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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른] 엽서리퀘 3건

당신을 기다리는 밤
커플링: 슈퍼맨/배트맨
for. 헤일리님

새벽의 어스름을 동쪽에서 햇빛이 들어 올릴 때면 남자는 마치 제 온몸의 혈관을 따라 잔 전기가 들끓는 듯이 간지럽게 활기가 샘솟아 이윽고 너무나도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밖에 없노라 고백했다. 어느 날인가 바지런히 출근을 준비하는 클락이 얄미운지 야속한지해서 졸음이 퉁퉁 부어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브루스가 심통을 부리자 커튼을 잘 닫아주며 속삭여주었던 말이었다. 이 태양계의 노란 태양이 저물지 않는 한(어쩌면 설령 이 항성계가 망한다고 해도 다른 항성의 광선이 또 그와 비슷한 역할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클락은 그가 지치다고 인지했든 말았든 늘 에너지로 가득 차있을 테다. 그것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부러웠던 적이 없었노라고 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해마다 늘어지는 몸뚱이를 그러모으고 진득하니 묻어난 피로로 말미암은 편두통을 떨어트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브루스로서는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걱정 또한 되는 것이다. 고담이 가당 어둑해질 시간을 앞두고서 스몰빌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 브루스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범죄와 그로 시작된 비극들이 스쳐지나갔다. 이렇게 브루스의 뇌리에 마치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마냥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한 상태로 놓인 가능성은 슈퍼맨에게는 언제나 관찰을 통한 고정상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이따금 그런 날이 있다. 극심한 불행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적의, 시시껄렁한 악담, 자잘한 시기와 약간의 불운이 차곡차곡 쌓여서 견딜 수 없이 살아가는 힘을 갉아먹는 때가. 그 해밝은 클락 켄트에게도, 슈퍼맨에게도 물론 말이다.

브루스는 추위도 무시한 채 멀거니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 별들을 해치고 돌아올 남자를 기다렸다.

“클락.”

브루스의 숨이 하얗게 덩어리진 뒤 바람을 따라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느새 클락이 유니폼도 갈아입지 않고 날아들어 브루스를 절박하게 끌어안았다. 굳이 어둠 속에서도 자신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힘을 주어 브루스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어깨에 이마를 묻은 클락을 브루스는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별의 냄새가 남은 남자를 밤처럼 감추었다.

 

 

 

그대는 귀여운 나의 검은 고양이, 새빨간 리본이 멋지게 어울려
커플링: 슈퍼맨/배트맨
for. 빙수님
리퀘스트: [멍숲냥뱃/꽁냥꽁냥]

평소 매끈한 꼬리를 나른하게 까딱하거나 곱게 갈무리하고 있을 브루스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채 제 꼬리를 세차게 팡팡 바닥에 내리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덩치 큰 개가 물고 온 빨간 천때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엄니를 드러내 보이며 큰 소리로 햐악하고 사자후를 뱉었다.

[많이 싫어? 별로야?]

이걸 보라며 반짝이는 눈으로 리본을 물고서 의기양양하게 빠른 속도로 날아온 클락은 심상찮은 브루스의 반응을 보고는 처량하게 코를 끙끙 울렸다. 클락의 불쌍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져 더 화가 돋은 건지 브루스는 아예 앞발로 맹렬하게 빨간 천을 저만치로 날려 보내고서 팩하니 돌아앉아버렸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앞발을 곱게 핥으며 몸단장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어린 새도 기겁할 법한 커다랗고 빨간 리본을 가지고 와서는 자신과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다짜고짜 매주려 드는 것이 어엿한 신사 고양이이자, 밤을 가르는 맹수인 배트냥으로서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클락은 브루스가 저 만치로 날려 보낸 리본을 도로 물고 오며 낑낑하고 슬피 울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브루스가 발톱을 빼내어 쳐낸 것은 아니어서 어디 상한 곳은 없었다. 까맣고 윤기 나는 털을 가진 브루스가 이 빨간 리본을 매어준다면 너무나 잘 어울릴 거라고 클락은 확신했다. 덧붙여 자신의 빨간 망토와 한 쌍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클락은 포기하지도 못 하고, 밀어붙이지도 못 한 채 무심하게 그루밍을 하는 브루스의 등 뒤에서 발만 굴렀다.

타박타박 클락이 애꿎은 앞발만 어쩔 줄 모르고 제자리걸음하는 소리를 들은 브루스는 귀를 옴찔 털며 한숨을 푹 쉬었다. 개들은 다 저렇게 미련하고 귀여운 걸까. 브루스는 탱, 하니 한 번 꼬리를 세차게 내리친 뒤 새치름히 뒤를 돌아 꼬리도 귀도 얼굴도 축 늘어뜨린 클락을 야옹 하고 불렀다.

[어디 줘 보든가.]

클락이 눈동자를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만큼 반짝이며 꼬리를 바삐 내저었다. 거의 브루스의 얼굴만한 리본을 목에 매니 역시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어서 역시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한편 신나게 날아다니는 슈퍼멍의 망토가 생각나 아주 싫지는 않아서 브루스는 뚱하니 싱글벙글한 클락의 콧등을 제 꼬리로 가볍게 톡 때렸다.

 



 

당신과 나, 그리고
커플링: 제이슨/브루스
for. 루님
리퀘스트: [슨뱃/임신초기 브루스/셀렘과 조마조마 두근거림 공유]
섹스 피스톨즈 AU

제이슨은 멍한 머리로 제 허벅지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하얀 솜뭉치, 아니 고양이를 세상 섬세한 무언가에 닿듯이 조심히 쓰다듬었다. 보통 때였다면 등만이 아니라 배 여기저기도 뒤적거리며 쉬이 보여주지 않는 남자의 혼현을 귀여워했을 테지만 제이슨은 그저 조심, 또 조심하고서 암모나이트 형태를 그리는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따금 그가 잠결에 골골대는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어느 정도 의식이 있는 상태였더라면 브루스는 혼현을 아예 내비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귀와 꼬리만 드러내거나, 보다 더 드물게는 커다란 설표의 모습을 할 테지만 마음 속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잠을 잘 때면 그는 마치 그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로 회귀한 듯 작은 고양이의 모습을 했다. 조그마한 고양이는 제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에도 배가 올록볼록해졌다. 아직은 전혀 티가 나지 않지만 몇 개월쯤 지나면 그가 아닌 다른 생명체가 그리는 움직임도 이 배에는 나타날 테다.

임신이라니, 제이슨은 새삼 곱씹으며 제 얼굴 위를 마른세수를 하듯 양손으로 쓸었다. 물론 제이슨과 브루스 사이의 임신은 철저히 두 사람이 의도하고 계획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중종의 고양이인이었고 자신은 라자러스 핏에 의해 부활한 뒤 형질이 발현한 선조귀환의 견신인이었으니 둘 사이의 임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바란다면 제이슨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브루스가 제 아이를 가져주었으면 했고 브루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뿐인 일이라고 제이슨은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 그게 정말로, 이렇게 진짜로 브루스가 임신을 하게 되다니. ‘좋은 아빠가 될게.’ 임신 사실을 덤덤한 얼굴로 말하는 브루스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서 그의 허리에 매달려 엉엉 울며 제이슨은 간신히 이야기했다. 태어나게 될 그와 자신의 아이는 브루스와 같은 비극도, 제이슨과 같은 배신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꼭 반드시 그랬다.

제이슨이 문득문득 찾아드는 긴장감에 애꿎은 주먹만 쥐락펴락할 즈음 하얀 고양이의 귀가 움찔 떨리더니 곧 제이슨의 허벅지를 베고서 깜빡 잠이 들었던 남자가 눈을 떴다. 그의 시린 눈이 완전히 드러나자 남아있던 귀와 꼬리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것을 조금 아깝게 바라보다 제이슨은 그가 추울까 싶어 얼른 이불을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제이.”

브루스가 나직이 제이슨을 부르자 그는 갑자기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그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 브루스가 웃었으니, 아마도 그게 정답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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