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눈에는 지각되지 않을 빠른 잔상이 도시의 공중에서 건물의 틈새로 숨어들었다. 클락은 드물게 가쁜 호흡을 골랐다. 후우하고 길게 숨을 뱉은 클락은 서둘러 옆구리에 끼고 있는 가방을 열어 속을 확인했다. 다행히 가방 안에는 필요한 자료들이 제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불과 10km도 되지 않는 거리를 왕복하는 일은 클락에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결과 클락은 출근시간에서 이미 20분 정도 지각을 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다시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는 소동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전에 이 이상으로 더 수선을 부렸다간 회사 안에서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하게 될 것 같아 더더욱 그랬다.
오늘은 날짜가 바뀌는 순간부터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다. 자정이 약간 넘은 무렵 공업지대에 위치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합선에 의한 화재가 발생했다. 공장에는 불에 닿으면 걷잡을 수 없이 연소할 화학물질들이 널려있었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불이 옮아 붙는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거기다 공장 뒤편에는 정유공장이 있었다. 슈퍼맨은 우선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당직 직원 2명을 안전한 곳으로 구출했다. 그리고 출동한 소방관들이 미처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불길이 거센 지점으로 가서 화재 진화를 도왔다. 다행히 소방관들의 신속한 작업과 슈퍼맨의 힘으로 화재는 큰 피해 없이 마무리 될 수 있었고 클락은 작성하던 기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곧장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노트북을 키던 중 클락은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지진해일이 발생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막 부팅을 끝내고 시작화면을 띠운 노트북을 그대로 방치한 채 슈퍼맨은 서둘러 일찍이 한낮을 맞이한 인도 아대륙으로 날아갔다. 미리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피난길에 올랐지만 그들의 급한 마음이 무색하게 행렬은 우왕좌왕하며 속도를 높이지 못했고 대피 길에 조차 들지 못한 사람들은 무작정 지붕 위를 오르고 있었다. 슈퍼맨은 그런 주민들을 도왔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축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해일의 물기둥은 최악을 가정할 만큼 높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슈퍼맨은 사태의 진정을 위해 꽤 긴 시간 동안 아수라장에서 붉은 잔상을 남기며 일을 했다. 상황이 안정된 후에는 지역 신문기자들이나 언제 찾아왔는지 해외언론에서 그런 슈퍼맨을 취재하고자 마이크를 들이밀었지만 슈퍼맨은 정중하게 거절한 뒤 다시 자신의 기사를 끝내러 아파트로 향했다.
클락의 머리카락에는 매캐한 플라스틱 재와 짠짠한 바닷물의 소금기가 엉켜있었지만 클락은 그것을 털어내기보다도 우선 미처 끝내지 못한 자신의 일에 착수해야했다. 편집장은 오늘 오전 10시에 회의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회의에서 의견을 나누기 전 우선 이 기사를 완성해서 페리에게로 보내야만 했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탓에 절전모드에 들어간 노트북을 깨운 뒤 클락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타자를 정신없이 누르며 간신히 마지막 문장을 끝내고 저장 버튼을 누른 뒤 메일에 첨부하여 보냈을 때에 날은 어느 새인가 한참 밝아있었다. 내내 웅크리고 있던 어깨가 뻐근해 기지개를 피던 클락은 환해진 풍경에 놀라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간은 벌써 출근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클락은 놀라 바쁘게 욕실로 들어가 씻고 부랴부랴 가방을 챙긴 뒤 데일리 플래닛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클락은 가던 방향을 틀어야했다. 이번에는 데일리 플래닛과 반대방향에 위치한 철로에서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전복되기 직전의 열차를 몸으로 막아 세운 뒤 슈퍼맨은 차장과 승객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때 시간은 이미 클락이 회사에 도착해야할 시각을 가리키고 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과 슈퍼맨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 출근길에 발목이 잡혀 울상을 짓는 사람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 온갖 군상들을 뒤로하고 클락은 그제야 간신히 데일리 플래닛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록 클락은 한숨도 자지 않은 채 어마어마한 활동 반경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저 노란 태양이 보우하사 신체적으로 지치지 않는 슈퍼맨이었지만 휴식 없이 계속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24시간 이상을 보내고 나니 아무래도 조금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클락의 인지를 통해 흘러드는 정보들이 이리저리 들쭉날쭉 하니 거칠어서 클락은 가벼운 두통마저 느꼈다. 그래도 누가 크게 다치진 않아 다행이었어. 클락은 스스로를 응원하듯 생각하며 좁은 골목에서 바쁜 거리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클락은 그제야 자신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거리를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의 차림은 하나 같이 포근했다. 클락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숨이 하얗게 흩어지는 모습을 그때서야 눈여겨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뉴스에서 기상캐스터는 오늘의 날씨는 퍽 추울 것이니 따뜻하게 챙겨 입어 외출하시라는 말로 일기예보의 마무리를 지었었다. 두터운 코트나 파카, 목도리와 장갑, 귀여운 털모자를 쓴 학생도 보였고 귀마개까지 꼼꼼히 챙겨 쓴 중년남성도 눈에 띄었다. 모두들 한껏 든든하게 차려입고 종종걸음으로 추위를 피해 저마다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클락의 차림이라고는 셔츠와 면바지, 계절의 구색에 맞추어 걸쳐 입고 다니던 재킷이 전부였다. 물론 클락에게는 그것들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슈퍼맨이었을 때도 분명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았을 텐데 클락은 기자인 클락 켄트가 되어 지상에 내려와서야 자신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한동안은 12월 치고 퍽 따뜻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새파란 추위가 닥치고 나니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제 금방 크리스마스다. 괜스레 클락은 마사가 정성껏 떠줬던 두터운 스웨터가 그리워졌다. 클락은 시리지도 않은 손을 비비며 빠른 걸음으로 데일리 플래닛 건물에 들어섰다.
“아, 자주 뵙는 기자분이시군. 늦잠인가요?”
“예? 아뇨, 아니... 예?!”
어깨를 조금 수그리고 회사 안에 들어온 클락에게로 익숙한, 하지만 이런 시간대와 장소에서는 낯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클락이 놀라 고개를 번쩍 들자 뽀얗게 김이서린 클락의 안경이 그 반동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클락의 바쁜 사고가 단숨에 정지했다. 클락의 눈앞에는 이 데일리 플래닛의 사주가, 브루스 웨인이 서있었다. 클락은 급하게 안경에 묻은 김을 옷소매로 대충 거둔 뒤 다시 고쳐 쓰며 그의 얼굴을 재확인하듯 바라보았다. 역시나, 언제고 잘생긴 그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왜?
“이런. 기어코 내리기 시작했군.”
“예?”
클락의 얼빠진 되물음에 브루스는 야무진 턱 끝으로 건물 밖을 가리켰다. 클락이 뒤를 돌아보자 바깥에는 어느새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나 추웠던 걸까? 클락의 눈썹이 쳐졌다. 다시 앞을 바라보면 눈앞에는 깃이 깔끔하게 정돈된 롱코트를 입고 반듯하게 맞아떨어지는 정장 차림에 가죽 장갑을 끼고 한 손에 머플러를 쥐고 있는 브루스가 여전히 서있었다.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차림새가 따뜻해보여서 클락은 우선 안도했다. 이미 데일리 플래닛에서 브루스 웨인이라면 으레 겪을 인사치레는 넘긴 모양인지 건물 내에서 둘 사이에 끼어드는 사람은 없었다.
“이왕 늦는 거 다음엔 좀 따듯하게 챙겨 입고 와요.”
어딘가 부산스러운 태도로 브루스를 바라보는 클락에게 그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머플러를 클락의 목에 걸듯 대충 걸쳐주고 매끄럽게 손 인사를 남기며 클락을 스쳐 지났다. 클락은 브루스의 움직임을 따라 홀린 듯 고개를 돌리면서 그저 눈만 깜빡였다. 지금, 브루스 맞지? 브루스는 어느덧 건물 밖을 나가 그 앞에 대기하고 있는 고급 차량에 몸을 싣고 있었다.
“저녁, 메트로폴리스 플라자, 7501호. 돌려주러 오도록.”
추위에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내리기 시작한 눈이 떨어지는 소리, 조용한 엔진 소리 너머에서 바리톤의 목소리가 어느새 무뚝뚝한 톤으로 돌아와 짧게 말했다. 어느 때고 차분한 그의 바이탈사인이 들렸다. 정말 브루스였구나... 클락은 템포가 느려진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클락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다음에야 자신의 목에 길게 늘어뜨려진 머플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캐시미어로 만들어진 회색 머플러였다. 어쩌면 클락이 입고 있는 옷 전부를 합한 값보다도 비싼 것일지도 몰랐다. 머플러에서는 차분하면서 시원한 향이 났다. 그 냄새가 브루스가 쓰는 스킨에서 나는 향이라는 것을 클락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추위에도 아랑곳 않던 클락의 귓불이 그제야 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그 안에 혼자 남게 된 클락은 머플러를 끌어안은 채 쪼그려 앉았다.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갈 때까지 클락이 엘리베이터에 손상을 주지 않기 위해 취한 최대한의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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