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va 앱을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2020년 할로윈 기념 엽서리퀘입니다. 기다려주셔서 고마워요😘💕
1. I Hate You, You Hate Me.
리퀘스트: [너는 날 좋아하지 않잖아, 안 그래?]
어린이 할뱃 AU
아이들의 왁자함과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끝난 운동장은 조금은 쓸쓸해 보일 정도로 조용했다. 아이 두 명이 시간 뒤에 남아 운동장 위를 굴러다니는 매트며 공을 치우고는 있었지만 그 둘이 퍽 데면데면한 거리에서 한 마디 이야기도 없이 심통 맞은 얼굴로 꾸역꾸역 돌아다닐 뿐이어서인지 더더욱 그랬다. 할은 제가 주워서 수납통에 넣어야할 소프트볼을 무성의하게 팡 하니 차서 운동장 가장자리로 굴려 보냈다. 저쯤에서 발야구 때 사용한 매트를 치우는 중인 브루스는 할이 한 행동을 알아차린 듯 했지만 그저 귀찮은지 제 할 일에만 코를 박고 있었고 할은 힐끗 쳐다본 시선으로 그것을 알았다. 할의 눈썹이 잠깐 매섭게 치솟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걷어차 버린 공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어서 할은 터덜터덜 저쯤으로 따라 나서야만 했다.
할은 브루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잣집 도련님이란 점이 그랬고, 보기만 해도 발이 답답해지는 윤나는 구두나 흙먼지를 모를 것 같은 가리비 손톱과 햇빛 냄새가 나지 않는 허연 뒷덜미 같은 것이 그랬다. 그리고 또래 아이인 주제에 삶을 두 번이라도 살았던 양 풍파서린 행동들이 그랬고, 입을 열면 바른 말이라지만 절대 곱지 않은 말씨도 그랬다. 브루스가 어떤 일을 겪었었는지는 할을 비롯한 이곳에 지내는 아이들 거의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홀(Hall)에서 공부하는 애들은 사연 한 자락 없는 아이가 없으니 할이 생각하기에 브루스가 굳이 저렇게 뾰족하게 행동할 필요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입고 있는 셔츠에는, 어쩌면 양말 한 짝조차도 구김이 없는데도 정작 제 이마에는 항상 꾸깃하니 주름을 잡고 있는 이 도련님이 할은 못내 밉살스러워서 곧잘 시비를 걸고는 했다. 절대 이 브루스 웨인 싹퉁바가지가 싹퉁바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제법 인기가 좋다는 게 아니 꼬아서는 아니었다.
오늘은 생일 순으로 매겨진 출석번호 탓에 브루스와 당번을 서게 된 그런 애석한 날 중 하나였다. 같이 당번을 서게 되었으면 좋건 싫건 서로 이건 너가 하고, 이것도 너가 하고 같은 말 두어 마디 쯤 나눌 법도 한데 브루스는 할이 있건 없건 개의치 않는 것 마냥 야 하고 부르는 한 마디 없었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홀수번호와 짝수번호로 팀이 나뉘어져서 피구 경기를 하게 되었을 때 할은 매우 영광스럽게도 저쪽 팀에서 뛰어다니는 브루스를 향해 마음껏 공을 던지는 것이 가능했다. 희멀건 도련님이 하는 것치고는 브루스가 용케 공을 피하거나 잡거나하는 것을 보면 할의 오기가 용솟음쳤고, 저 영리한 머리가 할이 저를 타깃으로 공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뚱하던 얼굴에 점점 독기가 오르는 것을 보면 어떤 통쾌함과도 같은 것이 할의 허파에 차올랐다.
피구가 거의 할과 브루스의 일대일 싸움이 되어버리고 서로를 빗나간 공에 무고한 아이들 몇몇이 수비로 빠져나갔을 즈음 할은 온 힘을 담아 아까 받아낸 공을 브루스를 맞히기 위해 던지려다 그만 발이 꼬이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할이 던진 공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3cm 정도 동쪽으로 비끼게 되었고 그 결과 공을 잡으려다 손에서 놓쳐버린 브루스가 아웃되었다. 저 새침데기의 얼굴에 한 방 먹여주지 못 한 게 조금 아쉽고 어딘가 요행으로 이긴 것 같은 느낌도 없잖아 들었지만 할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서
“예——————쓰!”
하고 크게 소리쳤다. 수비팀 쪽에 서있는 배리가 팔로 엑스 자를 만들어 보이건, 조용하라는 듯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건 간에 이번 승리를 할은 후련하게 만끽해야했다. 할은 비록 취사선택에 의하기는 했지만 무언가에 잘 몰두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제 세리머니를 선보이느라 자신의 팀 수비 쪽으로 걸음을 옮겼어야할 브루스가 두 팀을 나누는 선을 넘어 제 근처로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한창 올리버와 존 앞에서 요란스럽게 떠들며 뽐내던 할은 제 무릎 뒤를 누군가가 매섭게 걷어차자 대비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져버렸다. 할의 세상이 한 번 빙글 돌았다. 놀라서 아플 저를도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운 채 하늘을 보면 매우 분명하게 심술을 드러낸 파란 눈동자가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할은 잠시간은 하늘과 브루스의 눈 사이에서 헤매다가 퍼뜩 저도 눈에 날을 세웠다. 왜 날 그렇게 봐? 피구 중에 공을 던진 게 잘못은 아니잖아! 할은 떳떳했다. 떳떳하고 또 떳떳했다. 그렇다면 굳이 걸려온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할은 벌떡 일어나서 어느새 등을 돌리고 아무 일 없었던 양 걸어 나가버리는 브루스의 어깨를 잡아챘고 그 결과 두 사람은 단 둘이 남아 운동장에 너부러진 체육 도구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할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 시네스트로 선생님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며(“쟤가 시비 걸었어요!”) 항의했지만 한 마디만 더 했다가는 방과 후에 반성문을 쓰게 하겠다는 으름장에 입을 오리주둥이 마냥 길쭉하게 내민 채 뭉그적뭉그적 아이들이 다 떠나간 운동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살가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지만 못해도 니가 잘못했네, 나는 잘못 없네 하는 식의 실랑이는 있을 줄로 알았던 할은 운을 떼어보려 부러 “아, 진짜 뭔데!”하고 큰소리를 내뱉었지만 유일한 대화 상대인 브루스가 눈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아 할도 결국 단호하게 제 입술을 걸어 잠그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쯤(한 5분 정도) 묵언수행을 마냥 하자니 할의 까맣게 된 마음속에서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반짝였다. 도대체 자신은 무엇 하러 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다크사이드의 모근만큼도 보이지 않는 녀석을 상관하려 할까? 그때 그 시간, 그 사건하고 할이 브루스랑 얽혔던 갖갖은 일들을 떠올려보면 그 기억의 끝에 남는 것을 잘나신 도련님의 아니꼬운 시선뿐이었다. 그랬는데, 그래왔는데 도대체 해럴드 조던은 입때 정성껏 뭐하는 짓일까. 할은 매트를 전부 걷어다 비품 창고에 들어가는 브루스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매섭게 콧방귀를 픽 치고서 다신 자기도 저 재수탱이와는 상관하지 않겠노라며 다짐했다. 전의를 다잡으며 걸어가자니 절로 걸음걸이가 위풍당당해진 할은 비록 성의 없이 질질 끌어온 수납통이 창고 문이 계속 열린 채로 두기 위해 받쳐둔 야구방망이와 부딪치며 그때 넘어진 방망이에 발등이 쾅 찍혀 눈물이 찔끔 났지만 어쨌든 결심만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이정도 소란이 제 등 뒤에서 난다면 빈말이라고 괜찮냐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한데 별 말이 없는 브루스가 고까워도 이렇게 고까워 보일 수는 없어서도 그랬다.
보무당당하게 할은 창고 내부로 들어섰다. 그런 할을 따라 불어 들어온 바람이 타이밍 맞추어 쾅하고 창고의 문을 닫았다. 창고는 금방 어둠 속에 잠겼다. 할은 끌고 들어온 통을 저쯤으로 밀어놓으며 벽을 더듬어 전등불을 켜려고 했지만 달칵 소리만 공허하게 들릴 뿐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할이 하는 수 없이 바깥 빛이라도 끌어오기 위해 창고 문고리로 손을 뻗으려고 하면 그 새까만 어둠 속에서도 어떻게 길을 찾았는지 이미 브루스가 안달난 사람 마냥 급하게 문손잡이를 잡아 뽑을 듯이 덜걱덜걱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문은 철컹철컹 시끄러운 소리만 크게 울릴 뿐 열리지 않았다.
“뭐야, 너 문도 못 여냐?”
분명 어둠에 당황한 브루스가(할은 이따 아이들 앞에서 쩌렁쩌렁 이야기할 거리가 하나 생겨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밀어서 열 것을 당겨서 열려고 했든, 아니면 이 삐쩍한 도시 도련님이 제 힘도 제대로 못 쓰고 있든 한 것일 게 뻔했다. 할은 당당하게 브루스 옆에 다가가 힘껏 문고리를 돌려 문을 밀어보였다.
“어?”
하지만 문은 요란하게 덜컹거릴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명 문이 바깥으로 열려서 받쳐져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눈을 굳이 껌뻑인 할은 혹시 잘못 보았나 싶어 반대로 문을 당겨 보았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또 그렇게 몇 번을 밀고 당기고, 심지어 미닫이 문 마냥 끌어보기도 했지만 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할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고장 났어. 전에 스트레인지 선생님이 말했잖아.”
“뭐?!”
사위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으로 할은 대충 브루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에 브루스는 아까 재빨리 문고리로 다가가 문을 열려했던 것 답지 않을 정도로 덤덤하게
“우리가 여기 있는 건 반 아이들이나 선생님 모두 아니까 계속 돌아가지 않으면 찾으러 올 거야. 괜히 힘 빼지 마.”
라 말했다. 제법 희망적인 말이었음에도 할은 그런 얘기를 저렇게 얄밉게 말할 수 있다는 데 조금 감탄까지 했다. 아니, 짜증이 났다. 도대체 얘는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나한테 이러지? 클락이나 다이애나랑은 그럭저럭 잘 지내잖아. 배리랑도, 올리랑도... 트집에 가까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지금 할은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이 되었다. 할은 컴컴한 실내의 어둠을 기회삼아 인상을 벅벅 긁었다. 힘 빼지 말라니 그 잘난 말 들어나 주자 싶어 풀썩 주저앉으며 할이 큰소리로 툴툴거렸다.
“안됐네, 도련님. 너 나 안 좋아하잖아. 안 그래?”
눈이 분간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을 텐데도 할은 쓸데없는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할은 자신이 한 말이 너무나 창피하게 생각이 돼서 애꿎은 제 입술만 질근 씹었다. 이젠 정말, 진짜로 신경 안 쓸 거야. 쟤가 뭘 하든 나랑 상관없어 등등의 말을 되뇌며 저 까만 어느 매를 할은 고집스레 노려보았다. 브루스는 아까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다시 별 다른 말이 없어졌다. 스스로 이야기했듯 ‘힘 빼지 말고’ 가만히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할은 브루스가 보기 싫어서 이미 어둠이 자욱한 창고 안에서조차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그렇게 새까만 우주와 같은 공간 속에서 어렴풋이 사물의 윤곽이 보일 즈음이었다. 색색하니 숨을 뱉는 소리가 조금씩 커져서 할은 제 분을 잊어버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보면 어둠 속에 작은 공처럼 몸을 웅크린 브루스가 흐릿하게 보였다.
“야, 어디 아파? 무서워?”
할은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물었다.
“안, 무서워. 무서운 거 아냐.”
반면 브루스의 대답은 고집스러웠다. 할의 부름으로 제 상태를 자각한 것인지 숨을 억누르려는 브루스는 조금 씨근거리기는 해도 금방 큰일이 나거나 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할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이어 물었다.
“너 흡혈귀나 그런 거로 변하려는 거 아니지?”
브루스 가까이에 엉덩이를 붙여 앉자 브루스가 발 옆을 할의 발에 살짝 부딪쳐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딱히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아서 그 정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때 할의 머릿속에 주머니에 부적으로 담아놓은 장난감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어느 나라를 비행하러 갔던 아버지가 가져온 초록불이 들어오는 반지였다.
“이거 봐봐라?”
할이 천장을 향해 불을 켜면 초록빛이 반지 내부에 그려진 황도12궁을 반짝이게 했다. 폐쇄감 마저 들던 작은 공간은 제법 그럴싸한 플라네타륨이 되었다.
“멋지지?”
할이 씩 웃으며 브루스를 보면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위를 올려다보던 브루스가
“궁수자리랑 전갈자리가 반대야.”
하고 여전히 미운 소리를 했다.
“너 진짜 재수 없어.”
할이 주저 없이 그런 브루스를 욕하니 브루스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웅크린 자세가 풀어지지는 않았지만 브루스는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듯이 느껴졌다. 초록빛을 받고 있는 창백한 얼굴이 밉살맞은 말을 했어도 흥미로운 듯 반지가 만들어낸 작은 우주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클락과 다이애나가 어른들과 찾아오기까지 브루스와 가상의 우주에 앉아서 점점 차분해지는 호흡소리를 들으며 할은 제 가슴이 두근대던 걸 그만 신경 쓰지 못 했다.
2. 과실(過失)의 과실(果實)
리퀘스트: [수확철/‘이 과일 맛있다. 어디서 샀어?’,
‘내가 기른 거야.’,‘그렇구나.’, ‘너 안 믿지?’/ 과일 먹으며 장난]
스펙터 할/나이든 로드뱃
아직은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볕이 벌새마냥 나이든 목덜미를 따갑게 콕콕 쪼았다. 맹인이 되었다고 바깥에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듯 브루스는 새까만 시야로 자신을 꾸짖고 있을 한낮의 흰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시신경의 끝자락까지 광선에 타 없어져버린 눈구멍으로는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높은 가지에 달린 나뭇잎 사이로 걸러져 떨어지는 조각난 빛이 간지러운 것은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감촉으로마저 전환되는 감각은 워낙에 강렬한 것이어서 브루스는 덩달아 가려워지기 시작한 제 눈두덩 탓에 다시 얼굴을 바르게 했다. 브루스는 최대한 대기의 움직임에 한가득 실려 오는 과실의 다디단 내음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그 기체의 운행을 통해서 브루스는 새까맣게 덧칠된 세계 속에서 뭉뚱그려진 형체들을 분간해 나갔다. 그렇게 건져낸 형체와 형체들이 브루스의 허리춤에 찬 바구니에는 몇 알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제법 굵은 사과들로 데룩하니 남아서 그의 움직임을 따라 굴러다닌다. 그러다 브루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브루스 웨인.]
브루스가 가진 허공 전체를 튜바처럼 흔드는 음성이 마치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것처럼 들려왔다. 가브리엘의 계시마냥 뜬금없고 무시무시한 울림이었지만 브루스는 그 목소리를 확인하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제 앞에 손을 뻗어 끝에 과실이 단단하게 잡히자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묵은 가지에서 잘 익은 사과를 툭 따낼 뿐이었다. 따낸 과일을 바구니 안으로 무심하게 툭 떨어트린 브루스는 무시라 해도 좋을 만큼의 태연함으로 과수들 사이로 성큼 들어섰다. 어차피 어느 곳을 향해 가든 머리위에 떠오른 하늘의 눈을 피할 수 없듯이, 자신이 지은 과오를 피해갈 수는 없을 테니까.
“야.”
그런 브루스를 이번에는 낡은 친우의, 빛바랜 연인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브루스는 비록 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확신하고서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브루스의 옆에서 아지랑이마냥 일렁이던 무언가가 질량을 가지고, 형체를 가지고 사뿐히 제 곁에 내려서는 소리가 들렸다. 해묵은 잎과 굳세게 돋아난 잡초가 오랜만이 중력에 이끌린 발아래 사박사박 밟혔다.
“낫은 챙겨왔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해를 묵을수록 날이 서는 배트맨의 목소리는 반가움보다야 아니꼬움에 가깝게 들렸다. 어떤 그리움도 정다움도 발견하기는 어려웠지만 할은 그만큼 그가 건강하다는 의미이겠거니 싶어 브루스가 들을 수 있도록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그 곁으로 한 발짝 가까워졌다.
“내가 무슨 그림 리퍼라도 되는 줄 아냐?”
할은 제가 웃고 있는 입 꼬리가 브루스의 마른 뺨에도 느껴질 정도로 꾸욱하니 도장 찍듯이 뽀뽀를 했다. 볼 한쪽이 짓눌린 브루스는 잿빛 눈썹을 꾸욱하니 불만스러운 것처럼 구겼지만 흥 하니 코웃음만 칠 뿐 별 다른 말은 없었다. 적어도 뽀뽀에 대해서만큼은.
“크게 다른 게 있던가? 아, 그쪽이 좀 더 게으르시던가.”
수확철이 지난 것들이 오래되어서 썩어 굴러다니니, 하고 브루스는 보이지 않으면서 무엇으로 알았는지 이미 너무 익어 말라 상하기 시작한 사과 한 알을 툭 따서 땅 아래 거름으로 무겁게 떨구었다. 흙먼지 속에 얼마치 나뒹굴다 멈추는 과실을 할은 조금 쓰게 웃으면서 보다가 눙숙하게 나무에서 사과의 알알을 골라내고 있는 브루스에게로 다시 시선을 줬다. 할이 기억하기보다도 체구가 훨씬 작아진 것 같은 그는 그럼에도 얼굴에 젊을 적 고집을 버리지 못한 짙은 흔적들을 드리운 채 바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이거 진짜 네가 기른 거야?”
“‘이곳’에 나 말고 누가 있지?”
“혹시 알아? 네 그 잘난 배트- 뭐시기나, 무시무시한 니 회사 자산이라던가 그런 게 한 걸 수도 있잖아. 아니면—”
“언제 적 이야기를 하지, 조던?”
자신의 농담이 번번이 처참할 만큼 저 땅바닥으로 내던져졌지만 그럼에도 할은 그저 즐겁다고 웃었다. 할은 브루스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에서 잘 익은 사과 한 알을 쏙 빼내서 제 점퍼 바깥에 설게 닦은 다음 아삭 하니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네.”
사박사박 물이 잘 오른 과실을 냠냠 씹어 삼키며 할이 말했다. 그에 잠깐 브루스가 멈칫 하다가 비어있는 시선을 할 쪽으로 돌리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냥 먹나?”
“왜 농약 쳤어?”
브루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경계하듯 곁눈질로 그 차분한 얼굴을 훑는 중에도 할은 사과가 정말 맛있었는지 다시 사각하고 한 입 크게 베어 우물우물 씹었다. 그리고 할이 꿀꺽하고 목을 울리며 음식물을 삼키자 마치 그때를 노린 듯 브루스가 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약을 안치니 벌레가 들었을 텐데...”
“엣퉤퉤.”
브루스가 눈이 보이고 않고는 잊어버린 채 할은 떨리는 눈으로 연노란 빛으로 물이 오른 속살을 들여다보았지만 할의 가지런한 잇자국이 난 그곳에는 다른 생물체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할은 제가 잡고 있는 사과 알을 요리조리 살펴보았지만 벌레가 파먹고 들어간 흔적은 따로 없었다. 할이 어떤 동작을 했고, 표정을 지었는지 브루스는 보았을 리가 없는데도 내내 무표정하거나 조금 심통 맞아 보이던 브루스가 풋 하고 숨을 터뜨리더니 큭큭 하고 목 뒤로 삼켜 웃었다. 얄미울 정도로 듣기 좋은 소리라 할이 저도 모르게 바락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야!”
“하하하,”
기어이 브루스는 소리마저 크게 내어 웃고 말았다. 마치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굳게 끼였던 주름마저 순하게 펴고서 웃는 브루스가 정말로 즐거워 보여서 미워하지도 못 한 채 할은 구시렁구시렁 대며 남은 사과를 아삭아삭 먹어치웠다. 여전히 브루스는 자꾸 짓궂게 꼭 파먹고 들어간 게 아니더라도 열매를 맺을 적부터 안에 들어가서 살고 있던 벌레도 있었다는 둥, 자기도 얼마 전 한 알을 생각 없이 먹었다가 이물감이 느껴졌던 적이 있다는 둥, 곤충은 꽤 합리적인 식량 자원이니 그리 걱정할 건 없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지만 할은 그저 뾰족하게 눈을 뜨고서 브루스더러 들으라는 듯 버릇없이 사과를 야무지게 씹어 물었다. 그즈음 브루스의 웃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할이 투덜거렸다.
“넌 날 놀리는 게 좋냐?”
“싫은 기분은 들지 않는군.”
끼고 있던 면장갑을 벗은 브루스가 허공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면 할이 그 손을 건져서 제 어깨를 짚게 하며 보다 그가 자신에게 키스하기 쉽도록 자세를 맞춰주었다. 브루스는 마지막에 남았을 과거 한 장면 속의 동작을 따라 입술을 맞추었다. 아직 사과의 풋풋한 단내가 남은 구강 안이 달아서 마른 혀가 살짝 아려와 브루스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브루스가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은은하게 온기가 남은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훔쳐보았다. 마치 제 손끝으로 볼 수 없는 그 모든 형상들을 되 그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래서 할은 다시 그 손을 잡아서 그가 제 얼굴을 만지게 했다. ‘영(靈)’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자신과 다르게 나이를 먹지 않은 매끈한 얼굴이 얄궂을 만큼 브루스의 지문 아래로, 그의 남은 신경 위로 아로 새겨졌다.
“조만간, 너에게 다시 올 거야.”
할이 브루스와 이마를 마주하며 그의 입술 앞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로드슈퍼맨에 의해 안구와 시신경이 불타 없어져버린 그는 텅 비어버린 눈을 얇은 눈꺼풀로 감추면서 신을 떨어트릴 속내마저도 긴 세월 간 감추었다. 지구라는 한 행성을 독재하는 것보다도 훨씬 괘씸하고 용서받지 못할 계획을 가진 남자는 이 고즈넉한 과수원에서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나이 들어갔다. 모든 죄가 달게 익을 때까지, 붉은 눈이 스스로의 자아를 가지고 떠오를 때까지.
할은 자신이 브루스를 찾아올 일이 이대로 영영 없었으면 했지만 이 눈앞의 편집증자는 그런 할의 바람을 결코 들어주지 않을 테다. 아니나 다를까, 할의 말에 브루스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게 해사한 미소를 입에 물었다.
“그때는 늦지 말라고.”
심판자는 죄인의 고해를 묵묵히 들으며 그를 축복하듯 입을 맞췄다. 수확철이 한창인 과실이 저 어느 가지에서 스스로 툭 떨어지는 소리를 두 사람은 들었다.
Attire
[늙숲늙뱃/데이트/주름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한가롭고 느긋]
제 비욘드 늙숲늙뱃의 이야기 흐름들과 같이합니다.
“에이스는 좋겠네~ 브루스랑 맨날 산책가고~”
벽난로에서 쏟아지는 빛을 쬐며 나른하게 배를 보이고 있는 그레이트데인 앞에 커다란 몸을 구겨 앉은 클락이 개의 몸 곳곳을 정성껏 빗질해 묵은 털을 거두어내며 가벼운 리듬마저 붙인 채 속닥였다. 뜨뜻한 볕을 받고서 한껏 노곤노곤해져있는 개에게 정감을 담뿍 담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클락의 말투는 딱히 시샘이랄 것도 한탄이랄 것도 없이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브루스가 내는 모든 기척에 대해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귀 기울이고 있을 저 능구렁이가 혹시 저보고 들으라 한 소리인가 싶어 열린 문 옆에 몸을 기대고 지팡이에 무게를 분산하여 삐딱하게 선 채 노려보아봤지만 마음껏 그리고 양껏 긁어모은 털들을 둥글게 뭉치며 저를 향해 고개를 들고서 방긋 웃은 클락의 얼굴은 그저 해맑기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제법 약은 구석이 생겨버린 남편이 혹시 저것조차 일부러 하는 건가 싶어서 브루스는 눈썹을 보다 찌푸린 채로 클릭아 아까 에이스에게 조잘거린 말에 대해 설명할 것을 눈빛으로 다그쳤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클락은 개인지 곰인지 구별이 애매한 형태로 뭉친 에이스의 털 덩어리를 들어 보이며
“브루스~ 이거 봐라~ 강아지!”
제 실력을 우쭐거릴 뿐이었다. 때문에 브루스는 조금, 아주 조금 죄책감 어느 매의 것을 느끼고 말았다.
외관부터 고풍스럽게 차려진 도심에 위치한 맞춤 옷가게를 올려다보며 클락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하니 벌리고 말았다. 전문 재단사가 있는 부티크를 이전에 클락은 결혼 턱시도를 맞추기 위해 온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결혼’이라는 일생에 있어 제법 큰 이벤트를 이유로 한 방문이어서 그랬는지, 또 정신이 없었던 탓에도 크게 위축되지 않았지만 이런 아무런 날도 아니고, 이유도 없는 때에 발을 들이자니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클락이 자꾸만 뒤를 돌아서 그를 바라보건 말건 브루스는 요원에게 발레파킹을 부탁하며 제가 손수 몰고 온 차를 넘기고 이런 장소에도 주눅이 들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잘난 차림새로 주저 없이 가게로 다가갔다. 지팡이를 짚고서 걷는 그의 걸음이 그리 빠를 리는 없을 텐데도 클락이 조금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저만치로 가버린 것으로 보였다.
클락은 직원이 지탱해주는 유리문 앞에서 잠잠히 자신을 뒤돌아보고 있는 브루스가 몸을 돌려버릴까 싶어 허둥지둥 조마조마한 걸음걸이로 따라 가게로 들어갔다. 예민한 그의 청각에 찰칵하고 그렇게 퇴물이니 뭐니 떠들어대면서도 이 도시의 오랜 유명 인사를 잃지 못하는 파파라치 하나가 터뜨리는 플래시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클락은 이미 닫힌 문을 돌아보며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심 한복판에서 브루스를 자신이 뒤따라와도 됐던 것인지 클락은 괜스레 불안해졌다. 결혼 예복을 맞출 때조차 클락은 브루스와 같이 들어가지 못 했고, 그 브루스 웨인이 클락 켄트라는 시골 출신의 전직 기자와 그들과 그들의 친구 몇몇만이 알 수 있었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어느 할리퀸 소설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를 이 도시의 주민들은 아직 알지 못 한다. 자신이야 브루스의 안전을 위해서 그가 슈퍼맨의 남편이라고는 말하지 못 하겠지만(물론 그런 이유로 브루스를 숨기려 든다면 자신이 먼저 배트맨에게 죽겠지만 말이다.) 브루스가 이제는 싱글남이 아닌 어엿한 클락 켄트의 남편이라고, 임자가 있고 임자인 유부남이라고 세상 방방곡곡에서 알아주었으면 했다. 다만 브루스는 천성인지 직업이 그래서인지 잔걱정이 많은 편이니 그걸 굳이 강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머뭇머뭇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클락의 등을 클락에게로 몇 걸음 되걸어온 브루스가 툭툭 두드렸다
“음...”
클락이 뭐라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애매하게 찌푸린 얼굴로 저 바깥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런 클락의 망설임을 흥 하고 콧바람 하나로 날려버린 브루스는 남편의 손을 잡아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버릴 뿐이다. 클락은 제 남편이 배트맨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그제야 굳은 발을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네킹에 진열되어 있는 의복의 색상을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돋보일 수 있도록 고안된 따스한 조명 아래서 브루스는 의자에 앉아 레몬차를 홀짝이며 이따금 옷을 골라 입고 나오는 클락을 마치 제왕처럼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맞춤옷이 아니라 가게에 진열된 프레타포르테 종류에서 옷을 몸에 잘 맞게 간단한 수선정도만 하여 구매할 거라기에 가볍게 생각했던 클락은 자신에게는 브루스와 공유할 만한 어떤 미적 감각이 플라즈마의 세계만큼도 없는 것인지 싶어서 약간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한동안 브루스는 클락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클락에게 원하는 걸로 골라보라 하고서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를 보고 있었다가 클락이 체크무늬 스카프를 목에 두르는 걸 보자마자 옆에 세워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더니 테일러에게 이것저것을 가리키며 직접 클락을 두고 코디하기 시작했다. 가격표는 애시당초에 붙여놓지 조차 않은 옷의 금액을 상상하며(남편이 브루스 웨인이면서도) 클락은 거울 앞에서 매무시를 하는 중에도 옷을 입고 있는 자신보다 옷 자체만이 눈에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와중에도 옷들의 입음새는 또 어찌나 그렇게 하나같이 잘 떨어지던지... 클락은 이제 슬슬 자신이 입어 본 옷들 중에서 아무 거라도 브루스가 빨리 마음을 정해서 이 자신이 옷을 입는지, 옷이 자신을 입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공간을 벗어날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 브루스가 입은 몸의 선에 반듯하게 맞아 떨어지는 코트라던가, 어디에 선보이고 싶은 건지 깔끔하게 재킷의 앞주머니를 장식한 푸른 행커치프와 셔츠 가터로 반듯이 정돈한 매무새 같은 것이 생각나서 이 정도는 차리고 있어야 아까처럼 저 먼 곳에서 셔터 소리가 들리더라도 조금은 덜 켕길 수 있을까도 싶어 클락은 조금만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브루스의 마음에 조금은 찰까, 자신이 하기에는 화려한 무늬가 들어가 있는(이건 되는데 체크무늬가 안 되는 건 또 왜일까?) 다소 널따란 넥타이를 매만지며 클락은 늑골 안에 잔뜩 바람을 들여 넣고서 피팅룸의 커튼을 젖혔다. 차르륵 하고 금속 위를 구르는 소리가 나면 클락이 바로 보일 수 있는 곳에 지루한 기색 없이 그저 평온하게 앉아있는 브루스가 보였다.
“어때?”
클락이 어색하게 웃으며 짠 하니 제 양팔을 펼쳐보였다. 브루스는 별 말이 없었지만 그의 희푸른 빛 눈동자가 잠깐 반짝이듯 커진 다음 미세하게 사르르 접혔다. 마음에 들었구나! 거의 본능에 가깝게 제 남편의 의중을 알아차린 클락이 작은 웃음에도 전염된 듯 방긋 웃었다. 브루스가 지팡이는 옆에 그대로 둔 채로 아주 천천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면 근섬유의 아주 조그마한 움직임이나 떨림 같은 것이 클락의 귀에는 들렸지만 이때 곧장 달려나가 배트맨을 부축한다는 매몰찬 짓은 하지 않는다. 대신 클락은 느리지만 그만큼 공을 들이고 있을 브루스의 말끔한 동작 하나하나를 그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서서 기다렸다. 브루스의 성마른 성질에 제 마음대로 그저 몇 걸음조차도 나가기 힘든 것이 유쾌할 리가 없을 텐데도 브루스는 조금도 구김살 없이 움직였다.
브루스가 클락이 서있는 곳 바로 앞으로 왔고, 피팅룸과 외부와는 계단 한 칸 정도의 단차가 있어 그는 클락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클락은 지금 이 구도가 마치 결혼을 앞에 두고 예복을 입고서 배우자에게 선보이고 바라볼 때 나오는 것과 같이 느껴져서 이미 두 사람의 손에 끼어진 반지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사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 챈 듯 그 떨림에 맞추어 브루스가 매우 부드럽게 웃었다. 계획된 것이었을까? 물론 그렇겠지만 그 속에 담긴 깊이나 무게는 그의 계획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브루스의 심장도 쿵쿵하고 클락의 것과 맞물려 하나된 톱니바퀴처럼 뛰기 시작했으니까.
“괜찮군.”
“더 멋진 말은 없나요, 웨인 씨?”
그럼에도 말은 곱게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클락은 팩하니 토라진 듯 툴툴댔다. 피식 웃은 브루스는 살래살래 손짓을 하여 클락이 고개를 숙이게 한 다음 그가 엉성하게 묶어놓은 넥타이를 풀어 다시 고쳐 매어주었다. 사실 이젠 미운 정이고 고운 정이고 들 만한 정이라는 것은 다 들어버려서 클락이 못생긴 스웨터를 입고 몇 날 며칠을 굴러다녀도 이쁘게는 못 볼지라도 귀엽게만은 보이겠지만 브루스의 오래된 기억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들이 브루스에게 그리고 브루스가 부모님에게 서로의 외출복과 장신구를 골라주는 시간을 대단히 소중한 순간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어쩌면 배트맨을 하면서 알프레드가 제 차림을 챙기고, 자신이 아이들의 차림을 챙기는 것이 애정표현 중 하나가 되어버려서 더더욱 그렇게 생각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차라리 젊었을 적, 고담의 요란한 한량으로서 돈을 쓸 때는 오히려 데이트 상대의 옷을 골라주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카드를 쥐어주고서(어쩔 때는 그저 브루스 웨인이란 이름자면 되었다.) 그저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면 그걸로 되었으니까.
브루스는 차렷 자세로 딱히 일 없이 있던 클락의 손을 제 손에 잡아 가져왔다. 브루스만큼이 아니더라도 세월에 맞게, 마치 그의 성정을 이야기해주듯 마디마디가 믿음직스럽게 주름이 박힌 클락의 손이 제 미약한 손에 담겼다. 언젠가 이 손을 보며 브루스는 클락의 몸이 인간의 노화마저도 너무나 멋들어지게, 이상적으로 미화해버렸다며 얄밉다는 식으로 불평을 해댔었다. 요컨대 브루스는 클락의 주름진 손을 매우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브루스는 클락의 손을 조심히 들어 올려 에스코트하듯 받친 다음 그 주름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살짝 건조해서 딱딱함이 박힌 브루스의 입술에 간지러울 정도로 따뜻한 피부가 스쳤다.
“부디 저와 데이트해주실래요, 켄트 씨?”
옅은 색이 들어간 눈동자가 장난기도 머금고서 클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쁘게 호선을 그린 입술과 자신이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다워진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하는 에스코트와 그러면서도 교태 뒤로 교묘하게 감추어둔 일말의 한끗이 담긴 눈동자가 클락의 앞에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진실한 신의 핏줄을 지닌 이의 앞에서 영원을 약속했지만 브루스에게 자신이 영원히 클락 켄트이듯, 자신에게 브루스 역시도 영원히 잘나고 멋지고 세련된 브루스 웨인인 것이다. 클락은 브루스를 두고 퇴물이나 골방에 틀어박힌 초라한 노인네로 취급해버리는 뭇사람들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채로 어리석었으면 싶었다. 왜냐하면, 클락은 브루스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으므로.
그러니 허리 숙여 브루스에게 입맞춤을 하는 자신을 제 남편은 이해해야만 한다.
메두사가 잠든 곁
[슨뱃/봄볕/너와 함께라면 완벽하지 않은 것도 완벽하게 된다./따사 달콤]
'인어가 잠든 집'이란 책 제목에서 제목을 흉내냈습니다.
달그락하고 도자기 그릇이 테이블 위에 놓이면서 작은 소음이 발생했다. 남자의 집사가 으레 했던 것에 비하자면 투박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을 테지만 제이슨은 오히려 그런 작은 소음들을 브루스가 들을 수 있게끔 부러 울리고는 했다. 기척에 전부터도 예민했던 브루스가 제 눈으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을 전혀 알지 못 할 리는 없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꺼풀을 굳게 닫고 그 위에는 암막과 같은 검은 천으로 단단히 매어 시야를 온전하게 가리고 있으면서도 브루스는 손을 뻗어 제이슨이 수레에서 내려놓은 찻잔들을 위치에 맞게 배열하려했다. 제이슨이 브루스의 마른 손을 찰싹하고 소리 나게 때리면 이 고집쟁이는 비죽하니 입술을 내밀며 제 심사가 불편한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만 제이슨은 정말이지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얌전히 있어.”
제이슨이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이를 드러내려는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제이슨이 브루스를 무서워하지 않듯 브루스 역시도 기죽은 기색 없이 제이슨의 말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불합리하다는 듯 미간을 꾸욱 찡그렸다.
“나도 도울 수 있단다.”
“내가 도와달라고 했어?”
매몰찰 정도로 쌀쌀하게 잘라 말하는 제이슨이었지만 조심히 한 손으로는 찻주전자의 뚜껑을 누르고 다른 한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아 찻잔에 수레국화차를 따르는 손길에는 정성이 날것으로 묻어나고 있었다. 깔끔하게 찻물을 끊어낸 제이슨이 브루스 앞에 차를 놓으면 느릿한 바람을 따라 향이 먼저 브루스의 코끝에 닿았는지 그 얼굴에 습관적으로 박혀있던 긴장들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이런 차 종류의 음료는 제이슨의 입맛에는 여전히 풀 우린 물 정도의 인상밖에 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제이슨은 의리 있게 제 몫의 차도 찻잔에 담았다. 그와 기껏 한 자리를 같이 하면서 굳이 다른 것을 입에 하는 매정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브루스는 새까맣게 시야가 가려져 있음에도 보이던 때와 마찬가지로 제이슨이 제 몫의 차를 따르는 장면을 향해 바라보듯이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슨이 한 찻잔을 브루스 앞에 두고 남은 한 잔은 자신이 가지고서 자리에 앉았을 때야 비로소 손을 뻗어 제 잔을 손에 쥐었다.
히아신스는 이미 제 빛을 죽이며 다음 해를 기약하듯 땅으로 수그러들었지만 이 도시의 가장 고즈넉하고도 은밀한 정원에는 따스해진 날씨를 축복하듯 자목련이 흩날렸고 팬지와 튤립 같은 아기자기한 꽃들도 색채를 더하고 있었다. 온순하니 온기를 품은 바람이 정원을 한아름 감싸 안고서 이제 깨어난 생명의 냄새를 가득 실은 채 두 사람에게 끼쳐왔다. 굳건하게 서있는 웨인 저택을 성곽 삼아서 고담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만한 평온을 제이슨은 브루스와 단 둘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가 눈꺼풀 위에조차 빛이 서리지 못할 만큼 단단히 제 시야를 잠그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브루스의 후각에, 그리고 촉각에 지금 이 반짝반짝한 봄의 풍경이 마음이 부시게 담겼으면 좋겠다고 제이슨은 생각했다. 제이슨은 굳이 제 입으로 무엇은 어디에 있고, 무엇이 어떻게 생겼는지 따위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그의 눈을 대신해야할 감각들이 둔해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건 제이슨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었으니 말이다.
브루스가 찻잔을 거의 비웠을 즈음 다시 잔을 채워주는 대신 제이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브루스의 등 뒤에 섰다. 그리고 브루스의 뒤통수에 묶어진 천의 매듭을 풀어냈다. 그런 제이슨의 손을 브루스가 제지하려는 듯 했지만 제이슨은 퉁명스럽게
“영감은 볕이나 쬐셔.”
하고 말했다.
“내가 도와달라고 했었니?”
노파심에 하는 소리겠지만 마치 아까의 복수라는 듯이 브루스는 다소 심통 맞게 이야기했다. 그런 고집바가지쯤 못 이겨낼 양이었더라면 제이슨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 했을 테다.
“언제 돕는대? 내가 하고 싶다고 했지.”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눈가를 가리던 천을 들추어내면 그의 눈과 닿는 천 쪽에 보다 검게, 분명 붉게, 자국이 남은 것을 제이슨은 보았다. 눈썹을 꾸욱 찡그리며 마치 눈 속의 눈꺼풀이 한 장 더 있다면 그마저도 내리감을 듯 하는 브루스의 창백한 눈두덩에는 말라붙기 시작한 피딱지가 마치 눈물자국처럼 남아있다. 제이슨은 수레 아래에 실어온 물이 담긴 널찍한 대접에 흰 수건을 적셔 물기를 꼭 짜낸 다음 얼굴에 묻은 것들을 닦아나가려 했다.
“제이슨.”
가볍게 젖은 천이 눈가를 스치자 브루스가 바르르 놀라며 제이슨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제이슨은 브루스가 제 손목을 잡은 채로 두고서 톡톡톡 그의 눈에서 얼마 전에 흘러나왔을 피를 닦아냈다.
“차라리 세수를—”
“내가 한다고 했지.”
제이슨의 망설임 없이 브루스의 말을 잘라냈다. 여전히 제이슨의 손목에 자기 손을 매달아둔 채로 입술만 달싹이던 브루스가 결국 다시 제 손을 툭 떨어트렸다. 제이슨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자 브루스의 앞으로 보다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구나.”
“그렇지?”
제이슨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게 귀여웠던지 브루스는 푸푸하고 웃어버린다. 애정 어린 웃음소리가 간질간질 간지러운 한편 어린아이 취급을 받은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지만 제이슨은 브루스는 자신이 웃는 것을 보지 못 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이쯤은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웃고 있니?”
“아니.”
눈가를 닦을 때 마다 새로운 피들이 계속 묻어났지만 마른 피라도 닦아내니 그의 눈 주변이 말끔해졌다. 조금 묻어있는 물기를 다른 마른 수건으로 닦아낸 다음 제이슨은 새로운 천을 꺼내 브루스의 눈 주위에 둘러주려 했다. 브루스가 다시 손을 뻗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이슨의 손을 제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손에 조심스럽게 제이슨의 뺨을 담아보더니 턱을 따라 입 주변을 매만지고서 떨어졌다. 입술 위로 그의 손끝이 별 무게를 실지 않은 채로 지나갔을 때 제이슨의 등줄기에 오소소 기분 좋은 소름이 내달렸지만 정작 브루스는 별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 조금은 분했다.
“웃고 있잖니.”
거짓말쟁이, 브루스가 웃음어린 소리로 야유했다. 제이슨은 그런 브루스의 손을 잡아채서 손가락을 무자비하게 칵칵 깨물었지만 브루스는 오히려 소리 높여 웃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그 얄미운 입술에 한 번 뽀뽀를 해주었다.
제이슨은 비롯한 로빈들이 처음 로빈이 되고자 했을 때처럼, 브루스가 배트맨이 되어 고담을 지키고자 했던 것은 그리 복잡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덟 살에 골목에서 두 번의 총성으로 부모를 잃은 브루스는 무엇인가 해야만 했고, 그것이 배트맨이었을 뿐일 테다. 하지만 그의 단순한 의도는 나비효과처럼 이 다중 우주 속에서 불어나고 틀어져서 거대한 마물을 깨워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의 눈 속에 잠들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절망이었다. 그를 제 눈에 가두게 된 대가로서 브루스가 더 이상 눈을 뜰 수 없게 된 것은 단순히 시각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가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 도시며 그의 가족과 친구 모두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아주 전에 한 번 브루스가 시각에 문제가 생겼을 때 카울을 개조하여 레이더와 음파를 시각적 정보로 인지할 수 있게끔 해서 위기를 넘기려 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편법은 용납되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라도 브루스가 세상을 그의 눈에 담는 순간 제일 처음 시야에 닿은 존재를 시작으로 절망이 날개를 펼칠 터였다. 물론 박쥐란 본디 포기를 모르는 법이니 지금까지도 봉인이 보다 확실하게 되면서도 자신도 배트맨으로서 일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지만 브루스는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데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이슨이 끼어들었다.
“난 당신 곁을 한 번 잃었었는데 더 불행해질 게 뭐 있어?”
진짜 박쥐처럼 초음파의 반향을 이용해 장애물을 인지할 수 있는 법을 익히느라 도시 이곳저곳에 몸을 부딪치며 다니던 배트맨을 잡아챈 제이슨이 말했다. 손가락을 카울의 틈 사이에 밀어 넣자 뺨에 든 멍이 슬쩍 보였다. 제이슨이 어떤 감정을 느꼈건 간 브루스는 고집스럽게 제이슨의 손을 물리며 브루스의 옆에 있겠다 말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좀 사람이 좋게 이야기할 때 그러마하고 수그릴 줄 알았으면 좋으련만. 하기에 그랬더라면 박쥐들 사는 모습이 지금보다야 퍽 심심했을 것도 같다. 브루스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이 어디 딕 그레이슨 뿐이겠는가, 애초에 죽어주는 것뿐이겠는가. 제이슨은 불행에도, 세상의 끝에도 크게 관심은 없었다. 그저 이 끝에 브루스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배제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몰아갈지에 대한 확신만이 있었다. 제이슨은 여기저기에 애들 장난감 같은 폭죽을 던지며 그 작은 폭발이 만드는 파장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브루스를 보며 총구를 들었다.
“당신이 눈 뜨지 않고는 못 배길 짓을 할 거야. 그리고 그때 처음 보는 건 죽어가는 나겠지.”
탕 하고 사이렌서가 없어 크게 울려 퍼진 총성이 제이슨의 팔에 무거운 반동을 남기며 하늘로 울려 퍼졌다. 브루스는 제이슨의 협박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어찌됐든 제이슨은 기어코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더랬다.
그렇게 아름다운 메두사가 제 눈을 굳게 묻어두었다. 지금 그가 실수로라도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제이슨으로부터 해서 세상은 절망으로 번져갈 터였다. 브루스에게는 끔찍한 일이 되겠지마는 그의 절망이 되는 것은 제이슨에게는 꽤 기꺼운 일로마저 생각되었다. 브루스는 영영 모를 테지만 말이다. 어린 소년과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갇힌 어른이 위험을 찾아 그것을 공포로써 무마하기 위해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광경은 이 세상의 기준에서 말하자면 그리 ‘완벽하다’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때 그 순간에 주고받은 웃음과 시선이 제이슨에게는 둘도 없을 행복으로 각인되었듯이 그와 함께라면 완벽할 수 없는 것도 완벽하게 되었다. 그러니 절망이 눈앞에 있는 것은 제이슨에게는 오히려 긍지가 되고 지독한 고백이 되었다. 제이슨은 브루스도 꼭 자신처럼 느끼기를 바라며, 이미 닫혀있는 그의 시야를 검은 천 뒤로 굳게 가리웠다.
Set Back
[울새뱃/겨울/그들은 마침내 겨울 숲을 빠져나왔다./먹먹한]
인저 세계관의 뎀브루
태양을 떨어뜨리기 위해 쏘아올린 폭죽으로 말미암은 겨울은 유달리 잿빛이었고 희뿌연 먼지로 메말라 있었다. 다분히 자기 파괴적인 선택이었지만 그 시점에서 데미안에게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까지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동굴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데미안의 겨울이 그를 충분하게 좀먹었고 자아마저 송두리째 앗아져 가기 전에 데미안은 하릴없이 자신의 어머니가 태초에 점지해놓은 제 것을 되찾아야만 했다. 목표라 부를 것이 생긴 데미안은 방진복의 무게와 더불어 생을 잃어 늘어진 시신이 그를 끔찍하게 짓눌렀음에도 그나마 앞으로 나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러 와서 웬만한 끔찍한 것은 아무렇지 않은 느낌마저 들어 그는 일말의 죄책감도 두려움도 없이 오랜 저택 앞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경첩이 낡고 녹슬어서 잘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어떤 경외도 보이지 않은 채 발로 걷어차서 부서뜨리면 텁텁한 먼지와 자욱한 거미줄이 끼인 저택의 내부가 드러났다. 시공간이 박제되어 멈추어버린 저택은 유달리 영안실처럼 차가웠다. 곳곳에 걸린 초상화며 진열된 물품들은 산 사람의 것보다 죽어버린 사람의 것이 훨씬 많아서 웨인 저택이 이제는 유령 저택이라 불리는 것도, 현대의 피라미드이며 집주인의 거대한 무덤이라 불리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살던 사람조차도 어찌 보면 살아있던 것이 아닌 시간의 잔상이었으니 말이다.
전기는커녕 외부의 빛조차도 부옇게 들어오나마나 한 어둑한 복도에서 초상화들은 마치 침입자를 경계하듯 데미안의 걸음걸음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보다 위와 위의 조상들 그리고 아버지가 그들의 비속을 빛깔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데미안은 이곳이 한 번도 제 집이었던 적은 없었노라며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비난할 권리가 데미안에게도 조금, 아주 조금은 생길 것만 같았다. 이미 고장이 나서 멈춰버린 시계를 옆으로 치워 심해 깊숙이까지 박혀있는 빙하의 뿌리 같이 저택 아래에 이어져 있는 동굴로 향해 내려가면 데미안의 걸음소리조차도 데미안을 내쫓을 것처럼 텅텅 크게 뒤울렸다. 슈퍼맨에게서 거의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배트맨을 탈환했을 때의 긴장감이 아직도 혈액 속 호르몬 작용이 되어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인지 데미안은 에우리디케를 이끌어 나가는 오르페우스라도 된 것처럼 자꾸만 아무것도 없을 등 뒤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강박을 참아내며, 그리고 그 슈퍼맨을 무력화 했다는 점에서만큼은 제 아버지라도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란 유년기 자아의 속삭임을 방패삼아 아래로 아래로 계속 내려갔다.
배트맨이 제 동굴 곳곳을 장식한 전리품과 그와 그의 가족들이 남긴 거죽을 보고 있노라면 거기에는 어떤 자랑스러움보다는 제 스스로에 대한 비난과 조소가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일종의 투사에 따른 심리라는 것을 데미안의 머릿속 한 구석에 마치 드레이크라도 된 것처럼 밉살스레 속삭이는 자아도 있었지만 자신은 아버지의 가장 완벽하고 진실한 아들일 테니 그것이 아버지의 의도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로 했다. 이미 너무 많은 불신과 불협화음을 데미안은 지나쳐왔기 때문에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마저 자잘한 의구심에 놀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뇌기능이, 특히나 전두엽이 형편없이 곤죽이 되어버린 배트맨을, 아버지를 데미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데리고 왔다.
데미안은 동굴보다도 깊은 곳으로 내려왔다. 언젠가 제 손으로 비틀어 버린 작은 생명이 처참하게 썩어서 분해되었을 아주 밑바닥에서는 기이한 녹빛을 띄는 호수가 마그마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배트맨에 대한 집착은 기이한 것이어서 그를 위한 연구가 알 굴의 라자러스 핏에 다다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고 그가 후에 마음을 달리 먹었든 어쨌든 데미안은 그가 남긴 유산을 활용하는 데에 그의 적통으로서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그가 이 지구의 미지에 잇닿아 있는 지하수에 관심을 기울이기 이전부터 많은 이들이, 적이건 친구건 할 것 없이, 아버지를 이곳에서 건져내고는 했다. 배트맨의 시신은 방사선 피복과 더불어 여러모로 만신창이여서 복구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손상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 실험은 실패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미안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데미안은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든 살아 돌아와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데미안은 벌써 조금 부패가 진행되기 시작한 넝마 같은 시체를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경건하게 받쳐 안고서 조심히 초록빛 깊은 웅덩이 속으로 내보냈다. 그러면 웅덩이는 마치 끝 모를 늪처럼 아래로 저 아래로 아버지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한동안 아버지는 떠오르지 않았고 데미안은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 겨울의 끝이 언제일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웨인저택의 겨울은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에 의해 걷어져 갔다. 오래된 거죽을 집어삼켜버린 웅덩이에 있던 물이 말라 사라져버릴 정도로 그 오랜 시간을 품고 있던 저택의 모든 순간과 장소를 불태워버린 거대한 불길이 벌겋게 제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도시를 돌보는 데에도 여의치 않을 본토에서 유령만이 거느리는 도시와 한참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이름만 남은 이의 대저택에 난 화재를 관심 가져줄 리는 없었다. 그저 짤막한 기사 한 줄로 남기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일 테다.
데미안은 멍하니 한 줌의 그림자로 녹아 없어지는 아버지의 집을 보았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자폭 스위치를 자신이 누르게 될 것이라고 데미안은 차라리 자신이 예상조차 하지 못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바람을 되뇌었다. 물론 그걸 다른 누군가에게 넘길 바에야 데미안은 스스로 그 버튼을 눌러버릴 테지만 말이다.
“데미?”
그런 데미안의 한 쪽 손을 꼬옥 잡고 있던 작은 아이의 미성이 데미안을 현실로 일깨웠다. 데미안이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소 낡았지만 그래도 소재가 좋아서 맵시를 잃지 않은 어린아이의 옷을 차려입은 ‘브루스’가 자신을 무구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들지 않은 푸른 눈동자 곁에 불꽃이 일렁여서 마치 잘 빚어진 구슬처럼 보였지만 아이는 분명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처음 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보았을 때 데미안은 혹시 자신이 미치지는 않았는지 걱정했지만 이미 걱정의 순서가 한참 이전에 끝났던 것이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을 멈추었다. 어쩌면 라자러스 핏에서 성인 남성으로 되어 나오기에 브루스에게 남아있는 구성성분이 그리 여유롭지 못 한 탓에 생겨난 지극히 등가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어려진 그의 기억 속에는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있을 리가 없었고 심지어 그를 박쥐에 이르게 했던 마사와 토마스도, 그를 자기 자신보다도 사랑했던 집사도 브루스는 기억하지 못 했다. 백지처럼 눈을 뜬 그에게는 정말 데미안 웨인 한 사람 뿐이었던 것이다.
“괜찮아, 브루스.”
브루스는 제가 물어보고 싶은 말을 저에게 오히려 해주는 데미안이 의아했지만 곧 브루스는 그와 잡고 있는 손을 더욱 꼭 잡으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왜인지 저기가 어디인지 알 것도 같은 저택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불 속에서 무너지고 있었고 브루스는 그게 왜일까 조금은 무서워서(아니면 슬퍼서?) 데미안 옆에 필요 이상으로 찰싹 달라붙어 걸었지만 그는 상냥한 사람인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그저 브루스를 화마의 기운과 점점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겨울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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