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 캔자스 스몰빌에 위치한 켄트 씨의 집에는 고집스런 이마를 찌푸린 채 잠투정을 부리는 브루스 웨인이 있다.
“아침부터 사람 잠 깨워서 수선을 떠는 이유가 뭐야?”
부엌에 있는 식탁 앞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브루스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타박하듯 물었다. 정돈하지 않아 어수선한 머리칼은 백발이었고 세월이 그의 얼굴에 그가 지은 표정들을 박제해놓았지만 여전히 잘 뻗은 콧날이나 감은 눈꺼풀 뒤에 빛나는 그의 시리게 푸른 눈동자는 언제고 서늘하니 정정했다. 조리대 앞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이젠 아침이라기보다 점심이라 해야 옳을 식사를 준비하던 클락은 뒤를 돌아보며 느긋하게 웃었다.
“더 자고 있어도 된다니까.”
클락의 온화한 말에 브루스가 힐끔 한쪽 눈을 떴다. 그 세파를 겪고 나서도 브루스를 향한 클락의 미소는 언제고 상냥했다. 그 온기가 날카롭고 무기질적으로 변한 세상 속에서 변함없이 아늑한 이 시골과 많이 닮아있었다. 그에 브루스는 어물어물 입가가 허물어질 것 같았지만 다시 눈을 꾹 감고 부러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옆에 있던 커다란 난로가 사라졌는데 퍽이나 자겠군.”
콧방귀 섞인 브루스의 힐난에 클락은 기어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경쾌한 바람소리에 브루스는 감았던 눈을 반짝 떠서 따뜻하게 주름 잡힌 클락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 브루스가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런 브루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락은 싱크대 한 쪽에 걸린 수건에 손을 닦고 브루스에게로 다가와 그의 뺨을 가볍게 양손으로 쥐어 이마에 입을 맞췄다. 클락의 손에서는 신선한 야채의 냄새가 묻어났다. 분명 클락은 브루스가 더 잠을 자지 않고 클락을 따라 부엌으로 내려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클락의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부질없는 항의였다.
다시 부루퉁하니 고개를 돌려 눈을 감은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클락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심통을 부리고 있기는 하지만 브루스에게 타줬던 밀크티는 이미 바닥을 보이는 상태였다. 꿀을 듬뿍 넣은 아쌈이 입맛에 맞은 모양이었다. 아직 스튜는 다 끓이려면 몇 분 쯤 기다려야 한다. 그 사이 심통이 난 고담의 억만장자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밀크티를 한 잔 더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씻어 정리해둔 편수 냄비를 다시 꺼내 물을 조금 담은 후 가스레인지 위에 앉히는 클락의 코에서 가벼운 콧노래가 새어나왔다. 잠시 후 기포가 퐁퐁 솟아오르는 냄비 안을 확인한 클락이 찬장에 있는 차를 꺼내기 위해 손을 뻗을 때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 무슨 노래지?”
“응?”
클락이 브루스를 돌아봤을 때 파란 눈 한 쌍이 느긋한 오전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빛을 띠고 클락을 보고 있었다. 바라보는 객체를 해부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서린 그 똑바른 눈빛에 클락은 그만 그의 질문의 의미를 놓치고 말았다. 기계적으로 꺼내든 찻잎 통에서 두 스푼 정도 찻잎을 덜어 끓는 물 안에 빠트리며 클락이 의아한 듯 브루스를 보았다.
“자네가 허밍한 그거. 무슨 노래냐고.”
“아, 노래...”
그제야 브루스가 묻는 것이 노래의 제목임을 깨달은 클락이 느리게 맞장구 쳤다.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런 진지한 얼굴로 물으면 꼭 사건을 한창 조사 중인 브루스 같아서 클락은 그만 자신들이 주말을 핑계로 휴식을 취하러, 특히 브루스가, 왔다는 사실도 잊고 최근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되짚을 뻔 했다.
이제 브루스는 클락의 대답을 기다리기 지쳤는지 식탁 왼쪽 어디쯤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손가락이 토독토독 가볍게 식탁을 두드리며 나는 소리가 클락이 콧노래 하던 멜로디와 박자가 닮았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며 클락이 잔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제목은 몰라. 마가 자주 흥얼거린 음이라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요즘은, 아니 클락이 한창 푸른 유니폼에 붉은 망토를 둘렀을 적만 하더라도 멜로디를 알고 있으면 스마트폰이든 뭐든 이용해서 노래의 제목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하지만 클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클락에게 이 노래가 기억에 박힌 이유는 마사 켄트가 즐거운 목소리로 흥얼거리던 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뒤이어 파의 서툰 음이 섞여 들었었다.
스튜가 냄비 아래쪽에서 끓고 있는 소리가 났다. 클락은 그 냄비를 한 번 잘 저어준 뒤 진한 홍차 향이 묻어난 김이 피어오르는 편수냄비에 우유를 부었다. 클락이 물었다.
“아는 노래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기억을 휘젓듯 브루스의 목소리가 애매하게 부유한 다음 바닥으로 흩어졌다. 가끔은 배트맨에게도, 비록 지금의 브루스는 엄연히 말해 배트맨의 후견인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는 배트맨이었다, 살인 밀매나 빌런이 남긴 수수께끼가 아닌 오래된 기억 속에 남은 음표 한 자락을 쫓아갈 여유도 필요한 법이었다.
편수냄비의 가장자리에서 작은 우유거품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클락은 그것을 숟가락을 잘 저으며 옆에 있는 새 머그컵을 꺼냈다. 그리고 그런 클락의 등 뒤로 드문드문 끊기는 브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는 목소리라기보다 기도와 비강 그 어느 매를 울리는 진동소리였다. 브루스의 콧노래는 중간 중간 끊어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같은 구간을 반복하기도 하면서 그 노래의 이름을 되짚고 있었다. 클락은 브루스가 꽤 진지하게 노래의 제목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저렇게 나이도 잊고 귀여워서 뭘 어쩌려고. 냄비에 다 우러난 찻잎을 채로 걸러내어 머그컵에 완성된 밀크티를 조르르 담으면서 클락은 몽글몽글 피어나는 감정 한 덩어리를 삼켰다.
결국 클락이 단 것을 좋아하는 브루스를 위해 밀크티에 꿀을 탈 때까지도 그 허밍이 멈추지 않자 클락은 밀크티를 브루스에게 내밀면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예전에 파도 마가 노래하는 걸 듣고 하루 종일 같은 걸 흥얼거린 적이 있어.”
식은 밀크티의 향이 묻어난 입맞춤 끝에 클락이 브루스와 이마를 맞대고 자신의 기억 한 자락을 이야기했다. 투명한 푸른 눈이 클락의 애정에 아직까지도 당황한 듯 이곳저곳을 헤매다 외려 클락을 노려보며 정착했다. 브루스가 클락의 가슴께를 밀었다. 하지만 강한 힘은 아니었다.
“...스튜 타.”
클락이 준 밀크티를 얌전히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하는 브루스의 광대뼈 끝이 발간색으로 피어올랐다. 클락이 그 따뜻한 온도 위에 다시 뽀뽀를 남기고 보글보글 소리를 내는 냄비 앞으로 발을 옮겼다.
느긋한 오전 아침 속에 두 사람의 콧노래가 섞여 소박하게 차오른다. 한적한 휴일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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