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SuperBat(더뱃기반)

[숲뱃] SuperBat Rises

※더배트맨 기반 연상숲/연하뱃, SuperBat Begins(https://sowhat42.tistory.com/120)에서 이어짐
※22년도 7월 배포본으로 제작했던 내용 웹발행

지구의 자전이 태양을 저 반대편으로 밀어내는 시각, 클락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집을 향해가기로 마음먹는다. 그전에 클락은 메트로폴리스로 돌아가기보다 먼저 대서양까지 나온 김에 제 친구(클락이 생각키로)가 있을 섬도시를 습관처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시의 마천루 꼭대기의 고즈넉한 가장자리에 그는, 배트맨은 고요히 서있다. 비록 고담 상공에 나타난 슈퍼맨의 망토자락을 발견하자 수시로 잔소리에 시달려 진절머리라도 난 사람처럼 인상을 꾹 쓰기는 했지만 클락에게는 저도 알지 못 했던 짓궂은 면이 있는 건지 그 배트맨이 자길 보고 괜히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제법 즐겁게 여겨졌다. 클락은 그런 제 속내를 숨기며

“좋은 하루군.”

라며 다정하게 인사했다. 무기질적인 표정을 가장한 배트맨의 가면 뒤에서 그가 곤란한지 성가신지 애매한 모양새로 얼굴을 찌푸린다. 드러난 선이 예쁜 턱이 보다 앙 다물려서 도드라지는 것을 보고 클락은 저도 모르게 눈을 접어 웃는다. 반가움에 클락이 브루스에게로 좀 더 거리를 좁혀 다가가는 차에

“안녕, 슈퍼맨!”

하고 배트맨의 뒤로 작은 인영이 하나 빼꼼히 빠져나왔다.

“안녕, 로빈.”

클락은 당황하는 일 없이 침착하게 마주 인사를 하며 재빠르게 손도 흔들어 보인다.

마술쇼를 선보이듯 까만 배트맨의 등 뒤에서 짠 하니 등장한 노랑과 빨강이 어우러진 아이는 자신만만한 웃음이 너무나 경쾌하다. 로빈은 마치 자신의 민첩함을 뽐내기라도 하려는지 마천루의 아슬아슬한 가 쪽을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자신보다 키가 껑충한 두 히어로들 사이를 오고갔다, 아니 오고가려고 했다. 그런 울새의 걸음을 방해한 것은 로빈의 겨드랑이에 쏙 들어간 박쥐의 손이다. 브루스는 딕을 달랑 들어서 비교적 발밑이 안전한 제 뒤로 다시 데려놓았고 아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도미노를 쓴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벅벅 구기며 배트맨을 쏘아보았다.

“이정도로 안 떨어져요!”

로빈이 야유하며 볼멘소리로 외쳤지만 배트맨은

“그래.”

하고 느리게 대꾸하며 로빈을 저 안쪽으로 든든히 감추어 본다. 그 광경을 앞에 하는 클락은 자신이 어쩐지 이방인의 신분으로 끼어든 것만 같아서 멋쩍게 웃었다. 그런 슈퍼맨의 얼굴을 힐끗 본 브루스는 자신이 딕을 제대로 안전한 곳으로 두었는지 재차 확인하고 싶어서 손을 뒤로 주춤주춤 뻗었다. 하지만 자신의 탁월한, 과거 플라잉 그레이슨즈 일원으로서의 균형감각을 두 번이나 의심받은(의심받았다고 생각하는) 딕은 브루스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나와 제가 소지한 그래플링건을 꺼내들어 어느 새인가 떠오른 배트시그널이 비치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깔깔깔, 아이의 웃음소리가 꼬리에 남아 음울한 고담 밤하늘을 맑게 장식했다. 브루스가 부랴부랴 자신도 그의 뒤를 따라가려 할 때 클락이 불쑥 물었다.

“설마 아직도 그 날다람쥐 같은 윙 슈트를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짐짓 장난기를 녹여낸 말투였지만 이 행성의 중력에서 자유로운 이의 날지 못하는 생물의 아득히 높은 곳에서의 도약을 지켜보며 묻어나온 걱정이었다. 물론 클락은 속으로야 미모사처럼 제 말에 예민하게 반응해 보이는 브루스가 그럼에도 제 고집대로 행동하는 것을 왕왕 보아왔어서 그가 그대로 클락을 지나쳐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부끄러움에 속닥이듯, 오래전 일에 수줍어하며 브루스는 나직이 대꾸한다.

“안 그래, 이제는.”

그리고 배트맨은 금세 로빈의 뒤를 좇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클락은 박쥐 가족들이 사라진 텅 빈 허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뒤늦게 찾아든 바람이 왜인지 조금 쌀쌀하다.

 

***

 

배트맨에게 로빈이라는 파트너가 생긴 지는(절대, 절대로 사이드킥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브루스가 몰래 신신당부를 했다.) 이제 한 해마저 넘기고 두 해에 가까워지고 있다. 배트맨의 활동에 등장한 아이의 존재를 클락은 어른으로서 당연히 염려스러워했고 지금도 바람직하게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고담이 으레 그래왔듯 차악의 불합리는 논리의 마지노선이 되었다.

고담의 뿌리 깊은 흑막 단체인 법정에 연루되고 그 일원이 될 뻔까지도 했던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딕은 재능으로 눈이 부셨을 뿐만이 아니라 더없이 명랑하며 쾌활했고 그런 로빈의 존재는 배트맨은 물론이고 무채색으로 시간이 굳어버린 웨인저택에도 큰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브루스 웨인과의 인터뷰를 핑계로 웨인저택을 찾아온 클락은 이 전의 기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은 빛이 가득한 저택 내부에 새삼 감탄하며 내부를 기웃거렸다. 커튼이 활짝 열려있는 탓에 따스하고 밝은 기운으로 가득한 응접실 내부는 보다 훨씬 넓게 보였다.

“주인님께서는 아직 준비 중이시랍니다.”

클락에게 도리가 차를 한 잔 내오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금방 오실 거예요 하고 다정한 웃음을 덧붙인 그는 보통의 기자들에게였다면 입 무거운 고용인답게 여분의 이야기를 삼가고자 경계했을 테지만 얼굴이 익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주인과 친분도 있어 보이는 클락에게는 그래도 퍽 살갑게 대해주었다.

직장 동료들이 클락의 출장지를 듣는다면 요즘 같은 때에 사진도 남기지 않을 단순 인터뷰를 누가 직접 면대면으로 하려 하느냐고 굳이 ‘그’ 고담까지 찾아간 클락의 성실함에 혀를 내두를 테지만 그는 이 집안사람들의 이러한 소소한 환대가 꽤나 기분이 좋았다. 아마 이것이 쉬이 얻어진 것이 아닌 몇 번의 어색한 눈인사와 고집에서 비롯한 치기어린 기싸움이 층층이 쌓이고 쌓여 얻어진 친밀함이기에 더욱 각별한 것 같았다.

“고마워요, 도리. 딕은 학교에 갔나요?”

집에 있었다면 바로 튀어나와 클락에게 온갖 너스레를 떨었을 아이를 떠올리며 클락이 물었다. 도리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며

“네, 안 그래도 켄트님께 인사를 전해 달라 하셨어요.”

상냥하게 답을 한다. 도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짧은 인사를 남기며 자리를 비웠다. 저택은 넓었지만 주인이(아니면 그의 집사가) 믿음을 주는 이는 적어 도리의 하루가 여유롭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사유지로 감싸여 주변이 한적한 덕에 밝은 자연광마저 곁들여진 웨인저택 내부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전에 애먼 분풀이로 브루스 웨인을 겨냥하여 보낸 폭탄이 터지기도 하고, 날짐승의 가면을 쓴 자객들이 들이닥쳐서 브루스 웨인을 죽이겠다며 뒤엎어놓기도 하고 등등 녹록치 않은 역사를 지니는 건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늑하기 그지없는 성채였다.

클락의 커다란 덩치도 아늑하게 받아주는 의자에 편히 기대어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도리가 준비해준 차로 얼마쯤 입을 축이고 있자니 브루스가, 이 집의 주인이자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인 ‘브루스 웨인’이 걸어 들어왔다. 클락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그 길로 출사할 터라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덕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 인상이 훨씬 정갈해진 그는 실내에 가득한 햇살에 눈꼬리를 살짝 움찔거리면서도 그래도 제법 익숙해졌는지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도 태연했다. 늘 한 품 크게 옷을 입는 클락과는 다르게 제 몸 선을 따라 단정히 떨어지게 지어진 짙은 감색 슈트를 차려입은 브루스는 세련되었고 그야말로 고담 프린스라는 별명이 절로 떠올랐다.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충고를 듣고 착실하게 착용한 커프스가 어색한지 만지작거렸다. 클락과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대신해 브루스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클락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시간을 내주어서 고마워.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이럴 때 아니면 차분히 자네 얼굴 보기 힘들잖아.”

클락이 익살스럽게 윙크를 하면 브루스는 예상치도 못한 일을 앞에 한 사람마냥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도 항상 바쁘잖아.”

그래도 제법 친한 이라고 브루스는 느리게 사족을 덧붙여준다. 클락이 브루스가 앉은 쪽을 향해 몸을 조금 빼어 앉자 브루스도 따라하듯 클락과 보다 가까운 곳에 몸을 앉힌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토마스와 마사가 시행하기로 했다 예의 사고 이후 우야무야가 된 재개발을 다시 계획한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올빼미 법정이라는 사이비 단체의 방해를 받은 지금 어떻게 타개해 나아갈 건지라던가 메트로폴리스에 설립된 지점에 관한 이야기, 렉스 코프의 제휴 제안을 거절한 뒤로 겪는 어려움 등 지극히 공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브루스는 세간에서 알기로는 지난 몇 년 간 회사고 가족의 유산이고 전혀 자신과 무관하고 중요치 않게 여기며 은둔해왔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안 될 만큼 그 모든 물음에 차분하고 신중하게 답을 나열한다.

“딕이 이 곳에 온 지도 곧 2년이 되어 가는데...”

수첩을 닫은 클락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딕의 이름이 언급되자 내내 차분하던 브루스가 어깨를 살짝 굳히는 것이 보였다. 그 어떤 물음보다도 어려운 질문을 받을 것처럼 브루스의 얼굴에는 팽팽하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양자로는 들이지 않을 거야?”

그런 브루스를 안심시키려고 클락은 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브루스의 행동이나 저택 곳곳에 묻어나는 흔적들만 보아도 딕이 브루스의 가족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자명했고 이미 법적으로 브루스는 딕 그레이슨의 후견인이었지만 남 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아버지가 되지는 않은 브루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대는 것을 신문사에 몸담은 클락으로서는 알 수밖에 없었다. 그게 불쾌하기도 하고 브루스가 몇몇 서류를 준비하려 했던 것은 알아서 클락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브루스는 클락의 물음에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였다. 그러다가 겨우

“아직은...”

하고 한참 뒤에야 브루스는 답했다.

“딕에게 부모님은 소중한 존재니까.”

브루스는 말을 끌면서 조금 볼을 붉혔다. 너무 당연한 말을 굳이 입에 담는 것이 민망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인상을 초조하게 찡그리며

“난 그 분들의 자리에 있기에 모자랄 거야.”

하고 혼잣말처럼 이야기한다. 자신감 없는 브루스의 말에 클락은 그럴 리가 없다고 반사적으로 다독이려하다가 그 자신도 홀몸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의 자격에 대해 쉬이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대신 클락은 자리에서 일어나 브루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브루스와 바투 가까워진 클락은 그의 눈가가 화장으로 채 가리지 못한 파리한 피로가 묻어난 것을 보았다. 아직 점심이 되기에는 한참이 남은 이시간은 제 스스로를 야행성 동물이라 칭하는 그가 이렇게 착장까지 마치고 온전히 깨어있기에는 이르기는 했다. 클락은 안타까움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그의 뺨에 곁들여 조심히 눈가를 쓸어주고 말았다. 클락의 엄지에 브루스의 긴 속눈썹이 간지럽게 훑어지며 브루스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잠은 잘 자도록 해.”

클락이 다정히 말하면 브루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판단하고자 눈만 껌뻑이다 비로소 뻣뻣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이야 대답을 선선히 하고 있지만 클락은 브루스가 제 말을 듣지 않을 것을 그와 만난 이후의 일들로부터 하여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클락은 브루스에게 미소 지었다.

 

***

 

브루스의 뺨에 닿은 제 손길을 타고 흘러간 진동을 따라 그 얼굴이 수줍은 빛을 띠었던 것을 떠올린 클락은 또 괜한 짓을 하고 말았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부모님이 들었다면 흰 눈으로 볼 생각이지만 클락의 생애에서는 지금의 자신이 가장 나이가 든 자신이기에 말하자면, 나이깨나 먹고 나쁜 꾀만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브루스의 시선을 클락은 오랜 옛날로 느껴지는 그 어느 날에 자신의 얼굴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새삼 로이스가 참다 못 해 곤란한 듯 “너무 강아지처럼 보지 마, 클락.”하고 헛웃음을 지어버린 것이 떠올라 클락은 과거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그때만 해도 로이스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클락이, 슈퍼맨이 한 마디의 진실을 입에 해주기를 기다렸을 테다. 하지만 클락은 망설였고 결국 클락이 겨우야 입을 열려고 결심했을 때 그는 너무 한참은 늦어버렸다. 차라리 맘껏 흉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로이스가 선택한 리처드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그 로이스 레인이 결혼을 결심하게 한 사람이었으니 이론이 있을 수 없었지만) 사회적으로도 클락보다 훨씬 단단한 바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로이스가 마음껏 세계에 뛰어들어 온갖 위험들을 누비다가도 안심하고 돌아갈 곳이 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사람이었다. 클락은 자신도 그런 굳건한 토대를 가진 파트너가 되기를 항상 꿈꿨고 능력 있는 배우자의 날개가 되어줄만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의 또 다른 신분이 있었기 때문에, 판자 같은 세상 속에 칼엘은 감출 것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클락 켄트는 좁은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며 근근이 살아가는 봉급쟁이 기자이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아직은 그때가 아니라고 변명을 늘여놓았다. 요컨대 클락은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 슈퍼맨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함이었지만 클락 켄트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서도 섣불리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그런 평범한 인물 말이다.

그런데 그런 슈퍼맨을 마치 절대적인 무언가를 바라보듯 빙하처럼 희푸른 눈에 남모를 반짝임을 지니고서 향해오는 브루스를 클락은 귀여워하면서도 한편 쓴웃음을 지었다. 브루스는 제 개인적인 삶에 있어는 한없이 서툴렀으니 분명 제가 가진 히어로로서의 의무감을 곁들여 ‘슈퍼맨’을 향한 열정과 동경 그 어느 매를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이 좀 더 든 것이 벼슬이라고 멋대로 남의 감정을 재단한다 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현상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생물체로서 클락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클락은 로이스의 눈에 조금이라도 슈퍼맨이 멋져 보이고 싶다는 마음에 제 앞머리를 매만지며 그의 기사를 거울삼아 날아다니던 하루하루를 떠올린다. 클락은 슈퍼맨으로서, 몇 해 먼저 히어로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배트맨의 활동은 이따금 위태롭게 보였고 그것이 자신처럼 메타휴먼이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인 브루스가 돈과 기술을 쏟아 부은 도구와 그의 순수한 노력과 명석함을 믿고 활동하는 것임을 알기에 더더욱 염려스러웠다. 사람들에게 어떠한 상징으로서 인식된 순간 결국 그것이 짊어지는 무게도 그것을 그만 둘 선택도 본인의 의사와는 점점 상관이 없어질 것이었다. 지금이야 브루스는 젊으니까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노라 생각할 것이고 앞으로도 해내갈 수 있다 여길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그럴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더는 그가 자신의 과거를 따라잡지 못 하리라 느꼈을 때, 그때는 이미 브루스는 배트맨에서 쉬이 발을 뺄 수 없을 터였다.

제 찢어진 상처를 스스로 이를 사리물어 꿰매는 브루스를 보며 클락은 속상함과 답답함에 눈썹을 찡그려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부르지 그래.”

하고 다소 책망하듯 말해버렸다. 그의 옆에 있던 알프레드가 이 슈퍼맨님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꿈 소리를 하시지? 하는 얼굴로 자신을 보기는 했지만 클락은 마냥 진지했다. 결국 그런 클락의 걱정을 브루스는, 배트맨은 답해주지 않았다. 그랬던 그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빛이 있는 곳으로 이끈 것은 이제 만난 지 2년이 채 안 된 작은 소년이었다. 그간의 클락이 한 것이라곤 브루스가 위험에 빠져도 슈퍼맨이 있다는 그가 쓸지 말지도 모르는 보험이 되어준 것과 오히려 슈퍼맨인 자신을 보며 브루스가 더 무리하게 그의 힘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문제에도 이따금 관여하게 해버리는 것 정도였는데 말이다.

나이가 들어 는 것은 주책없는 상념뿐이라며 고개를 젓다가 클락은 소란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날아간다. 사람들이 비명과 고함을 혼란스럽게 내지르고, 차들이 경적을 날카롭게 울려대는 한복판에는 마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던 양철나무꾼을 연상하게 하는 은빛 몸체를 지닌 성인 남성의 형태의 것이 멀거니 서있었다. 제 주변이 혼란스럽건 어쩌건 간에 무심하게 주변의 것들을 둘러보며 그것은 자신이 갈 길을 가늠하는 듯도,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도 했다. 저게 무엇이건 어떤 것을 기다리건 우선 시민들에게 피해가 없는 곳으로 옮겨야겠다하는 생각에 주변의 놀라움과 환호성을 뒤로 하며 슈퍼맨이 그것을 향해 날아갔을 때 그것이 눈처럼 생긴 광학렌즈로 슈퍼맨을 훑어보다 타깃을 인지한 듯 붉게 빛났다. 그 빛은 점차 강렬해지다가 섬광으로 응축되더니 클락에게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지니고 쏘아졌다. 마치 슈퍼맨의 히트비전처럼.

광선을 가슴께에 맞은 클락은 놀랄 저를도 없이 몸이 아스팔트를 망가뜨리며 저쯤으로 나가떨어졌다. 뒤늦게 낯선 화상통증이 화끈거리며 갈비뼈가 으스러진 듯 익숙지 않은 고통이 온몸을 울려왔지만 클락에게 망설일 권리는 없는 것 같았다. 클락이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일어나려 들 때 슈퍼맨과 흡사한 속도로 달려드는 그것이 이미 슈퍼맨에게 무자비한 주먹을 날리려하고 있었다. 클락은 그보다 빠르게 인파가 없는 곳으로 날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또 무엇일까, 역시 저 배후에는 루터가 있겠지 등등의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항상 클락이 우선하는 것은 누가 슈퍼맨을 공격하느냐 보다도 그 공격에 사람들이 말려들면 안 된다였다.

클락이 간신히 찾아낸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공원이었다. 평일이기도 했고, 아직 학교도 회사도 끝나지 않을 시간이라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클락은 안드로이드의 공격에 나가떨어지는 자신의 몸이나 그에 따라 날리는 파편들로 드물게라도 주변을 거느리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게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안드로이드는 나노기술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고 클락을 스캔하여 제 몸의 구조를 입자단위로 카피하면서 그와 유사한 능력을 가지며 점점 그의 힘에 맞먹는 수준으로 진화하는 듯했다. 안드로이드가 가한 공격에 슈퍼맨의 상징이 그려진 가슴팍이 너덜 해졌고 지금이야 멍은 사라졌지만 안드로이드에게 맞은 부위의 타박상들이 욱신거렸지만 그것보다도 어떻게 저것을 무력화할지, 동작을 멈추게 할지가 문제였다. 산산조각 내려하니 금방 재생해버렸고 차라리 우주 밖으로 내던질까도 싶었지만 슈퍼맨의 능력을 지녔다고 하면 클락에게로 급강하하면서 소행성 충돌에 맞먹는 재해를 가져올지도 몰랐다. 클락과 같은 능력치를 지녔다는 것은 싸움이 길어질 경우 보다 체력이 남아있는 쪽이 이길 것이란 뜻이니 클락은 제 힘에 대한 강박은 풀고 안드로이드에게 주먹을 날리며 초조하게 머리를 굴려 안드로이드를 어떻게 하면 저지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생각하려 했다. 허공 어느 매를 가르며 날붙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날붙이는 정확히 안드로이드를 겨냥하여 날아왔다. 슈퍼맨의 능력을 카피한 안드로이드는 당연히 그 낌새를 알고 히트비전으로 녹여버리려고 했지만 배트맨이 어떤 수를 생각했건 간에 분명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안이 되리라 생각해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고정했다. 안드로이드는 클락을 밀어내려 버둥거렸지만 이내 배트랭에 박혀있는 초록 광물이 뿜어내는 방사선의 영향권 내에 들자 주춤하더니 제 등 한 가운데에 배트랭이 꽂히고 말았다.

클락은 계열사 회의에 참가하고 있을 브루스가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브루스 웨인으로 다닐 때도 배트슈트는 항상 챙기고 다니는지 등등 평소라면 많은 태평한 질문들이 떠올랐을 테지만 지금은 그 소리를 잃고 머리는 하얗게 표백되었다. 퍼져 나오는 방사선에 클락마저 몸이 노쇠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유독 선명하게 느껴지는 옥빛을 클락은 지나친 현실감에 비현실적으로 멀거니 보았다.

슈퍼맨의 기색을 신경 쓸 겨를 없이 브루스는 클레이페이스와의 싸움을 통해 개발해낸 급속 응결제를 투입해 상대를 카피하여 변형하고 진화하는 안드로이드의 무수한 나노 로봇을 일시에 정지시켰다. 슈퍼맨의 능력을 카피한 안드로이드는 그의 약점마저도 닮아버려서 크립토나이트에 의해 무력화되어 굳은 몸을 풀어낼 생각도 못하고 광석과 함께 굳어버렸다.

브루스가 드물게도 너덜너덜해진 슈퍼맨에게 다가갔다. 크립토나이트는 슈퍼맨에게도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테니 그를 부축해서 조금이라도 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브루스는 손을 뻗는다. 그의 손을 보며 클락은 고맙다고, 덕분에 수월하게 끝내겠다고 보통 슈퍼맨이 도움을 받은 뒤에 으레 할 법한 이야기를 하려했지만 어째서인지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상처 입은 야생짐승마냥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으르렁거림을 감추지 못하며 말한다.

“크립토나이트를 가지고 있군.”

클락은 슈퍼맨으로서, 모범을 보여야할 선임 히어로로서 세상의 안전을 우선시 해왔다. 또 배트맨이 끼어든 이유가 클락도 그렇게 판단했듯 싸움이 길어질수록 슈퍼맨에게는 불리해지고, 피해는 더 커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라는 것도 알았다. 그를 제 이후에 생겨난 히어로로서 가엾게 여긴다면 잔뜩 눈을 찡그리며 허둥지둥 다가온 그에게 그의 선택을 다독이고 옳았다며 웃어줘야 했다. 그럼에도 지금 클락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서운했고, 배신감이 들어 브루스에게 화를 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클락은 제 감정이 터져버리기 전에 까닭도, 연유도 묻지 않고서 자리를 황급히 벗어났다.

 

***

 

클락이 크립톤 유성을 파괴한 뒤 뿔뿔이 흩어진 크립토나이트는 슈퍼맨과 배트맨이 모아서 태양의 한 가운데에 빠쳤다. 슈퍼맨이 무슨 권한으로 외계의 광물을 그런 식으로 다루냐고 원성을 샀지만 생물체로서 자기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그것도 그것을 쓸 것이 자명한 이‘들’의 곁에 뻔히 두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속으로야 골 백 번도 대들었지만 자신의 경솔한 판단이었다고 고개 숙여 사과까지 했다. 그런 중에도 클락은 브루스가 자신과 뜻을 같이하고 제게 해가 될 광물을 모으는 데 도움을 주고 폐기하도록 한 것이 무척이나 고마웠었다.

일전에 브루스와 그런 식으로 헤어진 뒤 클락은 그로부터 뭐라 변명의 이야기를 듣지는 않을지 아니면 그런 연락이 오지는 않을지 지레 불쾌했던 반면 그 일이 있은 후로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가타부타 말이 없자 더더 기분이 저조하다 못해 불안해졌다. 브루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단 한마디 그 어떤 메시지도 주지 않고 있다. 클락은 자신이 심장박동까지도 세세히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저를 보며 쉬이 얼굴을 붉히는 청년에 대해 모든 것을 훤히 알 수 있다고 섣부르게 여겼던 것이 이제 와서는 믿겨지지 않았고 그의 표정 하나하나에 자신이 붙인 이름표들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호의가 아니었나? 그것은 우정이 아니었나? 그것에는 믿음이란 없던 건가? 그것은, 브루스는...

“실연의 아픔이 막 커요?”

그런 상념을 깬 것은 요 한 주간 멍하니 허공만 보며 배짱 좋게도 편집장의 노한 외침마저 흘려듣는 클락을 보다 못 해 말을 건 지미였다. 클락은 자다가 꼬리를 잡힌 개마냥 펄쩍 놀라 외친다.

“뭐?”

“화면이 지금 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하고 비명을 지르잖아요.”

“아니, 내가... 뭐?”

“아이고, 이 양반 이거 고장 났네.”

지미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클락의 등을 두드렸다.

“아, 거. 사진기자로 산 지 몇 년인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며칠 전까지도 헤실헤실 꽃밭에 있던 양반이 곧 죽을 것처럼 비실대는데. 그래도 다행이네요. 한평생 로이스 씨 그림자만 볼까봐 걱정했는데.”

마지막말은 주변에 들리지 않게끔 클락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이야기하며 넋이 나간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클락의 표정을 네가 어떻게 알았느냔 뜻으로 해석한 지미는 고개마저 끄덕이며 좋은 일이라고 추임새를 넣어 준다.

“힘내요. 늘 밝던 사람이 세상 끝난 얼굴을 하니까 덩달아 우울하네.”

지미는 믿음직스럽게 이야기하다 페리의 “올슨!!” 하고 내지를 사자후에 이크하고서 서둘러 클락에게 여차하면 술동무쯤은 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네, 갑니다. 가요!”라 외치며 떠나간다.

클락은 마치 세상의 소리가 멎은 듯 한 기분이었다. 실연? 누가? 내가? 클락은 지미가 잘 못 본 거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곧 실패한다. 만약 아니었다면 클락이 당황스러울 이유는, 갑작스러운 부끄러움에 뒷목이 시뻘게질 이유는 없을 터였다.

클락은 문득 고담의 옆 도시로 갔다던 브루스의 ‘친구’가 브루스를 보러왔다는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천상 세상물정 어두운 도련님인 브루스가 그의 놀림에 빨개졌다 파래졌다 하자(브루스는 자기가 그걸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고양이 같은 여자가 히죽거리는 것을 보니 그도 알고 있는 게 뻔했다.) 자기라도 편들어줘야지 싶어 둘 사이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가 슈퍼맨의 청각 따위야 상관없다는 듯 브루스의 귀에 속닥이는

“자기 어쩌다가 저런 거한테 걸렸어?”

하고 익살스런 한탄이 뒤섞인 뒷담 아닌 앞담을 들었어야 했더랬다. 그때는 그냥 여자가 자신에 대한 껄끄러움으로 한소리 하는 것쯤으로 생각했었더랬다. 그게 왜 지금 갑자기 떠오르는 것일까.

클락은 마치 처음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인류처럼 얼굴은 물론 온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맙소사, 클락은 제 입 밖으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날까 싶어 단단하게 손으로 틀어막았다. 사랑을 한 지 너무나 오래여서 클락은 그만 자신이 사랑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클락을 실망시켰다. 브루스는 제 망막렌즈에 아로새겨진 슈퍼맨의 표정을 제법 정직하게 읽어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셀리나에게 “자긴 정말 사람 맘을 모르네.” 하고 쯧쯧 혀를 차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가진 부정적인 감정만큼은 그럭저럭 분간해낼 수 있다고 브루스는 생각했다. 결국 인간이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동물이었으므로 불안도 분노도 슬픔도 두려움도 미움도 브루스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브루스가 클락이 자신이 크립토나이트를 숨긴다면 그러한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했었기 때문에도 그랬다. 그렇다면 왜 브루스는 미리 클락에게 자신이 크립토나이트를 보관하겠다고 언질을 하지 않았을까. 클락은 선량한 히어로이고 이타적인 성격이 강한 만큼 나약한 인간이 연유를 설명한다면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을 테다.

“브루스, 뭐해요?”

박쥐의 상념을 경쾌하게 깨두드리며 울새가, 딕이 브루스의 앞에 손을 붕붕 흔들었다. 브루스는 시선을 내리며 재빠르게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을 껐지만 눈치 빠른 아이에게는 어림없는 저항이었다.

“아아, 어른씩이나 되어서 화해하는 법도 모르고오~”

딕이 마치 푸념하는 것처럼 일부러 뮤지컬 배우마냥 과장되게 높인 목소리에 음을 입혀 끌끌하면서 양손을 어깨위로 들어 으쓱하며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었다.

“딕.”

브루스가 난처함을 숨기고자 무게 잡듯 나직이 이름을 불렀지만 딕은 눈 깜빡 하나 하지 않는다.

“뭐 어른들 하는 짓이 더 유치한 거는 잘 알지만요.”

키득키득 웃으며 울새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댄다. 브루스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입술이 조금 삐죽 나온 것이 영락없이 토라진 모습이다. 딕은 아직도 어떻게 이런 사람이 올빼미 법정의 마수를 벗어나서 고담의 질서로 자리할 수 있는지, 세상은 역시 귀여움 앞에 하나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신빙성 높은 의구심이 자라나지만 다정하고 상냥한 로빈으로서 박쥐님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의젓하게 참으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해서 잘 안 되면 또 어때요. 브루스한테는 나도, 알피도, 도리도 있잖아요.”

하여튼 욕심쟁이야. 딕이 브루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브루스는 움찔움찔 딕의 손끝이 질러오는 감각에 움츠리다가 이제 그만 해달라는 듯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딕은 착한 배트맨이라며 브루스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

 

지금은 스타연구소에 잘 분해가 되어 연구 및 격리 중인 안드로이드에게서 발견된 증거를 토대로 조사를 하던 클락은 아이보 박사의 실종을 추적하다 렉스 코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폐건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번 슈퍼맨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다시금 실패한 루터는 역시나 어떤 꿍꿍이속이 남아 있는 것 같다.

평소 그의 행동에 비하면 거친 동작으로 건물의 문짝을 뜯어내며 들어선 슈퍼맨을 보는 렉스의 눈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보통 같은 때였다면 작년에 왔던 각설이 취급을 하며 너그럽게 법의 심판대에 세우겠으나 아무래도 독기가 제대로 들은 모양인지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성싶다. 슈퍼맨이 들어오자 얼마 없어 순식간에 폐쇄된 건물은 붉은 광원이 내리쬐는 어둑한 빛으로 가득 찼다. 에너지 생성을 멈춘 태양을 본뜬 붉은 빛 아래 더불어 힘을 잃었을 슈퍼맨을 가둔 렉스는 이번에야말로 담판을 짓겠다는 눈치다.

“영웅으로도 안 죽고, 제 능력으로도 죽지 않는다면 악당으로 죽게 해주지.”

클락은 새삼 제 몸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생생하게 감지하며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주먹을 내질렀지만 렉스의 대슈퍼맨 용으로 제작한 슈트에는 가볍게 막혀 클락은 그대로 저만치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쩐지 요즘에는 이런 일이 빈번한 것 같다며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보통의 인간과 같은 몸이 된 클락에게 전해지는 신호들이 지금 그렇게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며 본능적으로 경고음을 울렸다. 클락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에는 렉스가 발길질로 슈퍼맨을 헝겊인형 마냥 차 날린다.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러냐고 따지고 들 마음도 이제는 들지 않는다. 사람 살다보면 숨 쉬는 모습마저 꼴 보기 싫은 인간이 있는 법이고 같은 동료로 분류되는 그가 아끼고 있는 이에게 마저 이 크립토니안의 존재가 위협적인 것이라면 적이라 일컬어지는 이에게는 오죽하겠냐는 제법 해탈한 생각마저 들었다. 클락은 지금 자신의 사고 흐름이 일종의 도피라고는 깨닫지 못 했다.

“저번에 보니 고담에서 꽤나 애를 먹더군. 슈퍼맨께서도 이 지구 물질 중에 듣는 게 있기는 한 모양이지?”

렉스는 외계인의 머리채를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한창 치기 어린 시절에는 슈퍼맨을 제 손으로 죽이기를 바라왔지만 살고 보니 히어로를 악당의 손에 죽게 하는 것만큼의 선행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만약 슈퍼맨을 죽인다면 그 길로 그는 동정 여론을 등에 업고 부활을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되어 영원히 선망될 터였다. 그것은 증오하는 것에게 안기기에 너무나 큰 선물이었고 누군가는 적에게 소금을 보낼 수 있을지 몰라도 렉스가 가진 증오는 그런 명예로운 것이 아니었다. 한참 슈퍼맨에 대한 자료를 강박적으로 재생하는 렉스에게 새로운 사실 하나가 포착되었다. 메트로폴리스 저 옆에 있는 구질구질한 섬 도시에 생겨난 마찬가지로 음침해 빠진 자경단을 도와 슈퍼맨이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포이즌 아이비라는 개조된 식물들을 이용한 과학자가 만든 특수 포자에 아주 짧은 순간 슈퍼맨이 저지 되는 장면을 그 단 한순간을 기어이 렉스는 포착을 한 것이다.

렉스는 슈퍼맨이 제 손으로 제가 아끼고 소중히 하는 지구를 스스로 위협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비록 이번 시도가 단기적인 해프닝으로 끝난다 해도 이미 믿음이 얄팍한 인류에게 의심을 하나 심어두면 그것이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것을 렉스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 옆 도시의 지저분한 박쥐와 공도동망 해 줄지도 모르고 말이다. 포기를 모르는지 몇 번이고 슈퍼맨이 렉스에게 달려들었지만 본래 힘을 가지고 있는 슈퍼맨에게서 마저도 어느 정도 싸움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아머였으니 한낱 성인 남성의 힘이란 우스운 것이라 그의 몸을 종잇장처럼 다루며 렉스는 비틀린 희열을 느꼈다. 제 손 아래 무력해져있는 슈퍼맨을 보며 좀 더 제 적수를 곤죽으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야만은 렉스의 성미와는 맞지 않았다. 렉스는 슈퍼맨을 질질 끌어 그가 아캄 산하 연구소에서 반출해낸 포자를 응용하여 만든 세뇌 용액에 담그기로 했다.

“크크크크큭.”

그때 붉은 조명이 일제히 꺼지며 장난스럽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한 아이의 웃음소리가 어둠 속을 메아리쳤다. 렉스가 당황할 새도 없이 어둠 속에 숨어있던 더욱 짙은 그림자가 나타나 무자비하게 렉스를 쳐 날렸다. 그때 모든 전원이 일제히 돌아오며 사위는 붉은광이 아닌 선명한 백색광으로 가득 차올랐다. 금세 냉정을 찾고 아머에서 날붙이를 빼어 배트맨에게 공격을 가하는 렉스를 보고 클락은 주먹을 쥐었다. 오늘도 제 힘을 가늠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슈퍼맨은 돌진해나간다.

 

***

 

슈퍼맨을 통해서 벌이려 했던 범죄행위들이 미수로 그쳤기 때문에 무혐의 처분으로 끝나거나, 그나마 아캄에서 연구 자료를 빼낸 것이 성립되어 가석방으로 풀려나가나 해서 금방 자유인이 될 테지만 렉스를 고발 처리한 슈퍼맨 옆으로 배트맨이 다가왔다.

온갖 상처를 받은 듯 그와 정 없이도 헤어진 다음이었는데 섭섭함이 떠오르기보다 오랜 반가움이 먼저 떠오른 클락은 웃으며 그에게 인사하려 했지만 웬일인지 배트맨이 입을 여는 것이 보다 빨랐다.

“미안해.”

브루스는 어째서인지 배트모빌에 먼저 들어가 있는 딕이 엄지를 들어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몰래 깊이 심호흡을 했다. 아캄으로 누군가의 침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그 인물과 사라진 물건,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다시금 제 영역 아닌 이웃 도시에 까지 발걸음을 하게 된 브루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좋지 못한 가정이 맞아떨어진 것을 알았다. 비록 그것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브루스는 자신이 너무나 안일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했다. 고담의 범죄자들을 쫓아다니며 세상이 선한 이들에게 어떤 짓들을 쉬이 하는지 모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당신에게 그래서는 안 됐어. 내가 잘못한 거야.”

배트맨의 말을 듣자 클락은 그제야 얼굴을 흐리며 둘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던 날의 일을 상기했다. 클락은 짐짓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어째서 내게 먼저 말하지 않은 거야?”

“당신이 기분 나빠할 것 같았어.”

“어차피 언젠가는 내가 알게 될 텐데도?”

“그때가 먼 훗날이거나, 아주 없을 줄 알았지.”

“그 말은 그때까지 나를 영영 속일 생각이었군?”

슈퍼맨은 불쾌한 듯 찌푸린 눈썹을 숨기지 않으며 브루스를 보았다. 혀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지만 브루스는 클락이 상처받은 얼굴로 자신을 보던 순간을 떠올리며 여기서 멈춰서 안 된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브루스는 일전에 슈퍼맨이 고담에 왔을 때 아이비의 특수포자에 사로잡혀 아주 잠깐이었지만 힘을 잃고 축 늘어져버렸을 때를 떠올렸다. 요즘 같은 때에 귀한 동료이자 신뢰할 수 있는 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무력해져버린 모습을 보았을 때 브루스는 불쑥 제 행성의 조각이 뿜어내는 방사선에 맥없이 추락하던 슈퍼맨이 떠올랐다. 그가 브루스가 처음 생각했던 만큼 무적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브루스는 이번에야 큰 탈 없이 일이 끝났다지만 그 반대로 그가 원치 않을 때 힘을 잃게 되거나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힘을 휘두르게 되었을 때 그를 돕고 막아서야함에도 지식의 부재 또는 절대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 그를 돕지 못하게 될 자신의 나약함이 소름끼쳤다. 그래서 브루스는 자신에게 크립토나이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지막으로 찾아낸 광석 조각을 몰래 간직하게 되었다. 그에 가장 피해를 보게 될 클락에게 그런 사실을 함구하는 것이 나쁜 짓임을 알았지만 그렇기에 브루스는 클락이 그 사실을 영영 알지 못 했으면 했다. 선량한 히어로도 아무리 말이 되는 소리라지만 그에 충분히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섬세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자신이 서투른 인간임을 브루스는 잘 안다. 브루스는 그것이, 자신이 크립토나이트를 가지고 있어야함이 배트맨이 슈퍼맨보다 한참 연약한 코스튬을 뒤집어쓴 평범한 인간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에 클락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와 나란히 서있을 자격이 없는 무력한 인간임을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클락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배트맨의 활동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약하다는 걸 당신한테 말하고 싶지 않았어.”

브루스는 자신이 하는 말이 뻔뻔한 것도 죄책감이 깃들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지만 자신을 평생에 걸쳐 보살펴주는 알프레드에게도 잔인할 수 있는 자신이 새삼 슈퍼맨에게만 유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크립토나이트를 돌려주지 않을 거야.”

늘 어딘가 숫기 없는 얼굴이던 그가 단단한 얼굴을 만들어 클락을 보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당돌한 태도였지만 그게 기껍게 보이는 건 역시 콩깍지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보다도 클락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처음으로 슈퍼맨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기사를 쓴 로이스에게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슈퍼맨에게 그보다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며 날카롭게 말하던 로이스의 말이었다.

“나는 기자지, 슈퍼맨의 치어리더가 아니야.”

그때 클락은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 했지만 순간 머릿속을 화끈하게 끼쳐온 창피함을 알고 있었다. 이런 나약함이 아이러니하지만 클락을 의심의 여지없는 인류의 종으로서 묶어낸다. 제멋대로인 칼엘과 소심한 클락 켄트, 그리고 하늘을 나는 슈퍼맨 이 모든 아이덴티티가 집약된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루기 쉬운 인물은 아닌 듯하다.

“그럼 이거는 굳이 필요 없겠군.”

클락이 작은 납상자를 내보이자 브루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받아들었다. 그저 잡은 채로 머뭇거리는 브루스에게 클락이 열어보라 고갯짓을 하자 브루스가 살짝 뚜껑을 열어보곤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까만 카울 아래 드러난 하얀 피부에 언뜻 초록빛이 묻어나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금세 지워진다. 클락은 과장되게 한숨을 푹 쉬며 부러 앓는 소리를 했다.

“나도 맞으면 아프고 미움 받으면 슬프니까. 살살 다뤄줘.”

클락이 엄살을 부리며 너스레를 떨자 브루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당신을, 미워할 수 있어?”

진심으로 알지 못 하겠다는 투였다. 역시 자신은 브루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뜨끈해지는 뒷목을 느끼며 클락은 자신이 이번에도 너무 어려운 상대를 마음에 담았음을 인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