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별 이후 + 외전1 이전의 이야기 입니다.
브루스는 도서관 열람실 내에 볕이 포근한 자리에 앉아 펜대를 돌리고 있었다. 교양교과 시간에 과제로 받은 ‘레드선 시대가 가능했던 이유’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 중이던 브루스는 한참 도서관의 책상마다 자료 검색을 위해 비치된 컴퓨터의 터치스크린을 훑다가 내리 쬔 햇빛 속에서 떠다니는 먼지들을 하나하나 펜 끝으로 건들었다.
주제 자체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레드선 시대, 여기 지구가 소련을 주축으로 체제를 편성했을 적의 이야기는 크게 든 작게 든 브루스를 싱숭생숭하게 했다. 그건 브루스가 이 먼 역사의 유물이자 상흔과 같은 인물로 인해 어린 시절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그에게 브루스가 꽤나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거진 8년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 그런 마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도 그랬고, 그가 현재 브루스의 동거인이기 때문에도 그랬다. 칼은... ‘적당히’를 잘 모르는 것 같단 말이야. 톡톡 건들던 빛 먼지 하나를 저 멀리로 튕겨내며 브루스는 눈앞에 펼쳐진 어느 역사가의 기록을 보았다. 사실 칼이 가지고 있는 ‘적당히’라는 기준은 이 지구의 일반사람들이 가진 그것과 같아지기에 조정 범위가 너무나도 넓어서 그가 인류와 발을 맞추어 가기란, 특히 슈퍼맨이라는 이름 위에 거의 신격화 되다시피 하던 세상에서는 더더욱, 많은 노력을 요하는 것이었지만 여하튼 로마에 온 이상 존재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하는 법이기에 이나저나 칼이 지독하게 미숙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뒷감당은 어쩌려고 슈퍼맨을 단순한 자원봉사자가 아닌 한 체제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서 추앙할 수 있는 거지? 단 한 사람의 철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던 이유가 뭐지? 애초에 그런 철인이 실제로 존재할 수나 있는 걸까? 추구하는 경제 체제가 달라 처음부터 각을 세웠던 미국과 다르게 그가 속해있던 소련에서 슈퍼맨을 슈퍼맨으로 만든 것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평생의 권력을 거머쥐려던 상류층에서 제 편이 가진 절대적인 힘에 안도하고 숭배마저 하던 보통의 사람들 전부. 그들 모두의 소박한 바람부터 시작해서 진득한 욕망까지 온갖 것들이 뭉쳐서 붉은 태양은 떠올랐고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실은 그는 결국은 스스로 구르고 굴러서 산화하며 저물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무엇보다 레드선은 그 출발선부터 스탈린과 그 측근들의 야욕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이런 지극히 사적인 욕망의 발로가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성공을 안기리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스스로가 필요하다면 가족이라고 이름붙인 사람에게도 총부리를 겨누고, 위에 전기폭탄을 심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였다. 그런 본성을 스스로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하물며 나라의, 세계의 운명을 단 하나의 지도자에게 쥐어줄 수 있는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이 가진 의심과 그를 기반으로 한 견제는 분명 합리적인 미덕이었을 텐데. 제 아무리 윤리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정의를 가치로 내세우던 사람도 제 손에 거대한 힘이 들어가고 주변의 잡음이 멎는 순간 그 힘은 엇나갈 가능성으로 무궁무진하다. 하물며 슈퍼맨이다. 인간사의 깊은 고뇌를 알기 전 권력의 뒷받침을 위한 세뇌교육을 바탕으로 자라난 괴력의 외계인이 벌인 일이 과연 단순히 한 존재의 과오였을까.
어떠한 굶주림이 지배하는 세계는 자연적 힘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힘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체제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세계가 된다. 레드선 시대가 가능했고, 또한 실패한 이유는 같은 것이라고 브루스는 생각했다. 거기다 외계에서 유래한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다면 그 순간에 복잡하고 어려운 의심을 잊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눈앞의 외계의 존재에 슈퍼맨이란 명함을 안기고 안주해서 믿어버리면 그만큼 속편한 일이 어디 있을까. 만약의 경우에는 속았다, 한 마디면 모든 책임은 자신의 손을 떠나게 된다. 브루스는 새삼 여러 면에서 보았을 때 자신이 칼과 같은 지구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에 조금 감사했다.
브루스는 모니터에 손을 뻗어 화면을 다음 페이지, 또 다음 페이지로 넘긴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칼에게 묻는 것만큼 생생한 것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관점에 있어서는 객관성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칼의 목소리로 치환되어 듣는 역사는 거기에 브루스의 감정이 곧잘 뒤섞여 지독히 낭만적인 서사가 되어버린다. 브루스가 굳이 이 수업을 듣기로 결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칼을 좋아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였다. 혹시 만약의 일이 생겨서 지금에라도 칼이 과거의 일로 인해 감옥을 가게 된다면 옥바라지쯤이야 평생정도 할 수 있지만,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면 브루스는 이 지구에서 칼을 반드시 빼돌리고 말 것이다. 어차피 지구야 이곳이든 저곳이든 생활환경이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닐 테니까. 이쯤의 선을 브루스는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한참 무심하게 화면을 넘기던 브루스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브루스는 눈을 깜빡이며 자기 앞에 떠오른 한 신문 자료를 멀뚱히 바라본다. 브루스는 검지와 엄지로 신문기사 이미지를 확대시켰다. 러시아어로 된 아주, 아주 오래된 흑백신문이었다.
“우와...”
저도 모르게 브루스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순간 귀에 들린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목을 움츠린 브루스는 좌우를 급히 살핀 뒤 입을 꼭 다물었다.
‘은둔의 테미스키라, 소비에트의 오른편에 서는가’라는 제목을 확인한 브루스는 그 아래 커다랗게 실린 춤을 추는 중인 남녀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았다. 서로를 마주한 채 은은하게 웃고 있는 두 초인은 주변의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홀연히 당당해보였다. 여신과 구원자라 불리는 외계의 남자. 기사 자체를 뜯어 읽어보면 슈퍼맨의 날을 기념하는 파티에 참석한 테미스키라는 결국 중립국임을 밝히는 입장이었지만 이 기사를 접한 이라면 누구라도 둘의 사진을 본 순간 그런 그들의 입장은 지극히 외교적인 화술에 불과하다고 으레 짐작할 것이 뻔했다. 브루스가 눈으로 보는 사진은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기술적으로도 요즘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조잡해서 화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있는 두 사람이 브루스가 알고 있는 지금의 그들보다도 훨씬 젊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단지 얼굴과 그들이 두르는 아우라 만으로도 브루스는 이들이 당시의 세계의 주역이었음을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고작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실제 이들을 눈앞에 뒀던 이들은 어땠을까. 이쯤이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숭배의 문제였겠는걸. 브루스는 내심 감탄하면서 리포트 작성에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신문 자료를 자신의 태블릿에 다운로드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은 이 시대 얘기는 정말 싫어하시던데... 칼도 숨기려 드는 건 아니지만 크게 달가워하지는 않았다.(정확히는 못 견디도록 부끄러워한다는 게 더 맞는 것 같지만) 뭐, 후에 칼을 약 올릴 때라도 쓰면 될 소재니까. 브루스는 괜히 자기 혼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리포트를 도서관에서 다 끝내는 편이 좋았을까... 브루스는 도통 끝나지 않는 과제에 혀를 차며 다시 다음 자료를 뒤적였다. 레드선 시대가 가능했던 이유, 라고 하면 마치 그 시대가 특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브루스는 그게 썩 와 닿지 않았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끝이 있을까? 타자를 누르던 손가락을 멈춘 브루스는 잠시 자신이 쓴 활자를 몇 번이고 되짚으며 브루스는 멍하니 생각한다. 후우, 후우.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작게 물어뜯던 브루스는 문득 머릿속에 새소리를 듣고 빠르게 자신이 속한 현실로 돌아온다. 이념의 껍질을 뒤집어 쓴 소련 내의 권력욕과 레드선 이전의 사람들과 이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된 열망의 다름으로 인해 발생한 시대의 온도차를 한참 논한 뒤 렉스 루터의 당선 이후 지구의 모습과 그의 방향성에 대해서 쓰던 브루스는 서둘러 추가된 문장을 지웠다. 이 부분은 인류사에 내재된 오류로 축약하고 레드선 이외의 시대에 대해 논한 주제에서 엇나간 부분은 제거했다. 브루스는 문단들 몇몇을 압축했다.
그나저나 분량도 분량이지만... 하기 싫어, 과제. 으으, 한참 타자를 치던 브루스가 어깨를 축 늘이며 고개를 책상 위에 묻었다. 옆에 둔 태블릿에 다운 받아둔 자료들을 의미 없이 시큰둥한 눈길로 훑어보다 브루스가 신문의 캡처 화면, 왈츠를 추는 칼과 스승의 모습이 실린 기사에서 손을 멈춘다. 브루스는 한동안 그것을 보다 “흠...”하고 엎드린 채로 조금 웃으면서 다시 감탄한다. 뭔가 믿어지지 않는 기분이다. 지금 사진 속에서 말끔한 소련의 제복을 입고 있는 칼은 스몰빌의 정비소에서 헐렁한 체크무늬 셔츠에 기름 때 묻은 목장갑을 끼고 농기구의 기능을 지나치게 보강하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기술과 최대한의 정성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다이애나는 브루스의 몇 번의 부탁으로 인해 결국 한정된 장소에서나마 정말 전사로서 싸우는 법을 그에게 가르쳐주고 있으며(처음 다이애나에게 부탁하러 갔을 때는 브루스의 존재가 파라다이스 섬에 닿은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기 때문에 브루스는 거의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명예교수로서 대학교 내의 학생들의 멘토가 되어주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며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두르고 자신들만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커다란 세상 속에 녹아들듯 속해있는 그들에 대해 브루스는 생각해보았다. 그러다보니 레드선 시대에 보이는 그들의 반응도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어서 브루스는 다시 조금 웃는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스승님도 칼도 좀 더 서로 달가워해도 괜찮을 텐데. 브루스는 얼마 전 칼이 스승과 불같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이유는 다이애나가 브루스와 겨루게 한 전사가 검을 놓치고 쓰러진 브루스에게 그대로 칼을 겨누고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막 브루스를 마중하기 위해 도착했던 칼은 그 장면을 보고(그날은 노동절로 정비소가 쉬는 날이라 칼의 마중이 평소보다 훨씬 빨랐다.) 주저 없이 대련을 막아섰다. 미리 준비해두고 있던 쇠줄로 제 목으로 달려드는 칼날을 막아낼 태세를 취하고 있던 브루스조차도 칼의 등장에는 아연하고 말았다. 그리고... 낮게 목소리를 깔기 시작한 칼도 칼이었지만 스승님이 정말 무서웠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좀 스승님을 믿어도 좋을 텐데. 브루스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 눈을 뜨니 다시 태블릿 화면 가득 떠오른 둘의 모습이 보였다. 믿어도... 칼의 어깨에 다정하게 얹어진 다이애나의 손이나, 스승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에스코트하는 칼의 팔이. ...좋을 텐데... 아마도.
브루스가 답싹 상체를 일으켰다. 뭐지, 지금 굉장히 기분이 답답해. 과제 때문인가? 브루스는 자기 눈앞 컴퓨터 화면에서 벌써 15페이지에 달하고 있는 리포트를 쏘아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면 춤... 춤 때문일지도. 브루스가 팔을 쭉 뻗어 길게 기지개를 켠 뒤 가볍게 손목을 털며 목을 스트레칭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한참 전이 되어버린 옛날. 브루스가 자신의 지구에서 웨인저택의 막내아들로서 지냈던 적에 브루스도 사교댄스를 배운 적이 있었다. 웨인으로서의 허영심만큼은 충만하던 부모님은 토마스와 브루스에게 상류사회 예절에 필요한 덕목이라면 빠삭하게 익히도록 교육시켰었고 토마스 역시도 그런 격식에서 뒤떨어지는 것을 결벽증적으로 싫어해서 브루스도 설게나마 익혔던 것이었다. 엄청나게 지루하고,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인데다 이런 게 뭐가 재밌다고 배우는 지 브루스는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저절로 무성의하게 박자를 밟았고 그 때문에 레슨 때마다 깐깐한 교사에게 가느다란 회초리로 손등을 맞곤 했다.
브루스는 한참 이어폰을 통해 듣고 있던 음악을 클래식으로 바꾸고 먼 기억을 더듬어 자세를 잡아보았다. 분명 팔은 이쯤에 두고, 시선은 바르게, 발사이의 간격은 어깨너비를 넘지 않게. 이렇게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희미한 기억을 토대로 스텝을 밟으면서 브루스는 허공에 있는 가상의 인물과 왈츠를 밟았다. 그러다 한 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돌린 순간.
“뭐, 뭐야?!”
브루스가 깜짝 놀라 얼른 귀에 꼽은 이어폰을 빼며 새된 소리로 자신의 방에 들어온 칼에게 외쳤다. 다 마른 빨래를 잘 개어서 가지고 온 칼도 놀랐는지 두세 번 눈을 깜빡이다 곧 빙긋 웃었다. 브루스의 얼굴로 홧홧한 열기가 올랐다.
“노크했는데... 듣지 못했구나?”
음악 너무 크게 들으면 귀 상한다. 다정하게 충고하면서 칼은 브루스의 옷장에 가지고온 옷들을 넣었다. 정말로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의 브루스는 자신의 방문을 잠그거나 아주 집을 나가곤 했으므로 칼이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게 불쾌한 건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민망했다.
“갑자기 춤?”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묻자 브루스는 도저히 지금의 대화 주제를 견딜 수가 없어서 급한 대로 불쑥 책상 위에 두었던 태블릿을 잡고 칼의 코앞에 기계의 화면을 들이밀었다. 브루스가 혈색이 붉게 도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키며 뜬금없이 물었다.
“칼. 이 제복 아직 가지고 있어?”
브루스의 손끝에 걸린 흑백사진 속의 낡은 인물을 둥근 안경 너머로 한참 살펴보던 칼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없지. 내가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 없잖니.”
저런 오래되고 낡아빠진... 칼은 뒤에 따라붙는 자신의 감상을 입속으로 삭이며 브루스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조심히 받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브루스에 의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사진 속의 인물이 자기 자신이었는지조차도 신경에 두지 않고 넘길 참이었다.
칼의 행동을 지켜보던 브루스는 속으로 한숨을 쉰다. 일단 대화 주제를 돌린 건 좋은데... 브루스는 그러고 보면 칼의 과거에 대해서 그의 입을 빌린 언어의 단편이나 역사서에 쓰인 몇몇 평론가적인 문장과 그와 더불어 실린 사료로 밖에는 파악하지 못했다. 브루스에게 있어 유의미한 과거는 그 시작부터 칼이 연관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도. 물론 칼이 그 자신의 옛 행적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나 감추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처럼 솔직하면서도 베일에 싸여있을 수 있다는 건 어떤 조화일까 싶었다. 브루스는 이래저래 칼은 모순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춤이라...”
“응?”
한참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브루스가 칼의 낮은 목소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칼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브루스에게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브루스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자 칼이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고 브루스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얼결에 브루스의 팔도 그와 같은 자세를 잡았다. 자연스레 둘은 서로를 마주한 채로 춤을 출 자세가 되었다. 브루스가 당황해서 말했다.
“나 대충 배워서 잘 기억 안 나.”
칼은 눈에 잡힌 주름을 좀 더 깊이 하면서 조용히 발을 움직인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칼이 경쾌한 스타카토처럼 숫자를 읊었고 그 박자에 맞춰 두 사람의 발이 잘 닦인 나무 바닥 위를 움직이며 타박타박 고즈넉한 소음을 만든다. 시선을 바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브루스는 칼의 발을 살피느라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렇게 한참 칼과 자신이 만드는 모양새를 살펴보다가 브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면 서로의 눈에 바로 시선이 마주 닿을까 궁금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둘의 시선은 거의 비슷한 선상에 있었다.
“뭐야, 이거 순 엉터리...”
브루스가 자신의 어렴풋한 기억 속 동작과는 전혀 맞지 않은 그저 박자만 정확할 뿐인 춤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야유했다. 자기 좋을 대로 동작을 지어내던 칼은 브루스가 콕 집어 말하자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사실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한단다.”
너무 오래됐거든. 칼이 속삭이듯 말을 이으면 흥하고 콧방귀 친 브루스가 이번에는 스스로 다음 동작을 이끌었다 칼이 조용히 웃으며 그에 따라 준 다음 브루스가 웃는 얼굴이 되었을 때쯤에 조심히 거리를 벌리며 떨어졌다. 브루스도 그것을 신호로 춤을 멈추었다. 그리고 둘의 손끝만이 이어져 있을 때 칼이 허리를 숙이며 다정히 잡고 있던 브루스의 손을 살짝 들어 그의 손끝에 닿을 동 말 동한 거리에서 쪽 하고 입맞춤을 남긴 다음 그를 놓아주었다. 그 손을 자신에게 되돌린 뒤 잠깐 살펴본 브루스가 뚱하게 말했다.
“칼. 가끔 되게 썰렁한 거 알아?”
제 귀가 온통 발갛게 된 것도 모르고 힐난하는 아이를 보며 칼이 장난기 서린 눈웃음으로 마주해주었다. 안경알 너머에 있는 바다가 경쾌하게 반짝였다. 못 말려, 정말... 브루스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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