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제 스스로를 마중하듯 돌아온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박쥐가 자신의 기척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장소라 하면 바로 이곳, 자기 집 정도다. 데미안은 몸 곳곳에 피 냄새를 짊어진 채 눈이 아프게 환한 모니터 앞으로 다가간다. 커다란 화면에는 이 도시의 안 좋은 소식들이 지치지도 않고 줄을 서서 흐르고 있다. 카울과 장갑을 벗어 컨트롤러 위에 아무렇게나 던진 뒤 털썩하고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그 사소한 충격으로 겨우 피가 멎은 옆구리가 지잉 하니 울렸다.
야옹—
데미안의 발치로 가느다란 짐승의 울음소리가 다가왔다.
“알프레드.”
데미안의 답변에 고양이는 폴짝하고 가볍게 튀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몇 번 제자리걸음을 하던 알프레드는 이윽고 안정적인 위치를 찾았는지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세를 낮췄다. 데미안은 알프레드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은 뒤 그의 하얀 털이 고슬고슬 난 목덜미를 긁어주었다. 알프레드의 목 깊은 곳에서 골골골 하고 기분 좋은 울음소리가 났다. 데미안은 그 소리에 섞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하루였어. 상처가 박힌 손끝에 보드라운 털의 감촉이 걸렸다. 데미안은 그것을 강박적으로 되새기며 흘러가듯 생각했다.
뻐근한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아보아도 나쁜 뉴스는 끊임없이 데미안의 인지를 통해 흘러들었다. 강도, 방화, 살인, 강간, 맹목적인 사이비들... 나열하자니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데미안은 잠조차 들지 못할 피로를 느끼며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애써 무시했다. 데미안의 뒤편에는 여기 굴의 주민들이 남긴 가죽이 동굴 벽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있다. 데미안이 이렇게 피로에 짓눌리듯 의자에 앉아있을 때면 그 탓인가 이따금 뒷목이 따가웠다. 데미안은 핏발선 눈을 떴다. 문득 옷 이곳저곳에 묻어온 이름 모를 미치광이들과 제 몫의 피가 더없이 역했다.
삑—, 삑—, 삑—.
데미안의 몸 상태를 쉼 없이 점검하던 장치가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얌전히 누워있던 알프레드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바깥으로 나가라 손짓해보였다. 그러면 유능한 집사의 이름을 받은 고양이는 영리하게도 데미안의 의도를 파악하고 동굴 위에 있는 황량한 저택으로 올라갔다. 가벼운 질량을 지닌 짐승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그런데도 데미안의 귀에는 선명하게 남는다.
데미안은 두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었다. 손바닥에는 가죽의 냄새와 소금기가 묻어난 땀의 냄새, 알프레드의 털에서 나던 냄새 따위가 남았다. 삑—, 삑삑—, 삑삑—. 데미안에게 약물을 투여할 시간임을 알리는 알람이 서서히 울리는 간격을 좁혀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데미안의 오감이 날을 세워간다. 본래대로라면 지금쯤 장치와 연동된 미세한 주사바늘들이 데미안의 신체 내로 약액을 주입할 테지만 앞으로 약 1분. 1분 동안 데미안은 감각의 조수 속에 무방비하게 방치된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이란다.”
브루스가 눈썹을 찌푸린 채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시험관 속 투명한 액체를 몇 번이고 다시 곁눈질하여 바라보았다. 약물을 브루스 본인이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완성품이라 이름 붙인 것을 못미덥다 듯 자꾸만 살펴보는 브루스의 행동은 썩 그 답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그의 눈동자가 아직도 끈질기게 모든 가능성과 앞으로 진행될 알고리즘들을 머릿속에서 훑으며 흉흉하게 빛났다.
브루스는 이 약물을 개발하기 위해 그 자신의 일정들을 소화하는 중에도 낼 수 있는 것 이상의 시간을 쏟았고 더할 나위 없이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그 브루스가 한참 모자란 휴식 시간 탓에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중요한 회의에 나가기 전 샤워를 하다 쓰러졌던 일마저 아직 한 달을 넘어가지 않던 때에 있었다. 데미안은 브루스가 자신에게 이 약물을 건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항을 고려하고 또 염두에 두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는 데미안이 열여덟, 열아홉 쯤 되었을 때였다. 시작은 후각에서부터였다. 걸음마와 같이 시작되었던 훈련 때문에도, 로빈으로서의 일 때문에도 데미안의 감각은 본래부터 일반에 비해 한참 예민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데미안의 후각이 감각 순응을 멈추고 모든 기체의 정보를 끊임없이 저장하고 판별하기 시작했다. 어쩔 때는 이것이 데미안이 산성(産聲)을 토하던 때 처음 맡았던 공기의 냄새가 아닐지 싶은 냄새마저 분별되는 듯 했다. 그러다가 어떤 때에는 데미안의 동공이 밝은 빛 속에서도 작아질 줄 몰랐고 몸에 걸친 옷이 거슬려서 신경질이 날 때도 있었다. 침묵 속에서도 세상 속의 갖은 진동들이 귀를 타고 흘러들어 지독한 귀울음 마냥 시끄러웠다. 브루스는 그때 데미안이 이 세계에 드물게 있는 센티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되는 정보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은 물론, 그 처리 속도와 보관 기간에서 마저 월등한 능력을 보이는 센티넬에 대해 정부에서는 아무래도 우호적이었다. 비록 센티넬의 감각이 제대로 조율되지 못할 경우 그에 따른 과부하로 센티넬의 뇌가 괴사해버리는 일도 있었지만 세상은 또 참 경이롭게도 그런 센티넬의 곁에 가이드라는 존재를 붙여놓았다. 정부에서는 후에 요긴한 인재가 될 센티넬을 당연히 귀하게 여겼고 그런 센티넬의 원활한 역량발휘에 필수적인 가이드의 존재에 대해서도 각별히 신경 썼다. 가이드를 찾지 못한 센티넬을 위해 정부에서 주도하는 프로그램도 마련되어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데미안을 센티넬로 등록하지 않았다. 그의 가이드를 찾지도 않았다. 브루스는 가이드를 믿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 수가 드물기는 하지만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현상은 어디까지나 생물학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고 그렇다면 굳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훨씬 안정적인 대안은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브루스의 주장이었다.
어느 날에 인가 데미안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해오는 진동을 통해 아버지와 페니워스, 그레이슨이 언쟁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날은 제 몸 속의 장기들이 꿀렁이는 소리에 마저 신경질이 나서 차라리 빨리 잠이나 들었으면 싶었던 날이었다. 아니면 한동안 아버지의 옆에서 로빈의 일을 할 수 없던 것이 심통이 났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벽을 타고 전해오는 진동 하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요. 당신 계획에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내일 당장 녀석이 얼마나 각성할지 우린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데미안이라면 괜찮다.”
“브루스, 그러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지 얘길 하지 않으면”
“데미안은 괜찮아.”
고집스런 브루스의 말에 딕이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데미안 역시도 브루스의 말에 동의했다. 자신은 정말로 괜찮았다. 근거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지만 데미안은 이 웨인 저택 안에 있는 이상 자신이 괜찮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저택 안은 조용해지고 데미안은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여전히 활짝 열린 감각기관들이 소란스럽게 이런저런 정보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데미안은 익숙한 발소리를 들었다. 곧 문이 열린다.
“데미안.”
데미안은 부러 고른 숨소리를 내보였다. 어느새 브루스가 자신의 옆에 다가온 것을 알았다. 아버지에게서는 늘 차분한 냄새가 났다. 한참 아드레날린이 들끓는 전투 중에서 마저 데미안은 브루스의 품에서 나는 평온한 냄새에 정신이 맑아지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아버지란 원래 이런 존재인걸까? 데미안은 그 냄새가 좋았고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스스로가 두려웠다. 아버지의 단단한 손이 서툴게 데미안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데미안의 센티넬이 발현되기 시작한 후로 브루스는 수시로 데미안이 잠들어 있는 방에 찾아와 자리를 지키곤 했다.
“잘 자렴.”
그 한 마디가 몇 곡의 자장가보다도 훨씬 효과적이었다. 데미안은 잠잠해지는 감각들 속에서 깊은 수면으로 떨어져갔다. 브루스는 앞으로 그가 눈을 뜨기 몇 분 전까지도 데미안의 옆에 있을 것이다. 데미안은 안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배트맨이 자신의 곁에 있으니까.
브루스는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에 일어나는 물리적, 화학적 메커니즘을 파고들었다. 세계적으로 이 두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는 데에 비해 해당 연구 자료는 뻔한 내용이거나 미미한 콘텐츠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 본연이 가지는 탐정의 기질을 백분 발휘해 결국 데미안을 위한 약물을 정제했다. 이론상으로 99.99%가 보장된 약액이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사안의 특이성으로 그 액체에 대해 만족할만한 표본조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데미안은 그런 아버지의 성미를 잘 알았고, 좋아했다. 데미안이 가볍게 웃었다.
“아버지 이론이면 충분해.”
그리고 브루스의 대안은 역시나 성공적이었다.
감각은 급격한 상승 곡선을 타고 초에 따라 그 정도를 달리하며 확장된다. 삑삑삑—, 삑삑삑삑—. 다급한 알람소리가 마치 가장 처음, 데미안이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르며 귀를 감싸며 주저앉자 놀라 달려오던 브루스의 심장소리와 닮았다.
브루스는 원래 데미안의 몸에 일련의 변화가 나타나기 전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장치를 설계했다. 그리고 데미안에게도 여러 번 주의를 주었고 다른 배트패밀리에게도 만약에 대비할 수 있게 비상시에 따른 매뉴얼을 전달했다. 하지만 브루스가 죽고 난 후 데미안은 다른 이들에게 이어진 연락망을 해제했고 약물이 주입되는 시기도 감각이 증폭되고 1분 후로 바꿔두었다.
고개를 들면 모든 것이 들어온다. 알프레드가 떨어트린 털 몇 가닥부터해서 데미안의 숨에도 쉽게 그 경로를 트는 빛 먼지들. 박쥐들의 속살거림. 동굴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물이 흐르는 소리. 피부에 와 닿는 배트맨 코스튬의 질량과 마찰. 폭력의 비린내. 모든 것이 여과 없이 데미안의 머릿속에 범람했다. 감각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데미안은 어떤 기억 하나를 건져 올린다.
ㄷ, ㅔ, ㅁ, ㅣ, ㅇ, ㅏ, ㄴ. 기억 속의 아버지가 자음과 모음이 해체된 채 자신의 아들을 불렀다. 그의 손의 질량과 온도가 기억난다. 그 손이 절박하게 데미안을 붙잡는다. 가면 뒤로 그가 약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아버지. 서툴지만 다정하던 그의 손. 그 손아래서 데미안의 감각이 진정되었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을까? 그의 등에 매달려 냄새를 들이키면 아무리 지독한 곳에서도 데미안은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없다.
삐삐삐삐삐삐삑—
아버지. 데미안이 비명을 지르듯 그 이름을 부른다. 아버지가 해결책일 수 없다면 그가 제시한 대안만이 데미안에게는 어떤 여지없이 답이었다. 그것은 언제고 마찬가지였다. 세포 하나하나가 시끄럽게 소란을 부렸다. 이 소란 속에서 오히려 외부의 소음은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만 같았다. 기억과 감각만이 이 짧은 순간 남는다. 미세한 바늘이 데미안의 피부를 뚫고 혈관으로 침투한 것을 알았지만 몸에 닿는 모든 것이 뇌로 흘러들어 통증은 평범한 것이 되었다. 썰물이 빠지듯 감각이 몰려나가고 데미안 홀로 차가운 현실에 내쳐졌다. 약액의 차가움이 의식 끝에 사라지는 순간, 데미안은 감각 기호로써가 아닌 온전한 브루스 웨인으로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자신의 가이드를.
“—아버지.”
지독한 박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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