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9.)
브루스의 선이 선명한 손이 클락의 뺨을 천천히 감쌌다. 브루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의 탄탄한 배 위에 이마를 부비던 클락이 고개를 들었다. 잘 손질된 엄지손가락이 짙은 눈썹을 결에 따라 미간에서 관자놀이 방향으로 쓸었다. 조용한 숨소리가 편안하다. 조심스러운 손가락이 이제 클락의 귓가에 닿았다. 무른 뼈가 그리는 오밀조밀한 귓바퀴를 덧그리던 손은 도톰한 귓불을 주물렀다. 그러다 귓불과 턱뼈의 끝이 맞닿은 지점으로 손이 내려오며 턱 선을 따라왔다. 클락은 마치 손길을 좋아하는 강아지처럼 브루스에게 턱을 들어보였다. 단단한 뼈와 상대적으로 여린 살이 이루는 경계를 브루스는 새삼스럽게 가늠했다. 손끝으로 올록볼록 클락의 턱을 만지던 브루스의 손이 클락의 얼굴을 떠났다. 눈을 감고 있던 클락은 눈을 반짝 뜨며 단정하지만 곳곳에 상처 진 손을 바라봤다. 클락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 브루스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 정착하자 다물었다. 클락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던 브루스의 손이 머리칼의 뿌리가 박힌 두피로 파고들었다. 역시나 따뜻한 피부가 기분 좋은 온기를 발한다. 클락은 한참 브루스의 손 아래서 소리도 없이 웃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그와 눈높이를 같이했다. 브루스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소중한 것을 어르듯 닿았던 손의 주인과는 맞지 않는 표정이었다. 날렵한 직선을 그리는 브루스의 콧날 위에 클락은 입을 맞췄다. 귀를 기울이면, 어쩌면 브루스의 속눈썹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클락이 브루스의 승모근을 따라 올라오며 목덜미를 쓸고 잘 정돈된 뒷목을 부드럽게 받쳤다. 브루스가 목에서 살짝 힘을 뺐는지 클락의 손 안에 간지러운 하중이 가해진다. 클락은 브루스의 옆이마에 도드라진 선을 따라 쪼듯이 뽀뽀했다. 그리고 입맞춤은 광대뼈로 타고 내려와 그의 뺨에 한 번, 그리고 다른 쪽 뺨에 한 번 스타카토처럼 떨어졌다. 클락은 브루스와 이마를 붙였다.
“키스할까?”
손가락 끝에서 클락의 머리카락을 꼬고 있던 브루스가 말없이 클락의 목에 팔을 휘감으며 눈을 감았다. 쿵, 쿵 하고 가슴 속에서 울리는 두 소리가 가깝게 맞닿으며 공명했다.
2017. 9. 12.) 로드숲뱃 아니면 그냥 숲뱃 - 왠지 붙이고 싶은 제목(?)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너와 나의 우주
천장의 조명이 별처럼 떠다니는 검은 액체 안에 각설탕을 하나 떨어트리면 따뜻한 커피를 머금은 설탕은 알갱이가 서로 떨어지며 사르르 부서진다. 김이 나는 잔에 굳이 수저를 휘젓지 않아도 각설탕은 커피로 녹아들어 퍼져갔다. 브루스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브루스의 몫으로 준비된 각설탕은 이제 한 개가 남았다. 묵묵히 혼합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핀 브루스는 남은 각설탕을 마저 넣으려 하다 그것을 덥석 제 입 안에 가져갔다. 어릴 적 앙증맞은 도자기 안에 가득 들어있던 하얀 각설탕은 제과점에서 파는 형형색색의 사탕들보다 탐스러워서 몰래 손으로 집어먹다가 집사에게 가볍게 꾸중을 들은 기억이 있다.
사각, 사각. 하얗게 각이 져서 뭉쳐있던 설탕이 얼마쯤은 구강의 온도에 의해 녹아들고, 또 얼마쯤은 저와 똑같이 하얀 이 사이에 부스러지는 소리를 남자는 예민하게 들었다. 한두 번쯤 씹었을까 말았을까 그래서 분자들 사이의 무른 결합은 불과 37도 내외의 온도에서도 금방 끊어지고 투명해진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마치 알갱이들을 잘게 부수어내듯 야금야금 턱을 움직여 녹아 사라지는 설탕과 설탕을 좇아서 끈질기게 작은 저작운동을 계속했다. 달각, 달각달각. 브루스가 손에 쥐 작은 수저가 빙빙 원을 그리며 밑바닥에 가라앉은 남은 설탕을 잘 저어 섞는다.
분자가 낱개로 흩어지는 소리들을 남자는 계속 듣다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저만치쯤의 거리에 있는 브루스에게 다가간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잔 위로 시선을 떨군 브루스의 고개를 들게 해서 끝에 희미하게 하얀 알갱이가 남아있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채 삼키지 못한 설탕이 남아서 브루스의 입안은 끈적하고, 혀가 아리게 달았다. 침샘을 자극하는 단맛에 살짝 혀뿌리가 아파서 탓하듯 설탕이 묻은 입안을 크게 휘저으면 혀와 혀는 혼합된다. 그렇게 엉기듯이 마주하다가 이내 떨어진다. 브루스는 조용히 숨을 한 번 고른다.
“여전히 단 게 좋아?”
남자는 꼭 놀리듯이 물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를 본다. ‘여전히’라는 것은 뭘까. 더는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나? 아니면 여전히 좋아해야 한다는 기대를 담은 물음일까? 진통제를 감싼 녹말 코팅보다야 설탕이 이룬 분자의 결합이 훨씬 입에 달았다. 어릴 적 약을 먹을 일이 있을 때면 가루약의 쓴맛이 싫어서 가득 인상을 쓴 브루스에게 부모님이나 집사가 건네줬던 작은 별사탕이 달았고, 이상하게 로빈들 모두가 브루스에게 제일 처음 준비해주는 음식인 코코아도 달았다. 입안의 설탕은 남자가 입맞춤으로 얼마쯤 거둬가고 남은 잔해도 다 녹아 사라져버린 뒤라 약간의 텁텁함을 남기고 브루스의 입안에는 공허한 체온 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브루스가 젓다 멈춘 커피 잔에는 설탕이 보이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물질과 물질이 물리적으로 섞여 있을 뿐일 이 혼합은 열을 잃고 정지하면 금방 분리되어 앙금으로 가라앉는다. 아주 밑바닥에 조금은 커피를 머금은 설탕이 모래알처럼 남는 모습을 단 것을 좋아하는 브루스는 굳이 이론적으로 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굳게 브루스를 바라보는 남자의 뒷목을 가벼운 힘으로 잡아 끌어당기면 호선을 머금은 입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닿는다. 모든 것을 녹여 없앨 것만 같은 따뜻함이 브루스의 입술에는 조금 아팠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얼마 쯤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입술을 섞은 뒤 떨어지고 나서야 브루스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제 필요 없어질 것 같군.”
2018. 8. 17.) 비욘드 숲뱃 뒷이야기, 쓰진 않을 거고 근데 뭔가 길?고 해서 남겨두기
늙숲늙뱃으로 생각한 부부싸움, 하나는 그냥 가벼운 꽁냥꽁냥 느낌. 브루스가 이젠 배트맨 후견인인데도 종종 탈출훈련이나 수중훈련 같은 위험한 훈련도 해서 클락이 이젠 나이도 있고 은퇴했으니 그만하라고 말하면 브루스가 괜히 욱해서, "그토록 걱정하면서 밤에는 그렇게 괴롭혀 되나?"하고 말하면 클락도 속이 이글이글.(한편 늘 바이탈 사인 체크하면서도 걱정함.) 또 반대로 클락이 히트비전으로 면도하거나 그러면 브루스는 자기가 만든 도구가 있는데 왜 위험하게 그러냐고 말함. 그러면서 브루스가 클락에게 아무리 크립토니안이라지만 클락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바뀐 부분에 대해 정리한 데이터 들면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면 클락도 자기 능력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있다 보니 욱해서 뭔가 할아버지 둘이 지금 누굴 늙은이 취급하나 하는 영양가 없는 싸움. 하여튼 침대가 짐(?) (생각해보니 내가 쓴 숲뱃 중에서 할아부지들이 제일 기운 좋은 듯?)
다른 하나는 부부싸움이라기보다 주어진 수명대로 일이 진행된다고 했을 때 있을 수 있는 두 사람의 뒷이야기가 더 정확할 거 같다. 브루스가 죽고 나서 클락은 브루스가 자타나의 도움 같은 것을 받아 슬픔과 관계된 호르몬 신경작용이 일정 수치를 넘고 그것이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도 계속될 경우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달리 말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기도 함.) 기억을 잊을 수 있는 주술을 몰래 걸어놔서 클락이 브루스를 잊게 됨. 브루스가 주변 사람들에게 클락이 자기를 잊어버렸을 경우에는 절대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해서 일단 그런 브루스의 의견에 동의하던 안하던 우선 어느 정도 기간 브루스의 존재는 비밀에 붙여짐. 다만 클락이 기어이 브루스를 기억하고 말게 되고 그때 브루스는 클락이 결국 자신을 잊지 못하고 기억할 경우 클락이 볼 수 있는 메시지를 남겨놓음.(주변 가족들도 브루스가 이렇게 해놓은 걸 알아서, 클락이 결국 브루스를 기억할 걸 아니까 브루스의 억지를 들어준 것도 있음.) 메시지는 브루스가 클락과 결혼한 이후 날마다(거의 매일매일, 못해도 일주일에 3번 이상) 기록해놓은 영상 편지가 있음. 브루스가 클락에게 어느 시간만큼은 자기도 배트맨의 뒤를 봐줘야하기 때문에 자신을 혼자 두라고 한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 브루스가 그날 클락과 있었던 일과 느낀 감정에 대해서(클락에게 서운하거나 열 받았던 일-물론 클락도 거기에 토 달 말은 있음-, 클락과 함께하면서 행복했던 숙나들) 빼곡하게 빠짐없이 이야기한 영상편지임. "지금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자네가 결국 나를 기억한 거겠지. 많이... 화 났나? 난 자네가 나로 인해 괴로운 것도, 남은 생을 그리워하는 것도 원치 않아. 지금 이걸 클락 자네가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브루스의 표정이 화가 난 듯, 목멤을 참아내듯 애매하게 찌푸려진다.) 그러니까 우린 비긴거야." 그리고 마지막 영상? 아니면 모든 영상의 마지막에는 "오늘도 내 하루는 자네가 있어서 행복해."/"이제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건 지나버린 과거밖에 없어. 그럼에도... 자네는 나를 기억하지. 자네는... 자네는 나를 사랑하니까."/"고마워. 나를 사랑해줘서. 나와 함께 해줘서. 그리고 사랑해.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자네 정말, 가끔... 아니 이따금 정말 화나는 거 알아?" 브루스의 묘비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온 클락이 굳은 얼굴로 이야기함. "사랑한다고 일부러 말한 거지? 못됐어 정말. 난 자네 못 믿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배트맨을 내가 어떻게 믿어." 클락이 계속 투덜거림. "내가 자네에게 프러포즈 했을 때, 자네가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브루스 자네니까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이 아픔을 난 기쁘게 내 몫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이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걸 어떻게 숨기려고 할 수가 있어? 자넨 나한테 그러면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우린 왜 이럴까. 꼭 어딘가에서는... 내가 자넬 사랑하는 걸 알면서 어떻게 내가 이 아픔을 마다할 거라고 생각해. 진짜 자넨 바보야. 헛똑똑이라고." 묘비 위를 손바닥으로 쓸면서 클락이 한참을 이야기함. "...내 걱정 안 해도 돼. '바보 같은 짓' 안 해. 자네가 날 사랑하는 데 내가 어떻게 나를 함부로 하겠어. 난 괜찮아."/ "바보 같고 화나는 자네를 사랑했어.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묘비 위에 짧게 입을 맞추는 클락.
2019. 1. 20.) 로드숲x페어리뱃(우유빙수님, 손목염좌님 이야기에서 나온 것)
시끄럽던 세상이 머잖아 침묵을 했고, 겨우 찾아든 고요의 끝에 그것이 생겨났다. 잡초가 꽃을 피우듯 경우 없이 자라난 그것은 슈퍼맨의 주변을 맴돌며 자꾸만 케케묵은 이야기를 한다. 슈퍼맨이 한참 전에 정돈했던 모든 것, 질서와 평화, 보다 나은 세상 같은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은 어지럽게 휘젓고 슈퍼맨을 보란 듯이 탓했다. 그러나 슈퍼맨은 빨간 문장을 가슴에 한 이후로 전에 없는 자비로 그것을 내버려두었다. 그것은 매일매일 꾸준하게 슈퍼맨에게 그가 자신을 가두었다고 시끄럽게 굴기는 했지만, 그의 존재는 슈퍼맨이 있기에 가능한 잔상 같은 것이었으므로 듣는 척도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비웃듯이 떠들고, 이따금 무시하고 이따금 반응을 하고. 그것에게 짓궂은 시비를 걸고, 이따금 무시를 당하고 이따금 반응을 얻고. 그래도 그것과는 제법 호의적으로 지내고 있다고 슈퍼맨은 자부했다. ‘그’와는 다르게.
“너는 언젠가는 여기서 혼자 죽어?”
과거의 슈퍼맨도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웃기지도 않은 차림의 그것이 머리꼭대기에서 새살거렸다.
“그러겠지.”
로드 슈퍼맨은 심상하게 대꾸한다.
“보다 말끔해진 집에서 마지막을 하는 것도 제법 괜찮잖아?”
“집?”
깔깔깔깔, 요정은 높이 웃었다.
“별은 잔해가 되고 먼지가 되고 가스가 돼서 산란하지. ‘너’는 언제고 순진하네.”
“그래서 네가 여기 있는 거 아니야?”
북극의 찬바람은 인간의 피부를 할퀼 듯 매섭지만 칼엘에게는 그저 이 행성을 감싼 대기의 흐름 중 하나에 불과하다. 갖은 분자들을 품에 안고 흘러가는 이 기체의 아름다움도 더러움도 정말로 볼 수 있는 이는 얼마 없다. 슈퍼맨은 그 얼마 없는 이들 중 하나로, 어엿하게 이 세계의 주민이고 주인이었다.
그저 눈밭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세상의 소리마저 눈 속으로 묻힐 듯한데 어째서 저것은 저리도 홀연히 떠올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가. 작은 몸이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치 위성처럼 슈퍼맨과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붙들려서) 떠있다. 얄궂을 정도로 앙증맞은 분홍빛 가면 뒤에서 요정은 슈퍼맨을 내려다본다. 이미 죽어 사라진 것들의 얼굴을 하고서.
“‘네가’ 나를 여기 매어놓았지.”
그리고 요정은 가차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별로 로드 슈퍼맨의 이마를 내려치는 것이다.
2019. 2 .19.) 파워링x브루스 - 할뱃 전력
생일은 반짝반짝 예쁜 포장지이다. 기억에는 없지만 처음 경험해보았을 폐호흡은 차갑고 따가워서 앙앙 울어버렸던 이 날은 브루스 웨인과 참 잘 어울리는 날이었다. 브루스는 오늘도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의 군집 속에서 한들한들 웃었다. 사람들은 상냥한 거짓말을 한다. 태어난 것을 축하해, 네가 있어서 기뻐, 오늘은 생일이니까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 같은. 그들의 손과 눈은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그래도 엔터테인먼트와 가십은 브루스의 천직이었으므로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달을 띄우며 고마워, 사랑해 하고 달콤하게 대꾸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품위를 잃는 것은 질색하지만 얕잡히는 것도 그 만큼 경기하는 토마스 때문에 오늘은 좋아하지도 않는 와인을 연거푸 8잔이나 마셔버렸다. 뱃속에 수천마리의 나비가 들끓는듯해서 온갖 향과 웃음소리가 지독하게 엉겨있는 회장을 몰래 빠져나와 저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올빼미를 피해 작게 몸을 웅크리며 브루스는 어둠 속에서 작게 헛구역질을 했다.
이제 브루스의 생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자꾸 떠올리려고 애쓰며 까만 허공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 브루스는 식은땀이 나는 이마를 차가운 발코니 난간에 비볐다.
“브, 브... 브루스.”
사실 목소리보다도 먼저 감은 눈꺼풀 뒤로 쨍하니 쏟아지는 초록빛이 아렸지만 브루스는 떠듬떠듬 이어지는 제 이름을 듣고 난 다음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불길한 녹빛 속에서 브루스는 제법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을 테지만 모든 것에 겁을 내는 해롤드는 오히려 평상의 두려움 때문에 정작 겁을 내야할 것에는 보통과 비슷한 반응을 한다.
“너”
눈이 너무 부시다고 쏘아붙이려는 찰나 해롤드는 비틀비틀 날아 브루스의 곁에 풀썩 떨어진 파워링은 무언가를 쥐어짜내려는 듯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제 기묘하게 변형된 오른팔을 벌벌 떨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 나온 것은 멋도 운치도 없는 초록색깔의 장미다발이었다.
“새, 생일... 생일! 추... 축하...”
그리고 얼마 못가 그는 죽어버린 반딧불처럼 기나긴 어둠만을 남기고 브루스의 발치에 기절해버렸다.
반지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바라는 것, 상상한 것은 무엇이든 구현해낼 수 있다고 했다. 해롤드를 갉아 먹으며 점점 흉흉하게 빛이 나는 반지는 사실 해롤드를 저 우주로도 날게 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해롤드는 고작 웨인 저택의 난간 그 높이 까지 오는 데에도 고통스럽게 제 어금니를 씹어 물어야한다. 파리한 얼굴로 줄곧 기절해있는 그는 마치 날개 끝이 잘린 채 새장에 갇힌 새 같다. 푸르른 하늘로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며, 제 날개를 잘라버린 이의 눈을 파버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점점 앙상해지는 제 애꿎은 날개만 신경질적으로 부리로 쪼아버리는 어리석고 가녀린 날짐승.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귀찮고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배워온 브루스는 해롤드의 이마를 얼마쯤 닦는 시늉을 하다가 제 손수건을 저기 던져버리고 눈을 감고 끙끙 거리는 해롤드의 옆에 나란히 누워서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본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온통 녹으로 휩싸여서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죽을 그는 해롤드 본인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제법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남자가 눈을 떴다. 그의 히스테릭한 기상을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해본 브루스는 갑자기 터져 나온 소음에 인상은 찌푸렸지만 굳이 트집은 잡지 않았다.
“안녕.”
호흡이 잘 되지 않는지 격하게 헉, 허억 하고 숨을 들이고 내면서도 자신의 목을 조를 듯 부여잡고 있는 해롤드를 보면서도 브루스는 태평하게 인사했다. 어깨가 여윈 해롤드가 파득 몸을 떨며 브루스를 마주했다.
“아, 아... 안녕. 브루스.”
“네 선물, 정말 별 볼 일 없었어.”
브루스와 눈이 맞자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려는 해롤드에게 브루스는 뚱하니 말했다. 그러면 볼품없는 남자는 더더욱 몸을 웅크리며 어, 어... 하고 제 손을 쥐어뜯는다. 그 와중에도 혈관과 신경을 따라 번지는 초록과 초록이 울컥울컥 해롤드의 근육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그 브루스 웨인이 장미 한 송이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탓하듯 말하는 브루스의 말에 해롤드는 고개를 이리저리 내젓는다. 그렇지만... 초록색 장미는... 나밖에 못주잖아. 하고 소심하게 꿍얼꿍얼 하는 말을 들었지만 브루스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초록색은 그렇게 좋아하는 색도 아니었으니까.
“너 기절한 덕분에 날짜 다 지난 거 알지?”
추욱 어깨를 떨군 해롤드의 턱 끝을 들어 올리며 브루스는 일부러 고개를 갸웃 기울여 목에 묻은 붉은 자국들을 보이면서 심통 맞게 말했다. 얼굴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 도미노 너머에서 해롤드는 눈을 몇 번이고 굴리려고 시도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아 앓는 듯 위협하는 듯 목을 울렸다.
“...미안해.”
하지만 결국에 남자는 소심하게 사과해버린다.
“그리고 난 꽃보다 새가 좋아.”
해롤드는 이제 잠기운이 없어졌는지 제 옆에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았지만 브루스는 그에게서 등을 보인 채 돌아누우며 중얼거렸다.
“올빼미 말이야?”
웬일로 더듬거리는 기색 없이 똑바른 말이었다. 브루스는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와서 이불을 꾹 쥐며 더 단단히 모로 돌아간다.
“우주까지 날아가는 새면 뭐든.”
올빼미의 계산도, 신의 철퇴도, 외계인의 경이도 소용없을 검고 검은 소용돌이 괴물이 있는 곳에 자신을 던져 넣을 새라면 무엇이든, 설령 그 새가 그러는 사이에 비틀려 죽는다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브루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브루스의 등 뒤에서는 깜짝 선물을 받고 과호흡이 온 허약한 어린 아이처럼 씩씩 하는 거친 숨이 들린다. 웃을 듯 울고 있고 울듯이 웃는 해롤드의 얼굴은 브루스가 퍽이나 좋아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자꾸만 심통이 나서 보고 싶지 않았다.
“나, 나... 노력할게.”
자신의 생일에 남의 꿈을 품게 된 해롤드가 들뜬 마음에 자꾸 산발적으로 브루스에게 무어라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브루스는 눈을 감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꿈에서, 초록빛의 불꽃이 너무 아름다운 불새가 브루스를 집어 삼키는 것을 보았다.
*초록장미: 천상에만 존재하는 고귀한 사랑,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2019. 5. 27.) 쿠운님께
“자.”
책상에 코를 박고 접수된 서류와 작성해야 할 보고서를 들여다보는 브루스을 눈앞에 직사각형의 하얀 상자가 내밀어졌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중에 시야를 방해받은 웨인경관은 보통 때라면 눈썹을 찡그리며 저를 방해한 이를 힐난하듯 쏘아보거나 아님 상자를 스윽 하니 치우며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였지만 짤막하고 무심한 자, 한마디에 그의 표정은 거품이 몽골하게 잘 오른 생크림마냥 부드러워졌다. 적어도 제이슨은 확연하게 알 수 있을 만큼
“제이.”
“경찰이면 이거잖아.”
듣기 좋은 바리톤이 제 애칭을 부르자 늑골 뒤가 간질간질해진 제이슨은 변명하듯 제가 내민 닫힌 채로도 단내가 폴폴 나는 상자를 설명했다. 브루스가 상자를 힐끗 열어보니 안에는 아이싱 빛깔이 고운 도넛이 질서 정연히 배열되어있다.
“갈게.”
브루스가 인사말도 하기 전 제이슨은 무어가 바쁜지 바로 뒤를 돌아 서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브루스가 조급하게 그런 제이슨의 소맷부리를 잡았다.
“커피! 커피... 같이 마시련?”
얼핏 무표정하지만 잘생긴 경관의 정돈된 눈썹이 약간 가련하게 기울어있다. 본래 나이에 비해 우스꽝스러울 만치 원숙하게 말을 건네는 그를 보니 불쑥 관심이 고픈 비뚤어진 어린아이마냥 그를 곤란하게 해보고 싶어진다.
“여기 커피? 차라리 '당신 집' 술이 낫지.”
픽 웃으며 제이슨이 말했다.
“제이슨.”
그러면 브루스는 살짝 눈가를 붉히면서도 성실하게 제이슨의 말을 지적한다. 으쓱 하고 어깨를 한 번 들썩인 제이슨이 브루스 앞에 놓인 의자를 빼 앉으며 들으라고 속닥인다. 그럼 이따 키스나 하지 뭐. 머그잔을 쥐는 브루스 손이 조금 떨린 걸 제이슨은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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