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뱃합작으로 제출했던 글입니다. 이쪽(https://robinxbat.postype.com/post/4888515)에서 다른 금손님들의 글을 감상해주세요. 주최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https://twitter.com/jhrXD/status/1091955607211368448 이 트윗 타래에서 루님과 나누었던 대화 중 CEO와 COO의 티타임 시간에서 소재를 가져왔습니다...만 미미하다 못해 아무말입니다.
[흔들리는 웨인 타워, 웨인 이울어지나?] 지루한 운율을 속으로 따라 읽으며 딕은 픽하고 웃은 다음 고담의 숱한 황색 언론들 중 하나인 골든 사이렌을 접었다. 잘 정돈한 신문 너머에서는 방금 읽었던 기사의 사진에서 브루스 웨인과 대결구도로 붙어있던 젊은(보단 어린) COO가 태연하게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본디 골든 사이렌과 같은 언론에서야 별 사소한 일도 몇 십, 몇 백 배는 부풀려 이야기하기 좋아하니 그곳에서 웨인 엔터프라이즈에서 경영권 다툼이 벌어질 거라는 둥, 웨인사의 COO가 독립된 회사를 차릴 거라는 둥 하는 이야기 쯤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테다. 하지만 얼마쯤 마냥 평온과 온화를 가장하며 차나 들이키고 있는 팀을 보자니 입술을 꾹 다문 채 혼자 틀어박혀 있던 누군가가 생각이 나 딕은 쓸데없는 참견인 줄을 알면서도 먼저 운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신나서 달려드는데?"
"그게 그 사람들 일인 걸 어쩌겠어."
힐끗 팀의 얼굴에 눈짓을 주면 넥타이를 매고 정장차림을 한 팀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팀이 저런 차림을 한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데미안이 제가 직접 자기 신체사이즈에 얼추 맞게 제작한 배트슈트를 입은 모습을 볼 때처럼 이상하게 입꼬리가 씰룩한다. 이것이 아마도 장남의 특권이겠거니 하고 딕은 동생들이 알았다간 편히 하루를 보내지 못할 생각을 영리하게 속으로 삼키며 진지한 얼굴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고 네가 사서 일거리를 주는 타입은 아니잖아. '브루스'도 아니고 말이지."
딕이 특정 명사에 살짝 강세를 넣어 발음하면 곱게 펴졌던 팀의 이마가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에 꾸깃 하니 구겨졌다가 이내 반듯해졌다. 오히려 은은한 미소까지 띤 채 형제를 바라보는 그는 침착하다 못 해 시린 눈동자를 했다.
"나도 자선이 좀 하고 싶어 졌나 보지. 브루스처럼."
"비키 베일에게 말이야?"
딕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신문들 중 고담 가제트를 끄집어 팀이 보이는 위치에 놓으며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팀은 그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언론에서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대해 언급했던 '수상한 자금 운용'을 다룬 기사를 파노라마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에 한 문장 기자가 자신과의 대화를 절묘하게 (악의적일 정도로) 발췌하여 서술했던 것도 어렵지 않게 팀의 머리에는 스쳐 지났다. 요즘 같은 시기에 COO의 입에서 CEO와 의견차가 있다는 말이 어떤 식으로 부풀려지고 서술될지,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에 결과를 몇 가지씩은 염두에 두는 팀이 생각하지 못 한 것은 아니었다. 딕 역시 팀의 그러한 성향을 모를 리 없었고 어쩌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굳이 자신이 주로 활동하는 블러드헤이븐을 나와 고담 심장부에 있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건물로 찾아온 것일 테다.
딕은 자신이 그를 아는 만큼 그 역시 딕의 의중을 알고 있을 팀이 무언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며 계속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팀은 그저 태연하게 다시 잔 속에 든 차를 얼마쯤 입 안에 털어 넣었다. 10분 남짓의 짧은 티타임을 위해 잔은 둘이 마련되어 있지만 남은 잔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권하는 말도, 권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딕이 속으로 백을 셌을 때 즈음에도 팀은 입을 열지 않았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아는 딕은 결국 푸 하고 숨을 내쉰 뒤 먼저 입을 열었다.
"브루스가 딱히 이겨먹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적어도 우리한테는."
"딕."
완전히 어린 동생을 어르고 달래는 형님 스위치가 들어온 딕의 말을 달각하고 팀이 테이블 위에 찻잔을 두는 소리가 잘랐다.
"브루스랑 나는 약속을 했어."
빙긋, 미소를 한 번 얼굴에 그리며 팀의 야무진 손끝이 쟁반에서 내려지지 않은 빈 찻잔을 가리켰다. 이번 여름, 올해에도 다행히 무사하게 찾아온 팀의 생일에 브루스에게 웨인 엔터프라이즈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10분 정도 정기적인 휴식시간을 함께 갖자고 제안하고 그에 승낙 받은 팀은 약속은 깬 브루스와 자기 사이에 찬바람이 불건, 폭풍우가 치건, 마그마가 끓건 어쨌든 그저 정당하고 떳떳했다. 그리고 바깥을 쏘다니며 가족과의 시간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보이는 브루스에게 긍정적인 강화와 가족 간 약속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입장인 딕도 보통 때였더라면 팀의 의견에 백 번 동의했을 것이다. 다만 이 번 만큼은 살짝 줄어있는 팀의 볼이나(본인은 젖살이 빠지는 중이라 그렇다 주장했다.) 칙칙한 눈 밑 피부(본인은 자기라고 노화를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알프레드가 근처에 있었더라면 극적인 한숨을 한 번 쉬어주었을 것이다.)를 보면 우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팀, 넌 휴식이 필요해."
"내가 브루스랑 약속했던 게 그건데?"
"10분이면 완판 되는 포핀스의 브라우니를 사다놨다면서. 브루스랑 먹으려고."
"브루스가 딱 열 상자만 파는 티라미수를 총회가 있던 날에 가지고 왔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브루스는 엉뚱한 곳에서는 이상하게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 본래 성질이 드라마 킹에 어울리는 탓인지, 거기다 그를 뒷받침해주는 재력 덕분에도 브루스는 그의 주변 모든 이들에게 여러 면에서 허들을 높여놓았다. 본인이야 자각하지 않는 듯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나 상대에게 받은 마음을 똑같이 혹은 그보다 많이 갚으려고 의식적으로 전전긍긍하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상대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성급한 자기 욕심밖에 남지 않는 법이다. 바깥에서야 왜 항상 필요한 말을 쏙 빼먹고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기만 하느냐 가끔, 아주 가끔씩 불평을 듣는 딕이지만 박쥐의 집안에서야 제일가는 커뮤니케이터인 만큼 딕은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서로를 챙기는 걸 경쟁처럼 하면 어떡하냐."
[띠디디디, 띠디디디-]
팀이 설정해둔 타이머가 형제 사이에 크게 울렸다. 쟁반 위에 자기 몫의 찻잔을 거두어들인 팀은 먼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딕. 시간 됐어."
다시 산뜻하게 웃으며 팀이 저쪽 문을 향해 한 번 눈짓했다. 그 자신 안에서 어떤 이론이 하나 성립되고 나면 굳건하게 그것을 밀고 나가는 동생은 이번에도 딱히 양보할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이전에 팀이 맞고 자신이 틀렸던 적처럼 이번에도 팀의 고집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감수할 가치가 분명 있겠지만 똑 닮은 두 사람이 똑같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가족 간의 조화와 평화를 소중히 하는 딕으로서는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 딕의 의도 역시 팀은 모르지 않았다. 줄곧 비즈니스맨과 같은 호선만 그리고 있던 팀이 진심을 담아 정답게 다독였다.
"딕.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건 나랑 브루스 문제야. 딕이 그렇게 손쓰려고 하지 않아도 돼."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그만큼 강경한 축객령에 결국 딕은 한숨을 푹 쉬며 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건강 좀 챙기면서 해."하고 짧은 인사를 남겼다. 물론 그 박쥐의 새들은 모두들 어딘가가 박쥐와 기가 막히게 닮아 있기는 하지만 저 둘은, 팀과 브루스는 그야말로 서로를 부추기기 딱 좋았다. 하기에, 제 새들에게 고집을 가르친 것이 그 박쥐가 아니던가. 이건 브루스의 몫이겠네요, 딕은 저 위층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을 한 사람을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픽 웃었다.
*
딕이 완전히 복도 저편으로 간 것을 확인한 팀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만(그렇다고 딕이 틀린 것도 또 아닌 이것은 그저 방법의 문제일 것이다.) 이렇게 배트 패밀리의 누군가와 의견차로 투닥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다툼이랄 것도 없이 딕은 그저 일이 좋게 해결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고 팀은 보다 꿍꿍이가 있다는 정도의 의견 교환일지라도 필드에서 항상 서로의 눈짓 하나, 손짓 하나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익숙한 박쥐의 일원인 만큼 불일치가 일어나는 건 어딘가 팀을 불안하게, 초조하게 했다. 그리고 팀은 자기 자신보다 더더욱 가족 간의 불일치를 못 견뎌하면서도 그러는 주제에 고집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센 큰 박쥐를 알고 있다.
본래 영웅은 만나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관념으로써만 존재하던 우상이 실재하게 되는 순간 그는 완전한 이상이 아닌 불완전한 현실로 끌어내려진다. 그럼에도 팀이 스스로 배트맨에게 찾아가 그에게 로빈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수많은 굴곡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은 팀이 배트맨, 그리고 브루스의 존재를 완성품으로서 본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나갈 현실로 보았기 때문이다. 팀은 배트맨이 그림자 속에 매몰되지 않고도 훨씬, 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실제로 그와 가장 근접했던 배트맨과 고담의 허공을 갈랐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바쁘다는 이유로, 세상은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스스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타인에 대한 불안을 이유로 조금만 핑계가 생기면 그것을 파고들어 늘 그와 멀어지려 한다. 그런 그를 팀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브루스에게 둘만의 티타임을 제안했을 때에도 팀은 지금처럼 브루스가 팀의 상황이 브루스 본인이 판단하기에 좋지 않을 때가 된다면 얼마든지 무를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한두 번 그럴싸하게 차려진 시간을 함께 하고 말 것이었다면 애초에 브루스에게 굳이 열여덟 번째 생일을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팀은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검토해야하는 서류 뭉치를 보았다. 팀은 지금 이 자리에 딕이 아닌 자신이 있다는 데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브루스가 자경단이 아닌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구어낸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는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 그저 브루스가 팀에게 제가 마음 놓고 있을 장소를 마련해주기 위해서와 같은 자애로운 시선에서 기인했다고 하기에 자기 스스로가 뛰어나다는 것을 팀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할 수 있도록 웨인의 이름으로 받은 많은 것에서 제 이상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배트 패밀리와 그리고 브루스 웨인이 그러하듯 그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는 시간이 좀 늦어지기도 하고, 식사가 다소 소홀해지기도 하고, 업무(밤 산책을 포함하여)를 이유로 하는 것 외에 외출이 급격히 줄어든 거야 한정된 시간 속을 사는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이 이번 한 번 잠깐 그러다 말 일이 아닌 것 또한 자명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누구처럼 72시간 만에 의자에서 새우잠을 10분 자놓고 효율적인 수면을 취했다고 하거나 영양제 뭉치나 삼켜놓고선 이거면 된다고 집사의 요리를 만류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브루스가 굳이 자신과 보내는 시간 때문에 팀의 휴식시간이 줄어든 것이라고 단정 지어서 약속을 깨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브루스의 얄팍한 핑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후퇴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범위 내였다.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진다. 딕 앞에서 요 보름간 수면부족에 시달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누구를 위해 부러 준비했던 캐모마일 차를 아무렇지 않은 양 곧이곧대로 들이킨 탓이려니 했지만 차 속에 든 성분보다야 팀의 눈가에 덕지덕지 매달린 피로가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마시기 좋은 온도로 따뜻하게 데워진 차가 팀의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긴장을 느슨하게 했다. 그러다 브루스가 통 잠을 안 자고 버틸 경우 알프레드와 딕이 극약처방으로써 그의 찻잔에 수면제를 넣었던 것이 문득 생각났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비하면 자신은 나름 브루스의 자유의지를 존중한 것일 텐데도 "이럴 시간이면 잠을 한 숨 더 자는 게 어떻겠니."하면서 찌푸린 얼굴을 한 걸 떠올리니 그런 그의 성격을 이미 알고 예측했던 만큼 더욱 심통이 났다.
"바보 브루스."
그런 말을 자신이 내뱉은 것도 같다. 예산서와 지역 미성년들을 대상으로 웨인에서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계획안을 검토하던 팀의 눈이 자꾸만 깜빡, 까암빡 하였다. 그리고 얼마 없어 팀의 호흡이 보다 천천한 것으로 바뀌었다.
*
상쾌하면서도 서늘한 냄새가 난다. 브루스는 파티 때는 머스캣과 장미가 조합된 달콤함이 발목을 휘어 감는 듯한 향수를 쓰지만 보통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이나 브루스 개인의 취향으로는 시트러스와 민트, 샌달우드가 절묘하게 섞인 향수를 쓴다. 팀이 반짝 눈을 뜨면 자신을 소파에 뉘인 뒤 담요를 덮어주려던 브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브루스의 눈꼬리가 짧게 떨린 것을 팀은 보았다.
"이럴 시간에 한 숨 눈 붙이라면서요."
브루스가 몸을 물리려고 할 때 팀이 그를 놓치지 않고 브루스의 넥타이를 잡았다.
"서류를 확인하러 왔는데 네가 자고 있었단다."
"무슨 서류요. 하이테크로 죽고 사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에서 굳이 브루스가 직접 걸음해야 하는 서류가 있어요?"
"...자는데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틀렸어요."
자꾸 엉뚱한 길로 빙 돌아가려는 브루스가 답답해진 팀이 몸을 일으키려하면 브루스는 그를 저지하려는 듯 했지만 상냥하고 싶은 마음에 비해 서툴기 짝이 없는 그의 손끝을 팀은 쉽게 물렸다.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아 가시 돋친 시선으로 팀이 브루스를 보면 그 역시 채 씻어낼 수 없는 만성적인 피로가 잔뜩 묻은 눈을 하고 있다. 이런 꼴을 하고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브루스가 팀은 말하자면 조금 가소롭기까지 했다.
"다른 말을 해 봐요."
브루스는 얼마쯤 뜸을 들였고 조심히 입을 연다.
"너무 네가 모든 것을 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나한테 아무런 기대 없이 이 자리를 주었다는 거예요?"
그건 모욕인데요. 팀이 사납게 브루스의 넥타이를 보다 바투 당기며 차분히 속삭였다. 팀에게 부딪히지 않으려 소파를 딛고 몸을 지탱하는 브루스가 약간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만족스러운 반응을 본 팀은 브루스의 마른 뺨을 눈으로 살폈다.
"얼굴이 이게 뭐예요."
브루스의 눈동자가 마치 팀이 제 생일 선물로 제안한 걸 들었을 때처럼 잠깐 흔들렸지만 이내 "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잖니."하고 조심스레 말하며 시선을 흩뜨렸다. 팀이 티타임을 제안했을 때 브루스 눈에 스쳤던 일말의 의혹, 설마 너마저 다음에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지 하는 고집어린 믿음을 팀은 똑똑히 보았고 그 의심을 괜히 벌써 기정사실로 만들만큼 성급하지 않았다. 팀은 딕처럼 브루스에게 맞추어만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제이슨처럼 직설적으로 브루스를 몰아만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팀의 방식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요."
팀이 흥정하듯 은근하게 화두를 뗐다.
"우리 둘 다 서로 휴식이 필요한 건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서라면 일이나 하나 더 해결하려하겠죠. 상황에 따라 조율할 수 있겠지만 요즘은 바쁘니까 브루스도 나도 간식 준비하는 건 당분간 금지예요."
"나와 꼭 같이 쉴 필요는..."
"이거 내 생일선물인거 알죠?"
팀이 잘라서 쐐기를 박듯 하면 브루스가 몸을 뒤로 빼려는지 소파를 받친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브루스의 넥타이를 잡은 팀의 손에도 꼭 그만큼 힘이 실린다. 팀이 괜한 마음 씀을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심증은 변하지 않지만 요 며칠간 팀과 자신 사이에 있던 묘한 긴장감이 회사에 끼치는 영향이라던가(왠지 루시우스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홧김인지 팀이 보다 훨씬 무리를 하고 있다는 점(티모시 도련님이 귀가를 하시지 않으신다며 알프레드가 브루스 주변에서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회사 복도나 고담 허공에서 짧게 마주쳐 지나는 시선에서 읽히는 부루퉁함 같은 게 마음에 걸렸다. 문제는 브루스 본인이 팀과 지난 며칠간 보냈던 그 짧고 고즈넉한 시간을 꽤 마음에 들어 했고 그리워하는 바람에 10분 정도야 충분히 할애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고 결론이 날 때마다 자꾸만 그 모든 것이 핑계처럼만 느껴진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팀은 자신보다 훨씬 현실과의 균형 감각이 좋은 아이이니 만큼 자신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어딘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열여덟의 생일선물을 무르면서까지 팀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더는 없었다.
결국 브루스는 입술을 질끈 물다 보름 만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팀은 그때야 편하게 미소 지으며 꽉 잡고 있던 넥타이를 놓아주었다. 어쨌거나 명분만 갖추어 놓으면 브루스는 자신에게 의무 지어진 일은 어떻게든 하려고 할 테다. 브루스는 분명 자신과 휴식시간을 보내는걸 마음에 들어 하고 있으니 다시 어떻게든 벗어나보려고 머리를 굴릴 테지만 팀은 습관의 미덕을 꽤 굳게 믿고 있다. 팀은 자신이 붙잡은 탓에 흐트러진 브루스의 넥타이를 정돈해주었다. 제 넥타이 끝을 괜히 만지작하다가 푹 하고 일부러 보라는 듯 한숨을 쉬면서 옆 소파에 앉은 브루스가 뾰로통한 눈으로 별안간 홀가분해진 팀을 보며 미련스레 구시렁댔다.
"수완이 좋구나."
그야 이 고집은 박쥐에게 배운 것이었으니까. 브루스에게 팀은 생긋 그 특유의 티모시 웨인 미소를 보여주었다. 브루스가 알던 모르던 간에 어쨌든 그간의 여러 일들, 그 많은 상실과 어째서인지 자꾸만 얽히고설키게 되는 어쌔신, 악마의 수장 때문에라도 티모시 드레이크는 결코 타협을 하지 않을 테니 승자의 미소를 짓기에 지금도 너무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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