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서 렉스 루터의 모진 명줄이 끊어진 후로 세상은 나날이 조용한 곳이 되었다. 그저 한 번의 선택이었다. 그 한 번의 선택이 이토록 멀고 먼 현재를 이끌었다. 이 오늘을 손에 넣지 못해 과거의 자신들은 그토록 번민하고 소중한 이들을 잃었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면, 그 선택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허탈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브루스는 습관처럼 커다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고담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건들을 비추는 화면에는 별 먹구름 없이 청량한 푸른빛만이 가득했다. 브루스는 그것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아니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동굴 안은 고요했다. 말하자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저스티스 리그가 로드로 그 이름을 바꾸고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세상을 위해, 그 평화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체제를 잡기 시작한 바로 직후, 배트케이브와 웨인 저택 안에서는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지금은 말수가 지나치게 적어진 나이든 집사는 이마의 주름을 깊이 하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이트윙과 로빈, 배트걸은 브루스를 향해 제정신이냐는 소리를 몇 번이고 계속했다. 그런 그들의 소음을 브루스는 손바닥 하나로 거부하며 그들의 다른 이름을 거두어갔다. 이젠 이 아이들이 이 미친 도시 속에서 위협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더 정확히는 위협에 발을 딛는 것조차 아이들에게는 금지될 것이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걸로 만족했다. 더 잃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1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저스티스 로드의 활동이 안정화되고 세상이 그들에게 수긍하고 협력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평화로웠다. 고담은 이제 더 이상 배트맨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질서 잡히고 깔끔한 도시가 되었다. 브루스는 어두운 동굴 한켠에서 지난 일들을 곱씹고 곱씹으며 칙칙한 행복을 떠올렸다. 두 달 전에 찾아왔던 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따라 작은 불씨 하나도 함께. 하지만 브루스는 이를 악물고 생각을 멈추었다. 모든 것은 이미 전에 되었어야할 일일 뿐이었다.
“더 음침해져서 어쩔 셈이야.”
등 뒤의 어둠 속에서 들려온 소리에 브루스는 어깨를 잠시 떨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를 돌려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슈퍼맨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 유난히 그의 가슴에 새겨진 희고 붉은 그의 문양이 도드라졌다. 잠시 그것을 보던 브루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슈퍼맨도 땅에 내려와 그의 앞에 몇 발짝 더 다가왔다.
“괜한 말이나 하고 싶어 여기에 왔나? 자네도 어지간히 심심한가보군.”
“심심하지 않아도 난 괜한 말을 하러 여기 올 권리가 있을 텐데?”
콧등, 볼, 입술을 따라 가볍게 떨어지는 슈퍼맨의 키스를 받으며 브루스는 한숨처럼 “아무려면.”하고 답했다. 그에 더더욱 기꺼운 듯 웃는 슈퍼맨의 눈은 이상하리 만치 형형했다.
“굳이 여기서 고담을 지켜보지 않아도 와치타워에서 이 도시에 대해서도 관리하고 있을 텐데? 아무리 평화롭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히어로’라면 출근 도장정돈 찍어주는 게 어때?”
브루스의 등 뒤로 보이는 화면에 잠시 눈길을 준 슈퍼맨이 매끄럽게 말했다. 그에 브루스는 김이 빠진 듯 하하고 웃으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 찰나를 슈퍼맨은 용서하지 않고 곧 브루스의 턱을 들어 자신을 향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워낙 평화로우니 말이지. 명예퇴직이라도 준비해야하는 건 아닌가 싶군.”
브루스가 얼없는 농담을 하듯 희미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재미없는 농담이 슈퍼맨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의 얼굴은 금방 온기를 잃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요 일 년 동안 그의 이런 얼굴은 이미 익숙해졌을 텐데도 늘 환영처럼 떠오르는 것은 햇빛처럼 웃던 클락의 얼굴이었다. 감히 그립다 말할 수조차 없는 기억이었다. 브루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게 우스갯소리라도 해보라고 했던 것 치곤 반응이 박하군.”
“자네가 어디 허투루 말할 사람이야?”
“나도 나이가 드나보지.”
브루스가 웃으면서 여전히 그의 턱을 잡고 있는 슈퍼맨의 손을 조심히 떼어냈다. 그 손은 금방 슈퍼맨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브루스는 구태여 그것을 빼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주 잡지도 않았다. 그저 잡힌 채 브루스는 얌전히 슈퍼맨의 손 안에 있었다.
슈퍼맨은 붙잡은 브루스의 손을 들어 살짝 허리를 굽혀서 그 손바닥 위에 길게 입을 맞췄다. 장갑 너머로도 그의 온기가 절박하게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왔다. 브루스는 그 광경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등 뒤의 모니터의 불빛 때문에 브루스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가볍게 붙잡혔을 뿐인 손이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다. 그의 입맞춤이 마치 족쇄처럼 가슴을 옥죄었다.
“...제발. 브루스.”
여전히 브루스의 손을 잡은 채로 슈퍼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단정한 클락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이 났다. 그의 눈동자는 무자비하게도 또는 애처롭게도 보였다. 브루스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인물이 자신의 생체 신호를 낱낱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태여 몰래 숨을 삼켰다.
“내가 자넬 필요로 하다는 걸 알면서 그런 말 하지 말아줘.”
애당초 모든 것은 ‘잃기 싫다.’는 마음 하나에서 시작했다. 그건 먼 과거에도, 지금에도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브루스는 클락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이미 잡힌 손에서 둘 사이의 거리는 0이었다. 그리고 분명 그와 자신은 서로를 눈앞에 마주하고 있을 텐데도. 어째서, 이렇게나 멀게 느껴질까. 그 날. 더는 무엇 하나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그에게 동조했던 그날. 그 때부터 브루스는 몇 번이고 슈퍼맨을, 클락을 지지했다. 배트맨에게선 상상도 할 수 없던 맹목적일만치 단단한 지지였다. 차라리 자기암시에 더 가까웠을 정도로.
브루스는 무거운 손을 움직여 클락의 손을 맞잡아 보았다. 그 손에 조금 아플 정도로 클락의 손이 대답해왔다. 가슴이 느낀 무게에 비해서는 소심하게마저 느껴지는 악력이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슈퍼맨의 얼굴을 바라보며 브루스는 다시 웃었다. 무기질적인 그 얼굴을 보며 브루스는 클락을 떠올렸다. 사는 게 더더욱 복잡하고 괴롭기만 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 속에서도 햇살처럼 웃던 클락을 떠올렸다.
물론 브루스에게 그를 그리워할 자격은 없었다. 브루스는 클락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에게로 다가가면서 클락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 귓바퀴 위에 몇 번 키스를 보냈다. 과거의 자신이 독려해서 지금에 이른 눈앞의 존재에게. 브루스가 자기 스스로를 어리석게 여기는 만큼 여전히 사랑하는 그에게.
“재주에 없는 일을 하자니 영 젬병이군. 같이 위로 가겠나?”
가벼운 어투로 브루스가 클락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슈퍼맨은 아무 말 없이 브루스의 허리를 안아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번 말은 마음에 들었는지 슈퍼맨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슈퍼맨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브루스는 지금은 머릿속에 떠오른 작은 불씨를 외면했다.
등 뒤로 멀어지는 동굴에서 희미하게 어딘가에서 잠을 깬 박쥐의 날개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