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부에 배트맨 비욘드의 the call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Will you(http://sowhat42.tistory.com/80) 이전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성인글) https://znfnxh2.postype.com/post/1465920
삶의 든든한 동반자, 용기 있는 어머니, 정다운 친구, 사랑받는 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배웅하기에 모자라기 짝이 없는 단어의 나열들이다. 클락은 아버지의 무덤 옆에 새롭게 자리 잡은 비석을 망연히 보았다. 오늘로 일주일 정도가 흘렀던가? 아니, 그것이 일주일밖에 되지 않던가? 그 영겁의 시간동안 지구가 맴맴 제자리에서 회전한 거리는 약 28만km이며 태양의 주위에서는 대략 2천만km 기울어졌을 것이다. 그 사이 이 우주는 보다 커다랗게 팽창했을 테다. 흐리지도, 그렇다고 유달리 쾌청하지도 않은 여느 때와 같은 하늘 아래서 옥수수 이파리의 고소함을 한가득 담은 바람이 클락과 침묵하는 무덤들을 훑고 지났다. 클락은 조심히 몸을 숙이며 두 분들이 클락에게 보이던 얼굴과는 영 다르게 무뚝뚝하게 굳어있는 잿빛 돌조각 표면으로 머뭇머뭇 손끝을 대려고 했다. 그러자 저 멀리, 햇빛에서 버석한 모래내음이 나는 나라로부터 절박하게 몸을 웅크리고 도움을 구하며 가냘프게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클락은 뻗어지던 손을 마치 도망치듯 빠르게 거두어들이며 마사의 무덤을 뒤로 하고 중동으로 날아갔다.
“아무리 히어로라고 해도 군사,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그도 한낱 아마추어에 불과합니다.”
기자들 앞에서 장관은 냉랭한 얼굴로, 하지만 격양된 어조는 감추지 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우리 용맹한 군인들은 언제나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하늘 어느 분과 다르게 전능하지는 못한지라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끔찍한 테러와 참혹한 전쟁을 막기 위해 인생을 전장에 바친 우리 군을 마치 일부러 민간인을 공격하는 불한당마냥 취급한 슈퍼맨의 언행에는 가히 유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분쟁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가 예민하고 민감한 사안인 만큼 현장에서의 판단은 절대적이며 섣부른 임시변통은 안보에 독이 됩니다. 슈퍼맨의 숭고한 봉사정신은 마땅히 존중하는 바이나 그로 인해 불발된 작전으로 우리 군이 자칫 위험에 빠질 뻔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세계의 정의와 질서를 위해 노력하는 ‘동지’로서 이후 슈퍼맨과 이런 식으로 얼굴 붉힐 일이 없기를 간곡히 바랄 뿐입니다.”
뜨겁게 달궈진 사막의 바람이 아닌 사무실 내부의 잉크와 종이 냄새로 충만한 상온의 공기를 들이키면서 클락은 드물게도 폐호흡이 버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테러리스트들의 본거지 중 하나로 알려진 마을에서 마른 몸으로 폭격에 놀라 거의 무너져가는 벽 뒤에 숨어서 와들와들 떨며 그가 믿는 신의 이름을 읊조리던 어린아이는 클락이 어딜 어떻게 보아도 민간인이었다. 슈퍼맨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총 한 자루 손에 쥔 것 없이 대항도 못하고 그저 그만두라고, 자신의 집에서 나가달라고 외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을 구하고 지휘관에게 그가 찾는 것이 이곳에는 없다는 것을 설명했을 뿐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예산 편성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냉전이 끝난 이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군 예산으로써는 작전 하나가 날아간 것을 미군이 그다지 탐탁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을지라도. 누군가는 슈퍼맨의 구호활동을 옹호하며 그와 더불어 미국이 더는 외국에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며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을 철수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다른 누군가는 슈퍼맨이 미래의 테러리스트의 편을 들었다며 결국 슈퍼맨은 국적이 정해지지 않은 떠돌이 외계인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정의? 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결국 누가 돈과 자원을 많이 차지하냐인데. 요즘 같이 빌어먹을 외국 놈들이 우리 것을 야금야금 훔쳐 먹을 때 말이야! 슈퍼맨 그건 도대체 어느 나라 편인 거야? 영광은 우리한테서 다 가져가고 지만 깨끗한 척말이지...”
누군가는 선술집에서 꼬부라진 혀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는 다크사이드와 함께 사라진 렉스 루터를 기리며 그야말로 슈퍼맨의 거대한 빛에 가려진 미국의, 인류의 용감한 도전자였노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별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슈퍼맨이 가진 힘은 이 지구를 언제든 먼지가루마냥 붕괴시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것이었고 사람들은 그 힘이 자신들의 편에 있는 것에 열광하고 안도하는 한편 끊임없이 경계했다. 애초에 슈퍼맨, 클락의 연인부터가 그 의심 많은 배트맨인지라 자신을 둘러싼 이런 논쟁은 한참은 날짜가 오래된 쾨쾨한 것이었고 큰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로이스는 그녀가 확인한 사실을 기반으로 슈퍼맨의 구조 활동 정황을 설명하며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야말로 슈퍼맨의 행동을 오역하고 있다는 기사를 투고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는 열광적으로 그녀의 기사에 찬성했고, 누군가는 잔뜩 욕을 하며 데일리 플래닛에 항의 전화를 걸고 메일을 보냈다. 언론사로서는 어느 쪽의 반응이든 그 모든 것이 명성이자 돈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로이스의 기사에 반응한 사람들보다 훨씬, 훨씬은 더 많은 수가 그것에 대해 기억조차 하지 않았다. 모두 그저 늘 그래왔던 일들이었다.
배트맨이 다른 곳에 잠시 발이 묶여있을 때 슈퍼맨은 고담에서 무기밀매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왔다. 고담을 통해 들어온 이 무기들은 마피아들을 거쳐 세계 어느 곳이든 퍼져나갈 것이다. 미국 정보국에서는 최근 저스티스 리그가 세계 각국의 군사기밀에 접근했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밝혀 다시 한 번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미국 내에서는 자신들이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고 불안을 토로했고, 다른 나라는 리그가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냐는 불신을 외쳤다. 이 또한 그리 새롭지 않은 주제다. 히어로들이 봉사활동을 이유로 지구를 살피는 것이 빅 브라더로 이어질 수 있지는 않은가에 대한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그저 시기가 지금 소동의 촉발요인이라고 클락은 생각한다. 저스티스 리그에서 외계만이 아닌 인간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경이로우면서도 무시무시한 기계가 만들어낸 기술에까지 관심을 보이는 건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었고 스타 연구소를 비롯해 배트케이브, 웨인 엔터프라이즈, 가끔은 렉스코프 등이 데이터들의 밑바탕이었다. 그마저도 슈퍼맨이 귀를 좀 더 기울이고, 마션이 보다 집중을 한다면 훨씬 광범위하고 세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지만 삼간 정도였다. 하지만 한창 슈퍼맨의 외교 자세가 논란이 되는 중 일전에 국가 간 커다란 무력 충돌이 있을 경우 히어로들이 취할 스탠스를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자료가 세계에 호의적이거나 하다못해 중립적으로 보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누군가는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어야지 않겠냐고 주장했다. 정부도, 히어로도 아닌 보통의 사람들도 언제 적이 될지 모를 외부를 경계할 수 있어야하지 않느냐고 외쳤다. 또 누군가는 미약하게 믿음을 속삭인다. 그 자신도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하는 낙관론을, 그럼에도 그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희망으로써 그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애처롭고 가련하며, 허무하다. 클락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이 지구의 생명을 느낀다.
“이봐, 총알 가져와!”
“거래는 어쩌고?”
“놈이 죽으면 어차피 다 끝나는 거 아니야!”
슈퍼맨은 자신의 몸을 맞고 허무하게 찌그러지는 탄환을 무감각하게 바라본다. 무리가 서둘러 새롭게 꺼내드는 무기가 어떤 것인지 클락의 눈에는 희미하게 파악되었다. 단단한 것에 부딪쳤을 경우 깨지기 쉽도록 아주아주 미세한 금이 들어간 납 재질의 탄두에서 아직 클락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새어나오는 흐릿한 광선이 보인다. 그 광선은 클락에게 유해한 광석에서부터 기원되는 것이었다. 이럴 때 클락의 눈이 총과 탄환의 내부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명백한 힌트다. 슈퍼맨은, 칼엘은 어째서인지 웃음이 지어졌다. 무르고 무른 행성, 클락에게 생명 그 자체와 같은 노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곳. 지구는 클락이 살아 숨 쉬는 동안 정말 바지런히도 돌았고 지금도 돌고 있다. 쳇바퀴처럼 맴맴맴. 하지만 이 판에 박힌 회전 속에서도 클락에게 있어 1도 기울어지기 전의 지구와 그 후의 지구가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칼엘은 일당의 근섬유가 움직이는 소리를 그들이 완전히 행동으로써 표현하기도 전에 듣고 검지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들의 무기를 망가뜨릴 수 있었다. 탄환이 칼엘의 몸에 맞아 초록빛 광석을 뱉어내기도 전에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 어쩌면 위협삼아 발포한 이의 손 정도는 조금 태울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사고 속도에 못 이겨 칼엘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 퍽! 아악! 콰과과광! 깔끔하고 단호한 검은 움직임이 총을 겨누고 있는 이들의 손을 와이어로 잡아챈 다음에 주변 사물들로 도르래와 같은 구조를 만들어 그들을 저 공중으로 치솟게 했다. 한창 무기의 거래처와 주모자를 추적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던 배트맨이 어느 새인가 클락의 앞에 있었다. 배트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일을 넘보지 마.”
선박에 컨테이너를 싣는 크레인 꼭대기에 일당들은 대롱대롱 매달려서 비명을 질렀다. 심문을 위해 그 곳으로 향해 가려던 배트맨이 간결한 명령을 뱉는다.
“요새로 가.”
클락은 브루스가 자신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마치 주인의 지시를 들은 충실한 견공마냥 북극을 향해 날아갔다.
고독의 요새 복도 한편에는 우주에서부터 유래된 종들이 보호되고 있는 쉼터가 있다. 유리벽 너머에서 어떤 종은 지구의 생물과 퍽 비슷한 소리로 울었고, 또 어떤 종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신기한 발성법으로 울음을 지었다. 바깥의 소동에 의해 지구로 불시착했거나 외계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때 발견한 미아 종들 중 지금으로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법이 없는 외래종들을 클락은 고독의 요새에서 각각에게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여 서식하게 했다. 이 얼음집 밖에서 이들은 지구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버리거나, 혹은 지나치게 번성하여 고유종들을 파괴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들을 공존이라는 명목 하에 슈퍼맨은 인위적인 분리와 일방적인 보호로써 돌보고 있다.
클락은 요새의 시스템 관리와 와치타워 등과의 연락에 사용되는 컴퓨터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후우, 클락의 입에서 밑바닥을 느리게 흐르는 밀도 높은 해수와 같은 한숨이 떨어진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클락에게는 전혀 고요하지 않았지만 바깥을 스치는 북극의 바람이 만들어낸 가는 메아리만이 울고 있던 요새 안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차분하고 깔끔한 걸음걸이, 그와 더불어 따라오는 규칙적인 심장박동. 클락은 굳이 투시도 무엇도 사용하지 않고도 그 소리의 주인이 브루스라는 것을 안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슈퍼맨이 좀 과하게 배트맨의 일에 참견하기는 했다. 심지어 예전 같았으면 덧붙이기라도 했을 변명이나 핑계도 하나 없이 그저 막무가내로 클락은 브루스의 일에 끼어들었다. 지금쯤이면 한소리를 한 마디든 두 마디든 슬슬 들을 때이기는 하다. 뭐, 오늘 일은 슈퍼맨과 아주 관계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잘만하면 약 한달 정도의 축객령으로 브루스와 타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걸 클락이 잘 지킬지 여부는 둘째로 하고.
몇 걸음 뒤에서 브루스가 발을 멈추었다.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는 클락의 등을 브루스는 얼마간 그저 본다. 보나마나 오늘도 한숨을 푹푹 쉬어댔겠지. 브루스는 쓰게 웃었다.
“뭐가 문제야.”
브루스는 얼핏 듣기에 정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뚱한 그의 말투에 클락은 하하, 하고 속이 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브루스와 얼굴을 마주한 클락은 어딘가 초연한지 아니면 슬픈 건지 화가 난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천히 브루스 앞으로 다가온 클락이 카울 너머에 감춰진 브루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조금 시끄러워서.”
클락은 잔뜩 찌그러진 미소로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클락의 말이 질문의 답이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클락을 클락 켄트로서, 스몰빌 출신의 팜 보이로서 키워낸 두 사람 그 분들 모두가 더는 이 지구에 남게 되지 않던 날에 전에는 실컷 슬픔이라도 토로하던 클락이 이번에는 그러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누구인가를 되새기듯 온 지구를 헤매고 다녔다. 그는 지금 보다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느끼며 ‘여느 때’처럼 행동하려 하고 있었다. 클락의 감각은 예민하고 포용 범위가 넓은 만큼 한 번 정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점점 더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들게 된다. 지금도 몇 번 그의 눈동자가 브루스의 눈에서 다른 허공으로 왔다갔다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브루스는 손을 뻗어 클락의 두 귀를 감싸듯 덮었다. 맑고 푸르러서 이 행성 자체로 보이는 눈동자가 조금 놀란 듯 커지다가 가늘게 호선을 만들며 안정되었다. 아직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어느 정도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브루스는 혼자서 몰래 안도하며 어딘가 조금 버석해진 클락의 입술 위로 입맞춤을 했다.
바깥 온도로 식은 피부 뒤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는 온기를 입술로 느끼며 클락은 가죽재질의 장갑 너머에서 들리는 손 인대가 자세를 지탱하는 소리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소리, 심장에서부터 울려온 맥박 소리 하나하나 전부를 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들었다. 그간 감지할 수 있다면 아무 것이나 이유도 없이 주워 삼키던 클락의 감각이 배트맨 손바닥 한 장을 경계로 외부와 조금씩 거리를 벌린다. 이 거리감을 잠깐 클락은 잊고 있었다. 아니 잊었다기보다 피하고 있었다. 그 공백사이로 상실과 허무가 밀어닥칠 테니까. 브루스가 닿았던 입술을 살짝 떨어트려 눌렸던 살덩이가 원래 모양으로 도톰하게 돌아오기 전에 클락이 브루스를 끌어안으며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 든든한 배트맨의 케블라 옷 너머에 있을 따듯한 브루스의 피부가 갑자기 그리웠다. 클락이 살짝 혀를 내어 브루스의 입술 사이를 간질이면 순순히 입을 벌려 브루스는 클락을 제 구강으로 맞이했다. 브루스가 뱉어내는 호흡 한 점조차도 아까운 듯 클락은 절박하다 싶을 정도로 브루스의 등과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켜 더더 깊이 입을 마주했다. 무작정 안쪽으로만 파고드는 클락의 혀를 브루스는 능숙하게 흘려보내어 그를 달래듯 부드럽게 키스의 속도를 늦추었다. 브루스가 귀를 막고 있는 탓에 입과 입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박자박한 소음이 유달리 크게 들렸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모자란 숨을 찾아 브루스의 가슴이 반사적으로 부풀면서 맞닿은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럼에도 먼저 고개를 돌리지 않는 브루스를 대신해 클락은 조심히 거리를 벌리며 브루스가 숨을 가다듬게 했다. 열이 오른 브루스의 입술이 마치 화장을 한 듯 붉다. 여전히 클락의 귓가를 손으로 막고 있는 브루스가 속닥였다.
“씻고 나와. 그리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자네도 씻을 거면 같이...”
말이 끝나감과 동시에 포근하게 귓가를 막아주던 손이 천천히 멀어지자 다시금 밀려드는 차가운 바깥의 공기에 어딘가 외로워진 클락이 웅얼웅얼 이야기했지만 브루스는 단호하게 클락의 가슴을 밀어내며 한 발짝 뒤로 걸음을 물려 거리를 두었다. 브루스는 그저 짧게 비죽 웃었다. 브루스의 친절은 따듯하지만 어딘가 심술 맞다. 그것에 클락은 다시 조금 웃는다.
침대 위에 알몸으로 가만히 걸터앉은 채 클락은 저 너머 샤워부스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듣는다. 근래 클락은 이 고독의 요새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연구실과 슈퍼맨의 체질에 맞춘 의료시설이 있는 만큼 비상시에 이용할 수 있게 지어진 샤워부스와 간단한 숙식을 해결할 방이 갖춰진 요새는 구성 자체만 놓고 보자면 정말 ‘슈퍼맨의 집’같다. 이곳은 칼엘의 고향과도 어딘가 닮아있다. 익숙하지만 낯설고, 클락의 생리에 꼭 맞게 구성되었지만 한없이 외롭다. 쏴아아,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단단한 피부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기는 소리와 브루스가 입을 악 물고 숨을 고르는 소리, 그 사이로 세밀한 틈에서 나오는 마찰음이 섞여있다. 혹시 지금 이곳은 브루스에게는 추울까? 클락이 멍하니 생각했다. 드물게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실내에 온도조절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역시 클락에게는 이쯤이면 적절한지 어떤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지식과 상식으로써 알고 있는 수치들의 범위에 맞는지 어떤지만 알 수 있을 뿐. 누군가에게는 허깨비 같이 무의미할 수 있는 이런 일련의 것들을 클락이 미덕으로써, 양식으로써 몸에 밸 수 있게 도와준 최초의 두 지구인이 있다. 외계에서 떨어져 내린 이물질을 당신들에게 찾아온 별이라 표현하던 스몰빌의 소박한 부부는 조금 따분할지라도 인류의 오래된 꿈과 같은 희망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사람의 가치로 믿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라면서 남들과 조금은 다르고, 자신들과는 점점 닮아가는 아들을 위해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때로 같이 고민하며 자신들의 힘이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크게 속상해하기도 하고 꼭 그 아픔의 배로 아들을 사랑했다. 그랬던 클락 켄트의 시작인 조나단 켄트와 마사 켄트는 이제 더는 이 지구에, 클락의 곁에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상의 무엇도 변한 것 같지 않은데 클락의 소중한 두 분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타박, 타박. 맨발이 매끄러운 바닥 위를 걷는 소리가 나며 클락과 마찬가지로 실오라기를 걸치지 않은 브루스가 무표정하게 저 앞에 있다. 또 서넛 정도 클락은 처음 보는 흉들이 브루스의 몸에는 새롭게 남았다. 슈퍼맨이 그렇게 끈질기게 참견을 해댔는데도. 클락은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어딘가 표정이 자꾸 찡그려졌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브루스는 어색한 클락의 얼굴을 보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클락의 앞에 다가간 브루스가 클락의 이마에 가볍게 접했다. 시야 가득 퍼지는 브루스의 피부와 그 동시에 클락의 청각과 후각 모두에 그가 바투 다가오며 이곳은 비로소 정말로 클락의 요새가 되었다. 잔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하지만 어딘가 자조적으로 클락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럴 때조차 나는 자네를 원할까.”
죄책감에 눈을 내리깔며 브루스의 맨 허리를 조심스럽게 안는 클락을 브루스는 손끝으로 고개를 들게 하며 꼭 이 지역의 빙하와 닮은 눈동자로 꿰뚫어보았다. 클락의 감각은 이 지구에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를 초월하고 그만큼 매우 복잡하지만 생애에 걸쳐 진행된 적응으로 그의 관심을 끄는 방법만 안다면 쉽게 적정 범위로 조정할 수 있다. 브루스는 그저 클락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방법을 차근히 다시 되살려주면 된다. 브루스는 브루스 웨인으로서 할 수 있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유려하게 선홍빛으로 웃었다.
“내가 브루스 웨인이니까.”
아주 짧고 명쾌한 답이었다. 클락은 소리 내어 웃으며 이제 자신의 감각에서 브루스 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배제해 나갔다. 그 브루스 웨인을 앞에 두고 한눈을 팔 배짱을 클락은 가지지 못했다. 브루스가 그렇게 두지 않았고, 클락이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막 샤워를 끝내서 혈색이 오른 커다란 손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에 피부와 피부의 마찰이 선명해서 클락은 그와 다르게 어디 흉하나 없는 말끔한 제 몸뚱이가 불현듯 조금 부끄러웠다. 아랫배 쪽을 손으로 감질나게 오고가며 브루스는 일부러 입술 끝에서 쪽쪽 소리를 내며 클락의 몸 곳곳에 키스했다. 그의 접촉에도, 그리고 소리에도 클락은 충실하게 반응했고 브루스는 좀 더 무게를 실어 클락의 몸에 제 몸을 겹치며 싱긋 웃었다. 나이가 들어 그의 눈가에 잡히기 시작한 중후한 주름이 야살스럽고도 더없이 상냥할 수 있다고 알게 된 것을 클락은 언제고 소중한 보물처럼 생각했다.
이제 브루스의 머리에 난 흰머리가 제법 되었다. 몇 년쯤 시간이 지난다면 그의 머리는 전부 하얗게 세어 그는 여명처럼 빛이 날 테다. 클락은 브루스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가 이렇게 브루스와 함께하는 중에도 저 밖에서는 누군가가 죽고, 다치고, 도움을 구하고, 죽이고, 상처 입히고, 멸시하고 있을 테지만 미국의 어느 장관이 지적했듯 히어로란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는 있어도 슈퍼맨도 한낱 아마추어 자원봉사자에 지나지 않다. 그저 가지고 있는 힘이 남들에 비해 커다란 탓에 그가 바랐던 것보다 더욱 커다란 일들을 해낼 수 있던 것뿐이다. 그마저도 모든 것을 부술 수는 있으면서도 구할 만큼의 힘은 되지 못했고, 거기다 클락은 때로는 슬퍼해야 하고 화도 내야하고 연인과 세속적으로 사랑을 나눠야하고 소중한 이를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가슴 속에 묻어야한다. 그 정도의 공백만큼 이 세상 사람들은 슈퍼맨의 손에서 자유롭고, 클락은 이 세상에 대해 무책임하다. 이 거리감은 소중하고 또 필요한 것이라고 클락은 그간의 경험들을 통해 분명하게 숙지하고 있지만 여유가 없었다. 불안과 희망으로 들떠있던 자신과 더불어 슈퍼맨에 대해 기꺼이 함께 꿈을 바라봐주었던 부모님 두 분이 이제는 모두 자신의 곁에서 떠났다는 것이, 해마다 변함없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아니 조금은 더 안 좋은 쪽으로 변해가는 것 같은 세상이, 집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외계 행성에서 조금씩 지치기 시작하는 자신이, 그리고 자신보다 빠르게 나이가 들어가는 브루스가 클락의 빈 공간으로 범람해서 클락은 마치 새까만 우주를 홀로 부유하듯 했다.
클락은 브루스를 꼭 끌어안고서 제 온몸으로 브루스를 받치듯 혹은 섞어들듯 밀착했다. 약간의 통증으로 브루스의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식은땀이 향수 입자처럼 클락의 콧속으로 스미어 호흡을 자유롭게 했다. 브루스는 클락이 바깥 소리에 감각을 뺏기지 않도록 전과 다르게 더 많은 소리를 냈고 훨씬 적나라하게 움직였으며 보다 꼭 클락을 감싸주었다. 브루스가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며 클락은 브루스를 폭 눕히며 그를 품속에 꼭꼭 가둬놓은 뒤 집요하게 키스했다. 두 사람이 만드는 열기로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한 희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클락은 마치 자신이 브루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아 희열로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클락은 계속 그 시리고 아름다운 세계 속으로 빠져들듯 파고들었다. 그 탓에 클락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리 눌렀던 감정이 잔잔하게 밀물로 밀려 토독토독 떨어지는 것을 보고 브루스는 팔을 크게 벌려 클락의 목줄기를 끌어안았다.
간신히 키스가 멎은 입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브루스, 클락이 간신히 뱉어낸 그의 이름은 울음과 닮아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 지금 모든 것이 허무한 일이라고 더 강한 무언가가 되려하고 싶지 않아. 나는 알고 있어. 자네가 필사적으로 자네의 도시를 지키고 있다는 거, 다이애나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른 차원에서 그 지구의 우리를 막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는 거, 사실을 좇는 로이스나 지미 같은 이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끈질기고 굳세다는 거, 그리고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힘들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려고 분투한다는 거 말이야. 그걸 나는 비관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 옆에서, 그 속에서 슈퍼맨으로서, 클락 켄트로서, 칼엘로서 함께 하고 싶었어.”
알몸으로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워서 두 사람은 차분하게 대화를 했다.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브루스의 손길에 드물게 졸린 기색을 보이며 클락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 브루스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가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존재였던 모양이야. 조금, 지쳤던 걸지도 몰라.”
브루스를 더욱 꼭 끌어안으면서 클락이 목이 막힌 듯 느리게 말을 이었다. 잠깐 입술을 질끈 문 클락이 뜬금없이 브루스의 목에 쪼는 듯한 뽀뽀를 했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클락의 머리카락은 아직 자신의 것에 비해 젊었을 적처럼 까맣다.
“이 세상은 무엇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물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들려오는 클락의 표정은 슬픔만이 아닌 화도 담고 있었다. 브루스는 그 감정의 혼돈을 익숙하게 생각하며 커다란 몸을 달래듯 자꾸만 토닥였다. 역시 이런 유의 아픔을 클락과 공명하고 싶지 않다고 소원했던 건 지나치게 순진한 바람이었을까.
“나를 나로 만들어 주셨던 두 분이 모두 이제는 내 곁에 안 계셔.”
브루스는 클락이 이상하리만치 의연했던 장례식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가 클락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것 같으면 클락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구호활동으로 도망쳐 나갔다. 클락의 감각이 과부하에 걸려 폭주하고 있다는 것 쯤 하루 24시간 내내 끊이질 않는 슈퍼맨의 소식을 들으면 알 수 있었고, 배트맨에게 조금 문제가 될 법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클락이 고담으로 얼굴을 비치는 지점에서 그의 심리상태를 뻔하게 엿볼 수 있었다. 실은 이런 와중에도 클락이 이 세상에 정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전과 다름없는 자신이기를 소망한다는 게 브루스에게는 어마어마한 기적으로 보였다. 커다란 상실과 그와 동시에 덮쳐온 세계에 클락은 지금 조금 주저하고 있다. 그건 그가 우유부단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피곤했을 뿐이고, 지쳤을 뿐이고, 다만 지나치게 건강한 탓에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조차 모르고 지구를 배회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을 뿐이다. 칼엘과 클락 켄트의 간극 사이에서 슈퍼맨은 이렇게나 처연하고, 사랑스럽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나.”
“앞으로?”
소곤소곤 물어오는 브루스의 말에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한 클락이 되묻자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슈퍼맨이 리더로 전체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건 맞지만 저스티스 리그는 엄연히 모든 히어로들의 연합체다. 네가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지구가 갑자기 위험에 처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지금 같은 상태로 선두에 나섰다간 무모한 행동으로 너는 물론이고 리그를 위험에 빠트릴 위험이 있지. 현재 상태가 피곤하다면 배제할 수 있는 것은 배제하는 것도 한 방법이야.”
“...굳이 리그에 붙들고 있지 않을 만큼 슈퍼맨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다는 거야?”
클락이 장난스럽게, 사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슈퍼맨이 필요하고 어떻고 하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동료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클락...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을 텐데? 자네가 이 세상에 해를 끼칠 작정이라면 나는 물론 리그원을 포함한 이 지구의 히어로들 모두가 자네를 막을 거고, 자네가 자리를 비우겠다면 그만큼 모두가 조금 더 힘을 내면 돼. 나도 아직은... 슈퍼맨의 뒷바라지를 할 만큼은 되고 말이야. 하지만 클락, 자네에게 있어 자네 자신은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해. 자네의 소중한 사람을 애도하고, 삶을 살아가고, 무엇을 선택할지는 온전히 자네 몫이야.”
맞닿은 피부 탓에 브루스가 하는 이야기가 마치 온 세포를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클락은 조금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깜빡였다.
“자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자네쯤이야 막을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어.”
“...브루스, 자넨 어떻게 언제고 그렇게 단호할 수 있어?”
“나는 배트맨이니까.”
그렇게 답을 하는 브루스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가족들과 데면데면해진 지금에도 브루스는 혼자서라도 꿋꿋하게 자신의 도시를 지키고 있다. 그런 배트맨이 무려 슈퍼맨에게 휴식을 제안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머릿속에 부나방들이 소란스럽게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때, 차라리 브루스가 정신을 차리라고 혼을 낸다면 클락은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다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처럼 슈퍼맨으로서 활동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한편으로 그의 고집과 단호함에 조금 기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도 브루스는 클락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란다. 그 의심쟁이가, 그 배트맨이... 브루스 한 사람으로 보다 가뿐하게 정리된 머리가 어쩐지 지나치게 드넓어진 듯 갈피 없는, 자유로운 바람 소리가 들린다. 다시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클락은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클락은 브루스를 꼭 끌어안으며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와도 저 미래 언젠가에는 작별할 날이 온다. 그건 브루스가 먼저일 수도 있고, 클락이 먼저일 수도 있지만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종말은 필연이다. 이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브루스를 사랑하며, 가끔은 힐난처럼 브루스가 보이스카우트라고 이죽이면서도 기꺼이 배트맨이 옆에서 싸우기로 결심할 수 있는 동료로 클락은 존재하고 싶었다. 언제고 그의 슈퍼맨이고 싶다. 허파에 한가득 브루스를 담고서 클락이 그 아까운 숨으로 조곤조곤 발음을 시작했다.
“나는―”
“어쩌면 지금 이 모습으로 여러분들과 대화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릅니다.”
앞 다투어 내미는 기자들의 마이크를 담담하게 손을 들어 정리한 뒤 슈퍼맨이 바른 자세,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저와 저스티스 리그를 둘러싼 많은 논쟁들이 일어난 것을 압니다. 그에 대해서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아는 범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갈 뿐입니다. 그런 미숙한 제 활동에 대해 어떤 비난과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건강한 일입니다. 이 지구는 그렇게 균형을 맞추어 나가는 곳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마지막이라고 한 거죠? 슈퍼맨, 당신은 리그를 탈퇴하고... 더는 활동을 하지 않을 생각인 건가요?”
로이스가 물었다. 그녀의 경력이면 충분히 편집장의 자리에 있을 수 있음에도 로이스는 자신의 체력이 되는 한 언제고 현장 기자로서 남고 싶어 했기 때문에 현재 그녀는 한창 이슈가 끊이질 않는 외교정치부에서 활약하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로이스는 슈퍼맨의 이야기만큼은 언제나 그래왔듯 어느 기자들보다도 냉철하게, 정을 가득 담아 취재하고는 했다. 슈퍼맨의 은퇴 소식을 접한 로이스의 눈에는 약간의 분노와 짙은 슬픔과 동요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이런 기자가 슈퍼맨에게 우호적으로 있어주었던 건 분명 감사해 마지않을 일이다.
“어디까지나 ‘지금’ 이 모습으로서는 마지막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제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이 슈퍼맨은 여러분들의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어쩌다 히어로라는 황송한 이름을 직업처럼 부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만 제가 하고자 했던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 자신으로서, 제가 보고 듣고 느끼며 배워온 모든 것을 바탕으로 제가 믿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제 힘이 허락하는 일들을 할 뿐입니다. 나무에 잘못 올라간 고양이를 구하는 일이든, 지구로 침공해온 침입자들을 막는 일이든 말이죠. 다만 지금의 제 위치에서는 소소하게만 생각했던 그 모든 일들이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이 세계에 걸쳐진 맥락들에 있어 저는 무지하고 분명 앞으로도 크고 작은 논란들을 불러일으키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어떤 정치도 타산도 없는 그저 저라는 개인이 슈퍼맨이라는 이름 아래 갖는 한갓된 희망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고 싶습니다. 지금 이 자리는... 작별인사를 드리는 자리이기보다 저의 다짐을 여러분께, 제 소중한 사람들에게 약속드리고자 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 다짐에서 어긋난 일을 했을 때 저를 반드시 막아낼 이들이 이 세계에는 있다는 사실을, 저를 믿지 않으셔도 이것만큼은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저 어디선가 무표정하게 방송을 보고 있을 브루스를 생각하며 클락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지금 그에게 돌아간다면 분명 클락은 브루스를 끌어안고 사실은 불안하고, 자신의 말에 자신이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거나하게 하소연할지 모른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 속에서 브루스와 잠시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을 클락이 결정한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 그가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중장년을 지나 곧 노년으로 접어들 이 시기에야 다시금 홀로서기를 하는 어리숙한 자신을 도대체 브루스는 어떻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던 걸까.
“형태는 다르겠지만 저는 분명 이곳에서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만나는 날이 오겠지요.”
그때 불현듯 슈퍼맨이 고개를 들어 공중 어딘가를 보았다. 작별인사를 대신해 짧은 웃음을 지은 슈퍼맨은 진지한 얼굴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딘가로 향해 새처럼, 비행기처럼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로이스는 문득 한 시대의 끝과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을 예감하며 어설프게 흐지부지 마무리된 인터뷰에 픽 가볍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세상은 나이가 들어간다. 다만 저 하늘에 태양은 오늘도 눈이 부시게 샛노랗다.
몸이 약해진 브루스가 배트맨을 은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클락은 바로 저스티스 리그로 돌아왔다. 끝끝내 자신은 파트타임이라고 못을 박았으면서도 자리를 비운 슈퍼맨을 위해 바쁜 몸으로 온갖 고생까지 도맡았던 그의 공백을 채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클락이 그것을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타로에 의해 신경계가 지배당하고 있어서 기억이 다소 애매했지만 브루스의 후계자라는 새로운 배트맨을 주시하는 중 브루스와 나눴던 싱거운 대화는 제법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스타로를 그의 고향행성으로 보낸 이후 브루스가 아직도 자신을 막기 위한 수단을 엄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을 안 클락은 그 길로 재차 브루스에게 돌아갔다. 그와 재회 인사는 이미 끝마친 뒤였지만 클락은 능청스럽게 처음부터 다시 인사를 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브루스.”
천천히 어둠 속에서 뒤를 돌며 클락을 마주하는 브루스의 눈동자가 차가웠다. 온전히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달빛을 품고 마치 이른 아침을 몰고 올 듯 아릿하게 빛이 났다. 이때 클락의 귀에 선명해진 것은 콩콩 뛰어오르는 제 심장소리다.
“이제 자네 뒷바라지는 그만했으면 싶은데, 클락. 테리가 고생하잖나.”
심드렁한 브루스의 말에 클락은 해맑게 웃었다. 클락 켄트는 그렇게 브루스 웨인에게로 회귀했다.
"My Dear 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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