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울려 바라보니 화면에 좀처럼 보기 드문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클락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 이름을 구성하는 알파벳에 반사적으로 가슴이 뛰었다.
"무슨 일이야?"
"전시회 오겠나?"
앞뒤 미사여구 없이 본론을 꺼내드는 서늘한 목소리에 클락은 소리 없이 웃으며 "전시회?"하고 되물었다.
"히어로를 주제로 열린다는군. 웨인 엔터프라이즈에서도 후원하기로 했지."
"꽤나 건설적인 주제네?"
배트맨을 통해 고담을 보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인 클락은 으레 그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며 조금 놀랍다는 듯 얘기했다.
"정의의 도시, 사랑의 도시잖나."
"우아..."
태연하다 못해 능청스런 브루스의 말을 듣고 클락은 일부러 얼굴을 찌푸리며 야유했다. 휴대전화 너머로는 상대가 보이지 않을 테지만 브루스는 클락의 얼굴을 짐작이라도 한 듯 쿡쿡하고 조용히 웃었다. 그 미세한 진동에 클락은 왜인지 등골이 간지러웠다.
아주 잠시 숨을 죽인 클락은 곧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거, 데이트하자는 거지?"
그에 브루스는 잠시 말을 아낀 뒤,
"내키면 취재라도 하던가. 히어로면 분명 네 잘난 '빅 블루'에 대한 것도 있을걸? 아님 기업의 문예후원과 탈세에 관해서 조사할 마음은 없나?"
하고, 모르는 이가 듣기에는 쌀쌀맞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했다. 어찌나 외풍이 몰아치는 말이던지 그의 말은 마치 힐난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하지만 클락은 그저 즐겁게 웃었다. 브루스가 에둘러 말하기에는 그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것부터 이미 승기는 클락에게 있었다.
"난 데이트가 좋아. 데이트로 받아들일게."
"...좋을 대로."
그 말을 끝으로 브루스는 서두르듯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를 알리는 화면이 떠오른 뒤 곧 전화는 잠잠해졌다. 클락은 몇 번째 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런 클락에게 마치 웃지 말라는 듯 곧 브루스로부터 자세한 일정과 장소에 대한 문자가 날아왔다.
분명 전시회 장소에서는 클락은 어벙한 기자의 차림새로 브루스는 돈 많은 한량의 모습으로 함께 할 테지만 클락은 마치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 마냥 능청을 떠는 브루스가 재밌었다. 항상 클락이 브루스에게 "웨인 씨."하고 운을 떼며 그를 부르면 브루스는 그를 돌아보면서 가늘게 눈꼬리를 접으며 "아, 그 기자 분이시군요. 어디보자... 성함이, 이런. 성함이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하고 약 올리듯 이야기했다. 그럼 클락은 다시 자신을 소개하는 거다. "켄트입니다. 클락 켄트요."라고.
일정보다 일찍 고담에 도착한 클락은 웨인 저택으로 향하기전 꽃집에 들렀다. 브루스는 클락과 전시회에서 마주칠 걸로 생각하는 듯 했지만 클락은 그보다 일찍 브루스의 얼굴을 보기로 했다. 분명 찾아가서 꽃다발을 안겨줘 봐야 그 꽃은 금방 그의 집사의 손으로 넘어갈 테지만 클락은 그저 그가 건네는 꽃다발을 안아든 브루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전시회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자신과 브루스 사이에 꽃을 주고받을 여유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클락은 잘 알고 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여유를 줄 마음이 없다, 이겠지만.
클락은 망설이지 않고 빨간 장미를 주문했다. 클락은 자타가 공인하듯 꽤나 감성적인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가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 아니기에 그는 더 인간적인 것일지도 몰랐다. 클락은 판에 박힌 미덕과 감성들에는 그만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다 여겼고 그를 충실하게 이행했다. 브루스는 그런 클락을 마치 구닥다리의 정장을 보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클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왜냐면 브루스는 그런 클락을 더없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복한 장미다발을 품에 안고 밖을 나오자니 어쩐지 바깥이 가게를 들어서기 얼마 전보다도 눈에 띠게 어두워져 있었다. 클락은 무거운 구름으로 들어찬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그런 타이밍을 재기라도 한 듯 클락의 콧등 위로 톡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어하고 주춤하는 사이에는 이미 주위가 빼곡한 빗줄기로 가득했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를 피해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따라 클락도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 클락의 움직임을 따라 붉은 물결이 그의 다급함을 얘기하듯 정신없이 넘실거렸다.
약속한 손님이 없을 텐데도 갑자기 울린 저택의 초인종에 알프레드는 반듯한 자세로 서둘러 현관으로 향해 걸어가... 려 했으나 그런 그를 브루스가 말렸다. 어느 때처럼, 아니 어느 때보다도 깔끔하고 세련된 차림을 한 브루스의 모습에 알프레드는 저도 모르게 이미 이 세상에 없는 토마스와 마사를 찾으며 그분들께 두 분의 아드님이 이렇게나 멋지게 자랐다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그런 그의 속마음을 눈가에 희미한 미소로 숨긴 채 물었다.
"지금 오시기로 한 분이 계셨나요?"
"오기로 한건 아닌데, 짐작은 가요. 내가 나갈게요. 다림질하느라 바쁘시잖아요."
브루스는 장난스레 알프레드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알프레드는 그에 새침하게 입가를 삐죽이곤 마치 어떤 권리를 양보하듯 과장되게 브루스에게 현관 쪽으로 손짓으로 안내하곤 다시 그가 있던 곳으로 총총총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브루스가 잠시 웃으며 보다 현관으로 다가갔다. 문을 여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클락이 서있었다.
물론 퍼붓는 소나기 속에서 물에 빠진 시골뜨기 꼴로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전화는 뒀다 죽 끓여먹었나?"
브루스가 클락의 팔을 끌며 한숨 쉬듯 말했다. 클락은 곤란한 듯 웃었다. 그의 안경은 빗물과 뽀얗게 서린 김으로 이젠 안경이라기 보단 안대가 더 맞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하면 놀라지 않을 거 아냐."
그야 사람이 갑자기 비에 쫄딱 절어서 나타나면 안 놀랄 일에도 놀라는 법이다. 브루스는 다시 한숨을 쉬며 수건을 가져오겠다고 저택 안쪽을 향해 걸어가려했다. 그런 브루스를 클락이 조심히 그의 손을 잡아 말렸다. 클락은 이미 외출할 채비를 마친 브루스의 옷을 망가뜨리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였다.
"그보다, 이거... 비랑, 사람들이랑 좀 부딪히느라 망가졌는데... 그래도... 어디 둘 데 없을까?"
클락이 소중히 안고 있는 꽃다발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사실은 브루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이 꽃다발을 안기고 싶었지만 이렇게 빗물에 젖어서야 그럴 수 없었다. 그럼 적어도 그의 저택 어딘가에 잠시 동안이나마 어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거로도 좋을 것 같았다. 브루스는 클락의 눈길을 따라 같이 장미를 보았다. 물론 처음 클락을 본 순간 그가 자신에게 줄 꽃을 사들고 왔다는 건 알았지만 브루스의 우선순위는 꽃이 아니라 클락이었다. 그 우선순위가 자기에게 꽃을 가리킨 후에야 비로소 시선이 그리로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꽃을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닐 텐데?"
"내가 꽃을 줄 사람은 자네가 맞아."
클락이 순박하게 말했다. 그에 브루스가 빙긋 미소를 띠웠다. 그의 귓가가 전보다 조금 붉게 물든 것을 클락은 똑똑히 보았다. 브루스는 클락이 품에 조심조심 안고 있던 꽃다발을 주저 없이 빼앗듯 받아 안아들었다. 브루스의 옷 가슴팍이 꽃다발에 묻은 빗물과 장미의 붉은빛에 물들어갔다.
분명 저택에 도착하기 바로 전 확인한 꽃다발은 처음 샀을 때보다 꽃대도 몇 개 부러지고, 꽃잎도 단정하지 못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는데 막상 그게 브루스의 품안에 있으니 그 어느 꽃보다도 예뻐 보였다. 그리고 그걸 품에 안은 브루스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둘 다 이 꼴론 어디 못 가겠군. 씻고 차라도 하겠어?"
브루스가 클락의 빈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전시회는..."
클락은 괜히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했다.
"데이트가 하고 싶다면서?"
브루스가 붉게 웃어보였다. 클락도 브루스의 빛에 물들 듯 따라 웃었다.
제목이 도통... 반짝 떠오르는게 없다.
글 쓰면서 드는 생각,
1.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주인님이라 불러야하는가 도련님이라 불러야하는가. -> 남들이랑 있으면 주인님으로?
2. 브루스는 알프레드에게 존댓말을 할까, 반말을 할까, -> 내 취향에 따라 미묘한 존댓말로.
3. 클락과 브루스는 서로를 자네라고 해야하는가, 너라고 해야하는가.
4. 내 히어로는 일을 안한다. 일코로도, 히어로로도... -> 괜찮아, 대신 연애하잖아? 근데 내가 고자.
[엄마, 우리 동네 히어로랑 저 동네 히어로랑 썸타요] 이런 제목으로 개그... 개그 보고싶다. 전에 트윗 했었는데, 뱃이 숲 보면 긴장되고 가슴 떨려서 그걸 숨긴답시고 (특히 숲은 귀가 좋으니까 더더욱 그 생체 반응을 숨긴답시고) 격하게 업어치기 메치기 패대기. 그리고 숲은 오기돋아서 더더 뱃에게 적극 다가간다. 이걸로? 개그, 개그가 좋다. ...근데 내가 치는 개그는 재미없어. 맹물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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