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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뱃(약 울새뱃)] Today is the day

for. 루님

엽서 리퀘스트: [할뱃/고백/가볍고 다정한 로코로코]

 

 

"오늘이 그날이야."

다른 장소에 있는 두 개의 결연한 목소리가 겹친다.

근무지도 거주지도 한참은 거리가 떨어져있는 이와의 약속을 위해 잡은 숙소에서 해럴드 조던은 거울 앞에 서서 빗으로 머리카락을 이쪽으로 쓸어 넘겼다가 다시 저쪽으로 넘겨보기를 반복하다 결국 맨손으로 자연스럽게 머리를 헝클였다. 말갛게 떠오른 햇살 아래서는 때때로 금빛으로마저 빛나는 브루넷 미남을 얼마간 노려보고 있다가 할은 픽 웃으며 거울상의 자신에게 손가락 총을 들이밀며 윙크하고서 말해본다.

"걱정 마, 인마. 너 잘생겼어."

비록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른 누구 씨의 취향은 할의 외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거야 대중적인 취향을 비껴나간 그 스푸키의 손해가 아니겠는가. 거울 앞을 서성이며 자신을 단장하던 시간들 따위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점퍼를 둘러 입은 할은 한 손에 들어오는 상자가 주머니에 잘 들어있는 것을 두어 번 두드리는 것으로 확인한 다음 발걸음도 당당하게 저 바깥을 향해 나아간다.

한편, 다른 목소리의 주인공인 리처드 존 그레이슨은 오늘 하루 명목상 지인의 대타로 근무를 서게 된 식당 안쪽 탈의실 캐비닛에 부착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딕은 밤마다 고담 빌런의 정강이를 부러뜨리고 인중을 두들기고 다닌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예쁜 얼굴을 그럼에도 중요한 사명을 띤 요원답게 보다 정갈하게 가다듬어 본다. 아무려면, 그가 좋아하고 그와 어울리는 흑과 청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이 얼굴은 어떻게 해도 못날 수가 없었다. 거울 속 딕은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은 꼭 마천루 끝을 딛고 저 하늘로 도약하는 파란새와 같이 숙련된 사냥꾼의 미소였다. 실용성 보다는 깔끔한 인상을 위해 착용하는 듯한 검은색 허리 앞치마의 리본을 곱게 묶으며 딕의 근무가 시작되었다.

 

 

보기에 과하다 싶을 수 있는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소화해낸 브루스 웨인은 세간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카페테라스 자리에 앉아 소소한 웅성거림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저거 브루스 웨인이야?"

"설마. 브루스 웨인이 이런 데 있겠냐?"

"잘생겼다. 번호 달라 할까?"

등등의 말소리가 새들의 흥겨운 지저귐 마냥 들려왔지만 브루스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로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만 느긋하게 두드리며 이 고담에 오고서 굳이 외식을 권해온 상대를 기다렸다. 할은 모르겠지만(무엇보다 인정하지 않겠지만) 브루스는 그의 덜렁거림에는 리그 임무 관련이 아니고서야 제법 너그럽게 대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을 먼저 잡은 그가 벌써 10분 정도 시간을 늦고 있었지만 앞으로 5분쯤은 더 기다려줄 수 있었다. 절대 만나는 일이 둘의 지리적(혹은 천문적) 위치상으로나 또 다른 직업으로나 쉬운 일이 아닌 그와의 약속이 반가워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브루스의 곁으로 그조차 감탄할 만한 조용한 발걸음으로 종업원이 다가왔다.

 

 

할은 달리느라 좀 더 헝클어진 머리를 다잡으며 부디 브루스가 자리를 떠나지만은 않았기를 바랐다. [야, 나 지금 가] [가는 중] [거기 있지?] 하고 보낸 메시지에는 답이 없었다. 그것이 평소 심술 가득한 박쥐의 성질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공사다망한 그가 결국 자리를 떠나버린 것인지 분간할 수 없던 할은 전화를 걸어 확인해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정신없는 중에 부랴부랴 구매한 꽃이 망가진 곳은 없는지 다발을 확인하며 약속 장소로 나아간다. 그러다 할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제법 시선이 몰려있는 테라스 자리를 보고 조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뒷모습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든든하고 반듯한 등을 가진 이가 가게 종업원과 무어에 즐거운지 제법 긴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보이자 자신이 약속에 늦은 것은 둘째로 저, 저 바람둥이가! 하고 괘씸한 마음도 드는 것이다. 할은 보무당당하게 주변의 웅성거림과 선망어린 시선을 받고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큰소리로 "야!"하고 브루스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할이 입을 열기보다도 전에 브루스와 종업원이 동시에 돌아보는 것이 더 빨랐다.

"늦었군."

"아. 오늘 할이랑 만나기로 했었어요?"

반가움어린 인사보다도 여상하게 나오는 책망 하나와 실망과 아쉬움이 적절히 어우러진 말씨 하나가 할의 기세를 앗아간다. 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면서 할에게 브루스 맞은편의 자리를 손으로 안내하며 냅킨 위에 엎어놓은 잔을 바로하며 물을 따라주었지만 브루스에게 작은 말씨로 "브루스랑 이렇게 만나서 제법 운명적이구나 했었는데..."하면서 투덜거리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딕의 장난기 어린 푸념에 브루스가 작게 웃으며 "다이내믹 듀오로는 성에 안 차서?"하고 대꾸해준다. 얼씨구? 스푸키가 제법 농담도 하네? 어쩌다가 자신이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는지는 모를 할이 눈썹을 씰룩이며 속으로 불만을 삭였지만 박쥐 가족들은 그런 할은 정말이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할은 멋과는 일억 만 광년은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삐쳐서 골이 난 아이처럼 브루스에게 불쑥 꽃다발을 들이밀며

"자."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홍빛을 띠는 소담한 크기의 꽃이 옹기옹기 모여 있는 다발을 눈앞에 한 브루스는 눈을 한 번 크게 떴다가 잠잠히 받아들어 한동안 제 손 안에서 꽃을 감싼 포장지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관찰하는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할은 불현듯 긴장이 되어 테이블 밑에서 손에 주먹을 쥐었다 피며 차라리 장미를 살 것을 유독 꽃집들을 지날 때마다 앞에 마치 지금이 시즌이라는 것 마냥 전시되어 있는 이름 모를 꽃이 예뻐서 즉흥으로 사버린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고맙군."

할의 생각은 아는지 모르는지 브루스는 짧게 답한 다음 꽃을 제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딱히 싫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기뻐하는 기색도 없어서 할은 무어라 더 캐묻고 싶었지만 준 것에 대해 꼬투리 잡듯 말을 붙이는 것도 이상한 일인가 싶어 속만 바짝바짝 태웠다.

"참, 브루스도. 반응 좀 크게 하라니까요. 예쁜 베고니아잖아요. 할이 걱정이 많아서 브루스한테 주는 것 같은데."

딕이 마치 할을 거들 듯이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할은 딕이 끝에 빙긋 웃으며 덧붙인 말이 뒷목에 콕콕 걸려서 켕기게 했다. 할의 뇌리에 꽃에는 각각 의미가 있다는 것이 뒤늦게 떠오르면서 선물하겠노라고 덥석 사온 꽃이 이토록 불길해보일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선물용으로 산 꽃다발치고는 포장도 꽤나 수수하지 않은가? 할은 물론 그린랜턴으로 복무하면서 지구상이 아닌 이 우주상 어느 언어라도 번역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이 꽃의 말이라곤 해도 사람이 임의로 말 못 하는 다른 종에게 붙인 의미까지 해석할 수 있는 뜻은 아니었다. 할이 속으로 혼란에 빠져있건 난리가 났건 상관없이 딕은 허리를 반듯하게 피며 주문서에 펜 끝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주문은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오늘 추천메뉴는 제철 채소를 곁들인 라따뚜이랍니다. 저는 비매품이지만 아홉 시 이후는 프리예요."

"그건 고려해볼 일이군요."

할이 바쁘게 저기 떨어진 도시에 있는 과학수사 연구실에서 간식을 열심히 챙겨먹으며 근무 중일 친구에게 [야, 베고니아 꽃말이 뭐냐?]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할의 휴대전화는 데이터를 못 쓰게 된 지 오래였다.) 오고간 대화를 기어이 주워듣고는 뜨악한 표정으로 퍼뜩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냥 평소의 그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태연한 두 사람은 할을 한 번, 그리고 메뉴판을 한 번 보며 어서 주문하라 무언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그래도 할이 아무런 말없이 벙찐 표정으로만 있자 브루스가 손을 뻗어 톡톡 하고 할의 앞을 두드렸다. 여기서 뭐라 말하면 내가 이상한 놈인 거냐. 할의 머릿속에 투덜거림인지 체념인지 모를 독백이 흘러나오고 할은 더위 먹은 너구리마냥 기운 없이 말했다.

"추천메뉴로..."

 

 

알콜이 들지 않은 스파클링 음료로 입술을 축이는 브루스는 은은한 미소마저 띠고 있는 것이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할이 제 점퍼 주머니 속에 든 상자를 쥐었다 말았다 하며 그것을 전해주는 데 실패를 하든, 오아와 고담의 거리를 둔 탓에 오랜만이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손 한 번을 잡아보든 말든, 뉘 댁의 잘난 아드님께서 할이 어떤 분위기를 잡아볼작시면 물잔이 빈 것 같다는 둥 피클은 더 필요 없냐는 둥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찾아온 덕에 준비해둔 말을 하든 말든 말이다. 테라스와 식당 내부 좌석을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면서도 서글서글한 미소에 금하나 가지 않은 채 붙임성 있게 응대하고 있는 딕을 멀찍이서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브루스는 정말 마냥 기분이 좋아보였다.

"딕은... 정말 대단한 거 같지 않나?"

취기라도 오른 사람처럼 달콤하게 할에게 속닥이는 브루스의 눈은 기대감과 자랑스러움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기어이 배트랭을 손바닥만큼도 안 되게 축소해 놓은 듯한 표창 비슷한 것으로 손등이 찍힐 뻔 한 할은 네가 그러고도 정말 배트맨이 맞느냐고 어쩜 이렇게 눈치코치가 없어서 내 속만 까맣게 타들어가게 하느냐고 하고 말하고 싶은 것들이 왕왕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 설렌 눈동자를 앞에 한 순간 모든 생각들이 증기마냥 맥없이 바깥으로 빠져나가 버려서 할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하고 맞장구를 쳐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한 삼십분을 더 레몬이 가미된 파블로바와 커피를 비우기까지 브루스의 아이들 자랑 얘기를 들은 할은 뒤늦게 브루스가 계산을 이미 끝마쳤다는 사실을 알고 이대로 언제나처럼 맛있는 밥이나 얻어먹은 채로 헤어질 수는 없겠다 싶어 브루스의 소매를 정말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야, 같이 산책이라도 해."

그게 무어라도 대단한 말인 양 눈에 힘을 주고서 이야기하는 할을 브루스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할은 여기서 브루스가 왜라고 한마디라도 하는 순간 뭐, 왜, 뭐하고 으름장을 늘어놓을 생각으로 눈썹에 힘을 주었지만 생각보다도 브루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딕이 저쯤에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을 눈치 채고서 손을 흔들자 브루스가 작게 웃어 보인 뒤 지금 가자, 당장 가자하는 기색을 풍기며 산책이 급한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할을 따라 나섰다.

 

 

약속 장소로 잡았던 식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은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의 온화한 노을과 어우러져 제법 매력적인 장소로 보였다. 자라난 나무들이 주변에서 울리는 소음들을 막아서준 덕분에 공원은 대도심 속에서도 제법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명랑한 새소리마저 들려오는 공원에 들어서며 할은 다시금 간질간질 찾아드는 긴장감에 몰래 주먹을 꼭 쥐었다. 배리에게 받은 답신으로 보아 브루스가 제법 소중히 품에 안고 있는 저 꽃은 고백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의미를 가진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꽃은 예쁘고 지금 할은 브루스와 단 둘이 있는 것이다. 할은 몰래 심호흡을 했다. 브루스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할이 입을 열어 공기에 진동을 담아 전달해내려 했다. 그 울림이 한적한 공원에 퍼져가려는 찰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할의 직감이 오, 안 돼 하고 상황을 파악하기보다도 빠르게 판단을 내렸지만 할이 브루스를 이끌어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하기보다도 그가 먼저 소란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가는 것이 빨랐다.

"오늘에야말로 네놈의 명줄을 끊어주지."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아 앳되었지만 백수의 왕자와 같은 기백이 서린 목소리가 고담의 스산한 바람을 타고 상대에게 나아간다. 그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청년도 아직 소년의 티가 남아있었지만 익숙하게 두르고 있는 고급 정장을 소화해낼 수 있는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반듯하게 서서 물러섬이 없었다. 하, 하며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는 팀과 그런 팀을 노려보며 주먹을 으드득 쥐고 있는 데미안의 모습은 어느 픽션의 한 장면처럼 작위적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극적인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조깅을 하러나오거나 반려견과 산책을 다니거나 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건 말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웬수마냥 서로를 마주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할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브루스는 겉으로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둘의 첫 시작이 썩 유쾌하지 않았던 것을 아는 만큼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할은 아이들은 싸우면 크는 거라고 거기에 어른이 끼어드는 건 역효과만 나는 거라고 얼토당토 않는 말이라도 해서 브루스를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박쥐의 아이들이 어슬렁거리는 어른 둘의 기척을 눈치 채버린 다음이었다. 굳어있는 브루스의 얼굴을 본 데미안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드레이크! 네놈이 비겁하게 아버지한테 꼰질렀나?!"

"뭐래? 네가 칠렐레팔렐레 다니니까 브루스가 여기까지 찾아온 거겠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최고운영책임자로서도, 레드로빈으로서도 배트패밀리만이 아닌 히어로들 중에서도 침착하기로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팀이었지만 데미안과 마주할 때면 임계점이 낮아져버리는 탓에(팀은 임계점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저 악마를 그동안 자신이 참고 또 참은 탓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두 아이들은 언제라도 서로에게 주먹을 쥐고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나마 둘 다 로빈과 레드로빈의 차림이 아닌 데미안 웨인과 티모시 드레이크 웨인의 차림으로 마주한터라 당장 쥐고 있는 무기는 없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만."

안고 있던 다발을 할에게 건넨 브루스가 양손을 둘 앞에 들어 보이며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는 지나가는 길에 여길 온 것뿐이란다."

브루스가 사실 그대로를 설명했지만 '우연'에 있어서는 마법이나 우주의 원리를 꿰차고 있는 메타휴먼들 보다도 믿지 않는 박쥐들은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눈을 샐쭉하니 빛냈다. 그러다가 브루스의 뒤에서 아이들을 말리려고 나아간 브루스를 대신해 꽃다발을 맡은 채로 멍하니 무상하게 허공을 보고 있는 할을 발견하고 성난 새처럼 데미안이 소리쳤다.

"아버지! 저 시퍼런 놈이랑 이런 음침한 데를 온 거야?!"

음침하다기에 공원은 행인들도 충분했고 탁 트인 공간인데다, 이곳이 음침한 공간이라면 고담이란 도시에 음침하지 않은 곳이 있기는 한지하는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지만 할은 괜한 불똥을 피하고 싶어서 입을 꾹 닫았다.

"그만해. 브루스도 생각이 있었겠지."

팀이 나름 옹호한답시고 차분하게 데미안의 말을 가로막았지만 할을 한 번 훑고 지나간 시선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니, 내가 뭐 할은 억울함과 황당함에 헛바람이 튀어나갈 거 같았지만 이미 그러기엔 브루스와의 사귐이 제법 된 터라 해탈한 얼굴로 대신 질문했다.

"너넨 무슨 일로 싸우고 있는데?"

"내가 왜 네놈한테 그걸 말하지?"

"제가 왜 할한테 그걸 말해요?"

사이가 나쁜 것치고는 죽은 정말 찰떡같이 맞는 두 사람이 동시에 쏘아붙였다. 아버님, 그렇다는 뎁쇼? 할이 눈짓하자 브루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인 다음에 아이들에게 답을 요구하듯 지그시 둘을 한 번씩 바라봐주었다. 그에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데미안과 팀은 분한 듯 이를 꽉 물고, 입술을 비죽이 내밀며 부루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브루스가 인내심 있게 말없이 둘을 바라보고 있자 마지못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저 가짜 놈이 열 받게 하잖아!"

"저 악마가 짜증나게 굴잖아요!"

겨우겨우 속내를 털어놓은 것치고는 둘 다 브루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그 속에는 그간의 답답함과 성가심이 크레이프 케이크마냥 층층이 쌓여서 제법 소란스러웠다. 말꼬가 트인 둘은 브루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저 놈의 간악한 짓을 들어보라며 쟤가 내가 한창 읽던 책의 결말을 얘기해버렸다는 둥, 내 물건을 가져다가 배트랭 타깃으로 삼았다는 둥, 내가 먹으려고 냉장고에 이름까지 써서 넣어둔 아이스크림을 먹어버렸다는 둥, 자기 노트북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는 둥 미주알고주알 일상적인 서러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말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삼형제 집안에서 자란 할의 얼굴을 허탈함으로 느슨해졌고 반면에 브루스는 세상 심각한 일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굳어져갔다.

할은 그저 헛웃음이 났다. 또 무슨 어마장장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가했더니 요컨대 이러쿵저러쿵 해도 서로 쏙 빼닮아있는 박쥐의 아기 새들이 형제싸움을 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둘 다 서로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화해하지 그러냐."

그야 감정이 격양되어있는 아이들이 듣기로는 불합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른으로서는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말이라고 할은 생각했다. 하지만 할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두 쌍의 눈동자가 그런 할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게 좋게 덮어서 뭐가 해결 된다는 거죠?"

"저 놈이 살아있는 한 같은 일이 반복될 텐데 그런 얄팍한 술수에 내가 속을 것 같으냐?!!"

아아아아 아버님!!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자신을 매도하는 눈동자들을 보며 할이 뭐라도 말해보라고 브루스를 보았다. 하지만 브루스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아이들에게 양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한다.

"앞으로 10분. 딱 10분간 원하는 만큼 싸워보렴."

그러더니 버팀목마냥 둘 사이를 막고 있던 브루스가 길을 내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버린 것이다. 잔뜩 벼르고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빛났고 할은 뒷목을 잡았다. 이건 도대체 몇 세기에 나오는 핫대디냐?! 할이 거하게 어깃장을 놓으려고 했지만 그러기에 이미 박쥐들의 표정은 더없이 진중하고 비장하다. 할은 마른세수를 하며 그저 일이 순탄히 풀려 끝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서로에 대한 앙심이 유별나게 깊은 둘인 만큼 싸움은 시작부터 서로의 급소를 노리려 드는 것으로 시작됐다. 다만 둘의 행동을 유심히 보던 브루스가 상황이 위험하다 싶을 때면 끼어들어 둘의 공격을 흘려보내며 중재했다. 처음에는 그런 브루스의 참견에 반발하듯 브루스에게도 싸움을 걸 던 둘은 점점 누그러지며 룰을 이해했다는 듯 캐치볼과 같은 대련을 이어갔고 제3자의 눈으로 보자면 그 광경은 마치 어른 고양이와 아기 고양이 둘이 사냥놀이를 하며 엉겨 노는 것처럼도 보였다. 어느 샌가 벤치에 앉아 상황을 관망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할은 조금 시들어가는 꽃다발을 안은 채 멍하니 제법 흥겨워 보이는 박쥐 가족들을 보았다. 그러니까...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그런 부질없는 헤아림도 해보면서.

"흥, 가짜 꼴에 박쥐 물은 들어선."

"짧은 팔다리가 자라기는 하는 모양이지?"

상대에게 헐떡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땅 위에 너부러지고서도 말만은 곱지 않은 데미안과 팀의 대사는 케케묵은 청춘드라마를 연상하게 했다. 그런 아이들을 따스하게 바라보며 손을 뻗어 일으켜 세우는 브루스의 모습은 와아, 정말 감동적인 광경이야 하고 느린 박수라도 쳐줄만했겠지만 할은 그저 모든 의욕을 잃은 눈동자로 아름다운 오후의 한 조각을 방관했다.

그러다 문득 하늘이 제법 어두워지는 것을 인지한 할은 이대로 있다간 정말 이도저도 아닌 하루가 될 것을 예감하며 기어이 더는 설명할 여유도 없이 브루스를 냅다 안아 날아오른다. 초록빛 구체가 공원을 벗어나는 것을 지켜본 본 팀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능숙하게 버튼을 조작하고 있었지만 이미 자리를 떠난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대로 브루스를 초록구체 안에 안은 채로 이제 이 근방에 안전하다고 여길만한 유일한 장소인 웨인저택을 향해가려했던 할은 브루스에게 인정사정없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비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아, 쫌!"

할이 인상을 박박 긁으면서 따지고 들려고 했지만 예의 배트-노려보기 스킬을 쓰고 있는 브루스의 서슬은 시퍼렜다. 결국 할은 브루스가 운전하는 세단 옆자리에 얌전히 몸을 싣고서 웨인 저택으로 향해간다. 그래도 옆에서 니가 날지 못 하는 걸로 남한테 심술부리지 말라고 투덜거리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주변에 다른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는 오솔길을 지나며 저쯤에 고성마냥 버티고 서 있는 웨인저택이 눈에 들어온다. 유럽의 오래된 성처럼 보이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구석이 있는 저택이 점점 뚜렷하고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할은 문득 오늘 일정에 끼어든 울새들의 면면이 떠오르면서 어쩌면 이렇게 웨인저택을 가는 것조차 어떤 장황한 음모의 일부이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다소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들기 시작했다. 브루스가 차고지에 주차하기 까지를 기다리던 할은 결국 그가 차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옆구리를 감싸 안으며 제 의지대로 반지의 힘을 쓰고 말았다. 지금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섰다간 이 집의 제일 두렵고 무서운 집사를 마주쳐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고백은커녕 국물도 없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내가 하지 말랬지."

남의 급한 마음은 모르고 브루스는 태평하게 인상을 쓰며 툴툴거린다. 할은 그에 대꾸할 정신없이 다시금 찾아드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키고 브루스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브루스와 단 둘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아늑하고 안전할 그의 방에서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할이 브루스의 이름을 부르고자 입을 열었을 때 브루스의 시선이 할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할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제이슨?"

"내가 방해했군."

이번에야 말로 브루스에게 할 말을 고르며 그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할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펄쩍 놀라 브루스의 손을 놓고 돌아보면 둘째 울새가 아주 짧은 순간 할을 독기 서린 눈빛으로 노려보다 이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브루스의 얼굴을 보고 저 땅 아래 마왕조차 가슴을 부여잡을 것 같은 표정으로 쓸쓸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청년은 입술을 꾹 물더니 황급히 등을 돌려 비련의 주인공처럼 브루스의 방을 빠져나갔다. 곧 죽어도 자신이 저택을 찾아오는 이유는 알프레드 때문이라고 우기던 제이슨이 (브루스가 보기에)가련한 얼굴로 제 방에 있다 뛰쳐나가는 것을 본 브루스의 머릿속에는 논리며 이유를 따질 여유란 남아있지 않았다. 브루스는 세상 애절한 목소리로 "제이!" 하고 외치며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라 나서버렸다. 그렇게 해럴드 할 조던만이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공간에 덩그러니 남았다.

 

 

숙소에 돌아온 할은 한없이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래 뭐, 고백하려고 마음먹은 날 전, 현직 로빈들의 훼방을 받은 것은 이제 와서 할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냥 으레 관례행사로마저 느껴질 경지에 이르렀다. 다만 할은, 아직도 브루스에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애초에 그 차 안에서라도 기회는 있지 않았나. 아니면 굳이 웨인저택에 가야만 했던가? 하물며 둘이 도란도란 걷던 그 짧은 순간에라도... 그린랜턴 씩이나 되어서 용기가 없어 고백을 하지 못했다니 오아로 돌아가면 랜턴 동료들이 비웃다 못 해 시네스트로마저 찾아와서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은 브루스에게 주려 마음먹었던 반지마저 어디로 떨어졌는지 그 행방이 묘연하다. 브루스와 같이 있었던 동선을 따라 죽 훑어보며 식당에 장남의 차가운 눈을 피해 분실물이 없는지를 물어보고, 청춘 한 컷을 찍던 두 사람은 이미 온데간데없는 공원을 뒤지고, 브루스의 자동차에 떨어트렸을까 해서 세단에 찰딱 붙어 짙은 선탠이 붙여진 유리창 너머를 보려다가 도난 경보음이 마저 울려버리고서도 그는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백도 못 하고, 반지도 잃어버린 할은 잔뜩 우울한 얼굴로 [야, 나 간다. 다음에 봐.] 메시지를 남기고 집에 돌아왔다. 브루스는 아니나 다를까 답이 없다. 할이 조금 딱딱한 재질의 침대 위에 으어어 하고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며 풀썩 엎어졌다.

그때 마치 그 타이밍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딩동 하고 숙소에 있는 벨이 울렸다. 할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면 바깥에서

"배달입니다. 조던 씨 계신가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고담인 것을 감안해 할이 보조 잠금장치는 풀지 않은 채 문을 여니 할의 눈앞에는 붉은 장미가 수북이 꽂힌 꽃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멍하니 깜빡이다 잠금을 완전히 열어 나온 할에게 수령 사인을 받은 배달원은 짧게 모자를 벗어 인사해보이곤 바삐 자리를 떠났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바구니를 받아들고 들어온 할은 한쪽에 꽂힌 메모지를 보았다. 장미 내음이 벤 종이를 보면 정갈하면서도 어딘가 둥근 글씨체가 눈에 들어온다.

[반지가 작아. 다음에는 성공해보도록.

-추신, 한 번 준 거는 안 돌려 줄 거야.]

조금 퉁명스러운 듯 들리는 장난기 어린 무뚝뚝한 목소리가 글씨에 입혀져서 할에게 전달되는 듯했다. 아무래도 할의 고백에 제일 큰 걸림돌은 이이 심술 맞고 앙큼한 박쥐님일 테다 싶어서 할은 갑자기 헤실헤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큭큭 웃어버렸다.

 

 

그로 며칠 뒤 그린랜턴으로서의 일을 마치고 아주 오랜만이 터덜터덜 코스트 시티의 집으로 돌아온 할은 여러 광고물과 공과금 용지들이 어우러진 우편함에 유독 눈에 띄는 고급스러운 우편을 발견한다. 우표는 따로 붙어있지 않았고 손수 녹여 붙인 듯한 왁스실링이 되어있는 봉투를 뭐지 싶어서(한편으로는 예견된 불안함을 안고서) 열어보면 멋들어진 필기체의 짧은 편지와 신문조각이 들어있었다.

할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들여다보면 어느 연예기사에 '고담의 황태자, 그린랜턴과 랑데부?!'라는 제목이 붙은 그린랜턴의 품에 안겨있는 브루스 웨인의 휴대폰으로 찍었는지 화질이 다소 거친 사진이 한 장 실려 있었다. 기사의 어조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마이너한 가십지인 것이 확연했지만 그 짧은 구설수마저 매의 눈으로 잡아내어 보낸 이의 마음 씀에 할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조심 편지를 읽으면

[보다 분별 있는 교제를 부탁드립니다.]

하고 필기체만큼이나 유려하면서도 날이 선 영국발음으로 더빙된 문장이 할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아, 역시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그 스푸키를 멕이고 입히고 재우며 키워낸 이 박쥐 집의 집사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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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고니아의 꽃말은 한국어로 찾았을 때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짝사랑, 사랑을 주는 꽃 이런 의미로 주로 구글링 되었는데 영어로 찾으면 불운, 주의, 조심의 의미가 있다고 나옴. 딕은 후자, 브루스는 전자로 해석한 것으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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