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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뱃] Have We Met Before

숲뱃 전력 60분, <첫 만남>과 <거짓말>

 

“우리 본 적 있던가요?”

갸웃하고 무구하게 고개를 기울인 브루스 웨인은 설탕이 녹듯 사르르 눈웃음을 띄고서 매끈하게 잘 빼 입은 저와는 정반대로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제 덩치보다도 커서 부해 보이는 양복차림의 촌스러운 기자에게 묻는다. 요즘 시대에 레코더도 아닌 수첩을 손에 쥐고 “웨인 씨.” 하고 그를 불러 세운 클락은 몰래 폭 한숨을 쉬었고 그 찰나에 맑은 벽안이 반짝하고 장난기 어린 빛이 났다. 외계로부터 와서 이 노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강한 힘을 지닌 슈퍼맨이란 크고 작은 구설수에 오르내리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누구나가 손을 들어 부르는 존재이지만 클락 켄트는 박애주의를 표방한 한량(인 척하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누구시냐는 말도 듣고 일이 없으면 보내주겠냐는 성의 없는 손짓도 보게 되는 지구상의 평범한 직장인인 것이다.

“데일리 플래닛의 클락 켄트입니다.”

클락은 굴하지 않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첫 인사말을 그에게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큰 체격에 맞게 커다란 손을 브루스 웨인은 미지의 무언가를 보는 눈으로 신기하다 듯 꽤 오래 쳐다보더니 설게 악수를 섞고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때 클락은 약간의 서운함과 조금의 심술을 담아 지문 끝으로 그의 손목 가운데부터 손바닥까지를 아주 가볍게 간질이듯 쓸고서 떨어졌다. 브루스의 눈꼬리가 잠깐 떨리는 것을 클락은 놓치지 않았다.

자신도 브루스 웨인과의 하룻밤, 혹은 구설수, 그의 재력 아니면 재미를 위해 달려드는 부나방이 되어 지금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의 허리를 당겨 안고서 귓가에 “예쁘다.”고 속삭여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문득 고개를 들었지만 그래서는 브루스 웨인과 클락 켄트라는 역할극이 성립되지 않는다. 클락이 말했듯 자신은 지금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스몰빌에서 대도시로 건너와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한 클락 켄트였으니 말이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간 발코니에서 마주한 브루스에게 입맞춤을 나누고 저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답하고자 발돋움하기 전까지는 둘은 오늘에야 처음 본 그런 사이인 셈이었다.

 

 

스스로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은 자신이 누가 되려하는가로 이어져 클락은 본능보다도 자아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흐르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했고 그들이 정의내린 삶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클락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존재들이 클락 켄트였고 슈퍼맨이었다.

“우리 본 적 있던가요?”

그래서 곤란하다 듯이, 미안한 듯이 찌푸려든 선한 그의 눈매가 클락의 세상이 붕괴했음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브루스가 클락이 기억나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꺼내는 순간, 그 말은 곧 클락의 사망선고와도 같은 것일 테다. 그의 삶에 순순히 기뻐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마치 조나단 켄트와 마사 켄트가 자신을 떠났을 때 느꼈던 커다란 상실감으로 클락은 발아래가 무너지는 것만 같아서 자세를 다잡는 데만도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괜찮아요?”

브루스는 순수하게 타인이 되어버린 클락이었지만 그럼에도 파리한 그의 안색이 신경 쓰였는지 선선히 한 걸음 다가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맑은 눈동자에 들어있는 자신은 슈퍼맨도, 클락 켄트도 아닌 클락 조차 알지 못 했던 또 다른 누군가였다. 그 이름이 ‘고독’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남자는 브루스에게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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