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벽에 붙여 놓은 메모지와 신문 스크랩, 사진들을 주욱 훑어보고 있었다. 아이의 손이 몇몇 포스트잇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떼었다 붙였다하며 바삐 움직였다. 보기에 치기어린 탐정 놀음 같기도 한 소년의 수사보드-아이는 그렇게 칭했다-에는 엄연히 또렷하고 확고한 목적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수사보드는 조금씩이라도 착실하게 필요한 내용들을 충당해가고 있는 참이었다.
벽 옆에 밝혀둔 책상 스탠드 불에 아이의 파란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났다. 브루스는 흠하고 생각에 잠겼다. 고담을 떠나 이 사립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지 이제 한 달하고 며칠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브루스의 머릿속에는 부모님을 삼킨 검은 도시가 여전히 생생했다.
이따금 문 밖에서 우당탕탕 하고 아이들이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또 가끔씩은 비명 같기도 한 웃음소리가 왁자하니 퍼졌다. 그럴 때마다 브루스는 조금 더 미간을 좁혔다. 오늘은 할로윈이었다. 망자가 이승의 달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마녀들이 높이 웃고, 온갖 괴물들이 잔치를 벌인다는 날이었다. 나이어린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마저도 과자와 가장들로 들떠있었다. 브루스는 여덟 살 이후로 그런 행사들과 자신을 분리하는 데 익숙해졌지만 아직 열한 살이 되고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아이에게 바깥의 소음은 선명하기만 했다.
콩콩,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브루스는 예민한 고양이처럼 흠칫 옆을 돌아보았다. 잘 여민 커튼 너머로 눈과 입에서 주홍색 불빛이 피어오르는 잭 오 랜턴의 그림자가 보였다. 잭 오 랜턴은 창문 아래에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브루스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한숨 한 번을 내쉬고 성큼성큼 커다란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멍청이, 누가 보면 어쩌려고!”
찬바람과 함께 잭 오 랜턴이, 그리고 그 아래 숨어있던 소년이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발갛게 눈과 입을 밝힌 잭 오 랜턴을 든 소년은 프랑켄슈타인-정확히는 그 이름을 한 과학자의 손에 만들어진 이름도 없는 가엾은 괴물이지만-의 분장을 하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옆머리에 커다란 나사가 박힌 채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 다들 라운지에서 노느라 바쁜 걸.”
프랑켄슈타인, 으로 분장한 클락은 느긋하게 이야기했다. 클락이 이렇게 유하게 굴 때면 브루스는 외려 조급해졌다. 브루스는 이마를 찡그렸다.
“이 학교는 수상한 놈들이 득시글해. 후에 엄한 뒤통수 맞기 싫으면 조심하라고.”
브루스는 작은 입으로 신랄하게 말했다. 클락은 살짝 볼을 부풀렸다.
“캣이 창문으로 들어왔을 때는 아무 말 안했잖아.”
“걔는 벽을 탄 거잖아. 넌 날아들었고. 나중에 여기 누가 네 힘을 이용하려 들면 어쩌려고? 그리고 굳이 멀쩡한 문을 두고 창으로 들어오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야 너 놀래키려고 그랬지.”
그렇다고 또래아이가 벽을 타서 들어오는 데에 납득 가는 점은 무엇인가 고민하던 클락은 결국 풀이 죽어 웅얼웅얼 자신의 작은 포부를 토로하고 말았다. 힐끔 눈을 들어보면 아니나 다를까, 브루스는 흥하니 콧방귀를 치며 자신이 보고 있던 수사보드로 다가갔다. 브루스는 험상궂게 생긴 두 아저씨가 나란히 실린 신문 조각을 살피기 시작했다. 클락은 자신이 안고 온 잭 오 랜턴의 불빛이 벽에 반사되어 기괴한 웃음을 그리는 것을 보고 우선 전등의 스위치를 껐다.
다시 스탠드 하나만 밝힌 방안은 나직한 정적이 돌았다. 클락은 이리저리 포스트잇과 자료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브루스의 작은 손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다 아차, 하고 짧은 탄성을 질렀다. 그에 브루스가 힐끔 돌아보았다.
“Trick or treat!”
클락이 브루스 앞으로 잭 오 랜턴을 쭈욱 내밀며 외쳤다. 전등과 동시에 과자들을 담을 수 있는 바구니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호박 머리 안에는 초콜릿과 사탕, 캬라멜 같은 과자들이 이미 가득 차있었다. 클락의 움직임에 따라 달콤한 냄새가 무질서하게 퐁퐁 솟아났다. 브루스는 코를 씰룩이며 차갑게 답했다.
“난 바빠.”
클락은 경악한 듯 커다란 안경알 너머로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브루스! 오늘은 할로윈이야!”
“그래, 10월 31일이지.”
브루스는 등을 보인 채 성의 없게 답했다. 클락은 그런 브루스의 뒤에서 잭 오 랜턴의 불빛을 달칵달칵 정신없이 깜빡이며 심통을 부렸다. 얼마 뒤 하, 하고 어린아이답지 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왜 벌써 왔어? 다이애나랑 다른 애들이랑 놀러갔었잖아.”
브루스는 힐끔 벽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오늘이 할로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이제 막 아홉시가 되기 시작한 시각은 이르다 할 수 있었다.
“애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존 차례가 됐거든.”
클락이 과장스럽게 몸을 떨었다. 브루스가 클락에게로 몸을 돌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무뚝뚝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브루스가 음침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하나 아는데 이야기 해줘? 팜보이는 잠도 제대로 못잘 법한 얘기인데?”
클락의 코앞에서 브루스의 눈동자가 짓궂게 빛났다. 클락은 커다란 눈을 껌뻑였다. 브루스의 의도는 분명했다. ‘방해할 거면 나가.’ 클락은 몇 번 또르르 눈을 굴리다 문득 더 없이 진지한 얼굴로 브루스를 보았다.
“그럼 더 여기 있어야지.”
원하는 반응이 아닌지 브루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클락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 얘기를 아는 넌 그게 무섭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난 너랑 같이 있을 거야.”
클락의 말에 이번에는 브루스가 눈을 깜빡였다. 깔깔 웃는 잭 오 랜턴을 들고 프랑켄슈타인 분장을 한 아이가 하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참 클락다운 억지였다. 브루스는 졌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브루스는 코로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려 했다. 하지만 클락이 그런 브루스의 코를 잡았다. 클락의 손에서도 과자 냄새가 묻어났다. 브루스는 사납게 눈을 치떴다.
“너 나한테 줄 과자 없지?”
브루스가 서둘러 클락의 손을 치워냈다.
“내가 왜 너한테 과잘 줘.”
“그야 내가 'trick or treat'했으니까.”
클락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브루스가 치워낸 손으로 굴하지도 않고 브루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브루스는 퍽 순순히 클락과 발을 맞추었다. 방에 있는 이층침대의 아래층은 클락의 자리였다. 클락은 브루스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잠자리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갔다.
“넌 나한테 줄 과자가 없으니까 난 너한테 장난을 칠 수 있어.”
“순 어거지.”
클락의 침대에 엉덩이만 붙인 브루스는 잡힌 손을 빼내며 투덜거렸다. 클락의 손은 자신의 손보다도 한참 따뜻해서 졸음이 쏟아졌다. 브루스는 아직 클락의 온도가 남아있는 손이 어색해서 두어 번 꾸욱 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했다.
“할로윈이잖아. 그러니까, 자. 넌 나랑 이거 먹어야 해.”
“뭐?”
클락이 웃으며 잭 오 랜턴 안에 있던 내용물들을 침대 위에 쏟았다. 형형색색의 포장지들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폭신한 이불 위에 어지럽게 떨어졌다. 브루스는 침대를 짚은 자신의 손 옆까지 굴러오는 자그마한 과자들을 조금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형화되지 못한 달달한 냄새들이 헝클어지며 넓게 퍼졌다.
클락이 꺼낸 과자의 양은 학교 내의 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서 얻어온 양치고는 꽤 많았다. 브루스는 클락과 같이 듣는 과목의 수업시간을 기억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을 때라던가 이동시간 때, 복도의 사물함에서 이따금씩 마주칠 때도 떠올려보았다. 클락도 브루스처럼 이 학교 안에서는 ‘아웃사이더’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그 이유는 확연하게 달랐다. 음침한 자신과 다르게 클락은 너무 해밝은 탓에 무리에서 도드라졌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알록달록한 과자들이었다.
브루스는 클락이 그에게는 필요하지도 않는 안경너머에서 선하게 웃을 때마다 그가 조금은 능글맞을 수 있거나 약간은 약은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무난하게 또래아이들과 섞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기에 클락은 클락 켄트였고, 그런 멍청한 또래집단 아이들이 아니어도 클락은 충분히 다른 좋은 아이들과 어울리고 교류할 수 있는 아이였으니 브루스가 이 얘기를 클락에게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이따금 클락의 앞에서 한심한 시비를 거는 아이들을 보면 브루스는 괜히 제가 분했다.
“다이애나랑 네 몫까지 챙기느라 애 좀 썼지. 그니까 넌 꼭 나랑 이걸 먹어야해.”
클락이 말했다. 브루스는 눈을 굴렸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이 학교에 전학 온 뒤 브루스는 운이 좋았는지 두 명의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한 아이는 당당하고 총명한 다이애나였고, 또 한 아이는 상냥하고 올곧은 클락이었다. 브루스는 생판 모르는 영역에 발을 디딘 만큼 더욱 날을 세워 학교생활을 했고 그런 브루스를 다이애나는 다독여줬고 클락은 이해해줬다. 고담에서 웨인이란 성씨로 그리고 후에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의 이름으로 학교를 다녔을 적에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은 브루스에게 함께 할로윈 파티에 참가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해주었다. 두 사람 뒤에는 몇몇 눈에 익기도 하고, 처음 보기도 하는 들뜬 표정의 아이들이 해가 지지도 않은 시간에 이미 분장을 마친 채 삼삼오오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브루스는 둘에게 고개를 저으며 바쁘다 이야기 한 뒤 기숙사 방문을 닫았다.
그렇게 클락과 다이애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브루스였다. 애당초 할로윈 같은 떠들썩한 행사와 자신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브루스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부모님의 일은 물론이고, 수상한 이 학교의 이사진들에 대한 조사나 윤리 시간에 받은 논술 숙제들... 브루스는 변명하듯 온갖 의무들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그러다 간신히 입에 담은 말이,
“아, 알프레드가 늦은 시간엔 과자 먹지 말랬어.”
이거였다. 몇 번인가 알프레드가 만든 쿠키나 마들렌을 밤에 집어먹으러 부엌으로 내려갔다가 혼이 났던 도련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번에는 클락이 흥하니 코웃음을 쳤다.
“네, 네. 도련님. 그러니 제 장난을 받으시라고요.”
그리고 클락은 초콜릿 하나의 포장을 까서 브루스의 입 속에 쏙 하니 밀어 넣었다. 브루스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정신없이 깜빡였다. 클락은 까르르 웃었다. 클락은 브루스가 단 음식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이따금 그의 집사가 브루스에게 디저트를 보내주는 것을 보았다- 브루스가 불쾌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브루스에게 준 초콜릿은 브루스가 매점을 지날 때면 몰래 눈을 굴려 바라보던 것이니 아마 좋아하든 관심이 있든 한 것일 터였다.
종종 다 큰 어른마냥 인상을 쓰고 있거나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스크랩을 들춰보는 브루스가 입에 넣어준 초콜릿하나에 자신과 같은 또래아이답게 당황하는 표정을 짓자 클락은 더없이 즐거워졌다. 브루스는 입가를 손을 가린 채 오물오물 볼을 움직여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매서운 눈이 클락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클락이 히 하고 웃어보였다.
“야!”
초콜릿을 다 먹은 브루스가 뒤늦게 성을 냈다. 브루스의 외침에서 초콜릿 냄새가 났다. 브루스는 억지로 인상을 쓰며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는 화보다도 당황에 가까워서 클락은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맛있지?”
뻔뻔한 클락의 반응에 브루스는 애꿎은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다. 말을 말자. 브루스는 오후 내내 뚱했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을 알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아직 소년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클락은 곧 종알종알 과자 하나하나를 들어 보이며 이야기 했다. 이 오레오는 존이 나눠준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거나, 이 사탕은 배리와 가위 바위 보로 차지한 레어품이었다거나, 이 캬라멜은 올리버가 깔깔 웃으며 5m 떨어진 곳에서 던져 들여놓은 것이었다던가 하는 이야기였다.
브루스는 머뭇머뭇 자신의 책상 서랍 쪽에 눈을 주었다. 한 번 아랫입술을 꾹 깨문 브루스는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클락이 빼꼼 고개를 내밀어 브루스의 움직임을 쫓았다. 브루스가 기분이 상하거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너무 자기만 얘기 했나 싶어 클락은 초조하게 브루스의 등을 보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브루스는 금방 클락에게로 돌아왔다. 브루스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줄 과자 있어. ...알프레드가 너랑 다이애나 주라고... 이건 네 몫이야.”
왠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자기 자신에게서 최대한 멀리 쭉 뻗은 브루스는 우물쭈물 이야기 했다. 평소 독설이든 자기주장이든 분명하게 전달하는 브루스에게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클락은 이 학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신랄하게 어떤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는 브루스가 아주 가끔씩은 놀라울 정도로 소심해지는 것을 알았다. 보통 주위에서는 그런 브루스를 영문을 알 수가 없다고 평했지만 클락은 정작 그 상황에서 영문을 모르고 헤매는 것은 브루스 본인이라고 간파했다. 도무지 고담이라는 도시에서 집사마저 둔 도련님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면이 도련님다운 걸까?
클락은 브루스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견과류의 고소한 냄새와 건과일의 상큼한 냄새가 어울러났다.
“무서운 이야기 해줘.”
클락이 웃으며 말했다.
“할로윈에 악몽 꿀 일 있어?”
신발을 벗고 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으며 브루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괜히 자신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꼭 클락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거 같았다.
“그래도 괜찮아.”
클락이 밝게 답했다. 다시 습관처럼 한숨을 쉬던 브루스도 결국 같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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