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즈, 특히 캐릭터 상품이란 대단하다. 클락은 눈앞에서 팬케이크를 굽고 있는 브루스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아래는 클락의 트레이닝팬츠를 빌려 입었지만 상반신은 반라인 브루스는 상큼한 민트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클락이 메트로폴리스에서 자취하는 것으로 결정 나자 피트가 필요할거라며 장난삼아 넣어준 에이프런이었다.
“자네 눈 색이랑 잘 어울려.”
클락이 시시덕거리듯 이야기하자 브루스는 고개를 살짝 돌려보다 코만 씰룩해 보이고 말았다. 앞치마가 가리지 못하는 브루스의 등은 훤히 드러나 그 움직임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클락은 그 사실 하나로 요리하는 배트맨을 앞에 두고도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주말이란 시간에 드물게도 짬을 내서 클락의 아파트에 머물다가는 브루스를 위해 실내는 난방이 돌아가고 있었다. 브루스의 맨 등을 감상하고 있어도 하등 문제될 일은 없었다. 클락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자세로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일의 발단은 늦은 아침에 브루스가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였다. 클락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어 잠이 들었던 브루스가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브루스의 정수리에 몇 번 입을 맞추던 클락은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키는 브루스를 지켜보다 같이 일어났다.
“...물.”
브루스가 쉰 목소리로 잠에 취해 중얼거렸다.
“물 가져올까?”
아직 눈꺼풀이 닫힌 채로 있는 브루스의 눈을 손가락으로 쓸며 클락이 물었다. 엄지손가락에 가지런한 속눈썹이 닿으며 약간 간지러웠다. 브루스의 눈이 어물어물 뜨이며 클락의 손을 피하는지, 물음에 부정을 하는지 브루스가 설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졸린 눈으로 몇 번 주변을 둘러보던 브루스는 침대 옆에 놓인 클락의 바지를 집어 들고 대충 꿰어 입기 시작했다. 몸이 뻐근한지 상체를 좌우로 스트레칭 하며 브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레이닝팬츠의 허리끈을 조여 묶은 브루스는 그대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이 일련의 동작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터라 클락은 그저 브루스의 뒷모습만을 지켜보다 브루스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게 되자마자 곧장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브루스는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 한통을 꺼내들었다. 그 와중에도 피곤했던지 잠시 고개를 푹 숙이던 브루스는 아주 약간의 짬이 지난 후에야 생수통을 열어 안의 물을 들이마셨다. 물을 삼키기 위해 움직이는 목과 그 속에서 만들어낸 소리들이 경쾌해서 보는 사람이 다 시원해질 정도였다. 그러다 하 하고 한숨을 뱉으며 통에서 입술을 뗐다.
“잘 잤어?”
클락이 웃으며 인사했다. 브루스는 고개만 끄덕이며 클락에게 물이 남은 물통을 들어보였다. 클락은 그것을 받아들고 모조리 마셔버렸다.
비로소 정신이 든 모양인지 브루스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세상 모든 정보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듯한 냉철한 눈동자가 아늑하기 그지없는 클락의 아파트 내부를 훑었다. 그러다 브루스의 눈이 부엌 한쪽에서 멈추었다. 주방기구들 몇몇 개가 걸려있는 행거에서 브루스는 지난번 자신이 찾아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한가운데에 슈퍼맨의 마크가 새겨진 팬케이크 전용 팬이었다.
“사용료는 받나?”
낮게 잠긴 목소리가 물었다. 클락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 답했다.
“수익의 일정부분은 난치병 연구센터로 기부하는 걸로 돼있어.”
흐음, 하고 별스럽지 않게 브루스는 코를 울렸지만 시선은 여전히 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팬의 손잡이를 잡고는 이쪽저쪽 구경하기 시작했다. 눈빛만큼은 꼭 품질관리 부서에서 감찰이라도 온 것 같았다.
“만들어줄까?”
클락이 브루스의 맨 어깨를 팔로 감싸며 물었다.
“아니...”
자신에게 달라붙어 관자놀이나 귓가에 입을 맞추는 클락을 그냥 내버려둔 채로 팬을 계속 관찰하던 브루스가 답했다.
그리고 일은 흘러, 무려 브루스가 직접 앞치마를 두르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브루스가 요리에 영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로빈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도 있고-그건 에피소드라기보다 하나의 무용담과도 같았다- 그 집의 집사가 집주인의 부엌 출입을 극도로 저어하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클락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브루스는 대뜸 클락에게 밀가루나 베이킹파우더의 존재 여부를 묻고 나섰다. 그러면서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의 차이를 묻는 것은 클락만이 알고 있는 웃음 포인트였다. 요리의 요 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도련님은 그럼에도 옆에서 봐왔던 주방장이 알프레드인 탓에 재료의 배합부터 스스로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팬케이크 전용 믹스가 있어.”
클락이 웃음을 죽이며 말하자 브루스는 눈썹을 까딱였다. 클락은 브루스의 심기가 더 뒤틀리기 전에 재빠르게 옷을 대충 챙겨 입고 근처 마트로 가 팬케이크 믹스를 사들고 돌아왔다. 팔짱을 낀 채 부엌에서 버티고 서 있던 브루스는 5분도 걸리지 않아 돌아온 클락의 손에서 도도하게 믹스를 받아들었다.
클락의 아파트 안에는 팬케이크 냄새가 가득했다. 그 사이에는 살짝 탄 냄새까지 섞여있었다. 필요한 것은 사전에 준비해두려는 브루스의 습성으로 부엌 앞에 있는 식탁에는 재료와 그릇들로 어지러웠다. 설명서에 있는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계량컵을 찾는 브루스에게 집에 있는 그릇으로 대충 맞추면 된다고 클락이 이야기한 탓에 찬장 안에 있던 이 그릇, 저 그릇 전부 밖으로 끄집어내져 있었다.
누군가는 보자마자 ‘혼돈’이라고 표현할 부엌의 상태에도 클락은 그저 평온했다. 이미 클락은 슈퍼맨으로서 숱한 난장판을 보고 왔던 사람이었다. 브루스가 요리를 한다고 벽이 날아갈 일은 없을 테고, 웬만해서는 폭발이 일어날 일도 없을 것이다.-그리고 그 정도로 상황이 악화될 때는 클락이 말리면 될 일이었다- 브루스는 클락에게 요리법에 대해서 몇몇 사항을 제외하고는 거의 묻지 않았고 클락도 구태여 나서서 브루스를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왜일까, 그냥 자신의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브루스를 바라보는 게 그저 좋았다.
제일 처음 만든 팬케이크는 쓰레기통 신세가 되었다. 알프레드가 하는 것을 보았던, 아니면 어느 매체를 통해서 접했던 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팬케이크를 뒤집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브루스가 만든 반죽은 살짝 무른 상태였고 어떻게 튕겨져 올라가기는 했지만 위에 익지 않은 반죽물이 흘렀다. 브루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클락은 그 광경을 보자마자 브루스의 손에서 팬을 빼앗아 그를 뒤로 떨어뜨려 놓았다. 그 탓에 팬케이크는 팬 위에 정착하지 못하고 반죽물로 궤적을 그리며 인덕션 가장자리를 쓸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찮아?”
클락이 뒤에서 눈을 껌뻑이는 브루스를 보며 물었다. 클락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던 브루스는 이마를 찌푸리다 입을 앙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유명을 달리한 팬케이크의 잔해를 치우고, 브루스는 팬을 씻었고 클락은 떨어진 반죽물을 닦았다. 브루스는 그래도 다시 요리를 시도할 모양인지 조리대 앞으로 돌아왔다. 그런 브루스에게 클락은 비장한 얼굴로 뒤집개를 내밀었다. 브루스는 매섭게 그것을 노려보다가 결국 받아들었다.
다음 번 브루스가 만든 팬케이크는 새까맣게 탄 것이었다. 바삭하고 한 입 씹자 매캐한 맛이 입과 코를 메웠다. 이번에는 반죽이 약간 된 상태에다가 믹스와 계란, 우유를 섞을 때 잘 섞지 않았는지 어느 지점을 씹을 때는 톡하니 뭉친 팬케이크 가루가 터져 나왔다. 입안에 씹히는 가루에 놀랐던 클락은 그 다음 이어 씹히는 계란껍데기의 아삭함에 다시 놀라고 말았다. 거기다가 비정상적으로 달았다. 가뜩이나 타서 쓴 맛이 나는 팬케이크 숯덩이는 탄 설탕의 맛 때문에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반죽은 살살 섞으면서 왜 계란은 박살냈어?”
클락이 부러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탄산칼슘 쯤 씹는다고 해는 없잖나.”
브루스가 시선을 모로 돌리며 내뱉었다.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클락은 자신이 먹은 음식이 어떠했는지 신경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신이 나서 다시 브루스에게 말을 붙였다.
“설탕은 왜 넣었어?”
“시럽이 없잖아.”
브루스는 어차피 같은 당류이고, 결국 함께 입에 넣을 물질이니 반죽에 설탕을 넣든 완성된 팬케이크에 시럽을 뿌리든 그게 그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클락은 브루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웃음을 감추기 위해서) 다시 마트로 가서 메이플 시럽을 사왔다.
브루스는 마치 클락의 말에 심통을 부리듯 오만인상을 쓴 채 클락이 보라는 듯 품에 보울을 안고 머랭이라도 치듯 전투적으로 반죽을 휘저어댔다. 그러다 갖갖이 물리의 힘 아래서 뒤섞이던 반죽물 중 일부가 앞치마 위에 드러난 브루스의 쇄골로 튀어 느리게 흘러내렸다. 브루스는 그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반죽을 뒤섞는데 여념이 없었다. 클락은 한참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제 팬케이크의 반죽이 이 이상 잘 섞일 수 없다할 정도를 넘어 거품마저 생기기 시작할 때 쯤 일어나 브루스의 손을 붙잡아 보울을 내려놓게 했다. 눈가를 찡그리는 걸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브루스의 눈을 보다 클락은 브루스의 쇄골과 그 아래를 입으로 훔쳤다. 클락이 가볍게 잡은 브루스의 팔이 움찔하고 떨렸지만 곧 잠잠해지며 클락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러다 클락의 손이 가슴께로 움직이려하자 단호하게 그를 저지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팬케이크는 분명 맛은 훨씬 나아졌지만 모양이 다소 엉망이었다. 브루스는 팬에 새겨진 슈퍼맨 마크 사이에 끼인 빵조각과 윗면의 마크가 뜯어져 나간 부정형의 팬케이크를 번갈아 노려보았다.-그 와중에 왜인지 클락의 가슴도 한 번 노려보았다- 그렇게 네 번째, 다섯 번째가 브루스 웨인의 까다로운 평가 아래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네 번째는 너무 얇았고, 다섯 번째는 그나마 제대로 되었지만 뒤집개를 이용해 뒤집을 때 한 구석이 찌그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나 브루스의 심미안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여섯 번째 팬케이크를 굽고 있는 브루스의 등은 고요했다. 클락의 마음은 여전히 평온했다. 훤히 드러난 맨 등은 브루스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견갑골의 움직임이 죄 노출되고 있었고 이따금 브루스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작게 근육을 풀 때면 그에 따라 척추를 따라 생기는 허리 골이 도드라졌다. 그리고 그 허리 골 한 가운데에 매어둔 앞치마 매듭이 따라 살랑살랑 움직였다. 저 등을 계속 보고만 있어도 행복할 거 같다. —아니, 아니. 역시 보기만 하는 것은 아깝다.
브루스는 마치 정교한 세공을 하는 듯 팔에 힘을 가득 준채로 뒤집개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읍 하고 깊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며 브루스가 팬케이크를 뒤집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다 한 1-2분 뒤. 브루스는 급하게 몸을 돌리며 클락의 앞으로 아직 달궈져 뜨거운 상태인 팬을 내밀어보였다. 팬 위에는 온전히 동그란 원을 그리며 슈퍼맨의 마크가 정확히 그 가운데에 위치한 고운 캐러멜 빛을 띄우는, 그야말로 아주 완벽한 팬케이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 건 괜찮군.”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브루스가 클락에게 팬케이크를 보여주는 태도로 보나 살짝 달아오른 뺨으로 보나 지금 그가 정말로 어떤 상태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클락도 구태여 말을 찾지는 않았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브루스가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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