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휘영청 하니 떠오른 밤이다. 굵은 달빛이 꼭 진주알처럼 도시로 떨어졌다. 그러나 빼곡히 들어선 높다란 건물들 탓에 환한 달빛은 오히려 도시 사이사이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고담의 밤하늘에 또 하나의 달이 다급한 외침처럼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일 오전부터 있을 고담과 메트로폴리스 간의 기술 컨벤션 취재를 위해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클락 켄트는 고담을 찾아왔다. 그가 머물기로 한 숙소에서 키를 받고 방 안에 들어섰을 무렵 하늘에는 배트시그널이 떠올라 있었다. 클락은 열리지 않는 유리창 너머로 고담 시 최고의, 혹은 최악의 풍물을 목도한 셈이었다.
얼마 없는 짐을 침대 옆에 갈무리 해두고 클락은 창가에 있는 낮은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딱딱한지 폭신한지 애매한 시트는 어딘가 몸에 맞지 않듯 불편했지만 이 지구상 대부분의 의자들은 그러했으므로 클락은 불평하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창 밖 도시에서 소리 하나하나가 흘러들어왔다.
제정신이 박힌 고담 시민이라면 서너 번 문단속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뒤 깊은 잠에 빠졌을 시간이었다. 달은 이제 하늘의 정점을 찍은 후 서서히 땅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 시각에 어수룩한 외견의 외지인 기자는 겁도 없이 혼자 어둠이 내리깔린 골목길을 서성이고 있었다. 클락이 그런 대담하다 못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의 또 하나의 정체가 슈퍼맨이기 때문에도 있었지만,
“켄트.”
그가 이 도시의 그림자 속에는 배트맨이 깃들어있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질의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이하게 밝은 달,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고담의 골목,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배트맨이라는 삼박자가 갖춰진 상황에서 클락은 미소 지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배트맨의 이마에 있던 고랑이 더욱 깊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달구경이라면 더 안전한 곳에서 하지 그러나.”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한다면 충분히 걱정의 말이 될 수 있을 이야기를 배트맨은 특유의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네모진 안경 뒤에 있는 남자는 그런 뉘앙스 하나하나에 동요하는 녹록한 순둥이는 아니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그러하다고 착각하기는 했지만.
클락이 그의 몸보다 살짝 더 큰 정장 자켓의 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창도 열리지 않는 숙소에서 달을 취재할 수는 없잖아?”
“내 실력이 녹슬었나? 내가 알기로 그쪽이 취재할 내용은 그런 게 아닌 걸로 아는데.”
“물론 배트맨, 당신이야 언제나 완벽하지. 하지만 기자도 꽤 바쁜 직업이라서 말이야. 소재가 그곳에 있다면, 언제든 그곳으로 가야해.”
“그렇다면 더더욱 왜 자네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군.”
달빛이 닿지 않는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배트맨이 차갑게 말했다.
그가 두르고 있는 새까만 카울과 망토 탓에 그는 마치 도시의 어둠에 녹아드는 듯했다. 저 하늘의 달을 지상으로 끌어내렸을 때 달은 빛을 반사하는 위성이 아닌 표면이 우둘투둘한 한낱 돌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고담만이 띄울 수 있는 달이 저문 지금 클락의 앞에서 배트맨은 하나의 그림자가 되어있었다.
히히히! 하하하! 아주 먼발치에서 들었을 뿐인 웃음이 클락의 머릿속을 다시 스쳤다. 이 밝은 달 아래서도 고담의 밤은 어둠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채우듯 배트맨이 도시를 누볐다.
“어디보자, 아, 배트맨. 최근 고담은 어떤가요? 활동 초반보다, 고담의 정의에 진척이 있다고 생각해요?”
부러 소리를 내어 수첩의 장을 걷으면서 클락이 물었다. 배트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슈퍼맨과 활동하는 일이 뜸하네요?”
“켄트, 장난은―”
“그와 활동하는 건 어땠나요? 둘이 성향은 다르지만 꽤 잘 맞는 거 같았는데.”
클락의 뜬금없는 질문이 이어지자 배트맨의 발이 클락이 서있는 달빛이 비치는 쪽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빌딩 숲속으로 사라졌을 그가 성질이 났든, 헛소리를 늘어놓는 클락이 걱정이 되었든 간에 그에게 한 발 다가온 것이다.
클락은 배트맨의 양팔을 잡아 달빛 속으로 걸어 나오는 그를 저지했다. 박쥐를 그의 원래 보금자리인 아늑한 동굴 속에 놓아주듯 클락은 배트맨을 어둠 속에 묻어놓았다. 하늘의 밝은 달이 클락과 배트맨 사이를 그림자로 메워놓았다. 바깥에서 바라보자면 마치 클락이 어둠과 춤이라도 추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히히! 하하! 살이 뭉개지고 피가 터지면서도 끈질기게 따라오던 웃음소리. 몇 시간 전 클락은 폭력과 광소를 귀에 담으며 초조하게 의자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니 환한 달이, 태곳적에는 밤눈이 어둡던 인간에게 안도감을 주었을 달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주먹이 무언가를 힘껏 올려붙이는 소리. 클락은 만약 자신이 저런 식으로 굴었다면 벌써 여럿 잡았을 것이라는 웃을 수 없는 농담을 떠올렸다.
“최근 가장 힘든 일은 뭐였어요?”
클락은 질문을 계속했다. 인터뷰 하는 자세가 글러먹었어. 이 와중에 브루스가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잠잠히 있었다. 배트맨에게 있어서 고담의 일을 온전히 그 혼자서 해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눈앞의 남자에게는 그것이 어마어마한 인내였을 터였다. 그저 적확한 상황판단이었을 뿐이라고 브루스는 생각했다. 배트맨에게는 슈퍼맨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부르지 않았다. 브루스는 클락이 배트맨의 일에 슈퍼맨이 개입해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생각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예전 같았으면 싹 무시해버렸을 내용에 별 의욕도 보이지 않는 인터뷰를 가장한 헛소리를 듣고 있는 건, 그의 과장된 어투와 자신을 붙잡은 손에서 묻어난 동요를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카울 밖으로 드러난 배트맨의 맨 턱이 마치 이를 악문 듯 굳게 닫혀 있었다. 그것을 계속 바라보면서 클락은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했다.
“전에 슈퍼맨에게 그가 달을 부술 수 있다고 했다던데, 정말인가요?”
뱃시, 자기! 광대는 박쥐를 그렇게 불렀다. 배트맨과 조커는 마치 같은 곳에 있으나 다른 것을 바라보듯 서로에게 대화가 되지 않는 말만을 던졌다. 뭔 수작을 부리던 네놈은 아캄으로 돌아가게 될 거다. 달이 두 개나 뜨는 도시에서 재미없는 짓 말자고! 아니면 서로의 의도를 알고 있기에 도리어 대화를 어그러뜨리던가.
하하하! 히히! 다시 불쾌할 정도로 유쾌한 웃음소리. 달과 춤추는 건 어떨까? 미이-치게 좋겠지?
땅으로 끌어내려진 달은, 빛을 잃고... 그리고 달을 잃은 지구는 어떨까.
“그렇다면 그 슈퍼맨이, 달을 훔칠 수 있다고 생각해?”
달을 등지고 클락이 물었다. 어차피 배트맨이 알고 있듯 자신의 취재할 내용은 배트맨이 아닌 내일 있을 컨벤션이었다. 지금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답을 얻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브루스가 클락의 손 안에 있었다.
값싼 호텔의 작은 방 안에서 클락은 시작하자면 밑도 끝도 없을 불안을 떠올렸다. 모처럼의 해밝은 달마저도 창백하게 질려버리는 도시 속에서 배트맨이 또 다른 달을 띄워 올렸고 브루스는 기꺼이 그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 결국 브루스는 이 도시에서, 달밤을 무대로 지리한 론도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에 있어서는 클락도 입장이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차이는 명확했다. 클락은 슈퍼맨이었지만, 배트맨은 브루스였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지, 무슨 말이 듣고 싶었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클락은 자신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손 안에 가득 들어찬 어둠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브루스는 클락의 등 뒤로 밝게 떠오른 달을 보았다. 저렇게 크고 둥그런 달이 뜨는 날이면 달빛에서는 진주알의 소리가 났다. 토독. 톡톡. 톡. 클락이 드리운 그림자가 더더욱 그가 등진 달빛을 환하게 하고 있었다. 브루스는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는 도가 트였지만 누군가의 불안을 거둬가는 것에는 재주가 없었다.
브루스는 한숨을 쉬며 클락을 밀어냈다. 의외로 순순히 클락이 달빛이 있는 곳으로 밀려났다. 다만 브루스가 달빛으로 나오는 것은 저어하는 지 여전히 그를 어둠 속에 둔 채였다. 배트맨은 그 손을 뿌리쳤다. 달 아래 다크나이트가 선명한 음영을 그리며 클락 앞에 섰다. 저 달 아래, 배트맨은 아직 일을 할 시간이었다.
“헛소리는 이쯤하지.”
배트맨은 그래플 건을 들어 빛과 그림자로 얼룩진 건물의 한 귀퉁이를 조준했다. 핑하고 갈고리가 어둠을 가르며 목표로 한 지점에 빠르고 정확하게 안착했다. 배트맨은 팽팽하게 이어진 와이어를 몇 번 당겨보며 새삼 그것을 확인해보았다.
고담의 달밤 속에 배트맨을 맞이하고도 미소 짓던 클락의 얼굴이 애매하게 굳어있었다. 조커는 분명 사람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데는 귀신같이 재주가 좋았다. 브루스는 와이어에 몸을 실으면서 무성의하게 이야기했다.
“답답하면 창이 커다란 곳에 가있던가. 혹시 아나?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합법적으로 봉급쟁이 기자 손에 달을 쥐어줄지 어떨지 말이야.”
클락은 아연하게 이미 자리에 없는 브루스의 그림자를 눈으로 쫓았다. 연인에게 입맞춤 하나 남기지 않고 아직 얼마쯤 남은 달밤에 쫓겨 사라진 그를 클락은 헛웃음을 지으며 배웅했다.
조커를 고담시경에 넘긴 뒤 브루스가 안도하듯 숨소리로만 한숨을 토로할 때 클락도 같이 긴 숨을 내쉬었었다. 그 후로 묻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보다도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고담의 밤은 끝나지 않았고, 클락은 한 번 얻은 타이밍을 넘쳐나는 헛소리들로 날려버렸다. 기자로서 이렇게 말주변이 없어서야, 그것도 사주 앞에서 이런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서야 언제 소리 소문 없이 감봉이 될지 몰랐다.
달과 춤을 추면 어떻게 될까. 아니, 그보다 먼저 달을 훔치면 어떨까. 클락의 가슴 깊은 곳에 있던 것들이 달의 인력에 이끌리는 바다처럼 마음 밖으로, 입 밖으로 스미어 나오려했다. 그 온갖 감정이 점철된 혼돈 탓에 ‘걱정했어.’라는 말 하나를 전하지 못했다. 아마 배트맨이 듣고 싶지 않아할 말들 중 꽤 높은 순위에 있을 말이겠지만.
클락은 품에 다시 수첩과 펜을 담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하늘은 달로 환하다. 조금 더 서쪽으로 기운 달을 지켜보며 클락은 걸음을 옮겼다. 일단, 더 늦기 전에 방부터 빼야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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