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층, 한 층 계단을 오르는 클락의 발걸음은 조심스럽다.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굳어진 움직임이었다. 다만 오늘은 살짝 그 걸음걸이가 늘어지듯 무거웠다. 클락은 침까지 튀기며 켄트를 부르짖던 편집장의 걸걸한 음성을 떠올리며 드물게 인상을 썼다. 푸욱 하고 한숨이 절로 났다. 그래도 이제 몇 걸음 더 가면 집이다. 클락은 반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클락이 딛고 선 계단의 수는 점점 많아졌지만 위를 향할수록 오히려 클락의 발걸음은 보다 가뿐해졌다. 집은 좋다. 집은 아늑하다. 집은 쉼터이고 안식처이다. 그리고 집에는.
잘각 잘각. 서둘러 꺼낸 열쇠로 현관문을 열면 아침에 클락이 기억하기로-이것은 꽤나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꺼두었을 형광등이 환했다. 새하얀 빛을 얼굴에 한가득 받으며 피곤으로 흐려져 있던 클락의 얼굴이 방긋 개었다.
“브루스.”
세상 온갖 인사말을 대신해 발음도 매끄러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거실 소파에 용케도 그 건장한 몸을 눕히고 있던 브루스가 팔걸이에 벤 고개를 젖혀 곁눈질을 했다.
“늦었군.”
사전에 어떤 약속의 말 하나 없던 브루스가 뚱하니 말했다. 클락은 거의 날듯 바쁜 걸음으로 서둘러 그의 앞으로 갔다. 소파에 누운 브루스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클락은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겸사겸사 브루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팔짱을 끼듯 제 가슴 아래에 얹어둔 브루스의 손은 여전히 얌전했다. 아무래도 오늘 브루스는 그나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 클락은 속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자신이 무언가 불만스러운 일이 있다면 하다못해 자신의 연인은 무어엔가 즐거워야지 세상은 공평한 법이다.
클락은 구태여 잘 잠가놓은 아파트의 문을 열고 (어쩌면 문이 아닐 수도 있지만) 들어온 브루스에게 ‘어떻게’냐 새삼 묻지 않았다. 그저 클락은 이제 슬슬 그에게 집 열쇠를 복사해서 건네야할지 아직은 그가 소소한 꾀를 발휘해 클락의 집에 무단침입하게 두어서 자그마한 서프라이즈를 만끽해야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을 맞이한 브루스의 눈에 살풋 의기양양함이 서린 것을 보자 아마도 아직은 후자가 더 답일 듯싶었다.
클락이 제 코와 브루스의 코를 한 번 부빈 후 떨어졌다. 그리고 그 후 바로 브루스가 사무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노트북.”
턱 끝으로 브루스가 클락의 침실을 가리켰다. 그 움직임을 쫓아 시선을 움직이던 클락이 고개를 끄덕여 브루스의 뒷말을 종용했다.
“네 노트북에 꽤 재밌는 걸 넣어놨지.”
브루스의 눈동자가 꼭 악동처럼 휘었다. 그 아주 사소한 변화를 유심하게 바라보던 클락이 파, 하고 숨을 토하듯 웃었다. 역시 그가 공으로 이 아파트에 찾아오는 일은 좀처럼 없다. 하기사, 클락이 브루스에게 제 아파트 열쇠를 건네지 않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한몫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클락 켄트가 CIA와 대면하게 될 일만은 만들지 말아줘.”
클락이 눈썹을 과장되게 휘며 말했다. 브루스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새침하게 올라간 눈매가 이야기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료했다. 나를 과소평가하는군. 클락은 지구의 둘레를 맴돌고 있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투자 아래 제작된 인공위성이 하는 일들에 대해 떠올렸다. 근래 클락이 브루스, 아니 배트맨을 포함한 다른 히어로들과 이야기한 바로는 자신들에게는 모니터링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안전한. 항상 인상을 푹 쓰고 있는 카울 뒤에서 일을 하고 있는 브루스였지만 이나저나 그는 결국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브루스는 슈퍼맨의 고독의 요새에 까지 찾아와 털을 덧댄 망토 마저 준비하면서도 몇날 며칠 외계의 망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고 결국 그의 집사와 이마를 맞대고 무언가를 만들어낸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이번 방문의 백 프로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클락은 소파 위에 늘어져 있는 브루스의 몸을 가뿐하게 안아 올린 뒤 자신은 소파에 눕고 브루스는 제 몸 위에 올려놓았다. 지구의 중력이 브루스를 꼼꼼하게 끌어당기면서 그 만큼 클락의 몸에 기분 좋은 하중이 가해졌다.
“이봐.”
“조금은 협조해 줘. 오늘 너무 힘들었다고.”
짜증의 기색을 띠려는 브루스의 말을 자르며 무려 그 슈퍼맨이 우는 소리를 하듯 칭얼댔다. 금방이라도 클락의 위에서 일어나 품에서 벗어날 듯 자세를 잡던 브루스의 몸이 잠시 굳었다. 그 사이 클락의 눈을 보더니 브루스는 한숨 한 번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퍽 순순하게 몸에서 힘을 빼주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근육 움직임 하나하나를 생생히 전달받으면서 눈만 깜빡였다. 클락이 빙그레 웃으며 브루스의 허리를 안았다. 브루스의 몸은 다부졌지만 그 허리는 또 제법 섬세해서 클락은 브루스의 허리춤을 안을 때면 더더욱 조심스러워졌다.
“한 달을 준비했던 게 종잇조각이 돼 버렸어.”
클락이 브루스의 정수리 위에 쪼듯이 뽀뽀하며 말했다. 클락의 애정표현에 브루스는 언제나처럼 움찔하니 손끝을 떨다 이내 모르는 척 잠잠해졌다. 클락은 브루스를 좀 더 꼭 끌어안았다.
“요즘 세상에 그런 이야기는 팔리지 않는다고 말야. 대신에 그 자리엔 풋볼 선수의 스캔들이 들어갔지.”
너무하지 않아? 클락이 이야기하면 흐음, 하고 코만 울릴 뿐 브루스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제대로 된 맞장구조차 없는 싱거운 대꾸가 클락은 더없이 안도됐다. 클락의 품에서 브루스가 떠나려고 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 든 갖갖은 문제들에 비해서는 사소할 고민들을 그 배트맨이 시간에 대한 불평 없이 들어주고 있었다. 아, 정말로. 클락은 문득 지금 자신이 안고 있는 브루스와 꼭 같은 질량, 촉감, 냄새를 가진 바디필로우가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브루스가 항상 제 곁에 있어주는 거지만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바람인지는 심지어 그것을 소원한 클락 스스로의 사정을 생각하더라도 뻔했다. 그래서 지금 이 감각을 온전히 떼어서 보관하고 싶었다.
몇 마디 말을 잠잠히 클락의 배 위에서 듣던 브루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정 그렇다면 기자일 정도야 편하게 하지 그래. 어차피—”
하지만 브루스는 곧 입을 닫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클락이 의아한 듯 브루스를 내려 보았다. 바라본 브루스의 미간에는 짙은 주름이 지어있었다. 하필 그 오목한 모양이 볼우물만큼이나 예뻐서 클락은 브루스에게 인상을 풀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클락의 시선을 알아챈 브루스는 클락과 눈을 마주하다 짧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불쑥 몸을 일으켰다.
불현듯 멀어지는 온기에 클락은 부랴부랴 브루스를 따라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브루스의 손이 단호하게 클락의 어깨를 누르며 저지했다. 그리고서 그 자신은 홀연히 안락했던 소파를 빠져나가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클락이 소리를 쫓은 바에 따르면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듯 했다. 하지만 자신의 집 냉장고에 든 것이라고는 생수와 우유가 전부였다. 물음표를 담고 브루스의 동선이 그려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자면 금방 손에 어떤 작은 상자를 든 브루스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상자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런 포장이었고, 그 위에 그려진 로고는 디저트에 큰 관심이 없는 클락마저도 들어본 유명한 가게의 것이었다.
“알프레드 씨가 용케 허락해줬네?”
상시 제 도련님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관리하고 있는 그 올곧은 집사를 떠올리며 클락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브루스가 단 것을 좋아하는 탓에 식단에 대해서는 더더욱 까다로워지는 알프레드를 이 도련님 역시도 떠올렸는지 그의 입술이 아주 잠깐 비죽 튀어나왔다. 브루스가 소파 앞 탁자에 내려놓은 상자에서는 벌써부터 진한 단 냄새가 풍겨 나왔다. 브루스의 커다란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포장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앙증맞은 초코 무스 케이크가 나왔다.
설마, 저걸 주겠다는 걸까? 클락이 고맙다는 말을 하려 브루스를 바라보다 다급하게 입을 닫았다. 이번에는 브루스 스스로가 클락의 몸 위로 걸터앉은 탓이다. 그리고 브루스는 목에 매어진 푸른 넥타이를 끌렀다. 사락 하고 질감 좋은 소재가 서로 마찰하며 지나치게 생생한 소리가 났다. 어, 하고 클락은 무언가 소리를 내뱉기도 전에 머리에 열이 올라 그만 뺨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저 목을 감싼 사소한 장식 의복 하나를 끄른 동작만으로 그 맨 오브 스틸을 무장해제한 옆 도시의 대부호는 멍하니 누워있는 클락의 양손을 잡고 자신의 넥타이로 진지한 자세로 꼼꼼히 묶기 시작했다. 그 세기도 제법 세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위협적일 수도 있을 만큼의 결박이었다. 하지만 이 매듭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클락은 물론이고 브루스 역시도 잘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풀리면 알아서 하도록.”
정정하자. 이 매듭을 클락은 결코 풀 수 없다. 클락은 최대한 고분고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매끈한 넥타이가 클락의 손목을 부드럽게 옥죄었다.
이제 브루스의 한손이 꺼내둔 케이크를 반듯하게 균형 잡힌 자세로 받쳐 들었다. 아담한 초코 케이크를 들고 있는 브루스는 어쩐지 더 귀여워보였다. 혹시 얌전히 먹는 모습을 보란 뜻일까? 클락은 원래 브루스가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의 브루스는 오히려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고는 했다. 마치 그 음식이 저에게 선사하는 모든 감각을 꼼꼼히 파악하겠다는 듯 퍽 절박하기까지 했다. 브루스가 먹는 것에 그만큼 열중할 수 있다는 건 클락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세속에 마음 붙인 점이 있다는 것만큼 그 사람을 단단하게 해주는 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 신경이 음식에 팔린 브루스를 보고만 있는 건 어쩐지 분해서 과거 클락은 몇 번인가 브루스의 식사를 방해하고 말았다. 어쩜 이 결박은 그에 대한 경고일지도. 그렇다면 이번에야 말로 차분하게 그가 조그마한 케이크 하나라도 온전히 다 먹는 모습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락은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클락의 짐작은 빗나갔다.
마치 과육을 먹듯 짙은 초코무스를 한입 베어 문 브루스는 그 입술 그대로 클락의 입술에 맞닿았다. 놀라 벌어진 클락의 입안으로 턱 끝이 지잉 하니 울리는 다디단 초콜릿의 향이 스몄다. 브루스의 혀 위에 오롯이 있던 무스는 끈적끈적하니 녹아서 클락의 후각을 흔든 뒤 미각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 끝에 브루스의 탄력 있는 혀가 따라 들어왔다. 마치 어두운 곳에 불을 붙이듯 브루스는 클락의 입안 곳곳에 케이크의 달콤함을 퍼뜨렸다. 혀끝을 시작으로 오돌토돌한 입천장, 부드러운 안쪽 볼 살, 나란한 치열의 안쪽. 종국에는 너무 달아서 제 혀와 브루스의 혀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저 하나로 녹아들 듯 겹쳐진 입술이 부족하고 또 부족했다. 클락은 단단히 묶인 손을 들어 브루스의 머리를 지나 그의 허리 뒤로 가져갔다. 그렇게 브루스는 다시 클락의 팔 안에 갇혔다. 자박자박, 이제 둘 사이에서 녹아내린 초코무스가 바닥이 나고 잔향이 남은 두 맨살이 소곤소곤 은밀하게 부대꼈다. 그러다 아주 한참만에야 간신히, 간신히 떨어졌다.
“좀, 나은가?”
폭, 달게 젖은 숨으로 브루스가 물었다. 클락은 순진하게 따라 나오는 긍정을 꾸욱 집어삼켰다. 꽁꽁 묶인 손으로 브루스를 바투 끌어당기며 클락이 대꾸했다.
“...아직 남았잖아?”
그러면 브루스는 흠, 하니 코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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