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선 이후의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의 어린 브루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만난다면의 이야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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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 침중한 소리와 함께 저택으로 이어진 길을 닫고 있던 검은 철문이 움직였다. 브루스와 칼은 서서히 반으로 쪼개지는 철문 위의 W자 장식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브루스는 고개를 돌려 자기 옆에 서있는 칼에게 시선을 주었고, 칼도 그와 거의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브루스의 얼굴을 살폈다. 브루스가 숨을 한 주먹 제 허파 안에 들였다.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후 브루스는 칼에게인지 자신에게인지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아이의 윤이 나는 구두가 어느 곳 하나 어그러진 곳 없이 완벽하게 짜 맞춰진 벽돌길 위에 닿았다. 잘 펴진 어깨와 곧게 선 목, 망설임 없이 뻗는 다리가 과연 이 아이도 웨인의 도련님이구나 싶어 몰래 감탄이 나왔다. 칼도 천천히 브루스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걷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웨인 저택으로 향했다.
브루스가 행선지로 고담을 언급했을 때 칼은 아이가 그간의 나날 동안 조용히 자신의 내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매우 당연한 일이었지만 왜일까, 칼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담’을 입에 담는 브루스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아니, 놀랐다기보다도 충격을 받았다는 쪽이 어감 상으로 더 적절한 것 같았다. 고담을 이야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바이탈 사인에 특별한 동요는 보이지 않았으며 시선 또한 올곧았다. 한 번은 생의 문턱을 지났던 브루스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칼 앞에 있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칼은 동당동당 소리를 지르는 브루스의 심장소리를 어쩔 줄 모르고 들었다, 이런 상태의 브루스를 집으로 보내야한다 이야기를 한다면 칼은 거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브루스는 마치 악몽에서 막 깨어난 때처럼 불안정했다. 분명 칼을 잡아끌며 돌아다니다 제가 고른 옷가지들을 주며 좁다래한 탈의실에 밀어 넣었을 때까지만 해도 브루스는 그저 즐거워하고 있었다. 칼이 바랐던 것처럼 꼭 그렇게. 하지만 어디선가 따박따박 규칙적인 발소리 하나가 아이 앞으로 찾아들고 그 뒤로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면서 브루스의 표정은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아이의 심장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자 칼은 주저 없이 아이를 감싸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 아주 잠깐 사이에 칼은 스쳐가는 시선으로 브루스를 겁에 질리게 한 인물의 얼굴을 보았다. 알프레드 페니워스. 침착한 얼굴로 장례식에 참석한 어린 상속자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집사의 얼굴이 신문의 흑백 사진 속에 있었고 그 아래 캡션에서 칼은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집사의 눈동자를 아주 잠깐 마주했던 칼은 확신했다. 집사가 범인이다. 웨인 부부를 살해하고, 브루스에게 총상을 입힌 자가 바로 이 남자라고 말이다.
칼은 우선 브루스를 진정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브루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얼굴은 한껏 굳은 채였고, 코트를 쥐고 있는 아이의 손은 하얗다못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칼은 브루스를 함부로 토닥이다 싸늘하게 얼어버린 아이가 혹여 어딘가 깨져버릴까 무서워서 꽃잎 위에 나비가 앉은 듯한 무게만으로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칼, 난 괜찮아.”
시선을 맞추며 그저 말없이 그러고 있는 칼에게 브루스가 까끌까끌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칼은 아이의 말을 듣다가 일부러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 뒤에야 긍정했다.
“그래.”
“오랫동안 이럴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래...”
“오늘은 그냥 칼이 멋있어지는 게 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천천히 아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너무 센 힘으로 주먹을 쥐고 있던 탓에 아이의 손이 살짝 잘게 떨렸지만 조금씩 조금씩 발간 혈색이 작은 손톱 끝까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살피면서 칼은 아이가 말을 끝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저 쪽에서 찾아올 줄은 몰랐네.”
브루스가 비죽 한쪽 입꼬리만 짧게 비틀어 올렸다.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칼은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아까 그 남자의 기척이 혹시라도 이곳으로 가까워질 것 같으면 그 전에 브루스를 데리고 여기를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럴 생각은 없는지 지하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칼이 몸을 일으켜 브루스가 앉은 벤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칼이 이동하는 것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던 브루스가 엉덩이걸음으로 조금 더 칼 옆으로 바싹 앉았다. 쇼핑을 시작하려는 사람들과 끝낸 사람들, 혹은 그저 모여 있기 위해 만난 사람들이 두 사람 앞을 막연하게 지나갔다.
“아까 그 사람.”
“알프레드?”
“그래, 그는...”
“집사야. 날 총으로 쏜 사람.”
브루스가 홀연하게 말했다. 칼의 머릿속에 총에 맞은 채로 두 구의 시신 옆에서 혼자 간신히 살아있던 브루스가 다시금 형체를 떠올렸다. 그때의 자신이 그저 가능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그 목숨을 저울에 올렸던 아이가 지금 자신의 옆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칼은 자신이 역겨워 목 아래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전부 없던 일로 할 모양인가 봐.”
브루스가 백화점 중앙의 돔 모양 천장에 휘황찬란하게 매달린 샹들리에의 반짝임 하나하나를 속으로 세어보며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는 어디에 알려지지도 않았으니까. 있던 걸 없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겠지. 굳이 토미를 들먹이면서 날 찾은 건 의외지만.”
“그의 말을 믿니?”
“그럴 리가.”
하, 하고 브루스가 시니컬하게 코웃음 쳤다. 하지만 이내 아이의 어깨는 한 뼘쯤 아래로 가라앉았다.
“...조금은 믿고 싶어. 그래서 문제지.”
“꼭,”
칼이 다시 브루스의 손을 잡으며 식어버린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칼은 머뭇머뭇 말을 꺼내다 잠시 멈추었다. 브루스가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잡힌 손을 까딱였다.
“꼭 돌아가야 하니?”
습 하고 브루스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옆을 돌아보면 브루스가 복잡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답변들이 뒤엉켜서 아이의 눈동자는 멈출 곳을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하지만 이윽고는 움직임을 멈춘다. 아이는 똑바르게 칼을 마주봤다. 브루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토미와 내가 한 이야기가 있어.”
그 날은 정말 오랜만에 토마스가 브루스와 어울려주었던 날이라고 했다. 최근 들어 토마스는 무슨 일을 하는 지 종종 알프레드와 함께 저택 밖을 나가기 일쑤였고 브루스는 너른 저택에서 혼자 조로와 악당을 번갈아가며 연기해야했었다. 그 날 브루스는 잔뜩 화가 났었다. 토마스가 홈스쿨링을 택한 탓에 브루스도 자연히 그 옆에서 같이 저택을 방문한 가정교사나 통신기술을 이용한 교육을 받게 되어 브루스에게는 제대로 된 또래 친구가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부모님은 언제나 자신들의 일에만 관심이 많았고 토마스는 자신과 놀아주기를 기대하기에는 썩 적합한 형제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부모님에게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싶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개라고? 제발 철 좀 들어 브루스!”
“넌 왜 그렇게 바라는 것 밖에 없니?”
얼굴 한가득 짜증과 귀찮음이 묻어난 부모님의 답변에 브루스도 신경질을 부렸다. 아빠는 열흘 전에 차를 바꿨고, 엄마는 사흘 전에 파티를 열면서 이브닝드레스와 비싼 보석들을 잔뜩 사들였는데 어째서 자신은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느냐고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며칠 정도는 부모님의 거절에 잠잠히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지만 그간 집안 사정을 고려한 결과 다시 말을 꺼낸 것인데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질타를 당하니 브루스는 서러워서 화가 치밀었다. 결국 브루스는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종아리를 다섯 대 맞고 자신의 방으로 쫓겨났다. 브루스는 울면서 자기 베개를 주먹으로 때렸다.
TV에서 털이 탐스러운 강아지가 브루스의 나이 또래쯤인 드라마 주인공에게 꼬리를 바쁘게 흔들며 달려가는 장면을 브루스는 제 눈동자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이따금 아이는 동네의 불량한 아이들에게 이죽임을 듣거나 심한 날에는 구타를 당했지만 그런 아이를 그의 강아지가 언제고 반겨주고 있었다. 아이는 강아지와 함께 무지개의 끝을 찾아 모험을 시작했고, 그리고 둘은 언제까지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친구였다. 브루스는 혼자 남은 시간이면 개에 대한 책을 읽거나 강아지를 돌보는 법들을 검색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정말 가지고 싶었던 블록 장난감의 한정판 시리즈나 리메이크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광선검, 유명한 클래식 모델들로만 구성된 자동차 모형 세트 등을 제 마음 속 깊이에서 버려버리고 오직 개가 키우고 싶다고 부모님에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그를 잘 돌보지 못한다면 밥을 굶겨도 좋고, 몇 대라도 때려도 좋다고 브루스는 부모님이 요구한다면 각서까지 쓸 생각이었다.
“부모님 정말 너무하지 않아?”
한참 상심을 삭이던 브루스에게 불쑥 토마스가 찾아왔다. 정말 듣는 것이 오랜만인 듯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웬일인지 토마스의 말투는 전에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브루스는 베개에 눈물을 문질러 닦은 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 집 돈은 어차피 저 사람들이 번 것도 아닌 데 말이야.”
토마스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브루스는 어딘가 믿기지 않는 기분이어서 자꾸만 눈을 찡그려 제 형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을 껌뻑이자 그 사이 또 눈물이 났었는지 후두둑 볼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브루스는 토마스가 혹시라도 그 꼴에 질려 나가버릴까 봐 서둘러서 그것들을 손등으로 훔쳤다. 토마스는 놀랍게도 인상을 쓰기는커녕 더 빙긋 웃으며 브루스에게로 다가왔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토마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브루스는 혹시 형의 말을 한 마디라도 소홀히 들을까 부랴부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모님이 없으면 우리가 돈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였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브루스는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이었다.
“부모님이 그렇게... 된 건 내 탓도 있어. 뭐라 하지? 방조범? 공동정범?”
하하, 하고 아이는 속이 빈 웃음을 지었다. 칼이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더욱 꼭 감쌌다.
“집에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있을 생각이면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몰라.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곳에 있으면... 언젠가, 어쩌면.”
끝은 두루뭉술했지만 심이 단단하게 잡힌 어조로 브루스가 말했다. 칼은 문득 자신의 지구에서 만났던 배트맨을 떠올렸다. 자신의 생각을 위해 폭탄을 삼키고, 슈퍼맨 앞에서 폭사도 서슴지 않던 유령 같은 그가 칼의 머릿속에서 차갑게 웃었다. 브루스의 박동은 어느새 평상과 가까워져있었지만 이제는 칼의 가슴이 오히려 동요하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그와 달라. 이 아이는—
“나도,”
칼이 한참 뒤에 말을 꺼냈다. 자신이 뱉은 말이 순간 조급한 듯 들려서 칼은 억지로 숨을 참으며 고삐가 풀린 듯한 말을 한 번은 멈추어 세운 뒤에 다시 이었다.
“함께 가마.”
“칼이?”
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브루스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꼬리를 잡지 못하고 늘어뜨렸다. 그러다 다시 힐끔 칼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그는 여전히 같은 얼굴이다. 브루스가 웃는지, 의아해하는지, 들뜬 건지, 놀란 건지 모를 애매한 얼굴을 했다. 도륵도륵 굴러다니는 아이의 표정이 재밌어서 칼은 웃을 수 있었다. 브루스는 그런 칼의 웃음을 뜻도 모르면서 따라 웃었다.
“네가 안전한지 확인해야겠어.”
브루스는 여전히 답을 하지 못했다. 매번 또박또박 자신이 할 말을 하던 아이가 말을 찾지 못하자 그 광경이 또 제법 신선했다. 칼은 왜 브루스가 종종 자신을 놀리려 드는 지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병원에서 날 네 보호자라고 했거든.”
칼이 방긋 웃었다. 브루스는 한참이 지나도 대답을 하지 못하다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브루스는 꽤 오랜만에 자신이 주로 입던 차림새로 돌아와 있었다. 풀이 잘 먹여져서 반듯한 셔츠의 칼라나 몸이 움직일 때 각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선명한 바지며 웃옷이 익숙한 듯 생경했다. 칼이 잠깐 나갔다오겠다며 사들고 온 것들이었다. 옷걸이에 잘 걸어진 채 옷에 망가짐이 없도록 포장 된 한 세트의 아동정장을 브루스는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왜, 아니... 이럴 거면 자기 옷을 사라고!”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산거야? 브루스가 한껏 인상을 쓴 채 외쳤다. 하지만 칼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있는 돈은 둬봐야 재밖에 안되잖니.”
“그러니까 내 꺼 말고—”
“내 돈은 내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라고 네가 얘기 했었지.”
칼이 고집스럽다싶을 정도로 브루스의 말을 잡아챘다. 브루스는 칼의 기세에 눌려서 그건 그렇지만 하고 입 안에서 말을 굴렸다. 아까부터 칼은 어딘가 막무가내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브루스에게 칼은 사온 물건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죽 아이 옆에 늘어놓았다. “그 정돈 나도 알아!” 브루스는 한동안 멍하니 그걸 보다 소리쳤다. 브루스가 그만 한숨을 폭 쉬고 말았다.
“칼... 잘 이용당하거나 그러지 않아?”
브루스가 정말,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칼을 바라봤다. 칼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일련의 결과로 브루스는 저택과 위화감이 전혀 없는 차림으로 정말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저택으로 이어진 제법 그 거리가 있는 길을 태연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길의 양 옆에는 잘 다듬어진 조경이 번듯하게 갖춰져 있다. 그러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유독 한 곳이 다듬어진 나무 한 그루도 없는 채 휑하니 비어있었다. 사뿐하게 앞으로 나아가던 브루스는 그 이질적인 공터에 걸음을 멈췄다. 잡초하나까지 깔끔하게 갈아엎어서 다듬은 듯한 흙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브루스?”
칼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불렀다. 브루스는 다시 멈춘 걸음을 움직였다. 칼은 제 걸음에 맞추어 흔들리는 아이의 손을 잠시 보다가 한 손을 조용히 잡아보았다. 다행히 브루스는 그 손을 마주잡아주었다.
어느덧 현관 앞이었다. 멀리서 보던 것보다 코앞에 서있는 저택은 그 위압감이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생생했다. 왁스칠이 꼼꼼하게 된 묵직한 나무문은 눈으로 보기에도 견고했다. 브루스는 문 옆에 위치한 메두사의 머리를 본 뜬 초인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그에서 눈길을 돌리고 바로 현관의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문은 생각 외로 스스럼없이 열렸다. 기름칠이 잘 된 경첩은 작은 소음하나 나지 않고 매끄럽게 움직였다. 저택 안에 있던 공기가 바깥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브루스에게는 새삼스럽지만 익숙한 것이었고, 칼에게는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브루스는 반사적으로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두 사람은 열린 문을 통해 조용히 침잠해있는 저택의 내부로 발을 들였다. 브루스가 손에서 놓아버린 현관문이 스르르 닫히자 등 뒤가 바깥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
저택 안은 넓었고 매우, 매우 조용했다. 브루스는 주름 하나 없이 깔린 카펫을 조심히 밟으며 중앙에 있는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그 때, 검은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윽.”
퍽하고 짧고 간결한 소리가 난 뒤 조용한 신음이 말끔한 바닥 위에 떨어졌다. 칼은 브루스를 뒤로 물리며 자신들을, 아마도 브루스를 노리고 달려든 새의 형상을 본 딴 복면을 쓰고 있는 자를 붙잡아 생명에 해가 없을 정도로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워낙 마음이 급했던 탓에 자객의 팔을 붙잡다가 그의 어깨를 탈골시킨 것 같았지만 용케도 그는 큰 소리 하나 내질 않았다. 칼은 제 손에 잡힌 수상한 이를 저만치로 굴리듯 내던져버렸다. 혹시 또 다른 인물이 있을까 주위를 살폈지만 이제 익숙해진 브루스의 소리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된 소리, 그리고 브루스 또래쯤으로 추정되는 소리 셋이 전부였다. 칼은 혹시라도 쓰러져있는 자객이 다시 일어날까 계속 그쪽을 쳐다봤다. 그런 칼을 갑자기 브루스가 답싹 붙잡았다.
“칼, 싸움도 할 줄 알아?!”
브루스가 놀라서 자신의 팔을 잡은 줄만 알고 아이를 달래기 위해 몸을 돌려 마주한 칼은 아이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까치발마저 든 채 칼의 얼굴을 신기하게 들여다보던 브루스가 저 바닥에 쓰러진 인물과 칼을 자꾸만 번갈아보았다. 아이의 뺨이 상기된 것을 보자 칼도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브루스 이건...”
“대단해. 칼! 영화 같았어!”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브루스가 외쳤다. 칼은 마치 처음 미소를 지어보는 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잔뜩 신이 난 브루스를 달래려는지 아니면 자신을 진정시키려는지 의미가 애매한 손길로 칼은 브루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미안. 어린애가 돈이 있다 보니 여간 사는 게 흉흉해서 말이야.”
하지만 곧 저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브루스의 표정과 칼의 행동이 멎었다. 또박또박 분명하고 매끄러운 발음으로 소년이 이야기했다. 쫑긋 올라있던 브루스의 뒤꿈치가 얌전하게 땅 위로 내려갔다. 브루스는 아까의 생기를 몽땅 감춰버린 얼굴로 소년의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바로 세웠다. 커튼으로 가려진 커다란 액자들을 지나 계단을 내려오는 소년은 브루스보다 머리 하나에서 조금 정도 더 키가 있었다. 차분한 걸음걸이로 층계를 밟아 내리던 소년은 아직 한참은 계단이 남은 위치에 멈춰 섰다. 토마스가 브루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늦었네, 브루스.”
“...다녀왔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브루스가 차분하게 마주 인사했다. 심지어 브루스는 살짝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토마스의 눈썹 한쪽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손님이 있으면 소개를 해줘야지?”
토마스는 마치 잘 짜인 연극을 하듯 자연스럽고 물 흐르는 듯 웃으며 살갑게 말했다.
“이 사람은 칼이야. 칼은...”
브루스가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브루스는 칼을 길 잃은 자신을 데리고 저택까지 동행해준 사람이라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덥석 브루스의 뒷말을 칼이 이어버렸다.
“나는 다친 브루스를 발견했단다. 브루스가 많이 아파서 바로 집에 돌아올 수 없었지.”
브루스는 당황한 듯 파닥 소리가 날 것 같은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칼을 보았다. 칼은 꺼릴 것 하나 없다는 당당한 빛으로 등잔만 해진 브루스의 눈동자에 답했다. 사실이잖니, 칼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브루스가 눈을 내리깔며 어휴, 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흐음, 브루스 네가 집에 전화 하나할 줄 모르는 갓난애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사고는 적당히 쳤으면 좋겠어. 이제 부모님도 안계신데 언제고 철부지처럼 굴면 곤란해.”
브루스가 주먹을 꼭 쥐었다.
“알고 있어.”
브루스는 덤덤하게 말하며 칼의 팔을 잡고 성큼성큼 계단 위로 올라갔다. 브루스는 금방 토마스가 있던 층계까지 올라가 그를 마주했다. 토마스의 눈이 조용히 가늘어졌다.
“손님방 비었지?”
브루스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칼이 거기서 머물 거야.”
“맘대로 해.”
토마스 역시 별스럽지 않게 대꾸했다. 브루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칼은 토마스가 자신을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쏘아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커다란 식당 안에는 기다란 식탁이 놓여있다. 세 사람은 그 식탁 주위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고 집사가 한 발 뒤에 서서 식사시간을 돌보았다. 여느 레스토랑은 쉬이 명함도 내밀지 못할 법한 요리들이 상 위에 차려져 있었지만 마치 지금 이 모든 것이 보기 좋게 장식된 가짜인 것 마냥 식탁에는 살가운 말 한 마디 오고가지 않았다. 칼은 이런 꺼림칙한 분위기의 식사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어서 오히려 태평한 생각이 들었다. 브루스는 칼이 사왔을 때는 맛있게 먹던 빛깔이 먹음직스러운 로스트 치킨이나 호두알이 박혀 고소한 냄새가나는 호밀 빵에 손길하나 주지 않고 제 앞에 있는 말간 스프만 입에 댔다. 그 와중에도 윤이 나는 숟가락을 손에 잡은 아이의 손이 더없이 반듯했다. 칼은 브루스의 호흡과 박동에 신경을 기울였다. 저택에 들어온 후부터 브루스의 표정은, 처음 칼이 수상한 사람을 때려 눕혔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디하나 치우침 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아이의 속은 전혀 그렇지를 못했다. 브루스의 겉과 속의 차이를 생생하게 보고 듣고 있는 칼은 그런 브루스가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더 안쓰러웠다. 네가 그럴 필요가 있니? 칼은 이따금 드는 질문을 입 밖으로 결코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칼이 브루스에게서 이상을 포착하고 아이를 불렀다.
“브루스?”
얼마 되지 않는 행동반경을 보이던 아이의 손은 이제 숟가락마저도 아예 놓아버렸다. 브루스가 색색 숨을 몰아쉬자 아이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칼이 의자를 조금 뒤로 빼며 브루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브루스의 맞은 편 끝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알프레드.”
서늘하게 침착한 목소리가 제 뒤의 그림자에서 조용히 서있던 알프레드를 불렀다. 집사는 신속하지만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소리 없이 브루스의 곁에 다가갔다. 아주 잘 훈련받은 이의 움직임이었다. 칼은 신경이 곤두서서 집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였다.
“일어나시죠, 브루스 도련님.”
집사는 아슬아슬하게 정중하지만 고압적으로 말했다. 열에 얼굴이 달아오른 브루스가 제 입술을 깨물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루스, 내가—”
칼이 반쯤 몸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세 쌍의 눈동자가 거의 일제히 칼에게 향했지만 칼은 브루스의 눈만을 보았다. 아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먼저 올라갈게.”
브루스가 작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칼은 그게 온전히 자신에게 만을 향한 말임을 알았다. 후들거리던 아이의 몸이 금방 꼿꼿해지면서 집사의 옆에 단정히 섰다. 브루스는 집사가 이끌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식당을 나갔다.
“받으시지요.”
잠옷으로 갈아입은 브루스는 칼이 사준 옷을 반듯하게 걸어 잘 정리해두었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새 옷에 주름이 잡히는 것은 싫어서 브루스는 퐁퐁 마지막으로 정리한 옷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런 브루스에게 바깥에 나갔던 집사가 쟁반 위에 물 한 컵과 약을 담고 돌아왔다. 컵 옆에 있는 약은 브루스가 삼키기에는 조금 큰 듯한 캡슐로 된 약이었다. 브루스는 결국 독기 서린 눈을 감추지 못한 채 알프레드를 노려보고 말았다.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도무지 적의가 가시질 않아 브루스는 위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직 제 감정을 온전히 감추고 다루기에 아이는 많이 어렸고 미숙했다.
“독은 아닙니다. 흔적 없는 독을 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요. 도련님께 그걸 감수할만한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집사가 말끔하게 말했다. 브루스가 허 하고 크게 코웃음 쳤다. 우리 집사님은 참으로 친절도 하시지.
“날 용케 찾았던데?”
“토마스 주인님께서 걱정하셨으니 까요.”
“진심이야?”
브루스가 싸늘하게 집사를 바라봤다. 알프레드가 토마스에게 이상할 정도로 헌신적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착각을 그대로 믿고 있을 만큼 맹목적일 줄은 몰랐다. 브루스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집사의 눈이 점점 더 검게 굳어갔다. 지금 화를 내는 건가. 브루스는 성의 없는 손길로 쟁반 위에서 약과 물을 잡아챘다.
“삼키세요.”
알프레드가 딱딱하게 말했다. 브루스는 금방이라도 컵에 담긴 물을 앞의 남자에게 끼얹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아직은... 브루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약을 삼켰다. 역시나 조금 컸지만 홧김에 오기가 생긴 덕에 목이 메지 않고 바로 삼켜낼 수 있었다. 브루스가 하는 양을 감시하듯 내려다보던 알프레드는 아이가 물 컵을 비우자 미련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집사가 문 뒤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확인한 브루스는 그가 걷고 있을 경로를 노려보며 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숨을 죽이고 욕을 퍼부었다.
혼자가 된 브루스는 겨우야 조금은 긴장이 풀려서 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커다란 베개 위에 머리를 뉘이면 브루스는 이곳이 자신의 방이구나 하고 별스런 생각을 한다. 내 침대가 이렇게 컸었구나. 브루스는 이제껏 자신은 이 방에서 지내왔을 텐데 이상하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칼과 있던 우주선이라는 게 조금 신기했다. 거기서 있던 기간이 그렇게 길었던 것도 아닌데... 역시 가장 최근의 기억이라서일까. 브루스는 자기 방이 이렇게 넓은 줄 알았다면 칼도 이 방에서 지내면 좋았을 걸이란 생각을 했다. 칼이 그렇게 오랫동안 여기 머물지 않을 거라면 어차피 그는 자신과 한동안 같이 선내에 있었으니까 그 기간이 조금 길어져도 괜찮지 않을까싶었다.
토마스가 칼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브루스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저택에 발을 디뎠을 때 달려들었던 사람은 브루스가 아닌 칼을 노리고 있었다. 브루스는 저보다는 한참 높은 위치로 팔을 휘두르던 사람의 그림자를 다시 기억했다. 집에서는 브루스가 동행이 있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칼은 브루스가 어느 정도 저택 안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떠나겠노라고 이야기했다. 그건 한 일주일일까? 아니면 한 달? 혹시 일 년? 브루스는 곰곰이 날짜를 짐작해보았다.
브루스는 칼이 무사하게 이 저택을 떠나 그의 원래 여행길로 발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랐다. 우선 그가 떠나기 전에 부모님의 방을 뒤져서 챙겨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그에게 쥐어줄 생각이었다. 칼이 만든 게 아닌 원래 세계에 있던 것이라면 칼도 조금은 거리낌 없이 자기를 위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칼은 또 자신이 아닌 브루스를 위해 제 돈을 쓰고 말았다. 처음 칼에게 옷을 받았을 때 브루스가 했던 감탄사가 가슴에 남았던 건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브루스는 칼이 준 것들이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칼은 불평 없이 저 같이 성가신 꼬맹이와 놀아주었고... ...잠이 와. 약기운 탓인지 이상하게 잠이 쏟아진다. 절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는데 수마가 자꾸만 브루스의 눈꺼풀 위로 내려왔다. 몸에 돌던 열도 지금은 많이 가신 것 같았다. 어쩌면 불편한 식사자리에 몸이 꾀병을 부린 걸지도 몰랐다. 브루스는 더는 자기 힘으로 제 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내일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칼에게 괜찮다고 얘기해줘야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브루스는 결국 잠이 들었다.
“위가 신경 쓰이시나 봐요?”
음식은 손에 대지 않은 채 칼은 제 몫으로 나온 차로만 입을 축이며 언제쯤 자리를 일어날까 가늠했다. 그런 칼에게 토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건 토마스는 단정한 얼굴로 식사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브루스가 괜찮은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양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토마스가 하는 말을 들으니 자신의 노력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칼은 다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워낙 집에만 있던 애니까요. 어디 혼자 나다니다가 탈이 난 모양이에요. 정말 칠칠치 못하다니까.”
토마스가 나이프로 닭다리 살을 정교하게 발라냈다. 소년의 동작은 예전 칼이 슈퍼맨이던 시절에 ‘동무’라 불렀던 고위직 인사들에게서도 좀처럼 보지 못했을 만큼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절제되고 절묘해서 적확히 필요에 의한 움직임의 집합이었다. 조금 꺼림칙할 정도로.
“브루스는 피를 흘리고 있었어.”
칼이 덤덤한 어조로 심상하게 말했다.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는 토마스는 여전히 차분했다. 소년은 소리 없이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브루스에게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통보한 주제에. 이 집의 인원들이 아이에게 하는 양을 보면 도무지 그 위험한 머릿속에 뭣들을 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 브루스를 혼자 둔다고? 칼이 속으로 혀를 찼다.
“너희들의 부모님과 같이 있었지.”
“그래요? 경찰들은 다른 흔적에 대해선 얘기하나 없던데. 신고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아, 하긴. 고담시경이 일처리가 허술한 건 유명하죠.”
이번에 토마스는 샐러드 볼에 담긴 방울토마토와 양상추를 제 접시 위에 덜었다. 칼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하지 않았니?”
“그러는 당신은 지나치게 남의 집에 간섭하시네요.”
마주친 토마스의 눈이 어느새 계단에서 마주했던 그것이 되어있었다. 브루스를 그 골목에 그렇게 놔둬놓고 간섭하지 말라는 건가? 어차피 들어줄 요구도 아니었지만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황당해서 칼은 그만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도대체 브루스를 어쩔 생각으로... 칼은 이를 악물었다. 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긱, 하고 칼이 앉았던 의자가 식당 바닥을 거칠게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만 실례하지. 대접 고맙군.”
“별말씀을요.”
칼은 단박에 식당을 빠져나갔다.
“브루스?”
칼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면 새근새근 안정된 숨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덮고 있는 이불이 호흡을 따라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칼은 그 모습을 벽하나 막하지 않은 육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어깨와 뒷목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칼은 조용히 브루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약을 먹어서일까? 아이의 얼굴색은 식당을 떠났을 때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무엇보다도 브루스가 문제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방은 아이가 지금껏 자라온 그 자신의 방이었다. 마음이 놓일 수밖에 없겠지. 칼은 그런 유의 안정감을 직접 경험해본 일이 없어 온전하게 알 수 없었지만 어설프게 짐작정도는 해보았다.
아까 전 집사의 입에서 ‘독’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얼마나 초조하던지. 칼은 몇 번 이고 자리를 박차서 나가고 싶었지만 우선은 참아야 했다. 첫째로 브루스가 칼에게 자신을 지나치게 감싸고돌지 않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토마스 웨인과 이야기를 해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렇게 에두르지 않아도 더 쉬운 방법으로는— 칼은 징글맞게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에 끈질기게 고개를 저었다. 칼이 방에 놓여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가져와서 브루스의 옆에 앉았다. 칼은 단순히 힘과 자신이 하려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만으로 움직이기에 세상이 너무나 복잡하고, 자신은 매우 어리석으며, 미래는 쉽게 망가져버린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한바 있었다. 칼은 예전의 자신이 그랬듯 혹시 브루스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작은 병속에 가두려는 듯 굴게 될까봐 여전히 겁이 났다. 최선이라 생각한 길이 그저 자신만의 욕심이라면, 이곳의 브루스가 칼에게 그가 한 모든 것이 괜한 참견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칼의 머릿속으로 이런 끝 간 곳 없는 상념들이 찾아들었지만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임을 칼은 참 늦게 깨달았고 이제야 시행해보는 중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이미 칼은 이 지구의 위에 발을 붙였고, 브루스 웨인을 알았으며, 지금 이곳에 있다.
“브루스.”
칼이 브루스를 작게 부르며 아이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아이는 잠결에도 고개를 돌려서 작게 웃어보였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릿하게 가슴이 쑤시자 칼은 그것을 울 것 같이 웃으며 통증을 삭였다. 브루스, 내가 또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틀리지 않을 만큼 너는 제멋대로일 수 있니?
“잘 자렴, 브루스.”
칼은 조용히 아이의 잠을 지켰다.
“저 남자.”
말끔하게 치워진 식탁 위에는 얼마쯤의 차가 남아있는 찻잔 하나만이 덩그러니 낯선 이가 앉았던 자리 앞에 남았다. 토마스는 그것을 불쾌하게 바라봤다. 소년이 제가 가늠해두지 않은 범주의 일이 벌어질 때면 으레 보이는 표정이었다. 알프레드는 묵묵히 어린 주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독이 듣지 않았어.”
“그렇군요.”
토마스의 입술이 비틀렸다. 잠시 미소와도 비슷한 호선을 띠던 그 모습은 금방 화가 난 듯 치켜 내려가다 결국에는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알프레드.”
“네, 주인님.”
“놈의 정체를 알아내.”
토마스가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적당한 곡선이 우아한 찻잔을 가리켰다.
“주인님의 바람이시라면.”
집사가 더없이 공손하게 제 하나밖에 없는 주인에게 답한다.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버렸지만, 반려동물을 들일 때는 충분한 숙고를 거치는 것이 옳다. 생각과 현실은 정말 다르니까.
-살다보면 브루스가 분위기 메이커일 수도 있다.
-살다보면 내가 커플링을 배제하고도 좋아하는 알프레드와 브루스의 관계를 완전히 뒤트는 일도 있는 법이다.
-으앙, 기빨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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