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스 플라자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한발 앞서서 기념하며 온갖 장식들로 휘황찬란했다. 건물 밖을 꾸미는 자잘한 전구들은 흥겹게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고 로비 한가운데에는 장식을 아끼지 않은 아름드리 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클락은 왠지 조금 기가 죽어서 트리의 꼭대기에 있는 별 장식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클락의 품 안에서 꽃잎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채 녹지 않은 꽃다발이 바스락하고 작게 소란을 부렸다. 클락은 미덥지 않은 걸음걸이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그나마 팔위에 곱게 개어서 걸어진 회색의 머플러가 클락이 이 장소에 와도 괜찮다는 증거인양 위안이 되었다. 클락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벽에 부착된 건물 내부 안내도를 바라보았다. 7501... 7501... 안내도를 보고 한 눈에 클락은 그 호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지만 어쩐지 자꾸만 다시 되짚어서 확인하고 말았다.
벌써 두세 번 엘리베이터는 안내도를 바라보는 클락을 내버려두고 홀연히 각각의 층들로 운행해 나갔다. 아차 하는 새에 눈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본 클락은 다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간신히 탑승할 수 있었다. 클락은 잔뜩 긴장한 손으로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호실이 있는 층이 써진 버튼을 눌렀다.
오전에 슈퍼맨과 클락에게 쏟아졌던 일들을 보상하듯 클락의 오후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비록 지각한 것에 대해 페리에게 혼이 나기는 했지만 초안으로 보냈던 클락의 기사는 내용이 통과되었고 그 길로 클락은 몇몇 수정사항을 반영한 뒤 편집장으로부터 OK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한시름 덜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클락의 등을 로이스가 톡하고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수고했어.”
“고마워...”
클락이 드물게도 피곤이 묻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클락은 데일리 플래닛에 출근했던 때부터 궁금해 했던 점이 떠올랐다.
“맞다, 로이스. 올 때 브... 아니, 웨인 씨를 봤는데 무슨 일이었어?”
매사에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정보를 얻는데 적극적인 로이스이니 간략하게라도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이스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클락의 자리 한쪽에 잘 개어진 머플러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
클락이 뺨을 긁으며 멋쩍게 답했다.
“그... 정신이 없었거든...”
“거의 페리와 이야기해서 잘은 모르지만, 데일리 플래닛 주식에 대한 이야기였어. 왜 요즘 렉스 코프가 이쪽에 관심이 많잖아.”
로이스가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페리 화이트가 편집장으로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상대는 그 렉스 루터였다. 클락도 그녀의 걱정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슈퍼맨에 대해서도 묻더라고.”
“슈퍼맨? 웨인 씨가?”
브루스가? 클락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어쩌면 메트로폴리스에 방문한 만큼 의례적인 질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클락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안 그래도 그가 오늘 동트기 전부터 바빴다고 이야기하니 말하더라고, ‘히어로도 못할 짓이군요.’라고.”
로이스의 말에 클락의 머릿속에 너스레를 떨었을 브루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떠올라 클락은 하하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그렇듯 매끄럽고 능숙한 처사였을 것이다.
브루스와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것은 한 달하고도 며칠만의 일이었다. 할로윈 때부터 시작해서 브루스는 배트맨의 일로도 브루스 웨인의 일로도 정신없이 바빴고 클락이 안부 차,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도 바쁘다며 금방 통신을 끊고는 했다. 클락이 한동안 크리스마스가 온다는 사실과 올해가 끝난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은 비단 그간에 겨울답지 않은 포근하던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클락 자신 역시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다망한 연인을 두다보면 세간에서는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함께!’를 슬로건으로 내거는 기념일이 온다할지라도 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은 슬프지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클락은 그에 크게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브루스의 얼굴을 본 것은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다. 오랜만이 연인의 얼굴을 본데다 생각도 못한 저녁 약속까지 생기자 클락은 금방 햇살처럼 행복해졌다.
그러다 이르게 해가 저물면서 노을이 지기 시작한 시각에 클락은 메트로폴리스에 위치한 어느 지점에서 소동을 접하고 부랴부랴 슈퍼맨이 되어 현장에 향하게 되었다.
“여기에 일이 있다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클락이 저도 모르게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슈퍼맨의 가슴에 쓰인 S 문양을 잠잠히 지켜보던 배트맨이 나리는 눈발 속에서 그 얼음 결정만큼이나 차갑게 답했다.
“자네 도움은 필요 없어.”
“또 그 소리...”
클락이 씁쓸하게 말했다. 역시나 그 브루스가 아무 이유 없이 그의 도시를 떠나올 리는 없었다. 클락은 건물의 그림자 속에 능숙하게 숨어든 배트맨을 보며 조금 풀이 죽은 웃음을 지었다. 괜히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들어 자신이 서운한 표정이 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클락은 그것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서로 못 본지가 한참은 되었다. 약간의 투정을 부려도 벌은 받지 않을 터였다.
거의 반쯤은 무시당할 각오로 보인 행동이었지만 브루스는 조용히 그런 클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 신호를 받았는지(클락은 브루스의 귀에 장착된 통신기에서 삑삑하고 가벼운 신호음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 고개를 돌려 지상을 바라보았다. 허리춤에서 그래플 건을 꺼내들며 그가 별스럽지 않은 듯 말했다.
“꽤 바빴던 모양이지?”
피융 하고 예리한 소리와 함께 와이어가 발사되었다. 그 궤적을 따라가며 클락이 답했다.
“꼭 그렇지도 않아.”
클락은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의 근황이 어땠는지를 가늠했다. 흠하고 브루스가 잠시 말을 줄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에 손대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선물을 주지.”
발성되는 어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말에 클락은 잠시 멍하니 배트맨의 옆얼굴을 보았다. 눈발 속에서 그의 검은 망토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아무 말 없이 떠있는 클락을 내버려두고 브루스는 홀연히 눈송이가 흩날리는 공중에 몸을 맡겼다.
“저녁에.”
그의 마지막 말을 클락은 착실하게 귀에 담았다. 눈 사이로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클락이 뒤늦게 외쳤다.
“발! 밑... 조심해.”
미끄러지지 않게... 진작에 배트맨의 부츠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알고 있는 클락이 한 말이었다. 찬바람 속에 낮음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클락은 심호흡을 했다. 깊은 숨을 따라 차가운 꽃향기가 들어왔다. 막대한 금은보화의 실마리가 되는 듯한 새 모양의 조각상은 구태여 옆 도시까지 찾아온 코블팟의 손으로부터 지켜졌고 배트맨이 단언한대로 사태도 큰 말썽 없이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슈퍼맨은 배트맨의 리퀘스트에 따라 얌전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클락은 다시 문에 붙은 호실이 쓰인 푯말을 확인했다. 칠, 오, 공, 일. 클락이 숫자를 조용히 따라 읊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브루스의 성미에 이정도의 사건을 이유로 메트로폴리스에서 숙박을 하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주식에 대한 것도, 슈퍼맨에 대한 일도 굳이 그 정보를 위해 데일리 플래닛에 올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머플러를 건넬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이래선 노크도 못하겠어. 클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손에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최대한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고 문과 손이 부딪히며 난 소리가 클락의 머릿속에서는 유달리 크게 들려서 혹시 자신이 들뜬 마음에 힘 조절을 못한 것을 아닐지 하고 괜한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매끄럽게 객실 문이 열렸다. 열린 문에서부터 촉촉하고 포근한 공기가 스미어 나왔다. 갖갖은 생각들이 목소리를 잃고 클락의 머릿속에는 브루스 하나만이 남았다. 샤워를 한 뒤 얼마 되지 않았는지 브루스의 머리카락은 살짝 물기가 묻어있었다. 브루스가 두르고 있는 가운 너머로 달큰한 살 냄새가 몽글하니 올라왔다.
“뭐하나. 들어와.”
바깥에 내리는 눈에 머리카락 군데군데에 물방울이 맺힌 클락을 바라보면서 브루스가 얘기했다. 클락은 무거운 침을 꿀꺽하니 삼키고 끼걱끼걱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온 객실은 분명 넓은 방이었음에도 이상하게 브루스의 존재가 선명했다. 그가 이 방에 머문 지는 분명 반나절도 채 되지 않을 텐데. 너무 오랜만에 브루스를 접한 탓일까, 브루스의 저택을 방문할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클락은 공간 곳곳에 묻어나는 브루스의 존재에 가슴이 술렁였다.
“아, 브루스. 이거랑 이거.”
클락이 어딘지 어색한 동작으로 앞서 걸어가던 브루스에게 꽃다발과 머플러를 쭈욱 내밀었다.
“두르라고 줬더니 모셔두다 왔군.”
익숙하게 한 팔로 꽃다발을 안아든 브루스는 곱게 접어진 머플러의 상태를 보며 말했다. 클락은 차마 자네 생각이 나서 두를 수 없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싱겁게 웃었다.
“앉지.”
브루스가 손으로 도시의 야경이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한 작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테이블은 깔끔하게 식탁보가 씌어 있었고 기다란 와인병과 두 잔의 글라스가 놓여있었다. 브루스는 그 사이 커다란 침대가 보이는 방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핏 시야에 들어온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에 클락은 헛기침을 한 뒤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창가와 가까워서 그런지 거실 한가운데보다는 서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가슴 한켠에 장미냄새가 묻어난 브루스가 돌아와 클락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 고담은?”
클락이 널을 뛰는 심장을 달래고자 마음에 없는 질문을 했다.
“아이들에게 맡겼다. 큰 문제가 될 싹은 잘라두었으니 괜찮겠지.”
브루스는 별스럽지 않게 답했다. 브루스에게서 쉬이 들을 수 없는 낙관론에 눈을 크게 뜨던 클락은 그간 내리 바빴던 브루스가 떠올랐다.
“로빈이 좋아했겠네?”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트맨의 일을 하루라고는 해도 양도받은 어린소년이 얼마나 신이 났을지 눈에 선해서 클락은 즐겁게 물었다.
“그런가? 평소와 별 차이는 없었다만.”
브루스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역시나 똑 닮은 부자지간이었다. 클락이 밝게 웃었다. 브루스는 익숙한 동작으로 와인 병을 막은 코르크를 땄다. 퐁하는 소리와 함께 벌써부터 짙은 포도향이 났다. 자신의 잔에 밑바닥만 살짝 채울 정도로 와인을 따른 뒤 잔 안에서 잠시 액체를 굴리다 향을 확인한 뒤 술을 입에 머금은 브루스를 지켜보던 클락이 물었다.
“혹시... 일부러 시간 내준 거야?”
확신을 바탕으로 한 물음이었다. 브루스의 목울대가 액체를 삼키기 위해 올록볼록하고 소리 없이 움직였다. 더없이 유능한 알프레드의 관리 아래에 있겠지만 브루스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더 턱 선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글쎄?”
브루스는 아리송하게 말하며 클락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창문 너머는 도시의 건물과 도로를 밝히는 불빛들과 흩날리는 눈발이 어우러져 퍽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클락은 브루스의 속눈썹을 보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새침하니 잘 뻗어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특히 그의 애정에서 나온 행위일 경우 더더욱- 설명하는 것도, 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클락은 그런 브루스의 행동에 자신이 얼마나 기쁜지, 행복한지를 말하고 싶었다.
차분하게 피어오른 와인의 향에 클락이 행복하게 웃었다.
“건배할래?”
“시답잖은 연설이 없다면.”
“안 해, 그런 거...”
이 자리에는 필요 없으니까. 두 사람의 잔이 맑게 부딪혔다. 한 모금 머금으니 혀 위에 무겁게 감겨든 액체는 차분하게 미각을 쓸고 식도를 따라 부드럽게 내려갔다. 그 침착함이 눈앞의 남자를 닮아 더 사랑스러웠다. 클락은 술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이미 이 와인이 차고 넘칠 만큼 마음에 들었다.
“좋은 와인인가 봐?”
잔을 내려놓는 브루스를 보며 클락이 물었다.
“좀 더 단 편이 낫지 않나 했다만.”
“이미—”
충분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브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같은 향이 나는 두 입술이 어우러졌다. 와인이 훑고 지나간 브루스의 입안은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달았다. 브루스가 이끄는 대로 그의 입안에 혀를 넣어 헤집다가 아쉽게 작별하듯 와인이 묻은 브루스의 혀를 가볍게 휘감았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는 클락의 혀끝을 브루스가 살짝 깨물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허리를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브루스는 순순히 클락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자네 말대로 단 쪽이 더 좋네.”
“그렇지?”
선홍색의 입술이 싱긋 웃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몸을 더 단단히 지탱했다.
“있지. 자네 말대로 얌전히 있었어.”
“그렇군.”
“선물은... 이게 끝이야?”
술 때문이 아닌 홍조를 띤 클락이 드물게도 욕심을 부리며 말했다. 그 욕심이 브루스는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단정한 손끝이 클락의 뒷목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글쎄?”
유연하게 웃는 겨울 하늘을 들여다보며 클락은 급하게 그와 다시 입을 맞추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인사드려요.
벌써 내일이면 2016년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바라시는 일 모두 원하시는 대로 풀리기를, 그리고 좋은 일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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