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운님께 드리는 생일선물입니다. [아주 달달한 딕브루 + 브루스 몸 걱정하는 딕]이에요.
그의 마음 속 시계와 꼭 같은 시간을 맞춘 후 생겨난 입구를 통해 딕은 지하로 내려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깊은 동굴을 광도 낮은 조명이 밝히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토닥토닥 일부러 소리를 내면 동굴 한쪽에서 끼긱하고 박쥐들이 소곤댔다. 계단의 커브를 마저 돌기도 전에 비죽 고개를 내밀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중앙모니터의 앞에도 그는 없었다. 딕은 익히 알고 있는 남자의 동선을 꼽으며 굴의 구석에 위치한 연구실로 향했다. 딕은 이 굴에 있는 박쥐들 중에서 가장 큰 박쥐를 찾아야했다. 가장 크고, 가장 사나우며, 가장 고집이 세고, 가장 아름다운 박쥐를.
“브루스.”
마치 휘파람처럼 딕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연구실로 향하는 중, 그 길 조금 전에 위치한 진찰대를 딕은 놓치지 않고 살펴보았다. 진찰대 위는 텅 비어있었다. 시트가 흐트러지지도 않은 걸로 보아 다행히 누가 눕거나 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조용한 기계소리가 들려왔다. 빙고. 딕이 히죽 웃으며 한달음에 남은 거리를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감아도 익숙한 박쥐의 꼿꼿한 뒷모습이 보였다.
“브루스!”
“시료 분석.”
[분석 진행, 스캔 시작—]
한가득 반가움을 담은 딕의 부름을 말끔히 무시한 채 브루스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조종했다. 브루스는 그의 얼굴 앞에 떠오른 모니터를 훑은 뒤 등을 구부려 좀 더 작업대 위로 코를 붙였다. 밤을 머금은 까만 망토가 그의 등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패트롤을 마친 뒤 바로 증거물 분석에 들어간 건지 브루스는 카울조차 벗지 않은 상태였다.
벌써 얼굴을 마주한지가 한 며칠이 넘어가고 있는 사람이 불쑥 등 뒤에 찾아왔는데도 브루스의 태도는 쌀쌀맞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딕은 그게 서툴러빠진 그에게 있어서 최대한의 신뢰의 표시라는 것을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무시하는 게 좋은 건 아니다.
“브루스!”
왁 하니 외치며 딕은 브루스의 양 옆구리를 뒤에서 쥐었다. 늑골 아래에 복부를 탄탄한 근육이 차곡차곡 감싸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의 몸이 움칫 굳는 것이 케블라 너머로 전해졌다. 짧은 순간에 딕은 그의 옆구리를 주무르며 그의 몸에 당장의 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딕.”
조금은 노성이 섞인 목소리가 책망하듯 청년을 불렀다. 이제사 겨우 그가 살짝 고개를 틀어 딕을 보았다. 딕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래요, 당신의 딕 그레이슨입니다.”
딕이 드러난 그의 턱 끝에 츄 하고 입맞춤을 보냈다. 그러면 굳게 다물린 남자의 입이 일자로 더욱 굳어진다. 그 모양을 싱글벙글 지켜보던 딕이 활발하게 말했다.
“3일째 철야라면서요?”
“토양 샘플 위치 추적.”
[위치 검색, 구역 42번—…]
어느 새 고개를 원위치로 돌린 브루스는 다른 증거품에 묻은 진흙을 긁어낸 뒤 컴퓨터를 향해 말했다. 원치 않는 대화에 대해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은 배트맨인 그가 정말 열 받도록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딕은 콧방귀를 치며 그의 태도에 굴하지 않았다. 그 정도에 굴하기에 딕이 겪어온 시간들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수염 자랐어요. 발리에서 한창 탕아노릇 한다는 사람이 이러면 써요?”
딕이 까끌한 수염이 돋은 브루스의 턱을 쓸었다. 카울 너머로도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브루스가 자신의 턱을 매만지는 딕의 손을 밀어내기 위해 손을 들자 딕이 다른 쪽 손에 통신기를 위협적으로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자꾸 이러면 지금 당장 A에게 오늘 아침은 콩 파티라고 연락할거예요.”
지금, 순간 그의 인상은 더 매서워졌을 테다. 딕은 싱긋 웃으며 브루스가 쥐고 있던 증거물들을 잘 갈무리 한 뒤 그의 손끝을 이끌었다. 역시나 브루스는 순순히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딕은 브루스를 달래듯 속삭였다.
“너무 들여다봐서 안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잖아요. 30분만요. 알프레드가 날 여기로 부른 걸 봐서래도요.”
브루스가 한숨을 한 번 뱉었다.
“15분.”
“20분! 그 아래로는 안돼요.”
다시 한숨 한 번. 딕은 괜히 긴장이 돼서 잡은 브루스의 손끝을 꾸욱하고 더더욱 쥐었다.
“...분석 보류.”
[데이터를 저장합니다.]
딕은 휴, 하니 괜히 너스레로 한숨을 쉬어보이며 브루스의 얼굴에서 카울을 벗겼다. 브루스가 눈을 깜빡이는 것을 따라 땀에 젖은 앞머리가 헝클어져서 흘러내렸다. 마치 춤을 권하는 것처럼 손끝만 서로 걸쳐진 브루스의 손을 이끌면 브루스는 인상을 쓰면서도 순순히 따라주었다. 두 사람은 같이 동굴을 올라갔다.
제 손으로 옷을 벗겠다는 그를 굳이 말리며 딕은 브루스를 감싸고 있는 코스튬을 하나하나 제거했다. 브루스가 토를 달려고 하면 “당신이 벗으면 알피 일감만 늘어요.”하고 일축했다. 그리고 그 말은 제법 효과가 좋아서 결국 브루스는 딕의 손길에 따라 말갛게 나체가 되었다.
딕은 알프레드가 미리 준비해놓은 따뜻한 물이 찬 욕조에 브루스를 밀어 넣은 뒤 제법 무게가 나가는 배트맨의 옷을 잘 모아 욕실 밖 세탁통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브루스가 있는 욕조로 가는 길에 서랍장에서 쉐이빙 크림과 면도칼을 챙겼다. 브루스는 착실하게 욕조 안에 누워있었다. 그래도 이왕 쉬기로 마음을 정했으니 최대한으로 효과를 볼 생각인 모양이었다. 굳은 어깨를 풀 듯 브루스는 가슴을 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움직임에 브루스의 목젖과 쇄골에 이어지는 목근육이 도드라졌다. 느리게 그의 흰 목을 따라 물방울이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딕은 침을 한 번 삼킨 뒤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브루스에게 다가갔다. 욕조에 걸터앉은 딕은 힐끔 브루스의 가슴을 보았다.
“이거.”
탄탄한 볼륨이 있는 가슴 한쪽을 가로지른 궤적을 딕이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새로운 거네요.”
“별 거 아니야.”
눈을 내리감은 채 따뜻한 물기를 머금고 노곤해진 브루스의 목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딕은 브루스의 왼쪽어깨에서 자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물속에 손을 넣어 갈비뼈 바로 아래에 긁힌 상처와 복부에 자리한 멍을 짚어냈다. 그 밖에도 몇몇 가지 더. 딕은 새로운 흉터들을 찾았다.
“신경 쓸 필요 없다.”
브루스가 위로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꼭 딕의 손길을 밀어내는 것만 같아 딕은 다시 떠오른 그의 하늘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 브루스. 나는 알아야 해요.”
또르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따라서 브루스의 눈동자가 천천히 감기고 뜨였다. 부연 수증기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왜 하는 의문을 담고 빛나고 있었다. 딕은 그저 미소만 지어보이며 답해주지 않았다. 당신은, 탐정이잖아요. 대신 딕은 브루스의 턱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어 올린 뒤 뾰족하게 자란 수염 위로 쉐이빙 크림을 발랐다. 몽골몽골 하얀 크림이 그의 턱과 아래 뺨에 덥수룩하니 묻어 귀엽고, 또 이상하게 야했다. 딕은 몇 번인가 작은 원을 그리듯 브루스의 턱에 크림을 발랐고 잠시 기다린 뒤 신중한 손길로 그의 피부결을 따라 거품과 함께 수염을 거두어냈다. 브루스는 그런 딕에게 협조하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욕조 한쪽을 짚으며 몸을 틀었다. 사각사각, 한동안 아무 대화도 없이 딕이 브루스를 면도해주는 소리만 들렸다.
“됐다!”
딕이 뽀얗게 드러난 브루스의 맨살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딕은 마무리로 차게 식은 타월로 브루스의 턱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면도 중 눈을 감고 있던 브루스가 딕의 외침에 따라 눈을 뜨며 피식 웃었다. 매끈해진 브루스의 뺨을 소중하게 양손으로 쥐며 딕이 그의 입술 위에 뽀뽀했다. 잠시 위에서 내려지는 입맞춤을 얌전히 받고 있던 브루스가 느리게, 하지만 착실히 그에 응해왔다. 포곤한 열기가 후덥한 욕실 공기를 타고 올라왔다.
“흠. 브루스, 역시 10분 더 주면 안돼요?”
어느새 브루스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딕이 입술만 살짝 떼며 물었다. 콩 하니 맞닿은 이마가 뜨겁다.
“10분이면 되나?”
촉촉한 공기 너머에 자리한 겨울 하늘이 아주 희미하게 한들한들 녹아내렸다. 딕이 그 눈웃음을 지켜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옷이 젖는 건 생각도 않고 브루스를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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