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선 이후의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의 어린 브루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만난다면의 이야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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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는 제멋대로다. 야아아 하고 웃음소리 같은 함성을 길게 날리며 아이는 설원 가운데로 뻗어나간다. 한걸음 우주선 바깥으로 발을 내딛으면 익숙한 시려움이 허파로 몰려들었다.
“너무 멀리는_...”
자신이 칭칭 감아준 망토 끝자락을 하얀 땅 위에 끌면서 작은 키로도 성큼성큼 달리는 브루스의 뒷모습을 보며 칼은 걱정스레 소리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주변의 소음을 집어삼키는 새하얀 눈밭 위에서 활발한 심장소리 하나가 순수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저렇게 신이 나서야 뭘 말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칼은 조금 이마를 찌푸려 철없는 아이를 보고 있었지만 결국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를 허물고 말았다.
이제 브루스와 다닌 지 한 보름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이 시간은 길다고 표현해야할까, 짧다고 표현해야할까. 꽤 오랫동안 날짜를 꼽아보는 일을 하지 않았었다. 칼은 어색하게 머릿속에서 달력을 셈했다. 문득 발아래를 보면 칼의 구둣발이 눈 속에 묻혀있었다. 이것은 또 얼마만일까. 칼이 한 발을 조심스럽게 들어보면 묻고 얹힌 눈들이 포스스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칼은 제 발이 새겨 넣은 발자국을 내려 보았다. 브루스가 남긴 자국보다 조금 더 깊은 정도의 그것은 아마 보통의 성인 남성들이 남기는 것과 큰 차이는 없을 터다. 칼은 이보다 더 깊이 이 행성에 발을 내딛을 수도 있고, 또는 흔적조차 없이 표면을 스쳐갈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저 적당한 정도가 칼의 걸음을 따라 눈 위에 자욱을 남긴다. 사박, 사박. 눈의 결정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반듯하게 땅 위에 발을 디뎠다. 처음부터 그랬듯 자연스럽고, 금방이라도 사라질듯 가벼웠다. 아이의 심장박동이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작은 금속이 꿰뚫고 지나간 자리에서 많은 피를 토해낸 아이는 숨도 겨우겨우 집어 삼키고 있었다. 남자는 머릿속에서 아주 오래된 지식 하나를 건져냈다. 어느 날에 인가 빠르게 훑어본 책장에서 찾은 몇몇 문장들이 시간에 바래지지 않고 선명했다. 남자는 아이의 상처에서 감염이 의심되는 부위는 태워버리면서 서둘러 더 피를 흘리기 시작하는 상처를 막아버렸다. 정신을 잃은 중에도 창백하게 질린 아이의 몸이 고통에 움찔 떨렸지만 그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지금 상황에서 남자가 당장 할 수 있는 응급처치란 이 정도였다. 남자는 아이를 조심히 안아 올리면서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 근방에 있는 응급실이 딸린 병원의 위치를 알아낸 남자는 금방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선생님, 제가 몇 번이나 말해야겠습니까. 지금 선생님만 급한 게 아니라고요.”
접수대의 직원이 삐딱한 자세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제 귀를 뜯던 접수원은 그 손으로 따닥따닥 데스크를 두드리며 남자의 뒤 차례의 사람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남자의 뒤에서 쿨럭, 쿨럭하고 술냄새가 묻어난 기침소리가 들렸다.
“이보시오. 이 아이는 총에 맞았어요.”
“예예, 선생님. 고담에 어서 오십쇼.”
“일이 바쁜 건 압니다. 하지만 응급_”
“아, 그니까 그 응급환자가 한 둘이 아니라고요. 곧 순서가 될 겁니다.”
직원이 이제는 손사래까지 곁들여 뒤에 얼굴이 벌게진 사내를 재촉했다. 남자가 한마디 말을 더 얹어보려는 순간 비틀비틀 걷는 사내가 남자를 밀치고 접수대에 기대며 긴 트림을 뱉었다. 그러면서 그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제 증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칼이 초조하게 응급실을 바라보면 접수원의 말대로 한가한 상태는 아니었다. 애당초 이 도시는 그 규모에 맞지 않게 응급실을 운영하는 병원의 수가 극히 적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박동이 한 박자 정도 느려진 것 같은 아이가 뒤 순위로 밀릴 정도의 ‘응급’ 환자는 없었다. 아까 전에는 소화불량으로 대학생 하나가 들어갔고, 또 이번에는 어디서 싸움질을 하다 왔는지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남자가 절뚝절뚝 진통제를 찾아 진찰실로 들어갔다. 다시금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던 남자는 문득 의무감 같은 다급함이 들었다. 이러다 아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게 되면?
남자는 직접 당직 의사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때 상황 파악을 위해 열어놓은 남자의 청각으로 소곤소곤한 말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봐, 아까 총 맞았다는 아이... 웨인 선생네 아들 아니야?”
“그러고 보니 전에 도박 빚이 어쩌고 하던데. 흐으, 왜 완전 무서운 덩치가 와서 말야. 쾅쾅하며 벽 두드리면서.”
웨인 선생? 이 병원은 무려 아이의 부모 중 누군가가 근무하는 곳인 모양이었다. 둘의 대화 사이로 잠시 웅얼웅얼 잠에 보채며 칭얼거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대화중이던 목소리 하나가 급하게 상냥해지며 “네네, 조명 바꾸겠습니다.”하고 속닥였다. 그리고 다시 더 음량을 낮춘 대화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그게 아닌 거 같던데? 스미스 선생이 그러더라, 블랙리스트가 내려왔다고.”
“뭐? 아직 애들 다 어리잖아. 소란이 나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그 ‘웨인’이잖아.”
그리고 우리는 고담에 살고 있고. 음음, 하며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고개를 주억여주고 있었다.
“접수 받는 사람 골치 아프겠네. 지금 누구야? 지니? 닐?”
“닐. 뭔 걱정이야. 몫은 받아뒀겠지.”
남자가 들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숨이 가늘어지는 아이를 다시 고쳐 안으며 남자는 새까만 밤하늘을 날았다. 지금 아이가 제 부모의 근무지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면 이 도시에는 오래 있어봐야 아이의 목숨만 갉아먹을 뿐이었다. 남자는 좀 더 멀리, 하지만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움직였다. 언뜻 지나간 시야 끝에 [반가워요, 메트로폴리스입니다!]라 써진 전광판이 있었다. 남자는 헛바람이 든 듯 짧게 웃었다. 설마 저 이름을 가진 도시에 이런 이유로 자신이 자발적으로 오게 될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아이는 이웃 도시의 종합병원에서 무사히 필요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은 문제없이 끝났지만 아이는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의사는 건강한 아이라 몸에는 이제 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가 확인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특이 혈액형이 아닌 덕분에 수혈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고 상처 부위도 제대로 치료했다. 다만 아이가 입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부상과 미심쩍은 응급처치에 의사는 보호자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 했고 남자는 그저 길을 가다 발견했노라 말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또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남자에 대해 의심을 가지던 병원 측은 곧 아이의 신원을 알게 되자 무언가 납득한 듯 조용해졌다. 주워들은 말 중에는 “고담 강에서 흘러든 애를 주운 거 아냐?” 하는 말도 있었다. 우선은 어떤 수사를 진행하는 낌새도, 사건을 파악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가 정신이 들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나라라면 못해도 약자를, 아이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 출신이 어디든 간에. 집요한 수사가 시작되면 아이는 괜찮을까? 아니, 본래대로면 그것이 옳은 순서가 아닌가.
남자는 벤치에 앉아 네 번째 신문을 펼치며 생각했다. 종이가 파스락 하고 소란을 부릴 때면 매캐한 신문 특유의 잉크 냄새가 번졌다. 남자는 그 와중에도 다시 귀를 기울여 저 강 너머 다른 도시에서 입원 중인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는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했는지 규칙적인 기계소리 사이에서 색색 숨만 쉬고 있었다. 어쨌든 아이는 살아있다.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찾아드는 안도에 잠깐 헛기침을 했다.
웨인 부부의 사망 소식은 몇몇 커다란 회사의 신문 경제면에 실려 있었다. 중요도는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분할을 차지했다. 기사에는 부부가 불의의 일로 죽었다는 소식과 그 유산을 작성되어 있는 유언장에 따라 그들의 장남이 고스란히 물려받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신문의 흑백사진 속에 들어있는 소년은 또래아이들과는 달리 온도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모의 죽음에 침중해보이지도 그렇다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고 그저 무표정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뒤에 깡마른 남자가 꼿꼿하게 허리를 바로 편 채 서있었다. 장례식에 참여했다는 두 사람의 사진은 신문이라는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매체에 실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꺼림칙할 정도로 지나치게 딱딱하고 차분했다. 그 밖에는 어린 CEO가 앞으로 어떻게 제계에 뛰어들지 기대가 된다며 비아냥 반 우려 반을 토로하는 칼럼이 있었고, 웨인엔터프라이즈의 주가변동 이야기나 소년 부자에 대한 시민들이 생각이 나열된 정도가 전부였다. 그 뿐이었다. 남자는 이 도시에 가장 팔리지 않는 마이너 잡지까지 읽어보았지만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음모론은 실렸을지언정-남자는 비록 찌라시의 기자지만 나름 그 감은 인정해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브루스 웨인, 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남자는 잠깐 혹시 이 지구가 아주 우연하게도 브루스 웨인이라는 존재가 없는 곳이었는가 하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병원 전산에는 분명 이 나라 국민으로 브루스 웨인이 존재했고 자신이 병원에 데려간 아이는 ‘토미’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이름은 분명 제 형의 애칭일터였다. 남자는 신문 글귀 중에 있던 토마스 웨인 주니어라는 단어를 기억했다.
남자는 마지막 장에 실린 가구 전문점 광고까지 마저 확인하며 등을 펴 고담의 잿빛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토미를 찾고 있었다. 웨인의 장남은 분명 살아있었고 그가 어디 다쳤다는 소식은 어디에서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웨인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이었다. 무거운 구름이 우울하게 바람을 따라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남자는 문득 펑 하고 커다란 폭발음을 듣는다. 위치는 저 도시의 안쪽. 극장이 있는 번화가. 그 샛길에 자리한 초라한 골목. 그 곳. 남자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집중하면 아수라장이 된 거리가 보였다.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들이 중상을 입었고 파편에 맞은 시민 몇몇의 울부짖음도 들렸다. 가스 폭발, 이라고 무전으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이면 바로 어젯밤 웨인부부가 죽고, 아이가 총에 맞았던 그 거리에서. 남자는 근접한 거리의 텍스트를 읽기에 적절하지 않은 초점을 다잡지 않은 채 손에 잡힌 신문, 으로 보이는 회색의 사물을 봤다. 활자를 새긴 잉크가 셀룰로오스가 엉겨 만든 질 낮은 펄프에 박혀 있었고 그 얼룩이 모여 단편의 사실들이 소식이라 이름 붙은 콘텐츠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결론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웨인 부부를 비롯해서 브루스 웨인은 결국 집안의 재산 싸움에 휘말린 거다.
남자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종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남자는 건조하게 웃었다. 겉으로 보면 꼭 남자가 신문에 코를 박고 울고 있는 듯도 보였다. 몇몇 행인들이 그 옆을 지나다 혹시나의 소동에 휘말릴까 저어하며 둥그렇게 남자를 피해갔다. ‘그’가 뭐라고 이야기했었지? 그는 무엇을 위해 박쥐가 되었더라? 하하, 짧게 끊어 웃으며 남자는 뒤끝이 볼품없이 남은 기억을 되새겼다. 그는 세계의 이런 가능성을 알았을까. 돈 때문에 자신이 핏덩이 같은 나이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그리고 그런 그를 이 외계인이 구한다는 사실은 알았을까. 자꾸 해묵은 변명이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목이 쓰렸다. 삶이란 참 재밌지 않은가. 아니, 바보 같지 않은가. 남자는 한참 울음처럼 웃었다.
남자는 아이에 대해서, 브루스에 대해서 관대하게 마음을 먹었다. 고담 내 병원에 브루스의 이름이 블랙리스트로 지정된 점이나 수사가 진행 중인 현장에서 난데없는 폭발 사건이 일어난 점, 브루스의 행방에 대해 물음표도, 느낌표도, 마침표도 없는 신문들을 돌이켜보았을 때 브루스가 당국의 수사에 휘말려보아야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는 아이의 몸이 거의 회복되었을 때 아이를 데리고 메트로폴리스를 떠났다. 물론 언제까지고 이방인 신분인 자신이 아이를 돌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떠날 때가 된다면 아이가 ‘자유’롭게 갈 것이다.
칼은 아이가 우는 것을 보았다. 아이가 등진 밤하늘의 별 조각들이 반짝반짝 들어와 어둔 밤이 더없이 환했다. 그런 것 없이도 칼의 눈은 밝았지만. 브루스는 심술이나 까탈은 가감 없이 칼에게 내보였지만 이따금 아이의 밤에 찾아든 공포나 갈피 잃은 혼란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제아무리 꽁꽁 숨겨봐야 결국 어린아이의 일이어서 아이에 비해 한참은 살아온 칼에게는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굳이 나이가 아니더라도 브루스의 불안을 해부하기에 칼은 지나치게 뛰어났을 테다. 하지만 그 감정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형태 있는 물방울이 되어서 또르르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 칼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칼의 눈앞에서 조용히 울고 있는 아이는 누군가의 카피도, 어떤 평행 우주적 도플갱어도, 0과 1이 만들어낸 가능성 따위도 아닌 온전한 ‘브루스 웨인’이었다. 칼은 쪼그려 앉았다. 아이를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울음에 벅찬 숨을 고르는 브루스의 얼굴을 겨우야 제대로 살펴보았다. 브루스가 우는 것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길바닥에서 의식을 잃던 아이가 죽음의 그림자에 두려워 눈물 한 방울을 흘린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이건 그것과 뭐가 다른 걸까. 칼이 떠듬떠듬 사과의 말을 뱉으며 브루스의 어깨를 토닥여보았다. 부드러워야할 아이의 어깨는 뻣뻣하게 경직되어 딱딱했다. 마치 어떤 무게가 아이의 어깨에 잔뜩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게를 알고 나니 칼은 함부로 아이를 달랠 수도 없었다.
주변에 남은 것 하나, 정말 그 하나도 없는 이런 무력한 아이가 홀몸으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을 칼은 알고 있었다. 알고서, 무엇을 기대했을까. 한참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제 욕심을 고해하듯 울면 문득 텅 비어있는 미지의 내일이 생각났다. 아직 하늘 저편에 잠들어있을 내일이.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어느새 자신을 따라 쪼그려 앉은 브루스를 보며 칼이 물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칼의 얼굴을 확인한 브루스는 눈물 얼룩이 남은 칼의 동그란 안경을 뺏어다 제 옷소매로 꼼꼼히 닦은 뒤 돌려줬다. 안경알의 수명에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시야는 훨씬 또렷해졌다.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칼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브루스는 어느 틈에 인가 잠이 들었다.
아침은 당연하게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고 공평하게 찾아온다. 칼과 브루스의 하루 또한 별 다를 것 없이 평온하게 흘렀다. 굳이 평하자면 지나치게 평온했다. 칼이 우는 것을 본 뒤로 브루스는 틈만 나면 그 일을 상기하고는 했다. 예컨대 브루스가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던 밤에 그것을 결국 더는 괄시하지 못하고 칼이 브루스의 옆에 찾아갔던 때가 그랬다. 꿈에 놀랐는지, 칼의 기척을 알아챈 건지 퍼뜩 잠을 깬 브루스의 눈동자는 홉 뜨여서 동공이 열려있었다. 식식 대듯 바쁘게 호흡을 고르던 브루스가 칼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시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괜찮_”
“뭐야, 칼. 혼자 못자?”
칼의 말을 서둘러 뺏으며 브루스가 새된 목소리로 주절댔다. 잠에서 막 깬 아이의 동작은 부산스러웠고 칼은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손을 뻗었다.
“칼 큰일이다. 다 큰 아저씬데 울보고, 혼자 잠도 못자고...”
그 단단한 손을 아직도 파르르 떨고 있는 작은 손이 필사적으로 잡았다. 횡설수설 잘난 척 하듯 말을 늘여놓던 브루스는 칼의 팔을 그러안고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눈을 감았다. 브루스는 칼이 저에게 보인 약점-적어도 브루스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인지 종종 이럴 때 써먹었다. 그리고 칼도 브루스가 거기서 어떤 안도를 얻는다면 굳이 그에 초를 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칼은 이따금 곤란했다. 브루스는 종종 제멋대로였다. 칼이 오래전에 봤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슈퍼맨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며, 조금은 경외하며, 얌전히 볼을 붉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자신에게 눈뭉치를 집어던지는 아이는 없었다.
이제껏 면식이 전무하던 아이와 어른이 세상에 비하자면 비좁기 그지없는 우주선 안에 덜렁 남아봐야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칼은 이왕 가지고 있는 자신의 비행체를 십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용하는 엔진만 전환하면 우주선은 행성 내의 대기에서 평범한 비행도 가능한 선체였다. 그리고 그 덕분에 브루스는 때 아닌 소풍을 다니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피를 하고 있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무엇으로부터, 언제까지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 칼에게 자잘한 것을 지적하는 브루스도(“그러니까... 칼은 밥을 안 먹어도 된다고? 하지만 씹는 활동은 두뇌에 좋다고 했어. 칼도 흰머리가 나는 걸 보면 늙기는 한단 말이지. 지금부터라도 치매 예방에 노력하면 어때?”) 정작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암묵적인 휴가와 같았다.
그러니까 그 휴가 중에 브루스가 불쑥 이른 계절에-적어도 그의 고향 도시를 기준으로는- 눈이 보고 싶다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한 행성 안에서도 위도에 따라 기후대가 달라지는 만큼 아이가 원하는 곳에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특히 칼은 꽤 낯익은 위치에 이 날짜에도 설원이 펼쳐져있을 곳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우주선 너머에서 보고만 있겠다고 했던 브루스가 열린 문을 통해 달려 나가 버린 데 있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 미리 브루스에게 자신의 망토를 칭칭 둘러주고 아이의 얼굴의 4분의 3은 가리는 모자를 푹 씌워서 얌전히만 있어준다면 바람은 막겠지만 저렇게 달려 나간 아이가 눈을 보고 손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칼은 자신의 가슴 아래에 닿기 전 이미 부스스 흩어져서 작은 눈보라마냥 코트 위를 스쳐 지나는 눈뭉치를 바라보았다. 맨손으로 눈을 쥔 아이의 손은 아니나 다르게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칼이 씌워준 모자가 눈을 던질 때의 반동으로 다시금 코 아래까지 내려가 브루스는 모자를 위로 끌었다. 그리고 그제야 칼의 코트에 눈가루가 묻는 둥 마는 둥 한 것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잘 뭉쳤는데.”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러니.”
아마 브루스는 더 가까운 곳에서 눈을 던지기 위해 칼 쪽으로 다가오는 것일 테지만 칼은 그것을 기회삼아 브루스에게 타일렀다. 역시나 브루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는 다시 눈을 뭉쳐 칼에게 집어던졌다. 이번에는 칼이 그것을 부러 피했다. 볼을 부풀린 브루스는 몇 번 더 눈뭉치를 던지다 종국에는 그저 눈보라를 퍼붓듯 칼에게 눈밭의 눈들을 뿌려댔다. 발짓까지 덧붙인 브루스의 움직임에 기껏 칼이 둘러준 망토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보다 아이의 손이 더할 수 없이 빨갛게 얼어붙고 있었다.
“이 녀석!”
칼은 제 주위를 빙빙 돌며 눈을 뿌리는 브루스를 답싹 잡아서 안아들었다. 그 때 칼은 브루스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을 보았다. 왜인지 아차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칼의 머리에는 하얀 눈이 가득 든 모자가 씌워졌다. 칼에게는 차갑지도 않은 온도였지만 그래도 머리카락이나 안경알은 착실히 엉망이 되었다. 칼이 표정을 굳히며 짐짓 엄하게 말했다.
“못된 아이.”
“눈싸움 해보고 싶었는걸!”
브루스가 깔깔 웃었다.
“싸움? 이건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거잖니.”
툴툴 대꾸하면서 칼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 브루스의 몸을 감쌌다. 한 손으로 브루스의 엉덩이를 받쳐 안아들고 다른 빈손으로 채 떨어지지 못한 눈이 아직도 가득 담긴 모자를 들고 브루스가 떨어뜨리고 온 붉은 망토를 주워들었다. 망토를 주울 때 칼의 몸이 기울어지자 브루스는 칼의 목을 지지대 삼아 매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정정당당한 눈싸움이었어.”
“난 너한테 눈을 던지지 않았는데?”
“그야 칼은 어른이니까! 어른은 약한 어린아이한테 싸움을 걸면 안 돼.”
브루스가 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어거지를 늘여놓았다. 칼은 여전히 볼을 부풀린 채로 브루스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하니 맞댄 뒤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문질렀다. 맞닿은 아이의 이마가 서늘했다.
“이제 됐지?”
칼이 확인하듯 물으면 브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삐진 칼을 달려는 듯 속닥였다.
“눈이잖아, 칼.”
칼이 브루스를 바라보면 여전히 장난기 서린 눈으로 조근조근 말했다.
“바라보기만 해서는 재미없는 것도 있다고.”
칼은 문득 뒤에 남기고온 풍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분의 움직임으로 마냥 새하얗지만은 않게 된 우둘투둘한 눈밭이 있었다. 더 이상 차가워 보이지 않고 웃음소리가 들릴 법한 부정형이었다. 그리고 다시 브루스를 보면 아이의 뺨이 추위 말고도 다른 이유 때문에도 상기되어 있다. 칼은 브루스를 단단히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체장이들에게서도 별 소식은 없었습니다.”
“흐음.”
고급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소년이 집사가 따른 차를 반듯한 자세로 들이키며 코를 울렸다. 또래 아이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군더더기가 완전히 배제된 깔끔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다.
“다만 메트로폴리스에서 브루스 도련님과 동형의 혈액이 소비됐더군요.”
“메트로폴리스?”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년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예, 하고 집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소파의 팔위를 손가락으로 토독토독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제 손가락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눈으로 쫓으며 생각에 잠기듯 박자를 점차 빨리했다.
“사람을 풀까요?”
“됐어. 그 애가 어디에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그 애가 보일 행동의 결과는 딱 하나니까. 여기 돌아오는 거 말이야.”
그러다 소년의 손가락이 딱하니 멈추었다. 소년은 자신의 앞에 꼿꼿하게 서있는 집사를 보았다.
“살아있다면.”
한참동안 소년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토마스 주인님.”
알프레드는 토마스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들며 아직은 어린 주인을 불렀다. 청회색의 무기질과 같은 구슬이 도르르 굴러 작게 반응했다.
“걱정 되신다면_”
“걱정 안 해.”
토마스가 또박또박 말을 씹어뱉었다.
“난 말 안 듣는 녀석은 싫거든.”
따뜻한 한낮의 햇볕을 받으면서도 어린 소년은 어떤 온도도 띠지 않은 말을 뱉었다. 알프레드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지만 현명하게 그것을 티내지 않았고 그저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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