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세계관 이후의 6차원 숲/오메가
블블님 리퀘스트
[둘이 로드였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났을 때 돌아온 화골숲을 보고
오메가가 무너지듯 울면서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장면]
시축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점으로 정지해버린 곳에 나이든 박쥐는 유폐되었다. 아직 남자의 감각이 온전한 것이 맞다고 한다면 뜨여있을 제 두 눈동자의 망막을 좀먹을 듯 깊게 퍼지는 암흑 속에서 브루스는 극도의 폐쇄감과 동시에 무중력 상태에 가까운 부유감을 느꼈다. 통증을 달고 살기 시작한 나이든 몸뚱이가 그가 친숙하다 여겼던 어둠에 짓눌리어 곤죽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고, 갈기갈기 찢겨져 여기저기 자신의 것이었던 고깃덩어리들이 산재하는 것도 같았다. 예전에 실험체를 자처하여 들어갔던 구덩이보다도 더 지독한 암흑이 브루스의 시신경을 시작해서 모든 인지를 엉망으로 뒤섞고 있었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침착했다. 이곳은 악령마저도 찾아들 수 없는 우주의 외딴 곳이었고, 모두에게서 버려진 곳이었으니 그 오메가는 세상 무해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주마등도, 악몽도 그 무엇도 브루스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브루스가 이미 그만큼 미쳐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 기나긴 무(無)의 한가운데에서도 브루스는 한 톨의 애정도 증오도 없이 점으로써, 얼룩으로써 단순히 존재하기만 했다.
아니. 실은 이 긴 어둠속에서도 단 하나, 오래된 뇌에 끈질기게 각인된 것이 있었으니 브루스는 자꾸만 이 1차원의 세계에마저 범접하려 눈 속에 박힌 가시처럼 하얗게 남은 잔상이 시려서 굳이 제 눈을 질끈 감아버리려고 했다. 붉은색보다도, 그 어떤 암흑보다도 지독히 선명하게 떠오른 하얀 빛이 이 다중우주에서 유일하게 오메가를 방문하는 환각이었다. 다만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브루스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죄보다도 끔찍해서 어금니가 시려울 정도로 입을 사리물었다. 그렇다고 그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이었고 오메가이며 브루스 웨인이란 망령의 뇌가 움직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브루스 본인이 지겨울 만치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자네가 이겼군.]
마지막 기억 속에서 힐끗 뒤를 돌아본 눈길로 만신창이가 된 잿빛의 배트맨을 정 없이 훑어본 로드 슈퍼맨이 딱딱하게, 한편은 체념한 듯 이야기했다. 찢기고 멍든 상처들에서는 지금이라도 불이 붙을 듯 아팠지만 그보다도 그의 지겨움과 차라리 후련함을 담은 그 한마디가 가책처럼 브루스의 심장을 튀어 오르게 했다. 그런 자신의 속내를 그가 생생하게 듣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더더욱 로드 배트맨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허리를 반듯이 펴야했고, 제 승리를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인류에게 배신당하고, 스스로의 신념에 배신당하고, 그의 연인에게마저 배신당했으면서도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차원의 틈바구니로 미끄러져나간 그를 바라보며 브루스는 몇 번이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무릎을 억지로 잡아 세웠더랬다. 그랬는데, 그의 모든 것을 바치게 했는데, 그를 영영 잃어 얻어낸 자유였는데도 결국 이 지구는, 세상은 배트맨의 헛된 희망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그것을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고서야 겨우 알았다. 슈퍼맨이 실패한 세상에서, 배트맨의 희망이라고 가당할 리가 없었는데. 브루스는 그제야 자신이 박쥐만큼이나 눈이 멀어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려면. 다시 어리석은 회선곡의 서막으로 접어든 세상은 이제 오메가의 손을 떠나버렸다. 젊은 브루스의 안일함과 어리석음을 다이애나의 지혜와 어느 순간엔가 찾아올 어린 크립토니안의 자비가 구원하기를 기원하기에 늙은이의 넉살이란 그리 좋은 것이 못 되는 것이다. 브루스의 귀에 쟁쟁하게 남은 것은 날카로운 웃음소리뿐이었다. 박쥐의 날갯소리와도 닮은 높고 거슬리는 웃음과 웃음들에 예전 같았다면 제 고막을 뚫어버렸을 테지만 이젠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변명할 기운도 염치도 없었다. 브루스는 그저 언제쯤 자신이 백골이 되어 이 점 속으로 산산이 으깨져 사라질 수 있을 지만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먼지조차 남기지 않는다면 이미 이곳을 떠나버린 남자도 자신을 덜 부정하게 여겨줄까. 그 따위의 생각이 브루스의 마지막 미련으로 남았다.
“브루스.”
눈을 계속 뜨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인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꺼풀 뒤로도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화한 빛이 내리쬈을 때야 브루스는 그것을 자각했다. 슬슬 환시 환청이 또렷해질 즈음인가 하고 브루스는 이전의 기억을 힘겹게 되짚으며 뻑뻑한 눈을 간신히 떴다. 그리고 순간, 마치 신의 광체에 타죽는 듯한 고통이 브루스의 온 감각을 할퀴었다.
“브루스.”
너무나도 오랜만이 손이라는 것을 움직여 브루스는 제 눈두덩을 감싸 쥔 채 처음 그 존재를 인지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브루스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음성이 황금비처럼 내려왔다. 브루스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망상은 그 어떤 악몽들보다도 지독했지만 이 정도로 무자비할 줄을 몰랐기에 브루스는 필사로 부정했다. 이제 와서 어떻게 그 이름을 입에 담을까. 감히 자신이 그를 바랄까. 울음소리가 새어나올 것만 같아서 너무 꽉 입술을 깨물어 잇새에 찢긴 살점에서 피가 솟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브루스는 점 속에서 더 작은 점이 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아직도 내가 보고 싶지 않아?”
그런 브루스에게로 빛줄기가 더욱 가까워지며 1차원이던 감옥은 어느덧 시간과 공간을 함유한 4차원의 세계로 급격히 팽창한다. 형체를 지닌다는 것이 이리도 괴로운 것임을 브루스는 오랫동안 잊어버렸다. 그래서 더욱 고통을 간직하고 싶어서, 고집스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자니 다정한 목소리보다는 강경한 손길이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브루스의 양손을 감싸고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는, 슈퍼맨은, 칼엘은, ...클락은 웃고 있었다.
“이제야 자네를 보았어.”
“유령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
황금빛으로 인자하게 나이든 남자가 어느 날의 말도 안 되는 꿈에서처럼 자신을 향해 미소 짓자 브루스는 필사로 거부했다. 그를 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지독한 악몽으로 끝이나 그때야말로 자신이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아 브루스는 그가 붙잡은 주먹을 더욱 꽉 말아 쥐며 그의 손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브루스의 입술에서 뜨뜻한 피가 느리게 방울져 마치 꽃망울을 틔우듯 톡하니 터져 내리자 클락이 아프게 웃으며 그것을 핥아 메마른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 간지러운 접촉에 브루스가 핏발선 눈으로 그를 매섭게 돌아보자 이제야 자신을 보아준다며 방긋 웃는다.
“이래도 내가 유령인 것 같아?”
이마를 맞대며 남자가 장난스레 속삭이자 브루스는 참지 않고 주먹 쥔 손을 들어 남자의 잘난 얼굴을 때렸다. 그는 성난 맹수처럼 슈퍼맨에게 달려들어 저 잘난 광대와 튼튼한 턱, 따뜻한 가슴 모두 흠신 두들기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울었다. 물기로 흐린 눈으로 클락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자 브루스는 덜덜 떠는 손으로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우릴 필요로 하는 곳이 있어.”
브루스가 제 배 위를 깔고 앉고 있는 것에도 아랑곳 않은 채 성난 숨을 식식 내쉬는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흉과 주름이 역사로 얼룩진 그의 뺨을 소중하게 감싸며 클락은 말했다.
“나는 자네가 필요하고.”
“이번에는 정말 죽여 달라는 건가?”
“아니.”
이번에는, 같이 죽어줬으면 해. 차원을 건너고 건너 나이든 슈퍼맨이 다정하게 말했다. 이 세상의 오점에서 브루스는 일그러뜨리듯 웃으며 눈물 맛이 나는 진한 키스를 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죽는 순간에도 이 얄미운 남자에게는 해주지 않으리라 맹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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