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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뱃] Shall We Dance?

숲뱃 전력 60분, <Shall We Dance?>

 

“나와 춤추지 않겠어?”

무덤 속처럼 고요한 만찬의 끝에 남자가 오랜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다만 내밀어진 검은 장갑을 낀 손은 이론(異論)을 허용하지 않듯 올곧게 브루스를 향해왔다. 그것이 그의 붉은 시선과도 참 닮았다고 생각한다.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스몰빌에 위치한 고즈넉한 그의 부모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한 날이 불현 듯 떠올랐다. 식사에 술을 곁들이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도 그날은 벌써 이유도 흐릿해져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아니면 굳이 지금 그것을 상기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어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제법 들뜨고 기뻤던 날이어서, 보통은 밤 일정을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브루스조차도 달콤한 와인 몇 잔에 기분 좋은 홍조가 얼굴에 떠올랐던 그런 드문 날이었다. 클락이 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며 춤을 권했을 때 클락의 춤 솜씨가 정말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브루스는 “저를 리드할 수 있겠어요?” 하고 거만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을 보며 깔깔 웃는 켄트 부부와 알프레드 앞에서 춤인지 몸짓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을 둘이 부둥켜안은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하다가 결국 이마를 맞대고 푸스스 웃어버렸더랬다. 그때의 클락 켄트도, 지금의 칼엘도 분명 한 명의 존재일 텐데 마치 완전히 딴 타인인 것처럼 얼굴이 낯설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브루스는 눈을 깜빡이고 나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그의 얼굴에 슬쩍 시선을 떨어트려버렸다.

어쩌면 그를 낯설게 봐야지만 배트맨이 손쓰지 않았던 문제들, 클락의 상냥함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고 있던 브루스 웨인의 무지함, 그의 눈물의 무게를 끝내 지지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같은 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약아빠지기 짝이 없는 뇌가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저 그가 변했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어지는 그런 안일한 감정이, 클락이 이제 더 이상 브루스의 손끝에 닿지 않을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브루스를 찾아왔고 그럴 때면 한낱 인간인 자신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서 그냥 어느 날엔가는 잠이 들었을 때 더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배신자에게 그런 평온은 가당치 않은 사치일 뿐임을 브루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브루스는 스스로가 지키지 못 할 약속을 맹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뻗은 손을 다시금 마주 잡는다. 그와 보란 듯이 춤을 추며 로드 슈퍼맨과 로드 배트맨이 언제까지나 공범으로 있을 것이며 둘의 유대가 굳건한 것임을 침묵하는 세상에게 내보인다. 칼엘의 춤은 너무나 유려하고 매끄러웠다. 그가 이끄는 팔 동작, 발 디딤을 따라가며 브루스는 얌전한 인형이 되며 웃었다. 분명 자신은 칼엘의 장례에 같이 묻힐 껴묻거리가 될 테다. 로드 배트맨은 이 춤의 끝에 그들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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