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선 이후의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의 어린 브루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만난다면의 이야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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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의 일이다. 부모님이 부부동반 세미나로 저택을 비운 날 브루스는 토마스와 늦은 밤에 방영되는 공포영화를 보았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존재들이 발톱을 세우고 스멀스멀 그들의 영역에서 기어 나와 사람들을 사냥하고 다니는 이야기였다. 엔딩크레딧이 오른 후에도 방안의 그림자들이 이상하게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눈꺼풀 너머에서 계속해서 재생되는 영상 탓에 등골이 오싹해진 브루스는 영화가 끝이 나고 길게 하품을 하는 토마스를 끈질기게 졸라서 그의 방에서 같이 잠을 자게 되었다.
달이 전부 차오르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달빛이 환한 날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브루스는 도중에 설게 잠에서 깨어났다. 피곤이 여전히 무겁게 아이의 머리를 눌렀고 브루스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잠이 들 준비를 했다. 그러다 아이는 제 옆에 늘어진 그림자를 보았다. 토마스였다. 토마스가 일어나서 달이 밝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거의 미동도 없이 침대에 걸터앉은 토마스의 그림자는 기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피부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서 브루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그림자를 드리우는 광경을 확인했다. 그리고 브루스는 간신히 그것이 토마스가 아닌 토마스가 보고 있는 새 때문이라고 알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느리게 펄럭이는 커다란 날갯짓 소리와 끼룩 하고 가냘픈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밤에 어울리는 고요한 소동이었다. 깊은 밤 부엉이가 저와 같은 시간대에 생활하는 박쥐를 사냥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얇은 피막으로 되어있는 날개를 찢었고 뾰족한 부리가 검은 짐승의 목을 그었다.
“먹어, 먹어, 먹어.”
마치 주문처럼. 홀린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브루스는 눈을 꾹 감으며 의식적으로 잠이 들었다. 다행히 그 후로는 꿈조차 없는 밤이었다. 아니, 어쩌면 브루스는 지독한 악몽 하나를 본 것일 수도 있다.
“드십시오.”
아침이 차려진 기다란 식탁 양 끝에 웨인가의 형제를 앉히며 알프레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적막한 식당 안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밝았지만 눅눅한 침묵으로 음침했다. 식기의 움직임이 아주 간간히 소음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토마스는 반듯하게 갓 구워진 식빵에 크림치즈를 발랐고, 브루스는 아직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콘 포타주 그릇 안을 휘저었다. 그때 토마스의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조용한 식사시간을 침범했다.
“손님은 어디 가셨지?”
“갔어.”
관심이라고는 묻어있지 않는 물음에 브루스도 심드렁하게 답했다. 옥수수 알이 너무 굵어. 브루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제 앞에 있는 빵의 귀퉁이를 떼어 제 접시 위에 담았다. 뜯어진 따끈한 빵에서는 고소한 밀의 냄새가 났다. 버터 냄새가 심한 거 같은데, 브루스가 예민하게 콧등을 찡그렸다.
“갔다고?”
“몰라. 여기 없어. 갈 곳이 생겼나보지.”
“인사도 없이 섭섭한데?”
토마스가 빵의 귀퉁이를 작게 베어 먹었다. 브루스는 손에 잡은 식빵을 거의 빵가루 수준으로 접시 위에 조각조각 찢어놓았다. 맑은 새소리가 저택 너머의 숲에서 들려왔다. 잠깐 브루스는 숨을 죽이고, 총총, 다시 맑게 들리는 그 소리를 확인한 뒤에야 고루 내쉬었다. 브루스는 제 앞의 접시를 밀어내며 발랄하게 물었다.
“토미, 낮에 뭐해? 나랑 놀아.”
식탁을 짚으며 브루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제 접시를 바라보던 소년의 유리구슬 같은 동자가 힐끗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본다. 토마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바빠.”
“에에...”
브루스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야유했다.
텅 빈 저택. 귀울음과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브루스는 그 소리가 꼭 그 밤의 날짐승의 울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갈비뼈 안쪽에서 성마르게 작은 북이 울려댈 때면 브루스는 주머니에 담아 놓은 쪽지를 꺼내 읽었다. ‘괜찮니?’ 아직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따뜻한 글씨였다. 브루스가 그 위에 남은 온기를 지문 끝으로 감지하며 다시 차분하게 호흡했다.
“난 괜찮아.”
브루스가 속살거렸다. 곧 어느 식으로든 정말 괜찮아질 것이다. 브루스는 다시 주머니 속에 쪽지를 넣고 오늘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던 다락을 향해 계단을 계속 올랐다. 요 근래 브루스는 놀이를 빙자해서 저택 안의 여러 수상한 곳들을 발견했다. 칼은 오래된 저택에는 으레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미로나 비밀의 방 따위가 있기 마련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어느 곳인가는 칼의 시선에 조차 파악되지 않는 공간도 있었다. 브루스가 말만한다면 칼은 그 위치를 찾아가 이 저택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었겠지만 브루스는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겼다. 칼이 해야 할 일은 그런 게 아니었으므로.
인간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보았을 때 평생을 논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햇수를 이 집에서 살아온 브루스였지만 그럼에도 ‘집’이라고 불러온 이 저택이 과거의 아이가 생각했던 것만큼 친숙한 곳이 아니라고 하루하루 깨닫고 있었다. 집을 찾아온 이들을 감시하듯 곳곳에 널려있는 부엉이의 존재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브루스는, 심지어 부모님마저도 몰랐을 법한 공간이 이곳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관심의 문제라고 하기에도 과할 정도로 이 저택은 겉과 속이 분리되어있는 마냥 두 가지의 목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택의 다락과 그 아래에 있는 층 사이에는 겉으로 보기에 제법 거리가 있는 듯 보였지만 실제 다락으로 들어가 보면 그 높이에 맞는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칼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방공호라고 생각하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그 공간은 이제 브루스가 마지막으로 확인해볼 장소였다.
다락에는 아주 오래된 물건들이나 할아버지 때 까지만 쓰이던 물건들, 또는 부모님의 취향과는 맞지 않는 것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이 있는 장소치고는 다락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다락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이 집안 집사의 성미가 깐깐하기 때문이었을까? 덕분에 브루스는 물건들이 근래에 누군가에 의해 이동한 적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을 목적으로 움직인 것인지에 대해 추론할 수 없었다. 연역으로 알 수 없다면 귀납으로 알아볼 수밖에. 브루스는 우선 나무 바닥에 귀를 대어 보았다. 바닥과 귓구멍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에서 나오는 백색 소음 밖에 들리지 않았다. 쿵쿵 바닥을 두드려 보아도 별로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여차하면 저 어디에서인가 도끼라도 가지고 와서 바닥을 부숴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괜히 힘을 뺄 일은 하지 않는 게 이로웠다. 그러다 브루스는 액자 하나를 기억했다. 토마스가 부엉이 법정의 동요를 알려준 뒷날에 그와 함께 이곳에서 잡동사니들을 뒤지며 놀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때 토마스는 자신들의 고조부인 알렌 웨인의 초상화를 발견하고는 굉장히 즐거워했었다. 알렌은 웨인을 이 고담에 정착시킨 인물이자 그 어느 가문보다도 크게 성장시킨 사람이었다. 파티에서 어른들이 뒷말로 그 시대에 비하면 지금의 웨인은 잡상인수준이라며 비웃는 것을 브루스는 종종 듣고는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빠는 알렌을 정신병자 늙은이였다며 욕을 퍼부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래도 저택에는 알렌의 초상화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있는 액자들도 다 커튼이나 천으로 가려놓아서 언제 다 이곳 신세가 될지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브루스는 그의 초상을 찾아 다락 물건들을 헤집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부엉이의 머리를 본뜬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있는 알렌 웨인의 초상화를. 브루스는 그 액자가 있던 아래 바닥에 누군가가 조각칼로 파낸 자국을 발견했다. 여러 번의 칼질이 만들어낸 그 모양은 브로치의 것과 거의 같았다. 토마스가 알렌의 초상화를 발견했던 날 혼자 계속 다락에 붙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싶더니 이걸 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문양이 그려진 나무 바닥에 손을 대고 움직여보면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브루스는 바닥 사이의 홈에 손톱을 넣어 들춰보았다. 그리고 그 밑에서 금속질의 바닥을 발견했다.
몇몇 개의 짐들을 치워내서 바닥을 드러내니 곧 그게 단순한 바닥이 아닌 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임을 알게 되었다. 손잡이로 보이는 둥그런 부엉이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 몇 번 돌려보자 끼익 하고 생각보다 쉽게 문이 열렸다. 잠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열린 틈새로 보이는 실내는 어두운지 부옇게 밝은지 애매했다. 브루스는 문을 마저 열고 아래를 향해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살펴보니 사다리나 주변에 마땅한 발판은 보이지 않았다. 브루스는 주변을 살피다 아주 오래된 디자인의 옷가지들이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끄집어냈다. 최대한 섬유가 단단해 보이는 옷들로만 골라 브루스가 그것들을 주욱 매듭지었다. 바로 근처 기둥에 옷으로 만든 끈을 단단히 고정시킨 뒤 아래층으로 그것들을 던졌다. 약간 끝이 부족했지만 저 정도 높이면 떨어져도 다치지는 않을 위치였다. 브루스가 옷가지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정도 높이에서 그만 브루스가 연결했던 매듭이 풀리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으, 젠장.”
브루스가 작게 욕을 뱉으며 끙끙댔다. 엉덩이가 많이 아프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브루스는 허리를 펴고 자신이 지금 막 떨어진 방의 광경을 둘러보았다. 어둑한 실내는 벽에서 새어나오는 창백한 빛으로 칙칙하게 밝았다. 눈앞에 펼쳐진 벽면의 거의 전체를 커다란 스크린이 차지하고 있었다. 네모난 화면은 또 작게 수많은 칸들로 나뉘어 있었고 그 곳에 한가득 떠올라 있는 것은 고담시의 이곳저곳이었다. 모니터 앞 책상에는 수많은 기록과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천장에서 커다란 부엉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부엉이의 둥지였다. 브루스가 습하니 숨을 삼켰다. 알프레드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브루스는 둘 중 누군가가 관계자이고 아닌지를 구분할 필요가 완전히 없어졌다. 위치를 파악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은 적어도 그 감시 작업에 두 명 이상은 동원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브루스는 화면 한 구석에서 원하지 않지만 눈에 익어버린 골목 하나를 발견했다. 골목 내부가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크라임앨리는 보통이면 지금쯤에나 공사가 진행될까 말까였지만 선거기간을 맞아서인지 빠르게 복구 작업이 완료되었다고 기사를 읽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가 크라임앨리의 귀퉁이가 부서져있었고 웬일로 공사인부들이 아닌 경찰들이 그 장소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브루스는 문득 자신이 열어둔 창문으로 아주 잠깐 제 곁을 머물다 가버린 바람이 생각나 불안해졌다. 눈에 띄면 안 돼. 브루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칼은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닌 만큼 브루스 때문이 아닌 이상 이 지구의 한 지점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사실 이 지구에 조차 머물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브루스는 최대한 칼이 제 능력을 저를 위해 쓰기를 바랐고 브루스의 계산이 맞는다면 그런 칼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한 누가 함부로 붙잡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보면 고담도 꽤 작지 않아?”
책상 위에 수북한 메모들을 살펴보던 브루스의 등 뒤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브루스는 침착하게 몸을 돌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토마스의 창백한 얼굴을 지켜보았다. 음영으로만 분간되는 검은 그림자에서 브루스는 희미하게 다른 통로의 존재를 알아냈다. 제대로 문이 있잖아. 브루스가 아직도 지끈지끈 아픈 제 엉덩이를 생각하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입만 웃고 있는 토마스가 브루스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발을 멈춰 세웠다.
“네가 아주 얼간이가 아닌 건 다행이지만 그동안 같잖은 연기를 지켜보느라 꽤 짜증이 났었어.”
“핸슨 옆에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짜내느라 그런 건 아니고?”
브루스가 헛웃음 섞인 투로 대꾸하자 토마스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멍청한 것들이 그게 효과적이라고 부득불 우기는데 어쩌겠어.”
“강하면 그딴 걸로 호소할 필요 없다며?”
“난 호소한 적 없어. 필요에 맞게 어울려준 거지.”
이렇게까지 쇼 비즈니스에 어울려줬는데 성과를 못 얻으면 놈은 죽은 목숨인거고. 토마스가 뒷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더욱 비죽이 웃었다. 어련하시겠어, 브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여기네? 네 멋진 둥지 말이야.”
브루스가 제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고갯짓으로 어두운 실내를 훑었다.
“좀 구차하지 않아? 어차피 고담 곳곳이 부엉이 밭이던데. 애매하게 이런 데를 만들 필요가 있어?”
“사람들은 대놓고 감시당하는 걸 알면 싫어하거든. 우리도 소모적인 소동은 지양하고 있고 말이지.”
“아하, 그래서 이 다락아래 치졸하게 숨어드셨다?”
토마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줄곧 토마스의 얼굴을 노려보던 브루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브루스가 말을 이었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재산도 퍽 필요했겠군. 전기세는 무서우니까, 안 그래?”
브루스가 눈썹을 과장스럽게 휘어보이자 토마스가 결국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난 내 것을 되찾은 거라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
“부모님이 그걸 축내고 있었고 말이지. 물론 기억해. 하지만 부엉이 법정은 아빠 대에서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죽은 토마스 웨인은 겁쟁이에 한심한 작자야. 그가 법정에서 배제된 건 합리적이고 적합한 판단이었지. 하지만 난 달라.”
유리알 같은 토마스의 눈동자 표면이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을 받고 기괴하게 빛났다. 마치 그 밤에 박쥐를 사냥하는 부엉이를 지켜보던 때처럼. 약간의 광기와 자부심이 뒤섞여서 소년은 더욱 자세를 꼿꼿이 폈다.
“네가 잘나서 부모님을 죽이고 돈을 차지했다?”
브루스가 너무 뻔해서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던진 뒤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깔깔 웃기 시작한다. 실내에서 아이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어둡게 차올랐다.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멎었지만 그새 잔상이 남았는지 허공을 여기저기 떠돌았다.
“오, 토미.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아이가 방긋 웃었다.
“넌 부모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잘 해쳐나가고 있어서 두 사람을 죽인거야.”
브루스가 느릿하게 걸음을 떼며 토마스의 주변을 가볍게 빙글 한 바퀴 돌았다. 토마스는 분명 브루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커다란 키였지만 이제는 그가 그렇게 커다랗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칼의 말대로 브루스가 금방 자라는 나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토마스가 나타났던 어둠 속에서 발을 멈추었다.
“유령 투자로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지분을 빼낸 건 법정의 자금 세탁 목적도 있지만 아빠가 회사에 가진 결정권을 약하게 하려던 목적도 있었지? 네 말대로 아빠는 원래 그렇게 믿음직한 임원도 아니었으니까.”
입지가 약한 임원을 쥐고 흔드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몇몇 숫자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브루스가 말을 이었다.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참담하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주가가 떨어지던 때, 그리고 파워스로의 기술 이전이 이루어지던 때, 부모님이 곧잘 싸움을 하던 때가 차례로 브루스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런 때 아빠에게 아울즈 크로를 소개한 건 네 쪽이었어. 아빠는 전에 경마로 한 몫 잡았던 적이 있으니까 도박에는 약하지. 거기다 총회가 막 끝났을 때 우리 집 분위기가 엉망이던 건 네가 모를 수 없었을 테고 말이야. 그런 시기적절한 때에 아무도 아빠에게 권하지 않았던 프리미엄 입장권을 제시할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어. 법정의 그 누구라도 말이야. 아, 끽해야 변수로 알프레드인가?”
아울즈 크로에 번번이 출입하는 알프레드의 소식을 들었던 브루스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래봤자 주인과 집사, 둘은 한 쌍이었지만.
“넌 아빠가 영영 아울즈 크로에 코가 꿸 거라고 생각했지. 그걸로 웨인의 재산이 전부 법정 소유가 될 거라고 말이야. 근데 아니었어. 맙소사, 아빠가 이겨낸 거야!”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는 토마스의 앞에서 브루스가 폴짝 뛰며 마치 어떤 마법이라도 벌어진 듯 양손을 활짝 펴 보이며 외쳤다.
“물론 아빠 혼자만이 이뤄낸 성과는 아니었지. 그때 즈음 엄마가 자선 파티를 열었어. 아무도 자선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발이 넓은 사람이잖아? 여기 사람들은 인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치들이고 말이야. 결국 뒤에서 뭐라 지껄이든 모금은 성공적이었어. 그리고 그 돈이 어디로 간지는, 토미 네가 더 잘 알지?”
아빠의 다이어리를 처음 봤을 때 브루스는 아빠가 기어코 제게 일어난 문제를 엄마로부터 숨겨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정말 평소의 그녀와는 맞지 않게 식물 하나를 꾸준히 좋아했던 것을 기억했고 아빠가 아주 가끔씩 이라지만 그 꽃을 엄마에게 안길 만큼은 둘이 부부로서 그럭저럭 해내가고 있는 파트너라는 게 생각났다. 그 뒤에야 그 즈음에 있었던 자선 파티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웨인이라는 이름 아래 있는 재산은 분명 부모님의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도 그 돈의 주인임은 자명했고 둘은 그 돈을 저들을 위해 낭비하는 동시에 저들을 위해 그럭저럭 지키는 일 또한 해나가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게 지겨워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마저도 결과적으로는 제 손으로 직접 해내지는 못했지만.
“있지, 토미. 박쥐무덤 기억해? 저택 저 뒤에 있는 굴 말이야. 아참. 네가 모를 리가 없구나... 거기 지금 금고였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정치인에게 소중한 것은 돈이었다. 그리고 정치가가 내세운 정책에 따라 뒷세계의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은 그 범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비록 법이라는 게 종잇장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고담이었지만 외려 권력을 쥐거나 돈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만큼 유효한 요새가 따로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유착하기 쉬웠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어떻게 둘 사이에서 힘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단순히 부엉이 법정 덕분에? 브루스는 이 저택 뒤편으로 트럭이 출입한다는 이야기를 칼로부터 들었다. 검은 봉투에 마치 불법으로 쓰레기를 유기하듯 버려지는 그 뭉치는 전부 돈이었다. 굴은 웨인의 사유지의 범위 안에 있었고 고담시경에서 설마 신고도 없었는데(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트럭의 움직임을 좇을 일은 만무했다.
“그 무덤이 지금 박쥐의 서식지가 된 거 알아? 거기 출입하던 어떤 사람이 물린 거 같다면서 징징 짜더라고.”
산책을 나간 길에 칼에게 부탁해서 그와 함께 확인한 결과였다.
“그래서 브루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감명 받았다고 박수라도 쳐줘?”
“와, 박수 쳐달라면 쳐줄 거야?”
기괴하게 비틀어 웃으면서 짓씹어 뱉듯 말하는 토마스에게 브루스가 호들갑을 떨며 합장한 손을 제 입 위에 붙였다.
“넌 죽어도 모든 걸 발톱으로 움켜쥘 수 없을 거야. 기어코 몇몇은 네 손아귀에서 벗어날 테고 넌 그때마다 미쳐 돌아가시겠지.”
손 뒤에서 브루스는 제 기억 속에 있던 토마스의 미소를 그대로 재연해 보였다.
“어쩌니 토미.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애송이라 정말 유감이야.”
브루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브루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마스가 주먹을 휘둘러 브루스의 뺨을 내려쳤다. 온힘을 다해 휘둘러진 주먹에 브루스가 그만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런 브루스에게 토마스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계속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다 토마스가 브루스의 목을 조를 듯이 두 손으로 아이의 가는 목을 내리눌렀다.
“쥐새끼 같은 게...”
토마스가 잇새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브루스가 컥 하고 밭은 숨을 뱉었다.
“지금 네가 그 주둥이를 나불거릴 수 있는 게 누구 덕인 줄 알아? 너 같이 성가신 꼬맹이를 죽이지 않은 게 누군지 아냐고. 그래, 거 참 대단한 걸 알아냈구나. 브루스. 하지만 그게 뭐? 멍청한 놈. 그래봐야 넌 무일푼의 고아야. 네가 그나마 쥐고 있던 쓸 만한 무기는 네 손으로 내쳐버렸지. 넌 내가 내다버리면 제대로 갈 곳도 없는 팔푼이라고.”
기도가 위험할 정도로 좁아지자 브루스의 시야가 잠깐 핑 돌았다. 하지만 브루스는 냉랭하게 제게 악을 퍼붓는 토마스를 보았다. 고작 이런 애가 상대해주는 게 좋아서 이 사달을 만들다니. 브루스는 마음 한 구석에 끈덕지게 남았던 미련 하나를 털어내며 제 스스로를 힐난했다. 브루스는 주머니에 담아둔 칼의 시계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토마스의 턱을 힘껏 퍽하고 쳐 날렸다. 그리고 콰쾅! 동시에 둥지의 벽이 부서졌다.
“브루스!”
바깥 공기가 모든 것이 정체해있던 둥지 안을 빠르게 휘저었다. 다급하게 벽을 뚫고 들어온 칼은 차림새가 몹시 엉망이었다. 옷 여기저기가 칼날 같은 것에 의해 찢어져있었고 잘 빗어 넘기던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헝클어져서 삐쳐있었다. 심지어 그의 코트는 소매 하나가 거의 통째로 찢겨져서 날아간 상태였다. 브루스에게 턱을 맞아 반쯤 날아간 상태인 토마스를 칼이 저 멀리로 떨어트리며 그가 브루스의 앞에 주저앉았다. 브루스가 쿨럭쿨럭 기침을 토하면서 터진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칼이 얼른 브루스를 지지해주었다.
“미안하다. 밖에서 조금 소동이 있어서...”
칼이 눈썹을 찡그리며 벌겋게 멍이 오르기 시작하는 브루스의 얼굴을 살펴보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브루스는 쓰라린 입으로도 히죽 웃으며 칼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칼이 쓴 안경도 여기저기가 금이 가있었다. 그래도 일단 칼 본인은 상처하나 없이 멀쩡했다. 외계인이라 다행이야. 브루스가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어차피 칼에게 이런 소동은 오늘로 마지막일 테니까.
“돈은?”
“전부 태워버렸단다.”
“그래.”
브루스가 토마스에게 주먹을 날린 탓에 손등에 뼈가 도드라진 쪽이 까져서 쓰렸지만 저와 키를 맞춘 칼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칼의 머리가 더 심하게 엉망이 되었지만 칼은 깨진 안경 너머에서 웃고만 있었다.
“전통 깊은 조직은 이래서 좋아. 관습을 고집스럽게 지키거든.”
브루스가 하하 웃으면서 다시 반듯한 자세로 서서 제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토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토마스는 독기 서린 눈으로 그런 브루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반은 도박이었어. 네 정체를 알아내는 나를 잡는 데 주력할지, 아니면 나대신 네 소중한 역할 하나를 엉망으로 만들 칼을 잡을지 말이야.”
“건방떨지 마, 브루스. 네가 이런다고 뭔가가 달라질 거 같아? 이제 넌 죽은 목숨이야. 외계인,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경찰에게나 넘기려고 이런 거 같아? 너야말로 법정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게 좋을걸? 세탁이 끝나지 않은 돈들이 다 타버렸거든.”
그러고 보니 법정이니 뭐니 하는 그런 사람들은 꼭 실패를 싫어하더라고, 너처럼 말이야. 브루스가 차갑게 웃었다.
“탈론들도 오늘은 더 이상 찾아오지 못할 거다.”
토마스가 으득 주먹을 쥐었다. 애초에 브루스에 위험이 생길 즘이면 칼이 어디에 있던 이 곳으로 달려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부릴 수 있는 탈론 전부를 저택으로 불러들였던 건 토마스였다. 효과적으로는 당국에 신고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단 붙잡고 나서 며칠 부엉이 법정에서 굴리고 나면 괜찮을 전력이 될 것 같아 짜놓은 수였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지금 당장 사용할 말이 없어졌다. 단 하나를 빼면.
“그딴 병정 몇이 어쨌다는 거죠?”
“윽!”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브루스가 제 몸통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다급하게 숨을 마신 브루스가 급하게 기침을 토하자 피가 섞여난 타액이 뱉어졌다. 경보가 전부 해제되어버린 저택의 시스템을 원상복귀 시키고 벌여진 사태들에 미봉책을 처방한 뒤 알프레드는 서둘러 이 둥지로 올라왔다. 사실 모든 문제를 처리하지도 못했다. 그는 매우 드물게 차림새가 단정하지 못했다.
“제가 항상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요?”
집사가 장갑 낀 손으로 리모컨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토마스가 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칼은 문득 찾아든 데자뷰에 얼굴이 창백해져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브루스를 투시했다. 그리고 위 유문부에 조금 커다란 강낭콩만한 크기의 장치가 부착된 것을 보았다. 장치에서 흘러나온 듯한 전류가 아이의 위를 손상시키고, 더불어 불수의근의 움직임을 망가뜨려놓았다. 조금씩 혈액이 내부로 유출되는 것이 보였다.
“허튼 짓을 하면 목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알프레드가 덤덤하게 일렀다. 브루스를 미끼로 칼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생각한 모양이었다. 납까지 대서 외부와 내부의 전파의 교란과 쓸데없는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둥지는 굳이 그가 이곳까지 리모컨을 들고 오지 않으면 브루스의 위에 장착된 장치를 작동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사실을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하는 게 칼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종종 사람들은, 사실 칼 스스로 조차도 슈퍼맨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꽤 한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고는 했다. 칼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었다. 칼의 눈이 붉게 끓어올랐다. 시뻘건 시선이 똑바르게 긴 궤적을 그리며 집사의 오른손에 닿았고 그의 손과 리모컨을 통째 태워버렸다. 집사는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켰지만 무릎만이 굽어졌을 뿐 그 외의 반응은 없었다. 칼이 식은땀을 흘리며 작게 경련하는 브루스의 몸을 조심히 안아 올렸다.
“만일의 일이 생기면”
칼은 이를 갈며 뒷말을 뱉었다.
“너도 네 주인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외계인은 빠르게 부엉이의 둥지를 떠나갔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한순간에 손이 타 없어진 고통에 주저앉았던 집사가 시근시근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켰다.
“제가... 브루스를 죽여야한다고 했었지요, 토마스 도련님?”
책망보다도 한숨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답하지 않고 어둠이 차오르기 시작한 허공만을 노려보았다.
빨리, 더 빨리. 칼은 브루스를 온몸으로 감싸 안고 공중을 날았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신음처럼 이어지며 칼은 계속해서 비행속도를 높였지만 여전히 시원치 않은 빠르기였다. 그리고 1분이 조금 덜 된 때에야 비로소 선체 내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우선 칼은 외부에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을, 전파를 포함한 어떠한 파장이나 입자 전부를 차단했다. 그리고 결코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응급챔버를 가동시켰다. 챔버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완충액의 조성 퍼센티지를 확인하며 칼은 초조하게 입술 안쪽을 씹었다.
“브루스, 브루스? 조금만 참으렴.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칼은 금방이라도 브루스의 위벽에 파묻힌 장치가 아이의 장기를 손상시키고 결국은 그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닐까 무서워졌다. 마치, 자신의 앞에서 산산이 터져서 죽었던 그처럼. 혹시라도 여분의 리모컨을 통해 장치에 신호를 전달할까봐 확신할 수 없어서 메트로폴리스는커녕, 이 지구의 병원에는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칼은 수술을 집도하고 후에 브루스를 돌볼 이 지구의 사람들을 믿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칼은 제가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을 떠올렸다. 늘 그 궤도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언제가의 미래를 기약하던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향할 지구. 바로 그 자신이 속해있던 지구였다.
칼은 초조함을 대신해서 선내의 모든 기기들을 작동시키며 시간을 견뎌냈다. 혹시 자꾸 움직이면 브루스에게 해가될까? 하지만 내려놓았다가 아이가 차갑게 식어버리면? 칼은 자신이 무어를 잘못했는가를 생각했다. 까맣게 달려드는 탈론의 무리를 죽이지 않으려고 쓸데없이 오랫동안 시간을 끌지 말았어야했다. 괜한 메시지와 함께 크라임앨리의 지하도를 인명피해가 없을 타이밍에 부수며 경찰이 원인규명을 하기 위해 싫어도 그곳을 재조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메이저부터 마이너까지 온갖 언론사를 들쑤셔서 익명으로 칼럼 따위나 퍼다 나른 게 잘못이었다. 브루스의 말을 듣고 아이의 곁을 떠나는 게 아니었다. 브루스가 건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의심 없이 살펴보지 않은 게 문제다. 브루스가 돌아가겠다고 할 때 아이가 충분히 칼을 택해도 된다고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도 같잖게 꼴에 어울리지도 않는 양보를 했던 제 무름이 실수였다. 왜 이렇게 모든 게 바보 같은 결말로만 치닫는지 칼은 화가 났지만 닥닥 떨리는 이를 사리문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브루스. 죽... 잠들면 안 된다. 눈 뜨고 있으렴. 미안, 내가 미안해. 얘야 제발, 브루스...”
이제 조금 있으면 완충액이 완성된다. 칼의 지구로 갈 때 브루스를 이 챔버 안에 재워두면 웜홀을 통과할 때 발생할 충격은 아이의 몸에 어떤 지장도 주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길어봐야 15분. 칼이 이 비행만을 위해 남겨놓은 에너지하고도 여분의 에너지가 있으니 금방이면 된다. 아직 그렇게 까지 멀리 온건 아니니까 괜찮아. 아니, 좀 더 빠른 길은 없나? 칼의 시선이 브루스, 응급챔버의 상태를 표시한 패널, 우주선의 경로 설정이 표시된 모니터로 계속해서 이동하며 안정될 줄 모르고 헤맸다. 브루스가 겨우 뜨고 있는 눈으로 그런 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
아이가 갈라진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다 쿨럭하고 피 섞인 기침이 나왔다. 토마스에게 맞은 부위가 퍼렇고 검게 변하고 있었다. 칼은 제가 피를 토한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칼은 브루스를 내려놓지도, 그렇다고 괜찮다고 다독이지도 못하고 그저 품에만 안은 채로 서성였다.
“걱정 마.”
위를 차가운 손이 몸통을 관통하고 들어와 그대로 움켜쥐는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지만 브루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프기는 정말 아픈데, 브루스는 왜일까 겁이 나지 않았다. 또 제법 확신하고 있었다.
“나 안 죽어.”
브루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울컥하고 다시금 통증이 치밀어 기침을 뱉느라 금방 무너져버린 웃음이었지만 분명 브루스는 웃었다. 칼은 그것을 똑똑히 보고 고개를 주억이다 기어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브루스가 칼의 품으로 더 제 머리를 묻었다. 자신과 별로 크게 다를 것 없는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응급챔버에 완충액이 전부 충전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다 괜찮을 거야.”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브루스를 포근한 무언가가 감쌌다. 브루스가 정신을 잃기 마지막에 칼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브루스는 그게 자신이 한 말이었다고 착각했다. 아이에게 어둠이 찾아들고, 우주선은 지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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