챱님 리퀘스트 ['더 멋있게 고백하려고 했단 말이야 방금 전 고백은 무효야!' 같은 느낌의 포카포카 귀여운 숲뱃]에서 나온 글입니다. ...방향이 초큼 많이 틀어져버렸어요☞☜
“사귈까?”
그 순간 온 세상은 침묵을 일관한다. 브루스는 자신이 꺼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애꿎은 눈을 깜빡였고 클락은 안경너머에서 더욱 선명하게 눈동자를 동그랗게 할 뿐이다. 그래, 저 눈동자. 브루스는 괜히 속으로 혀를 차며 투덜거려본다, 모든 것은 저 남자의 눈동자가 너무나 빛났기 때문이라고.
클락과 브루스가 이렇게 서로의 맨 얼굴을 마주한 것은 사흘이 모자란 넉 달만의 일이었다. 슈퍼맨의 도움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지구 곳곳 어디에서나, 저 대기권 너머에서조차 요구되는 것이었고 거기다가 성실한 봉급쟁이로서 클락은 최근 실마리를 잡아낸 지역 풍토병과 렉스 코프의 하청업체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기사를 작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고담이야 언제나 그렇듯 크고 작은 범죄들이 나를 잡아보라며 배트맨의 눈앞에서 얼쩡거렸고, 브루스 웨인은 엉뚱한 분야에 로비되고 있던 회사 돈의 행방을 찾아 그 책임자를 색출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둘이 나란히 바쁠 때는 넉 달은커녕 반 년 이상도 서로의 행적을 보고 들리는 뉴스 구절에서 파악하는 일이야 종종 있었지만 아무래도 삼 주 전 팔랑팔랑 박쥐의 동굴로 날아들었던 슈퍼맨에게 이렇게 노닥거릴 정신 있으면 자네 아파트 공과금고지서나 확인하라며 내쫓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마침 메트로폴리스는 크게 특종 하나를 마무리해서 곧 내일이라도 들이 닥칠 고소장이나 반박사설 등을 대비하며 한숨을 돌리고 있었고, 브루스는 사주로서 직원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잠깐 이 빛이 휘황찬란한 도시에 발을 디디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직원들의 의욕을 북돋는 데는 뺀질뺀질한 사주의 말 몇 마디보다야 신속 정확하게 입금되는 보너스와 상여금이 훠-얼-씬 효과, 효율적인 것을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최고 경영자인 브루스가 모를 리는 없었다.
데일리 플래닛 안에서 설핏 마주친 눈길로 브루스의 의도를 파악한 클락은 브루스가 잠시잠깐 머물게 된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으로 찾아와서는 앞전의 복수라도 하려는 듯 “이럴 시간 있으면 잠이나 한 시간 더 자지 그래.” 하고 운을 떼기는 했지만 결국 수줍게 볼을 붉히며 배시시 웃어버렸다. 안 그래도 커다란 몸인데도 그보다 반 치수쯤 더 크게 지어진 시시해 빠진 양복과 사각형의 두꺼운 안경테, 대하는 이로 하여금 친근함을 주는 수그린 어깨를 눈앞에 하자 브루스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온갖 통증들이 싹 모습을 감추어버렸고 그때 브루스는, 그 배트맨은 생각하고 만 것이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뭐?”
클락이 고개를 갸웃하니 움직이자 그것을 신호로 멈춘 것만 같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놀랍게도 브루스는 자신의 얼굴이 목부터 시작해서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알았다. 브루스가 브루스 웨인으로서 차림 한 지금 순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브루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혼잣말처럼 “이만 가봐야겠군.”라 얘기하며 저기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브루스의 뒷덜미를 어딘가 멍한 클락의 목소리가 잡아챈다.
“브루스?”
“아무것도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그리고 또 한 번 놀랍게도 그 배트맨이 자리를 도망쳐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진 남자에게는 어떤 것을 미끼로 마음을 전하면 되는가. 한때 브루스는 이러한 별 수도, 도리도 없는 것의 답을 찾아보겠답시고 머리를 굴렸더랬다. 브루스는 다른 것은 다 제쳐두더라도 자신의 얼굴 하나만큼은 어디를 가서 나쁜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 알고 있었고, 육체적 향락적 즐거움을 원한다면 그가 가진 온갖 지식과 경험들을 끌어 모아 상대를 충족시킬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상대가 브루스에게 이미 잔잔하게 웃으며 “나와 항상 같이 있어 줘.”하고 말을 건네 오지 않았던가. 어디를 어떻게 보더라도 희망찬 전개만이 예상되는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변수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슈퍼맨이라는 점이었다. 크립톤의 아들, 강철의 사나이, 저 하늘에 떠올라 모든 이의 가슴 속에 희망을 안겨주는 히어로. 그것이 바로 슈퍼맨이고 클락 켄트였다.
어둠 속에 숨어서 범죄자들의 공포를 눈에 새기며 망령처럼 가고일 상 위에 깃들이 있을 때, 슈퍼맨이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말을 했다. 그와 같이 있어달라고. 나와, 항상, 같이. 그것은 분명 슈퍼맨의 어딘가 동화나 경구에서 읽을 법한 모범적 감성에서 비롯된 동료애의 발현이었겠지만 브루스는 오래 전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해버린 주책없는 감정 하나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설게나마라도 이렇다 할 대꾸도 못 하고 자리를 떠나버렸지만 어떤 1%의 확률을 눈에 한 기회주의자는 언제부터인가 계속 클락과 자신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을 재단하며 시나리오를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그 완벽한 존재의 마음을 흔들어 조금은 그 빛무리 속에 제 마음을 심어둘 수 있을까 하고. 그러다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와 같이 세상을 위험해서 구해낸 슈퍼맨이 눈부신 태양을 등에 지고 피와 먼지로 얼룩진 자신에게 괜찮으냐며 손을 내밀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은 그에게 그림자밖에는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이다.
관리하지 않은 잡초마냥 무성해져버린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고 정리해버린 그날에 브루스는 왠지 웃음이 났더랬다. 자신의 멍청한 순진함에, 한 번도 자신의 것인 적이 없었는데 몸서리치도록 마음을 뒤흔드는 상실감에, 그리고 드디어 어리석음을 끊어낼 수 있다는 후련함에 독한 위스키를 한 잔 생으로 삼켜내며 브루스는 자꾸만 웃었다. 웃어 버렸다. 웃어서, 버렸다. 분명 그랬을 텐데도...
“흠.”
브루스 입맛에 썩 맞는다고 표현할 수 없는, 브루스 웨인의 유산으로서 받은 술병들이 진열된 진열장을 기웃거리는 중 브루스의 등 뒤에서 짧고 굵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저택 청소는 이미 끝냈을 알프레드가 브루스 옆에 서서 무의미하게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액자 위를 먼지떨이로 토닥토닥 털어내며 그를 바라보는 도련님을 곁눈으로 힐끗 보았다.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싱겁게 대꾸한 브루스는 제 발이 저린 모양으로 허둥지둥 서재를 떠나가 버렸다. 솔직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제 도련님의 어설픈 뒷모습을 지켜보며 알프레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귀여운 아이는 도대체 무어가 그리 겁나는 일이 많은 것인지.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 해주고 싶은 온갖 군소리들이 떠올랐지만 능숙하게 삼켜냈다. 그저 지금으로써 자신은 맛있고 잘 차려진 한 잔의 코코아를 만들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어머니, 도시의 도련님이란 모두 이런 걸까요? 스마트폰에 저장된 연락처 목록을 한참 끌고 내리다가 클락은 한숨을 푹 내쉬며 휴대전화를 책상에 덮어 놓았다. 일박에 클락은 지불해본 적도 없을 금액이 매겨졌을 방을 미련 없이 뒤로하며 빠르게 호텔 건물을 빠져나가는 브루스는 클락이 따라잡기에는 분명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우선 클락의 머릿속이 그를 따라 나가 붙잡을 만큼 깨끗하지 못 했다. 사귈까? 사귈까라고? 커다란 언론사에 소속되어 나름 기자랍시고 언어를 놀린다는 자가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클락은 사귄다에 사전적으로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었는지 혹은 아까의 맥락에서 브루스가 말한 문장이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어떤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물론 클락 머릿속 검색결과는 0, [해당 검색어에 맞는 게시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였다. 그렇다면 지금껏 잘 사귀고 있었던 연인에게 불쑥 “사귈까?”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귀고 있는 게 아니었어?”
멍하니 허공 어느 매를 초점 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린 클락은 끄으으으 하고 앓듯 괴성을 내며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회사에서 모니터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몸부림치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이는 건 이상한 일도, 드문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그런 클락을 의심스럽게 보거나 하지 않았다. 브루스는 브루스 웨인으로서 세상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선망의 시선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고 숱한 호의의 속삭임들에 둘러싸여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말 한 마디에 고요 속에서 튀어 오르던 박동 소리는 분명 클락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을 거라고 자부했던 만큼 클락은 지금 엄청난 정신적 타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늘 브루스가 클락에게 지적했듯 클락은 그의 능력에, 감각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 배트맨이 그저 누가보기에도 확연하고 분명한 반응을 보였다는 이유로 제대로 서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해보지 않고 어물쩍 넘겨버린 것이 문제였고 클락의 무른 부분이었다.
정말로? 책상 위에 엎드려 죄 없는 머리카락만 헝클이던 클락이 고개를 살짝 들어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배트마크가 떠오르는 슈퍼맨 머그잔을 보았다.(제조사의 의도와는 반대로 나온 불량품이었다.) 그날은, 왜일까 그저 모든 상황이 그 말을 꺼내기에 완벽해 보였다. 어둠이 곱게 드리운 도시를 그의 수호자가 이 한 밤이 평온하게 지나도록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고, 그런 그의 옆에 자신이 날아들었다. 미국은 비록 밤이었지만 그렇다고 전기가 사람 사는 곳이면 이곳저곳으로 공급되는 요즘 시대에 고요할 리는 없는 데다 거기에 클락은 저 지구 반대편에 존재할 낮의 소음마저도 귀에 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배트맨의 망토가 나직이 바람에 맞추어 흔들리며 그의 호흡이며 심박이 차분하게 또렷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이 소중한 소리와 소리들이 온전히 저 발아래 펼쳐진 도시에 바쳐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클락에게 어떤 풍경을 눈에 할 때 끼쳐오는 압도감과 더불어 일말의 초조함 같은 것이 찾아들었다. “나와 항상 같이 있어줘.” 클락은 그렇게 이야기했고, 계획에 없었던 시시한 고백은 말로 꺼내고 나니 너무나도 선명했다. 브루스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고 비록 그는 그 자리에 대답 한 마디 없이 다시 도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클락은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어떤 연인적인 제스처나 스킨십이 없다하더라도 그도 같은 마음이고 그걸로 된 거라고, 진전이 없을 뿐 적어도 뒤로 가거나 어그러지지는 않았으니까. 배트맨과 슈퍼맨, 브루스 웨인과 클락 켄트 이 이질적인 존재들이 함께하면서 가져다주는 든든함은 너무나도 안락한 것이었고 그걸 잃고 싶지 않았던 클락은 답지 않게 겁을 내었다. 하지만 오늘 브루스의 말을 듣고 나니 이제야 결심이 섰다. 이제 와서 무효로 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클락은 브루스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로이스!”
퇴근 시간, 자료 수합을 마치고 다이애나와 함께 새로 생겼다는 터키식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기로 오랜만이 약속을 잡은 로이스의 앞에 불쑥 온 얼굴이 길장과 설렘의 사이에서 우스꽝스럽게 굳어져 붉어진 클락이 나타났다. 로이스는 영문은 몰랐지만 클락의 절박한 기세에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시선을 기꺼이 할애해주었다.
“왜?”
“나에게 용기를 줘!”
로이스가 조심스럽게 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클락이 외친 말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로이스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로이스는 어제 외근에서 돌아온 후로 묘하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스몰빌에게 클락의 동료로서, 친구로서, 몇 분 후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퇴근한 직장인으로서 조금은 상냥해져보기로 했다. 용기쯤 나눠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었고 뭔지는 몰라도 일이 잘 풀린다면 아침 로열 클로버의 커피 한 잔은 타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 그래. 힘내, 스몰빌.”
“고마워!”
클락은 손을 붕붕 흔들며 헐레벌떡 복도 저 끝으로 사라졌다. 로이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다음 다이애나에게 보낼 메시지를 마저 작성해나갔다.
“안녕.”
순조롭게 패트롤을 마치고 동굴로 오면 슈퍼맨이, 클락이 뒷짐을 쥔 자세로 방긋 웃으며 브루스를 마중했다. 배트모빌에서 내려 층계를 디디려는 순간 너풀너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 브루스는 쿵, 하고 무거운 짐처럼 가슴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더더욱 등을 꼿꼿하게 펴고 부러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클락이 납득하지 못 한다면 그가 박쥐의 고집에 질려 포기해버릴 때까지 브루스는 그 날의 실언을 모른 척, 없던 일인 척 할 셈이었다. 뻔뻔함은 브루스 웨인의 미덕이오, 배트맨의 생명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에게 클락은 뒷짐을 풀며 곱게 종이포장지에 감싸인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내미는 것이다. 배트맨은 눈매가 험악해지며 마치 클락이 이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철없이 가져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 여린 송이를 쏘아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에도 클락은 땅 위에 발을 단단히 디디며 끈기 있게 내민 손을 더욱 곧게 뻗을 뿐이다.
“꽃 한 송이 준비하지 않고 어물쩍 나 좋을 대로 일이 되길 바란 내가 나빴어. 그러니까 다시 제대로 자네에게 말하고 싶어.”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 같군.”
브루스는 필사적으로 몸을 물리며 그런 클락의 손길을 보지 못 한 듯 피해 길을 가려 했지만 클락이 브루스 앞을 단호히 막아섰다.
“브루스, 우리 사귀자.”
“클락.”
카울 위로 떠오른 표정은 험상궂다 못해 살벌해졌지만 그 너머를 알고 있는 클락은 동요하지 않았다. 하, 하고 한숨을 짧게 쉰 브루스는 가면 너머에서 위협적일 만큼 똑똑히 이야기한다.
“지난번에 나는 분명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을 텐데? 바보 같은 실수를 한 건 사과하지. 그러니 클락, 내 말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자네가, 그 브루스 웨인이 말실수를 해버릴 만큼 나를 좋아하는 걸 알아.”
클락이 내미는 꽃을 무르기 위해 손끝으로 그것을 밀어내는 브루스의 손을 클락은 조심히 마주 잡으며 장갑이 껴진 빈손에 장미를 쥐어주었다.
“미안해, 알고 있었어.”
제 손을 감싼 클락의 손에 의해 브루스의 손가락이 말리자 포장지에서 바스락하고 소리가 났다. 검고 단단한 장갑 너머에서 잘 손질된 장미는 가시가 설령 있더라도 아플 턱이 없는데도 브루스는 고통스러운 듯 한번 어금니를 악 문다.
“나는, 이러고 싶은 게... 그렇게...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클락 나는 자네에게 이런 걸 바라지 않아.”
클락의 손 안에는 온전히 힘을 주지 않고 버티고 있는 브루스의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꽃을 놓아버릴 듯했다. 클락은 꿋꿋하게 그런 무력한 손을 받치며 브루스를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브루스는 맑은 시선이 아파서 고개를 살짝 틀어버린다. 그에 클락이 마치 피하지 말라고 부드럽게 다그치듯 아주 살짝 제 손에 힘을 더 실었다.
“진심.”
클락은 단단하게, 그만큼 절박하게 잘라 말했다.
“또다시 내 착각이 아니라고 증명해줄 자네의 진심을, 주체 못하고 배트맨이 얼결에 고백해버릴 정도의 진심을 내게 줘.”
평소 클락의 어조와는 다른 강경한 투에 브루스가 눈길을 들어 그를 보고 있자면 그에 비해 브루스 앞에 놓여있는 파란 눈동자는 초조하게 제자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슈퍼맨이 한없이 연약해지는 순간을 앞에 하고 브루스의 약은 머릿속이 빠르게 다시금 확률을 셈한다. 브루스의 가슴에서 감정이 치밀어 오르던 순간과 다정한 슈퍼맨의 웃음, 그가 내미는 자애로운 손과 지금 제 손을 다정하게 구속 중인 손, 클락 켄트가 서있는 모습 하나하나가 뒤섞여서 자꾸만 새빨갛게 욕심이 피어난다. 모든 것을 가진 남자에게는 어떤 것을 미끼로 마음을 전하면 되는가. 한때 브루스가 생각했던 것이었고, 결국에는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볼 새도 없이 볼품없는 마음이 툭 하니 튀어나와 없던 일로 덮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번에 대답을 하고 나면 무를 수 없는 건가?”
“이제는, 없던 일로 지나가지 않아.”
브루스는 조용히 하지만 든든하게 제 손에 곁들여진 클락의 손과 고집스레 손에 힘을 넣고 있지 않은 자신의 손을 본다. 슈퍼맨의 맨 손과 배트맨의 장갑 낀 손. 클락 켄트의 솔직함과 브루스 웨인의 회피를 브루스는 제법 오랫동안 보았다. 꽤 긴 침묵이 둘 사이에 남았던 것 같다. 브루스는 장미 줄기를 쥐게 된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조금씩 실어 보았다. 그는 깊게 고른 숨과 함께 시선을 정리한다. 그곳에 푸른 눈동자가 있다.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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