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운님께서 [숲뱃 또는 딕뱃으로 왼쪽이 뱃 때문에 쩔쩔매며 우는 것]을 리퀘해주셨습니다.
저는 딕브루가 떠올라 쓰느라 썼는데... 그랬는데...☞☜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아보았다. 짤막한 진동이 딕의 다 자라지 못한 손을 타고 전해졌지만 그 작은 움직임은 시치미를 떼듯 금방 잠잠해지고 말았다. 꼭 고집스레 앙 다물린 남자의 입술과 같았다. 입술. 딕은 몽글몽글 열기가 오르는 눈으로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술은 무뚝뚝했고 어쩔 때는 매정해보이기까지 했지만 지금 바라보니 분홍빛으로 혈색이 올라와있어 보기에도 부드러워보였다. 그 입술이 이제 코앞에 있다.
자신을 말릴 거라 생각했던 남자의 손은 얌전히 딕의 손안에 잡힌 채였다. 그와의 신장 차이를 생각했을 때 딕이 까치발을 들어도 조금 모자랄 위치에 있을 그의 입술은 그가 딕 앞에 조용히 앉아있는 덕분에 쉽게 마주할 수 있었다. 딕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남자는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딕의 얼굴에 파란 시선을 부유하다 결국 눈꺼풀 뒤로 자신의 동요를 감추어버렸다. 딕의 손안에서 남자의 손이 긴장한 듯 뻣뻣해졌지만 그의 하얀 뺨에 피어오른 홍조에 딕은 그가 자신에게 허락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숨이, 뜨겁다. 이제 곧 그의 입술에 닿을 수 있다. 딕은 자신의 심장이 꼭 머릿속에 든 것만 같았다. 그의 조용한 숨과 딕의 성마른 숨이 뒤섞이는 것을 가늠하며 딕도 그만 눈을 꾹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리고 딕은 꿈에서 깨어났다. 아직 아침이 찾아오지 않은 밤의 끝자락이 시커멓게 시야로 밀려들어왔다. 심장이 늑골 안쪽에서 동당동당 다급하게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서 시작된 열기로 온몸이 뜨거운 중에 머릿속만이 밤공기에 물들듯 점차 차가워졌다. 딕은 문득 자기 숨소리가 시끄러워 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 덕분에 딕의 귓가에는 가벼운 귀울음이 스쳤다.
그때, 딕은 양 무릎과 그 아래에 이어진 다리가 둔탁하게 아려오는 것을 알았다. 제 열기 오른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던 차, 난데없이 소란을 피우는 신체에 딕은 남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한편 다행이었고, 또 한편 아쉬웠다.
딕이 웨인저택을 온 뒤로 몇 번인가 계절이 바뀌었다. 애초에 딕이 이 저택에 오게 된 것부터가 그랬지만 그 뒤로도 딕에게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 가지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들 수 있는 예가 있다면 딕이 어느 미래에도 들어보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리처드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익숙하게 듣게 된 점이 있겠다. 처음에는 후견인의 허리께에 있던 딕의 키는 한창 자라나는 나이답게 이제 그 가슴까지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딕은 아주 명백하게도 아직까지 계속 성장해나가는 중이었다. 그 증거로 딕은 지금 답지 않게 인상을 푹 쓴 채 뜬 눈으로 제 방의 천정을 노려보며 누워있었다. 오늘로 3일째, 다시 성장통이 찾아온 탓이었다.
딕은 슬쩍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에 떠오른 달은 아직 밝았다. 딕은 더 이상 잠을 자려 시도하기보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침대 옆 협탁에는 알프레드가 자기 전 찜질을 하라며 준비해준 수건이 있었지만 이제는 차게 식어있어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도움을 청한다면 사려 깊은 그는 지금이 어떤 시간이고 간에 찾아와 적절한 조치를 마련해 줄 테지만 딕은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설렁설렁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딕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본래라면 박쥐의 옆에서 고담 시 곳곳을 누비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고 그제나 어제보다도 이른 시간에 성장통으로 앓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평소처럼 배트맨의 옆에서 패트롤을 돌고 있는 편이 백배 천배 나았다. 딕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련의 소란을 떠올렸다.
처음 성장통이 찾아왔을 때는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지만 그 다음날마저도 뜬금없이 다리가 저려와 밤잠을 설치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할 사건이 없었던 딕의 얼굴에는 금세 피곤이 드러나고 말았다. 정신을 빼놓고 허공에 포크질을 하던 딕을 유심히 바라보던 브루스는 집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배트맨이었고, 그런 그는 로빈의 상태를 좌시하지 않고 아침식사가 차려진 자리에서 딕의 수면부족의 원인에 대해 추궁했다. 별 일 없다며 처음에 딕은 버팅겼지만 얼마가지 않아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 뒤 브루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찌나 유난을 떨던지.
병원에서 검사를 마친 딕은 심드렁하게 고급 세단의 창밖으로 흘러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딕의 주머니에는 지극히 건강하다는 의사의 소견이 적힌 종이가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져 있었다. 보통 같으면 딕이 브루스에게 실없는 소리들을 던지고 그에 한 두 번 쯤 브루스가 싱거운 대꾸를 해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딕은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나있었고 브루스는 그런 딕에게 몇 마디 조언인지 잔소리인지를 늘어놓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브루스를 적절히 조율해줄 알프레드마저도 브루스와 의견이 같았는지 운전석에서 매끈한 주행을 선보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딕은 더더욱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한동안 로빈 활동은 금지다.”
“엑?!”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는 결코 놓치지 않도록 그간 훈련을 받아온 딕이었다. 딕은 단호하게 던진 브루스의 말에 펄쩍 뛰며 서둘러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브루스는 서늘한 얼굴로 아침에 읽다만 신문을 손에 쥐고 차분히 읽고 있었다. 딕은 그의 깔끔한 옆얼굴이 무엇을 뜻하는지 뻔하게 알았다. 그에게 있어 지금 거론된 문제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딕은 하지만, 그렇지만으로 시작하는 반박의 말들을 입에 담았지만 해결책을 공지한 브루스는 견고했고 알프레드도 백미러로 힐끔 둘의 (일방적인) 논쟁을 지켜보다 딕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 없었던 양 시선을 돌려버림으로써 딕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딕은 오늘 밤, 배트모빌에서 배트맨의 옆자리에 앉는 대신 자기 침대에 일찍이 붙박인 신세가 되었다.
도대체가. 딕은 다시금 차오르는 분통에 흥하니 콧김을 뿜었다. 도대체가 배트맨은, 브루스 그 자신은 상처든 고통이든 밥 먹듯, 아니 숨 쉬듯 접붙이고 다니면서 고작 딕의 성장통에는 어떻게 외출금지씩이나 내릴 수 있는지 딕은 도통 납득할 수 없었다. 딕은 그 유난과 불합리함에 심통이 났다. 물론 머리 한구석에서 지금의 자신이 떼를 쓰고 있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딕은 그것을 모른척했다. 무엇보다 한창 자라는 나이인 게 딕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딕은 자신이 자라난다는 이유로 로빈으로서의 일을 공란으로 만들어야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딕은 드물게도 한숨을 내쉬었다. 여느 또래들처럼 딕도 성장통이 반갑기는 했다. 이든저든 딕이 아직은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딕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자라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자신이 한참 자라야하는 미숙한 소년이라는 점을 새삼 상기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브루스의 눈앞에서.
딕은 그간 많이 자랐다.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원흉에 대해 새파란 분노를 품었던 아이는 이제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해 나가야할지를 알았고 브루스가 인정했듯 딕은 배트맨의 옆을 지키기에 충분히 소질이 있었다. 딕은 저린 다리를 대충 마사지하던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전의 꿈에서도 보았듯 그와 비교했을 때 아직 어리기 짝이 없는 손이었다. 배트맨의 옆자리가 본래 나있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 자리를 배트맨은 직접 딕에게 내어주었다. 딕은 단순한 브루스 웨인의 피후견인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서 그와 함께 싸워나갈 파트너였다. 그랬을 텐데도.
끄응, 하고 딕이 신음하며 굽힌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딕은 초조했다. 브루스가 딕을 대하는 데에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리 큰 변화는 없었다. 브루스는 부모라 칭하기에는 놀랍도록 서툴러서 그가 사랑을 주기보다도 그 자신이야말로 우선 사랑을 받아야할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브루스는 딕의 후견인으로서, 보호자로서 자리했다. 딕이 어떻게 자라건 간에 말이다.
...그만하자. 더 이상 생각 했다간 오늘 역시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지도 모른다. 아직 다리는 아프지만 어떻게든 억지로 잠을 자서 조금이라도 나아야 지금 이 외출금지도 하루빨리 끝을 낼 수 있을 테다. 딕은 도로 잠자리에 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딕?”
조용히 열린 방문에 누우려 했던 자세 그대로 딕은 굳고 말았다. 그 와중에 딕은 무거운 부츠를 신고도 용케 인기척 하나 없이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배트맨의 솜씨에 반사적으로 감탄했다.
“일찍 왔네요? 오늘도 별 일 없었나 봐요?”
다시 몸을 일으키며 딕이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다 자신의 목소리가 잠기운 하나 없이 지나치게 깔끔하다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마 같은 것을 생각했는지 브루스의 눈썹도 걱정스레 살짝 찌푸려졌다. 비록 복장은 배트맨의 것이었지만 카울을 벗은 상태라 이미 어둠에 눈이 익은 딕은 브루스의 표정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안자고 있었니? 다리가 오늘도 아프니?”
브루스가 성큼성큼 딕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파란 눈이 또렷해서 딕은 다시 울컥하고 속이 들끓었다. 그가 내 말에 답을 해주지 않아서 그래. 딕은 심호흡을 하듯 생각했다. 자기 일보다 그저 잠 좀 설치는 내 상태를 먼저 묻는 그가 미워서 그래. 딕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에이, 브루스도 검사결과 봤잖아요. 아픈 게 아니라 좀이 쑤셔서 잠이 안와요. 그러니까 브루스, 나는—”
“무리하는 건 좋지 않아. 특히 넌 지금 한창 자랄 나이다.”
상냥함을 이렇게 고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브루스의 재주였다. 딕은 그런 브루스가 좋았지만 지금의 딕에게는 독과도 같았다. 하염없이 보호자의 눈을 한 그의 잘생긴 눈매가 이토록 아팠다. 딕은 그만 시선을 뿌리치듯 고개를 돌리며 말을 내뱉었다.
“새삼스럽네요.”
그리고 딕은 스스로의 퉁명스런 말투에 놀라 입을 꾹 하니 다물어버렸다. 아, 제발. 딕 그레이슨. 딕은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래서야 정말 삐진 어린 아이 같지 않은가.
“...브루스. 내 말은—”
딕은 브루스가 혹시 먼저 몸을 돌릴까 허둥지둥 침대 위를 내려오려 했다. 하지만 딕의 발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양 무릎과 그 아래 정강이가 제 힘에 놀라 욱씬 하니 아려왔다. 그 짧지만 뚜렷한 통증에 딕은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는 꼴이 되어버렸다. 딕의 움직임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웠는지 딕을 향해 뻗어진 브루스의 손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왜 하필, 왜 하필 브루스 앞에서. 딕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파자마 차림의 두 다리가 전에 없이 미숙하고 초라해보였다. 플라잉 그레이슨즈 시절, 엄마의 작은 로빈이었을 때보다도 더 못미더워보였다. 어째서, 분명히 몸은 더 자랐을 텐데. 딕은 여린 입술을 짓씹었다.
딕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브루스는 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한동안 미동이 없는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딕은 보고 싶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즈음 브루스의 움직임을 딕은 예민하게 감지했다. 딕은 그가 알프레드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딕의 숙인 시야 안에 브루스의 맨손이 들어오자 딕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고담의 빌런들과 악인들을 단호하게 벌하던 그의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딕의 무릎을 감쌌다. 협탁에 그가 벗어둔 장갑이 보였다. 파자마 너머로 그 손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의 손은 자라나는 딕의 근육을 따라 부드럽게 몸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거쳐 간 곳은 통증이 거두어진 듯 아픔을 잊었다. 그 섬세하고 상냥한 손길이 미워 딕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리고 눈물이 나게 사랑스러웠다.
“딕?”
브루스와 눈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 딕은 잡고 있던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다른 쪽 다리를 마사지해주려 하는 브루스의 목덜미에 힘껏 매달렸다. 지금은 그의 눈을 보는 것보다 그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고 기분 좋게 흘러 들어왔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딕이었다. 딕의 마음이었다.
차라리 자라난 것이, 자라고 있는 것이 몸뿐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딕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그는 결코 모를 자신의 꿈 한 자락을 떠올렸다. 그 꿈에 가슴이 설렜던 자신을. 왜 그저 소년의 동경에 불과했을 그의 몸에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하고 그 탄탄하지만 애처로운 몸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딕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 저택에 발을 디딘지 그저 계절이 몇 번 바뀌었을 뿐인데.
“괜찮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아이의 마음속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남자가 다정하게 말했다. 어설프게 토닥이는 브루스의 손의 리듬에 맞추어 딕의 눈에서 눈물이 토독토독 하고 배트맨의 검은 망토위로 떨어졌다.
“넌 자라고 있는 것뿐이다. 다 괜찮아.”
딕은 하하하고 능숙하게 웃음소리를 만들었다.
“어쩌면 당신보다 더 클지도 몰라요.”
딕의 말에 브루스가 작게 웃어주었다. 딕 그레이슨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어느새 성장통은 잊혔고 딕은 말없이 브루스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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