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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브루] 당신으로 귀결되는 나

※배트맨 웹 온리전(Chase Bat) 참가글입니다

 

닫은 눈꺼풀 위에 부서지는 아침 해가 선명해 딕이 눈을 뜨면 어린시절부터해서 그리 낯설지 않은 침실 풍경이 앞에 있었다. 방주인의 고집 탓인지, 집사의 한결같음 덕인지 딕이 가진 최초의 기억과 비교해도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공간이었지만 이 풍경과 향취 속에 머무르고 있어야할 인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높인 탁상시계가 여덟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찡그린 눈으로 확인한 딕은 심통 맞게 빈자리를 팔로 휘적여 보았다. 그래보아야 없는 인물이 갑자기 생겨날리 없었고 이 세계의 어떤 말도 안 되는(하지만 가능성 있는) 작용에 의해 조그마해진 그가 딕의 손을 다급하게 붙잡으며 또 다른 이슈의 서막을 알리는 일 역시 애석하게도 없었다. 물론 딕은 탁상시계 근처에 정갈한 필체의 메모가 불온한 기운을 뿜으며 놓여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런 일말의 경우들이 있을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귀납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딕은 어제, 아니 오늘 새벽 자신이 브루스와 침대로 들어온 시간을 어렴풋 떠올려 보며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아침잠이 많아서(정확히는 밤에 잠을 안 자서지만) 알프레드와 항상 5분만, 10분만 하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이 어제 자신과 몸을 섞은 건 피곤하지도 않았던 거냐며 볼멘소리를 하며 그 튼실한 가슴을 주무르고 하지 말라 경고하는 미운 입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 불만을 이야기할 사람이 자리에 없어서야 도리가 없었다. 예전에 그에게 있었던 수많은 상대들에게도 이런 식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브루스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고담의 매력적인 바람둥이로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어떤 다른 술수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딕은 브루스가 제게 잘 덮어주고 몰래 빠져나간 애꿎은 이불 위를 팡팡 때리면서 가자미눈으로 브루스가 남기고 간 메모를 째려봤다.

[회의가 있어서 먼저 나가마. 아침은 꼭 챙겨먹고 출근하도록.]

회—의? 딕은 픽하니 콧방귀를 쳤다. 브루스의 연중무휴 24시간 항시대기 배트맨 근무를 알고 있는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아침에 일정을 잡는 일은 정말 피치 못할 일이 아닌 이상 드물었고,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딕이 브루스의 일정을 모를 리가 없으니 정말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거기다 브루스조차도 딕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회의 운운하는 것이 뻔뻔하고 밉살스럽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딕의 심보를 사납게 하는 건 브루스가 아침 먹고 나가라는 메모를 남긴 걸 확인하자마자 잘 길들여진 경찰견마냥 뱃속이 꼬르륵하고 울려왔다는 점이었다. 브루스 때문에 배고프잖아요,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하고 브루스에게 브루스 웨인 개인 휴대전화와 배트패밀리의 비상연락망, 저스티스 리그와의 통신망, 배트케이브의 내선 등등에 메시지 폭탄을 날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냥 문자나 한 줄 보내는 걸로 마무리하며 딕은 침대에서 벗어났다.

 

 

야간 순찰을 마치고 간식 삼아 포장해 나온 젤리도넛과 커피를 먹으며 딕은 제 휴대전화의 메시지함을 들여다보았다. [브루스 때문에 배고프잖아요,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하고 보낸 문자에 답이 없어 딕이 다시 보낸 [시리얼 먹었어요.😉] 메시지에 겨우야 [그래.]라는 답을 받았다. 이마저도 오늘로부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자신의 허기에 어떻게 책임질 거냐 보낸 메시지에 좀 유난스런 연인들이 할 법한 음담이 오고가길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하다못해 부엌에 가면 뭐가 있다던가, 그게 왜 내 책임이냐던가, 그러는 나는 너 때문에 엉덩이가 아픈데 어쩔 거냐라던가 정도는 돌아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가 일에 대한 것 외에 그리 구구절절한 성격이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백번 양보한다손 쳐도 ‘그래’ 이 한 단어의 문자는 또 뭐란 말인가. 옆에 엄지를 들어 올린 이모티콘 하나라도 붙여주면, 정 그게 생각이 안 났다면 박쥐 이모티콘이라도 붙여 보내면 탈이라도 나느냔 말이다. 브루스가 저래 봬도 귀여운 구석이 제법 있음을 체득하며 한 평생을 성장해온 탓에 ‘우리 브루스도 한다면 한다고요!’가 지론인 딕인만큼 그런 무모하고 야심차다할 법한 기대를 안 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애초에 이런 거추장스러운 그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지금 브루스 웨인과 딕 그레이슨이 사귀고 있노라면 연인으로서 이런 소통에 대한 요구는 꼭 섹스할 때 어떤 특이하거나 매니악한 플레이에만 응해줄 때만이 아니라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 아닌가.

벌써 일주일째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오지 않는 이 업무 동료들과 함께 있는 단체방보다도 갱신이 없는 대화방을 딕은 무어라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야 자신도 브루스와 배트맨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업데이트 받고 있는 만큼 브루스도 딕과 나이트윙의 행동반경에 대해 이미 꿰차고 있을 테지만(제이슨은 이것을 보고 변태 같은 놈들이라며 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레드후드 역시도 크게 차이는 없다는 걸 욕을 한 본인도 알고 있을 테다.) 이건 그런 것과는 결이 다르지 않냔 말이다.

식어서 미지근함과 서늘함 어느 매에 있는 커피로 입안에 남은 당도 높은 딸기잼을 씻어 내리는 중 나이트윙 전용 호출기에 알람이 울렸다.

[A13구역, 지원 필요 -B]

이런 메시지 타이핑은 알프레드 도움 없이 혼자서도 잘하나 봐요? 딕이 잔뜩 심술이 난 아이마냥 속으로 투덜거려본다.

브루스는 지금 이스트엔드의 폐공장 구역에 있으니 지금 보낸 메시지의 좌표는 그가 겪고 있는 상황과는 별개의 사건일 것이다. 물론 거시적으로 보자면 상관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우주의 얽히고설킨 수수께끼에 대해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결국 머릿속을 오고간 숱한 이야기 중 어떤 것도 끄집어내지 못 한 채 [OK👌 -NW]하고 답변을 보낸 딕은 미련스레 제 개인용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한데 당신은 당신의 디키버드가 신경 쓰이지 않아요? 그런 이야기를 보내볼까 하는 충동이 언뜻 들지만 머릿속에서 바바라가 성대하게 한숨을 쉬어준 덕분에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나이트윙은 서둘러 지정받은 위치를 향해 액셀을 밟았다.

 

 

고담이란 도시의 자경단이자 이 다중우주 속에서 히어로로서 종사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위험과는 쉬이 멀어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거기다 이따금은 죽음조차도 넘나드는 일이 생기다보니 가벼운 뇌진탕과 한순간의 호흡곤란, 늑골의 골절과 과다출혈로 인한 저혈압 쇼크쯤은 다소 평상에 속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것도 같다. 적어도 이 고집불통에 똑똑함이 지나쳐 가끔은 바보 같은 브루스 웨인에게 그 부상의 주체가 본인인 배트맨이라면 말이다. 하필 오늘 패트롤에는 로빈도 옆에 없어서 브루스가 더 저 하는 양 무리를 했던 모양이었다.

응급처치를 끝마친 알프레드에게 큰 위기는 없겠다며 전달 받은 딕은 최선을 다해 부드러운 얼굴을 지어내며 몇 시간 전보다도 더 해쓱해 보이는 알프레드에게

“그럼 브루스 엉덩이를 차줘도 되겠어요.”

하고 농을 던졌다. 그러면 알프레드도 따라 웃으며

“제가 먼저 주인님 엉덩이를 걷어차드린 다음에요.”

하고 특유의 단정한 영국억양으로 대답했다.

“정신이 드셨는데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알프레드의 물음에 딕은 마치 클락처럼 엑스레이 비전이라도 가진 것처럼 벽 너머를 바라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서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말하며 걸음을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지금 브루스 얼굴을 보면 어째서 자신에게 잘못된 좌표를 주었는지, 왜 항상 브루스가 다치고 들어오는 걸 뒤늦게야 알게 하는지에 대해 말씨름 하다 결국 브루스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자신은 화만 꾹꾹 내리누른 채 나가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딕은 자신의 물음에 브루스가 할 대답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었을 일이기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할 것이고, A13에서 진행되는 펭귄의 밀거래를 막아야 블랙마스크로 이어지는 무기매매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 보냈다고 할 것이고, 이 정도 위험을 모르고 배트맨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딕에게는 브루스보다도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말할 테다. 딕은 단지 스스로의 생각일 뿐인 그의 말에조차도 열이 차올라서 조금 난폭하게 핸들을 돌렸다. 브루스가 저렇게 마음껏 무리를 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알프레드와 그의 가족들이 있어서이다. 물론 그는 고집과 고담에 대한 집착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니 그가 가진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어떤 형태로든 활동을 이어나가고자 할 테지만 어쨌든 그가 믿는 가족들이 그를 그런 꼴로 만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말이다. 딕이 화가 나는 점은 바로 그것이다. 브루스는 자신이 짊어진 것이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그가 소중히 하는 이들에게 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함께 논의하지 않는다. 브루스는 그것을 보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딕이 느끼기로 그것은 오히려 방치이고 고립이었다. 딕이 만약의 경우에 배트맨이 되기 위해 나이트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브루스가 이해하고 있다면 브루스 역시도 자신이 대체될 수 없음을 알고 보다 신중하고, 보다 제 스스로를 염려해야할 것이 아닌가. 딕은 두 번 다시는 브루스를 대신한 카울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딕은 브루스의 부재를 세 번은 견디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안전에 대해서, 가족의 일에 대해서 그가 혼자만 모든 것을 완결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공포는 사람을 도망가게 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있게끔 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가 극심할 때는 역으로 공격적이고 맹목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가. 딕은 크레인 박사가 새롭게 고안한 공포가스에 의해 아드레날린 폭주로 평소 배의 배를 넘는 힘을 발휘하며 날뛰는 공포갱단을 곱게 기절시키며 베인과 스케어크로가 있는 근거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공포로 인해 이성을 잃고 날뛰는 무리의 공격은 특별한 목적이나 의지 없이 그저 눈앞에 환각으로 펼쳐진 공포 대상을 제거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오히려 패턴을 읽어낼 수 없었다. 브루스가 한창 수련을 하던 시절에 전 세계 곳곳에 있는 무술 전문가 내지는 암살자를 찾아가 훈련을 받았던 것을 물론 무정형의 싸움에도 대비하고 위해 불법 격투장의 선수로 나가 싸움을 했던 적도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역시 브루스는 그의 카울을 쓰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조금은 미쳐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딕도 내심 생각했었지만 이 고담이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건들이 그의 편집증이 광증이 아닌 최소한의 안전장치임을 자꾸만 증명하고는 해서 쓴웃음이 났다. 방독면을 쓰고 나아가는 중에 결국 겁에 질린 갱 중 한 녀석에게 배후에서 방독면을 잡아 뜯기는 바람에 공포가스를 마시게 된 순간에는 속으로 브루스에게 미쳤다고 생각해서 미안하다며 사과까지 해버렸을 정도였다.

방독면이 벗겨지는 순간에 반사적으로 숨을 참기는 했지만 그걸로 가스의 흡입을 막아낼 도리는 없어서 딕은 그저 어떻게든 제정신을 잡아보고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는 중 딕은 깨진 유리 조각들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나이트윙의 모습이 아니라 배트맨의 모습이 된 것을 보았다. 아니야, 이건 진짜가 아니야. 브루스는 돌아왔고 그 카울을 자신이 쓸 일은 이제는 없을 터였다. 지금 찾아내야하는 건 베인과, 베인... 베인과 스케어크로. 딕이 다시 한 발짝 내딛으려 할 때 그의 귓가에 후우후우하고 밤 짐승의 울음소리가 스쳤다. 갑자기 안쪽 어금니가 시려오더니 딕은 어느 새인가 탈론이 되어 있었다. 그저 다른 우주의 가능성인 줄 알았던 것이 실제로 자신이 갔을지도 모를, 어쩌면 언젠가에 가고 있을지 모를 길이라는 것이 딕의 등줄기를 뻣뻣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저 서커스보이였는걸. 브루스도, 브루스도 나는 괜찮았을 거라고 했어. 딕의 필사적인 생각의 타래를 이번에는 세포 하나하나의 변이에 따른 통증이 온몸을 관통하며 다시 뚝 끊겼다. 괴물이 되어버린 나이트윙이 그의 마을을, ‘그’가 사랑하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것이 감각에 선했다. 그러다가 미칠 듯한 웃음이 괴성을 대신해 괴물의 입을 통해 하하하하하 하고 대포알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런 딕 앞으로 박쥐의 마크가 성큼 다가왔다. 딕의 모든 정체성 중심에서 구심점 또는 원심점이 되어 존재하는 저 문양이 딕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한참을 예전에 딕이 로빈이 아닌 나이트윙이 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나름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한 불안 하나가 다시 딕에게로 돌아왔다. 딕은 클레이페이스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자꾸만 변형되는 자신을 딕 그레이슨이자 나이트윙으로 고정시킨 그가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 가진 비중이 두려워졌고, 갑자기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아닌 이가 손을 뻗어 박쥐의 목을 붙잡았다.

 

 

정신이 들어보니 익숙한 침실에 딕은 누워있었다. 머리통 전체를 찌르는 두통이 상흔처럼 딕을 괴롭혔다. 딕은 아직 제 스스로가 가했던 악력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양손을 내려다보며 눈을 껌뻑였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얼빠진 듯이 느긋하게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종전의 기억이 자신에게 생생한 것임을 알고 있는 딕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일어났니?”

바리톤의 목소리가 기억의 잔여물들로 혼란한 머릿속을 조심스럽게 일깨웠다. 딕은 변명을 하려는 사람처럼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제 얼굴에 그려내려 했다. 반면에 그런 딕을 바라보는 브루스의 눈동자는 두터운 눈이 덮인 산처럼 고요한 것이어서 딕은 슬쩍 눈을 내리깔며 머쓱하니 어깨만 으쓱했다. 딕에게 브루스는 친절하게도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베인과 스케어크로는 아캄으로 수용되었단다.”

“음.”

딕은 싱거운 소리를 내며 답변을 대신했다. 브루스는 침대 옆에 높인 간이의자에 앉아 잠잠히 딕을 살피다 홀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제와 해독제를 투여했으니 이제는 괜찮을 거다. 쉬다 나가렴.”

그리고 브루스는 마치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어떤 나쁜 일도 겪지 않았던 양 이 방안에 딕을 남겨두고 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딕이 브루스의 손을 빠르게 움켜잡았다.

“나, 당신 목을 졸랐죠?”

“이번에 스케어크로가 고안한 공포가스 때문이더구나. 화학식은 분석되었으니 곧—”

“나, 당신인 줄 알고 그런 거예요.”

말을 뱉으면서 딕은 점점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을 붙잡은 딕의 손과 눈동자를 번갈아 보다가 브루스는 다시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렇게 브루스가 자리에 앉아준 건 좋았지만 딕은 금세 할 말을 잃어 초와 초 사이를 헤맸다. 사과를 해야 할까? 많이 아팠느냐고, 자신이 더 주의하겠다고 하는 것이 무난한 화두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딕은 브루스에게 그인 줄 알고서, 어떤 약물로 인한 환각이 아닌 명백하게 그임을 인지하고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그에게 덥석 말을 해버렸다. 그럼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지금이야 많이 누그러져서 그렇지만, 또 패밀리 내에서 브루스와 알피 다음으로 오래된 멤버로서 지내다보니 원만한 소통과 부드러운 분위기를 위해 공들였던 탓에 가족 중 가장 유하고 친근한 성격으로 평가 받는 딕이지만 배트패밀리에서 브루스와의 주먹다짐이 가장 많은 것이 딕인 만큼 딕도 그렇게 마냥 온화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이트윙이란 이름의 히어로를 하고 있고, 배트맨과의 다이내믹 듀오이자 보이원더였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딕도 결국은 사람의 자식이라 브루스의 무모함이나 불합리함에 화가 난 적이 있고, 만약에라도 브루스의 목을 조르는 일이 있다면 그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일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더랬다. 그 슈퍼맨씩이나 되는 클락도 농담과 진담을 애매한 비율로 섞어 그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설마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죽이고 싶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딕은 자신이 배트맨의 다이내믹 듀오였던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고, 배트패밀리 내에서 그가 만들어낸 자신의 자리에 긍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 까탈스럽고 까다로운 브루스의 연인이 자신이라는 데에도 남모른 우월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딕의 몇 번 째인가의 고백에 마지막 번을 제외하고 브루스가 이야기했던 ‘착각’이 여기에서 새삼 떠오르자 딕은 또다시 머리가 지잉하고 아파왔다. 단지 브루스가 말한 착각은 어린 시절의 동경이나 가족애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딕은 브루스에게 향한 자신의 사랑이 자신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되어 상기하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한참 말을 찾지 못하고 해매고 있는 딕에게 브루스가 퉁명하게 말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손에 더 힘을 넣었어야지.”

“목 주위에 케블라를 왜 둘렀는데 그런 말이 나와요?!”

“보다 간단하게는 칼로 찌르는 법도 있겠고.”

“브루스!”

자꾸만 끔찍한 소리를 해대는 브루스에게 딕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꾸욱 하고 온 얼굴을 감고 있는 딕의 손등을 브루스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딕이 슬쩍 눈을 뜨면 브루스가 딕의 코끝에 아프지 않은 세기로 툭 하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게 나한테 조심하라더니 이게 뭐니?”

“그건...”

미안해요. 딕의 목소리가 드물게도 잔뜩 기어들어간다. 브루스가 피식 웃더니 까치집이 지어진 딕의 머리통을 설게 쓰다듬으며 정돈해주었다. 그는 박쥐 일원들이나 알아볼 수 있을 미소를 희미하게 띤 채 있었다. 그의 미소가 의미하는 것이 피부양자에 대한 애정인지, 연인에 대한 사랑인지 브루스의 미소는 분간할 수 있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딕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이 순수하게 브루스를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집착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관계는 브루스가 처음에 우려했던 것처럼 건강한 것이 아닌 걸까? 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브루스, 있잖아요. 우리, 아니 나...”

응? 하고 딕의 뒷말을 기다리며 브루스가 코를 울려 재촉했다. 몇 번인가 입을 달싹이다 딕은 이어 말했다.

“왜 아침에 내 옆에 없어요?”

브루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메모...”하고 운을 떼려고 하자 딕은 단호하게 “나한테 거짓말하지 말아요.”하고 말하자 입술이 살짝 삐죽 튀어나왔다.

“아침에는 나도 나름 준비해야할 게 있단다.”

너야 아직 모르겠지만. 힐끗 딕을 흘겨보는 눈빛이 제법 사나웠지만 귓불이 살짝 붉어져서야 겁이 나지 않았다. 딕은 잠깐 모든 생각과 행동이 멈추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맥이 탁 풀려버린 사람처럼 하하하 하고 커다랗게 웃어대더니 주저 없이 브루스의 뺨을 꼬집어 쭈욱쭈욱 잡아 늘렸다.

“그게 뭐예요!”

딕이 크게 웃으며 자꾸 제 얼굴을 반죽하려들자 브루스가 성난 고양이처럼 그런 딕을 밀어냈다. 이젠 잘 모르겠다. 브루스와는 항상 이랬던 것 같다. 잘 아는 것 같다가도 전혀 모르고 그러다가 다시 아는 그들로 돌아오고 계속 그 반복이었다. 브루스의 그 간의 모든 것이 나름의 수줍음의 표현이었다는 걸 알고 나자 딕은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졌고 그렇게 선택했다. 어쨌든 브루스 웨인을 사랑하는 딕 그레이슨은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게 내게 사랑한다고 표현해줘요. 내가 당신으로 귀결될 수 있게 해줘요.

“브루스, 나한테 메시지 보낼 때 박쥐 이모티콘 보내줘요.”

“어째서?”

그야 물론,

“나는 박쥐가 좋으니까요.”

딕은 자신의 모든 것, 브루스 웨인에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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