휑한 저택 안 곳곳을 무거운 종소리가 정처 없이 부딪히고 지나갔다. 시계를 바라보던 브루스는 습하니 마른 숨을 마시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현관에 다다랐다. 커다란 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생겨난 틈새로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급하게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더불어 독한 장미향이 브루스의 뺨을 스쳤다. 문 너머, 눈앞에는 안경을 쓴 남자가 싱긋 웃는 얼굴로 반듯하게 서있었다. 브루스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크게 뜨였다.
“자네가 직접? 황송한데.”
남자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습관처럼 굳어진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남자의 눈동자는 피부에 와 닿은 겨울공기 만큼이나 새파랬다. 말 그대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는 시선을 브루스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저 눈동자 앞이라면 아무리 남자가 순박한 안경을 쓰고, 그의 커다란 몸보다도 반 치수 정도는 큰 양복을 차려입었을 지라도 괜찮았다. 브루스는 남자 앞에서 아주 오랜만이 브루스 웨인의 매끄러운 미소를 선보였다.
“슈퍼맨이 초인종을 누를 줄도 알고. 나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품에 붉다 못해 검은 장미를 안고 있는 슈퍼맨은 기꺼운 양 웃었다. 잘 짜인 연극을 하듯 둘은 의미 없는 호선을 주고받았다. 브루스가 몸을 살짝 뒤로 물리면 슈퍼맨은 다른 설명 없이도 자연스럽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면서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던 공기의 흐름이 단절되고 넓은 저택 안에 쌉쌀한 장미향이 향처럼 피어올랐다. 브루스의 예민한 후각이 그 짙은 꽃향기를 가르고 조각내어 그 자신의 머릿속을 수놓았다. 하지만 브루스는 흐트러짐도 없이 오늘로 마지막일 손님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브루스의 등 뒤에 장미향이 따라온다.
웨인저택 안에 있는 가구들은 그들이 놓여있는 건물에 맞추어 큼직큼직 했다. 식사를 위한 테이블 역시도 그러해서 혼자나 둘이 앉아있자면 보기에 썰렁할 정도이다. 그 테이블의 양 끝에 두 남자는 앉았다.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자면 둘의 모습은 마치 천칭 끝에 매달린 것과도 같다. 그런 둘의 가운데에 검붉은 장미가 심판처럼 놓였다. 브루스는 자리에 없는 집사를 대신해 서툰 재주로 레몬을 곁들인 차를 내왔다. 클락은 미소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한 몇 분 간 어떤 말도,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찻잔에서 피어오른 따뜻한 김이 둘 사이에 놓인 기다란 여백으로 퍼져 싸늘하게 식어서 사라졌다.
“명색이 발렌타인인데 날 위한 카드 한 장 없어?”
대리석 같은 침묵을 깨고 슈퍼맨은 별스럽지 않게 물었다. 브루스는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 저만치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범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안경과 서툴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서도 남자의 얼굴은 도를 넘게 잘 다듬어진 슈퍼맨의 것이었다. 행색 따위야 결국 코스튬에 불과하다. 레몬의 시큼함에 잠시 목이 말라서 브루스는 한 박자 느리게 대꾸했다.
“욕심이 과한데?”
“그래. 자네에게 한마디씩이나 바랐을 만큼은 되지.”
잿빛으로 굳어 들어가는 공간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울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지듯 한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슈퍼맨의 음성을 들으며 브루스는 등을 떨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한 때는 그것을 믿지 않기 위해, 한 때는 그것과 나란히 하기 위해, 한 때는 그것에 녹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지금은 휩쓸리지 않기 위해. 브루스는 눈 한 번 깜빡인 것으로 온갖 상념을 털어냈다. 다시 차분하게 차를 마셨다. 아무래도 홍차를 조금 떫게 우린 것 같다.
“난 자네 입에서 변명이라도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두터운 안경 뒤에서 친절하게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소리 없는 한숨 후에 무너지며 익숙한 무기질로 굳어갔다. 마치 달이 기우는 것과 같았다. 브루스는 응고되어가는 남자의 표정을 다시금 지켜보았다.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던 그 날. 차원의 통로 앞에서 말없이 서있던 배트맨을 바라보던 남자의 그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브루스는 제 낙인처럼 되새겼다.
브루스는 여전히 어떤 문장도, 단어도 나열하지 않았다. 박쥐의 침묵에 슈퍼맨의 눈썹이 아주 조금 찌푸려들었다. 유리알 같은 차가운 눈동자를 한 남자는 평범한 인간이라기 보단 이제는 기계처럼도 보인다. 굳게 닫힌 입술이 여전히 부드러워 보인다는 것이, 또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슈퍼맨에게는 골치 아픈 비극이었다. 슈퍼맨은 성급하게 다시 말을 했다.
“브루스, 난 멍청이가 아니야.”
가슴 안에서 몇 번이고 짓이겨져 나온 말이었다. 오랜 질문을 담고 남자는 자조하듯 얘기했다. 죽은 고목과도 같이 거칠고 메말라 있어서 불씨가 붙기 쉬운 말이었다. 다만 슈퍼맨은 스스로가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그 차원에 원래 존재하던 저스티스 리그들이 별 문제 없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던 것은 어떤 상황 설명을 듣지 않아도 배트맨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 건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후에 배트맨이 그쪽 루터의 무기에 대해 정보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자신에게 투표와 힘을 두고 거래를 할 수 있었겠는가.
브루스는 변함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오랜 세월 웨인의 이름 아래 길들어진 단정한 동작과 배트맨으로서 그 속을 가늠할 수 없는 투명함.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불행히도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슈퍼맨은 조금 멍청한 게 맞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스스로가 생각하기보다도 훨씬 ‘인간’답거나.
“자넨 나와 같은 걸 보고 있지 않았어?”
칼날과 같은 한낱 인간의 눈동자가 슈퍼맨을 직시했다. 지나치게 스스로를 단련한 그는 모든 감정을 속으로 삼키고 그것을 없던 것으로 지워낼 수 있었다. 긴 침묵에 귀가 아팠다. 슈퍼맨은 손에 쥔 찻잔을 깨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했다.
“서로 다른 존재가 꼭 같은 것을 보는 건 불가능하지.”
여상하게 뱉어진 말에 숨이 막혔다. 슈퍼맨은 하, 하고 억지로라도 질량 없는 숨을 뱉었다. 브루스는 요리 쪽으로는 손재주가 없어서 그가 내온 차가 쓰다.
“차라리 필요 없다고 라도 해보지 그래.”
나즈막한 목소리가 긴 테이블을 맥없이 굴러 브루스 앞에 시체처럼 도달했다. 그것을 보고도 브루스는 표정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됐다.
“도대체 언제부터... 아니.”
후, 하고 숨을 고르는 소리. 브루스는 다시 차를 마셨다. 역시 자신은 이쪽으론 영 재주가 없다.
“자네는 날—”
천칭이, 기우는 소리가 들렸다. 매서운 말의 부재 속에 허무함만이 남았다. 슈퍼맨은 결국 뒤의 말을 잇지 않았다. 브루스도 묻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은, 필요하지 않은 것에는 입을 열지 않는다. 답이 너무나도 뻔한 것에도.
우둑하고 빈 찻잔이 결국은 망가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슈퍼맨은 그저 얌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잘 마셨어. 발렌타인은 발렌타인인 모양이지.”
다시 웃는 얼굴이 된 남자가 낯선 목소리로 손잡이가 으스러진 찻잔을 가벼운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등을 돌린 그가 아주 잠깐 멈추어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돌려 브루스를 바라봤다.
“다음에 그 주머니 안의 상자를 쓸 거면 최대한 신속한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참 뒤 브루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 품에 넣어둔 텅 빈 납 상자를 꺼내 매끈한 표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 쓸었다. 멍청하게도. 브루스는 턱없이 늦고 말았다. 벌써 3년만큼은 늦었다. 이따금 환청처럼 들리는 박쥐의 소리를 브루스는 피곤한 눈으로 들었다.
매우 느린 걸음으로 테이블의 가운데로 걸어가 독한 장미를 안았다. 꽃잎이 아직 생생한 꽃이 그 색의 짙음 때문인가 드라이플라워만큼이나 건조해보였다. 아니면 새까맣게 불타버린 듯도 보였다. 괜한 의구심에 꽃다발에 있는 장미 중 하나를 억지로 끄집어내면 식물의 대에 달린 가시가 여린 인간의 살을 할퀸다.
“클락.”
단 한마디가 너무나도 많은 무게를 담고 아무도 듣지 못할 곳으로 가라앉았다.
애증 관련 꽃말 뭐가 있나 했더니 흑장미가 나오고, 레몬에는 진심으로 사모함이라는 꽃말이 있다기에.:Q_
로드숲뱃이면 섹시해야 될텐데.(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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