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숲늙뱃 이야기입니다, 결혼 판타지가 가미됩니다.
회귀(http://sowhat42.tistory.com/86) - Will you(http://sowhat42.tistory.com/80) - 이번 이야기, 순서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쪽(https://znfnxh2.postype.com/post/2020116)은 성인글 버전입니다.
“우리는 끝을 지고 있으면서도 영원을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허상이라 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허무라 하지요.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감히 입에 담는다는 것이 기꺼이 꿈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의 양식과 가치는 그런 무모한 부토에서부터 피어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잇는 길의 끝에서 다이애나가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테미스키라의 전통예복을 갖추고 곧게 편 자세로 잔잔한 미소를 띤 다이애나는 정말로 자애로운 신 그 자체로 보였다. 결혼식 당일인 오늘은 특별하게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브루스는 이따금 제 백발 너머의 하늘이 눈부셔서 몇 번씩 눈꺼풀을 부러 껌뻑였다. 어쩌면 익숙지 않은 하얀색 의복을 몸에 두르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지팡이를 대신해 브루스의 체중을 나누어 지탱하며 클락이 단단하게 브루스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하얀 비단 장갑 너머에서조차 그 손의 윤곽이나 온도가 지나치게 선명해서 브루스는 메마른 손바닥에 땀이 비어지는 것만 같았다.
“제 더없이 소중한 두 사람이 부부로서 미래를 약속하는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결혼은 완결점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여정인 만큼 누구도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를 함부로 논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저는 월즈 파이니스트로서 둘이기에 더욱 빛이 났던 두 사람의 연대를 믿으며, 서로가 서로의 강점이 되어 두 사람의 모든 순간을 단단히 지탱하리라 확신합니다. 과거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은 지금 이 오늘이 아름답다는 사실입니다. 부디 여러분, 오늘을 아낌없이 격려해주시고 축복해주십시오. 오늘 브루스 웨인과 클락 켄트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맹세를 묻는 말에 자신이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브루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했고 브루스는 머릿속이 텅 비었지만 리허설 때의 기억을 기계적으로 되짚어 고개를 끄덕였던가 짧게 무어라 말을 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힐끗 옆을 보면 클락이 마치 브루스가 그런 대답을 할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는 듯 깜짝 선물을 품에 안은 아이마냥 눈가의 잔주름을 잡으며 햇빛처럼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쿵, 쿵하고 심장소리가 소란스러웠다. 귓가에서 고동이 새삼 커다랗게 둥둥 둥둥 울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뛰는 건지 멈춘 건지 브루스는 통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몇 번인가 나이 들어 얻은 지병이 오늘 도진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요즈음에 들어서는 즐거운 소식보다도 상실과 작별에 대한 이야기가 브루스와 클락이 속한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이어서 연락을 받고 식에 참석해준 이들 모두가 어딘지 들뜬 기색이었다. 그리운 이들, 소중한 이들, 고마운 이들과 몇 마디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는 중에도 브루스는 눈이 부셨다. 꼭 빛의 파편이 눈알에 박힌 것처럼 망막이 하얗고, 반짝반짝하고, 시려서 그렇게 모두가 발그레 웃고 있는 중에 브루스만 혼자 조금 눈썹을 찌푸렸던 것도 같다. 그나마 오늘 자리에 모인 손님들은 브루스가 브루스 웨인이면서 동시에 배트맨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딱히 별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을 테다.
브루스는 자신의 방에 놓인 커다란 침대에 낯설게 걸터앉아 검푸른 빛으로 식은 장막이 드리운 하늘을 멀거니 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떠올렸다. 클락처럼 저 먼 어딘가의 소리를 주워들을 수 있는 청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브루스의 귓가에는 잔상처럼 웃음소리가 계속 맴돌고 있다. 결혼식이 끝나서는 사람들과 조금 이른 만찬을 나누었다. 식을 비밀리에 조용히 준비하려다 보니 접객을 위한 요리조차 브루스와 클락의 가족들과 다이애나가 직접 마련하는 수밖에 없어서 그 웨인에서 대접하는 만찬으로는 소박한 감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묵혀온 술과 사람들의 추억, 웃음이 어우러져서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띤 식사였다. 그렇게 오늘의 행사가 마무리 되고서 브루스는 시계를 확인한 뒤 습관대로 배트케이브로 발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가족들이 그런 브루스를 막아섰다. 심지어 제일 먼저 전직 배트맨을 그의 동굴에서 쫓아낸 것은 브루스의 결혼 이야기에 놀라움을 넘어 충격을 받은 듯했던 현직 배트맨, 테리였다.(“어... 그러니까, 브루스랑 클락... 배트맨이랑 슈퍼맨이요? 둘이 결혼한다고요?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처음 이야기를 들은 테리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재차 확인했다. 그 뒤로도 패트롤이 있는 밤마다 통신을 통해 테리는 브루스에게 “어떻게 내가 모를 수 있죠?” 하고 간헐적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다 끝에 가서 테리는 “왜 내가 여태껏 몰랐지?! 그러고 보니 그때―” 하면서 자책을 하는 건지 요즘 젊은이 나름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건지 모를 혼잣말을 내뱉었다. 브루스는 테리의 정서가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바바라와 팀에게 상담을 요청했고 어느 날 저녁에 팀이 테리에게 “배트맨의 세계에 어서 오렴, 얘야.”라고 말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 바바라는 잔뜩 웃음을 참는 얼굴로 브루스의 등을 다독였다.) 테리가 배트맨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브루스는 아직도 많이 신경이 쓰였다. 특수 슈트도 조금 더 손보고 싶었고, 어둠 속에 숨은 악령처럼 도시를 배회하던 과거의 자신과는 다르게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희화화 되어버린 지금의 배트맨이 괜히 더 험한 일을 당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역시 아래에... 브루스는 살짝 허리를 들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동시에 커다란 문이 고요한 울림소리와 함께 열리며 클락이 정말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야. 테리가 나가게 되면 딕이 보조할 거래. 팀은 코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기술이 있다고 같이 메트로폴리스로 갔어. 바바라는 조금 있다가 사무실로 돌아갈 건데 카라가 같이 따라간다고 했어. 브루스, 자네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시 털썩 침대 위에 엉덩이를 붙인 브루스는 클락을 멍하니 보다 고개를 끄덕이는지 가로젓는지 모를 애매한 동작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클락이 성큼성큼 자신에게 오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이 누군가와 나란히 같은 옷가게에 들어가 한 쌍이 되는 디자인의 예복을 맞춘다면 아무리 지금의 그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둥, 대부호의 초라한 말로라는 둥의 동정과 빈정거림을 한 번에 떠받는 신세이기로서니 고담 내 커다란 소동이 될 것이 뻔해서 클락과 떨어져 각자 옷을 맞출 수밖에 없었던 탓에 그가 제대로 차려 입은 모습을 보는 건 브루스에게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두 세대에 걸쳐 브루스 웨인의 거의 모든 정장을 책임져온 테일러는 짐작한 바가 있는지 비밀스럽게 웃으며 “웨인 님 마음에 꼭 들도록 마무리하겠습니다.” 하고 이제껏 그가 결과물로써 충분히 보여줬던 사실을 새삼 인사말로 남겼다. 기본 디자인은 클락과 미리 얘기를 나누어 정해놓았지만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는 특별한 주문 없이 넘어갔던 브루스는 클락이 입고 있는 턱시도가 자신의 것과 꼭 맞춰진 것을 보고 조금 놀랐었다. 나이가 들어도 어디 구부러진 곳 없이 건장한 체격을 한 클락은 하얀 턱시도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소화했다. 자신처럼 억지로 등을 더더욱 꼿꼿이 펴려고 기를 쓰거나 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몸이 갖춰진 클락은 밝은 옷과 어울리게 활기로 반짝이면서도 그의 연륜이 어우러져 멋스러운 무게감도 있었다. 정말이지, 브루스의 마음에 쏙 들었다. 브루스 자신의 차림을 보았을 때보다도 더더욱, 아니 이쯤 되면 조금 과하다는 생각도 들만큼.
브루스는 자꾸만 자신의 뇌리에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현실감을 붙잡으며 무표정하게 클락을 보았다. 브루스는 지금 자신이 마치 구름 위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제3자가 되어 관망하는 것처럼 두둥실 마음이 뒤놀았다.
“브루스?”
머리를 반듯하게 넘기고 한껏 정돈된 얼굴을 한 클락이 조심스럽게 브루스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클락에게서는 자신과 같은 종류의 향수 냄새가 난다. 이 센스는 딕일 가능성이 높다. 브루스는 클락을 보면서 계속해서 끝이 날 줄 모르는 생각의 타래를 풀어나갔다. 그때 불현듯 클락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우더니 둘의 이마가 가볍게 맞닿았다. 순간 섬광처럼 결혼식 마지막에 클락과 입을 맞추었던 것이 떠올랐다.
“조금... 열이 있는 거 같은데.”
푸른 별을 담아 놓은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자신이 그와 키스를 했다. 앞으로를 맹세하면서, 그 배트맨이. 브루스는 갑작스럽게 자기로 돌아와서는 설게 고개를 젓고 손사래를 쳐 클락을 약하게 밀어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이마가 뜨겁다. 아니 어쩌면 클락의 이마가 뜨거웠던 게 아닐까? 브루스의 어설픈 몸짓에도 선선히 클락은 몸을 조금 물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브루스의 방에, 자신의 곁에 있었다. 브루스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서.
“...집에 안 가나?”
홍조가 오른 얼굴로 브루스가 인상을 쓰며 나직이 물었다. 하하, 클락이 즐겁게 웃으면서 단정한 브루스의 눈썹을 쓰다듬었다.
“이제 자네가 있는 곳이 내 집인걸.”
그러면서 쪽 하고 주름이 잡힌 미간에 클락이 뽀뽀를 했다. 브루스의 눈동자가 도르르 옆으로 굴러갔다. 브루스는 몇 번 손을 자신의 무릎 위에서 꼼질꼼질 움직이다가 그의 뺨을 감싼 클락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클락을 떨어트려 놓을 생각이었던 브루스는 문득 그 손 약지에 둘러진 귀금속을 발견하고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쿵, 쿵. 오늘 따라 브루스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자신의 가슴 속에서 나는 소리였던 모양인지 자꾸만 무언가를 확인해보는 듯한 브루스의 동작들을 지켜보면서 클락은 늑골 안쪽이 뻐근해졌다. 브루스는 지금 이 상황을 진짜라고, 현실이라고 결론내릴까? 자신은 정말 제대로 오늘 속에서 지금을 보고 있는 게 맞을까? 매사에 되도록 긍정적인 면을 중점에 두고 생각하려 노력하는 클락에게마저 오늘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고 꿈만 같았다. 꽤 긴 시간을 걸쳐 의논하고 준비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신이 제대로 땅에 발을 붙여서 걷고 있는지 혹시 이게 무슨 마법이나 정신조작이나 백일몽은 아닌지 몸단장을 하다말고 자꾸만 제자리에서 빙빙 돌던 클락은 기어이 제 뺨을 몇 번씩 꼬집어보았다. 코너와 함께 클락을 살피러 왔던 카라가 그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깔깔 웃으며 “칼, 자꾸 그러다가 볼거리 들어서 나가겠어!” 하고 말했다.
자신과 같은 하얀 턱시도 차림을 하고 왼손의 같은 위치에 반지를 끼고 있는 브루스가 진짜가 맞는지 궁금해진 클락은 또 참지 못하고 쪼옥 다시 뽀뽀를 했다. 살풋 열이 오른 따끈한 피부와 그 온도에 실려 기화하는 향수 분자가 어우러져 클락의 머릿속에 콕콕 박혔다. 브루스가 살짝 목을 뻣뻣하게 굳히자 클락은 그를 달랠 생각으로 그의 뒷목에 손을 넣어 가볍게 마사지를 했다. 한참 그러다가 클락은 브루스의 드레스셔츠 칼라 아래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그가 매고 있는 은색 실로 넣은 자수가 들어간 보타이의 매듭을 풀어낸 다음 그의 목가가 편하게 셔츠 윗 단추를 두 개 정도 끌렀다. 브루스는 그저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나직이 호흡하고 있었다.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브루스를 살피면서 클락은 젊을 적 자신이 기자로서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던 브루스 웨인을 떠올렸다. 단단하고도 유연한 실루엣을 그리는 몸이 그에 꼭 맞는 매끄러운 소재의 옷으로 감싸여서 더더욱 제 손에는 닿지 않을 누군가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집사의 정성 아래 브루스의 상처와 비밀을 지켜내듯 빈틈없이 꼼꼼하게 정돈되어 있던 그의 차림새가 행사가 무르익을수록 낯선 손과 손들에 의해 이곳저곳 흐트러져갔다. 한들한들 눈웃음을 지으며 사람과 욕망 사이에서 브루스는 그것을 가끔은 곤란한 듯, 가끔은 수줍은 듯, 또 가끔은 즐기는 듯 흘려보내고는 했다. 몸을 긴장한 채 들뜬 열기에 녹아 어룽진 눈을 하는 브루스를 보면서 핑계로는 그가 조금 편하게 있었으면 해서 그의 타이를 풀었다지만 해쳐진 옷 너머에 살짝 드러난 그의 살갗에 닿은 손이 저릿해서 아무래도 클락은 자신이 정말 거짓말에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라고 한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브루스.”
클락이 낮은 진동으로 브루스를 불렀다. 그러면 브루스는 마치 오한이 든 사람처럼 바르르 등을 떤다. 자신들 사이에 달라는 것은 별 게 없었다. 그저 처리해야 할 서류 몇 장과 더불어 늘 몸에 지니게 된 반지가 생겼고, 법률적 권리 관계에 약간의 변동이 발생했으며, 두 사람이 지난 세월 동안 주변부에서만 빙빙 맴돌며 시기와 적실성만 따져보던 일을 그들이 신뢰하는 사람들 앞에서 공증했을 뿐이었다. 결혼은 행복을 절대적으로 불러오는 소환술도 아니고 하물며 둘의 관계를 책임져줄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라고 브루스는 알고 있었다. 그저 브루스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삶에서 클락을 밀어내지 않겠다고, 클락의 삶에서 자신을 지우지 않겠다고 결정한 게 전부였다. 단지 그 뿐인데도, 브루스는 자신이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지 자신이 계획하고 진행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기답지 않게 믿어지지 않아서 자꾸만 무의미한 확인을 되풀이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브루스는 쿵쿵 목구멍 뒤에서 울려대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말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억지로 꺼내는 것처럼 눈썹을 찡그리고서 앓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응.”
브루스가 해가 다 저문 지금에 이르러서야 현실에 다다랐을 때 클락은 함빡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부부가 된 브루스와 클락에게로 뒤늦은 오늘이 밀려들어와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클락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던 브루스가 더듬더듬 클락의 뺨을 손으로 짚어보며 입술을 찾았다. 알고 보니 똑같이 뛰고 있던 두 가슴의 사이를 조금 벌린 뒤 브루스가 클락의 입술을 확인하고서 앙하고 깨물듯 달려들었다.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그저 막무가내로 어설프게 상대를 탐하는 브루스의 모양새는 꼭 젊을 적 클락과 같았다. 클락은 브루스를 꽈악 끌어안아서 찌부러뜨릴 것만 같은 충동을 꾹꾹 누르며 브루스를 침대에 눕혔다. 잔뜩 굳어서 움직임이 뚝뚝 끊어지는 브루스의 혀를 휘어 감듯 핥으며 이 각도, 저 각도에서 한참 키스를 하다가 브루스의 얼굴을 보듬고 있던 손가락 사이로 간지럽게 물방울이 흘러들자 클락이 입술을 떨어트려 내려다보면 선홍빛으로 달아오른 브루스가 무표정한 중에 눈물을 한 방울, 한 방울 흘리고 있었다. 본인에게 자각은 없는 모양인지 브루스는 왜 갑자기 클락이 입맞춤을 멈춘 건지 몰라 눈만 깜빡이며 숨을 색색 고르게 쉬고 있었다. 눈물은 소리 없이 눈물샘에서부터 톡하고 망울져서 피어난 다음 브루스 피부 위에 새겨진 잔주름의 골을 따라 포르르 흘러 클락의 손아귀를 적셨다. 킁, 하고 브루스가 숨을 삼킬 때 울음이 불어서 작은 소음을 만들자 클락이 붉어진 눈꼬리에 새롭게 부푸는 이슬을 쪽하고 빨아들였다. 혀끝에 짜고 단 맛이 난다.
“나 때문인 거지?”
클락의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속닥속닥 들린다. 브루스는 그제야 클락의 눈을 통해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알았고 그 지점부터 브루스는 숨이 조금씩 분절되었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지 어쩌다 이런 신체반응이 나온 건지 브루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클락이 어째서 자신이 울고 있는데도 이렇게 기쁜 얼굴을 하는지 오히려 눈물을 종용하듯 자꾸 눈가를 쓰다듬는지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
한 몇 년 전부터인가 연락이 끊어진 딕에게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그로부터 직접적인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바바라와 팀이 딕도 좋아하고 있다고, 식 준비를 도와주고 있다고 전해 들었을 때 브루스는 그 진위를 알진 못해도 그냥 그것으로 만족했었다. 그 세월동안 브루스는 아들에게 자기 멋대로 굴었고, 그의 고집에 질려 딕은 떠나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에게 축하를 바란다는 건, 용서를 바란다는 건 택도 없는 공상이라고 브루스는 생각했고 다이애나가 조언했듯이 차라리 딕이 이런 염치없는 자신에게 아주 신물이 나서 용서도 무엇도 할 가치가 없다 판단하고 치워버릴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딕이 오늘, 식을 앞두고 거울 앞에 서있던 브루스를 찾아왔다. 화가 난 건지, 아니면 다른 식구들의 등쌀에 못 이겼던 건지 딱딱한 얼굴로 브루스의 앞으로 걸어온 딕은 어느새 과거의 자신만큼 나이가 들어 있었다. 브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숨 쉬는 것조차 잊고서 눈을 동그랗게 떠서 딕을 보았다. 그런 브루스를 무뚝뚝하게 얼마간 마주하던 딕이 피식 하고 묵은 것들을 털어내듯 가볍게 웃으며 아직 매지 않은 브루스의 보타이를 매듭지었다.
“이제 행복해질 마음이 들어요?”
딕이 다정하게 말했다. 기억과 기억이 너무 따뜻해서, 뜨거워서 브루스는 자꾸만 자신의 속에 고여 있던 무언가가 녹아서 밖으로 새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자신을 다독이고 쓰다듬는 클락은 어째서 이다지도 선명하고 생생한지. 이유도 없이 브루스는 무어라도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정말 열이라도 난 건지 온몸이 뜨거워서 브루스는 클락을 꼭 당겨 안으며 눈물이 그칠 때까지 불안정한 호흡을 삼켰다.
“자네 피곤한 거 알아...”
브루스가 비교적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을 때 어느 정도 진정된 브루스를 확인하며 얼굴 곳곳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를 반복하던 클락이 브루스의 턱시도 재킷 단추를 끌렀다. 잠잠히 클락의 행동을 지켜보던 브루스는 재킷을 벗고 편안하게 발을 감싸던 가죽구두를 성의 없이 발짓으로 벗어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브루스가 클락의 보타이 매듭 안쪽에 손가락을 걸어 가볍게 당기며 쪽, 입술을 깨물듯 뽀뽀했다.
“아침에”
흠, 목소리 끝이 갈라지자 브루스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브루스가 내내 눈을 감고 있었던 탓에 그가 곧 잠이 들 거라고 생각하고 맨 어깨를 토닥이던 클락이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평소보다도 더 낮아진 목소리로 그가 이야기했다.
“눈을 뜨면 자네가 있겠지. 앞으로 계속...”
“응.”
쪽, 브루스의 하얀 정수리에 입을 맞추면서 클락이 긍정했다. 잠깐 눈을 뜬 브루스가 그런 클락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 픽 웃음 다음 고요하게 다시 눈을 감았다. 클락과 손을 맞잡고 있는 브루스가 조금 더 클락과 가깝게 자리를 잡았다.
“조금, 무섭군.”
편안하게 브루스가 중얼거렸고 그 뒤 얼마안가 브루스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지런히 뻗은 속눈썹을 한 번 쓰다듬고 보드라운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입술을 가볍게 훑은 다음 클락은 잠이 들어 힘이 빠진 브루스를 대신해 더더욱 꼭 손을 잡으며 빙긋 웃었다. 자신과 자신의 사이에서 평생을 미숙하게 오고 갈 클락도, 지나가지 않을 과거와 얻어낼 수 없는 미래 속에서 현재를 기꺼이 감수할 브루스도 이제는 각자가 아닌 서로의 몫이 될 것이다. 반드시 끝이 있는 이 우주에서 영원을 말하는 건 오만하지만 거기에는 아이의 꿈과 같은 치기어린 설렘이 있다. 분명 무서운 일이었지만, 기대도 두려움도 모두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드는 것이기에 클락은 그저 지금 자신의 옆에서 잠이 든 브루스 웨인만을 눈 속에 담기로 했다. 두 사람에게 남은 앞으로의 밤에 브루스는 이렇게 자신의 곁에서 눈을 감을 것이다.
“잘 자, 브루스.”
가볍게 브루스의 이마에 키스한 클락은 마치 오래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평온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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