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선의 숲이 이후 우주/차원 곳곳을 방랑한다.
방랑하던 레드선숲은 뱃을 만나 차를 마신다.
레드선숲이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에서 생사를 오가며 골목에 버려진 브루스를 줍는다.
나이든 칼과 어린 브루스가 같이 방랑을 한다.
...이것은 무엇?
낮에 배트맨이 활동하는 일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웨인 매너 사유지 안에 정체모를 비행체가 불쑥 안착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몇 번 목적을 묻는 통신을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 모양인지 백색소음만 들릴 뿐 답은 없었다. 배트맨은 그 의문의 비행체 안에 있는 탑승자와 그의 목적을 알아야했다. 브루스는 평소의 고담 시로 향하는 쪽이 아닌 정반대방향으로 배트모빌을 몰았다. 저택을 둘러싸듯 심어진 사이프러스를 지나 다듬어지지 않은 풀길을 얼마간 달리자 숲 사이 자리한 고즈넉한 공터에 세워진 비행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브루스는 배트모빌에서 내린 후 조심조심 비행체로 다가가 보았다. 겉보기에 비행체는 눈에 익지 않은 형태였다. 착륙한 비행체에 눌려 짓이겨진 풀의 쓴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비행체에 다가가는 중 브루스는 차분히 땅을 살펴보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에는 별 다른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탑승자는 지금 비행체 안에 있는 것일까? 브루스는 비행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비교적 간소한 형태였지만 재질은 든든하게 만들어져있었다. 방사능 측정기를 대본 결과 지구의 상공을 나는 비행체보다 훨씬 높은 수치의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그렇다면 이 비행체는 우주를 항해하고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부를 확인하기 전에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비행체는 지구의 것과는 다른 기술로 만들어진 듯했다. 어찌 보면 살짝 구식인 것도 같았고, 또 어찌 보면 신기술인 것도 같았다.
한참 주위를 샅샅이 살피던 브루스는 예민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손님이 와 있었군.”
지긋한 연륜이 벤 목소리였다. 방금 전만해도 어떤 소리도 내지 않던 목소리의 주인은 느긋한 말 한마디를 뱉은 후에야 사박사박하고 발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척을 의도적으로 숨길 줄 아는 이였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 사실에 경계를 취하기 전에 눈앞에 나타난 인물의 얼굴에 우선 놀라고 말았다. 남자의 얼굴은 브루스의 눈에 익었다. 하지만 낯설었다.
“...슈퍼맨?”
브루스는 약간 주저하듯 남자를 불러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분명 슈퍼맨의 것이었다. 아니, 그가 입고 있는 허름한 코트나 촌스러운 안경, 중절모까지 차림새만으로 보자면 남자는 클락 켄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브루스가 익히 아는 얼굴보다 남자는 훨씬 나이가 들어있었다.
브루스의 부름에 남자의 주름 진 눈이 한 번 동그랗게 뜨였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를 들어 가볍게 인사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칼’이라 불러주겠나?”
자신을 칼이라 남자가 지칭한 덕에 그를 표현할 고유명사는 분명히 알게 되었지만 그가 정말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브루스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비행체 주변에는 발자국이 없었는데 비행체의 주인으로 보이는 칼은 브루스의 등 뒤에서 다가왔다. 그렇다는 말은 남자가 그의 비행능력을 써서 어딘가에 다녀왔다는 뜻이었다. 눈매를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브루스를 눈치 챘는지 칼은 양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웃었다.
“배트맨, 아니 브루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브루스가 살짝 몸을 뒤로 물렸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게나. 자네가 괜찮다면 난 그저 이곳의 자네와 차나 한 잔 했으면 좋겠군. 이야기도 나눌 겸 말이야.”
‘이곳’의 자네. 브루스는 눈을 내리깔고 칼의 말을 반추했다. 시간이 아닌 장소로 구분지은 것으로 보아 눈앞의 남자는 다른 차원의 슈퍼맨인 모양이었다. 한편 타임패러독스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브루스는 살짝 안도했다. 하지만 풀어야할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일은 공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야기라, 당사자가 정보를 건네주겠다면야 브루스도 두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브루스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배트모빌로 향했다. 그리고 의외로 칼은 순순히 브루스가 운전하는 배트모빌의 옆 좌석에 앉았다.
브루스는 배트맨의 차림을 한 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브루스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건너편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알프레드가 차를 담아온 쟁반을 가져왔을 때 그것을 대신 받아들려던 남자의 모습은 이곳의 클락에게서도 익히 볼 수 있었지만 고급 다기를 익숙하게 들고 자연스럽게 차의 향을 음미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좋은 곳이군.”
한참 끽다를 즐기던 칼이 불쑥 말을 꺼냈다.
“조금 휑하지만... 그래도 곳곳에 추억과 사람 손길이 묻은 곳이야.”
브루스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칼은 그런 브루스의 싱거운 반응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지 말을 이었다.
“이곳의 자네는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군. 다행이야. 내가 아는 자네는... 그래, 옷에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났었거든.”
칼의 말투는 먼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 아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저쪽의 브루스 웨인은 꽤 까다로운 상황에 있는(혹은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쥐 가면을 쓴 자신과 마주치고서 빈말이라도 ‘잘 지낸다’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브루스는 잠잠히 자신의 찻잔에 담긴 차를 마셨다.
“물어보지 않나?”
브루스가 잔을 내려놓는 타이밍에 맞추어 칼이 물었다.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그저 단정한 정도가 아니라 절도 있었다. 브루스는 둥그런 안경 뒤에 있는 칼의 인자하게 주름이 잡힌 눈을 바라보았다.
“이 곳에 왜 왔지?”
“하하, 역시 그건가. 그러고 보니 그 말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질문이군.”
칼이 평온하게 이야기했다. 눈앞의 칼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해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브루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뒷목을 뻣뻣하게 하는 긴장감을 감지했다. 단순히 그가 다른 차원의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이질감 때문이었다. 예컨대 섬세하게 찻잔을 갈무리하는 손놀림이라거나, 지나치게 꼿꼿한 그의 자세라던가 가 그랬다. 브루스는 차분히 칼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칼은 그런 브루스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래.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말을 돌리는 것 같군. 별 이유는 없어. 정말 자네와 차나 마시고 이야기나 나눌까 해서 왔지.”
“하... 지금 고작 이런 소꿉놀이를 위해 차원을 넘어왔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
“소꿉놀이라니... 조금 섭섭하군.”
칼의 눈썹이 축 쳐지자 브루스는 카울 뒤에서 눈을 굴렸다.
“믿기진 않겠지만 사실이야. 뭐...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우연이 가미한 바도 있으니 관광차 왔다고 정정하지.”
차 마시러 왔다 다음에는 관광이었다. 브루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관광 차 차원을 넘으셨다?”
“역시 못 믿겠나?”
브루스는 입을 꾹 다물어 보임으로써 칼의 반문에 답했다. 칼은 폭하고 한숨을 쉬었다. 꼭 알파벳부터 차근차근 일러줘야 하는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어떤 교수법을 사용할지 고민하는 교사 같았다. 그에 브루스의 기분이 약간 상하고 말았다.
“능력이 필요한 곳에 적절히 쓰여야한다는 생각은 나 역시 동의했던 바니 자네 의심도 납득은 가네.”
칼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반듯하게 잔을 들어 차를 삼켰다.
“하지만 차라리 없던 것처럼 소멸하는 게 답일 수도 있지. 가장 영향력 없는 장소에서 낭비해버리는 편이 최고의 답일 수도 있어. 자연스럽게 말일세.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적확할지 어떨지 누가 알겠나.”
“무위에 대해 강의 하고 싶었나?”
“그렇게 들렸나?”
문제의 핵심을 피하듯 어중간하게 뭉뚱그려진 답이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칼의 눈은 끝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칼의 말은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 관광 차 차원을 넘어왔다가 골자인성 싶었다. 그리고 브루스는 당연하게도 그것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비록 그의 말 어딘가에 어떤 진실 한 면이 담겨있을지라도.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온 그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에둘러 말을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차원의 무언가, 물질적인 것이 필요한 걸까? 그렇다기에 왜 이 저택에서 브루스와 수다나 떨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한 후일까?
“...슈퍼맨.”
칼의 입에서 새로운 화제가 떠올랐다. 브루스는 손에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칼을 마주봤다.
“나를 슈퍼맨으로 불렀다는 건 당연히 이곳에도 그가 있다는 말이겠지?”
브루스는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어떤가? 그를 어떻다고 생각하나?”
브루스는 잠시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머릿속을 헤맸다. 몇 박자 쯤 놓친 뒤에 브루스가 답했다.
“...좋은 히어로지. 믿음직한 동료이고.”
브루스가 입에 담은 대답은 뻔하고도 유치했지만 그만큼 또렷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브루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간지러움에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그가 외계인인데도?”
깊은 바다와 같은 파란 눈동자가 브루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브루스가 익히 아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달랐다. 그 차이점이 브루스의 의식 한 끝을 끈질기게 잡고 늘어지는 이질감의 근원인성 싶었다.
“생물학적으로 어떻고 간에 그는 이 지구의 슈퍼맨이지. 우선은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무엇보다 그를 슈퍼맨으로서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그의 성품이었지만 브루스는 구태여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칼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소리 없는 호선 하나가 브루스가 보기에는 유일하게 진짜로 목격한 그의 웃음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곳의 그도 나보다 잘 지내는 모양이군. 그리고 나보다 훨씬 현명한 모양이야.”
칼은 깔끔한 동작으로 남은 차를 마셨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저택 바깥을 보았다. 그리고 칼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 가봐야겠군.”
브루스는 그를 바라보았다.
“차 잘 마셨네. 미안하지만 준비해준 집사 분께도 대신 감사의 말 전해주겠나?”
그리고 그는 왔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브루스의 눈앞에서 떠났다. 브루스는 한 모금 남은 차를 전부 들이키며 휴대하고 있는 모니터링 장치를 꺼냈다.
“찾던 꽃은 찾았니?”
“응.”
칼의 우주선 옆자리에 앉은 소년이 품에 고이고이 안고 있던 화분을 내밀어보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가지런히 매달린 진주 같은 꽃망울들이 살풋 흔들렸다. 어느새 지구의 대기권을 통과하고 안정궤도에 들어선 우주선을 계기판으로 확인한 칼은 안전벨트를 풀고 소년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었다.
“은방울꽃이구나.”
“응. 어머니께서 향기가 좋은 꽃이라 하셨어.”
“그러니?”
칼이 상냥히 되물었다. 아이의 작은 머리가 끄덕끄덕 고갯짓을 했다. 그 모습이 앞서 본 누군가와 참 닮아있었다. 결국 차원은 달라도 일단은 같은 사람이라는 뜻일까. 칼은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이 꽃은 맹독이 있다고도 하셨어. 그래서 이 꽃이 좋다고...”
“그리고 너도 그런 게로구나?”
브루스는 다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아이의 머리를 온화하게 쓰다듬었다. 그런 칼을 시린 겨울 하늘과 같은 눈동자를 한 브루스가 마주봤다.
“고마워, 칼. 한줄기라도 꼭 그 정원에 있는 꽃이 가지고 싶었어.”
“네 어머니께서 아끼신 꽃이기 때문이지?”
“응.”
하지만 브루스는 곧 어깨를 떨구며 힘없이 말을 이었다.
“...물론 이 꽃은 그 꽃이 아니야. 이 꽃을 돌본 것도 내 어머니가 아니고.”
“하지만 너는 결국 꽃을 가지고 왔구나.”
한참 시선을 부유하던 브루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꽃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니까.”
칼은 시무룩하게 쳐진 브루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브루스,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은 한 가지겠구나.”
머뭇머뭇 시선을 드는 브루스의 얼굴을 칼은 자상하게 웃으며 보았다. 오래전 핏덩이 속에서 건져낸 아이의 얼굴은 이제는 퍽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브루스는 어색하지만 밝은 웃음도 지어보일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웃음 하나에 칼이, 과거 슈퍼맨이 꿈꿨던 그리고 갈피를 놓쳤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이루어진 듯 만족감이 드는 것은 효율을 이유로 지도자의 자리에 있던 칼에게 있어서는 비합리적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이 작은 생명이 그로 인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고, 사소한 바람이나마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칼은 어쩔 수 없이 기뻤다.
“이제 그 꽃은 네 꽃이란다. 지금부터는 네가 그 꽃을 키워가는 거야.”
“응.”
브루스는 대답하며 화분을 소중하게 끌어안아 보였다.
“곧 태양계를 지나겠구나. 한동안 안전한 궤도를 비행할거 같은데 샤워라도 하고 오련?”
손과 옷 곳곳에 웨인 저택 정원의 흙이 묻은 브루스를 살피며 칼이 말했다. 브루스는 안고 있던 화분을 칼에게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칼.”
“응?”
“겉옷 한 번 잘 살펴봐. 나라면 어딘가에 위치추적기를 붙여놨을 거야.”
브루스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칼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 브루스와 같이 웃었다.
“그렇다면 그가 완전히 한시름 덜 수 있게 해주자꾸나. 어디 따로 가고 싶은 곳 있니?”
“맛있는 게 먹고 싶어.”
브루스가 답했다.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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