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뱃른전력: 양념장-와사비(초록색에 먹으면 눈물나고 찡해지는 것이 크립토나이트가 생각나서 클락을 떠올렸습니다.)
※ 욕설, 폭력이 묘사 됩니다.
지하실은 벽에 칠해진 쨍하니 고운 노란색 페인트로 기묘하리만치 밝았다. 뼈는 굵었지만 웅크린 어깨 때문인지 왜소해 보이는 소년은 마찬가지로 페인트에 푹 담갔다 빼어낸 옷을 입고 있었다. 소년이 작게 움직일 때면 페인트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나왔고 코끝에는 시큼하면서도 묘하게 달콤한 냄새가 감돌아 속이 울렁거렸다. 소년은 준비해온 머그컵 안에 적정양의 초록빛 광석 가루를 담고 그 위로 물을 부어 막대로 휘휘 저었다. 1초, 1초... 시간에 맞추어 태양이 기울어갈 때마다 소년의 몸은 죽음과 닿아서 비명을 질렀다. 냄새 때문인지 몸이 약물을 먹은 뒤의 반응을 기억하기 때문인지 욕지기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지만 소년은 꿋꿋하게 참아냈다. 먼 옛날, 소년이 언어는커녕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을 때 그의 친생부모가 우르릉 무너지려는 행성을 뒤로 하고서 그에게 속삭였었다. '너는 그곳의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강할 거란다.' 소년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질끈 감고서 컵 안에 담은 혼합물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혈관 곳곳에 가시가 돋아나는 듯 아팠지만 손끝에 힘이 빠지며 무뎌지는 느낌이 더없이 안도가 되었다. 지금의 부모님인 캔자스 시골의 더없이 다정한 부부가 나이 들어 죽은 행크를 보며 슬퍼하던 소년에게, 클락 켄트에게 이야기했다.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죽기 마련이란다. 그래서 소중한 것이고, 아껴야하는 것이지.' 그래서 클락은 살아가기 위해 죽어갈 것을 택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시뻘건 전등이 천장에서 빛나던 그 좁고 좁은 네모난 공간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이제는 그 공간을 만날 수 있는 건 꿈속에서밖에 없었지만 클락은 자꾸만 그것이 현실이고 눈을 떠서 바라본 오늘의 노란 아침 햇살이 거짓말인 것 같아서 자신을 심하게 때리고 꼬집었다. 제 몸에 멍이 들고 뺨이 얼얼하게 부어오를 즘이 되어서야 클락은 안도하며 정말 현실로 돌아왔다. 그만큼 클락에게, 과거 실험체1에게 붉은 방은 자신의 평생일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온도적으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적한 환경이 조성된 공간이었지만 온기라고는 없어서 실험체1은 늘 제 몸을 구부려 스스로를 끌어 모아야만 했다. 창문 하나 없이 그저 잿빛의 벽만 세워진 작은 공간에는 실험체1을 선보이듯 복도 쪽으로 난 면 하나는 전체가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어서 아이는 그곳을 통해 생명체들을 보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과 큰 눈과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가진 몸에 비해 커다란 머리를 가진(후에야 그게 그들이 방독면을 쓴 것임을 알았다) 사람, 그런 그들의 뒤로 늘 따라오던 총을 든 사람, 가끔씩 그들의 안내를 받고 실험체1 앞으로 다가와 미소를 띠던 멋들어진 정장 차림의 사람 이렇게가 열 살도 안 된 그가 바라본 인간의 전부였다. 그래도 숫자상으로는 제법 많은 사람이 오고 갔고, 그들 중 몇몇은 실험체1이 의식과 자아가 생긴 후 자주 바라보는 인물들이었지만 누구와도 대화라고 할 만한 것도 접촉이라고 할 만한 것도 해본 일이 없었다. 실험체1과 맞닿았던 것은 무기질의 튜브와 전선, 간지러움에서 고통 사이를 오가는 자극을 전달하던 하얗고 네모난 패치, 이름 모를 약물이 전부였다. 그 공간의 어느 인물도 실험체1에게 제대로 된 언어를 가르쳐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실험체1은 제 머릿속에 영문도 모르고 남은 지금 그가 밟고 있는 행성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의 입술을 떠듬떠듬 읽어서 모든 음절과 음운을 추측했다. 저것에게 또 다른 능력이 있는가, 보안 문제, 앞으로 진행할 실험은, 국방부, 지구 다른 편에 붙어 있는 나라의 이름들 같은 것을 실험체1은 보았고 그 무엇도 그에게는 도움도 희망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실험체1의 몸이 자라면 자랄수록 눈을 감고 떴을 때 찾아드는 하루에 대한 공포와 불안 역시도 점점 커져만 가서 아이는 어깨가 굽고 무릎이 오그라들었다. 그저 몸이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싶었고 인간의 시선이 너무 날카롭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열한 살이 되던 실험체1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실험체1의 실험이 진행되는 연구실이 대도시인 메트로폴리스에서 보다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며 지대도 싸게 먹히는 곳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냉전이 막을 내린 후 국방비는 감축하는 추세였고, 그나마 우주개발 계획에서 끌어오던 예산도 동쪽 나라들이 제작하는 위성과 우주선 소식을 듣고 나니 더는 정식으로 승인 받은 연구가 아니었던 실험체1에 대한 연구로는 운용하기가 힘들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미 실험체1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데이터는 거의 대부분 수집한 상태였기 때문에도 그랬을 것 같다. 그들은 이제 살아있는 그보다는 아직 해독작업이 끝나지 않은 우주선이나 크립톤의 문장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실험체1이 낡은 밴에 실려 이동을 하던 날은 거센 비가 내렸고 도시를 벗어나자 차는 심하게 덜컹거리며 마치 픽 쓰러질듯 휘청거렸다. 비포장도로로 가자 이젠 시야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만큼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고 흔들림은 더욱 심해져서 쾅, 쾅 하고 바퀴가 진창에 빠지고 나올 때마다 실험체1의 몸도 퉁하고 튀어 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바깥에 어느 짐승이 달려들었던 건지 아니면 핸들 조작을 잘못했던 건지, 그도 아니면 빗길에 미끄러졌던 건지 밴은 거의 한 바퀴 빙글 하니 돌아 길바닥에 너부러지듯 쓰러져버렸다. 쾅 하고 땅과 부딪치는 충격 때문에 밴 화물칸을 가득 채웠던 붉은 조명은 꺼지고 문도 살짝 비틀려 빗물과 함께 짙은 회색을 띤 가시광선이 스몄다. 그때 항상 시렸던 실험체1의 손끝에 지잉 하니 온기가 감돌며 전에 없이 들뜨듯, 혹은 끓어오르듯 무언가가 가슴속에 차올랐다. 앙상한 손으로 주먹을 쥔 아이는 비가 잔뜩 쏟아져 어두운 중에도 저 먹구름 너머에서 전해져온 햇빛이 스미어 들어오는 틈을 향해 그것을 내질렀다. 마른 주먹은 얼얼했지만 몸 아프게 거센 빗줄기가 작은 얼굴로 한가득 쏟아지는 것을 보며 아이는 생애 처음으로 늑골이 저리게 웃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가서 빗소리 사이사이로,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소리, 저 먼 곳에서 다가오는 바퀴소리, 그 먼 곳 도시에서 건너오는 소리소리들이 빠르게 전해져 오자 아이는 땅을 박차 달리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렇게 계속 도망쳤다. 날 듯, 하지만 이 행성의 중력으로 다시금 끌어내려지기를 반복하며 도망가다가 어느 순간 실험체1은 모든 끈이 떨어져버린 인형처럼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귀에서는 여전히 빗물에 섞인 소음들이 머리를 아프게 했고, 처음 느꼈던 힘도 고갈되어버렸는지 이젠 눈을 깜빡하는 것도 힘들었다. 탁 트인 평야에서 실험체1은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만 느껴졌고 금방이라도 저기 몇 십 마일 떨어진 발소리들이 자신을 잡으러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이는 옆에 있는 옥수수 밭으로 기어가 꼭 진흙 속에라도 파고 들어갈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저 즈음에서 웡, 웡 하고 짐승이 묵직하게 짖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렸지만 흙바닥에 둥그렇게 자리를 잡아버린 아이에게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였다. 실험체1은 빗물과 다른 짠 물이 섞여 흐린 눈을 꾹 감으며 자신이 차라리 돌이라도 되어버리기를 빌었다. 그날 아이는 마사 켄트와 조나단 켄트를 만나게 되었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클락 켄트'가 되었다.
클락은 그 날 쏟아진 비에 감사했고 켄트 부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인류라는 족속들이 그렇게 끔찍한 존재들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그저 외계인이 아닌 살아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았다. 자신이 삶이라는 생득권을 누리기 위해 지구에 왔음을, 조나단이 던져준 공을 잡으며, 마사가 떠준 스웨터를 입으며, 행크와 저 먼 언덕까지 뛰어 달리며, 켄트 가족 모두가 모여 애플파이를 만들어 먹으며 알게 되었다. 그래서 클락은 자신의 힘을 도려내기로 결심했다. 다시 실험체1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행복함에 끌어안은 자신의 가족이 늑골을 다치거나 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에. 마사와 조나단은 힘은 그런 식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게 조절하면 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다정하게 말해주었지만 클락이 가지고 있는 힘은 '자신에게 맞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괴력과 능력들은 모두 클락 켄트에게 맞는 것일 수 없었다. 적어도 이런 생각을 하던 시점의 클락에게는 그랬다. 클락이 계속 한 방에만 묶여 지낸다면 모를까 다른 평범한 또래의 사람들처럼 지내고자 한다면 붉은 태양광으로는 안 됐다. 그래서 열여섯의 클락은 마지막을 다짐하며 자신의 힘을 끌어 모아 저기 저쯤에 생긴 연구소에서 크립토나이트를 훔쳤다. 잔뜩 무장한 사람들과 연구소에 마련된 좁다란 공간들을 보며 쿵쾅쿵쾅 가슴이 뛰어 무섭고 두려웠지만 켄트 부부가 안전했으면 해서, 다시 이곳에 잡혀오지 않기 위해서 클락은 미리 챙겨간 납 상자에 광석을 담아서 빠르게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부모님에게 엉엉 울며 매달렸다. 켄트 부부는 물론 클락에게 잘잘못을 묻거나 하지 않았고 용서를 구할 필요 없이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클락이 너무나도 서럽고 처절하게 울자 그저 아들을 꼭 안아주며 다독이다가 그들도 조금 울어버렸다.
성인이 된 클락은 사진기자로서 고담가제트에 입사하게 된다. 언론사에 소속되면 혹시라도 들릴 실험체1의 행방을 좇는 소문을 귀에 담을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클락이 유아기 때 워낙 한 장소에 갇혀있던 탓인지 보다 사람과 사람, 그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고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이런 갈망이 생길 만큼 켄트 부부가 클락을 용기와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스몰빌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메트로폴리스의 데일리 플래닛이 훨씬 가까웠지만 아직 클락은 메트로폴리스로는 발을 딛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기왕에 조금 더 거리 있는 도시로 간다면 스타 시티는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했지만 클락은 굳이 고담을 고집했다. 치안이 불안한 것은 물론이고 사회기반 시설도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지원과 기부를 통해 어느 정도는 마련했다고 하지만 턱없이 낙후된 늙은 도시는 시골에서 굴러들어온 외지인이 살기에는 좋지 못했지만 모든 소란과 소란 속에서 진짜 자신을 숨기고자 했던 클락에게는 적당히 시끄러운 곳이었다. 물론 클락은 이 고담으로 온 후로 몇 번의 소매치기와 사기, 강도를 경험해야 했지만 그런 그들을 보면서 왜인지 클락은 자신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클락이 고담으로 오기를 결심한 이유는 이 도시에는 '박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락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존재 자체가 괴담처럼 퍼지던 고담이라는 도시에 또 다른 도시전설이 생겨났다. 그가 흡혈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고담 마천루를 장식한 가고일이 살아난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냉혈한 미치광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병든 도시를 지키는 수호자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실체는 없이 소문만 무성한 존재였다. '배트맨'이라고 불리는 자경단인지 무어인지 모를 존재를 사춘기 끝자락의 클락은 좇으며 가슴속에 다시 차오르는 무언가로 남기게 되었다.
오늘은 연예부에서 발행하는 잡지 기사에 들어갈 사진을 촬영하는데 투입된 클락이 피사체인 배우가 좀처럼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여러 번 시도를 거친 끝에 최종안을 보내고 나니 시간은 벌써 어둠이 새까맣게 차오른 깊은 밤이었다. 묵직한 피로가 감돌 시간이었지만 오늘 분량의 크립토나이트가 조금씩 조금씩 희석되는지 오히려 머릿속은 맑은 느낌이었다. 그 생명력이 클락은 버거워서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를 향했다. 그러다 저기 골목에서 어느 왜소한 형체를 갱단의 잔챙이로 보이는 인물들이 둘러싸고서 점점 거리를 좁히는 것이 보였다. 고담에 온지 1년이 되어갈 즈음이니 이제는 이런 광경은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못 본 듯 넘겨야 했지만 켄트 부부의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던 클락은 아직 그렇게 까지 머리가 약아지지를 못 했다. 클락은 메고 있던 가방을 던져 무리의 누군가의 등에 맞혔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금방 뒷덜미를 잡혀서 배를 걷어차이고 말았다.
"이건 또 뭐야? 니 새로운 이거냐?"
누군가가 여자에게 시시덕이고 있었다. 이따위 놈들이 클락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별 도리가 없었다. 클락은 그저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며 악력을 쓸데없이 가늠해볼 뿐이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펼쳐져있던 검은 밤하늘이 무너져 땅 위로 내려왔다. 적어도 땅바닥에 엎어져 배를 감싸 쥐고 있던 클락의 눈에는 마치 그렇게 보였다. 묵직한 존재감으로 땅위에 내려앉은 그는 그럼에도 어떤 소음 하나 없이 뒷골목을 제 짙은 그림자로 뒤덮을 뿐이었다. 짧은 침묵 뒤로 악한들이 그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폭력은 물론이고 날붙이를 휘둘렀고 누군가는 어디서 꺼냈는지 권총마저 빼내어 발포했다. 그리고 그들은 손목이 꺾어지거나, 벽에 얼굴을 갈리거나, 무릎이 빠지거나, 급소를 맞고 기절하거나 딱 목숨만은 건질 정도의 제재를 받았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살벌하고 잔혹했던지 그의 도움을 받는 여자는 다리가 풀려 어디로 도망도 가지 못하고 있었고 클락도 왜인지 자신의 몸이 흠씬 두들겨 맞는 느낌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골목에는 다시금 그를 닮은 침묵만이 찾아왔다. 클락은 그제야 비로소 주먹을 만족스러울 만큼 꽉 쥘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배트맨도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저 먼 곳에서 사이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겨우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여자는 골목에 떨어진 제 가방을 품에 안고서 저쯤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런 그 앞에 배트맨이 섰다. 그의 눈앞에는 분명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있을 것이다.
"계속 겁을 내도록."
그간 소문을 통해 배트맨이 여자를 달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협박을 할 줄은 몰랐어서 클락은 깨진 안경 뒤에서 눈을 깜빡였다.
"그 선에서 나오는 순간 다음에는 그쪽 차례이니까."
배트맨은 흔적도 없이 다시 밤하늘로 사라져버렸다. 적어도 보통의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멍하니 굳어있던 여자는 이내 허공을 쏘아보며 제 가방을 털썩 내동댕이치며 분노하듯 억울하듯 외쳤다.
"씨발! 난 뭐로 먹고 살라고! 재수 없는 가면 변태 새끼!"
그 길로 여자는 저 골목 너머에 있는 주택가로 사라졌고 클락은 여자가 남기고간 가방을 주저주저하며 열어보았다. 그리고 여자가 약물을 판매하는 데 관련된 사람임을 알았다.
배트맨이 인간임을 알게 된 밤, 클락은 자꾸만 차오르는 심장의 박동으로 결국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인간은 그렇게 무르지도, 연약하지도 않다. 그리고 어떤 페르소나의 뒤에서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몇 번의 고민 끝에 클락은 납 상자를 단단히 잠가두게 되었다. 이제는 부모님이 말해주신 ‘클락에게 맞는 정도의 힘’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못해도 평범한 인간이라고 해서, 죽음이 결정지어진 생명체라 해서 늘 죽음을 달고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웅크리고 있던 클락에게는 아직은 그저 부푼 가슴만이 아플 뿐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죽음보다 삶에 훨씬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 뿐. 분명한 것은 없이 부풀었던 가슴도 점차 꺼져만 나가서 망설임만 남은 클락은 저에게로 무의미하게 흘러드는 자극과 에너지에 지쳐 다시 초록 광석의 영향 아래에 있어야 하는가 싶어 잠긴 납 상자를 힐끗댔다. 이제 몇 년 쯤 더 쓸 수 있을지를 가늠하면서 손끝에 찌릿하니 맴도는 온기가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속없이 흘러갔다.
연초에 시정연설을 취재하러 나선 비키를 따라 현장에 나갔다가 클락은 고담 시에 진행 예정인 새로운 고담 정비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브루스 웨인을 보게 되었다. 시장의 연설 후 프로젝트의 짧은 설명회를 요청받은 브루스 웨인은 대중 앞에 자세를 곧게 펴고 누구나가 호감을 가질 얼굴로 당당히 서있었다. 무엇하나 걸릴 것 없다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그리고 클락은 그 밤에, 온갖 소음들 속에 섞어들었던 선명하고 또렷한 한 심장소리를 기억해냈다. 그 순간에 흐릿해져가던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왔다.
"찾았다."
터진 플래시 너머에서 브루스 웨인은 그저 무해하게 매혹적으로 웃고 있었다.
여기서 두 가지 루트를 생각했습니다.
1. 배트맨의 모습에 감화되어 클락은 슈퍼맨이 된다. 이때 클락이 자신에게 쓸 이름으로 ‘고담’도 생각했었지만 이 도시의 이름은 온전히 배트맨의 것이었으므로 존중하는 마음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당신을 위한 슈퍼맨 엔딩.
2. 배트맨에게 흠모하고, 그의 정체가 브루스 웨인임을 알게 된 클락은 브루스 웨인의 팬보이로 지내게 된다. 그리고 배트맨은 고담 시로부터 버림받는 내쳐지게 되고, 그는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클락은 더 이상 숨지 않기로,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들을 가두기로 결심한다.
덧, 처음 이 이야기를 생각하기 전에 생각한 문장) 신은 스스로 독을 먹어 자신을 인간으로 끌어 내리셨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그의 광명으로 불타죽지 않기 위해. 위의 내용들이랑 별로 이어지지는 않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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