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선 이후의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의 어린 브루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만난다면의 이야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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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이상하다.
브루스는 커다란 화면에 떠오른 뜻 모를 궤도를 살피는 남자의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토라진 작은 아이가 저의 어깨너머로 열없이 보낸 눈길이었지만 그것을 기어코 알았는지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니 하는 물음을 대신해 남자는 상냥하게 눈썹을 구부려보였지만 브루스는 고개를 팩하니 돌려버렸다. 얼핏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다. 브루스는 왜인지 심사가 더 꼬여서 누운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한낮일 테지만 밤 동안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해 아이의 몸은 행인지 불행인지 피곤했다.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병정 하나 없는 이 ‘우주선’에서 브루스는 못해도 잠은 청할 수 있었다. 브루스는 뻑뻑한 눈을 감았다.
비록 정신이 들었던 적에는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남자에게서 전해들은 대로 브루스의 회복은 빨랐다. 할 일 없는 병실 안에서도 마치 누군가가 시키기라도 한 듯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던 남자는 팔짱을 끼고서 날선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를 둥그런 안경 너머에서 바라보며 웃어주고는 했다. 그러다가 이따금 브루스는 남자가 자신을 훑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불만을 말하자면 저 호선이 박힌 눈매가 부담스러워서 그저 몸을 모로 돌리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브루스가 제 작은 머리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할 즈음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밤이 찾아오고 병실도 전등을 내렸을 때 가물가물 잠이 들려는 브루스의 어깨를 남자가 조심히 흔들었다. 막 선잠이 들참이었던 브루스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얼굴을 찡그려 드러내보였다. 남자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 위에 붙이면서 쉿 하고 촌스러운 제스처를 해보였다. 가타부타 따지고 싶은 말도 잠시 삼키고 브루스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런 브루스의 어깨에 남자는 웬 부드러운 천을 둘러주었다. 몸을 조심히 감싸는 감촉에 비해서 생각보다 제법 무게가 있는 천이었다. 남자는 신중한 손길로 브루스의 팔에 박힌 링거 바늘을 제거했다. 전에 브루스가 급한 마음에 뜯어낸 탓에 이제야 상처에 딱지가 굳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전문적이라고도 해줄법한 처치였다. 브루스는 침대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를 신었다. 온전히 양 다리에 힘을 싣기 시작하자 핑하고 짧은 현기증이 찾아와 브루스는 두어 번 고개를 도리질했다. 브루스의 시야가 다시 또렷해졌을 때 남자는 브루스를 이끌고 병실을 나섰다. 다급하지는 않지만 목적은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비상계단이 나오는 철문을 열고 초록색 비상등만이 불을 밝힌 어두운 층계로 들어서자 남자는 브루스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병원의 아래층을 향해 가리라 짐작했던 브루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위로 올라갔다. 남자의 품에 안긴 몸에 어떤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아 남자는 공중을 떠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괜히 연약한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심통이 났지만 남자가 제 걸음을 대신하고 있는 점이나 몸을 덮고 있는 천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쯤은 관대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불평까지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뭐야.”
소곤소곤, 브루스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제 불만을 또렷이 드러내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입원해있을 건 아니잖니.”
“퇴원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처음 알았는데?”
비죽 입 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리는 브루스의 말에도 남자는 별 동요가 없었다.
“곤란한 일을 겪고 싶지는 않잖니?”
“내가 왜 곤란해지는데.”
아이는 부러 당당하게 말했지만 남자는 잠잠히 아이의 눈동자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브루스는 남자의 말에 이미 요동하는 심장소리를 제 귀로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남자의 의중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꺼림칙했다. 단순히 마음이 좋아 아이를 구한 사람이 보일 행보치고는 브루스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 생각해보아도 과했다. 브루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남자에 대한 의구심을 높이는 중 두 사람은 어느새 옥상에 다다랐다. 싸늘한 밤바람이 브루스의 뺨을 쓸고 지났다. 그러기를 잠시. 남자는 브루스를 예의 그 천으로 꽁꽁 싸맸다.
“도대체,”
브루스가 제 온몸을 덮은 천을 헤집으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천 너머로 남자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아이를 토닥이며 달래고 있었다.
“위험하니까 너무 버둥거리지 마렴.”
남자의 말투는 여상하게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내용은 충고가 아닌 통보였다. 아무래도 남자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고 모든 말이 상냥한 것이 되는 게 아님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굴하지 않고 기어이 입을 열었지만 이제껏 느낀 것보다도 한참은 심한 부유감에 곧 입술을 다물고 주위를 살폈다. 천 너머로 가려진 시야로도 브루스는 제 몸이 중력을 거슬러 높이 높이 치솟는 것을 알았다. 눈을 껌뻑이며 제가 처한 상황을 가늠하고자 했지만 울렁이는 내장기관의 움직임이 불현듯 생생해서 브루스는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벼운 멀미가 나서 브루스가 몸을 뻣뻣하게 굳히자 아이를 안은 남자의 팔이 더 견고해졌다. 그 단단함에 반사적으로 안도가 들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 너머로 물결과도 같은 공기의 흐름이 전해졌다. 그리고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올록볼록 스쳐가던 바람이 뚝 멈추었고 브루스는 새삼 제 몸을 잡아당기는 중력이 가까움을 알았다. 남자는 조심히 브루스에게서 천을 거둬내며 아이를 지면에 내려놓았다. 브루스의 예민한 후각에 처음 맡는 냄새가 한가득 들어왔다. 금속 같이 매끈하고, 지나치게 청량해서 비현실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브루스가 도착한 곳은 처음 보는 상아빛의 실내였다. 조종대가 있는 것을 보아 기내인 것도 같았고 커다란 스크린이나 조작 패널들을 보자면 꼭 모니터링실인 것도 같았다. 그 와중에 몇몇 부스들이 보였고 침대도 있었다. 도통 알 수 없는 구성의 방이었다. 이곳저곳을 관찰하던 브루스가 몸을 돌려 남자를 보았다. 아이의 시선에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별스럽지 않게 말했다.
“내 우주선이란다.”
“우주선.”
아이는 남자의 말을 따라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지나치게 똑바로 물었다.
“아저씬 외계인이야?”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남자는 결국 적당한 말을 건져내지 못했는지 어딘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타휴먼에 대한 존재가 별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브루스는 오래전 아빠를 따라 토미와 메트로폴리스에 왔을 적 보았던 파워링의 존재를 떠올렸다. 사방에 푸른빛이 퍼지며 비명을 지르던 남자는 도시 중심에서 건물을 몇 개 파괴하다가 결국에는 그 빛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토미가 뭐라고 했더라? “다루지 못할 힘 따위 질색이야.”
비행은 끝났을 텐데도 뒤늦게 멀미가 치솟았다. 브루스는 숨을 한 번 크게 쉰 뒤 고갯짓을 멈춘 남자의 주위를 과장되게 빙 돌았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미지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 나았다. 심지어 브루스는 그의 낡은 코드자락을 들추기 까지 했다.
“꼬리는 없단다.”
“...뭐야, 시시하네.”
뚱하니 말하며 브루스가 남자의 옷자락을 놓자 파하고 숨이 터지듯 남자는 짧게 웃었다. 그러다 브루스는 남자가 공중에 뜰 수 있던 것을,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을 안고 날았던 존재임을 상기했다. 아, 그렇게까지 시시한 건 아니네. 브루스가 속으로 심드렁하게 조잘댔다.
“그래서 외계인이 무슨 이유로 날 데려온 거야?”
브루스는 최대한 지금 상황에만 몰두하려 애쓰며 물었다. 묵묵히 듣던 남자가 조금 후에야 입을 열었다.
“브루스.”
낯선 이의 발음으로 제 평생을 달고 산 이름이 들리자 브루스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인하듯 아이와 어울리지 않게 잔뜩 인상을 쓰고서 저보다 한참 나이 많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브루스가 기억하기로도 남자는 제 곁에 있으면서 줄곧 저를 돕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정보의 부재가 그 의도를 재단하게 만들었다. 소리 없이 한숨을 뱉은 남자는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게 그렇게 이상하니?”
“정말 외계인인가 봐? 고담 사람에게 그런 얘길 하는 멍청이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 주제에, 제 이름을 알고 있다. 브루스는 어금니를 꾹 물었다. 아이의 작은 턱에 가해지는 긴장을 지켜본 남자는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달래듯 말했다.
“우선 한숨자지 그러니. 저쪽 침대를 쓰면 된단다.”
브루스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남자가 기어이 휴 하고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고 말았다.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다면 가고 싶은 곳을 얘기하렴. 얼마든지 데려다 줄 테니.”
가고 싶은 곳이야 정해져있다. 다만 갈 엄두가 나지 않을 뿐. 그것을 남자도 뻔히 알고 있으리란 사실이 분했다. 브루스는 흥하니 코웃음 치며 남자가 보란 듯 성큼성큼 당당한 걸음걸이로 그가 가리킨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둔통이 남아있었지만 브루스는 아랑곳 없이 퐁 소리가 나게 드러누웠다. 우주선 내 벽면에 자리한 침대는 남자의 몸에 맞춰 제법 커다랬지만 브루스는 일부러 그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그래봐야 브루스의 몸은 작아서 둘레에 많은 여백이 있었지만 브루스는 팔 다리를 쭉 뻗어보았다. 그리고 실내에 잔잔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야?”
그러다 문득 브루스는 외계인이란 말에 조금씩 눈매가 찌푸려지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물었다. 뾰족뾰족 하니 가슴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뜻 모를 감각이 도저히 걸리고 걸려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답이 없던 남자가 되물었다.
“내, 이름말이니?”
“그럼 누구.”
단순한 질문에 남자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설마 외계인들은 자기 이름을 떠올리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로 긴 이름을 가진 걸까? 아니면 혹시 발음이 정말 정말 어려운 걸까? 암기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브루스는 외계의 것이라는 이유로 서투른 면모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남자는 외계인이면서도 영어를 매우 능숙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씩 발음이 미끄러지기는 하지만. 브루스는 괜히 긴장을 하며 남자의 답을 기다렸다.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하지만 그 기다림이 허망하게 남자는 맥 빠진 대답을 한다. 브루스는 그만 새끼고양이가 아르릉 성질을 부리듯 언어가 되지 않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이다.
“칼. 당신 이름은 이제 칼이야.”
브루스는 불만을 담아 오래전부터 커다란 개를 키우면 붙이고 싶던 이름을 불쑥 꺼냈다. 그래도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꺼낸 말치고는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그럴싸해서 브루스는 나쁘지 않다 평했다.
“그렇게 하렴.”
아마 남자, 칼도 싫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보아도 칼은 이상하다. 외계인 어쩌고 전에 어딘가 답답한 면모라던가, 뭐든 알고 있는 듯하다가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을 때라던가... 브루스는 자신이 신고 있는 고급스런 가죽구두와 영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와 후드티를 내려다보았다. 헛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이 옷은 저 칼이 손수 사온 물건이었다.
처음 칼의 손에서 옷가지들을 건네받았을 적에 브루스는 정말, 아주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런 싸구려는 처음 받아봐.”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한 상표와 평소 브루스가 봐온 물건들보다 0이 하나, 둘쯤은 덜 붙은 가격이 적힌 태그를 보며 브루스는 중얼거렸다. 꽤 진지하게 물건들을 살펴보느라 브루스는 멋쩍어 헛기침을 하는 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청바지에서는 빠지지 않은 염료 냄새가 났고 옷들은 바느질 마감이 반듯하지 않았다. 몸에 두른 천은 뻣뻣하고 거칠어서 생소했다. 브루스는 빙그르르 돌며 제 눈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 애썼다. 그리고 브루스는 실은 꽤나 지금 입은 옷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이런 옷이면 브루스가 사소한 말썽을 부리다 옷을 찢어먹거나 더럽혀도 크게 혼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나, 알프레드나, 토미... 브루스는 서둘러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돈은?”
확실히 태그가 매달려있던 물건이니 새 옷임은 틀림없었다. 설마 훔친걸 까? 그러고 보니 병원비는 어떻게 된 거지? 생각을 돌리기 위해 꺼낸 질문이지만 꽤 흥미로운 주제였고 브루스는 주저 없이 그에 매달렸다. 칼이 곤란한 기색을 보이자 더더욱. 혹시 그가 보기에는 샌님 같아도 실상은 꼭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브루스에게는 무엇이든 진실과 가까운 정보가 필요했다.
“이걸 보련?”
한참 말을 못 찾던 칼은 불쑥 브루스의 눈앞에 새까만 돌덩이를 내보였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 석탄이었다. 칼은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선보이듯 브루스의 눈앞에서 꾸욱 주먹을 쥐었다. 까드득, 하고 주먹 안에서 석탄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브루스는 그의 힘이 아주 세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후. 칼은 조심히 주먹을 풀어 브루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까만 재를 날리던 석탄은 온데간데없이 투명한 보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세상에.
“지금, 이걸 할 수 있는 데 이걸 샀다고?!”
브루스가 제가 입은 후드 티의 앞자락을 쭉 내밀며 허망하게 외쳤다. 이왕 외계인이 눈앞에 있는 마당에 그가 주먹을 쥐어 석탄을 다이아로 만들든, 물에서 포도주를 만들든 개의치 않았다. 다만 금전을 통해 재화를 얻는다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한 이가 저 보석에서 이런 가격의 옷을, 아니 브루스의 옷이야 남의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제 옷차림마저 저런 것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빈티지룩이라는 패션의 장르가 있다지만 그런 장르를 쫓을 인물로는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저 코트는 주머니도 해졌단 말이야!
“이건... 원래 있던 재물이 아니잖니.”
“뭐?”
팔자로 눈썹을 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칼의 모습에 브루스는 그만 아연하고 말았다. 그리고 브루스는 다시 제 생각을 정정했다. 칼은 샌님이 맞다. 그것도 어마무지하게. 브루스는 다시 주먹을 쥐어 제 손에 들어있던 보석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칼을 흘깃 보며 이상하게 두통이 올라오는 머리를 제 작은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이 능력으로 너무 세상에 득을 봐선 안 된단다.”
그런 브루스를 타이르듯 칼이 얘기했다. 조금 변명처럼도 들렸다. 어찌됐든 브루스는 만사가 귀찮아져서 칼에게 손사래만 치고 말았다.
밤이면 시커먼 악몽이 찾아온다. 브루스는 흩어지는 핏방울의 궤적을 보며 진주알이 땅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총알이 브루스의 살을 찢고 스산하게 지나갔다. 타는 통증 뒤로는 얼음장 같은 냉기가 아이의 목을 졸랐다. Who, who, who. 가만히 눈을 뜬 채로 숨이 멎어가는 브루스의 머리 위에서 부엉이가 운다. 누구? 도대체 누가. 알프레드였던 범인은 이따금 얼굴이 변하며 브루스가 한 번쯤 보았던 이의 모습을 하기도 했고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의 모습을 하기도 했다. 어쩔 때는 그게 브루스 제 자신인 적도 있었고, 심지어 칼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브루스는 부엉이의 울음을 등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토미, 토마스의 눈동자를 보았다. 숨이 그 유리알 같은 눈 아래 멎고 있었다. 브루스는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토마스는 등을 돌린 후였다. 어둠 속에 그렇게 홀로 남았다.
브루스는 성급하게 의식으로 끌어올려졌다. 식은땀으로 몸이 축축했다. 브루스는 의자에서 잠이 들었을 칼 쪽으로 급하게 시선을 주었다. 다행히 그는 별 요동이 없었다. 삐익 하고 이명이 지나가는 귓가에 서서히 다급하기 짝이 없는 제 숨소리가 들리자 브루스는 입술을 꾹 물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들켜서는 안됐다. 이렇게 겁에 질린 자신은 꼭꼭 숨기고 숨겨야만 했다. 브루스는 이불 속을 파고들며 몸을 작게 웅크렸다.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긴 고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란다.”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브루스는 급히 숨을 삼키다 그만 발을 또 헛딛고 말았다. 휘청이는 아이의 몸을 칼이 가뿐하게 잡아 바로 세웠다.
“그냥 궁금해서 열어본 거야.”
브루스는 어깨를 털어 칼의 손을 치워냈다. 가끔씩 칼이 밖을 나갈 때면 그의 등 뒤에서 유심히 그의 동작을 지켜보면서 브루스는 이 우주선의 문을 여는 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낮에 잠을 자둔 덕에 밝게 개인 머리로 어둠을 틈타 그것을 그대로 따라해 보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처음 듣는 새의 울음소리나 물에 젖은 풀의 냄새 따위가 들어왔지만 어느 외곽지의 숲 정도 일 거라 생각했던 브루스의 눈앞에는 깎아지른 절벽과 부서질 듯 무수한 별들이 펼쳐졌다. 아이는 금방 지금 있는 곳이 제 머릿속 지도에는 없는 곳임을 알았다.
“문 여는 법 쯤 물어보면 알려줬을 텐데.”
“어쩌다 알게 돼서 해봤어. 잠을 깼다면 미안해.”
브루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푸욱, 하고 칼이 다시 브루스의 머리 위에서 한숨을 쉬었다.
“난 널 도운 사람이란다. 그 걸로는 네가 날 믿기에 충분하지 않았니?”
토라진 아이를 어르듯 조근조근한 목소리였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충분하지 않냐고? 그래! 전혀 충분하지 않아!”
브루스는 이를 갈 듯 쏘아 말했다.
“당신 코트 안에 있는 신문을 봤어. 고담 가제트였지. 웨인 부부... 사망,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소년! 전부 보았어!”
그리고 그 무수한 활자들 어디에도 브루스 웨인은 없었다. 그리고 남자는 아마도 전부, 거의 전부를 알고 있었다. 브루스가 무엇을 무서워했고, 무엇을 감추고 싶었는지도. 전부. 그래서 브루스는 남자를 믿을 수 없었다.
그 알프레드가 부모님과 자신에게 총을 쐈고, 토미는 죽어가는 자신을 뒤로한 채 떠났다. 세상 위에 브루스 웨인을 묻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고 제 상황을 알고 있는 이를, 그러면서 어떤 설명을 요구하지도, 질문을 하지도 않는 이를 어떻게 믿으면 좋단 말인가.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아니 알겠지. 내가, 브루스 웨인이... 집, 에서...”
브루스는 닥닥 떨려오는 이를 다시 사려 물며 칼을 노려보았다. 저 의문투성이의 남자를 하릴없이 믿을 수밖에 없는 제 처지가 비참했다. 미지의 인물에게 저의 목숨을 구걸해야했고 그만큼 지금 당장 브루스의 생사가 그 손에 매달렸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래서 브루스는 알아야 했고, 의문을 가져야했다.
“그런데, 당신을 믿으라고?”
브루스는 밤마다 시달린 악몽을 그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았다. 쉬어버린 브루스의 목소리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한동안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침묵 사이에 웅성웅성 밤벌레 울음소리가 차올랐다. 그리고 브루스의 등 뒤에는 여전히 많고 많은 별들로 밝을 테다. 브루스는 숨을 골랐다. 그러다 갑자기 브루스의 앞에 서있던 그림자가 작아졌다. 칼이 쪼그려 앉으며 브루스와 눈높이를 맞춘 탓이었다.
“미안, 미안하다.”
칼이 손을 들어 브루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뭐냐고 묻기 전에 브루스는 그 별거 아닌 진동을 따라 제 눈에서부터 볼을 타고 내려가는 것의 정체를 가늠해야했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브루스는 고개를 모로 돌리며 주먹을 꼭 쥐었다.
“난, 네 목숨으로 믿음을 흥정하려 했던 게... 오, 맙소사.”
칼이 브루스의 양 팔을 잡았다. 그나마 표면에 걸쳐두듯 두었던 그의 손이 이제는 브루스의 옷자락의 끝만 간신히 쥐고 있었다. 미미하게 그의 손끝이 흔들린다 싶어 브루스는 그 손을 치워내고 싶어서 할 수 없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칼이 쓰고 있는 둥그런 안경알이 지저분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게 밝은 그의 눈동자에서 별빛이 하나, 하나 토해지고 있었다.
“뭐, 야. 왜 울어.”
“응?”
미동도 없이 저를 들여다보는 칼의 얼굴에 브루스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만큼 얼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브루스는 살면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심조심 주먹을 풀고 칼의 뺨을 짚어보면 축축한 것이 그는 분명 울고 있었다. 브루스가 놀라 눈을 껌뻑이면 눈에 고였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면서 조금은 눈앞이 환해졌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이다. 브루스는 한숨을 대신해 물었다.
“원래 외계인은 이렇게 이상해?”
마치 기도하듯 칼이 제 얼굴을 쥔 브루스의 손에 자신의 커다란 손을 곁들였다. 그리고 간신히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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