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숲뱃... 원작의 흐름과는 (언제나 그렇듯) 전혀,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는 이야기.
“―루스, 브루스.”
남자의 목소리에 브루스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뜬 눈 사이로 낮게 뜬 주황색 햇볕이 스며들어 잠시 미간을 좁혔다. 간신히 눈이 햇빛에 적응한 후에야 브루스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있었다. 그런 브루스의 얼굴을 그를 안아 들고 있는 남자가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그나마 펴졌던 이마의 주름이 다시 잡히고 말았다.
태양의 높이로 보아 지금에서 다소 얼마 전, 갑자기 저택에 남자가 찾아왔다. 젊었을 적에도 남자가 불쑥 브루스의 영역에 고개를 들이미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짜고짜 함께 갈 곳이 생겼다며 브루스를 안아 날아갈 채비를 하는 건 꽤나 드문 일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기전에 브루스가 어떻게든 저지를 했었던 탓도 있지만.
물론 머리가 새고 지긋한 나이를 먹은 지금이라 해서 브루스가 고분고분 남자의 품에 안겼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의자에 앉아 간간히 에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니터링을 하다 남자의 손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브루스는 험악한 인상으로 남자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그러나 남자는 나이와 함께 능구렁이도 잡수었는지 그런 브루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그저 공중에서도 몸을 바동거리는 브루스에게 “그러다 다쳐.”하고 김빠진 소리만 할 뿐이었다. ‘똥고집.’하고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불평을 집어 삼키며 브루스는 결국 고담이 시야에서 멀어질 쯤 되어서야 반항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이왕 이렇게 된 거 편안한 자세나 잡자 싶어 몸에 힘을 빼던 게 어느새 잠이 들었었던 모양이었다.
브루스의 기분이 좀 더 상하기 전에 남자는 브루스를 얌전히 땅 위에 내려놓았다. 탁 트인 평야에 저물어가는 해가 오늘 하루의 마지막 빛을 내고 있었다. 브루스는 이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곳은 남자의 고향이었다.
세월이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까마득한 것으로 세상은 곧잘 그를 따라 예전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곳. 이 캔자스의 고즈넉한 시골마을만은 누군가가 소중하게 똑하니 떼어내어 보관한 듯 모든 풍경이 온전했다.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지?”
그렇다고 브루스가 모든 상황을 수궁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자네가 바깥 공기를 쐰 횟수가 한 손에 꼽혀. 슬슬 걱정 됐거든.”
남자는 유연하게 웃으며 주름이진 브루스의 눈가를 쓸었다. 세월이 남긴 흔적 외에도 브루스의 만성적인 피로가 묻어난 눈가가 따스한 손길에 파르르 떨렸다. 평온이 바람을 따라 졸음처럼 찾아들었다. 브루스는 한손으로 남자의 손을 쳐냈다.
“난 바빠.”
“브루스. 후임은 장식으로 데린 게 아니잖아? 그 애를 좀 더 믿어봐.”
“그 아인 아직... 잠깐. 혹시 테리가 부탁하던가? 시끄런 노인네 좀 달래나 보라고?”
브루스가 인상을 쓰며 날카롭게 물었다. 브루스는 남자가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당황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양손으로도 모자라 머리마저 휘저으며 적극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하지만 브루스는 그저 흥하니 콧김만 내뺄 뿐이었다.
“부탁은 내가 했어. 자넬 빌려달라고.”
남자의 얼굴을 외면하듯 모로 고개를 돌렸던 브루스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으며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얼굴은 지나온 세월에 비하면 젊었지만 그의 눈동자의 깊이가 선명히 그가 지내온 시간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단정한 얼굴을 브루스는 조금 아련한 듯, 아득한 듯 바라보며 자신은 물건이 아니라는 비아냥거림은 일단 입 안으로 감추었다.
브루스는 나이가 들 때마다 언제나 짤막한 그의 어린 시절에 보아온 부모님을 떠올렸다. 브루스가 어릴 적 이미 어른이던 두 분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굳세어 보였다. 비록 두 분의 목숨은 너무나도 일각에 그 꽃을 떨어뜨리고 말았지만. 하지만 자신은 어땠을까. 브루스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비틀리며 곡예 하듯 지나온 세월을 헤아렸다.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자신은 그럼에도 여전히 미숙한 존재였다. 브루스는 그런 자신을 숨기기 위해 방어와 회피, 외면 등 모든 수단을 쏟아 부었다. 덕분에 브루스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과거의 남자에게도 물론.
남자의 눈은 젊을 적만큼, 아니 그때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는 그 이야기들 중에서 무언가를 건져내려 그 푸른 바닷물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브루스의 머릿속 한 끝에서부터 시작된 동요가 천천히, 심장을 타고 내려왔다. 눈앞의 남자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브루스의 영역을 침범하려 들었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브루스는 한숨을 쉬었다.
“가끔은 괜찮잖아. 정말 걱정이 돼서 그래. 그리고...”
남자는 웃으며 엄지로 등 뒤의 집을 가리켜보였다.
“이 집. 자네가 맡아 준거지?”
줄곧. 계속. 남자의 존재가 전설로 혹은 퇴물로 변색되어버린 무심한 시간 속에서.
“...그야, 여기가 자네 집이잖아. 클락 켄트의...”
천천히. 브루스는 마치 자신이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는지 확인하면서 말하듯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남자는, 클락은 웃었다. 오래 전, 세상에서 그 존재를 잃었을 남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클락 켄트가 되어 웃고 있었다.
“있지 브루스.”
스몰빌은 바람마저도 아늑한 곳이었다. 그 바람을 잠시 헤아리며 클락은 조용히 표정이 굳어든 브루스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 광경을 아주 오래전, 어느매에인가 봤던 기억이 있었다.
클락은 죽음과 같은 세월을 떠올렸다. 온화하던 도시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때, 클락 켄트가 더 이상 그 존재 의의를 잃었을 때, 체념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세월 속에서 브루스는 클락을 기억했다.
“이젠... 날 옆에 둘 수 있겠어?”
브루스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하, 하고 한숨인지 힘없는 웃음인지 구분이 어려운 소리를 내며 클락을 바라보았다. 깊은 눈동자. 브루스는 남겨지기 전에 스스로 혼자가 되는 법을 알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러질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 따뜻한 사람이었다. 클락 켄트는 바보였고, 애틋했다.
“저 노을 보이나?”
브루스가 평야의 끝에 걸린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은 벌써 오렌지 빛을 잃고 서서히 푸른 밤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저만큼. 찰나에 사라질 거라는 건 알고 있나?”
“자넨 그러기엔 똥고집이잖아.”
“농담하자는 게 아니야.”
브루스는 엄하게 클락을 바라보았다. 그에 클락 또한 표정 없이 그를 보다가 결국에는 빙긋 웃어버리고 말았다.
“멍청하긴.”
브루스가 한숨처럼 말했다. 클락은 철없는 어린아이 마냥 그런 브루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 클락의 손길을 브루스는 어깨를 털어 치워냈다. 클락은 브루스의 심사가 꼬일 것을 알면서도 결국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브루스의 어깨가 푹하고 꺼졌다.
“슈퍼맨이 노망이 든 건 아닐 테고, 내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정도는 알겠지?”
“글쎄...”
클락이 황혼이 남긴 찰나의 풍경이 밤 속에 잠드는 것을 바라보며 말을 끌었다.
“모르겠어. 내가 자네랑 있고 싶다는 거 밖에는.”
“이봐...”
클락은 짜증이 난 듯, 혹은 난처한 듯 주름이 깊어진 브루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살 피듯 문질렀다. 이번에 브루스는 클락의 손을 치워내지 않았다. 그저 내려앉은 어둠 속에 속내를 감춘 그의 눈동자가 클락의 앞에 있었다.
브루스는 왜 항상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걸 좋아하는 걸까. 클락은 젊을 적의 망설임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젠 그에 맞장구를 쳐주기엔 클락에겐 인내심도, 시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말마따나 그 잠시 잠깐에 날 옆에 두지도 못하겠어? 쪼잔 하기는.”
“있는 놈이 더하다는 얘기, 들어봤나?”
“없는 놈도 언제까지고 없이 살지는 않거든. 그게 바로 인간의 경이 아니겠어?”
유들유들한 말투로 이야기하면서도 클락은 더없이 진지하게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고집과 욕심. 세월은 참 멋진 것을 선물하지 않았던가. 브루스는 불안한 발밑을 그저 지팡이가 없는 탓으로 돌리며 일부러 더 꼿꼿이 등을 세웠다. 브루스의 눈이 꼭 게임을 시작한 배트맨처럼 신랄하게 빛이 났다.
“차 있나?”
브루스가 클락을 뒤로하고 집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응. 어제 챙겨놨어.”
클락은 곧바로 그런 브루스의 뒤를 따라 그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으며 답했다. 그런 클락의 손에서 살짝 벗어나며 브루스가 뒤돌아서 씨익 하고 못된 장난이라도 떠오른 듯 웃었다.
“차를 끓여주지.”
“...자네가?”
클락이 못미더운 듯 말하며 현관의 문을 열었다.
“이래봬도 이젠 제법 괜찮은 걸 마실 수 있게 되었어. 바바라도 좋아하더군.”
“헤에... 알프레드가 참 자랑스러워하겠네.”
“새삼스럽긴, 알프레드는 날 언제나 자랑스러워했어.”
현관 뒤로, 두 사람의 실없는 이야기가 모습을 감추고 집 안은 환한 불빛으로 밝게 물들었다.
황혼이 저물고 긴 밤이 찾아온다. 서툴고 고집스런 브루스가 준비한 차의 향과 속절없는 세월을 보낸 두 사람 사이의 길고 긴 이야기가 그 밤을 채워나갈 것이다. 간간히 웃음소리가 섞인 불빛이 밤 속에 조용히 퍼져갔다. 그 풍경이 소중하게 내려앉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 속에.
...그래서 두 할아버지 결혼식은 언제라는 걸까?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숲뱃(할?)] 세상의 끝 (0) | 2015.09.12 |
---|---|
8/29 숲뱃전력 '달밤' (0) | 2015.09.04 |
[숲뱃] 꽃다발 (0) | 2015.08.24 |
8/15 숲뱃전력 ‘키스의 의미 : 손바닥-간원 귀-유감’ (0) | 2015.08.15 |
[숲뱃] 위로 (0) | 2015.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