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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묘사되며 날조가 심합니다.
※제목은 크랜베리스의 'Ode to my family'에서 가져왔습니다.
얼굴에 마스크를 뒤집어쓰거나 오색이 요란한 괴짜들에게 더 이상은 좌지우지되지 않겠다며 새로이 부임한 시장이 야심만만하게 ‘네오’라는 단어씩이나 앞머리에 붙인 도시에서 과거에는 하루라도 그 이름이 가십지나 언론에 오르지 않는다면 서운할 유명인사가 오랜 지병이었던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고 젊은 시절의 명성이 무색할 만큼 초라하고 쓸쓸한 장례를 치른 지가 이제 반 년 쯤이 지나갈까 한다. 하지만 네오고담을 운운했던 시장 맥캐넌이 약물남용과 마피아와의 유착관계가 드러나 임기를 못 채운 채 퇴임하였듯이 이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렇듯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와 드문드문 터져 나오는 총성으로 얼룩져있었으며 사이사이로 어둠으로 빚어 만든 망령이 깃든다.
데미안은 그중에도 가장 짙고 미쳐있는 망령을 무기질적인 눈길로 쫓고 있다. 그의 후임으로 일컬어진 이보다 외형만큼은 훨씬 기존에 가깝게 보이는 망령은 마치 그의 존재를 도시의 비극이자 희극이며 관광명소 쯤으로 치부해버린 도시에 분노와 조소를 행하듯 전무했던 폭력과 무자비를 휘두르고 있다. 12번 지구에서 경찰도 범죄자도 상관없이 묵사발을 내놓은 배트맨은 이미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산송장을 향해 쉬지 않고 주먹을 내지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일 아침에도 배트맨의 손에 목숨이 끊어지는 이가 나왔다는 기사가 소란스럽게 장식될 것이다. 누군가는 아주 오래전 이미 그가 그랬어야 했다며 통쾌해할 테고, 누군가는 그의 행동이 도를 넘어섰다며 분개할 터며, 누군가는 이미 그는 그런 존재였다며 냉소할 테고, 누군가는 하염없이 슬퍼할 테다. 데미안이 보고 있는 수많은 0과 1의 신호의 혼합으로 변환되어 펼쳐지는 커다란 화면 위 광경의 의미는 그토록 다채로운 것이었지만 정작 그것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시선에는 색이 없었다. 마치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실험체를 관찰하는 듯 한 감정이 배제된 시선이 배트맨의 움직임을 따랐고 이윽고 배트맨이 기어이 범죄자 하나를 맨손으로 죽여 버리는 것을 확인했다.
토독토독 하고 의자의 팔걸이에 일정 리듬을 담고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도, 그게 어떤 의미가 될지도 알 리 없는 배트맨은 분노보다도 광기에 가까운 증오에 사로잡혀 다른 타깃을 찾아 네오고담의 뒷골목을 헤집었다. 아주 짧게 한숨을 뱉은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한 장비들을 챙기고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데미안에게 캣타워 정상에서 유리창 밖에서 서성이는 밤벌레를 관찰하고 있었을 턱시도 고양이가 어느새 다가와 그가 바깥으로 나가려는 것을 알아챈 듯 야옹하고 마치 경고음처럼 울었다. 어쩐지 몰래 했어야 할 일을 들킨 듯 뒷목이 간지러웠지만 데미안은 그저 고개만 한 번 까딱해보이고선 의복을 정돈하고 제 걸음을 재촉했다.
데미안은 옛 기억과는 너무나도 달라져버린 고향처럼 여겨졌던 도시를 매끄럽게 운행해 나가면서도 변화에 탄식하거나 그나마 남은 것들에 대한 감상도 없이 그저 제 목적지만을 향했다. 언젠가 데미안이 앉고 있는 지금 이 위치에서 핸들을 잡고 이 도시의 밤을 들쑤시고 다닐 날이 올 것을 그의 인생처럼 알았던 때도 있었던 것도 같지만 그건 너무 옛날로 느껴져 이젠 공감이 가지 않는다. 데미안이 지나치는 이 도시 골목골목에는 협박, 밀거래, 부정, 모략 따위가 판도라 상자 깊이에 잠들어 있는 재앙들처럼 숨어있다. 데미안의 평생처럼 느껴지는 시간과 아버지의 인생이 녹아들었을 도시는 그저 말 그대로 그들이 녹아들었을 뿐 그 시절과 지금의 차이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아 그 지독한 악취와 습기에 향수보다는 권태가 인다.
핸들을 좌로 한 번, 우로 두 번, 그 뒤로 좌로 한 번 더 돌리고 나서 데미안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어두운 골목에는 꺽꺽대는 신음과 비명, 간간한 욕설과 지워지지 않는 피 냄새가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퍼져나가고 있었다. 데미안이 그래플 건으로 저쪽 건물 바깥에 나있는 난간에 고정하고 폴짝 그 위로 뛰어올랐다. 데미안이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배트맨은 최초의 그가 고안했던 의도처럼 사람보다도 악귀에 가까웠다. 하지만 보다 세세히 뜯어보자면 그는 어떤 영적인 존재보다도 선도 정도도 없이 제 감정만이 시꺼멓게 물들어서 마치 제 새끼나 영역을 빼앗긴 짐승에 더 가까워보였다. 그래서 더 인간적일 수는 없을까? 데미안은 잠깐 생각하지만 배트맨은 인간적인 것과 가까워서는 안 됐다.
얼마안가 또 한 번 끅끅하는 신음소리가 멎고 그럼에도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은 듯 어깨로 숨을 쉬던 배트맨이 불현듯 예민하게 데미안이 서있는 위치를 돌아보며 붉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렇게 시선이 옮겨올 즈음 데미안은 이미 소리 없이 그의 곁으로 내려서며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신속하게 배트맨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내장이 거칠게 갈라지고 뼈에마저 그 통증이 금으로 남았을 때 배트맨은 고통에 찬 숨을 헉 삼키면서도 이미 사리분별을 잃고 광기에 잠식되어 그저 더 많은 울분을 퍼뜨리기 위해 으르렁 거리며 주먹을 쥐었지만 그보다 데미안이 그의 심장을 꺼트리는 것이 더 빨랐다. 묵직한 무게가 데미안의 품에 기대어지고 데미안은 그간의 무덤덤한 시선과는 다르게 그를 정성스럽게 제 품안에 담았다. 데미안이 제가 살해한 배트맨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발길을 돌렸을 때
“이봐!”
뒤에서 젊고 패기로운 음성이 데미안을 불러 세웠다. 힐끗 돌아보면 온갖 첨단기술로 점철해놓고서도 역대 배트슈트 중 최경량을 자랑할 유니폼을 입은 새로운 배트맨이 보였다. 스스로 날 수 있는 그는 아까 데미안이 배트맨의 행적을 지켜보고 있던 자리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데미안은 죽어버린 배트맨의 어깨 너머에서 저 ‘새’ 배트맨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호의가 들어있지 않은 눈빛을 숨기지 않았던 만큼 저 청년이 배트맨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면 이정도 의중은 이미 꿰뚫어 보았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젊은 배트맨은 미간을 좁히며 어린 불쾌감을 숨기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땅으로 내려왔다. 그 모습이 과거의 수많은 잔상 중에 하나와 닮아있는 것도 같았지만 데미안은 그저 빨리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데미안은 마치 새 배트맨의 존재를 보지 못 했던 것처럼 그를 당연하게 외면했다. 너무 당당한 발걸음으로 무시하기에 잠시 멍하니 서있던 테리가
“이봐!!”
하고 다시 소리치며 데미안을 향해 그래플 건을 발사했다. 하지만 줄 끝에 달린 후크가 데미안의 옷깃 어디에 걸리기보다 데미안이 꺼낸 단검에 부딪혀 땅으로 볼품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깡, 깡깡 하고 금속이 땅 위를 맥없이 구르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테리는 뒤꿈치를 밀어 올리듯 지면을 가볍게 박차 배트맨의 시신을 안고 있는 데미안에게로 날아가려고 했지만 그의 시야는 도시의 밤보다도 시꺼멓게 차오르는 연기로 뒤덮였다. 테리는 적외선을 추적하려 카울의 비전을 바꾸어보아도 이미 그들의 모습은 거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꼭 시간의 유령들처럼. 테리는 그저 나직이 남겨진 “애송이.”라는 단어에 꾸욱하니 인상을 찌푸릴 뿐이다.
“나이트윙,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테리는 통신기 너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딕에게 이야기했다. 후우, 하고 통신기 너머에서 침중한 한숨소리만이 건너왔다.
집. 집은 아늑한 곳. 그리운 곳. 모든 죄도, 회환도 묻을 수 있는 곳. 그렇기에 마치 무덤과도 같은 곳. 데미안은 침묵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자신의 보금자리에 시신과 함께 도착했다. 데미안은 자신이 소중하게 바쳐 안아든 배트맨을 진찰대 위에 반듯하게 눕히고 이미 생명의 증후는 사라져버린 바이탈 사인을 다시금 수치로서 체크하며 13번째 녹음 기록을 이어갔다. 실험체 코드B-2 061146, 3번째의 소생. 분노에 가득 차 있으며 도파민 수치를 조작해도 소용이 없었음. 교감 신경계의 비이상적인 활성화. 자아의 붕괴. 다만 동작에 대한 기억은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 함. 전두엽 및 해마의 손실. 향을 통한 변연계 각성 실패. 신체 손상 정도 극심. 결론, B-2 061146... 실패. 녹음을 끝내는 데미안의 마지막 말은 무겁게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 브루스 웨인의 클론도 적절한 절차를 거쳐 폐기되어야한다는 말을 간신히 마치며 데미안은 카울을 뒤집어 쓴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죽은 클론의 뺨을 설게 쓰다듬었다. 데미안은 지난 5번째까지의 실험 결과 클론을 반복적으로 소생시키는 것은 불완전한 각성만을 초래할 뿐 진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구도-데미안조차도- 믿지 않을 이야기로 데미안 나름 클론의 존재를 존중하기에 데미안은 예견된 실패를 반복하고는 했다.
“아비에게 쓸 데 없는 것까지 배웠구나.”
어머니의 망령이 데미안의 머리 위에서 차갑게 비웃는다. 아무려면. 영원을 건재할 것 같은 그조차도 죽어버린 마당에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재단하겠는가. 데미안은 제법 긴 시간을 망령들의 속삭임 속에서도 미치지 않고 잘 견뎌내고 있었다. 어쩌면 진작에 미쳐버렸기에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야옹.”
사뿐히 데미안의 곁으로 다가온 고양이 알프레드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어떤 형태로든 알프레드에게는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이어서 데미안은 빠르게 몸을 돌려 알프레드의 시선을 차단했다.
“걱정 마. 작별은 아주 짧으니까.”
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해주면서. 알프레드는 그런 데미안의 말을 알아듣는지 야옹 하니 한 번 느긋하게 빼어 울더니 차분하게 제 스스로의 몸을 단장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기품이 마치 그의 이름을 가졌던 집사가 보여준 단정함과 닮아 있어 데미안은 찡그려 웃었다.
그런 데미안에게로 배트케이브 및 리그 오브 어새신의 기술과 데미안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보안을 뚫고 익명의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문자만으로 상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는 이 특유의 답답한 한숨이 가득 느껴지는 것 같은 단어의 조합을 데미안은 금세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설게 읽은 다음 미련 없이 삭제해버린다.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 데미안은 꼭 이 무덤 앞에 선다. 그러면 마치 제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꾸짖으려 박쥐의 망령이 땅 속에서 올라와줄 것만 같다는 조금 답지 않은 생각도 해본다. 물론 이 곳의 지하세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데미안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데미안은 저를 엄하게 타이르는 그에게 그가 틀린 이유 예순세 가지를 말해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버석한 묘비와 메마른 낙엽이 굴러다니는 이 묏자리는 예전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의 비석이 서있던 곳이었다. 마사 웨인과 토마스 웨인, 알프레드 페니워스의 품으로 그를 돌려주어야 마땅할 테지만 세상 무서울 것 없을 데미안에게도 염치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속일 수 있어도 제 조부모와 충직한 집사를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녕?”
인기척 한 톨 없이 성큼 다가온 딕 그레이슨이 마치 엊그제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처럼 평이한 어조로 인사를 했다. 데미안은 픽 하니 코웃음 쳤지만 자리를 피하거나 그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테리 기 죽이는 거 그만두지 그래? 네 성에는 안 찰지 몰라도 꽤 잘해나가고 있는 애잖아.”
“그 정도에 기죽을 거면 배트맨을 하지 말았어야지 않나?”
그레이슨 네 놈도 참 자존심 없는 녀석이더군. 데미안이 비죽이었다. 누군가를 쏙 빼어 닮은 고집이 뚝뚝 묻어나는 짙은 눈썹을 보다 딕은 딱 하니 손가락을 튕겼다.
“아, 이거 그거야? 나 때는 말이지~ 하는 그거?”
“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껏 저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자리를 꿰찬 배트맨이 있기나 했냐며 툴툴대는 그를 보며 딕은 마치 동생이 태어나 관심을 뺏겨 심통해진 어린 아이를 보듯 웃음이 나면서 처음 자신이 아닌 로빈을 보았을 적의 그 자신이 생각났다. 로빈이라는 사이드킥 자리에 조차 그렇게도 노엽고 브루스가 원망스러웠는데 데미안이 제 신념을 비틀면서 마저 추구했던 배트맨의 자리에 다른 이가 있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딕은 상상만으로도 뒷목이 당겼다. 거기다 테리 맥기니스는 어쨌든 유전적으로 브루스의 혈육이었으니 어릴 적 브루스의 친자라는 사실에 유독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데미안에게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났을지라도 그 존재가 날벼락과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데미안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딕은 데미안과 시선의 방향을 같이하여 브루스 웨인이란 이름이 무심하게 새겨진 묘비를 바라보았다. 딕의 얼굴은 연륜을 머금고 더없이 고요했지만 이 무덤 앞에 설 때면 그의 가슴 속에는 새까맣게 일렁이는 심해와 같은 감정이 요동쳤고 그는 그것을 묵묵히 견뎌내었다. 다만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하소연할 이가, 원망할 이가, 그리워할 이가, 사랑할 이가 세상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몸 안쪽이 송두리째 앗아가진 느낌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지만 하도 부활과 귀환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수차례 겪어와서인지 어딘가 진짜 마지막 따위는 없는 것이라고 그는, 그들은 영원히 함께일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동화적 판타지가 현실감을 가져가려는 즈음에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은 아이들의 곁을 떠났다.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로. 그렇게 홀로.
“나도 브루스가 너무 보고 싶어 리틀 디.”
계절에 맞지 않게 사무치는 바람에 섞어 딕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도, 이젠 그를 놓아줘야 해. 우린 한 번 했었잖아.”
물론 너무나 다행히 그때는 우리가 틀렸었지만, 울컥하니 올라오는 뒷말을 딕은 침착하게 삼켜냈다. 대신 딕은 담담히 말을 다음으로 이어갔다.
“브루스를 이제 그만 보내줘.”
침묵이 바람을 타고 흘러갔고 마른 잎들이 소스라치게 떨며 만들어낸 백색소음이 대신 공간을 채워나갔다. 얼마쯤을 그렇게 있다가
“드레이크에게 전해.”
그 긴 공백을 끊으며 굵은 목소리로 데미안이 말했다.
“스팸메시지 좀 그만 보내라고 말이야.”
그리고 데미안은 빈 무덤을 미련 없이 뒤로했다.
딕 그레이슨도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하기에 그 징글맞은 세월이었으니까.
데미안은 고작 감상적인 이유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규정받는 것이 불쾌했다. 아무리 클론일 뿐이라지만 배트맨을, 브루스 웨인을 죽이고 장례를 치르고 다시 되살리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딴, 아버지가 그리워서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나온 세월 동안 데미안은 전직 로빈으로서, 그리고 과거 배트맨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결국 어떻게 해도 아버지와 같은 배트맨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아왔다. 그날, 데미안의 마지막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애써 차분한 양 에이스를 쓰다듬으며 무뚝뚝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데미안에게 “너는 네가 갈 길을 가거라.”라고 말했고 그것은 데미안에게 그의 모든 인생을 부정하는 모욕이었다. 차라리 데미안에게 너에게는 배트맨이 될 자격이 없다며 단언해버리는 편이 데미안은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자신의 길을 가라니. 데미안은 언제나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의지로 그 자리에 서있어 왔다. 그러기에 그와 그렇게 충돌했었다. 그런데, 잘도. 그걸로 그치지 않고 그 모든 난장 끝에 결국 결론이 테리 맥기니스라는 것을 데미안이 납득해야한다고 하는 것이다.
데미안은 주먹을 꽉 쥐며 마구 휘두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가 저 벽 한쪽에 눈을 감고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진짜 브루스 웨인을 노려보았다. 단정하게 감긴 눈이 푸른빛 완충액 속에서 창백하지만 정말로 평온해보였고 동시에 언제 있을지 아니면 없을지 모를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기에 너무나 굳건하게 고요했다.
“차라리 당신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고 하지 그랬어요.”
그렇게 계속 고집을 부리다 배트맨으로 죽지 그랬어요.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며 데미안이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하얗게 김이 번졌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데미안은 반향 되어 돌아온 자신의 말에 스스로의 신경이 찢겨져 나간다. 벌써 이 짓도 몇 번째.
분하지만 당신이 아닌 배트맨은 나도 인정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그의 또 다른 혈육이 나타나서 배트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저기 다른 이가 당신의 자리에 있는지, 왜 당신이 아니고서는 당신의 모사품들조차도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는지, 왜 자신은 당신처럼 될 수 없는지, 왜 당신 옆에 내가 없었는지. 나는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을 텐데. 삭히지 못한 상념이 제대로 애도 되지 못한 채로 데미안의 내면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직 반 년이다. 진짜 배트맨이 사라진지는 그보다 조금 더 되었을까? 그럼에도 데미안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오르는 것들이 이미 아주 오래되어버린 것들뿐이라는 것에 절망했다. 자신은 그가 본래 그랬어야했던 것보다도 훨씬 나이가 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유전공학으로 만들어진 부작용 같은 것일까?
데미안은 잠들어있는 브루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또 몇 번째의 당신을 이용해야하는가, 차라리 진짜 당신을 깨우면 당신은 흔쾌히 일어나 자신을 용서해줄 것인가. 데미안은 누구에게 무엇을 증명하고자 하는가.
“아버지.”
마치 대답을 갈구하듯 데미안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역시나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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