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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뱃] 하루

아침

바깥은 제법 밝았는데도 손님의 요구를 반영하여 설치된 두터운 커튼이 햇빛을 전부 끌어안아 방 안은 달콤한 피로가 묵직하게 깔려있다. 아침이 온 것을 알고 깨어난 지는 제법 되었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새근새근한 숨소리를 헤아리다보니 때는 벌써 클락이 출근을 해야 할 시간에 가깝다. 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묻고 일어날 기색이 없는 브루스의 왼쪽 뺨에 꾸욱 하니 도장이라도 찍듯 뽀뽀를 한 클락은 평소보다 빠른 동작으로 욕실과 드레스룸을 스쳐 출근 준비를 했다. 되도록 일어나자마자 따끈따끈하게 차려진 아침밥을 함께한다면 좋겠지만 끼니보다도 수면을 택하며 앵돌아지듯 이불 도롱이 속으로 꾸역꾸역 숨어버릴 손님의 성정을 생각해서 아쉬운 대로 그가 데워 먹을 수 있는 요깃거리를 차려놓았다.

다시 후다닥 침실로 돌아온 클락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조용히 가슴을 오르내리며 평온하게 잠들어있는 브루스를 지켜보았다. 자는 중에 브루스는 무어가 그렇게 복잡한지 미간을 꾸욱 찡그리며 인상을 쓰고 있다가 또 별안간 순한 아이의 얼굴처럼 보드랍게 펴져 있다가 따끈하게 뎁힌 침대가 포근했던지 보기 좋게 혈색이 오른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그랬다.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성실한 직장인의 성정 상 버릇 때문에 보게 된 시계가 어느새 출근시간에 거의 가까워져있었다. 클락이 어둠보다도 낮게 "다녀올게."하고 속삭이며 다시 브루스의 볼에 꾸우욱 굳센 입맞춤을 남기면 아직 눈도 채 뜨지 않은 브루스가 꾸물꾸물 팔을 뻗어 클락의 목둘레에 감으며 설게 키스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클락 켄트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점심

세간에 알려진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 브루스 웨인이라면 절대 발을 들일 일 없으리라 여겨지는 임대 아파트에서 언제 피곤에 찌든 채 굴러다녔느냐는 듯 뽀송한 얼굴로 나온 브루스는 입 무거운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메트로폴리스에 위치한 계열사를 방문해 일정 잡혀 있던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니 사장은 시간도 얼추 되었는데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느냐며 논의에 없던 점심약속을 꺼내들었지만 회사의 장들이 모여 밥을 먹는 일이 그저 친분 있는 사람끼리의 하하호호한 자리가 되지 않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미인과 선약이 있기 때문에 어렵겠다며 조금 얼빠져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아침이라기보다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클락이 차려준 클럽샌드위치를 든든히 먹고 나왔으니까 알프레드도 굳이 끼니를 걸렀다며 눈을 흘기지는 않을 터였다.

오늘은 무언가 단단히 각오라도 한 듯 계속 아쉬운 눈으로 브루스를 붙잡는 사장에게 살래살래 손사래를 치며 차에 몸을 실으려는 중 거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스마트폰의 카메라 셔터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메트로폴리스 특유의 쨍하니 깨질듯 맑은 하늘을 보았을 때 파랗고 빨간 잔상이 슉 하니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브루스는 부신 눈으로 보았다.

"우리 도시 명물을 보고 가시네요, 회장님."

내내 조심스럽고 듣기 좋은 말로만 치장하던 사장이 이번에는 뿌듯함과 자부심을 숨기지 못하는 들뜬 목소리로 브루스에게 말을 건넸다. 순간 왜일까 그가 깨물어 놓은 안쪽 허벅지가 욱신거렸지만 브루스는 생긋생긋 웃으며 "그러네요." 하고 대꾸하며 겨우야 리무진의 뒷좌석에 올랐다.

선탠 필름이 잘 부착되어 있는 차의 유리창을 통해서는 아까처럼 반짝이는 하늘을 바로 볼 수는 없었지만 슈퍼맨이 남겨놓은 기다란 비행구름은 좇을 수 있었다. 브루스가 느른한 한숨을 뱉었다.

 

저녁

신문기자 클락이 이른 야근을 마치고 회사 건물 바깥으로 나왔을 즈음 그의 귀에는 점점 자주 ‘그’의 명칭이 들려온다. 자줏빛이 점점 짙어지며 검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 저 하늘을 사뿐히 짊어지고 있을 이의 모습이 별자리처럼 클락에게는 잔상으로 보이는 듯하다.

로빈은 현재 그들이 말하기로 ‘학업 전념 시즌’에 있기 때문에(아이는 입을 삐죽삐죽 내밀며 성난 아기새마냥 굴었지만) 패트롤은 배트맨 혼자서 나갔을 것이다. 물론 그의 다른 패밀리도 있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구역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고담의 선량한 사람들이 보다 두려울 것 없이 살 수 있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일 테다. 언뜻 들은 배트맨의 심장박동은 이렇다 할 변화 없이 침착하고 차분하기만 하다. 클락의 귀에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들려오는 찬송과 논란처럼 그의 이름과 함께 거느려지는 구설들이 오가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알아가려는 중이다. 클락의 소중한 사람들이, 클락을 위해서 그럴 수 없다면 자신들을 위해서 그래달라고 말했으니까. 물론 이따금 [너와 나는 같아.]라며 그의 발목을 움켜쥐고 진흙탕으로 끌고 내려가려는 아귀의 말에 화가 치미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자신과 아침밥도 함께 할 수 없을 만큼 피곤해하면서도(그도 이 부분에는 조금 억울한 구석이 있겠지만 어쨌든 그의 집사는 클락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매번 반복되는 하루가 지치도 않은지 한숨소리 한 번 없는 그의 걸음걸음을 클락은 얼마쯤 음미하다가 문득 저기 골목 어둠을 보고 부리나케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와 닮은 어둠이 클락을 안전하게 감싸주었다.

 



"슈퍼맨은 여길 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지? 내가 전에 크립톤어로도 설명하지 않았던가?"

무기질적인 기계음을 입힌 목소리로도 충분히 짜증이 건네져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슈퍼맨은 그저 가슴을 쭉 피고 당당하게 공중에 떠있었다. 마천루에 설치된 가고일상 위에 잠시 날개를 쉬듯 앉아있는 박쥐는 그런 슈퍼맨의 뻔뻔함에 험악하게 인상 써진 카울을 더더욱 박박 구겼지만 강철의 사내는 악한도 죄인도 아니었으므로 그를 겁낼 이유가 없었다.

딱히 배트맨이 그가 서있던 철근 구조물이 무너진다 해서 쉬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극한으로 단련한 몸을 상하거나 슈퍼맨이 조금만 입질을 해도 발갛게 꽃이 피는 여린 피부가 까지거나 할 거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약하고 무른 존재를 염려하는 건 지성체로서는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발밑이 무너지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그래플링 건을 발사해 다른 발판으로 건너가려는 찰나보다도 전에 슈퍼맨에 의해 건져져서 그가 애용하는 가고일 석상의 머리 위에 안착한 배트맨은 자신이 뛰고 날아봐야 따라잡을 수 없을 그의 전능함에 반사적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내 성난 표정마저 지우고 뜻을 알 수 없는 낯으로 돌아온 배트맨이 슈퍼맨에게 이리와 보라 손짓했다. 무언가 건넬 말이 있는 듯한 그의 제스처에 슈퍼맨은 착실하게 배트맨의 곁으로 다가가 공중에서 석상 위로 사뿐히 발을 디뎠다. 그 순간 잘 씻어놓은 밤의 청량한 내음이 슈퍼맨의 후각에 훅하니 끼쳐왔다.

"                 ."

웅웅거리는 밤의 웅성임 사이로 슈퍼맨만이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그렇게 밤은 얄밉게 입을 훔치고 저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갔다. 슈퍼맨이 저를 두고 귀신처럼 사라진 어둠 자락을 조금 토라진 얼굴로 바라볼 때 입술에 남은 온기만이 홧홧해서 손끝으로 조금 매만져 보았다.

 

새벽

그렇게 둘은 아침과는 다른 공간, 하지만 같은 침대 위에 나란히 있었고 오늘도 하루는 저물고, 또 다른 하루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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