 발달했으니까. 히어로도 능력 있는 소수가 독점할 필요는 없다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겠지.”
“응. 가끔 우리 쪽 젊은 히어로가 대응하거나 맞붙거나 해서 걱정이야. 여론도 그렇고.”
“해야 할 일만 제대로 하고 있으면 될 일이야. 자네 말대로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한참 꼼지락 댄 후에 담요 고치 안에서 한 손을 빼낸 브루스가 클락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브루스가 핀잔주듯 말하길 그 주인을 닮아 자기주장이 강한 S자 모양의 앞머리를 손가락에 걸어보면서 브루스는 눈으로만 웃고 있었다. 세상이 변했다는 이야기는 별반 새롭지도 않고, 나이든 이의 푸념 같은 김빠지는 대화주제지만 클락은 브루스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살았고, 들을 수 있을 만큼 곁에 있다는 건 의심할 것도 없이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웬일로 말꼬가 트여서 이런저런 대꾸를 꼬박꼬박 돌려주는 브루스를 보는 게 좋았다. 이거, 진짜 데이트인가보다. 클락은 신이 나서 한참을 재잘거렸다. 도시 야경을 같이 내려다보면서 클락이 메트로폴리스에서 사라진 애플파이 가게와 새로 생긴 동양차 전문점에 대한 설명을 끝마치자 잠깐 나긋한 고요가 찾아왔다.
“테리는”
얼마쯤 클락의 머리카락, 눈 옆에 진 잔주름, 귓바퀴를 따라 그리던 브루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없어도 괜찮겠더군.”
당장은 아니지만. 재빨리 엄하게 덧붙이기는 했지만 브루스가 좀처럼 하지 않을 말을 듣고 클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초에 브루스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배트맨’을 쥐어준 것부터 놀라운 일이기는 했지만.
“이번에 배트맨이 정말 잘 해낸 모양이네?”
“무모했지만.”
브루스가 굳이 토를 달았지만 클락은 가볍게 받아 넘기며 이야기했다.
“잘됐네. 자네가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면 나도 도울게. 물론 고담 일에 참견하겠다는 건 아니고... 우리랑 같이 움직이게 되거나 그러면 말이야. 그러니까 브루스,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아도―”
“나는 마음을 놓지 않아.”
조금 수선스러운 클락의 말에 브루스가 끼어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클락이 입을 꾹 다물자 입가에 주름이 생겨 브루스는 그 모양도 따라 그려보려다 금방 말았다. 브루스는 다시 고담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나는 은퇴했지. 나는... 느려지고 약해졌어. 조무래기 같은 건달도 쉽게 제압하지 못해서 구해야할 사람을 오히려 위험하게 만들기도 했어. 그런 단순한 이유야. 간단하고 명료해서 재고의 여지가 없지.”
“테리는 자네 하는 걸 보면 가끔 기가 죽는다던걸.”
“내가 헛살지는 않았다는 뜻이겠군.”
클락은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많이 누그러져 있는 브루스의 말투에서 그가 가볍게 웃는 것을 알았다. 두근두근두근. 클락 자신의 소리보다도 익숙한 고동이 품안에서 차분하게 뛰었다. 반면에 클락의 것이 어딘가 불안하게 갈피를 잡지 못한다.
“흘러간다는 것은 잔인해. 돌아오지 않지. 그걸 알면서, 알아서 나이깨나 먹고 미련한 짓을 했어.”
“자네가?”
“내가.”
“난 상상이 안 가.”
클락이 팔에 힘을 담았다. 브루스가 고개를 돌려 클락을 보았다. 방금 전만해도 철없이 즐거워보이던 얼굴이 형편없이 굳어서 약간 어색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클락은 고집스럽게 브루스를 마주보았지만 브루스는 계속 희미한 웃음을 유지할 뿐이다. 브루스는 밤을 배경으로 완벽한 음영이 그려내는 그 얼굴을 살핀다. 한참 부족하지만 분명히 클락도 나이가 들었다. 눈에 진 주름은 온화하지만 이마나 입가를 보면 그가 고집 있는 성격이라는 것쯤(브루스가 이야기하면 클락이 억울해할 테지만) 알 수 있다.
지금 남자의 얼굴은 단순히 인간에 비해 느리게 노화가 진행 중인 크립토니안의 얄궂은 면상이 아닌 그 모든 세월을 겪고서 다시 브루스 앞으로 나타난 이의 현상이다. 그리고 큰 변수가 없다면 브루스는 따라가지 못할 한참의 나날이 그에게 남았다는 것도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있다. 브루스는 자신의 부름에 한달음에 날아온 클락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어둠에 익은 눈은 굳이 크립토니안 수준의 시력이 아니라도 희미한 빛 속에서 표정을 가늠하기 쉬웠다. 그때 문득 떠오른 건 북극 한가운데의 요새에서 피곤에 찬 한숨을 쉬며 의자에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던 슈퍼맨의 뒷모습이었다. 클락이 잠시 클락 켄트를 쉬고 고독의 요새나 스몰빌의 농장에 박혀 있기까지 클락에게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클락은 장례식을 치러야했고, 끊임없이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매스컴에 답해야 했으며, 정부와 끝없이 알력을 다퉈야했다. 지쳐버린 클락에게 휴식을 제안한 것은 브루스였다. 클락 켄트도, 슈퍼맨도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만 정작 본인이 그 무게에 짓눌려버린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브루스의 제안이 의외였는지, 아니면 말을 꺼낸 상대가 이상했는지 클락은 자꾸만 갸웃갸웃 웃었지만 며칠 후 메트로폴리스에서 한 기자가 데일리플래닛을 떠나 귀향길에 올랐고, 슈퍼맨도 공식석상에서는 자리를 물러났다. 그랬던 그에게 브루스는 더 이상 배트맨으로서 있어주지 못할 뿐더러 브루스 웨인조차도 전부 내어줄 수 없다. 명목상으로는 클락이 클락 켄트로서 세상에 관여할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지만 어쨌건 클락이 멀쩡하게 존재하는 한 외부에서 요구하지 않아도 클락은 저절로 클락이다. 결국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브루스의 노욕인 셈이었다. 브루스는 본인도 예상치 못할 만큼 끈기 있게 살아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 덕에 눈을 감는 날까지도 철없는 도련님을 걱정하던 다정한 집사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었고, 테리를 만날 수 있었으며, 정말 기도도 해보지 못했지만 팀과 인사를 섞어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 바라지 못할 것들을 잔뜩 누린 세월이다. 그런데도 자꾸 그의 옆에 나란히 설 수 있기를, 여전히 그 푸른 눈에 자신이 있기를 바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클락이 차라리 전능하기만 하다면 문제는 훨씬 간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크립토니안은 칼엘이지만 슈퍼맨이고, 또 클락 켄트다. 어쩌다 이렇게 복잡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달리 묻자면 브루스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과연 미련만으로 그를 과거에 묻어두는 건 옳은 일인가.
“나에게는 배트맨에 대한 책임이 있어. 내가 미련하건 은퇴했건 상관없이 말이지. 클락, 자네 말대로 ‘나’는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더 오래 살 모양이야.”
브루스가 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클락은 오래 살아남는 건 브루스지 배트맨의 굴레가 아니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자꾸 멎어서 그만두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슈퍼맨이 배트맨이 언제까지고 배트맨일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연인 이전에 등을 맞대며 싸워왔던 동지로서도 못할 일이었다.
“알프레드가 여기를 떠났을 때”
브루스가 굳어있는 클락의 얼굴을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따듯해서 자꾸 웃음이 났다. 그래서 지금 브루스는 훨씬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한다.
“다시 눈을 뜨지 않는 그를 보고서야 조금씩 알겠더군. 알프레드가 죽는다는 걸.”
무슨 예감이 든 걸까. 클락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감으며 조금 오랫동안 브루스의 손길에 제 뺨을 부볐다. 한참 뒤 가라앉은 클락의 목소리가 말을 했다.
“바람이, 차.”
브루스는 잠자코 클락에게 다시 온전히 몸을 기울였다. 클락이 브루스를 조심히 안아서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른 아침. 브루스는 세 개의 묘를 돌보았다. 밑바닥에서 자라난 억센 풀을 뜯어내고 파르스름한 묘비를 닦았다. 예전 같았으면 까무룩 잠이 들어있을 시간이지만 직접적인 밤활동을 끊어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렇게 세상이 빛나기 전 시푸른 색을 띠는 때에도 눈을 떠있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클락이 곁에 있을 경우에는 예외지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브루스는 자신의 등 뒤에 바람이 하나 끼쳐온 것을 알았다. 인사도 건네지 않고 눈길을 주지 않아도 인기척의 정체가 클락인 것쯤은 눈을 감고서도 알 수 있었다. 클락은 브루스가 눈을 뜨면 하루일과로 부모님과 알프레드가 잠들어있는 이곳을 돌보러 온다는 것을 안다. 잠시 제자리에서 매무새를 가다듬는지 어떤지로 서있던 클락이 사박사박 이슬이 말라가는 풀을 밟으며 다가왔다. 클락의 품에는 아마 지구 다른 편에 위치한 나라에서 사왔을 꽃다발이 세 묶음 안겨있었다. 새벽바람부터 먼 비행을 한 클락의 차림새는 반 치수 쯤 커다란 양복에 안경을 꼼꼼하게 착용한 클락 켄트 특유의 것이었지만 그 중에도 꽤 힘을 준 축에 속했다. 이제는 눈에 익어버린 건지 클락의 차림새가 어수룩하다기보다 삼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클락은 브루스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나자 세 몫의 꽃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얼마간 비석을 바라보는 클락은 말이 없었다.
“용건은?”
브루스가 물었지만 음, 하고 클락은 계속 말을 고르고만 있을 뿐이다. 브루스는 다그치지 않고 그냥 클락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얼마쯤이 지나서야 등을 보이고 있던 클락이 천천히 몸을 돌려서 브루스와 마주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여기 올 때 계속 생각했는데...”
멋쩍은지 클락은 자신의 뒷목을 긁었다. 예전이라면 쓸데없이 찾을 수도 없는 말이나 억지로 하려고 한다고 할 법했지만 브루스는 그저 조용히 클락을 지켜본다. 지금, 이 순간은 클락과 브루스에게 놓인 하나의 분기점이다. 브루스가 자신의 욕심으로 오랫동안 유예했던 이 관계가 지금 이 시점에서 이제야 시간에 발맞추어 모양을 바꾼다.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하는 아침 해가 하늘을 점점 부드러운 빛으로 만들었다. 브루스와 눈을 맞추고도 잠시 입안에서 말을 찾던 클락이 불쑥 자세를 낮추었다. 커다란 몸이 갑자기 시야에서 훅 꺼지자 놀란 브루스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클락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자세로 제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브루스에게 쭉 내밀었다. 한줌이 될까한 공단 재질의 작은 상자 안에서 투명한 보석이 하루 첫 해를 머금고 천진하게 반짝였다. 브루스는 사건의 시료를 분석하는 눈으로 그것을 훑은 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클락을 보았다.
“초록색이 아니군.”
“청혼 정도는 안전하게 하고 싶어서.”
“자네 수제인가?”
“안타깝게도 시중에서 유통되는 상품을 모아뒀던 월급으로 구매한 것입니다만.”
클락이 살짝 불퉁하게 대꾸했지만 지팡이를 반듯하게 짚은 브루스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흠흠, 클락은 목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표정을 다잡았다. 얼굴이 진지하게 정돈된 클락이 또박또박 발음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자네와 함께하고 싶어. 브루스 웨인,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서늘하게 클락을 내려다보고 있던 브루스는 여전히 꿈쩍도 않는다. 브루스는 모양 좋은 입술만 달싹였다.
“전에 내가 한 말, 제대로 들은 거겠지?”
“세상이 바뀌고 자네가 나이 들었다는 거? 무슨 세월은 자네만 살았나 나도―”
“그게, 아니잖아. 설마 기자였다는 양반이 맥락도 못 읽나?”
브루스는 클락의 말을 자르며 짓씹어서 이야기했다.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의 하얀 등위로 보다 뼈대가 도드라졌다. 클락은 그것을 못 본 척 대꾸했다.
“그래서 여기 왔잖아, 브루스.”
차츰차츰 높아지는 햇빛이 매서운 얼굴에 또렷한 그림자를 잡는 것을 눈에 담으면서도 클락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 정도에 일일이 겁을 먹고 돌아섰다가는 고담의 주인과는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다. 앞으로의 오늘에 브루스가 없다.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 난 지금에야말로 자네가 날 옆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해.”
“웨인은 더 이상 누군가를 지키고, 지지할만한 이름이 아니야. 법적으로 연관되어봐야 메리트 따위 없어.”
“그런 건 바라지 않아.”
“리그도, 세상도 변했지만 날 통해서 클락 켄트를 증명할 필요는 없어. 자네 하는 짝은 요란한 쫄쫄이 때나 지금이나 같은데 뭐가 불안해서 나를―”
“내 말.”
이번에 대화를 끊어낸 것은 클락이었다. 브루스만큼이나 굳은 표정을 한 클락은 단어마다 하나하나 꼭꼭 씹어서 힘을 주어 발음했다.
“자네야말로 내 말 똑똑히 들어. 나는 지금 자네에게 청혼을 했고 자넨 거기에 ‘좋다’, ‘싫다’ 둘 중 하나로 답을 하면 돼.”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뭐로 듣지?”
“아니, 자넨 대답이 아니라 회피를 하고 있잖아. 브루스, 난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내가 옆에 있는 걸 원치 않는다면 싫다고 하면 돼. 자네와 함께 나이 들지 못하는 내가 싫다면 그렇게 말하면 된다고.”
브루스는 아랫입술을 질근 씹었다. 누가 싫다고 못할 줄 알고? 기껏 사람이 나이 들어 유해진 덕에 좋은 말로 끝내려고 했더니 이 외계인은 굳이 자신의 호승심을 지른다. 브루스는 입을 열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스몰빌정도야 울면서 물러날 만큼 독한 말을 내뱉으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저 눈동자는 도대체 뭘까. 웃기지도 않은 자세로, 어디 하나 비틀린 곳 없어서 심심하기까지 한 청혼을 전직 배트맨에게 입에 담는 주제에 왜 저렇게 궁지에 몰린 눈을 하는가, 정말 궁지에 몰린 게 누구인줄 알고. 브루스는 지금이 아침인 점을 탓했다. 차라리 밤이었다면 말갛게 푸른빛이 고여서 그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다가 어떤 모습을 하는지 따위 친절한 어둠이 묻어놓았을 텐데, 그 핑계라도 댈 텐데 이런 밝아오는 햇빛 아래서는 굳이, 쓸데없이 눈에 밟힌다. 브루스는 괜히 알프레드에게 이 녀석 하는 양 좀 봐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어졌지만 어쩐지 귓가에 들리는 건 한숨과 닮은 바람소리다. 문득 브루스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일부러 이 시간에 여기를 찾아왔군.”
지구 저 편 꽃집까지 굳이 들르면서 말이야. 브루스는 한껏 날이 선 투로 혼잣말처럼 빈정거렸다.
“자네와의 앞일을 말하자면 이분들 앞만 한 곳이 어디 있겠어.”
얄밉게도 클락은 지지 않고 대꾸한다. 브루스는 눈을 꾹 감으며 후우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한숨을 몰아쉰다. 얼마 뒤 낮아진 목소리로 브루스가 말했다.
“그 구닥다리 자세 그만두고 일어나.”
하지만 클락은 여전히 브루스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며 반지를 들이밀고 있을 뿐이었다. 브루스는 혀를 차더니 날카롭게 소리를 친다.
“부모님, 알프레드 앞에서 민망하니까 일어나라고!”
클락은 그제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클락과의 눈높이가 평소대로 같아지자 브루스는 고개를 픽 돌리며 불만스럽게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물었다. 광대뼈가 시원스런 틀을 잡고 있는 뺨 위에 발갛게 물이 든다. 클락이 조심스럽게 브루스의 턱가로 손을 뻗으면 매서운 눈매가 꼭 그것을 물어뜯을 듯이 좇는다. 클락은 그것을 보고도 미소를 지었다. 피가 돌지 않아 하얗게 질린 입술을 빼내면 다시 도톰하게 살이 오르며 혈색이 돌았다. 클락이 그 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 툭 하고 브루스가 짚고 있던 지팡이로 가볍게 클락의 정강이를 때렸다.
클락은 결국 소리를 내어 웃는다. 브루스에게는 뭐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 모르지만 정말이지 간단한 일이다. 잠깐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간간이 작물과 가축을 돌보며 몰래몰래(클락이 생각하기로는) 봉사활동도 하다가 불현듯 그런 적 없었다는 듯이 돌아왔을 때 브루스가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클락을 묵인했을 때부터 클락의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는 결말이 나있었다. 클락은 이래봬도 승산 없는 승부는 하지 않는다. 브루스가 자신에 대해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 쯤 알고 있었다. 유예기간이라느니 그런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클락은 다만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브루스와 자신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 할 수 있을 만한 때를. 어쩌면 배트맨을 은퇴한 브루스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브루스로서만 있을 때가 온 거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을 살다가 모르는 새에 브루스가 늘 경계하던 불확실성이 클락도 무서워져서 몸을 사리고 브루스 입으로 이젠 아무 걱정 없다며 이야기해줄 그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동화처럼 완벽한 때 같은 것은 없다. 히어로라는 일을 하다보면 더더욱 그런 신기루를 믿고 기다리다간 아무것도 바랄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주먹을 얼마나 꽉 쥘 수 있느냐가 아니라 손에 무엇을 담고 싶어 하는가이다.
“왜 나에 대해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아? 아니, 내가 미안해. 자네 성격을 알면서 계속 답을 자네에게 미뤄놓은 내가 짓궂었어. 브루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온 거야. 난... 각오하고 있어.”
클락이 자신을 곧은 눈으로 보고 있는 게 피부에 닿았다. 브루스는 짧은 한숨을 뱉고서
“우리 관계는 내가 자넬 죽이는 걸로 끝날 줄 알았지.”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 클락을 곁눈으로 쏘아보면서 살벌하게 말했다. 하지만 실쭉한 배트맨의 진담에도 클락은 그저 태평하다.
“그럼 잘됐잖아. 요주의인물이 지금 자네 수중에 스스로 걸어가겠다고 하는 거라고?”
“배트맨이라고 좋아서 슈퍼맨을 죽이자고 달려드는 줄 아나?”
“좋아서건 싫어서건 나는 상관없어.”
여전히 고개를 모로 돌린 채, 어지간히 속이 분한지, 툴툴거리는 브루스에게로 다시 질리지도 않고 손을 뻗은 클락은 이번에는 그의 볼을 살포시 감싸보았다. 옆이마에 희미한 푸른빛의 핏줄과 고집스러운 입매, 조금 피곤해 보이는 미간의 주름을 하나하나 보면 어쩜 이렇게 얼굴을 이루는 하나하나가 브루스스럽다. 클락은 드디어 얼굴을 마주하는 브루스에게 그의 빙하 같은 눈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만약의 그날엔 배트맨이 날 죽이면 돼. 다른 누구도 아니야. 대리인도 후계자도 안 돼. 다크나이트 본인이 날 죽이는 거야. 난 그가 아니면 안 되니까.”
그 정도 기력은 항상 있을 거잖아? 곧 죽어도 배트맨일 브루스 자네라면. 클락이 바짝 얼굴을 가까이 해서 거의 이마가 맞닿을 듯하다. 브루스는 갑자기 눈 안에 한가득 들어찬 클락 때문에 시야를 다잡으려고 눈을 깜빡였다.
“그게 자네가 거는 조건인가?”
브루스가 물으면 클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락은 기도문을 외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죽음이 나에게서 당신을 거두어간 후에도, 클락은 괜한 뒷말을 속으로 감추어 놓는다.
“클락 켄트, 칼엘은 브루스 웨인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클락이 다시금 프러포즈했다. 브루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정말 그거면 되는가? 온전한 것이라곤 무엇 하나 내줄 수 없는 반쪽짜리의 늙은이를 순진한 외계인은 납득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역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슈퍼맨은 바보다. 각오라는 건 아직 닥치지 않은 어림잡은 것이기에 가능한 법이다. 그걸 모를 리도 없으면서 굳이 클락은 감정을 짊어지려고 한다. 그렇기에 그가 브루스가 사랑해 마지않는 클락이라는 사실이 지금으로서는 지독하기까지 하다. 브루스의 마음에는 몇몇 의구심이 자라나지만 이게 눈을 뜨면 한가득 펼쳐질 바다에 잠겨 전부 소용없게 돼버릴 것을 안다. 브루스는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많이 물러진 탓이라고 혀를 찼다.
조심히, 브루스는 정말 조심히 눈을 떴다. 어쩌면 다른 결말을 이끌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용없는 바람도 담아본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클락은 고집스럽게 브루스의 눈앞에 있고 배트맨의 예상은 빗나가지를 않았다. 예의 공백 이후 우선순위가 더 분명해진 클락은 어째 다루기가 조금 버겁다.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순수한 결정이 담긴 상자의 뚜껑을 덮어내며 브루스가 손을 미끄러트려 그 상자를 받치고 있는 클락의 손으로 건너가 손목을 정말 별것 아닌 방향만을 가리키는 힘으로 붙잡았다. 아침에 아직 데워지지 않은 신선한 바람을 몰래 가슴 속에 가득 담은 뒤에 브루스는 입술을 달싹여서 성대의 울림을 거의 담지 않은 말을 뱉었다. 거의 한숨과 같은 단어의 조합이 클락의 입술 위에 부딪친다. 용케 그것을 알아들은 클락이 이제 자신보다 조금 덩치가 작아진 브루스를 한 아름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날은 이제 완전히 밝는다.
2017.12.27.
하늘이 푸르고 바람은 기분 좋아 풍경 속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날에, 두 사람으로부터 받은 연락으로 다이애나는 그리운 얼굴들과 카페의 테라스 자리에 앉아 마주하고 있다. 여전히 온화하고 자애로운 얼굴이지만 보다 굳건해진 클락과 머리가 세고 지팡이를 짚는 탓에 살짝 등이 굽었지만 이지적인 빛이 변함없이 날카로운 브루스가 커피를 마시는 다이애나를 앞에 두고 어딘가 긴장이 가득 들어간 표정을 지었다. 특히 테이블 아래서 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꼼실거리는 브루스가 더더욱 그랬다. 클락은 그런 브루스를 살피며 조심히 자신의 손을 그의 손등에 곁들이며 달래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후, 하고 한숨처럼 가볍게 웃으며 옛 친우들이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할지를 기다렸다. 얼추 둘이 다시 사귀기 시작했다는 정식 보고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며 다이애나는 여유를 가지고 그저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 뭐, 정말 단순히 교제 보고를 위해 저렇게 각을 재고 있다면 조금 김이 빠질 것도 같지만 그래도 기쁜 일은 기쁜 일이기 때문에 서툰 이에게 본디 너그러운 다이애나는 재촉하지 않고 부드럽고 묵직하게 퍼져나는 커피 향을 감상했다.
"다이애나."
한참 뒤에 브루스가 간신히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커피잔에서 입술을 뗀 다이애나는 "음?"하고 싱긋 웃으며 그의 부름에 응했다. 여신의 자비가 묻어나는 드넓은 눈동자를 앞에 한 브루스는 다시 입을 다물며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클락은 소곤소곤 "내가 이야기할까?"하고 말했지만 브루스는 고개를 저은 다음 파란 시선을 올곧게 다이애나에게 고정했다. 브루스가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클락과 내가 결혼을 하기로 했어. 그래서... 당신에게 주례를 부탁하고 싶어."
듣기에 너무나도 좋은 부드러운 음색을 띤 브루스의 목소리가 다이애나의 고막을 수줍게 두드리며 들어왔다. 다이애나는 마치 멈춘 시간 속에 있는 것 마냥 우뚝 굳어서 그저 긴 속눈썹만 나풀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짧지만 선명한 공백 속에서 다이애나는 자신이 들은 브루스의 이야기를 반추하고 또 반추했다. 그녀의 침묵이 불안했던지 브루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다이애나?"하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때 마법처럼 다시 이 세상의 경쾌한 소음들 사이로 돌아온 다이애나는 자신의 눈가가 따뜻해지는 것을, 그리고 코끝이 지잉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오, 세상에. 헤라시여!"
다이애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브루스에게로 다가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옆에 앉아있는 클락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드렸다. 다이애나는 그런 자세로 한참을 그저 여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듯 이름을 연호했다. 그렇게 얼마간 있다가 겨우 만족했는지 몸을 물리며 다이애나는 근래 들어, 아니 이번 세기에 들어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보았다. 약간 눈에서 눈물이 어릴 정도로 기뻤던 다이애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다음에도 계속 브루스와 클락을 보면서 자꾸만 미소를 깊이 했다. 다이애나의 시선에 귓가가 새빨갛게 익어버린 브루스는 살짝 고개를 모로 돌렸다. 클락은 그런 브루스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다이애나에게 말했다.
"지인들만 불러서 웨인매너에서 조용한 식을 올릴 생각이야. 주례는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 외에는 있을 수 없었어. 다이애나, 우리의 결혼에 주례를 맡아 주겠어?"
다이애나는 신선한 공기를 가득 폐 안에 담은 다음 대답했다.
"물론이지. 맙소사, 클락. 당신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일이라니... 그 날은 나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거야."
푸른 하늘에서는 여전히 샛노란 태양이 반짝반짝 고운 빛을 흩뿌리고 있다. 그 빛의 조각에 뒤섞여 다이애나는 마냥 따듯하게 부푸는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클락은 브루스를 따라 긴장했던 몸에서 힘을 풀며 맑게 웃었다. 다만 브루스는 그저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뿐이었다.
오랜만에 모인 트리니티는 앞으로 진행될 식 얘기는 물론이고 요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본인들의 근황, 새로 모인 저스티스 리그 히어로들에 관한 이야기, 다른 차원에서 일이 흘러가는 정황 등을 죽 이야기하며 옛날의 그들처럼 때로는 웃고 때로는 미간을 좁히며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한참을 그러던 중 클락의 귀에 슈퍼맨을 필요로 하는 호출이 닿았다.
"잠깐 자리를 비울게."
클락이 양해를 구하며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이애나와 브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의 입술 위로 짧게 입맞춤을 한 클락은 상쾌한 바람을 남기며 자리에서 떠났다. 남은 두 사람은 클락이 가고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며 그를 배웅했다.
"브루스."
섭취하는 카페인을 줄이기 위해 허브 차를 주문했던 브루스가 제 찻잔에 손을 뻗어 조용히 들이키는 것을 보던 다이애나가 나직이 브루스를 불렀다. 잠시 시선을 동요하던 브루스가 마치 혼이 나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이애나를 마주했다. 다이애나는 쓰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혹시 당신은 내가 주례로 서는 게 달갑지 않았어?"
"아니야."
브루스는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으며 곧바로 단호하게 답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다이애나, 당신이 식의 주례를 맡아준다면 우리에게 그것보다 더한 축복은 없어."
"그럼 왜 그래? 왜 그렇게 켕기는 얼굴을 하는 거야?"
다이애나의 물음에 브루스는 한참을 대답 없이 조금 미지근해진 찻잔을 부여잡은 채 말과 말을 고르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다이애나는 그런 브루스의 손등을 살짝 자신의 손끝으로 토닥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왼손에는 이미 투명한 보석이 들어있는 반지가 약지 위에서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주례를 부탁하는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브루스는 내내 손을 다이애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내려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 반지를 확인한 다이애나는 이 결혼 얘기가 못해도 브루스가 저 반지를 어색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의 시간과 함께 진행된 일임을 짐작했다. 브루스는 자신의 손에 비하자면 아직 세월의 흔적이 그렇게 많이 있지 않은 원더우먼의 손을 그리운 듯 바라보다 겨우겨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브루스가 다시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말을 멈추어 세웠다. 다이애나는 그런 브루스를 다독이며 그저 그가 말을 이어가는 것을 기다렸다. 후, 깊이 숨을 고른 브루스가 어딘가 조금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을 마저 했다.
"나는 이렇게 행복해지는 건가?"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힘겹게 끝을 맺은 브루스의 말을 듣고 다이애나는 그의 말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가뿐한 대답을 하며 눈썹을 기울였다. 다이애나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브루스가 바람이 빠지는 풍선마냥 웃으며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다이애나, 난... 내가 이렇게 오래 살줄은 꿈에도 바라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그 세월동안 많은 소중한 이들을 슬프게 했지. 알프레드는 눈을 감으면서도 내 걱정을 멈추지 못했고 딕은 나에게 화가 나버렸어. 자신이 하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던 바바라에게서 억지로 그녀의 카울을 박탈했어. 팀은 이제껏 조커로 인해 고통 받았지. 거기다 테리까지... 그 아이도 내 길에 끌어들이고 말았어."
브루스는 자신의 가족들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천천히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보았다. 쉬이 마음에 새겨지는 그 얼굴들은 브루스를 너무나도 따듯하게, 한없이 죄스럽게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브루스의 노욕에 걸려 얼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추억으로 박제되었을 감정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게 된 이가 있다.
"...클락을 놓아주지 못했어."
찻잔을 잡은 손이 보통의 사람은 알지 못할 정도로만 바르르 떨렸다. 다이애나는 클락에게 휴식을 제안한 후로 브루스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움직였는지를 기억했다. 물론 그 후로도 클락은 제 힘을 이 세계를 위해서 기꺼이 사용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는 슈퍼맨을 대신해 배트맨은 정말, 정말 부지런하게 모든 것을 돌보았다. 다이애나는 그즈음보다 전부터 다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에 힘을 보태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서도 그저 얼굴을 보게 되는 날 가끔씩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안부를 확인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찻잔에서 브루스의 손을 조심히 떼어내며 대신 자신의 손을 잡게 했다. 살짝 식어 있는 손에 다이애나의 손이 온기를 넣어주었다.
"차라리 다시 만났던 날에 그를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그걸로 클락도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다이애나, 나는 분에 넘치게 오래 살고 있지만 내가 한 일을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을 살고 있어. 그런데 나는,"
브루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행복해지려 하고 있어."
"당신이 행복해지지 않으면 당신을 남기고 간 알프레드, 당신의 아이들, 그리고 클락은 좋을까?"
"...그런 건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아."
다이애나가 힘 있게 브루스의 손을 잡았다.
"아니, 브루스. 당신이 행복으로부터 도망가서 당신을 비롯한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얻는 건 당신의 자기만족뿐이야. 여기서 알프레드가 당신의 행복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당신도 알겠지? 만약 당신이 박쥐의 이름 아래 가족이 되게 한 아이들에게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더더욱 행복해져야해. 그들이 마음껏 당신을 잊고, 미워하고,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그들이 그럴 수 있는 온전한 당신으로 서있어야 한다고. 그들만 두고 행복해지는 당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해? 어차피 당신은 행복해진 다음에도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거 아니야. 그렇다면 기꺼이 비겁해져서 그 아이들이 동정도 죄의식도 없이 당신을 비겁하다고 욕할 수 있게 해줘.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그들도 그들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줘. 배트맨, 당신이 미움 받는 걸 망설이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물론 그의 가족이 그가 행복해지는 것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다이애나는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어딘가 필사적인 얼굴로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클락은? 내 미련으로 시한부를 걷게 될 칼엘은 어떻지?"
"...그의 감정이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 건 알고 있지?"
다이애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차분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브루스도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내며 가벼운 한숨을 쉰다.
"유감스럽게도."
"그렇다면 당신도 실컷 그에게 감정을 쏟아줘. 클락과 잔뜩 사랑을 하고, 이따금 싸우기도 하고, 당신이 눈을 감는 날 그 옆에 클락이 지킬 수 있게 해줘."
"클락 켄트는 바보 같은 남자야. 그런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삶은 덧없어, 브루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살아가지만 사실 행복보단 아픔에 더 민감하고, 보다 깊이 각인되어 살아가. 당신도 알잖아. 사람은 그 아픔에 대응하면서 그 사람이 되어 가는걸. 물론 타인이 그 사람의 삶에 아픔을 강요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어. 하지만 아픔을, 그 가능성을 클락이 선택했고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클락 켄트일 수 있게 도와주면 돼. 클락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야. 자신이 선택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브루스, 그는 당신과 같아. 배트맨인 당신은 알고 있는 것처럼 보기에는 칼이 천 년 만 년 건재할 것 같지만 그도 나이가 들고, 어쩌면... 그가 당신보다 먼저 눈을 감게 되는 세상도 있을 수 있지. 어쩌면 정부에서 그를 이용하려고 할지도 모르고, 저스티스 리그가 붕괴해서 그가 모든 책임을 지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은 그걸 클락에게 말하지 않고 기꺼이 참아내고 있어. 꼭 당신이 클락과 함께 있으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감수했던 것과 같이 그에게도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거야."
브루스는 눈을 꾹 감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쉰다. 모두 브루스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확률 상으로 클락에게 그런 일들이 있을 가능성보다 자신이 클락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 쪽이 몇 번 따져볼 것도 없이 높아서 그 커다란 리스크를 짊어지는 클락의 순진함, 따듯함, 사랑스러움이 브루스는 새삼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감정의 동요는 메리지 블루라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클락으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은 이후 일련의 준비들을 죽 진행하면서 브루스는 자꾸만 제 무름을 떠올리고 말았다. 지금 시점에서 다이애나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토로한 건 어떤 대단한 기적을 바라는 것도,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뒤바꿀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도 아닌 브루스가 직면해야하는 것을 다시금 선명하게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프러포즈를 한 클락에게 자신과 함께해줄 것을 되물었던 브루스의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의미하게 될지 더없이 신뢰하고 있는 친구의 지혜와 정명함으로 낱낱이 밝히어 마주하고 싶었다. 자신의 불안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 답지 않게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다잡기 위해, 단순한 욕심을 넘어 이 결혼이 클락을 위한 일이 될 수 있기 위해. 브루스는 자신의 손을 단단하게 마주 잡고 있는 소중한 친구의 손이 전해주는 용기를 제 나이든 심장에 담는다. 다시 말갛게 눈을 뜬 브루스의 얼굴에는 조금 긴장이 덜어진 듯 보다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아주 괜찮아지지는 않아도 이정도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충분했다.
"당신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걸... 나는 내 생에 주어진 커다란 선물로 생각해."
브루스가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방긋 웃었다.
"손이 많이 가는 친구를 좋아해. 내가 여신이 아닌 다이애나 프린스로서 세상에 어울리게 해주니까."
하하, 브루스가 비로소 진심어린 웃음을 소리 내어 뱉어냈다. 다이애나는 자세를 바르게 하며 브루스를 더없이 상냥한 눈빛으로 보았다.
"당신과 클락을 사랑하는 친구로서,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다이애나가 말했다.
"역시 당신 외의 주례는... 생각할 수 없어."
브루스가 장난기가 섞인, 하지만 볼에 올라온 붉은 기운은 감추지 못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식은 찻잔을 앞에 두고 다이애나와 브루스는 다시 맑은 바람이 그들이 앉은 자리로 불어올 때까지 한동안 키득키득 어린아이들처럼 웃었다.
-왠지 브루스는 자기 손으로 클락을 죽이게 되는 것보다 클락이 자기를 구하다가 죽는 걸 더 싫어할 것 같습니다.
-남들 몰래 둘이서만 결혼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숲뱃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에 드디어 때가 되었나! 하는 마음으로 축하해주면 숲이 막 베시시 웃으면서 사실 이번이 n년째 기념일인데 그때는 제대로 지인들을 불러서 식을 올리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을 브루스가 들어줬다면서 쑥스러워하면 리그 사람들은 막 배신감과 역시 그랬었나의 더블콤보에 휩쓸리고요. 주례는 원더언니가 봐주시는 걸루.
-브루스가 먼저 청혼 한다면 갑자기 혼인신고서 한 장이랑 펜 한 자루를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올려두면서(분위기로는 왠지 이 돈이면 되나/이걸로 우린 끝이야 같은) "해 되는 건 아니니까. 내키면 사인 해."이러면 어떨까 했습니다. 한 며칠 클락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시뮬레이션 해보다가 클락 켄트라는 신분이 이렇게나 취약한가! 하면서 더는 두고 볼 수 없게 된 브회장님이라거나요. 그 뒤에 알프레드가 막 짜게식은 눈으로+안쓰러운 눈으로 도련님을 바라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왠지 이거 dceu같네요.(?) 굳이 혼인신고가 아니라도 방법은 있을 거 같지만 더위먹은 숲뱃러는 우겨봅니다.
-모든 아무말은 더위가 그랬습니다. 나쁜 건 더위예요.
'2 > 비욘드 늙숲늙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숲뱃] And they will live happily ever after (0) | 2018.06.06 |
---|---|
[숲뱃] 회귀 (0) | 2018.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