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하고 외치며 커다란 보자기를 망토처럼 둘러맨 클락이 의기양양하게 브루스 앞에 섰다. 클락이 저에게 잠시 있어보라 한 동안 나무에 등을 기대고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던 브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푸르른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바람이 클락이 두른 천과 그의 머리카락을 하늘하늘 스쳐 지났다.
브루스가 스몰빌에 도착한 아침때서부터 클락은 무어엔가 들떠서는 얼굴을 발갛게 빛내고 있었다. 파란 바다가 안에서 반짝반짝 생기가 도는 클락의 눈동자를 보던 브루스는 읽던 책의 표지를 덮어 나무 밑동에 두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제 엉덩이에 붙은 마른 풀과 흙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브루스의 주변을 왔다갔다 서성이던 클락은 브루스가 성에 찰 만큼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낮은 언덕을 성급하게 내려가며 브루스가 클락에게 잡힌 손을 빼지 않고 외쳐 물었다.
“어디가?”
“보여줄게 있어!”
둘은 어느 샌가 키가 큰 옥수수 밭에 다다랐다. 파스락 하고 두 아이가 식물의 잎과 줄기에 몸을 부딪치고 갈 때면 쌉싸래하니 싱싱한 냄새가 났다. 브루스가 낮게나마 있던 내리막을 따라 달리던 힘을 그대로 받은 채 클락의 뒤를 따라 뛰었지만 조금씩 클락의 속도가 버거워질 참이었다.
“나, 잘 봐.”
클락이 고개만 돌려 브루스를 보고 말했다. 말을 마친 아이는 잡은 브루스의 손을 살며시 놓고 더 힘차게 내달렸다. 숨이 차오르고 더 이상 클락은 자신의 손을 끌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브루스는 제 페이스대로나마 클락을 따라 달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와 거리가 멀어지는 클락을 지켜보았다. 녹빛 옥수수들을 가르는 클락이 두른 다홍 천이 너풀너풀 흩날렸다. 푸른 하늘과 초록 작물, 클락의 빨간 망토가 넘실넘실 어우러져 브루스의 눈에 와 박혔다. 힘껏 달리던 클락은 이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클락이 딛고 지나간 자리의 흙에는 제법 옴팡진 발자국이 남았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클락의 점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
“짠!”
잠시 비틀비틀 몸을 가누던 클락이 허공에서 팔다리를 쭉 펴며 소리쳤다. 서서히 달리는 속도를 줄이던 브루스가 이제 완전히 걸음을 멈추어 선 채 제일 키가 큰 옥수수의 머리보다도 높이 떠있는 클락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클락의 등 뒤에 펼쳐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이 부셨다. 브루스는 한손을 들어 부신 눈 때문에 찌푸려진 눈썹을 가리고 색색 숨을 골랐다. 흰 와이셔츠 아래에서 아이의 작은 가슴이 벅찬 호흡을 따라 부풀다 꺼지고, 다시 부풀기를 반복했다.
한동안 브루스의 반응을 기다리며 대자로 핀 자세로 떠있던 클락이 흠 하니 헛기침을 했다. 클락은 마치 좁고 위태로운 징검다리를 건너듯 신중하게 지면을 바라보며 기우뚱기우뚱 브루스에게로 날아왔다. 브루스의 앞에서 다시 겨우 균형을 잡은 클락이 들뜬 눈으로 물었다.
“어때?”
브루스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클락은 멈춘 상태로 떠있기보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아오른 편이 편한지 아니면 불현듯 초조해졌는지 브루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얼마간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그 움직임을 쫓던 브루스는 이내 어지러워서 관뒀다. 클락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바람 속에는 클락이 우물우물 흘린 말소리가 녹아있었다. 아직 라나나 피트는 몰라... 아, 마랑 파는 알고 계셔! 음... 이제 한 달 정도 됐어. ...친구 중에선 브루스가 제일 처음이야. 이제 클락은 저도 모르게 제 손가락을 뜯고 있었다.
브루스는 불현듯 다시 하늘을 보았다. 이 지구를 감싸고 있는 푸르른 공간을.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곳을. 그리고 그 위에 몇몇 다른 층들이 있고, 그 너머는 새까만 무한이 맞닿아 있는 것을 떠올렸다. 브루스는 맨몸으로 닿지 못할 광활한 우주가. 힐끔 쳐다본 클락은 이제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직도 아무 말이 없는 브루스의 반응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브루스는 정신없이 서성이는 빨간 잔상을 멈추어 세우듯 팔을 뻗었다. 빙글빙글 배회하던 클락이 뻗어진 브루스의 작은 손을 보고 뚝하니 멈추었다. 브루스의 말간 눈이 조용히 클락을 보고 있었다. 클락은 팔을 내려 저에게로 향한 브루스의 흰 손을 잡았다. 두 어린 손이 맞물리자 브루스는 마치 점검을 하듯 몇 번 클락을 아래로 잡아끌듯 당겼다. 하지만 클락은 그것을 버텨냈다. 오히려 치기가 돌아 조금 더 위로 날아올랐다.
처음 몸이 멋대로 떠올랐을 적에는 무서웠지만 이제는 꽤 감을 익힌 차였다. 또 하나 제 또래들과는 다른 특징이 생겨나 버렸지만 그럼에도 클락은 한편 자랑 하고 싶었다. 자유롭게 날 수 있다니! 정말 멋진 일이잖은가. 물론 브루스는 돈이 많으니까 하늘을 날고 싶거나 먼 곳을 가고 싶을 때는 비행기든 헬리콥터든 뭐든 이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브루스에게는 이런 것쯤 큰 자랑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안도되기도 하고 또 조금 시무룩하기도 해서 클락의 어린 마음이 복작복작해졌다. 그리고 이러저러 생각을 하는 틈에 클락은 보다 높이 떠오르게 되었고 그 탓에 이제 브루스와는 손가락만 간신히 걸친 채였다.
브루스가 불편하겠어. 클락이 브루스와 잡은 손을 놓을까하던 중 클락은 브루스가 까치발을 들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클락이 방긋 웃으며 다시 조금 내려와서 브루스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그러면 브루스도 클락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클락이 조심히 브루스와 어깨동무를 한 채 떠올랐다. 처음에는 클락이 혼자 떠오를 때와는 다르게 무언가가 끈질기게 자신과 브루스를 잡아매는 기분이었지만 곧 클락은 가뿐하게 이겨냈다. 브루스의 구둣발이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자 그의 어깨가 조금 굳은 것을 알고 클락은 웃음을 삼키며 브루스의 등을 받친 팔에 힘을 주었다. 조금씩, 조금씩 두 소년의 몸이 떠오르며 이제 옥수수 밭이 둘의 발아래 있었다.
“어떻게 하는 거야?”
땅에서 멀어지는 제 발끝을 보던 브루스가 클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음, 하고 클락은 운을 뗐지만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냥 됐어.”
브루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하고 되물었다.
“그냥?”
“그냥.”
클락도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며 재차 대답해주었다. 브루스의 옅은 하늘빛 눈동자가 의구심에 도르륵 굴렀지만 우선은 됐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머리위에 하늘과 발아래에 땅을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꽤 단단히 받치고 있는 클락의 손을 보았다.
“...멋지네.”
소곤소곤 마치 풍경을 보고 이야기한 듯 브루스는 클락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얼핏 보이는 브루스의 오밀조밀한 귓바퀴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클락은 귀가 좋아서 브루스가 속살거린 말을 기어코 놓치지 않았다. 그러자 순간, 휘청하고 두 아이의 몸이 허공에서 균형을 잃었다. 끊임없이 중력의 방해를 받고 있던 브루스의 몸 쪽으로 모든 중심이 쏠렸다. 땅으로 기울어지는 브루스를 클락이 급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브루스의 눈이 크게 뜨인 것을 보며 클락은 지면을 등졌다.
“클, 락!”
“잠깐, 브루스. 다쳐.”
브루스가 무슨 짓이냐는 듯 자신을 감싸며 떨어지는 클락의 위에서 바동거렸지만 클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래는 폭신한 흙바닥인데다가 이정도 높이에서 클락은 절대 다치지 않는다. 하지만 브루스는, 브루스는 다칠지도. 자신을 단단히 안은 클락의 팔을 풀어내려고 몸부림치던 브루스는 결국 포기했는지 얌전해졌다. 대신 브루스의 손과 팔이 클락의 머리와 목을 감싸며 마치 떨어지는 클락을 위로 끌어당기듯 힘을 주었다. 클락과 브루스는 눈을 꾹 감았다. 두 사람 옆으로 옥수수의 잎이 차르르 스쳐 지나며 텁텁한 흙냄새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아무 통증도 없었다. 땅에 떨어져 잔뜩 먼지를 먹을 것을 각오하고 꾹 닫은 입, 코와 눈으로 어떤 먼지도 들어오지 않았고 산들바람만이 지나갔다. 둘은 눈을 떠 자신들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락의 등은 땅 위 1피트 남짓 정도에서 멈춰있었다.
“됐다!”
“됐다!”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빛내며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은 툭하니 흙 위로 떨어졌다. 흙먼지가 포옥 피어오르고 결국 두 사람 다 그것을 들이마시고 콜록거렸다. 그래도 이쯤의 낙하야 한창 넘어지고 부딪히는 것이 일인 소년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기침을 해대던 둘이 겨우 먼지를 다 뱉어내고 멍하니 서로를 마주보다 동시에 눈을 껌뻑였다.
클락의 품위에서 브루스가 몸이 잘게 떨다가 푸푸하고 공기를 리듬 있게 뱉어내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소리가 곧 하하하 하고 웃음소리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브루스의 웃음을 지켜보던 클락도 히 하고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다 따라 높이 웃기 시작했다. 까르르, 하고 두 소년의 웃음이 옥수수 밭 아래서 너른 하늘로 반짝이며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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