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이스님 리퀘스트 리그숲/로드뱃 이야기입니다.
"과거를 사랑할 수는 없지."
짧게 시선을 아래로 떨군 남자의 말은 그만의 것이 되어 싱겁게 끝이 났다. 불연속적인 공간과 공간을 이은 틈새에서 빛이 쏟아지며 강한 태양으로 색 바랜 박쥐를 살라먹을 듯했다. 로드 배트맨은 미련 한 점 시름 한 끝 없이 그 빛을 타고 저기 수많은 우주들 중에 있는 자신의 세계로 걸어 나갔다. 포털이 닫힌 공간에는 차게 식은 어둠만이 길게 남았다. 슈퍼맨은 아직 눈에 박힐 듯 남은 빛과 빛 위에 새겨진 그림자가 어른거려서 얼굴을 떨어뜨리고 땅 위를 딛고 선 자신의 빨간 부츠 끝을 보았다. 유독 어색한 제 발밑을 향해 고개를 숙인 그는 마치 묵념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노란 태양 아래 생존하고 있는 크립토니안으로서는 상당히 번거롭다고도 할 수도 있었지만 클락은 제 감각에 감지된 위험이나 위기를 어떤 일신의 이유를 핑계로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히어로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클락은 손을 내밀면 금방 상대를 구할 수 있음을 알고서도 내밀지 않는다면 설령 자신이 직접적인 불행의 인과관계가 되지는 않더라도 상관관계 상에는 놓인다고 생각하는 성미였다. 때로는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비겁한 짓이라고까지 말이다. 클락이 가지는 신념은 이따금 슈퍼맨이면서 클락 켄트로서 살아가고 있는 칼엘이 가진 논리의 타당성과 윤리의 정당성을 시험하고는 했지만 어쨌든 클락은 그가 생각하는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내면의 문제야 제쳐두고 지금 당장 저 하늘을 날아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또 한 사람, 이러한 일종의 가능성 확률 게임에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민감한 이가 있다. 클락은 배트맨의 동굴로 날아들어 인사말도 생략하고 말을 꺼냈다. 십중팔구 위기에 처해있을(처할) 로드들의 세계에 대해서. 자신이 그곳에, 로드 배트맨에게 간여하겠다고 말이다.
"안 돼."
검은 박쥐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에게는 시선조차 주지도 않으며 무심히 배트케이브의 모니터만을 바라보는 배트맨에게로 한 발짝 더 성큼 다가간 슈퍼맨은 두 손바닥을 내밀어가면서까지 온몸으로 호소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자네도 보았잖아. 그곳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
"끝난 이야기를 계속하는군. 그 지구와는 더 이상 서로 간섭하지 않는 걸로 했을 텐데?"
"나는 그걸 납득한다고 한 적 없어."
"어린애처럼 굴지 마."
후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쉰 배트맨이 빙글 의자를 돌려 슈퍼맨에게로 몸을 향했다. 카울 위에 떠오른 그의 표정은 보통 때보다도 더더욱 찌푸려져서 훨씬 험상궂게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톡톡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끝이 배트맨의 심사가 썩 편하지 않음을 알려주었지만 슈퍼맨은 그것을 못 본 양 저스티스 로드들이 있는 세계에 자신들이 어떻게든 힘을 보태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낸다. 전쟁을 치루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막 혼자 그들과 대항하기로 결정한 로드 배트맨의 계획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만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클락은 눈짓 손짓 다 동원해가며 역설하고 있었고 그 말을 듣는 브루스의 표정은 점점 굳어 들어갔다.
"이게 무슨 물자 지원정도로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플래시를 다른 범죄자들과 같이 취급해서 죽이려던 '히어로'들을 그저 힘만 보태서 제압하면 된다고? 어디 잡아 가두고 설교라도 늘어놓으면 되는 일인가? 그들의 마음을 개조해버리면 되나? 아니면 그들의 평생을 그 지구에서 격리해버리면 될 일인가? 그렇게 하고 나면, 우리는 무엇이 되지? 그들과 우리가 어떻게 다른 게 되지? 나는, 배트맨이라면 괜찮겠지. 그런 유의 불합리에는 익숙하니까. 하지만 자네는? 자네가 아닌 슈퍼맨의 모습만으로 동요하는 자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나?"
"왜 여기서 내가 나오는 건데? 나는—"
"얼마 전에 우주로 추방해버린 몽굴, 그린랜턴으로부터 보고받은 워월드 행방, 렉스 코프에서 새롭게 진행하는 둠스데이 연구 등,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지. 이것들 모두 언제 싹이 터서 지면을 뒤덮을지 모르는데 자네는 지금 그 어떤 도움 요청도 들어오지 않은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어. 이 문제들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결론을 내린 뒤 나에게 말하고 있는 건 슈퍼맨, 자네지. 그런데 이게 자네와 관계가 없다고, 정말 슈퍼맨의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따금 배트맨은 슈퍼맨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마냥 바라보며 고압적인 언사를 할 때가 있고는 한데 안타깝게도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클락은 적의가 끓어올라 험악해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배트맨을 마주했지만 카울 너머의 그는 언제나 그렇듯 짙은 어둠처럼 선명하다. 그의 곧은 시선은 마치 제 흉부를 열어 뒤져보듯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 시선에 화를 내고 있어보아야 대화는커녕 누구 한 사람(주로 브루스) 다치기나 할 것만 같아 클락은 부러 목소리를 한 톤 끌어내려 말했다.
"그는 죽을 거야."
"슈퍼맨에게 언제부터 예지력이 생겼지?"
"브루스..."
클락은 초조하게 애꿎은 제 손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했다. 한동안 그런 클락을 노려보다가 다시 한 번 브루스는 크게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
배트맨이 카울을 벗자 잘 빗어 넘겼을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져서 이마 위로 내려오는 브루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설 속에 나오는 괴물의 거죽과도 같은 천 한 겹을 벗자 속에 가려져있던 뼈와 피와 살로 이루어진 그의 얼굴은 의외로 생각보다 부드러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배트맨이 어디 쉽게 남의 손을 빌리는 인물이야?"
더 이상의 논쟁을 바라지 않는 브루스의 제스처를 뻔히 읽었음에도 클락은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으로 끈질기게 대꾸했다.
"배트맨은 필요한 수단이라면 앞뒤 재지 않고 이용하는 인물이기도 하지."
그런 클락만큼이나 끈질기게 응수하며 브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클락에게로 다가왔다. 클락의 머릿속에서는 잿빛의 박쥐가 클락의 제안을 마다하며 제가 속해있는 세계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다.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지금 눈앞에 있는 검은 박쥐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어딘가 조금 멋쩍기도 하고 그와는 공유할 수 없는 그와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클락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잠깐 아래로 떨구었다.
"로드들이 있는 지구 말고도 저 밖에는 숱한 세상이 있겠지. 그 중에는 우리가 그저 무력할 뿐인 곳도, 악역인 곳도 있을 거야. 그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감당할 수는 없어. 아무리 슈퍼맨 자네라도."
힘이 빠져 조금 구부정해진 클락의 어깨를 브루스는 두어 번 설게 토닥여 주었다. 그에 다시 고개를 들어 희푸른 눈동자와 마주하면 그 빛은 언제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어쩌면 브루스 본인이 생각하기보다도) 훨씬 다정한 온도를 띠고 있다.
"지금은 믿음을 가지고 '이곳'에 더 마음을 쓰도록 해. 자네는 이 지구, 저스티스 리그의 슈퍼맨이니까."
그것을 마주하고 나니 클락은 여전히 속이 켕기면서도 결국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평소 브루스 웨인을 연기하며 그의 페르소나들을 멋지게 전혀 상관없는 두 개의 개체로써 분리해내는 박쥐의 교활함이었던 것 같다.
"배트맨!"
와치타워 메인 컴퓨터실에 그린랜턴과 플래시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배트맨 앞으로 슈퍼맨이 형형한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그가 배트맨의 앞에 거센 바람과 함께 당도하기 전에 원더우먼이 우뚝 막아서며 그를 저지했다.
"슈퍼맨, 우선 진정 좀 해."
"나는, 진정하고 있어. 원더우먼. 나는 지금 배트맨에게 설명을 듣고 싶은 거지 당신과 얼굴 붉히고 싶은 게 아니야."
"당신 내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이곳으로 날아온 건 알아? 지금 당신 얼굴이 어떤지는 아냐고."
"원더우먼."
원더우먼의 등 뒤에서 나직한 배트맨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 근육에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다이애나는 고개도 얼마 돌리지 않고 그저 힐긋 짧은 시선을 제 뒤에 서있는 배트맨에게로 보냈다.
"슈퍼맨과 이야기 하도록 하지. 여기서는 소란스러우니까 진찰실로 가."
"둘이서 괜찮겠어?"
진찰실이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랗고 붉은 잔상이 휙 하니 저만치로 사라져버렸다. 다이애나가 그제야 몸을 돌려 브루스를 걱정스레 마주하면 그는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진찰실로 걸음을 옮긴다. 그의 뒤에서 플래시가 무슨 일이야 뱃츠? 무슨 일이야? 하고 갸웃갸웃 했지만 누구도 그에게 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다이애나는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듯 쓸며 짧게 혀를 찰 뿐이었다.
진찰실에서 자료를 살피고 있던 존은 브루스가 도착했을 즘에는 클락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가는 존과 엇갈려 들어가는 브루스가 짧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눈 뒤 들어서면 슈퍼맨만이 제 위압감을 뽐내는 진찰실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브루스는 문을 닫았다.
"어째서 나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어?"
처음에는 그저 낮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클락이 말을 꺼냈다. 감정을 추스를 때 몸을 웅크리는 버릇이 있는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오고 대답을 원하는 클락은 고개를 들어 브루스를, 배트맨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분노를 감추지 않는 슈퍼맨은 이 와중에도 여전히 제 화를 안으로 삭여내며 그저 주먹만을 꾸욱 말아 쥐었다. 금방이라도 붉은 안광을 내뿜을 것처럼 노여움에 눈빛이 흉흉한 슈퍼맨을 앞에 하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브루스의 침착함은 그가 그간에 몸에 익힌 냉정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슈퍼맨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 때문이 더 컸다.
"다이애나가... 원더우먼이 저쪽 차원 일을 도우러 왕래하는 건 알고 있었어. 그는 현명하고, 나보다도 강하니까... 나도 아무 말 없이 있었지. 하지만..."
계속 말을 쏟아낼 기세로 보였던 클락은 날카롭고 딱딱한 무언가가 목구멍에 걸린 사람처럼 괴롭게 눈을 질끈 감으며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리고 띄엄띄엄 단어와 단어를 이어간다.
"그가... 그곳의 배트맨이 죽었다고, 들었어."
아무것도 없을 허공이 마치 묵직하게 내려앉은 심해처럼 무거웠다. 드물게도 슈퍼맨의 호흡소리가 거칠게 실내에 들어찼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어떻게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어? 나도 힘이 될 수 있었는데... 나도... 나는,"
"누구도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어."
"다이애나는 강하지만 그 혼자로는 손이 부족했었잖아! 브루스! 자네는 무얼 했어? 나에게 이 지구를 신경 쓰라 해놓고 자네는 뭘 했냐고! 그 세계를 가상 시뮬레이터라도 보는 것 마냥 관찰하고 기록했잖아! 그럴 거면서 왜 날 보내지 않았어? 왜!!"
쿵 하고 클락이 바르르 떨리는 주먹으로 벽을 치자 온 실내에 진동이 펴졌다. 그에 클락은 잠시 벽을 노려보더니 그와 몇 걸음 떨어진 위치로 날아 이동하며 제 손을 단단히 팔짱끼어버렸다.
브루스는 로드 배트맨이 그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 꼭 상사병에라도 걸린 양 속앓이를 해대던 클락을 떠올렸다. 브루스는 그날 클락이 배트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저 클락이 이상하리만큼 로드 배트맨이 홀로 차원을 넘어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는 점과 그의 안위를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을 들어 보았을 때 그에게 어느 정도 태세가 갖춰질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든, 넘나드는 형식으로 있든 할 것을 추천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에 한 가지 더. 어쩌면 클락은 로드 배트맨에게 무언가 마음을 전하는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클락의 감정은 올곧고 선명하지만 그 빛이 나오기까지는 클락의 주위를 감싼 온갖 빛들이 겹치고 겹쳐서 뒤섞이고 하나로 내리쬐어야 한다. 그것은 무지개의 빛깔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얀빛을 만들어내는 것과도 같았다. 세상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염두에 두고서 재어보는 브루스에게 클락은 밝고 선명할수록 오히려 미지와 무지가 뒤섞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브루스는 슈퍼맨을, 클락을 존경하고 친애했지만 그와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섬세한 그를 이해하기에 자신은 그저 편집증이 심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브루스는 지금 클락의 반응이 자신이 호감을 느낀 상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에 의한 것인지, 자신이 가진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에 의한 것인지, 그도 아님 배트맨이라는 존재에게 느낀 괘씸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답이기에 브루스는 그의 감정을 온전히 마주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슈퍼맨의 감정과 배트맨의 논리는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공존하고 있을 수밖에는 없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지 못하는 두 사람은 그저 나란히 서로를 묵인하는 것 외에는 함께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
"배트맨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
"그가 죽었어. 그곳의 내가 그를 죽게 했어."
"로드 배트맨의 직접적인 사인은 슈퍼맨이 아니야."
"어쨌든 그가 의지한 것이잖아."
자네도 알고 있잖아, 들었잖아, 보았잖아. 해일이 몰아치는 파란 눈동자가 브루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배트맨이 죽는다고 그 세계가 끝나거나 하지 않아. 그가 없이도 신념을 가진 이들은 일어서겠지. 그런 미래를 위해 배트맨은 선택을 한 것뿐이고."
"정말 그래? 자넨, 배트맨은 그 자신의 목숨도 그저 네 아니오의 선택지에 지나지 않아? 꼭 그렇게..."
슈퍼맨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제 손바닥 뒤로 감추어버렸다. 와치타워의 진찰실 안에 함께 있음에도 그와의 거리가 이상하게 꽤나 멀거니 느껴졌다. 오래 전 브루스가 예감했듯이 그와 자신은 결국 이 평행선 위에 고정된 채 협력이야 할 수 있을지라도 엮어지지는 못한 채로 지금의 이 거리감을 유지하며 그저 각자 뻗어만 나갈 것이다. 긴 침묵에 빠진 클락을 남겨둔 브루스는 진찰실을 조용히 뒤로했다. 오늘도 와치타워 너머에서는 푸른 지구가 그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그저 하루하루 특이했던 사건마저 훗날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공평하게 무심하게도 흘러간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사건은 발생하여 저스티스 리그의 히어로들은 또 다시 지구를 구해야만 했다.
루터와 월러가 협력하여 분석, 재개발을 시도하던 둠스데이의 세포가 하수구를 타고 지구 전반으로 퍼져나가 행성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었다. 크립톤의 기술은 물론이고 브레이니악과 마더박스의 코드까지 융합된 둠스데이는 사실상 이전에 없던 하나의 인공생명체와 같은 것이지만 그에 새로이 이름을 붙여줄 만큼 상황은 여유롭지가 못했다. 연구실 인큐베이터에만 갇혀 온갖 실험을 거치고 있던 그는 이 행성을 지독하게 미워했고, 그의 집이 무너져버려도 그 자신은 끈덕지게 우주를 떠돌며 생존할 수 있음을 진즉에 깨달을 만큼 영악했다. 히어로들은 이 세포들의 움직임을 봉쇄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땅 지하에 만들어놓은 그들의 둥지마다 마련한 독을 차단해야했다. 상황은 절박했지만 그래도 해결책을 알고 나자 언제나 그렇듯 희망이 저 아래서부터 솟아나 히어로들을 움직이게 했다. 이 사건도 곧 과거의 일상이 되어 한 몇 번의 감동에 차오른 언론사의 기고문 정도로 장식 되었다가 차츰차츰 희미해질 터라고 모두의 가슴 한켠에 이른 안도감이 싹을 틔워나갔다. 그러던 그때 세포들의 가장 큰 둥지에서 구제 시스템을 조작하고 있던 배트맨이 있던 위의 지반이 약해지면서 붕괴가 일어나 쿵 하고 머리 위로 그 무거운 암석들이 맥없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 사고로 배트맨은, 브루스는 영원과도 같은 잠에 들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채 침상에 누워 그저 생명만이 보존된 브루스는 마치 완벽한 장식품처럼 보였다. 자신은 어떻게 배트맨에게 매번 속을 수 있는 걸까. 왜 항상 그가 스스로를 죽게 방관할 수 있는 걸까. 클락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둥지 속에서 배트맨이 슈퍼맨 보고 바깥에 나가 싱크홀이 생길 지점을 보강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을 떠올렸다. 저 위에는 슈퍼맨을 들볶아 대지 못해 안달이 난 승냥이들이 있었다. 배트맨은 다시 한 번 찾아온 진동에 불안한 시선을 보내는 슈퍼맨에게 이곳은 세포들이 가장 중요하게 지어낸 둥지이며 기둥이 단단하니 문제없다며, 자신은 손을 뗄 수 없을 뿐더러 힘으로는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에 클락이 나가야만 한다고 슈퍼맨의 등을 떠밀었다. 이것은 박쥐가 교활하기 때문일까? 배트맨은 철두철미하기 때문에? 슈퍼맨이 순진했기 때문에? 슈퍼맨이 너무나도 그를 믿었기 때문에? 이젠 이런 질문들은 어찌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결국 어느 쪽의 질문도 하나같이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었으니까.
지금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배트맨(어느 쪽이 되었든)은 슈퍼맨 본인이 꺼려했던 만큼이나 더더욱 그를 다른 슈퍼맨과 만나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저스티스 리그는 이미 보호와 안전을 이유로 저 지구를 발아래에 두고 하늘 높은 곳에 이름도 ‘와치타워’라는 곳을 지어 띄워놓지 않았던가. 로드 슈퍼맨과 슈퍼맨이 서로를 설득하거나 어떤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분명 둘의 기본 생각이 똑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그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과 범위에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의 세상은 판자처럼 연약하고, 노란 태양 아래의 칼엘에게는 힘이 있었다. 정말 단순한 사실이다. 너무나도 또렷한 명제를 그저 클락만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공통점을 인정하는 순간 클락은 자신이 실패가 결정지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부정한다고 해서 그의 태생이 신비하게도 한 순간에 바뀌는 것도 아닌데도 굳이 슈퍼맨과 크립토니안을 선으로 가르고 구분하여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그런 무의미한 짓을 지키느라 슈퍼맨은 배트맨을 두 번이나 희생하게 되었다. 과연, 과거 배트맨이 말했던 것처럼 과거는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어리석은 존재들의 앞에 군림하기로 결심한 슈퍼맨이 하얗게 지구의 어둠 위로 떠오른 날, 우주의 어둠 속에 떠오른 슈퍼맨은 병상을 미약하게 두드리는 하얀 손끝 움직임을 듣지 못했다.
결론: 숲뱃이 사귀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다.
(아무말 글의 끝은 아무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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