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선 이후의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의 어린 브루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만난다면의 이야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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웡웡, 막 와인 반잔을 비우고 침실로 향하던 로이스는 거실쯤에서 행크가 짖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 얌전하고 순하던 행크가 놀란 듯, 위협하듯 목청을 높이자 로이스는 걸음을 돌려 행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집안에서 문제가 생길만한 게 있나? 로이스가 생각하다가, 어쩌면 바닥에 충전 중이던 오래된 로봇청소기가 제멋대로 움직이기라도 했나보다 하고 추측했다.
“왜 그러니, 행—”
로이스가 바짝 경계하는 자세로 엎드린 채 짖고 있는 개의 뒤통수를 보며 말하다 우뚝 멈추었다. 테라스와 이어진 거실의 유리 너머의 집 정원 가운데에 한가득 그림자를 드리운 무언가가 소리도 없이 있었다. 추정해보건대 비행체인 것 같았다. 로이스는 나이트가운을 굳게 여미며 근처 서랍에 보관해두고 있던 리볼버를 조심스럽게 챙겨들었다. 원래 총은 로이스가 아닌 남편의 것이었지만 여태까지 그녀와 함께 남아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영부인이던 로이스에게 이 정도는 최소한이라며 집 곳곳에 몇몇 보안장치들을 설치했다. 평상시에 경비원을 두라는 요구를 거절한 뒤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제안이었지만 그들의 기술을 믿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기술의 모토는 자신의 남편인 렉스가 발굴해낸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얼마나 유효한 가는 따지지 않아도 훤했다. 그럼에도 그 경보들 무엇 하나도 뻥끗 하니 울리지 않고 미확인 비행체가 로이스의 집 마당에 착륙해 있었다. 굳이 로이스의 집을 노릴 까닭은 있는가? 경보가 울리지 않은 것은 어떤 의도에서 인가? 그에게 만약 적의가 있다면 선제공격도 없이 저렇게 있을 이유가 있는가? 온갖 질문들을 머릿속에 담으며 로이스는 바깥을 향해 조심이 나아갔다. 위험 앞에서 몸을 숨기기보다 직접 마주하고 그것을 파헤치려 드는 것은 과거 기자 생활을 하던 로이스의 버릇이자 습성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금속이 대기에 긁혀 약간 시큼한 탄 냄새가 난다. 그러던 중 로이스 앞에 무언가가 훅하니 날아들었다. 아니,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였다. 로이스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두 다리로 굳건하게 버티고 섰다.
“루터부인.”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파란 눈동자가 간절하게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선체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로이스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잠깐, 날아들었다고? 로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리고 아주, 아주 낡은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하나의 존재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너무나도 낯선 모습이 되어버린 슈퍼맨이, 그만큼이나 그와는 거리가 있는 말을 했다.
노년에 들어 젊었을 때처럼 세계 곳곳을 휘저으며 돌아다니기는 녹록치 않게 된 로이스는 과거에는 외부와의 투쟁에 헌신하던 이들을 지켜보았다면 지금은 자신과의 싸움에 하루를 걸고 있는 이들을 격려했다. 렉스 메디컬 센터는 아직 그 치료법을 찾지 못한 병과 치열하게 하루를 겨루고 있는 환자와 그들을 돕고자하는 의료진과 그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 헌신하는 학생으로 붐비었다. 명실상부한 국립의료원이면서도 한 개인의 이름을 딴 이 메디컬 센터의 간판이 로이스는 조금 거북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것을 그가 온당 받아야할 트로피로 여겼다. 부드러운 조명으로 은은하게 밝은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도중에 몇몇 얼굴을 아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로이스는 그녀가 목적으로 한 개인병실에 다다랐다. 로이스는 아주 작게, 그녀 자신도 부딪힌 손마디 끝의 감각으로만 겨우 알 수 있을 만큼 작게 노크했다. 얼마 후 남자가 나왔다.
“문병 와 주신건가요?”
지지난밤에 보았을 때는 옷이 이곳저곳 찢겨져나가고 머리카락은 산발이었던 남자는 이제 수수하지만 단정한 양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여느 성실한 회사원처럼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둥그런 안경까지도 쓰고 있었다. 제복도 아니고, 이미지 선전을 위해 연출된 평상복도 아니었으며, 그의 붉은 망토도 두르지 않은 슈퍼맨은 정말이지 낯설었고 평범했다. 그 탓에 로이스는 자꾸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 밤의 소동을 비추어보면 이 남자는 분명 슈퍼맨이었다. 로이스는 의심을 다잡으며 소곤소곤 물었다.
“아이의 상태는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내상도 말끔하게 처치되었고요.”
남자는 도중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로이스는 저가 사온 병문안 선물을 내밀었다. 깔끔한 포장지 안에는 아이가 의식을 회복한 뒤 병실 침대 위에서라도 가볍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입체퍼즐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로이스에게 들어올 것을 권하듯 살짝 발을 뒤로 물렸다. 로이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는 중인 거 같은데 소란을 부리고 싶지 않아요.”
로이스가 조용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세파가 그녀의 얼굴 위에 그대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진실을 좇는 성정이 변함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로이스가 말을 이었다.
“잠깐 산책이라도 하겠어요? 병원 내 산책길이지만 꽤 잘 꾸며놓았거든요.”
잠시 로이스를 지켜보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손에서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아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다가가 그 옆 탁상에 선물을 올려두고 몇 번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리를 떠나기 전 로이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가 아이에게 “잠깐 다녀오마.”라고 인사했던 것 같다.
“어쩌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입원하게 된 거죠?”
간호인과 환자들로 소소하게 붐비는 병원의 뜰을 지나 한적한 산책로에 다다르자 로이스가 물었다. 신원이 모호한 아이를 빠르게 수속하여 수술을 진행할 수 있게 한건 로이스였다.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가 일을 마친 후 로이스에게 연락을 하며 의아한 듯, 그리고 조금 두려운 듯 물었다. “혹시... 아직도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테러리스트라도 있는 겁니까? 당국에 보고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 연배가 꽤 있는 의사는 과거 이 세계에 있었던 사건을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나마 가지고 있었고 그때의 잔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비록 평화의 시기에 들었다고는 하나 결국 인간 사회에서 진정으로 조용할 날은 결코 찾아오지 않았고 분쟁의 씨앗은 찾으려면 그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 어쩌면 그러한 소음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평화의 증거일지도 모르고. 로이스는 적당히 일상적인 사고를 들먹이며 의사를 진정시켰다. 더불어 아이의 몸에서 나온 페이스메이커보단 거의 전기폭탄이라 칭할만한 장치가 어느 기술자가 특허를 준비 중인 기술과 연관이 깊은 모양이라고 설명하며 그에게 순수한 실수를 운운하고 함구를 부탁했다. 의사는 모든 것을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로이스 루터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녀의 요구를 신뢰했고 받아들였다.
로이스의 질문에 남자는 찡그린 얼굴로 입만 웃는 모양을 그린 채 느리게 답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당신의 부주의로 아이가 발전장치를 위에 담고 있었다고요? ...도통 당신에게는 평범한 일이 없군요.”
“원래 평범이야말로 가장 추상적이고 가상적이지 않던가요.”
남자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변명이라기 보단 한탄에 가까웠다. 잠시 둘 사이에 말이 사라졌고 그 사이로 느린 바람이 불었다. 산책로를 두르고 있는 가로수들의 나뭇잎이 공기의 움직임에 손을 흔들며 차락차락 소리를 냈다. 로이스가 또박또박 말을 했다.
“당신, 여태 살아있었군요.”
슈퍼맨이 걸음을 멈추었고 로이스도 그와 맞춰 발을 세웠다. 이미 온 머리가 하얗게 된 자신과는 다르게 자신의 동년배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옆머리만 살짝 희끗한 채로 한창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습 하고 깊이 공기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가슴 깊이 숨을 집어넣은 남자는 천천히 그것을 뱉어내며 얘기했다.
“부인께선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로이스면 됩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빨간 망토는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하하, 남자가 짧게 기계적으로 웃는다.
“워낙 알록달록한 세상 아닙니까.”
“이 총천연색의 세상이 오기 전 당신이 세계에 드리웠었고요.”
로이스가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로이스의 목소리는 음량도 크지 않았고, 어조도 지극히 차분했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 특유의 힘이 실려 있었다. 남자는 그런 로이스를 그저 순종적으로 바라만 보았다.
“브레이니악과의 싸움에서 당신은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으로 되었어요. 우리에게는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초리 아래에서 떨던 이들, 당신에 의해 뇌에서 생각을 적출당한 이들, 당신과의 싸움에서 스러진 이들... 모두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하지만 슈퍼맨, 당신은 없었죠. 인류는 결국 죽음 앞에서 관대했고 우리는 기꺼이 당신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당신이 있어요.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하죠? 당신의 생존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하나요.”
한참 풀의 노래만이 무성한 뒤, 조금씩 조금씩 아주 오래 돼 버린 그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슈퍼맨은 죽었습니다.”
남자는 한 박자 말을 멈추고, 자신이 하는 말을 자신의 가슴 깊숙이에 담으며 이어갔다.
“그 독재자는 폭발에 휘말려 마지막에나마 영예롭게 제 몫을 해냈습니다. 앞으로의 언제라도 그는 다시 이곳에 오지 않아요. 이 세계에는 슈퍼맨이 없습니다. 필요하지도 않고요. 저는 그게 옳다고 믿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아요.”
“그럼 당신은 침묵할 생각이로군요. 법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죽음 뒤에 은닉해서 이제까지처럼 몸을 감출 셈이에요.”
“로이스 씨, 저는...”
“...그렇게 당신이 줄곧, 숨소리 하나 없이 사라진 덕에 내 남편은 존경받는 렉스 루터로서 눈을 감을 수 있었고요.”
로이스는 렉스의 마지막 인터뷰를 떠올렸다. 얼굴에 서린 주름 하나하나에 자부심을 가득 안고 자신의 ‘큰 업적’에 대해 답하며 전례 없는 득표율을 자랑하던 전 대통령은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한 사람이 저를 위대하다 만족하며 죽음에 잠기던,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가장 영광된 순간이었다. 로이스는 그날 자신이 느꼈던 안도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열정이 광기가 되지 않은 것에, 그의 싸움에 세계가 용인하지 않을 범위에서 세상이 휘말리지 않게 된 것에, 그리고 그가 그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눈을 감은 것에 로이스는 감사했다.
사람들은 슈퍼맨이 외계인이기 때문에 이 지구를 휘둘렀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화약고는 인간 그 자신들이었노라고 로이스는 생각했다. 누구보다 힘을 가진 자는 거만해지기 쉬웠고 결국 그 붉은 독재의 세상은 슈퍼맨과 인간의 합작품이었다. 슈퍼맨은 참으로 핑계 좋고 거대한 카무플라주였다. 그들과 같은 종족이 아니기 때문에 대립하기도 쉬웠으며 의심하기도 쉬웠다. 축제의 막이 오르듯 전쟁의 탄화대신에 폭죽이 쏘아 올라가던 하늘을 보며 로이스는 우주 어디선가 있었을 폭발을 그렸었다.
“당신은 내가 더 이상 펜을 잡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할 거예요.”
남자가 이제야 겨우 기껍게 웃었다. 두 사람은 다시 멈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남자가 불현듯 병원 건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던 남자가 급한 얼굴이 되어 양해를 구하려는 듯 로이스에게 입을 열었다. 로이스는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안부전해주세요. 다음에 다시 찾아갈 테지만. 아, 그리고 가기 전에.”
이제는 몸을 거의 완전히 튼 상태인 남자에게 로이스가 물었다.
“이제 당신을 뭐라 부르면 되나요.”
“칼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미소와 함께 자랑스럽게 답한 남자, 칼은 금방 로이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뒤에 남기는 바람이 로이스는 과거의 언젠가 겪었던 것도 같았고, 전혀 새로운 것도 같았다. 소련에서 미국까지 한달음에 날아와 어린아이와 엄마를 구하던 슈퍼맨은 여태까지도 로이스가 잊고 있지 않던 기억 중 하나였다.
“다시 봐서 반가웠어요.”
왜일까, 로이스는 가슴 한구석에 있던 이름 모를 짐을 덜어내며 미소 지었다.
아이의 손끝이 매트리스 위에서 까딱이는 소리를 들었다. 심장박동과 호흡수가 조금 상승하면서 아이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속도로 병실 앞에 도달한 칼은 급하게 몸을 멈추어 세우고 할 수 있는 온힘을 다해 침착하게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은 어떻게 망가뜨리지 않았지만 결국 브루스의 곁으로 다가가는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서 아이의 뺨에 그가 몰고 온 들뜬 공기가 간지럽게 부딪쳤다. 감긴 눈꺼풀이 몇 번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열리면서 그 뒤로 숨어있던 하늘이 드러났다. 칼이 커다랗게 미소 지었다. 아이의 눈도 그것을 분간해내고 그를 따라 호선을 그렸다. 아직은 메말라서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아이가 말했다.
“안녕, 칼.”
자신을 향해 뻗어지는 작은 손을 두 손으로 맞잡으며 칼은 몸을 구부려 그것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마치 감사의 기도를 올리듯, 칼이 아이의 인사에 답했다.
“안녕, 브루스.”
“춥지 않니?”
“괜찮아.”
눈으로 푹 뒤덮인 길을 걸으며 칼이 3번째로 같은 질문을 했다. 역시나 3번 같은 내용을 돌려주는 브루스의 대답은 칼이 칭칭 감아놓은 털실목도리에 막혀서 둔탁했다. 브루스는 귀까지 가리는 폭신한 빵모자에 두터운 외투까지 차려입고 있었지만 칼은 결국 제 손에 들고 있던 담요를 아이에게 둘러주면서 아이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맨 처음 칼이 저를 안아들려고 하자 브루스가 질색을 하며 선내를 뛰어다니려고 했기 때문에 식겁한 칼이 어떻게 마음을 접었구나 싶었지만, 결국 칼의 고집이 이기고만 셈이었다. 으휴, 브루스가 과장스럽게 한탄했다.
나무가 빼곡한 길을 지나 작은 공터에 들어서자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나오는 단층건물이 나타났다. 뽀득뽀득 눈 알갱이를 으깨며 현관에 다다른 칼은 가볍게 발을 털어 묻은 눈을 털어냈다. 한 손으로 아이를 받쳐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이 잠긴 문을 열어 실내로 들어섰다. 포근한 공기가 부드러운 나무냄새를 가득안고 두 사람을 반겼다. 아이가 퇴원하기 전에 미리 집에 와서 난방을 땐 덕이었다. 하지만 칼은 지금의 온도가 브루스에게 적절한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날씨가 보다 따듯한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 칼이 조심히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칼의 걱정은 브루스가 제게 둘러진 담요와 외투 등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다.
“혹시 너무 서둘러서 퇴원한건...”
“의사선생님이 몇 번이고 말했잖아. ‘아이는 괜찮습니다. 퇴원해도 좋아요.’”
브루스가 폭 한숨을 쉬며 병원에서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하던 칼에게 인내심 있게 대꾸해주던 의사의 말을 그대로 모사했다. 칼이 멋쩍게 웃으며 아이의 손에서 옷가지들을 받아들어 벽에 부착된 옷걸이에 잘 걸어놓았다.
“여긴 폐쇄된 선내가 아니라 온도가 적절한지 모르겠구나. 브루스 지금 있기 적당하니? 조금 싸늘하거나... 혹시 더우면—”
“칼.”
옷가지를 정리한 뒤에도 몇 번이고 다시 옷의 주름을 피거나 벽난로 옆에 가서 타닥타닥 불에 타는 나무들을 확인하거나 그 옆에 있는 여분의 땔감을 만지작거리거나 하면서 산만하게 움직이는 칼을 브루스가 불러 세웠다.
“진정해. 난 괜찮아.”
브루스의 말에 움직임을 멈춘 칼이 한참 뒤에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괜찮지 않단다.”
아직도 아이의 얼굴을 볼 때면 그의 옛날 속에 깊이 자리한 망령이 시니컬하게 웃어댔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았어, 잘못 행동하지 않았다고. 칼이 꿈속에서 저를 비웃는 남자에게 외쳐보았지만 그는 그래서? 하고 되물으며 비뚜름하니 웃었다. 마치 그가 다시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상에 관여한 것부터 잘못되기라도 한 듯 죄책감이 시꺼멓게 차오르고 그 버거움에 눈을 뜨면 병실에서 아이가 눈을 감고 있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브루스. 네 몸 안에서 전기가 터진 건데 괜찮을 리가 없잖니.”
“하지만 죽지 않았잖아. 알프레드도 죽일 생각이었으면 분명 단번에—”
“지금 목숨에 문제가 없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니!”
칼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자 그 성량에 오히려 자신이 놀라서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칼은 눈을 꾹 감았고, 식식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다시 차분한 얼굴이 된 칼이 입을 막던 손을 내렸다.
“...브루스, 난 네가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었어.”
말을 하는 도중에도 칼은 중간 중간 의도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죽였기 때문에 그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내가 어설프게 선을 세울 것 없이 너를 지켜봤다면 네가 네 지구를 떠나면서까지 수술을 받을 일은 없었겠지. 브루스, 난 네가 저택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어. 너도 알다시피 난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네가 그들을 쫓아내는 게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내가, 아니,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아이가 칼을 바라보았다.
“정말 칼이 모든 걸 할 수 있었어? 그럼 우리 부모님이 죽던 밤은 어때? 그때도 내 지구에 있었어? 있었으면 칼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소리도 다 들을 수 있잖아. 우리 부모님이 죽지 않을 수 있었어?”
칼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 밤에 언제쯤에 브루스의 지구를 찾아들었는지, 그가 누군가의 손에 불타버린 농장을 허망하게 바라보다 고담에 도착한 것은 언제쯤이었는지, 사건은 어느 쯤에 있었는지 등을 계산했다. 묵묵히 가라앉은 칼의 눈동자를 본 브루스가 답답한 듯 외쳤다. 브루스가 칼에게 다가가 비어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런 표정을 해... 그건 칼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었잖아! 그날 밤에 칼이 날 구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었다고. 그때도 지금도 나한테 일어난 일들의 원인은 칼이 아니었단 말이야.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따지자면 끝이 없어. 그렇게 치면 나야말로 처음부터 토마스의 말을 듣지 않았어야 했어. 멍청하게 알프레드가 내미는 약을 덥석 삼키지도 말았어야했고. 아님, 칼은 그걸 내 잘못이라고 할 거야?”
“그럴 리가 없잖니.”
“마찬가지야. 생각하지도 못한 일에 부주의한 건 잘못이 아니잖아. 잘못은 알프레드가 한 거지, 나도 아니고 칼도 아니야.”
브루스가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칼, 내가 뭐라고 했어. 날 너무 감싸고돌지 말라고 했었잖아. 칼은 내 말을 들은 거뿐이야. 그리고 칼이 내가 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도... 난 칼을 믿지 못했을 거야. 솔직히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걸! 어쩌면의 이야기는 결국 지금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일인 거라고. 칼이 택했던 모든 건 그게 칼이 답답한 사람이건 아니면 나 때문이건 간에 그때는 그럴법했던 것들이야. 그리고 난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거에 정말 만족하고 있어.”
칼은 여전히 불확실한 얼굴로 미묘한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브루스는 조금 절박하게 제가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을 입에 담았다.
“지난 얘기로 계속 기죽고 있고 싶지 않아.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잠깐 말을 멈추고 브루스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브루스에게는 이제 본인도 가늠하지 못할 기다란 시간이 앞에 텅 빈 채 남아있었다. 가능성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미궁이기도 한 시간들은 혼자가 걸어가기에는 많이 먼 거리였다.
“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타닥타닥, 거실의 벽난로에서 나무의 섬유가 불씨에 타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혼란도 자책도 분명 응당 있어야할 감정들이었지만 칼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런 감정을 겪기에는 제멋대로였고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적으로 분류하고 믿지 않았다. 정도를 조율할 필요도 없이 충분히 구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저 그러면 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결국 무엇을 만들었는가를 떠올리면 칼은 제가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괴로웠다.
“무슨 일이 일어난 후에는 너무 늦단다. 브루스... 또 네가 이런, 일을 겪게 된다면 나는... 그렇다고 너를 가둬두고 싶은 건 아니야. 나는 방관자가 되기에는 너무 너와 가까운 곳에 있고, 네 보호자가 되기에는 많이 미숙하단다. 하지만, 그런데도...”
한참 혼잣말처럼 단어를 굴리던 칼이 겨우야 땅을 이리저리 스치던 시선을 바로잡고 브루스를 향했다.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쥐며 칼이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랑 있어도 될까?”
자신감 없이 떨어지는 말에 계속 딱딱한 얼굴로 칼을 보고 있던 브루스가 서서히 피어나듯 환하게 웃음을 그렸다. 아이는 답싹 칼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아이가 즐겁게 외쳤다.
“싫어도 그래야지! 칼 때문에 이제 나도 외계인인걸!”
내가 로이스한테 날 설명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홍채에는 마치 별이 헤엄치듯 반짝였다. 칼이 조금 힘겹게 아이의 등을 감싸 마주 안았다. 타오르는 장작불의 열기는 알기 어려웠는데 지금 이 작은 아이가 따뜻하다는 건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결국 문제는 뿌리를 뽑지 못한 채 어느 날엔가 터오를 싹을 남기고 저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잡초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배워두었으면 좋았을걸... 칼이 문득 생각했다.
“널 병 안에 담지 않을 만큼은 너도 나를 도와주면 좋겠단다, 브루스.”
“칼이 그렇게 말한다면 고려해둘게. 하지만 여차하면 칼이 울면서도 날아올 거잖아? 난 그래서 조금 샘이 나. 멋지기는 하지만...”
브루스가 마지막쯤에 가서는 작게 말을 얼버무렸다. 짧게 시선을 돌렸던 아이는 다시금 칼과 눈을 마주쳤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아이가 발을 반걸음 쯤 뒤로 물린 뒤 인사했다. 칼이 아이와 눈높이를 같게 하며 다시 아이를 끌어안으며 꼭 같은 말을 속닥였다. 브루스가 마치 달래듯 칼의 등을 작게 토닥였다. 서로를 감싼 두 사람의 팔이 마치 죽 이어진 궤도와 같았다. 이 너른 세상 위에 존재는 언제고 떠돌겠으나 분명 그 자리에 있을 서로를 붙잡듯 이어져있다. 그렇게 질량을 지닌 두 물체는 인력을 지니고, 무한에 잇닿은 우주에 서로 배열되었다. 별은 그렇게 존재한다. 누군가의, 우리의 우주 안에.
-끝났습니다! 이것으로 두 남자의 바짓바람 싸움 얘기겸 철컹철컹인지 아닌지 애매한 둘의 사랑(...)의 도피 얘기가 끝이 났습니다 ٩(`・ω・´)۶
-후에 아마 브루스는 가끔씩 역사책을 손에 들고 칼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느 시대에 대해 낭독하며 칼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 거십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원래는 아무 생각 없이 제목을 붙였습니다만, 사전에 찾아보니 '떠돌이별 : 중심이 되는 별의 둘레를 각자의 궤도에 따라 돌면서, 자신은 빛을 내지 못하는 천체'로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마지막에 끌어와보아찌요. 실패했습니다.
-지금 게시된 떠돌이 별은 10월 말 후로는 보호글로 전환되고 새로 정리해서 포스타입에 유료로 발행될 수도 있습니다.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수정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이야기 흐름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겁니다. ...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써요.ㅇ<-< 유료발행을 할 경우 외전을 조금 덧붙일 생각입니다. 전체이용가예요.
-이 이야기가 괜찮은지 어떤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쓰면서 제 자신이 많이 신기했고 또 이렇게 끝을 맺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분들 모두 정말정말 감사해요.8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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