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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선택지_뱃른

남자는 눈을떴다. 그의 시선에

>낯선 장소가 들어온다.



채 풀리지 못한 피로탓인지 고요함에도 귀가 아리다.

>마치 쉬라는듯 주위는 얇은 천이 둘러져있다.



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라도 일으켜 앉아본다. 그 인기척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가 천을 조용히 들추었다.

>"몸은 어때?" 청년이 묻는다.



피로는 익숙한 통증처럼 온몸을 간질였지만 브루스는 그저 설게 고개를 끄덕였다.

>삐땃하게 선 청년이 마뜩잖은듯 브루스를 본다.



브루스는 그의 시선에 조금 멋쩍어졌다.

>무언가 말하려 해보지만 발성이 되지 않는다.



몇 번 아아하고 목에 손을 대고 시도해보지만 역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청년이 듣기에 뾰로통하게 말했다.

>"말하려 하지 마."



청년은 브루스 옆으로 다가와서 외상없는 목주변을 눈으로 훑는다. 잠시 손을 뻗으려는듯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청년이 물었다.

>"그렇게 그 자식이 좋아?"



제이슨의 물음은 대화보다 독백에 가까웠다. 브루스는 그가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걸 알았다.

>하지만 그 뜻을 할지 못해 시선만 내리깔았다.



목소리와 함께 사라진 기억의 토막이 불현 초조해서 브루스가 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증거를 몹지 못하는 탐정이 과연 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브루스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고 있는 제이슨에게 입모양으로 묻는다.

>[바깥은 어떻게 되었니?]



제이슨은 마치 허탈한 듯, 그러면서도 묘하게 기꺼운 듯 허하고 웃었다. 이내 그는 짓궂게도 삐뚜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엉망이지."



잠시간 그의 녹음서린 파란 눈이 더없이 지지한 빛을 띤 것 같았다.

>"딴 생각 말고 여기 있어."



제이슨은 잘라 말했다. 박쥐에게 저런 운을 떼어 놓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가당하지 않은 걸 아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인과를 이긴 고집에 브루스도 조금 눈썹을 찌푸렸다.

>브루스는 스스로 답을 찾기로 한다.



브루스는 눈을 껌뻑이며 다시 잠이 드는 척을 했다. 제법 오래도록 브루스 위로 시선이 머물렀다 사라졌다. 얇은 천을 젖히고 나가니 새하얀 방이 보인다. 문은 당연히도 잠겨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열어냈다.

>이곳은 병동이다.



보통의 병원보다도 하얀 복도가 생경하리만치 깔끔하다. 묘하게 집으로 온 듯한 편안함을 주면서도 순한 양 같은 고요함이 브루스의 뒷목을 시리게했다.

>브루스는 제 스스로에게 위화감을 느낀다.



하얀 공간 속에서 브루스는 제 자신이 오점처럼 느껴진다. 자신은 병자보다도 죄수에 가깝게 생각된다. 애초에 이런 생각이 깃든 것부터 꺼림찍하다. 순간 이명을 동반한 두통이 쨍하게 머릿속을 울렸다.

>눈 앞이 하얗다.



"브루스, 괜찮아요?"

복도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어 씨근대던 브루스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다정한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팀이 염려 서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제이슨이 쓸데없는 말을 했나 해서요. 아직 목소리는 안 나와요?"

>[여긴 뭐지?] 또박또박 입모양을 만든다.



두통과 함께 조갑증이 몰려와 브루스는 자신을 다독이는 팀을 마주보았다. 자신을 찾으러 온 걸 보면 자신이 잠들었던 걸 제이슨이, 어쩌면 아이들은 믿지 않았던듯하다. 당연하지만은. 얼마간 갸웃갸웃하던 팀이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뱉는다.

>"브루스에겐 지금 아캄이 새롭겠네요."



"이제는 그냥 요양병원 같은 곳이죠. 당신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

살짝 장난기 있는 얼굴로 팀이 인상써진 브루스의 미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자신이 어떤 끔찍한 짓을 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만 든다. 그 불온한 기운을 알아챈 듯 팀이 덧붙인다.

>"이건 당신의 업적이죠."



브루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과오를 확정한다. 팀이 브루스가 이를 위해 여러 희생을 겪었고 그것이 보답받은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필히 팀의 상냥함 때문일 터였다.

>브루스의 시선이 어느 방을 향했다.



별다른 사고과정이나 추론과정 없이 이루어진 시선의 움직임이었다. 브루스의 눈이 막연히 저 끝의 방을 향해있자 그걸 예민하게 눈치 챈 팀이

"여긴 안전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을 염탐하거나 하면 안 돼요."

하고 웃음으로 조언해준다. 브루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답답하죠? 정원에 같이 갈래요?"



잠시 기다리게 한 팀은 브루스의 겉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바깥은 고담 같지 않을 만큼 청명하다. 잘 가꾸어진 정원은 전문가 손길 이상 티없이 정갈했다. 저쯤에서 밀집모자 아래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정원사가 보였다.

"궁금한게 많죠?"

같이 벤치에 앉은 팀이 브루스의 손등을 톡톡 두드린다.

>브루스가 정원사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 도시를 지키고 싶었고 결단을 내렸어요."

팀은 더없이 온화한 말투였지만 브루스는 뒷목이 선뜩해진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당신은 많은 걸 포기했으니까요."

>"우린 당신을 혼자 두어서는 안 됐어요."



나긋하던 팀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그런 두 사람의 곁으로 그림자가 하나 다가온다. 브루스의 등 뒤 가까이에 다다를 즈음 팀이 그에게 시선을 주며 반갑게 부른다.

>"딕."



"여기 있었네?"

딕은 기억 속에서처럼 명랑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바투 다가온 딕은 브루스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브루스, 기분은 괜찮아요?"

하고 묻는다. 딕이 고정한 탓에 브루스는 딕의 얼굴을 잠깐 볼 수 없었다. 브루스는 대꾸로 고갯짓만 할 수 있었다.

"나온 지 오래 되지는 않았어."

"그래, 브루스도 바람도 쐬고 그래야지."

한걸음을 움직여 브루스의 뒤에서 두 사람의 앞으로 나온 딕이 팀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맞장구를 쳤다.

>"아쉽지만 브루스 약 시간이야."



팀과 설게 작별을 하고 왔던 길을 딕과 함께 되돌아 가며 브루스는 자꾸만 뒷목이 켕겨온다.

"나랑 있는 게 불편해요?"

브루스의 상태에 언제나 민감했던 딕이 잔뜩 눈썹을 구부리고서 서운한 듯, 염려되는 듯 말한다. 브루스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브루스의 기억에서처럼 말 없는 자신의 곁에서도 반짝반짝 쾌활했다. 그에 그리움보다도 위화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잠시간 거닐었던 결과 건물자체도 소음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었지만 다시 자신의 방-병실로 돌아오니 이곳은 거의 세상과 단절된 것만 같았다. 그 묵직한 조용함이 브루스를 집어삼킬 듯 감쌌다. 막 일어났을 적에는 감각이 순응해 몰랐던 건지 방에서는 어떤 은은한 향이 새롭게 느껴졌다. 침대 머리맡에는 약과 물병, 컵이 준비되어 있었다. 딕은 브루스를 자리에 눕히고서 옆에 앉고 잔에 물을 따라 약봉지를 터서 브루스에게 건넸다.

"당신이 약 먹는 걸 볼 때면 늘 마음이 아팠는데 이렇게 되네요."

딕이 어딘가 쓸쓸하게 웃었다. 딕이 주는 약과 컵을 그저 받아만 든 채 브루스가 딕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요. 브루스 빨리 나아야죠."

브루스는 결국

>약을 입에 머금었다.



딕이 "쉬어요."라는 인사를 뒤로하고 나가자 브루스는 '나아야'하기 위해 먹는 약을 기어이 삼키지 않고 뱉어냈다. 제법 시간이 흐를 때까지 기다린 뒤 브루스는 마치 이야기를 처음 시작해야하는 등장인물처럼 복도로 나왔다. 아까 전만 해도 낮의 태양을 본 것 같았는데 어느새 불이 꺼진 복도 탓에 지금이 한밤중처럼 느껴졌다. 브루스는 논리로 귀결되지 않는 자신의 의구심에 자조하면서도 순간의 시선 끝에 걸렸던 예의 그 방 앞에 섰다. 다른 방들과 크게 다른 모양도, 표식도 없는 방 앞에서 브루스는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브루스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고 기이하게도 문고리는 잠기지 않은 채 부드럽게 돌아갔다. 어둑한 실내가 드러난다. 브루스는 그곳에

>어떤 장치가 있음을 알았다.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서 장치는 희미한 빛을 내며 일정한 진동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치 브루스의 심장박동처럼 둥, 둥, 둥 그 진동이 브루스의 몸을 뒤흔들었고 두통은 더욱 심해지며 이젠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몸이 쪼개어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저 장치에 다다라야한다고만 생각이 들었다. 저곳에 자신이 치루어야할 업보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한 발, 한 발. 브루스가 움직였고 기어이 그의 손 끝이 장치의 중심부, 빛이 새어나오는 발원점을 향해 닿았다.

쨍, 하고 쪼개졌던 세계가 급격히 맞물리는 것같은 고통이 브루스를 감쌌다. 브루스는 실재인지, 환영인지, 그도 아니면 잔상인지 모를 이가 흰 빛 너머에서 붉은 눈을 한 채 비명처럼 저주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았다. 아득하게 저 뒤에서 자신을 구하려는 손길을 인지했지만 브루스는 결국 자신이 와야할 곳으로 돌아왔음을 알았다.

"클락."

죄 많은 유령이 정인의 이름을 부른다.

[엔딩: 배회하는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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