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표지는 쿠운님(@arkham_and_GCPD)께서 제작해주신 이미지입니다
1
행성의 대기를 그으며 별똥별이 떨어진다. 대륙들 중 밤이 찾아온 면에 착륙한 우주선을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렇게 남자는 조용히 지구를 찾아온다. 그리고 처음부터 없었던 양 사라질 것이다.
오랜 시간 남자가 살아온 곳에서 점잖은 코트와 흔해빠진 양복, 촌스러운 안경 뒤에 잘 다듬어진 육신을 감춘 남자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세상은 남자에게 멋대로 죽음을 부여했고 그것이 그나마 영예로운 길이었다 평가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원색의 독재자만이 낙인처럼 남았고 남자는 저를 부를 이름을 잃었다. 소중한 장난감을 다루듯 남자의 손아래서 완벽을 꿈꾸던 세계가 자유를 찾고 제 색깔로 형형색색 빛이 났다. 남자는 그것을 퍽 순순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짧은 고개 인사로 남자를 잊은 세계에 작별을 고한 뒤 남자는 중력을 딛고 하늘 너머에 펼쳐진 우주로 부유했다. 그가 직접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그의 가족이 남겨준 지식이 이 지도 없는 여정을 위한 우주선을 주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남자가 이렇게 자기기만도 없이 온전하게 제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만든 것은 처음이었다. 기름때가 묻은 손을 보며 남자는 자신이 차라리 평범한 정비공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실력은 꽤 괜찮아서 적어도 배를 곯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암흑 물질의 인력을 끊고 별의 부스러기와 쪼개지고 다시 붙는 원자들의 흐름 사이를 오가며 남자는 존재하는 만큼이나 무의미해졌다. 무한에 맞닿은 우주 속에서 상하좌우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로 남자는 유배했다. 그리고 남자는 0과 1 사이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가능성의 틈바구니에 존재하는 노란 태양의 지구를 찾았다. 우주의 차원에 걸쳐 산재한 무한의 지구들을. 역시 기왕 돌아보려면 그나마 익숙한 것이 구경하기에도 편했다.
지구는 다양하고 가지각각이었지만 그러는 동시에 많이도 닮아있었다. 예컨대 어디 하나 조용한 곳이 없다는 점이 그랬다. 남자는 무엇 하나 제 것이 없는 세계들을 상공에서 발끝 아래로 말없이 지켜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아래로 흘러가는 희와 비, 호와 오, 심지어 생과 사마저도 별스럽지 않았다. 그저 케케묵은 책에 쓰인 텍스트의 나열과도 같았다. 어떠한 판단도 책임도 없이 바라만 보는 세상에 대해 남자가 과오를 범할 일은 없었다. 그것으로 전부 괜찮다고 남자는 납득했고 홀연히 다음으로 떠나갔다.
극장이 있는 휘황찬란한 거리를 벗어나면 금방 음침한 사잇길이 나왔다. 남자의 망막에는 아직도 누추한 시골 농장을 집어삼킨 붉은 불길의 잔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남자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은 온도를 띤 불꽃은 이미 농장주민 두 사람을 휩쓴 상태였다. 싸늘하게 식은 골목에서마저 목재의 타는 냄새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재의 잔상을 잊고자 남자는 어둠 속에서 몇 번 눈을 껌뻑였다.
얼마간의 여정을 통해 익숙해진 어느 도시의 골목으로 남자는 흘러들어왔다. 그것이 좋은가 나쁜가는 둘째로 다양한 지구들 속에서도 고담은 비교적 일관성이 있는 도시였다. 지구라는 행성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것이 남자의 여정에 있는 유일한 이정표였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 독특한 도시를 꼭 한 번은 눈여겨보는 것이 그가 다른 지구에 찾아든 또 다른 자신을 찾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그가 먼 과거에 미치광이, 망령쯤으로 치부했던 이의 도시에 왜 이런 지대한 관심이 생겼는지는 이렇다 할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자신을 벌건 공간 안에서 두들겨 패던 그를 비웃고 싶었을 수도 있고, 지금에 와서는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게 된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쨌건 남자는 그저 흘러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번 역시 그러했다.
차차 어둠 속에 시야가 잠잠해지더니 이번에는 진득한 피의 냄새가 남자의 주된 신경을 이끌었다. 남자는 지상의 약 2피트 떨어진 지점까지 내려왔다. 어둠에 적응한 남자의 눈에 이제는 퍽 익숙해진 레퍼토리가 펼쳐졌다. 지저분한 골목 위에 두 남녀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이제 흐름을 멈추고 웅덩이가 된 채로 고여서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여러 번 귀동냥으로 전해들은 적 있던 이야기 속 광경이 이번 지구에서는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남자를 지상으로 이끈 것은 이미 숨이 멎은 부부가 아니었다. 남자의 감각이 틀리지 않다면 이 지구는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두근, 두근. 미약하지만 분명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가느다란 호흡이 아직까지도 어린 신체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끈질기게 이어져갔다. 남자는 이제 땅에서 불과 0.5피트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토, 미?”
가물가물 이어지는 숨소리가 고유명사를 빚어냈다. 그것은 남자의 이름이 아니었다. 남자는 말없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후우(Who), 후우 하고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이제사 한창 싹을 틔우고 있을 아이의 생명은 퍽 질긴 모양인지 저 출혈량 속에서도 용케 명줄을 부여잡고 있었다.
인기척에 반응했던 아이는 간신히 눈을 굴린 후에야 남자가 자신이 찾는 이가 아님을 알았다. 힉 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아이의 작은 흉강 안이 흐릿하게나마 소란을 부리기 시작한 것을 들었다. 맥없이 땅 위에 놓여있던 아이의 하얀 손끝이 움찔하고 떨리다가 아주 약간 그 위치를 틀었다. 남자가 유추하건데 아이는 그나마 남자 쪽과 가깝게 뻗어진 손을 제 품으로 끌어당기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런 단순한 행동조차 끝마칠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미세한 진동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마저도 지금의 움직임으로 팔 근육으로 향하는 혈류량이 늘어난 탓에 어깻죽지 아래에 난 총상에서 울컥하니 피가 뱉어져 나오고 말았다. 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깎아가면서까지 아이는 낯선 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남자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를 지금 아이의 목숨을 가장 높은 확률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정처 없는 이방인뿐이었다. 아이가 한껏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남자야말로 아이가 살 수 있는 유일하며, 현실적인 희망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찾는 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는 시력 좋은 눈으로 점차 그 빛이 명멸하는 아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전구에서 빛이 가시듯 아이의 목숨 또한 그러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목숨은 곧잘 별과 비유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아이의 목숨은 떠오르는가, 저무는가.
남자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살고 싶지 않니?”
지나치게 친절한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반경이 커져가는 핏물 위에 내려앉았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아이의 시린 눈이 허공을 헤매듯 남자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삶.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아이의 손이 다시 움찔하고 떨렸다.
“살, 고...”
끝내지 못한 말이 바닥으로 퍼졌다. 아이의 가슴이 느리게 공기를 잃으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갔다. 아이의 눈동자 끝에 고여 있던 투명한 구체가 남자의 귀에만 닿을 마찰음을 내며 파랗게 질린 작은 뺨을 기어 내려갔다. 아이는 곧 의식을 잃는다. 남자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익명으로 남겨진 남자는 줄곧 허공을 맴돌았다. 세계의 어느 힘에도 매이지 않은 남자의 무게는 어디에서건 0으로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살아 있다. 그러니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지내온 세월 전체에서 보자면 얼마 되지 않는 방랑이었지만 남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을 지나쳐왔다. 너무 많아서 이름조차 제대로 붙지 않은 별, 별, 별들을. 문득 그것의 무게가 궁금해졌다.
그 날 남자는 아주 오랜만이 중력을 따라 발을 땅 위에 붙였다.
2
검게 침잠한 의식 속에서 통증이 솟아났다. 가슴통을 움켜쥔 고통에 쫓기듯이 숨을 마시면 매운 소독약 냄새가 났다. 브루스는 새삼스런 느낌으로 눈을 떴다. 재미없는 모양의 새하얀 천장이 부옇게 펼쳐졌다. 규칙적으로 삑, 삑, 삑 하는 기계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브루스는 제가 알고 있는 온갖 명사를 뒤졌다, 여긴 병원이다. 집어삼킨 응어리를 폭하고 뱉어내면 그 무게만큼 몸은 조금 딱딱한 침대 아래로 가라앉는다.
“일어났니?”
친절한 말소리가 났다. 브루스가 알기로는 이름표가 붙지 않은 목소리였다. 다만 기억의 수면 그 가장 얕은 곳을 어렴풋이 부유하며 남자의 목소리는 브루스에게 인지되었다. 브루스는 머리를 조금 돌려 침대 옆 의자에 앉아있는 이를 보았다.
촌스러워. 브루스가 제일 처음 생각한 것이었다. 남자의 빗어 넘긴 머리카락의 옆머리는 살짝 잿빛으로 새어가고 있었다. 브루스가 아는 어른들 중에서 비교해보아도 남자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남자의 분위기가 더욱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별 이렇다 할 특징 없는 정장을 입고 조금은 낡은 듯한 얇은 코트를 걸친 남자는 옷매무새만큼이나 재미가 없었다. 거기에 둥그런 안경까지. 브루스는 아빠의 그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안경을 떠올렸다. 그나마 이 남자는 아빠보다 체격이 좋았고, 항상 수그린 듯한 느낌의 아빠와는 다르게 자세가 반듯해서 초라한 기색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촌스러웠지만. 한참 신랄하게 남자를 쪼개보던 브루스는 생각을 뚝 그쳤다.
아. 아빠. 브루스의 머릿속에서 단어의 흐름이 멈추었다.
“3일 쯤 누워있었단다. 의사 선생님께선 다행히 네가 건강한 아이라 별 문제는 없다 시더구나.”
아빠, 엄마. ...토미. 브루스의 고막에는 남자의 조근한 말소리가 닿았지만 머릿속에 자리하는 것은 탕! 탕! 탕! 하고 어거지로 공기를 가르며 터져나가던 총성이었다. 그러니까, 부모님이 쓰러졌다. 아마도, 길바닥에. 브루스는 엄마의 목에 길게 늘어져 있던 진주목걸이가 총알에 뜯어지며 하얀 구슬 구슬이 땅바닥으로 흩어지는 것을 들었다, 고 생각했다. 그 직후 브루스도 쓰러졌으니까. 빠르고 너무 뜨거워서 차가운 무언가가 살을 꿰뚫었다. 총에 맞았다. 그리고, 그리고.
아이의 눈은 불투명하게 어두운 밤의 장면, 장면을 되짚고 있었다. 브루스는 출렁거리는 기억 속에서 구역질을 뱉지 않으려 숨을 골랐다. 그런 브루스를 남자는 그저 내려 보고 있었다.
“선생님을 모셔 오마.”
그리고 남자는 반듯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은 모습으로도 커다랗다 생각 했던 남자는 일어서 있으니 브루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커다랬다. 브루스는 남자가 등지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군더더기 없는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갔다. 알프레드처럼 몸이 가벼운 것도 아닐 텐데 남자의 걸음걸이는 가뿐했다.
브루스는 혼자 남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병실에는 브루스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커튼 뒤에 있었고, 누군가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앉아서 작은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브루스는 혼자서 이렇게 신원이 불분명한 이들과 섞여 있어본 적이 없었다. 브루스의 작은 가슴이 불쑥 찾아든 불안으로 술렁였다. 누군가의 눈동자, 누군가의 사소한 움직임, 누군가의 수군거림, 누군가의 침묵. 그 모든 것의 까닭을 알 수 없어 브루스는 숨이 메였다.
그, 알프레드가 총을 쐈다. 부모님에게. 자신에게. 브루스는 어깨 아래의 살을 뚫고 근육을 찢으며 뼈를 스산하게 긁고 간 작은 탄환이 남긴 고통을 세세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토마스의, 제 손위 형제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온도가 없는 유리알 같은 시선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브루스의 위에 떨어졌다. 후우, 후우. 골목길 어딘가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토마스는 분명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브루스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형제였다. 토마스는 머리가 좋았고 영악했다. 주변에서 토마스에게 내리는 평가는 보통 칭찬, 호평 일색이었지만 토미는 이따금 못된 일들을 저질렀고 그 일들을 브루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해주었다. 브루스는 토미가 비죽 웃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사람들은 의젓하다 얘기하는 제 형이 저에게만 비밀 얘기를 해주는 것 같아서 그랬다. 이번에도 그랬다. 소곤소곤 토미는 엉뚱하다 싶을 정도로 나쁜 계획을 이야기했고 브루스는 그 내용보단 토미가 그것을 예전처럼 자신에게 이야기했다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 뿐이었다. 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브루스는 토미를 동경은 할지언정 한 번도 무서워해본 일이 없었다. 한 번도. 그 밤이 오기 전에는.
“토미.”
브루스는 신음처럼 형의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브루스는 왜 이렇게 자신의 어깻죽지가 짓눌리듯 아픈지, 숨이 버거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가도. 드물게도 외롭지 않던 날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과 영화를 본 브루스는 토미의 장난에 겁을 먹고 저의 옛날을 반성한 아빠에게서 장난감 총을 받아낸 뒤 토마스에게 실없는 장난을 걸 생각이었다. 근래에 토미는 집에 붙어 있는 날이 많으니까 10일을 조르면 하루정도는 브루스의 고집에 어울려줄 것이었다. 이렇게 총에 맞아서 생판 모르는 이들 속에 멀뚱히 누워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브루스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모로 앉았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아이의 몸은 얕게 떨리고 있었다. 집에, 가야했다. 모든 것이 착각이고, 오해라고 들어야했고 알아야했다. 침대 아래에는 누군가가 가지런히 정리해둔 가죽 구두가 있었다. 브루스는 후들거리는 발을 신발 안에 구겨 넣었다. 아이는 팔에 꽂힌 링거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다 바늘을 잡아 뜯었다. 바늘이 살을 찢어서 피가 방울져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새로운 상처가 남기는 고통은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브루스는 토마스 웨인 주니어, 제 형제의 이름만을 떠올렸다. 물어야했다. 알아야했다. 나쁜 꿈에서 깨야했다.
아이는 떨리는 다리를 바로 세워 병실을 빠져나왔다. 누구도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브루스는 인기척이 뜸한 비상계단으로 갔다. 잔뜩 두들겨 맞은 듯 몸이 아팠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걸었다. 브루스는 고집스럽게 불안정한 발밑을 내려 보면서 한 층, 한 층 계단을 내려갔다.
“무리를 하는구나.”
“힉!”
층계의 아래를 목소리 하나가 가로막고 있었다. 브루스는 새되게 숨을 집어삼키다 그만 발을 헛딛고 말았다. 브루스의 몸을 중력이 성급하게 잡아끌었다. 브루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아이는 아직 꽤 높은 단에 있었다. 어쩌면 다시 며칠 간 병원에 누워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 일말의 기대마저 가지면서 아이는 둔탁하고 날카로운 아픔이 저에게 다가올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를 맞이한 건 차가운 콘크리트도, 계단 모서리의 날선 금속도 아닌 따뜻하고 튼튼한 무언가였다.
브루스는 눈을 깜빡 떴다. 아이의 발은 어느 틈엔가 안전한 평지에 내려와 있었다. 잠시 자신의 두 발만 지켜보던 브루스는 반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둔한 유리알 너머의 파아란 눈동자. 계단의 어둑한 조명아래도 선명한 눈이었다. 브루스는 지난여름에 보았던 바다를 떠올렸다. 끝없이 깊어지던 지구의 물웅덩이. 그 일체가 낯선 이의 눈 안에서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째서 이 사람이 여기 있지?
“어딜 갈 생각이니?”
친절한 물음이 아이의 머리 위에 떨어지자 브루스는 급히 남자를 밀었다. 하지만 그 힘은 그대로 아이에게 돌아와 오히려 브루스가 두어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비, 비켜.”
아이는 제가 할 수 있는 양껏 인상을 쓰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눈썹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범한 차림새에 브루스가 그간 봐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인자한 얼굴을 하고 맑고 맑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선량하다 정의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일말의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예컨대 저 목소리. 브루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하늘에서. 드리워지던 그림자.
아아.
그러다 브루스는 기어이 기억하고야 만다. 브루스가 애매한 기억의 타래를 붙잡았다. 남자는 사신이었다. 아니, 남자는 브루스가 사신일 거라 잠시 생각했던 이였다. 브루스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길목에서 차게 식어가던 순간으로 갔다. 들이쉬는 숨보다도 점점 내뱉어지는 것이 많아 목이 막혀가고 있었다. 뜨거운 피는 왈칵 솟아서 브루스의 옷을 차게 물들이며 번져갔다. 브루스는 밤하늘이 이토록 까맣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별 하나 없이 까무룩 무표정한 공간이 너무나도 넓게 저 위에 있었다. 엄마, 아빠, 토미. 브루스는 가물가물 남은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제 가족들을 찾았다.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 브루스는 혼자서, 아무도 없는 골목길 위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브루스의 피부로 인기척 하나가 다가왔다. 브루스는 반사적으로 제가 지금 간절히 찾고 있는 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는 답이 없었다. 그는 브루스가 찾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브루스가 알기로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았다. 좁은 골목으로 도시의 어지러운 빛 부스러기가 몇몇 흩어졌고 누군가가 그것을 등지고 짙고 짙은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브루스는 그 탓에 그가 사신일거라고 생각했다. 싫어, 무서워. 아이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떨치기 위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생을 쥐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숨은 점점 꺼져만 갔다. 아래로, 아래로.
아이의 날선 시선을 받던 남자는 기어이 호선을 띠우던 얼굴을 굳혔다. 무표정해진 남자의 얼굴은 엄중했고 이상하게 조금은 익숙한 모양이 되었다. 브루스는 예민한 새끼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며 잔뜩 남자를 경계했다.
“이 곳은 고담이 아니란다.”
남자는 차분하게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선명한 남자의 말소리는 분명 듣기에 좋았지만 어딘가 독특하게 튀어 올랐다.
“여긴 메트로폴리스 종합병원이란다.”
브루스의 동그란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고담과 메트로폴리스는 미국 내에서는 분명 옆 동네라 해도 좋을 만큼 가까웠지만 굳이 위급한 환자를 옮겨올 만큼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게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한 일인가 어떤가는 둘째로 말이다.
“고담에서는 네가 치료를 받을 수 없겠더구나.”
그럴 리가. 아이는 부정하는 말을 금방 떠올렸지만 차마 무서워 입에 담지 못했다. 남자는 자신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뒤로 수군거리는 목소리는 끝이 없을지라도 그래도 고담에서 ‘웨인’의 성을 가지면 편리한 일이 꽤 되었으니까. 아니면 남자가 아빠가 근무하는 병원을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남자의 말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아이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가정들을 떠올려 보았고 그때마다 머릿속 깊숙한 곳에 있는 생각하나가 무게를 더하며 아이의 몸을 짓눌렀다. 아이는 텅 빈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다 점점 무릎에서 힘이 빠져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토미, 토미... 브루스의 머릿속에 갈 곳 잃은 부름이 이곳저곳을 헤매다 묵음으로 퇴색했다. 아이는 낯선 도시에 주저앉았다. 그런 아이를 이름조차 모르는 이가 단단히 붙들었다.
3
남자는 이상하다.
브루스는 커다란 화면에 떠오른 뜻 모를 궤도를 날마다 습관적으로 살피는 남자의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토라진 작은 아이가 저의 어깨너머로 열없이 보낸 눈길이었지만 그것을 기어코 알았는지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니 하는 물음을 대신해 남자는 상냥하게 눈썹을 구부려보였다. 브루스는 왠지 속이 뒤틀려서 고개를 팩하니 돌려버렸다. 얼핏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다. 브루스는 왜인지 심사가 더 꼬여 누운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한낮일 테지만 밤 동안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해 아이의 몸은 행인지 불행인지 피곤했다.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병정 하나 없는 이 ‘우주선’에서 브루스는 못해도 잠은 청할 수 있었다. 브루스는 뻑뻑한 눈을 감았다.
비록 정신이 들었던 적에는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남자에게서 전해들은 대로 건강한 브루스의 회복은 빨랐다. 할 일 없는 병실 안에서도 마치 누군가가 시키기라도 한 듯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던 남자는 팔짱을 끼고서 날선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를 둥그런 안경 너머에서 바라보며 웃어주고는 했다. 그러다가 이따금 브루스는 남자가 자신을 이상하게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불만을 말하자면 저 호선이 박힌 눈매가 부담스러워서 그저 몸을 모로 돌리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브루스가 제 작은 머리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할 즈음이었다. 이쯤에 브루스는 상태를 직접 묻기 위해 찾아오는 의사의 질문을 이리저리 회피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밤이 찾아오고 병실도 전등을 내렸을 때 가물가물 잠이 들려는 브루스의 어깨를 남자가 조심히 흔들었다. 막 선잠이 들참이었던 브루스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얼굴을 찡그려 드러내보였다. 남자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 위에 붙이면서 쉿 하고 촌스러운 제스처를 해보였다. 가타부타 따지고 싶은 말도 잠시 삼키고 브루스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런 브루스의 어깨에 남자는 웬 부드러운 천을 둘러주었다. 몸을 조심히 감싸는 감촉에 비해서 생각보다 제법 무게가 있는 천이었다. 남자는 신중한 손길로 브루스의 팔에 박힌 링거 바늘을 제거하고 지혈밴드를 붙였다. 전에 브루스가 급한 마음으로 뜯어낸 탓에 상처가 생겨 이제야 딱지가 굳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전문적이라고도 해줄법한 처치였다. 브루스는 침대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를 신었다. 온전히 양 다리에 힘을 싣기 시작하자 핑하고 짧은 현기증이 찾아와 브루스는 두어 번 고개를 도리질했다. 브루스의 시야가 다시 또렷해졌을 때 남자는 브루스를 이끌고 병실을 나섰다. 다급하지는 않지만 목적은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비상계단이 나오는 철문을 열고 늦은 밤이라 초록색 비상등만이 불을 밝힌 어두운 층계로 들어서자 남자는 브루스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병원의 아래층을 향해 가리라 짐작했던 브루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위로 올라갔다. 남자의 품에 안긴 몸에 어떤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아 남자는 공중을 떠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괜히 연약한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심통이 났지만 남자가 제 걸음을 대신하고 있는 점이나 몸을 덮고 있는 천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쯤은 관대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불평까지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뭐야.”
소곤소곤, 브루스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제 불만을 또렷이 드러내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입원해있을 건 아니잖니.”
“퇴원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처음 알았는데?”
비죽 입 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리는 브루스의 말에도 남자는 별 동요가 없었다.
“곤란한 일을 겪고 싶지는 않잖니?”
“내가 왜 곤란해지는데.”
아이는 부러 당당하게 말했지만 남자는 잠잠히 아이의 눈동자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브루스는 남자의 말에 이미 요동하는 제 심장소리를 귀로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남자의 의중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꺼림칙했다. 단순히 마음이 좋아 아이를 구한 사람이 보일 행보치고 지금 이것은 브루스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 생각해보아도 과했다. 브루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남자에 대한 의구심을 높이는 중 두 사람은 어느새 옥상에 다다랐다. 싸늘한 밤바람이 브루스의 뺨을 쓸고 지났다. 그러기를 잠시. 남자는 브루스를 예의 그 천으로 꽁꽁 싸맸다.
“도대체,”
브루스가 제 온몸을 덮은 천을 헤집으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천 너머로 남자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아이를 토닥이며 달래고 있었다.
“위험하니까 너무 버둥거리지 마렴.”
남자의 말투는 여상하게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내용은 충고가 아닌 통보였다. 아무래도 남자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고 모든 말이 상냥한 것이 되는 게 아님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굴하지 않고 기어이 입을 열었지만 이제껏 느낀 것보다도 한참은 심한 부유감에 곧 입술을 다물고 주위의 변화를 살폈다. 천 너머로 가려진 시야로도 브루스는 제 몸이 중력을 거슬러 높이 높이 치솟는 것을 알았다. 눈을 껌뻑이며 제가 처한 상황을 가늠하고자 했지만 울렁이는 내장기관의 움직임이 불현듯 생생해서 브루스는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벼운 멀미가 나서 브루스가 몸을 뻣뻣하게 굳히자 아이를 안은 남자의 팔이 더 견고해졌다. 그 단단함에 반사적으로 안도가 들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 너머로 물결과도 같은 공기의 흐름이 전해졌다. 그리고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올록볼록 스쳐가던 바람이 뚝 멈추고 브루스는 새삼 제 몸을 잡아당기는 중력이 가까움을 알았다. 남자는 조심히 브루스에게서 천을 거둬내며 아이를 지면에 내려놓았다. 브루스의 예민한 후각에 처음 맡는 냄새가 한가득 들어왔다. 금속 같이 매끈하고, 지나치게 청량해서 비현실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브루스가 도착한 곳은 처음 보는 상아빛의 실내였다. 조종대가 있는 것을 보아 기내인 것도 같았고 커다란 스크린이나 조작 패널들을 보자면 꼭 모니터링실인 것도 같았다. 그렇게 넓지 않은 실내였지만 몇몇 부스들이 있고 침대도 있었다. 도통 알 수 없는 구성의 방이었다. 이곳저곳을 관찰하던 브루스가 몸을 돌려 남자를 보았다. 아이의 시선에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별스럽지 않게 말했다.
“내 우주선이란다.”
“우주선.”
아이는 남자의 말을 따라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지나치게 똑바로 물었다.
“아저씬 외계인이야?”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남자는 결국 적당한 말을 건져내지 못했는지 어딘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타휴먼에 대한 존재가 별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브루스는 오래전 아빠를 따라 토미와 메트로폴리스에 갔을 적 보았던 파워링의 존재를 떠올렸다. 때는 겨울이었고 도착한 뒤 브루스가 감기 증세를 보여 이렇다 할 추억은 없었지만 그 푸른빛이 눈 아프던 사건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사방에 빛이 퍼지며 비명을 지르던 남자는 도시 중심에서 건물을 몇 개 파괴하다가 결국에는 그 눈부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토미가 뭐라고 했더라? “다루지 못할 힘 따위 질색이야.”
비행은 끝났을 텐데도 다시 늦은 멀미가 치솟았다. 브루스는 숨을 한 번 크게 쉰 뒤 고갯짓을 멈춘 남자의 주위를 과장되게 빙 돌았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미지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 나았다. 심지어 브루스는 그의 낡은 코드자락을 들추기 까지 했다.
“꼬리는 없단다.”
“...뭐야, 시시하네.”
뚱하니 말하며 브루스가 남자의 옷자락을 놓자 파하고 숨이 터지듯 남자는 짧게 웃었다. 그러다 브루스는 남자가 공중에 뜰 수 있던 것을,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을 안고 날았던 존재임을 상기했다. 아, 그렇게까지 시시한 건 아니네. 브루스가 속으로 심드렁하게 조잘댔다.
“그래서 외계인이 무슨 이유로 날 데려온 거야?”
브루스는 최대한 지금 상황에만 몰두하려 애쓰며 물었다. 묵묵히 듣던 남자가 조금 후에야 입을 열었다.
“브루스.”
낯선 이의 발음으로 제 평생을 달고 산 이름이 들리자 브루스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인하듯 아이와 어울리지 않게 잔뜩 인상을 쓰고서 저보다 한참 나이 많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브루스가 기억하기로도 남자는 제 곁에 있으면서 줄곧 저를 돕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정보의 부재가 그 의도를 재단하게 만들었다. 소리 없이 한숨을 뱉은 남자는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게 그렇게 이상하니?”
“정말 외계인인가 봐? 고담 사람에게 그런 얘길 하는 멍청이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 주제에, 제 이름을 알고 있다. 어쩌면 병원에서 알게 된지도 모르지만 브루스는 남자가 자신을 알게 된 건 보다 전, 남자는 허공에 떠있고 브루스는 골목에서 죽어가던 그 즈음부터라고 짐작하고 있다. 브루스는 어금니를 꾹 물었다. 아이의 작은 턱에 가해지는 긴장을 지켜본 남자는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달래듯 말했다.
“우선 한숨자지 그러니. 저쪽 침대를 쓰면 된단다.”
브루스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남자가 기어이 휴 하고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고 말았다.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다면 가고 싶은 곳을 얘기하렴. 얼마든지 데려다 줄 테니.”
가고 싶은, 정확히는 가야할 곳이야 정해져있다. 다만 갈 엄두가 나지 않을 뿐. 제 이름을 알고, 자신을 병원에서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는 그것을 뻔히 알고 있을 것만 같아 분했다. 브루스는 흥하니 코웃음 치며 남자가 보란 듯 성큼성큼 당당한 걸음걸이로 그가 가리킨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둔통이 남아있었지만 브루스는 아랑곳없이 퐁 소리가 나게 드러누웠다. 그 충격으로 상처부위가 조금 아팠다. 우주선 내 벽면에 자리한 침대는 남자의 몸에 맞춰 제법 커다랬지만 브루스는 일부러 그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그래봐야 브루스의 몸은 작아서 둘레에 많은 여백이 있었지만 브루스는 팔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실내에 잔잔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야?”
그러다 문득 브루스는 외계인이란 말에 조금씩 눈매가 찌푸려지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물었다. 뾰족뾰족 하니 가슴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뜻 모를 감각이 도저히 걸리고 걸려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답이 없던 남자가 되물었다.
“내, 이름말이니?”
“그럼 누구.”
단순한 질문에 남자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설마 외계인들은 자기 이름을 떠올리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로 긴 이름을 가진 걸까? 아니면 혹시 발음이 정말 정말 어려운 걸까? 암기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브루스는 외계의 것이라는 이유로 서투른 면모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남자는 외계인이면서도 영어를 매우 능숙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씩 발음이 미끄러지기는 하지만. 브루스는 괜히 긴장을 하며 남자의 답을 기다렸다.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하지만 그 기다림이 허망하게 남자는 맥 빠진 대답을 한다. 브루스는 그만 새끼고양이가 아르릉 성질을 부리듯 언어가 되지 않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이다.
“칼. 아저씨 이름은 이제 칼이야.”
브루스는 불만을 담아 전에 커다란 개를 키우면 붙이고 싶던 이름을 불쑥 꺼냈다. 그래도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꺼낸 말치고는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그럴싸해서 브루스는 나쁘지 않다 평했다.
“그렇게 하렴.”
아마 남자, 칼도 싫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보아도 칼은 이상하다. 외계인 어쩌고 전에 어딘가 답답한 면모라던가, 뭐든 알고 있는 듯하다가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을 때라던가... 브루스는 자신이 신고 있는 고급스런 가죽구두와 영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와 후드티를 내려다보았다. 헛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이 옷은 저 칼이 손수 사온 물건이었다.
처음 칼의 손에서 옷가지들을 건네받았을 적에 브루스는 정말, 아주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런 싸구려는 처음 받아봐.”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한 상표와 평소 브루스가 봐온 물건들보다 0이 하나, 둘쯤은 덜 붙은 가격이 적힌 태그를 보며 브루스는 중얼거렸다. 꽤 진지하게 물건들을 살펴보느라 브루스는 멋쩍어 헛기침을 하는 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청바지에서는 빠지지 않은 염료 냄새가 났고 옷들은 바느질 마감이 섬세하지 않았다. 몸에 두른 천은 뻣뻣하고 거칠어서 생소했다. 브루스는 빙그르르 돌며 제 눈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 애썼다. 그리고 브루스는 실은 꽤나 지금 입은 옷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이런 옷이면 브루스가 사소한 말썽을 부리다 옷을 찢어먹거나 더럽혀도 크게 혼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나, 알프레드나, 토미... 브루스는 서둘러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돈은?”
확실히 태그가 매달려있던 물건이니 새 옷임은 틀림없었다. 설마 훔친 걸까? 그러고 보니 병원비는 어떻게 된 거지? 생각을 돌리기 위해 꺼낸 질문이지만 꽤 흥미로운 주제였고 브루스는 주저 없이 그에 매달렸다. 칼이 곤란한 기색을 보이자 더더욱. 어쩌면 그가 보기에는 샌님 같아도 실상은 꼭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브루스에게는 무엇이든 진실과 가까운 정보가 필요했다.
“이걸 보련?”
한참 말을 못 찾던 칼은 불쑥 브루스의 눈앞에 새까만 돌덩이를 내보였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 석탄이었다. 칼은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선보이듯 브루스의 눈앞에서 꾸욱 주먹을 쥐었다. 까드득, 하고 주먹 안에서 석탄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브루스는 그의 힘이 아주 세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후. 칼은 조심히 주먹을 풀어 브루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까만 재를 날리던 석탄은 온데간데없이 투명한 보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세상에.
“지금, 이걸 할 수 있는 데 이걸 샀다고?!”
브루스가 제가 입은 후드 티의 앞자락을 쭉 내밀며 허망하게 외쳤다. 이왕 외계인이 눈앞에 있는 마당에 그가 주먹을 쥐어 석탄을 다이아로 만들든, 물에서 포도주를 만들든 개의치 않았다. 다만 금전을 통해 재화를 얻는다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한 이가 저 보석에서 이런 가격의 옷을, 아니 브루스의 옷이야 남의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제 옷차림마저 저런 것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빈티지룩이라는 패션의 장르가 있다지만 그런 장르를 좇을 인물로는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저 코트는 주머니도 해졌단 말이야!
“이건... 원래 있던 재물이 아니잖니.”
“뭐?”
팔자로 눈썹을 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칼의 모습에 브루스는 그만 아연하고 말았다. 그리고 브루스는 다시 제 생각을 정정했다. 칼은 샌님이 맞다. 그것도 어마무지하게. 브루스는 다시 주먹을 쥐어 제 손에 들어있던 보석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칼을 흘깃 보며 이상하게 두통이 올라오는 머리를 제 작은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이 능력으로 너무 세상에 득을 봐선 안 된단다.”
그런 브루스를 타이르듯 칼이 얘기했다. 조금 변명처럼도 들렸다. 어찌됐든 브루스는 만사가 귀찮아져서 칼에게 손사래만 치고 말았다.
밤이면 시커먼 악몽이 찾아온다. 브루스는 흩어지는 핏방울의 궤적을 보며 진주알이 땅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총알이 브루스의 살을 찢고 스산하게 지나갔다. 타는 통증 뒤로는 얼음장 같은 냉기가 아이의 목을 졸랐다. 후우, 후우, 후우. 가만히 눈을 뜬 채로 숨이 멎어가는 브루스의 머리 위에서 부엉이가 운다. 누구? 도대체 누가. 알프레드였던 범인은 이따금 얼굴이 변하며 브루스가 한 번쯤 보았던 이의 모습을 하기도 했고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의 모습을 하기도 했다. 어쩔 때는 그게 칼인 적도 있었고, 심지어 브루스 제 자신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브루스는 부엉이의 울음을 등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토미, 토마스의 눈동자를 보았다. 숨이 그 유리알 같은 눈 아래 멎고 있었다. 브루스는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토마스는 등을 돌린 후였다. 어둠 속에 그렇게 홀로 남았다.
브루스는 다급하게 의식으로 끌어올려졌다. 식은땀으로 몸이 축축했다. 브루스는 의자에서 잠이 들었을 칼 쪽으로 급하게 시선을 주었다. 다행히 그는 별 요동이 없었다. 삐익 하고 이명이 지나가는 귓가에 서서히 성마르기 짝이 없는 제 숨소리가 또렷해지자 브루스는 입술을 꾹 물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들켜서는 안됐다. 이렇게 겁에 질린 자신은 꼭꼭 숨기고 숨겨야만 했다. 브루스는 이불 속을 파고들며 몸을 작게 웅크렸다.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긴 고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란다.”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브루스는 급히 숨을 삼키다 그만 발을 또 헛딛고 말았다. 휘청이는 아이의 몸을 칼이 가뿐하게 잡아 바로 세웠다.
“그냥 궁금해서 열어본 거야.”
브루스는 어깨를 털어 칼의 손을 치워냈다. 가끔씩 칼이 밖을 나갈 때면 그의 등 뒤에서 유심히 그의 동작을 지켜보면서 브루스는 이 우주선의 문을 여는 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낮에 잠을 자둔 덕에 밝게 개인 머리로 어둠을 틈타 그것을 그대로 따라해 보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처음 듣는 새의 울음소리나 물에 젖은 풀의 냄새 따위가 들어왔지만 어느 외곽지의 숲 정도 일 거라 생각했던 브루스의 눈앞에는 깎아지른 절벽과 부서질 듯 무수한 별들이 펼쳐졌다. 아이는 금방 지금 있는 곳이 제 머릿속 지도에는 없는 곳임을 알았다.
“문 여는 법 쯤 물어보면 알려줬을 텐데.”
“어쩌다 알게 돼서 해봤어. 잠을 깼다면 미안해.”
브루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푸욱, 하고 칼이 다시 브루스의 머리 위에서 한숨을 쉬었다.
“난 널 도운 사람이란다. 그 걸로는 네가 날 믿기에 충분하지 않았니?”
토라진 아이를 어르듯 조근조근한 목소리였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충분하지 않냐고? 그래! 전혀 충분하지 않아!”
브루스는 이를 갈 듯 쏘아 말했다.
“당신 코트 안에 있는 신문을 봤어. 고담 가제트였지. 웨인부부... 사망,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소년! 전부 보았어!”
그리고 그 무수한 활자들 어디에도 브루스 웨인은 없었다. 남자는 아마도 전부, 거의 전부를 알고 있었다. 브루스가 무엇을 무서워했고, 무엇을 감추고 싶었는지도. 전부. 그래서 브루스는 남자를 믿을 수 없었다. 남자는 브루스의 이름을 알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도 알고 있지만 자신은 왜 그가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고 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알프레드가 부모님과 자신에게 총을 쐈고, 토미는 죽어가는 자신을 뒤로한 채 떠났다. 세상 위에 브루스 웨인을 묻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제 이름조차도 브루스의 임의에 맡겨버리는 남자를 어떻게 믿으면 좋단 말인가.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아니 알겠지. 내가, 브루스 웨인이... 집, 에서...”
브루스는 닥닥 떨려오는 이를 다시 사려 물며 칼을 노려보았다. 저 의문투성이의 남자를 하릴없이 믿을 수밖에 없는 제 처지가 비참했다. 미지의 인물에게 저의 목숨을 구걸해야했고 그만큼 지금 당장 브루스의 생사가 그 손에 매달렸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래서 브루스는 알아야 했고, 의문을 가져야했다.
“그런데, 당신을 믿으라고?”
브루스는 밤마다 시달린 악몽을 그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았다. 쉬어버린 브루스의 목소리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한동안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침묵 사이에 웅성웅성 밤벌레 울음소리가 차올랐다. 그리고 브루스의 등 뒤에는 여전히 많고 많은 별들로 밝을 테다. 브루스는 숨을 골랐다. 그러다 갑자기 브루스의 앞에 서있던 그림자가 작아졌다. 칼이 쪼그려 앉으며 브루스와 눈높이를 맞춘 탓이었다.
“미안, 미안하다.”
칼이 손을 들어 브루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뭐냐고 묻기 전에 브루스는 그 별거 아닌 진동을 따라 제 눈에서부터 볼을 타고 내려가는 것의 정체를 가늠해야했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브루스는 고개를 모로 돌리며 주먹을 꼭 쥐었다.
“난, 네 목숨으로 믿음을 흥정하려 했던 게... 오, 맙소사.”
칼이 브루스의 양 팔을 잡았다. 그나마 표면에 걸쳐두듯 두었던 그의 손이 이제는 브루스의 옷자락의 끝만 간신히 쥐고 있었다. 미미하게 그의 손끝이 흔들린다 싶어 브루스는 그 손을 치워내고 싶어서 할 수 없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칼이 쓰고 있는 둥그런 안경알이 지저분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게 밝은 그의 눈동자에서 별빛이 하나, 하나 토해지고 있었다.
“뭐, 야. 왜 울어.”
“응?”
미동도 없이 저를 들여다보는 칼의 얼굴에 브루스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만큼 얼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브루스는 살면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기하고 이상해서 조심조심 주먹을 풀고 칼의 뺨을 짚어보면 축축한 것이 그는 분명 울고 있었다. 브루스가 놀라 눈을 껌뻑이면 눈에 고였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면서 조금은 눈앞이 환해졌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이다. 브루스는 한숨을 대신해 물었다.
“원래 외계인은 이렇게 이상해?”
마치 기도하듯 칼이 제 얼굴을 쥔 브루스의 손에 자신의 커다란 손을 곁들였다. 그리고 그는 간신히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4
브루스는 제멋대로다.
야아아 하고 웃음소리 같은 함성을 길게 날리며 아이는 설원 가운데로 뻗어나간다. 한걸음 우주선 바깥으로 발을 내딛으면 익숙한 시려움이 허파로 몰려들었다.
“너무 멀리는_...”
자신이 칭칭 감아준 망토 끝자락을 하얀 땅 위에 끌면서 작은 키로도 성큼성큼 달리는 브루스의 뒷모습을 보며 칼은 걱정스레 소리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주변의 소음을 집어삼키는 새하얀 눈밭 위에서 활발한 심장소리 하나가 순수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저렇게 신이 나서야 뭘 말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칼은 조금 이마를 찌푸려 철없는 아이를 보고 있었지만 결국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를 허물고 말았다.
이제 브루스와 다닌 지 보름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이 시간은 길다고 표현해야할까, 짧다고 표현해야할까. 꽤 오랫동안 날짜를 꼽아보는 일을 하지 않았었다. 칼은 어색하게 머릿속에서 달력을 셈했다. 문득 발아래를 보면 칼의 구둣발이 눈 속에 묻혀있었다. 이것은 또 얼마만일까. 칼이 한 발을 조심스럽게 들어보면 묻고 얹힌 눈들이 포스스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칼은 제 발이 새겨 넣은 발자국을 내려 보았다. 브루스가 남긴 자국보다 조금 더 깊은 정도의 그것은 아마 보통의 성인 남성들이 남기는 것과 큰 차이는 없을 터다. 칼은 이보다 더 깊이 이 행성에 발을 내딛을 수도 있고, 또는 흔적조차 없이 표면을 스쳐갈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저 적당한 정도가 칼의 걸음을 따라 눈 위에 자욱을 남긴다. 사박, 사박. 눈의 결정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반듯하게 땅 위에 발을 디뎠다. 처음부터 그랬던 듯 자연스럽고, 금방이라도 사라질듯 가벼웠다. 아이의 심장박동이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작은 금속이 꿰뚫고 지나간 자리에서 많은 피를 토해낸 아이는 숨도 겨우겨우 집어 삼키고 있었다. 남자는 머릿속에서 아주 오래된 지식 하나를 건져냈다. 어느 날인가 빠르게 훑어본 책장에서 찾은 몇몇 문장들이 시간에 바래지지 않고 선명했다. 남자는 아이의 상처에서 감염이 의심되는 부위와 주변의 이물질들을 태워버리면서 서둘러 더 피를 흘리기 시작하는 상처를 막아버렸다. 정신을 잃은 중에도 창백하게 질린 아이의 몸이 고통에 움찔 떨렸지만 그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지금 상황에서 남자가 당장 할 수 있는 응급처치란 이 정도였다. 남자는 아이를 조심히 안아 올리면서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 근방에 있는 응급실이 딸린 병원의 위치를 알아낸 남자는 금방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선생님, 제가 몇 번이나 말해야겠습니까. 지금 선생님만 급한 게 아니라고요.”
접수대의 직원이 삐딱한 자세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제 귀를 뜯던 접수원은 그 손으로 따닥따닥 데스크를 두드리며 남자의 뒤 차례의 사람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남자의 뒤에서 쿨럭, 쿨럭하고 술 냄새가 묻어난 기침소리가 들렸다.
“이보시오. 이 아이는 총에 맞았어요.”
“예예, 선생님. 고담에 어서 오십쇼.”
“일이 바쁜 건 압니다. 하지만 응급―”
“아, 그니까 그 응급환자가 한 둘이 아니라고요. 곧 순서가 될 겁니다.”
직원이 이제는 손사래까지 곁들여 뒤에 얼굴이 벌게진 사내를 재촉했다. 남자가 한마디 말을 더 얹어보려는 순간 비틀비틀 걷는 사내가 남자를 밀쳤다. 그 힘이 남자에게 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고 있는 아이에게 해가 될까 남자는 한발 앞서 그의 움직임을 피했다. 사내는 접수대에 기대며 긴 트림을 뱉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제 증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초조하게 응급실을 바라보면 접수원의 말대로 한가한 상태는 아니었다. 애당초 이 도시는 그 규모에 맞지 않게 응급실을 운영하는 병원의 수가 극히 적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박동이 한 박자 정도 느려진 것 같은 아이가 뒤 순위로 밀릴 정도의 ‘응급’ 환자는 없었다. 아까 전에는 소화불량으로 대학생 하나가 들어갔고, 또 이번에는 어디서 싸움질을 하다 왔는지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남자가 절뚝절뚝 진통제를 찾아 진찰실로 들어갔다. 다시금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던 남자에게 오래된 의무감 같은 다급함이 찾아왔다. 이러다 아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게 되면?
남자는 직접 당직 의사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 상황 파악을 위해 열어놓은 남자의 청각으로 소곤소곤한 말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봐, 접수대 앞에 총 맞았다는 아이... 웨인 선생네 아들 아니야?”
“그러고 보니 전에 도박 빚이 어쩌고 하던데. 흐으, 왜 완전 무서운 덩치가 와서 말야. 쾅쾅하며 벽 두드리면서.”
웨인 선생? 이 병원은 무려 아이의 부모 중 누군가가 근무하는 곳인 모양이었다. 둘의 대화 사이로 잠시 웅얼웅얼 잠을 보채며 칭얼거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대화중이던 목소리 하나가 급하게 상냥해지며 “네네, 조명 바꾸겠습니다.”하고 속닥였다. 그리고 다시 더 음량을 낮춘 대화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그게 아닌 거 같던데? 스미스 선생이 그러더라, 웨인은 환자로 받지 말라고.”
“뭐? 아직 애들 다 어리잖아. 소란이 나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그 ‘웨인’이잖아.”
그리고 우리는 고담에 살고 있고. 음음, 하며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고개를 주억여주고 있었다.
“접수 받는 사람 골치 아프겠네. 지금 누구야? 지니? 닐?”
“닐. 뭔 걱정이야. 몫은 받아뒀겠지.”
남자가 들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숨이 가늘어지는 아이를 다시 고쳐 안으며 남자는 새까만 밤하늘을 날았다. 지금 아이가 제 부모의 근무지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면 이 도시에는 오래 있어봐야 아이의 목숨만 갉아먹을 뿐이었다. 남자는 좀 더 멀리, 하지만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움직였다. 언뜻 지나간 시야 끝에 [반가워요, 메트로폴리스입니다!]라 써진 전광판이 있었다. 남자는 헛바람이 든 듯 짧게 웃었다. 설마 저 이름을 가진 도시에 이런 이유로 자신이 자발적으로 오게 될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아이는 이웃 도시의 종합병원에서 무사히 필요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은 문제없이 끝났지만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의사는 건강한 아이라 몸에는 이제 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가 확인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특이 혈액형이 아닌 덕분에 수혈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고 상처 부위도 제대로 치료했다. 다만 아이가 입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부상과 미심쩍은 응급처치에 의사는 보호자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 했고 남자는 그저 길을 가다 발견했노라 말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남자에 대해 의심을 가지던 병원 측은 수혈을 위해 얻은 혈액형 정보에서 그와 일치하는 병원 전산 상의 아이의 신원을 확인한 후 무언가 납득한 듯 조용해졌다. 주워들은 말 중에는 “고담 강에서 흘러들어오기라도 한 거 아냐?” 하는 말도 있었다. 우선은 어떤 수사를 진행하는 낌새도, 사건을 파악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가 정신이 들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나라라면 못해도 약자를, 아이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 출신이 어디든 간에. 혹시라도 수사가 시작되면 아이는 괜찮을까? 아니, 본래대로면 그것이 옳은 순서가 아닌가.
남자는 벤치에 앉아 네 번째 신문을 펼치며 생각했다. 종이가 파스락 하고 소란을 부릴 때면 매캐한 신문 특유의 잉크 냄새가 번졌다. 남자는 그 와중에도 다시 귀를 기울여 저 강 너머 다른 도시에서 입원 중인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는지 규칙적인 기계소리 사이에서 색색 숨만 쉬고 있었다. 어쨌든 아이는 살아있다. 잠이 들었다 뿐이지 호흡도 제의지대로 하고 있다.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찾아드는 안도에 잠깐 헛기침을 했다.
웨인부부의 사망 소식은 벌써 신문 경제면 등에 실려 있었다. 중요도는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분할을 차지했다. 기사에는 부부가 불의의 일로 죽었다는 소식과 그 유산을 작성되어 있는 유언장에 따라 그들의 장남이 고스란히 물려받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신문의 흑백사진 속에 들어있는 소년은 또래아이들과는 달리 온도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모의 죽음에 침중해보이지도 그렇다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고 그저 무표정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뒤에 깡마른 남자가 꼿꼿하게 허리를 바로 편 채 서있었다. 발 빠르게 부부의 장례식을 준비한다는 두 사람의 사진은 신문이라는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매체에 실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꺼림칙할 정도로 지나치게 딱딱하고 차분했다. 그 밖에는 어린 CEO가 앞으로 어떻게 제계에 뛰어들지 기대가 된다며 비아냥 반 우려 반을 토로하는 칼럼이 있었고, 웨인엔터프라이즈의 주가변동 이야기나 소년 부자에 대한 시민들이 생각이 나열된 정도가 전부였다. 그 뿐이었다. 남자는 이 도시에 가장 팔리지 않는 마이너 잡지까지 읽어보았지만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음모론은 실렸을지언정-남자는 비록 찌라시의 기자지만 나름 그 감은 인정해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브루스 웨인, 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남자는 잠깐 혹시 이 지구가 아주 우연하게도 브루스 웨인이라는 존재가 없는 곳이었는가 하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병원 전산에는 분명 브루스 웨인이 있었고 자신이 병원에 데려간 아이는 ‘토미’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이름은 분명 제 형의 애칭일터였다. 남자는 신문 글귀 중에 있던 토마스 웨인 주니어라는 단어를 기억했다.
남자는 마지막 장에 실린 가구 전문점 광고까지 마저 확인한 뒤 등을 펴 고담의 잿빛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토미를 찾고 있었다. 웨인의 장남은 분명 살아있었고 그가 어디 다쳤다는 소식은 어디에서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웨인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이었다. 무거운 구름이 우울하게 바람을 따라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남자는 펑 하고 커다란 폭발음을 듣는다. 위치는 저 도시의 안쪽. 극장이 있는 번화가. 샛길에 자리한 초라한 골목. 그 곳. 남자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집중하면 아수라장이 된 거리가 보였다. 데면데면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들이 중상을 입었고 파편에 맞은 시민 몇몇의 울부짖음도 들렸다. 가스 폭발, 이라고 무전으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이면 바로 어젯밤 웨인부부가 죽고, 아이가 총에 맞았던 그 거리에서. 남자는 근접한 거리의 텍스트를 읽기에 적절하지 않은 초점을 다잡지 않은 채 손에 잡힌 신문, 으로 보이는 회색의 사물을 봤다. 활자를 새긴 잉크가 셀룰로오스가 엉겨 만든 질 낮은 펄프에 박혀 있었고 그 얼룩이 모여 단편의 사실들이 소식이라 이름 붙은 콘텐츠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결론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웨인부부를 비롯해서 브루스 웨인은 결국 집안의 재산 싸움에 휘말린 거다.
남자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종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남자는 건조하게 웃었다. 겉으로 보면 꼭 남자가 신문에 코를 박고 울고 있는 듯도 보였다. 몇몇 행인들이 그 옆을 지나다 혹시나의 소동에 휘말릴까 저어하며 둥그렇게 남자를 피해갔다. ‘그’가 뭐라고 이야기했었지? 그는 무엇을 위해 박쥐가 되었더라? 하하, 짧게 끊어 웃으며 남자는 뒤끝이 볼품없이 남은 기억을 되새겼다. 그는 세계의 이런 가능성을 알았을까. 돈 때문에 자신이 핏덩이 같은 나이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그리고 그런 그를 이 외계인이 구한다는 사실은 알았을까. 자꾸 해묵은 변명이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목이 쓰렸다. 삶이란 참 재밌지 않은가. 아니, 바보 같지 않은가. 남자는 한참 울음처럼 웃었다.
남자는 아이에 대해서, 브루스에 대해서 관대하게 마음을 먹었다. 고담 내 병원이 웨인가문에서 있을 싸움에 선을 긋고 있던 점이나 형식적으로나마 수사가 진행 되던 현장에서 난데없는 폭발 사건이 일어난 점, 신속하게 웨인부부의 죽음을 명시하면서도 브루스의 행방에 대해 물음표도, 느낌표도, 마침표도 없는 신문들을 돌이켜보았을 때 브루스가 당국의 수사에 휘말려보아야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브루스조차도 잠을 자거나 시치미를 떼거나 꾀병을 동원해서 의사의 질문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는 아이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아이를 데리고 메트로폴리스를 떠났다. 물론 언제까지고 이방인 신분인 자신이 아이를 돌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떠날 때가 된다면 아이가 ‘자유’롭게 갈 것이다.
칼은 아이가 우는 것을 보았다. 아이가 등진 밤하늘의 별 조각들이 반짝반짝 들어와 어둔 밤이 더없이 환했다. 그런 것 없이도 칼의 눈은 밝았지만. 브루스는 심술이나 까탈은 가감 없이 칼에게 내보였지만 이따금 아이의 밤에 찾아든 공포나 갈피 잃은 혼란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비록 제아무리 꽁꽁 숨겨봐야 결국 어린아이의 일이어서 아이에 비해 한참은 살아온 칼에게는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굳이 나이가 아니더라도 브루스의 불안을 해부하기에 칼은 지나치게 뛰어났을 테다. 감정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동그란 형체를 띠며 도르르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 칼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칼의 눈앞에서 조용히 울고 있는 아이는 누군가의 카피도, 어떤 평행 우주적 도플갱어도, 0과 1이 만들어낸 가능성 따위도 아닌 온전한 ‘브루스 웨인’이었다. 칼은 쪼그려 앉았다. 아이를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울음에 벅찬 숨을 고르는 브루스의 얼굴을 겨우야 제대로 살펴보았다. 브루스가 우는 것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길바닥에서 의식을 잃던 아이가 죽음의 그림자에 두려워 생리적으로 눈물을 흘린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이건 그것과 뭐가 다른 걸까. 칼이 떠듬떠듬 사과의 말을 뱉으며 브루스의 어깨를 토닥여보았다. 부드러워야할 아이의 어깨는 뻣뻣하게 경직되어 딱딱했다. 마치 어떤 무게가 아이의 어깨에 잔뜩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게를 알고 나니 칼은 함부로 아이를 달랠 수도 없었다.
주변에 남은 것 하나, 정말 그 하나도 없는 이런 무력한 아이가 홀몸으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을 칼은 알고 있었다. 알고서, 무엇을 기대했을까. 한참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제 욕심을 고해하듯 저도 모르게 울고 있으면 문득 텅 비어있는 미지의 내일이 생각났다. 아직 하늘 저편에 잠들어있을 내일이.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어느새 자신을 따라 쪼그려 앉은 브루스를 보며 칼이 물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칼의 얼굴을 확인한 브루스는 눈물 얼룩이 남은 칼의 동그란 안경을 뺏어다 제 옷소매로 꼼꼼히 닦은 뒤 돌려줬다. 안경알의 수명에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시야는 훨씬 또렷해졌다.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칼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브루스는 어느 틈엔가 잠이 들었다.
아침은 당연하게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고 공평하게 찾아온다. 칼과 브루스의 하루 또한 별 다를 것 없이 흘렀다. 굳이 평하자면 지나치게 평온했다. 칼이 우는 것을 본 뒤로 브루스는 틈만 나면 그 일을 상기하고는 했다. 예컨대 브루스가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던 밤에 그것을 결국 더는 좌시하지 못하고 칼이 브루스의 옆에 찾아갔던 때가 그랬다. 꿈에 놀랐는지, 칼의 기척을 알아챈 건지 퍼뜩 잠을 깬 브루스의 눈동자는 홉 뜨여서 동공이 열려있었다. 식식 대듯 바쁘게 호흡을 고르던 브루스가 칼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시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괜찮―”
“뭐야, 칼. 혼자 못자?”
칼의 말을 서둘러 뺏으며 브루스가 새된 목소리로 주절댔다. 잠에서 막 깬 아이의 동작은 부산스러웠고 칼은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손을 뻗었다.
“칼 큰일이다. 다 큰 아저씬데 울보고, 혼자 잠도 못자고...”
그 단단한 손을 아직도 파르르 떨고 있는 작은 손이 필사적으로 잡았다. 횡설수설 잘난 척 하듯 말을 늘어놓던 브루스는 칼의 팔을 그러안고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눈을 감았다. 브루스는 칼이 저에게 보인 약점-적어도 브루스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인지 종종 이럴 때 써먹었다. 그리고 칼도 브루스가 거기서 어떤 안도를 얻는다면 굳이 그에 초를 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칼은 이따금 곤란했다. 브루스는 종종 제멋대로였다. 칼이 오래전에 봤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슈퍼맨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며, 조금은 경외하며, 얌전히 볼을 붉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자신에게 눈뭉치를 집어던지는 아이는 없었다. 이제껏 면식이 전무하던 아이와 어른이 세상에 비하자면 비좁기 그지없는 우주선 안에 덜렁 남아봐야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칼은 이왕 가지고 있는 자신의 비행체를 십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용하는 엔진만 전환하면 우주선은 행성 내의 대기에서 평범한 비행도 가능한 선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때 아닌 소풍을 다니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피를 하고 있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무엇으로부터, 언제까지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 칼에게 자잘한 것을 지적하는 브루스도(“그러니까... 칼은 밥을 안 먹어도 된다고? 하지만 씹는 활동은 두뇌에 좋다고 했어. 칼도 흰머리가 나는 걸 보면 늙기는 한단 말이지. 지금부터라도 치매 예방에 노력하면 어때?”) 정작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암묵적인 휴가와 같았다.
그러니까 그 휴가 중에 브루스가 불쑥 이른 계절에-적어도 그의 고향 도시를 기준으로는- 눈이 보고 싶다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한 행성 안에서도 위도에 따라 기후대가 달라지는 만큼 아이가 원하는 곳에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특히 칼은 꽤 낯익은 위치에 이 날짜에도 설원이 펼쳐져있을 곳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우주선 너머에서 보고만 있겠다고 했던 브루스가 열린 문을 통해 달려 나가 버린 데 있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 미리 브루스에게 자신의 망토를 칭칭 둘러주고 얼굴을 거의 가리도록 모자를 푹 씌워서 얌전히만 있어준다면 바람은 막겠지만 저렇게 달려 나간 아이가 눈을 보고 손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칼은 자신의 가슴 아래에 닿기 전 이미 부스스 흩어져서 작은 눈보라마냥 코트 위를 스쳐 지나는 눈뭉치를 바라보았다. 맨손으로 눈을 쥔 아이의 손은 아니나 다르게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칼이 씌워준 모자가 눈을 던질 때의 반동으로 다시금 코 아래까지 내려가 브루스는 모자를 위로 끌었다. 그리고 그제야 칼의 코트에 눈가루가 묻는 둥 마는 둥 한 것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잘 뭉쳤는데.”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러니.”
아마 브루스는 더 가까운 곳에서 눈을 던지기 위해 칼 쪽으로 다가오는 것일 테지만 칼은 그것을 기회삼아 브루스에게 타일렀다. 역시나 브루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는 다시 눈을 뭉쳐 칼에게 집어던졌다. 이번에는 칼이 그것을 부러 피했다. 볼을 부풀린 브루스는 몇 번 더 눈뭉치를 던지다 종국에는 그저 눈보라를 퍼붓듯 칼에게 눈밭의 눈들을 뿌려댔다. 발짓까지 덧붙인 브루스의 움직임에 기껏 칼이 둘러준 망토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보다 아이의 손이 더할 수 없이 빨갛게 얼어붙고 있었다.
“이 녀석!”
칼은 제 주위를 빙빙 돌며 눈을 뿌리는 브루스를 답싹 잡아서 안아들었다. 그때 칼은 브루스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을 보았다. 왜인지 아차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칼의 머리에는 하얀 눈이 가득 든 모자가 씌워졌다. 칼에게는 차갑지도 않은 온도였지만 그래도 머리카락이나 안경알은 착실히 엉망이 되었다. 칼이 표정을 굳히며 짐짓 엄하게 말했다.
“못된 아이.”
“눈싸움 해보고 싶었는걸!”
브루스가 깔깔 웃었다.
“싸움? 이건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거잖니.”
툴툴 대꾸하면서 칼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 브루스의 몸을 감쌌다. 한 손으로 브루스의 엉덩이를 받쳐 안아들고 다른 빈손으로 채 떨어지지 못한 눈이 아직도 가득 담긴 모자를 들고 브루스가 떨어뜨리고 온 붉은 망토를 주워들었다. 망토를 주울 때 칼의 몸이 기울어지자 브루스는 칼의 목을 지지대 삼아 매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정정당당한 눈싸움이었어.”
“난 너한테 눈을 던지지 않았는데?”
“그야 칼은 어른이니까! 어른은 약한 어린아이한테 싸움을 걸면 안 돼.”
브루스가 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어거지를 늘어놓았다. 칼은 여전히 볼을 부풀린 채로 브루스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하니 맞댄 뒤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문질렀다. 맞닿은 아이의 이마가 서늘했다.
“이제 됐지?”
칼이 확인하듯 물으면 브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삐진 칼을 달래려는 듯 속닥였다.
“눈이잖아, 칼.”
칼이 브루스를 바라보면 여전히 장난기 서린 눈으로 조근조근 말했다.
“바라보기만 해서는 재미없는 것도 있다고.”
칼은 문득 뒤에 남기고온 풍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분의 움직임으로 마냥 새하얗지만은 않게 된 우둘투둘한 눈밭이 있었다. 더 이상 차가워 보이지 않고 웃음소리가 들릴 법한 부정형이었다. 그리고 다시 브루스를 보면 아이의 뺨이 추위 말고도 다른 이유 때문에도 상기되어 있다. 칼은 브루스를 단단히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체장이들에게서도 별 소식은 없었습니다.”
“흐음.”
고급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소년이 집사가 따른 차를 반듯한 자세로 들이키며 코를 울렸다. 또래 아이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군더더기가 완전히 배제된 깔끔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다.
“다만 메트로폴리스에서 브루스 도련님의 병원전산이 갱신되었더군요.”
“메트로폴리스?”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년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예, 하고 집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소파의 팔위를 손가락으로 토독토독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제 손가락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눈으로 좇으며 생각에 잠기듯 박자를 점차 빨리했다.
“사람을 풀까요?”
“됐어. 그 애가 어디에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그 애가 보일 행동의 결과는 딱 하나니까. 여기 돌아오는 거 말이야.”
그러다 소년의 손가락이 딱하니 멈추었다. 소년은 자신의 앞에 꼿꼿하게 서있는 집사를 보았다.
“계속 살아있다면.”
한참동안 소년은 집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토마스 주인님.”
알프레드는 토마스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들며 아직은 어린 주인을 불렀다. 청회색의 무기질과 같은 구슬이 도르르 굴러 작게 반응했다.
“걱정 되신다면―”
“걱정 안 해.”
토마스가 또박또박 말을 씹어뱉었다.
“난 말 안 듣는 녀석은 싫거든.”
따뜻한 한낮의 햇볕을 받으면서도 어린 소년은 어떤 온도도 띠지 않은 말을 뱉었다. 알프레드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지만 현명하게 그것을 티내지 않았고 그저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일 뿐이었다.
5
높다란 건물들로 빼곡한 도시 거리를 키 작은 아이가 저보다 한참은 커다란 어른의 손을 잡아끌며 걸어가고 있다. 칼은 난감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자신의 중절모를 뒤집어쓴 브루스의 작은 뒤통수를 보았다. 아이의 머리통의 전부가 칼의 모자 안에 폭 들어가 있었다. 저래서야, 투시력이라곤 없는 평범한 지구인인 브루스의 시야는 잴 것도 없이 새까말 게 뻔했다. 그런데도 브루스는 제법 단단한 힘으로 칼의 손을 잡고-아이의 작은 손으로는 칼의 손을 다 잡기에 버거웠는지 세 손가락만 모아 쥐고 있었지만- 앞장서서 사람들로 붐비는 길거리를 성큼성큼 걸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자신이 살던 도시라는 걸까. 속으로 작게 웃으면서 칼은 소용없을 줄을 알면서도 작은 등에 대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브루스.”
“안 말해줄 거야!”
도시의 소음이 가득한 거리 속에서도 브루스의 대답이 또렷하게 칼의 귀로 들어왔다. 고담으로 가자고 말한 후로 브루스는 줄곧 그 까닭에 대해서 함구하는 상태였다. 칼은 브루스가 자신이 난처해하는 것을 꽤나 즐거워한다는 걸 차츰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에 한숨을 쉬면서도 칼은 아이의 보잘 것 없는 힘에 순순히 이끌려갔고 가끔씩 위험이 발생할 것 같을 때만 브루스를 자신의 쪽으로 조용히 끌어들일 뿐이었다.
브루스는 잡은 손을 타고 전해지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칼의 부름에 깜깜한 모자 아래서 히죽 웃었다. 요 며칠간 칼을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칼은 사람과 마주하는 일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았다. 딱히 사람이 싫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억지로 아귀에 맞지 않는 일을 하듯 불편해보였다. 브루스가 칼에게 고담으로 가자 말한 데에는 네 가지 정도의 목적이 있었는데 그중하나는 칼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못해도 한 가지는 성공한 셈이었다.
가끔씩은 브루스의 의지대로 향하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칼이 브루스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단호하지만 아프지 않은 정도의 힘이었다. 그럴 때면 조금 전 브루스가 서있던 자리를 아슬아슬 하게 자전거 한 대가 달려지나가거나 손에 짐들을 잔뜩 들고 있는 행인이 바쁘게 “비켜요!”를 외치며 지나가던가 했다. 위험한 일이 사라지고 나면 칼은 다시 브루스가 자신을 이끌 게 내버려두었다. 브루스는 그럴 때마다 가슴 속이 이상하게 콕콕 찔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칼이 나빴어! 브루스가 속으로 단단하게 제 자신을 북돋았다. 그깟 초록색에 동그랗고 조그마한 음식에 영양이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다고 굳이, 기어코 자기에게 콩을 먹이려 드느냔 말이다. 브루스는 일부러 심술 맞은 표정을 짓고 툴툴거리면서 붙잡은 칼의 손가락을 더 꼭 쥐었다. 그러면 칼도 엄지손가락으로 브루스의 손을 좀 더 단단하게 마주 잡아주었다.
서로 마주앉은 자세로 칼과 브루스는 눈씨름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칼은 그저 브루스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볼 뿐이었고, 브루스만이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칼을 노려보고 있는 상태였다. 칼의 손에는 방금 전 브루스가 먹은 샐러드가 담겼던 플라스틱용기가 들려있었다. 그릇의 한구석에는 녹빛 콩알들이 옹기종기 숨어있었다. 얼마간의 대치상황 끝에 브루스가 시선을 픽 돌렸다.
“잘 먹었습니다.”
평소 잘 하지도 않는 인사말을 브루스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외쳤다. 하지만 칼의 눈빛은 여전히 단호했다.
“브루스, 콩.”
“잘, 먹었습니다!”
브루스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만치로 달려 나가려 했다. 3일 전, 칼과 콩을 남긴 브루스는 이 좁은 선내에서 때 아닌 술래잡기를 한 일이 있었다. 빙글빙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몇 번 뜀박질을 한 결과 칼은 이번만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니 이번에도 대충 칼과 몇 번 정도 우주선 안을 빙빙 돌고나면 칼이 포기해줄 거라고 브루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브루스의 몸이 튕겨져 나가기 무섭게 칼은 브루스를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브루스가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브루스는 칼이 이 일련의 동작을 한 팔로 하고 있다는 데 조금 약이 올랐다.
“밥 먹고 바로 뛰면 안 되지. 거기다 브루스, 아직 다 안 먹었잖니.”
“이상하다아― 칼. 내가 무슨 인사 하지 않았어?”
브루스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갸웃 움직였다. 칼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브루스. 저번에 네가 뭐라고 했었지?”
“몰라.”
“다음번에는 남기지 않고 다 먹겠다고 ‘약속’했지?”
칼이 굳이 ‘약속’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넣으며 고개를 픽픽 돌리는 브루스에게 말했다. 브루스는 순간 울컥 억울해져서 눈썹을 처량하게 휘면서 부당함을 호소했다.
“칼... 고작 콩 몇 개 안 먹는다고 안 죽는단 말이야.”
“브루스.”
하지만 칼은 그런 브루스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았다. 칼이 포크 위에 콩들을 싹싹 긁어 얹어 놓고서 브루스에게로 내밀었다. 파란 눈동자가 굳건하게 브루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안경너머에 있는 눈동자에 포획되는 것만 같아서 브루스는 눈알을 도륵도륵 굴렸다. 브루스는 억지를 쓸 때면 되도록 칼의 눈동자를 주의 깊게는 보지 않도록 하고 있었는데 칼의 눈동자에 대해 자세한 감상이 생각나기 시작하면 제대로 고집을 부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눈동자의 모습이란 색소의 색깔이나, 그 옅고 짙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일 텐데도 이상하게 칼의 눈동자는 투명하고 깊었다. 꼭 바다처럼. 글쎄, 아마 그가 외계인이기 때문에 그러리라 브루스는 생각했다. 이건 좋지 않다. 브루스는 꾹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싫어, 콩 맛없단 말이야. “브루스.” 다시 한 번 더 채근하듯 칼이 브루스를 불렀다. 브루스는 마지못해 칼이 내민 포크를 입에 물었다. 동글동글한 콩알이 입안에 도르르 굴러들어왔다. 눈을 꾹 감은 채 한두 번 씹는 행세를 하곤 그대로 알갱이들을 꼴깍 삼켜버렸다.
“다음에는 더 꼭꼭 씹어 삼키렴. 그러다 체할라.”
브루스의 머리를 칼이 가볍게 퐁퐁 쓰다듬어주었다. 브루스는 우웩이라 말하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어보였다.
“착하다.”
“언제는 못됐다면서.”
브루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후 하고 칼이 웃었다.
“가고 싶은 데 있니? 이제 브루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자꾸나.”
칼이 상냥하게 제안했다. 아하, 그러니까 ‘상’이란 말이지? 어차피 칼은 브루스가 요구하는 일은 거의 빠짐없이 들어주었으므로 대단한 특혜는 아니었다. 코흘리개 애를 어르는 듯한 얄팍한 구슬림에 브루스가 발로 자신 앞에 앉은 칼의 무릎을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어차피 꿈쩍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브루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칼의 손을 떼어놓을 만큼의 효과는 있었다.
“고담.”
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브루스가 말했다.
“고담으로 가.”
칼은 잠깐 놀란 듯 안경 너머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다정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로 가려진 시야에 도시의 풍경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브루스는 자신이 살고 있던 동네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심하게 북적이는 인파나 길거리의 냄새, 곳곳에 산재한 소음들, 잘 다듬어진 길과 그 길로 이어진 후미진 골목, 방금 지나간 잘 닦인 구둣발, 아래로 한정된 시야에 들어오는 길바닥 위에 누운 사람 이 모두가 브루스의 감각에 익은 풍경이었다. 새삼 확인 차 모자를 들어 시야를 넓히면 마천루의 외벽을 장식하는 음침한 가고일상이 보였다. 지금 막 신문과 간단한 스낵을 파는 가판대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브루스는 앞에 1면을 내보이며 진열된 신문들을 곁눈으로 훑어보았다. 앞으로 치러질 시장선거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톱모델과 풋볼선수의 스캔들 따위가 새삼스럽지도 않게 장식되어 있었다. 도시는 이곳에 있었다. 그대로 무엇 하나 변한 것 없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브루스는 방금 지나친 건물을 기억하며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할지를 생각했다.
어느새 모자가 다시 브루스의 시야를 뒤덮었지만 브루스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다시 브루스를 칼이 잡아당겼다. 칼이 마주잡지 않은 손으로 브루스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빵빵 날카로운 경적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팽 하니 브루스를 훑고 지났다. 눈을 가리는 모자를 들어 올려 브루스는 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칼은 아무 말 없이 브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가 ‘괜찮니?’하고 묻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 브루스가 누군가와 시간을 보낸다면 그건 대부분 토마스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토마스는 그 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브루스가 가장 믿고 있는 존재였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으며 몰래 동경하고 있는 손위형제였다. 그런 토마스였지만 브루스는 항상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또렷하게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머리가 기민하며 가끔은 엉뚱하고 또 또래보다 그리고 자신보다는 훨씬-가끔씩은 부모님보다도- 어른스럽다는 것만 알았다. 그는 제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아이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토마스가 크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 물린 듯 귀찮아하거나 그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될 때 정도 그 당연함을 거만하게 기꺼워하는 게 브루스가 본 토마스의 표현의 거의 전부였다.
브루스는 어느 날의 일을 떠올렸다. 브루스가 보다 어렸을 때 저택 뒤에 있는 정원에서 장난감 비행기를 가지고 놀다 묘목을 심기 위해 파두었던 구덩이에 발이 빠져 호되게 넘어졌던 일이 있었다. 브루스의 손에 들렸던 비행기는 선단의 프로펠러가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옷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브루스의 무릎은 까져서 독하게 쓰라렸다. 브루스는 당황했고 아끼던 장난감은 망가져버렸으며 무릎은 아팠다. 브루스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몇 발치 떨어진 곳에서 토마스는 책을 읽고 있었다. 보통 토마스는 브루스의 요구에 잘 어울려주지 않았지만 브루스가 같이 놀자고 조른 끝에 브루스는 얌전히 놀고 자신은 그 옆에서 책을 읽겠노라며 타협한 결과였다. 탁,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하 하고 한숨소리가 들렸다. 브루스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고 토마스가 그 끝에 팔짱을 낀 채 브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음 좀 내지 마.”
토마스는 눈물이 도르르 떨어져 내리는 브루스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브루스의 울음을 ‘소음’이라고 토마스가 말하고 있었다. 브루스가 킁 하고 코를 삼켰다.
“약속 어겼으니까 나 들어간다.”
그리고 토마스는 미련 없이 저택으로 걸음을 옮겨버렸다. 얼마간 굵은 눈물을 툭툭 흘리던 브루스는 몸을 일으키고 절뚝절뚝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새로 깔아놓은 카펫에 흙먼지를 묻혔다며 화를 냈고 엄마는 기껏 사 입힌 옷이 그게 무슨 꼴이 나며 짜증을 냈다. 양말의 목이 젖을 정도로 피가 난 무릎을 치료받을 때는 알프레드의 차가운 눈초리를 견뎌야했다.
굳이 그 날만 아니더라도 토마스는 우는 일에 대해 쓸데없는 일이라 표현했다. 물론 그는 세상 남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 대해서 쓸데없는 일이라 평했지만 특히 눈물과 같이 감정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더더욱 가차가 없었다. 브루스는 제 감정이 주저 없이 드러나는 아이였으므로 토마스가 그런 말을 할 때면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또 조금은 욱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토마스에게 반박을 했다.
“하지만 내가 울면, 엄마가 매를 조금 덜 아프게 때린단 말이야.”
“그건 네가 엄마보다 약해서 그렇지.”
토마스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강하면 그딴 걸로 호소할 필요도 없어.”
도대체 엄마보다 강하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나저나 엄마는 엄마일 텐데. 브루스는 그 날도 토마스가 참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브루스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 밤에 보았던 토마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날 본 토마스의 얼굴이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브루스가 간과했던 사실임을 알았다.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은 착각이 아니며 실제로 발생한 일이었고 또 꽤나 예견되었던 것임도 인정해야했다. 그리고 브루스 자신도 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했다. 단지 브루스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경찰서로 달려간다? 겨우 살아난 목숨이 다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필요로 하는 선택지였으나 그게 브루스에게 좋은 일일지는 알 수 없었다. 고담 내에 있는 보육원 시설에 제 발로 걸어간다? 쉬이 상상이 가는 범위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브루스가 맞이할 미래에 고정적으로 자리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칼.
브루스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칼의 얼굴을 보다 다시 좌우를 대충 살핀 뒤 목적한 곳으로 걸어갔다. 사실 브루스가 생각하는 가장 최상의 선택지는 지금 브루스가 제 손에 붙잡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가 과거를 뒤바꾸거나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미래를 보장해주기엔 더없이 제격이었다. 진짜로? 브루스는 제가 물은 물음에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는 아직 그 골목길에서 들었던 칼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낯선 이의, 힘을 가진 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곧이어 자기 앞에 앉아서 폴폴 눈물을 흘리던 칼의 얼굴이 따라와서 브루스는 혼란스러웠다.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토마스에게서 본 적도 없는 감정의 발로를 생판 남인 남자에게서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령 그게 연기라 해도 그럼 그는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무일푼의 성가신 꼬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진실의 단편을 보인 칼에 대해 브루스의 태도는 유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그에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릴 만큼 브루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칼을 100% 믿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외계인이다. 그는 자신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어느 곳에 머무르는 이가 아니라고 했다. “태어난 곳은? 칼도 일단... 지금 여기 있으니까 태어난 거잖아. 그럼 거기는?” 브루스가 물었고 칼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칼은 브루스의 일은 예외로 하고 세상의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세상을 부유하는 칼이 과연 브루스를 위해 이 지구 위에 붙들려 줄까? 브루스는 종종 자신과 토마스의 양육비에 대해 투덜거리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따금 무언가를 요구하는 저를 귀찮아하는 엄마를 보았다. 제 자식을 키우는 일도 그렇게 두 사람의 성인 어른-그것도 웨인의 재력을 가지고 있는-에게 골치 아픈 일이라면 칼과 같이 물질에 대해, 관여하는 것에 대해 어딘가 저어하는 인물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의 성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칼은 자신을 잘 돌보아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브루스는 지금 이것이 단순히 일회성이기에 가능한 선행이지 한 인간의 평생, 아니 못해도 브루스가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한심하게도 또는 매우 얍삽하게도 브루스는 이제 칼이 좋아져버렸지만 그만큼 대비해야했다. 결국, 칼은 브루스의 곁을 떠날 테니까.
브루스는 칼을 이끌고 화려한 회전문을 지나 으리으리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브루스는 백화점 안내도를 확인한 뒤 다시 칼을 끌고 4층으로 향했다. 3층에서 4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디디는 브루스를 멈춰 세우며 칼이 말했다.
“브루스. 네 옷은 이쪽에―”
“나 아니야.”
브루스가 칼의 손을 이끌며 위로 올라가는 층계를 밟았다.
“칼이 입을 걸 살 거야.”
“뭐? 브루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자며.”
4층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기척이 보다 뜸해졌다. 브루스는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던 모자를 벗어 칼의 코트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칼은 보다 더 곤란해 하는 기색이 짙어져있었고 브루스는 그만큼 더 즐거워졌다.
“맞춤으로 하고 싶지만 지금 우리가 그런 가게에 들어갔다간 쫓겨날 거야.”
브루스가 양팔을 벌려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인 자신을 칼에게 선보이며 말했다. 칼은 이후로 브루스에게 옷을 몇 벌 더 마련해주었지만 브루스는 이것들을 가장 좋아했다. 브루스는 매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저긴 너무 촌스러워. 저긴 너무 튀고. 저긴, 오 세상에 지금 저거 세로줄 넣은 거야? 저 색에?! 저긴... 칼한텐 유치해. 아, 저기. 브루스의 눈에 꼭 들어오는 디자인의 옷들이 있는 매장이 보였다. 브루스는 주저 없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체구 좋은 손님이 가게 부스 쪽으로 향해오자 반색하던 직원의 표정은 이내 브루스와 칼의 행색을 보고 흐려졌다. 어딜 봐도 벌이가 될 법한 손님은 아니라고 점원은 판단한 모양이었다.
“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무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마치 일이 없으면 바로 돌아가 달라는 투로 점원이 둘을 훑어보며 인사했다. 직원의 등장에 당황한 듯 브루스가 붙잡고 있는 칼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브루스는 자신의 후드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직원에게 팁으로 내밀었다. 제법 버젓한 금은방에서 다이아를 거래한 덕에 브루스가 내미는 지폐는 어디 흠 없이 깔끔했고 꽤 뻣뻣했다.
“천천히 구경하세요.”
점원이 금세 웃는 얼굴이 되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할 일 없는 떠돌이들에게 잠깐 장소를 빌려주겠다는 듯 한껏 인자한 얼굴이었다. 점원이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자 브루스가 진열된 상품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브루스, 너...”
칼이 나직이 브루스를 불렀다.
“설마 칼 내가 지갑 가져간 거 몰랐어?”
눈앞에 보이는 재킷과 칼을 대조해보면서 브루스가 물었다. 음, 저기 마네킹이 입고 있는 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근데 좀 더 차분한 거. 브루스가 다음 상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혀 몰랐단다.”
그런 브루스를 보며 폭 한숨을 쉬듯 칼이 답했다. 이리저리 말끔하게 진열된 옷가지들을 뒤적이던 브루스가 움직임을 뚝 멈추고 칼을 올려다보았다.
“전혀?”
“전혀.”
“정말?”
브루스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 있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칼은 브루스가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알지 못해 당황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답해주었다.
“그래.”
브루스는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그 얼굴에 순간 칼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브루스는 대단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남의 물건을 가져간 일에 이렇게 즐거워하면 안 될 텐데. 칼은 뒤늦게야 책망하듯 브루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었다. 키득키득 브루스가 결국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난 칼이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것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되지.”
물론 브루스가 자기 지갑을 가져간 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칼은 일반론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브루스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려 칼의 말을 외면하는 시늉을 했다. 보통 칼은 주변에서 오는 위협이나 브루스의 행동에 대해 가볍게 저지하고는 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늘을 날고 주먹을 쥐어 석탄을 보석으로 바꿀 수 있고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고 시력과 청력이 뛰어난 칼 몰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브루스는 어쩔 수 없이 즐거웠다.
생각 외로 진지하게 물건을 살 생각인 듯한 둘의 모습에 점원이 다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브루스가 또 지폐 한 장을 건네자 점원은 브루스의 말에 따라 칼의 몸에 맞는 사이즈의 옷을 손수 찾아주었다. 그렇게 몇 번 매장 안을 왔다 갔다 하던 브루스가 칼의 코트를 뺏고 골라낸 옷들을 건네며 칼을 탈의실로 떠밀었다. 옷가지들을 안아든 칼이 우왕좌왕하는 얼굴로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브루스, 정말 꼭...”
“어차피 사두면 칼이니까 몇 년 입을 거 아니야. 다 입고 나와. 봐줄게.”
브루스가 칼을 탈의실에 밀어 넣었다. 끝까지 버티던 칼이 결국 어기적어기적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기 전 브루스를 보며 칼이 단단히 말했다.
“어디 함부로 가면 안 된다.”
“알았으니까! 빨리!”
겨우야 문 뒤로 사라진 칼을 보며 브루스가 칼의 코트를 끌어안은 채 손을 털었다. 브루스는 이제 말쑥한 차림을 한 칼을 볼 수 있겠거니 싶어 뿌듯해졌다. 칼은 몸도 다부지고 키도 크니까, 전에 영화에서 봤던 탐정처럼... 아니 잘하면 그보다 더 멋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담으로 온 목적 두 번째가 달성되는 셈이다.
우주선 안이나 브루스와 단 둘이 있을 때 칼은 필요한 경우 자기 힘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이런 세상 보통 일들에 대해서는 일반 사람들의 기준에 될 수 있는 대로 맞춰가려하는 편이기 때문에 칼의 몸집에 비해 조금 비좁은 듯도 보이는 탈의실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아까 매장 구석에 놓여있는 간의 의자와 그 위에 놓여있던 신문을 떠올리며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한 열 발짝 움직인 정도이니 이정도면 ‘함부로’ 어디 간 축에는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브루스의 기억대로 의자 위에는 신문이 놓여있었다. 브루스가 신문을 잡고 자리에 앉으며 칼의 코트를 둥글게 말아 무릎위에 놓았다. 신문을 펼치면 잉크냄새가 폭 퍼져서 브루스는 코를 씰룩였다.
길에서 1면만 훑어본 신문들처럼 별 특이한 일은 보이지 않았다. 브루스는 팔랑 얇은 신문지를 넘기면서 이걸로 칼이 조금은 자신이 만들어낸 돈을 쓰는 데 익숙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그래서, 칼이 돈이 나가는 데 덜 거부감을 느끼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익숙해지게 되면 어쩌면... 어쩌면, 조금은 더 오래 칼과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따위를 덧붙였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자신의 존재를 부담으로 느끼기 시작했으면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키지 않지만 목적 세 번째였다. 브루스는 문득 제 상반신을 거의 가리고 있는 신문이나 칼의 커다란 코트, 그리고 신문지를 잡고 있는 자기 손을 보았다. 자신은 한 없이 작다. 만약 브루스가 더 똑똑하거나 아니면 더 나이가 있었다면, 이렇게 무턱대고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브루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가 없다. 온갖 가정을 떠올려봐야 소용이 없었고 주어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 마저도 변변치 않은 것들뿐이라 문제였지만. 그나마 브루스에게는 운이 좋게도 칼은 좋은 사람, 아니 좋은 외계인이었고 그게 브루스의 앞일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사고실험으로 시간을 낭비할 여유를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기사의 제목들을 살피며 장을 넘기던 브루스는-지나간 장 구석에 크라임앨리의 가스관이 드디어 복구가 완료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손을 멈추었다. ‘웨인 엔터프라이즈, 아울즈 크로(Owl's Claws)의 경영진에 참가하다’ 아울즈 크로, 브루스는 낯익은 이름에 한 번 입 속으로 단어를 읊어보았다. 아울즈 크로는 고담 항구 쪽에 커다랗게 위치한 카지노의 이름이었다. 워낙 TV에서도 심심치 않게 커머셜이나 관련 뉴스들이 나왔기 때문에 어린 브루스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빠가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그 카지노의 프리미엄 입장권을 알아봐줄 수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던 게 기억났다.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어도 아빠가 쩔쩔매면서 이야기하던 곳이니 분명 어마어마한 곳이겠거니 브루스는 짐작했다. 지금 그곳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일정 지분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신문에서는 아울즈 크로를 고담에서 제일가는 도박장이라 소개하고 있었다. 불경기 속에서도 해가 저물지 않는 환락장이라고. 소년 CEO를 둔 기업이 보일 행보로는 가히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얘기하는 한편 이게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가에 대한 공허한 질문을 기자는 서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브루스의 관심은 토마스가 카지노를 사들였건 말았건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전에 정말 드물게도 토마스가 직접 읽어준 동요를 떠올렸다. 마치 마더구스의 노래처럼 잠자리를 지키는 동요라기에는 오싹한 시를 토마스가 좀처럼 없는 기쁜 얼굴로 브루스에게 가르쳐주었다. 내용은 고담을 부엉이 법정이 지켜보고 있고, 그들의 말을 발설한 자는 탈론이 그 머리를 취하러 온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생각해?” 토마스가 상기된 얼굴로 브루스에게 물었었다. 브루스는 거의 처음 토마스가 제 또래처럼 흥분한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서 “멋진 거 같아.”하고 답해주었다.
지금 이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브루스는 탈론(Talon)과 아울즈 크로 두 단어를 나란히 놓아보았다. 그때 브루스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칼?”
신문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면 칼보다 한참 왜소한, 하지만 자세만은 그 못지않게 꼿꼿한 남자가 브루스 앞에 서있었다. 브루스는 잠시 숨 쉬는 것도 잊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브루스가 익히 알고 있는 집사가 언제고 깔끔한 차림으로 뻣뻣하게 서서 자리했다. 브루스는 불현듯 뒷짐을 지고 있는 알프레드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을까를 생각했다.
“토마스 주인님께서 걱정하십니다.”
여상한 말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브루스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막힌 숨을 뱉어야했다. 머릿속에 차갑게 굳어들면서 귓가에 세 발의 총성이 메아리 쳤다. 탕! 탕! 탕! 네 형의 말을 들었어야지, 브루스. 싸늘하게 몸이 굳은 브루스는 자신을 향해 총을 쏜 집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런 브루스를 어디선가 불어온 따뜻한 바람이 재빠르게 감싸서 밖으로 데려나갔다.
브루스는 원래의 차림새가 된 칼과 백화점 라운지에 와있었다. 땅에 발을 디딘 브루스가 살짝 비틀거리자 칼이 조심스럽게 브루스를 벤치에 앉히며 시선을 맞춰왔다. 브루스가 품에 안긴 코트를 더 꼭 끌어안았다.
“브루스?”
두근, 쿵! 두근, 쿵! 아이의 심장이 매섭게 뛰었다. 브루스는 잠시 제 발끝만 보았다. 어린아이의 작은 발이 보였다. 브루스는 앞으로 제게 있을 일 중 가장 실천하기 쉬우면서 택할 수밖에 없는 길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지만 설마 ‘집’에서 브루스에게 접촉해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애초에 지금까지의 일들이 이상한 거 아니었어? 언제까지 칼과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집에서 브루스를 찾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브루스로서는 회피할 도리가 없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고담으로 굳이 온 네 번째의 목적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정해졌다.
“칼.”
꽉 쥔 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집에 가야 해.”
브루스의 귀가 제 말소리에 먹먹하게 막혀왔다.
6
끼이이, 침중한 소리와 함께 저택으로 이어진 길을 닫고 있던 검은 철문이 움직였다. 브루스와 칼은 서서히 반으로 쪼개지는 철문 위의 W자 장식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브루스는 고개를 돌려 자기 옆에 서있는 칼에게 시선을 주었고, 칼도 그와 거의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브루스의 얼굴을 살폈다. 브루스가 숨을 한 주먹 제 허파 안에 들였다.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후 브루스는 칼에게인지 자신에게인지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아이의 깔끔한 구두가 어느 곳 하나 어그러진 곳 없이 완벽하게 짜 맞춰진 벽돌길 위에 닿았다. 잘 펴진 어깨와 곧게 선 목, 망설임 없이 뻗는 다리가 과연 이 아이도 웨인의 도련님이구나 싶어 몰래 감탄이 나왔다. 칼도 천천히 브루스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걷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웨인저택으로 향했다.
브루스가 행선지로 고담을 언급했을 때 칼은 아이가 그간의 나날 동안 조용히 자신의 내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매우 당연한 일이었지만 왜일까, 칼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담’을 입에 담는 브루스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아니, 놀랐다기보다도 충격을 받았다는 쪽이 어감 상으로 더 적절한 것 같았다. 고담을 이야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바이탈 사인에 특별한 동요는 보이지 않았으며 시선 또한 올곧았다. 한 번은 생의 문턱을 지났던 브루스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칼 앞에 있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칼은 동당동당 소리를 지르는 브루스의 심장소리를 어쩔 줄 모르고 들었다, 이런 상태의 브루스를 집으로 보내야한다 이야기를 한다면 거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브루스는 마치 악몽에서 막 깨어난 때처럼 불안정했다. 분명 칼을 잡아끌며 돌아다니다 제가 고른 옷가지들을 주며 좁다래한 탈의실에 밀어 넣었을 때까지만 해도 브루스는 그저 즐거워하고 있었다. 칼이 바랐던 것처럼 꼭 그렇게. 하지만 어디선가 따박따박 규칙적인 발소리 하나가 아이 앞으로 찾아들고 그 뒤로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면서 브루스의 표정은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아이의 심장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자 칼은 주저 없이 아이를 감싸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 아주 잠깐 사이에 칼은 스쳐가는 시선으로 브루스를 겁에 질리게 한 인물의 얼굴을 보았다. 알프레드 페니워스. 침착한 얼굴로 제 부모의 부고를 맞이하던 어린 상속자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집사의 얼굴이 신문의 흑백 사진 속에 있었고 그 아래 캡션에서 칼은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집사의 눈동자를 아주 잠깐 마주했던 칼은 확신했다. 집사가 범인이다. 웨인부부를 살해하고, 브루스에게 총상을 입힌 자가 바로 이 남자라고 말이다.
칼은 우선 브루스를 진정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브루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얼굴은 한껏 굳은 채였고, 코트를 쥐고 있는 아이의 손은 하얗다못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칼은 브루스를 함부로 토닥이다 싸늘하게 얼어버린 아이가 혹여 어딘가 깨져버릴까 무서워서 꽃잎 위에 나비가 앉은 듯한 무게만으로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칼, 난 괜찮아.”
시선을 맞추며 그저 말없이 그러고 있는 칼에게 브루스가 까끌까끌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칼은 아이의 말을 듣다가 일부러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 뒤에야 긍정했다.
“그래.”
“오랫동안 이럴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래...”
“오늘은 그냥 칼이 멋있어지는 게 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천천히 아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너무 센 힘으로 주먹을 쥐고 있던 탓에 아이의 손이 저린 듯 잘게 떨렸지만 조금씩 조금씩 발간 혈색이 작은 손톱 끝까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살피면서 칼은 아이가 말을 끝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저 쪽에서 찾아올 줄은 몰랐네.”
브루스가 비죽 한쪽 입꼬리만 짧게 비틀어 올렸다.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칼은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아까 그 남자의 기척이 혹시라도 이곳으로 가까워질 것 같으면 그 전에 브루스를 데리고 여기를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럴 생각은 없는지 지하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칼이 몸을 일으켜 브루스가 앉은 벤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칼이 이동하는 것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던 브루스가 엉덩이걸음으로 조금 더 칼 옆으로 바싹 앉았다. 쇼핑을 시작하려는 사람들과 끝낸 사람들, 혹은 그저 모여 있기 위해 만난 사람들이 두 사람 앞을 막연하게 지나갔다.
“아까 그 사람.”
“알프레드?”
“그래, 그는...”
“집사야. 날 총으로 쏜 사람.”
브루스가 홀연하게 말했다. 칼의 머릿속에 총에 맞은 채로 두 구의 시신 옆에서 혼자 간신히 살아있던 브루스가 다시금 형체를 떠올렸다. 그때의 자신이 그저 가능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그 목숨을 저울에 올렸던 아이가 지금 자신의 옆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칼은 자신이 역겨워 목 아래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전부 없던 일로 할 모양인가 봐.”
브루스가 백화점 중앙의 돔 모양 천장에 휘황찬란하게 매달린 샹들리에의 반짝임 하나하나를 속으로 세어보며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는 어디에 알려지지도 않았으니까. 있던 걸 없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겠지. 굳이 토미를 들먹이면서 날 찾은 건 의외지만.”
“그의 말을 믿니?”
“그럴 리가.”
하, 하고 브루스가 시니컬하게 코웃음 쳤다. 하지만 이내 아이의 어깨는 한 뼘쯤 아래로 가라앉았다.
“...조금은 믿고 싶어. 그래서 문제지.”
“꼭,”
칼이 다시 브루스의 손을 잡으며 식어버린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칼은 머뭇머뭇 말을 꺼내다 잠시 멈추었다. 브루스가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잡힌 손을 까딱였다.
“꼭 돌아가야 하니?”
습 하고 브루스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옆을 돌아보면 브루스가 복잡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답변들이 뒤엉켜서 아이의 눈동자는 멈출 곳을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하지만 이윽고는 움직임을 멈춘다. 아이는 똑바르게 칼을 마주봤다. 브루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토미와 내가 한 이야기가 있어.”
그 날은 정말 오랜만에 토마스가 브루스와 어울려주었던 날이라고 했다. 최근 들어 토마스는 무슨 일을 하는지 종종 알프레드와 함께 저택 밖을 나가기 일쑤였고 브루스는 너른 저택에서 혼자 조로와 악당을 번갈아가며 연기해야했었다. 그 날 브루스는 잔뜩 화가 났었다. 토마스가 홈스쿨링을 택한 탓에 브루스도 자연히 그 옆에서 같이 저택을 방문한 가정교사나 통신기술을 이용한 교육을 받게 되어 브루스에게는 제대로 된 또래 친구가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부모님은 언제나 자신들의 일에만 관심이 많았고 토마스는 자신과 놀아주기를 기대하기에는 썩 적합한 형제가 아니었다. 브루스는 부모님에게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싶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개라고? 제발 철 좀 들어, 브루스!”
“넌 왜 그렇게 바라는 것 밖에 없니?”
얼굴 한가득 짜증과 귀찮음이 묻어난 부모님의 답변에 브루스도 신경질을 부렸다. 아빠는 열흘 전에 차를 바꿨고, 엄마는 사흘 전에 파티를 열면서 이브닝드레스와 비싼 보석들을 잔뜩 사들였는데 어째서 자신은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느냐고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며칠 정도는 부모님의 거절에 잠잠히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지만 그간 집안 사정을 고려한 결과 다시 말을 꺼낸 것인데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질타를 당하니 브루스는 서러워서 화가 치밀었다. 결국 브루스는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종아리를 다섯 대 맞고 자신의 방으로 쫓겨났다. 브루스는 울면서 자기 베개를 주먹으로 때렸다.
TV에서 털이 탐스러운 강아지가 브루스의 나이 또래쯤인 드라마 주인공에게 꼬리를 바쁘게 흔들며 달려가는 장면을 브루스는 제 눈동자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이따금 아이는 동네의 불량한 아이들에게 이죽임을 듣거나 심한 날에는 구타를 당했지만 그런 아이를 그의 강아지가 언제고 반겨주고 있었다. 아이는 강아지와 함께 무지개의 끝을 찾아 모험을 시작했고, 그리고 둘은 언제까지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친구였다. 브루스는 혼자 남은 시간이면 개에 대한 책을 읽거나 강아지를 돌보는 법들을 검색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정말 가지고 싶었던 블록 장난감의 한정판 시리즈나 리메이크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광선검, 유명한 클래식 모델들로만 구성된 자동차 모형 세트 등을 제 마음 속 깊이에서 버려버리고 오직 개가 키우고 싶다고 부모님에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그를 잘 돌보지 못한다면 밥을 굶겨도 좋고, 몇 대라도 때려도 좋다고 브루스는 부모님이 요구한다면 각서까지 쓸 생각이었다.
“부모님 정말 너무하지 않아?”
한참 상심을 삭이던 브루스에게 불쑥 토마스가 찾아왔다. 정말 듣는 것이 오랜만인 듯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웬일인지 토마스의 말투는 전에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브루스는 베개에 눈물을 문질러 닦은 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 집 돈은 어차피 저 사람들이 번 것도 아닌 데 말이야.”
토마스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브루스는 어딘가 믿기지 않는 기분이어서 자꾸만 눈을 찡그려 제 형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을 껌뻑이자 그 사이 또 눈물이 났었는지 후두둑 볼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브루스는 토마스가 혹시라도 그 꼴에 질려 나가버릴까 봐 서둘러서 그것들을 손등으로 훔쳤다. 토마스는 놀랍게도 인상을 쓰기는커녕 더 빙긋 웃으며 브루스에게로 다가왔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토마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브루스는 혹시 형의 말을 한 마디라도 소홀히 들을까 부랴부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모님이 없으면 우리가 돈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였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브루스는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이었다.
“부모님이 그렇게... 된 건 내 탓도 있어. 뭐라 하지? 방조범? 공동정범?”
하하, 하고 아이는 속이 빈 웃음을 지었다. 칼이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더욱 꼭 감쌌다.
“집에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있을 생각이면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몰라. 그 곳에 있으면... 언젠가, 어쩌면.”
끝은 두루뭉술했지만 심이 단단하게 잡힌 어조로 브루스가 말했다. 칼은 문득 자신의 지구에서 만났던 배트맨을 떠올렸다. 자신의 생각을 위해 폭탄을 삼키고, 슈퍼맨 앞에서 폭사도 서슴지 않던 유령 같은 그가 칼의 머릿속에서 차갑게 웃었다. 브루스의 박동은 어느새 평상과 가까워져있었지만 이제는 칼의 가슴이 오히려 동요하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그와 달라. 이 아이는—
“나도,”
칼이 한참 뒤에 말을 꺼냈다. 자신이 뱉은 말이 순간 조급한 듯 들려서 칼은 억지로 숨을 참으며 고삐가 풀린 듯한 말을 한 번은 멈추어 세운 뒤에 다시 이었다.
“함께 가마.”
“칼이?”
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브루스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꼬리를 잡지 못하고 늘어뜨렸다. 그러다 다시 힐끔 칼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그는 여전히 같은 얼굴이다. 브루스가 웃는지, 의아해하는지, 들뜬 건지, 놀란 건지 모를 애매한 얼굴을 했다. 도륵도륵 굴러다니는 아이의 표정이 재밌어서 칼은 웃을 수 있었다. 브루스는 그런 칼의 웃음을 뜻도 모르면서 따라 웃었다.
“네가 안전한지 확인해야겠어.”
브루스는 여전히 답을 하지 못했다. 매번 또박또박 자신이 할 말을 하던 아이가 말을 찾지 못하자 그 광경이 또 제법 신선했다. 칼은 왜 브루스가 종종 자신을 놀리려 드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병원에서 날 네 보호자라고 했거든.”
칼이 빙긋 웃었다. 브루스는 한참이 지나도 대답을 하지 못하다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브루스는 꽤 오랜만에 자신이 주로 입던 차림새로 돌아와 있다. 풀이 잘 먹여져서 반듯한 셔츠의 칼라나 몸이 움직일 때 각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선명한 바지며 웃옷이 익숙한 듯 생경했다. 칼이 잠깐 나갔다오겠다며 사들고 온 것들이었다. 옷걸이에 잘 걸어진 채 옷에 망가짐이 없도록 포장 된 한 세트의 아동정장을 브루스는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왜, 아니... 이럴 거면 자기 옷을 사라고!”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산거야? 브루스가 한껏 인상을 쓴 채 외쳤다. 브루스는 여전히 칼의 차림새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칼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있는 돈은 둬봐야 재밖에 안되잖니.”
“그러니까 내 꺼 말고—”
“내 돈은 내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라고 네가 얘기 했었지.”
칼이 고집스럽다싶을 정도로 브루스의 말을 잡아챘다. 브루스는 칼의 기세에 눌려서 그건 그렇지만 하고 입 안에서 말을 굴렸다. 아까부터 칼은 어딘가 막무가내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브루스에게 칼은 사온 물건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죽 아이 옆에 늘어놓았다. “그 정돈 나도 알아!” 브루스는 한동안 멍하니 그걸 보다 소리쳤다. 브루스가 그만 한숨을 폭 쉬고 말았다.
“칼... 잘 이용당하거나 그러지 않아?”
브루스가 정말,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칼을 바라봤다. 칼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일련의 결과로 브루스는 저택과 위화감이 전혀 없는 차림으로 정말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저택으로 이어진 제법 그 거리가 있는 길을 태연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길의 양 옆에는 잘 다듬어진 조경이 번듯하게 갖춰져 있다. 그러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유독 한 곳이 다듬어진 나무 한 그루도 없는 채 휑하니 비어있었다. 사뿐하게 앞으로 나아가던 브루스는 그 이질적인 공터에 걸음을 멈췄다. 잡초하나까지 깔끔하게 갈아엎어서 다듬은 듯 흙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브루스?”
칼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불렀다. 브루스는 다시 멈춘 걸음을 움직였다. 칼은 제 걸음에 맞추어 흔들리는 아이의 손을 잠시 보다가 한 손을 조용히 잡아보았다. 다행히 브루스는 그 손을 마주잡아주었다.
어느덧 현관 앞이었다. 멀리서 보던 것보다 코앞에 서있는 저택은 그 위압감이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생생했다. 왁스칠이 꼼꼼하게 된 묵직한 나무문은 눈으로 보기에도 견고했다. 브루스는 문 옆에 위치한 메두사의 머리를 본 뜬 초인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그에서 눈길을 돌리고 바로 현관의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문은 생각 외로 스스럼없이 열렸다. 기름칠이 잘 된 경첩은 작은 소음하나 나지 않고 매끄럽게 움직였다. 저택 안에 있던 공기가 바깥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브루스에게는 새삼스럽지만 익숙한 것이었고, 칼에게는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브루스는 반사적으로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두 사람은 열린 문을 통해 조용히 침잠해있는 저택의 내부로 발을 들였다. 브루스가 손에서 놓아버린 현관문이 스르르 닫히자 등 뒤가 바깥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
저택 안은 넓었고 매우, 매우 조용했다. 브루스는 주름 하나 없이 깔린 카펫을 조심히 밟으며 중앙에 있는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검은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윽.”
퍽하고 짧고 간결한 소리가 난 뒤 조용한 신음이 말끔한 바닥 위에 떨어졌다. 칼은 브루스를 뒤로 물리며 자신들을, 아마도 브루스를 노리고 달려든 새의 형상을 본 딴 복면을 쓰고 있는 자를 붙잡아 생명에 해가 없을 정도로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워낙 마음이 급했던 탓에 자객의 팔을 붙잡다가 그의 어깨를 탈골시킨 것 같았지만 용케도 그는 제대로 된 비명 하나 내질 않았다. 칼은 제 손에 잡힌 수상한 이를 저만치로 굴리듯 내던져버렸다. 혹시 또 다른 인물이 있을까 주위를 살폈지만 이제 익숙해진 브루스의 소리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된 소리, 그리고 브루스 또래쯤으로 추정되는 소리 셋이 전부였다. 칼은 혹시라도 쓰러져있는 자객이 다시 일어날까 계속 그쪽을 쳐다봤다. 그런 칼을 갑자기 브루스가 답싹 붙잡았다.
“칼, 싸움도 할 줄 알아?!”
브루스가 놀라서 자신의 팔을 잡은 줄만 알고 아이를 달래기 위해 몸을 돌려 마주한 칼은 아이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까치발마저 든 채 칼의 얼굴을 신기하게 들여다보던 브루스가 저 바닥에 쓰러진 인물과 칼을 자꾸만 번갈아보았다. 아이의 뺨이 상기된 것을 보자 칼도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브루스 이건...”
“대단해. 칼! 영화 같았어!”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브루스가 외쳤다. 칼은 마치 처음 미소를 지어보는 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잔뜩 신이 난 브루스를 달래려는지 아니면 자신을 진정시키려는지 의미가 애매한 손길로 칼은 브루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어린애가 돈이 있다 보니 여간 사는 게 흉흉해서 말이야.”
하지만 곧 저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브루스의 표정과 칼의 행동이 멎었다. 또박또박 분명하고 매끄러운 발음으로 소년이 이야기했다. 쫑긋 올라있던 브루스의 뒤꿈치가 얌전하게 땅 위로 내려갔다. 브루스는 아까의 생기를 몽땅 감춰버린 얼굴로 소년의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바로 세웠다. 커튼으로 가려진 커다란 액자들을 지나 계단을 내려오는 소년은 브루스보다 머리 하나에서 조금 정도 더 키가 있었다. 차분한 걸음걸이로 층계를 밟아 내리던 소년은 아직 한참은 계단이 남은 위치에 멈춰 섰다. 토마스가 브루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늦었네, 브루스.”
“다녀왔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브루스가 차분하게 마주 인사했다. 심지어 브루스는 살짝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토마스의 눈썹 한쪽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손님이 있으면 소개를 해줘야지?”
토마스는 마치 잘 짜인 연극을 하듯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 웃으며 살갑게 말했다.
“이 사람은 칼이야. 칼은...”
브루스가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브루스는 칼을 길 잃은 자신을 데리고 저택까지 동행해준 사람이라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덥석 브루스의 뒷말을 칼이 이어버렸다.
“나는 다친 브루스를 발견했단다. 브루스가 많이 아파서 바로 집에 돌아올 수 없었지.”
브루스는 당황한 듯 파닥 소리가 날 것 같은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칼을 보았다. 칼은 꺼릴 것 하나 없다는 당당한 빛으로 등잔만 해진 브루스의 눈동자에 답했다. 사실이잖니, 칼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브루스가 눈을 내리깔며 어휴, 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흐음, 브루스 네가 집에 전화 한 통 할 줄 모르는 갓난애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사고는 적당히 쳤으면 좋겠어. 이제 부모님도 안계신데 언제고 철부지처럼 굴면 곤란해.”
브루스가 주먹을 꼭 쥐었다.
“알고 있어.”
브루스는 덤덤하게 말하며 칼의 팔을 잡고 성큼성큼 계단 위로 올라갔다. 브루스는 금방 토마스가 있던 층계까지 올라가 그를 마주했다. 토마스의 눈이 조용히 가늘어졌다.
“손님방 비었지?”
브루스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칼이 거기서 머물 거야.”
“맘대로 해.”
토마스 역시 별스럽지 않게 대꾸했다. 브루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칼은 토마스가 자신을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쏘아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커다란 식당 안에는 기다란 식탁이 놓여있다. 세 사람은 그 식탁 주위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고 집사가 한 발 뒤에 서서 식사시간을 돌보았다. 여느 레스토랑은 쉬이 명함도 내밀지 못할 법한 요리들이 상 위에 차려져 있었지만 마치 지금 이 모든 것이 보기 좋게 장식된 가짜인 것 마냥 식탁에는 살가운 말 한 마디 오고가지 않았다. 칼은 이런 꺼림칙한 분위기의 식사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어서 오히려 태평한 생각이 들었다. 브루스는 칼이 사왔을 때는 맛있게 먹던 빛깔이 먹음직스러운 로스트 치킨이나 호두알이 박혀 고소한 냄새가나는 호밀 빵에 손길하나 주지 않고 제 앞에 있는 말간 스프만 입에 댔다. 그 와중에도 윤이 나는 숟가락을 손에 잡은 아이의 손이 더없이 반듯했다. 칼은 브루스의 호흡과 박동에 신경을 기울였다. 저택에 들어온 후부터 브루스의 표정은, 처음 칼이 수상한 사람을 때려 눕혔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디하나 치우침 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아이의 속은 전혀 그렇지를 못했다. 브루스의 겉과 속의 차이를 생생하게 보고 듣고 있는 칼은 그런 브루스가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더 안쓰러웠다. 네가 그럴 필요가 있니? 칼은 이따금 드는 질문을 입 밖으로 결코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칼이 브루스에게서 이상을 포착하고 아이를 불렀다.
“브루스?”
얼마 되지 않는 행동반경을 보이던 아이의 손은 이제 숟가락마저도 아예 놓아버렸다. 브루스가 색색 숨을 몰아쉬자 아이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칼이 의자를 조금 뒤로 빼며 브루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브루스의 맞은 편 끝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알프레드.”
서늘하게 침착한 목소리가 제 뒤의 그림자에서 조용히 서있던 알프레드를 불렀다. 집사는 신속하지만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소리 없이 브루스의 곁에 다가갔다. 아주 잘 훈련받은 이의 움직임이었다. 칼은 신경이 곤두서서 집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였다.
“일어나시죠, 브루스 도련님.”
집사는 아슬아슬하게 정중하지만 고압적으로 말했다. 열에 얼굴이 달아오른 브루스가 제 입술을 깨물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루스, 내가—”
칼이 반쯤 몸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세 쌍의 눈동자가 거의 일제히 칼에게 향했지만 칼은 브루스만을 보았다. 아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먼저 올라갈게.”
브루스가 작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칼은 그게 온전히 자신에게 향한 말임을 알았다. 후들거리던 아이의 몸이 금방 꼿꼿해지면서 집사의 옆에 단정히 섰다. 브루스는 집사가 이끌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식당을 나갔다.
“받으시지요.”
잠옷으로 갈아입은 브루스는 칼이 사준 옷을 반듯하게 걸어 잘 정리해두었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새 옷에 주름이 잡히는 것은 싫어서 브루스는 퐁퐁 마지막으로 정리한 옷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런 브루스에게 바깥에 나갔던 집사가 쟁반 위에 물 한 컵과 약을 담고 돌아왔다. 컵 옆에 있는 약은 브루스가 삼키기에는 조금 큰 듯한 캡슐로 된 약이었다. 브루스는 결국 독기 서린 눈을 감추지 못한 채 알프레드를 노려보고 말았다.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도무지 적의가 가시질 않아 브루스는 위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직 제 감정을 온전히 감추고 다루기에 아이는 많이 어렸고 미숙했다.
“독은 아닙니다. 흔적 없는 독을 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요. 도련님께 그걸 감수할만한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집사가 말끔하게 말했다. 브루스가 허 하고 크게 코웃음 쳤다. 우리 집사님은 참으로 친절도 하시지, 어차피 검시 따위 크게 소용 있는 일도 아니면서 저렇게 염두에 두는 듯 이야기하다니.
“날 용케 찾았던데?”
“토마스 주인님께서 걱정하셨으니까요.”
“진심이야?”
브루스가 싸늘하게 집사를 바라봤다. 알프레드가 토마스에게 이상할 정도로 헌신적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착각을 그대로 믿고 있을 만큼 맹목적일 줄은 몰랐다. 브루스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집사의 눈이 점점 더 검게 굳어갔다. 지금 화를 내는 건가. 브루스는 성의 없는 손길로 쟁반 위에서 약과 물을 잡아챘다.
“삼키세요.”
알프레드가 딱딱하게 말했다. 브루스는 금방이라도 컵에 담긴 물을 앞의 남자에게 끼얹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아직은... 브루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약을 삼켰다. 역시나 조금 컸지만 홧김에 오기가 생긴 덕에 목이 메지 않고 바로 삼켜낼 수 있었다. 브루스가 하는 양을 감시하듯 내려다보던 알프레드는 아이가 물 컵을 비우자 미련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집사가 문 뒤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확인한 브루스는 그가 걷고 있을 경로를 노려보며 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숨을 죽이고 욕을 퍼부었다.
혼자가 된 브루스는 겨우야 조금은 긴장이 풀려서 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커다란 베개 위에 머리를 뉘이면 브루스는 이곳이 자신의 방이구나 하고 별스런 생각을 한다. 내 침대가 이렇게 컸었구나. 브루스는 이제껏 자신은 이 방에서 지내왔을 텐데 이상하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 칼과 있던 우주선이라는 게 조금 신기했다. 거기서 있던 기간이 그렇게 길었던 것도 아닌데... 역시 가장 최근의 기억이라서일까. 브루스는 자기 방이 이렇게 넓은 줄 알았다면 칼도 이 방에서 지내면 좋았을 걸이란 생각을 했다. 칼이 그렇게 오랫동안 여기 머물지 않을 거라면 어차피 그는 자신과 한동안 같이 선내에 있었으니까 그 기간이 조금 길어져도 괜찮지 않을까싶었다.
토마스가 칼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브루스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저택에 발을 디뎠을 때 달려들었던 사람은 브루스가 아닌 칼을 노리고 있었다. 브루스는 저보다는 한참 높은 위치로 팔을 휘두르던 사람의 그림자를 다시 기억했다. 집에서는 브루스가 동행이 있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칼은 브루스가 어느 정도 저택 안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떠나겠노라고 이야기했다. 그건 한 일주일일까? 아니면 한 달? 혹시 일 년? 브루스는 곰곰이 날짜를 짐작해보았다.
브루스는 칼이 무사하게 이 저택을 떠나 그의 원래 여행길로 발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랐다. 우선 그가 떠나기 전에 부모님의 방을 뒤져서 챙겨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그에게 쥐어줄 생각이었다. 칼이 만든 게 아닌 원래 세계에 있던 것이라면 칼도 조금은 거리낌 없이 자기를 위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칼은 또 자신이 아닌 브루스를 위해 제 돈을 쓰고 말았다. 처음 칼에게 옷을 받았을 때 브루스가 했던 감탄사가 가슴에 남았던 건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브루스는 칼이 준 것들이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칼은 불평 없이 저 같이 성가신 꼬맹이와 놀아주었고... ...잠이 와. 약기운 탓인지 이상하게 잠이 쏟아진다. 절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는데 수마가 자꾸만 브루스의 눈꺼풀 위로 내려왔다. 몸에 돌던 열도 지금은 많이 가신 것 같았다. 어쩌면 불편한 식사자리에 몸이 꾀병을 부린 걸지도 몰랐다. 브루스는 더는 자기 힘으로 제 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내일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칼에게 괜찮다고 얘기해줘야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브루스는 결국 잠이 들었다.
“위가 신경 쓰이시나 봐요?”
음식은 손에 대지 않은 채 칼은 제 몫으로 나온 차로만 입을 축이며 언제쯤 자리를 일어날까 가늠했다. 그런 칼에게 토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건 토마스는 단정한 얼굴로 식사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브루스가 괜찮은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양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토마스가 하는 말을 들으니 자신의 노력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칼은 다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워낙 집에만 있던 애니까요. 혼자 나다니다가 탈이 난 모양이에요. 정말 칠칠치 못하다니까.”
토마스가 나이프로 닭다리 살을 정교하게 발라냈다. 소년의 동작은 예전 칼이 슈퍼맨이던 시절에 ‘동무’라 불렀던 고위직 인사들에게서도 좀처럼 보지 못했을 만큼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절제되고 절묘해서 적확히 필요에 의한 움직임의 집합이었다. 조금 꺼림칙할 정도로.
“브루스는 피를 흘리고 있었어.”
칼이 덤덤한 어조로 심상하게 말했다.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는 토마스는 여전히 차분했다. 소년은 소리 없이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브루스에게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통보한 주제에. 이 집의 인원들이 아이에게 하는 양을 보면 도무지 그 위험한 머릿속에 뭣들을 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 브루스를 혼자 둔다고? 칼이 속으로 혀를 찼다.
“너희들의 부모님과 같이 있었지.”
“그래요? 경찰들은 다른 흔적에 대해선 얘기하나 없던데. 신고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아, 하긴. 고담시경이 일처리가 허술한 건 유명하죠.”
이번에 토마스는 샐러드 볼에 담긴 방울토마토와 양상추를 제 접시 위에 덜었다. 칼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하지 않았니?”
“그러는 당신은 지나치게 남의 집에 간섭하시네요.”
마주친 토마스의 눈이 어느새 계단에서 마주했던 그것이 되어있었다. 브루스를 그 골목에 그렇게 놔둬놓고 간섭하지 말라는 건가? 어차피 들어줄 요구도 아니었지만 귀로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황당해서 칼은 그만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도대체 브루스를 어쩔 생각으로... 칼은 이를 악물었다. 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긱, 하고 칼이 앉았던 의자가 식당 바닥을 거칠게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만 실례하지. 대접 고맙군.”
“별말씀을요.”
칼은 단박에 식당을 빠져나갔다.
“브루스?”
칼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면 새근새근 안정된 숨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덮고 있는 이불이 호흡을 따라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칼은 그 모습을 벽하나 막히지 않은 육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어깨와 뒷목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칼은 조용히 브루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약을 먹어서일까? 아이의 얼굴색은 식당을 떠났을 때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무엇보다도 브루스가 문제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방은 아이가 지금껏 자라온 그 자신의 방이었다. 마음이 놓일 수밖에 없겠지. 칼은 그런 유의 안정감을 직접 경험해본 일이 없어 온전하게 알 수 없었지만 어설프게 짐작정도는 해보았다.
아까 전 집사의 입에서 ‘독’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얼마나 초조하던지. 칼은 몇 번 이고 자리를 박차서 나가고 싶었지만 우선은 참아야 했다. 첫째로 브루스가 칼에게 자신을 지나치게 감싸고돌지 않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토마스 웨인과 이야기를 해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렇게 에두르지 않아도 더 쉬운 방법으로는— 칼은 징글맞게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에 끈질기게 고개를 저었다. 칼이 방에 놓여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가져와서 브루스의 옆에 앉았다. 칼은 단순히 힘과 자신이 하려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만으로 움직이기에 세상이 너무나 복잡하고, 자신은 매우 어리석으며, 미래는 쉽게 망가져버린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한바 있었다. 칼은 예전의 자신이 그랬듯 혹시 브루스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작은 병속에 가두려는 듯 굴게 될까봐 여전히 겁이 났다. 최선이라 생각한 길이 그저 자신만의 욕심이라면, 이곳의 브루스가 칼에게 그가 한 모든 것이 괜한 참견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칼의 머릿속으로 끝 간 곳 없는 상념들이 찾아들었지만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임을 칼은 참 늦게 깨달았고 이제야 시행해보는 중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이미 칼은 이 지구의 위에 발을 붙였고, 브루스 웨인을 알았으며, 지금 이곳에 있다.
“브루스.”
칼이 브루스를 작게 부르며 아이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아이는 잠결에도 고개를 돌려서 작게 웃어보였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릿하게 가슴이 쑤시자 칼은 그것을 울 것 같이 웃으며 통증을 삭였다. 브루스, 내가 또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칼은 제 불안을 내리누르며 생각했다. 브루스는 제멋대로니까, 계속 그럴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잘 자렴, 브루스.”
칼은 조용히 아이의 잠을 지켰다.
“저 남자.”
말끔하게 치워진 식탁 위에는 얼마쯤의 차가 남아있는 찻잔 하나만이 덩그러니 낯선 이가 앉았던 자리 앞에 남았다. 토마스는 그것을 불쾌하게 바라봤다. 소년이 제가 가늠해두지 않은 범주의 일이 벌어질 때면 으레 보이는 표정이었다. 알프레드는 묵묵히 어린 주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독이 듣지 않았어.”
“그렇군요.”
토마스의 입술이 비틀렸다. 잠시 미소와도 비슷한 호선을 띠던 그 모습은 금방 화가 난 듯 치켜 내려가다 결국에는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알프레드.”
“네, 주인님.”
“놈의 정체를 알아내.”
토마스가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적당한 곡선이 우아한 찻잔을 가리켰다.
“주인님의 바람이시라면.”
집사가 더없이 공손하게 제 하나밖에 없는 주인에게 답한다.
7
하나, 둘, 셋... 아이는 위로 치솟다 다시 땅을 향해 떨어지는 공의 움직임을 고개로 따랐다. 통, 통, 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빨간 공이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는 저택 안에서 혼자 선명하다. 브루스는 힐끔 제 옆에 있는 커다란 문을 보았다. 서재로 통하는 문이었다. 원래는 엄마와 아빠 두 사람 모두가 이용하는 공간이지만 엄마는 활동적인 사람이어서 집안에 있기보다 바깥을 나가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서재는 거의 아빠의 차지였다. 마른 체구의 아빠가 이 커다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설 때면 브루스는 아빠가 스스로 들어간다기보다 억지로 떠밀리는 것 같아서 웃기다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빠는 늘 무언가가 자신의 신경줄을 잡아채는 듯 찡그린 표정으로 부루퉁해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브루스는 저에게 돌아오는 공을 잡아 옆구리에 꼈다. 시큰둥한 얼굴로 문을 지켜보던 아이는 거리낌 없이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열린 문 사이로 착 가라앉은 서재가 드러나자 브루스는 휙 하니 그 안으로 제가 잡고 있던 공을 던졌다. 통, 통, 통통. 빨간 공이 데구루루 굴러서 방안을 활보한다. 브루스는 공을 좇아 방안으로 발을 들여 넣었다. 제 자신을 위해 준비된 놀이터로 들어서듯 브루스의 행동은 별스럽지 않았다.
눈을 뜨면 잠이 금방 들었던 것치고는 머리가 무거웠다. 브루스는 꾹 달라붙어서 쉬이 떨어질 생각을 않는 눈꺼풀을 손등으로 비비며 끙끙거렸다. 몇 번 이불 속에서 몸을 뒤치락댄 후에야 브루스의 시야가 흐리게 밝아온다. 부옇게 지나치게 높은 천장이 보였다. 집, 집이구나, 집이지... 브루스는 몸질을 멈추고 멀거니 떠있는 천장을 눈으로 더듬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충분히 지금 상황을 되새긴 다음 대강의 시간을 확인하려고 브루스가 몸을 옆으로 돌리자 눈을 감고 있는 칼이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에 비해 한참은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있는데도 칼은 불편하지도 않은지 한 팔로 브루스의 베갯맡을 감싸고 고개는 거의 수그리지 않은 자세로 잘도 잠을 자고 있다. 브루스가 베개 위에서 고개를 젖혀 칼의 손이 제 머리 위에 있는 걸 알고 제 손을 들어 확인하며 뒹굴 몸을 뒤집었다. 칼의 손목에는 시계가 있었다. 칼이 가진 물건이 보통 그렇듯 시계도 역시 새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시계판은 거의 브루스의 손바닥만 했다. 그래도 워낙 칼은 다부져서 그게 과해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계에는 시간만이 아니라 달력까지 표시되었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것들 중 무엇하나도 이곳과 맞는 것은 없었다.
브루스는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바동바동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브루스가 둥그런 안경 안쪽으로 손을 뻗어 꾹 감긴 칼의 눈매를 잡았다. 아이는 별안간 그의 눈꼬리를 잡고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렸다, 혹은 짝짝이로 만들었다하며 저 혼자 장난을 걸었다. 그 움직임에 뿔테안경이 달싹였다. 아, 아까 되게 웃겼어! 브루스가 입안에 꾹 웃음을 담고 제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그러다 칼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쿡쿡, 목 안으로 삼키는 진동이 손끝에 닿아오자 브루스를 얼른 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동시에 칼이 눈을 떴다.
“잘 잤니?”
“졸려.”
웃음기 서린 물음에 브루스는 시치미를 떼듯 불퉁하게 답했다. 안경알 너머에서 둥근 호선을 그리는 칼의 눈매가 조용히 브루스를 살펴보았다. 브루스가 다시 칼에게 팔을 뻗어 그의 안경알 위에 손으로 돔을 만들어 까맣게 덮어버렸다.
“열 안나. 나 괜찮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결국 칼은 하하하고 소리 내서 웃는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칼은 조심히 브루스의 손을 떼어냈다. 지금 이렇게 아침부터 저에게 장난을 치는 브루스를 보니 한시름을 덜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브루스의 열이 내린 것은 벌써 아이가 깨어나기 30분 전에도 진작 재차 확인을 마친 참이었다. 집사의 입에서 나온 불온한 단어도 있고 해서 칼은 밤 내내 브루스의 바이탈 사인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이라도 브루스가 괴로운 기색이 보이면 칼은 바로 아이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브루스는 밤 동안 정말 평온하게 잠을 잤다. 예전에는 제 시선 때문에도 잠에서 일어나던 브루스였기 때문에 칼은 예민한 아이가 혹시나 간만에 찾아온 단잠을 깰까봐 최대한 제 기척을 죽였다.
“왜 그렇게 불편하게 자? 그 방 혼자 있기 무섭지?”
브루스는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어투로 칼에게 물었다. ‘무섭다’는 말이 아주 엇나간 것은 아니어서 칼은 어깨를 작게 으쓱해보였다. 브루스는 아까의 잠기색은 떨쳐낸 듯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칼 울보인거 아니까 여기 같이 있고 싶으면 그래도 되는데... 이거 봐, 넓잖아!”
브루스가 제가 앉은 침대 위를 두 손으로 팡팡 두드리며 종알댔다. 아이는 부산스럽게 제 침대의 폭신한 정도나 방에서 볼 수 있는 전망(“칼 우주선은 어떻게 된 게 창문하나 없잖아. 그렇게 답답한데 있다간 우울증에 걸릴 거야.” 브루스가 제법 걱정스럽게 덧붙였다.)이나 또 자신이 퍽 얌전한 성질이라는 점 등을 들었다. 꽤나 장황하게 제 방에 칼이 같이 있어도 되는 이유들을 늘어놓는 브루스의 말을 음악처럼 들으며 칼은 편안한 마음으로 웃었다.
“글쎄... 언제까지 네가 그 말을 해줄지 모르겠구나.”
“나 내가 한 말은 잘 지킨다고!”
한 번, 두 번 정도는 어겼지만... 작게 웅얼웅얼 덧붙이며 브루스가 볼에 바람을 가득 집어넣었다. 자신의 제안에 칼이 의문을 표하는 게 퍽 섭섭했던지 아이는 매섭게 칼을 노려보며 칼의 손등을 자근자근 꼬집었다. 그 모양이 꼭 결과 다른 방향으로 쓰다듬어 잔뜩 성이 난 고양이 같았다. 칼이 브루스를 달래듯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몇 년 뒤면 넌 혼자 있고 싶다면서 날 쫓아내게 될 걸? 그게 5년일지, 3년일지... 1년일 수도 있겠군. 아이들은 빨리 자라니까.”
그러니 처음부터 내가 머물 곳이 따로 있는 편이 좋을 거 같단다. 칼이 차분하게 말을 하자 모가 나있던 브루스의 눈이 누그러진다. 그러다가 멍하니 깜빡인다. 파란 눈동자가 도르르 구르면서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반추한다. 내가 자라? 칼이 머물 곳? 브루스가 결국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뭐?”
“너는 금방 클 테니까 내 방이 필요하단다.”
칼은 또박또박 답해주었다. 하지만 브루스의 눈에서 껌뻑껌뻑 떨어져 나오는 물음표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러다 멈칫 브루스의 생각이 어딘가 즈음에 길을 멈추고 아이의 작은 방황이 끝났다. 브루스는 파드득 침대 위에서 벗어나며 의자에 앉아있는 칼을 잡아끌었다.
“브루스?”
“나, 나! 옷 갈아입을래!”
꽤 되는 거리를 영차영차 칼을 잡아당긴 아이는 칼의 등을 밀어 제 방에서 쫓아냈다. 칼은 눈을 둥글게 뜨며 제 등 뒤로 닫힌 아이의 방문을 바라보다 다시 어깨를 으쓱한 뒤 얌전히 그 문 앞에 섰다. 브루스가 귓가가 빨개질만한 얘기를 자신이 했던가? 칼은 조용히 자신이 한 말을 되돌아보았지만 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을 닫은 브루스의 눈은 다시 바쁘게 깜빡이기 시작한다. 외계인은 시간관념이 이상한 걸까? 칼이 차고 있는 시계는 시침, 분침, 초침, 년, 월, 일 모두가 전부 엉망이었다. 그런 엉망인 시계를 보고 사는 칼이니까 브루스가 안전하겠다는 확신이 생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브루스가 예상했던 것과는 한참 다른 단위를 가진 게 이상한 건 아닌 거 같았다. 아님 그보다 사용하는 말 자체가 어딘가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칼이 자신에게 했던 말에서 ‘떠난다.’는 부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갑자기 왕왕 불어난 칼의 체재기간에 당혹하고 있었다. 그게 곤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아냐, 내일이라도 내가 다 자라고 안전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브루스가 엄하게 제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다 자신이 닫은 방문을 바라본다. 문을 짚은 아이의 손은 그에 비해 훨씬 작다.
“어... 지금 이게 그거야?”
브루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서재 안은 항상 이상하게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 덕분에 인상 탓인지 자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못해 보이는 아빠도 일단 서재 안에 있는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꽤 그럴싸한 어른이 되었다. 그도 전화 몇 통이 걸려오고 나면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브루스는 예전 같았으면 단박에 혼이 날 것을 알면서도 아랑곳없이 서재 안에서 공놀이를 했다. 어차피 주인 없는 방이었고, 설령 주인이 새로 정해졌다면 제 또래 아이가 저를 혼낼 권한은 어디 있는가 싶었다. 통, 통 이곳저곳에서 공을 튕기며 브루스는 심상한 눈길로 서재 안을 죽 훑어보았다. 위로 치솟는 공은 당연하지만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브루스에게로 돌아온다. 아니, 정말 당연한가? 브루스는 잠시 땅 위로 몸을 띄우는 칼을 생각한다. 브루스의 손이 그때 각도를 틀어서 상하로 움직이던 공의 경로를 비틀었다. 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공은 마호가니로 된 번질번질한 책상을 때린다. 의도했던 것보다도 세게 두들겼는지 마치 목재를 부술 듯이 큰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어어...”
브루스는 짧게 어깨를 떨어뜨리며 매우 유감스럽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행동이 가구에 별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공을 계속 옆으로 밀어 가구에 맞혔다. 쾅! 쾅! 쾅! 큰 소리를 내며 공이 사정없이 책상을 때렸다. 아마도 서랍들이 있을 뒷부분이었다. 몇 번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저 혼자 공을 던지던 아이가 제게 돌아오는 공을 무시하고 조르르 책상 앞으로 간다. 공이 부딪쳤던 충격으로 잘 닫혀 있던 서랍들 중 하나가 아주 조금 삐져나왔다. 생각처럼은 안 되는데. 브루스가 남몰래 칫 하고 혀를 찼다. 차라리 부술 걸 그랬나? 브루스가 잠깐 생각하지만 곧 천진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며 마치 새로운 놀잇감에 정신이 팔린 산만한 아이처럼 책상의 서랍들을 전부 바닥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스탠드며 전화기, 필기구들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보고 가세요, 사세요, 웨인 씨의 유류품이랍니다!”
아이는 마치 길거리 상인이라도 된 마냥 어지럽게 널린 물건들 사이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과장스럽게 외쳤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신중한 눈으로 바닥에 널린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한다.
“흠. 종이에, 종이에, 종이뿐이잖아요.”
브루스가 온갖 문서들을 뒤적이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까탈스러운 손님을 연기했다. 익살맞은 상인이 대꾸한다.
“아니요. 안경집, 명함집, 권총집. 많은 집들도 있지요.”
빈 권총집을 확인하며 브루스는 그 크기와 모양을 유심히 살폈다. 그날 밤 브루스는 알프레드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총을 쥐고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그럼 토마스가 가지고 있던 것은 이건가? 아직도 그 총을 가지고 있을까? 역시 처분했을까? 브루스가 제 기억을 바쁘게 헤집었다. 브루스는 다른 물건으로 관심을 옮긴다. 이번에는 갈색 가죽으로 표지를 만든 다이어리였다. 브루스는 감싼 끈을 풀려고 손가락을 끈과 표지 사이에 집어넣다가 잠시 멈추며 고개를 저었다.
“손님. 고인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는 법이에요.”
그러다 브루스는 책상 아래의 작은 공간을 보며 히죽 웃는다.
“그럼 몰래 볼게요. 약속해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게요.”
브루스가 허공을 향해 엉터리로 성호를 그은 뒤 간절한 어조로 얘기하고 잠시 뒤에는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브루스는 보물찾기를 하듯 책상 아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브루스는 다이어리를 감싼 끈을 풀고 한 장 씩 사락사락 넘겨보았다. 수첩에는 날짜와 그 날의 일정 같은 것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아빠가 그 아래에 몇 마디 토를 달아놓기도 했다. 코멘트의 대부분은 욕설이었다.
브루스는 제 기억을 토대로 몇몇 날짜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이어리를 살폈다. 주주총회, OC 입장권-친절한 익명으로부터, 빌어먹을, 변상금, 법률 상담, 다시 주주총회-어떤 새끼가 계속 빼돌리는 거지?, 오. 운이 좋았어, M이 눈치 챘을까?, 영화... 등의 글귀들이 단정하지 못한 필체로 주르륵 브루스의 눈앞을 흘러갔다. 브루스는 다이어리 표지에 딸린 수납공간에서 몇몇 종이들을 찾아냈다. 대부분은 영수증이었고, 정치가나 다른 기업의 임원, 동료 의사의 명함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브루스는 회색의 반듯한 카드 하나를 발견했다. 카드 위에는 아울즈 크로가 멋들어지게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는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입장권인 모양이었다. 이게 얼마나 소중하면 입때껏 모셔두었담. 브루스는 혀를 차면서도 나름 개방된 곳에 보관한 걸 엄마가 알지 못한 정도였으니 역시 자신의 부모님은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참으로 정이 넘치는 사이였다고 새삼 이죽이었다. 브루스는 엄지로 양각처럼 튀어나온 마크의 인쇄면을 쓰다듬었다. 눈에 익은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이 모양을 아주 가까운 시일에 봤던 기억이 났다. 새의, 부엉이의 머리를 본뜬 복면을 쓴 사람. 그 사람이 이 저택으로 돌아오던 날에 브루스와 칼을, 정확히는 칼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가슴에 분명 이 마크와 똑 닮은 문양의 오브젝트가 있었다. 어디를 가나 부엉이 투성이군. 후우― 후우― 마치 환청처럼 날짐승의 울음소리가 브루스의 귓가에 맴돌았다.
“지루하네요.”
브루스가 다이어리를 탁 소리 나게 경쾌히 닫으며 책상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대충 다시 끈으로 봉한 다이어리를 브루스는 흥미를 완전히 잃은 듯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툭 던져놓았다. 브루스는 크게 기지개를 키며 몸통을 도리도리 움직였다. 그리고 아이는 보았다. 서재의 문 위에 장식된 부엉이 조형물을. 브루스는 저가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자신이 방치해둔 빨간 공 옆으로 다가갔다. 날개를 활짝 핀 부엉이는 마치 이 방안을 감싼 듯 제 몸체를 부풀리고 있었다. 너로군. 브루스가 제 환청의 근원을 향해 비죽 웃었다. 브루스가 공을 잡았다. 통, 통, 통. 위아래로 몇 번 튕겨 본 뒤에 브루스는 공을 제 어깨보다 높이 들어올린다. 그리고 던졌다. 쾅!
“10점, 만점!”
정확히 부엉이의 부리를 맞히고 다시 땅으로 돌아와 서재 안을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공을 보며 브루스가 깔깔 웃으며 방안을 폴짝폴짝 뛰었다.
칼은 도서관 안에서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소리는 용케 삼켜냈지만 미처 수습하지 못한 진동 때문에 신문을 넘기는 칼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날짜별로 정리된 신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칼은 웨인저택에 있을 브루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칼은 병원에서 브루스의 회복상태를 확인했던 것 이외로는 브루스를 직접 투시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이의 건강상태 정도는 직접 아이의 행동으로 보거나 아이의 몸에서 나는 소리들을 듣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정보를 아이의 동의 없이 얻고 싶지 않아서 칼이 스스로에게 그어놓은 일종의 선이었다.
첫날에 불쑥 자객이 튀어나왔던 적도 있고 해서 칼은 자신을 바깥으로 보내는 브루스에게 처음에는 반발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이담에 내가 혼자 있겠다고 하면 어떡해! 그때 칼이 혼자는 싫다고 삐져서 아주 떠나버리거나 하면 곤란하단 말이야!”하면서 으름장을 놓으며 칼을 밖으로 보냈다. 나가서 바깥 공기도 쐬고, 사람 구경도 좀 하고, 할 수 있으면 총알이 남았는지 확인해달라는 게 브루스의 요구였다. “칼은 눈에 안 띄게 움직일 수 있잖아? 그렇지?” 그렇게 내보내는 와중에도 브루스는 불안한 듯 칼을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칼은 할 수 없이 대신 귀를 계속 세우고 있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브루스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표정을 굳히고 단단하게 일렀다. “절대 눈에 띄면 안 돼. 토마스나 알프레드랑은 나 없을 때는 마주할 생각도 마.”
칼은 사고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발행된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주식에서 해외 지분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만 웨인 엔터프라이즈는 최근 경기침체에 따라 하락세를 띠고 있었고 근래에 파워스 사로 일부 기술을 양도해버린 건수도 있어서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는 주식이 아니었으므로 차명주식을 통한 세금 포탈이라도 준비하는 게 아니냐는 뼈있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토마스 웨인이 주가조작 의혹으로 이사회에서 문책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어딘가에서 지나쳤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웨인 엔터프라이즈는 놀라울 정도로 상승세로 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익명의 주식매매는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토마스, 마사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는 회사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서 당연히 주가가 떨어졌었지만 아주 차분하게, 어린 CEO를 필두로 한 회사는 성장해나갔고 도박장이라고는 하나 고담의 랜드 마크의 일정 지분을 인수한 후로 그 가치를 착실히 높여가고 있었다. 아울즈 크로의 경영에 참가한 후로는 오히려 제 아버지 때보다도 더욱 성장한 기업이 되었고 누군가는 분명 이를 통해 큰 이득을 봤을 것이다. 허, 자본이란. 칼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신문 뭉치들을 확인한 칼은 어느새 대강의 복구 작업을 끝낸 골목으로 왔다. 얼마간 새 벽돌들을 깔고 망가진 관들을 새로 고쳐 묻은 골목을 살피던 칼은 왁자한 군중들의 소리와 그 속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한 사람의 외침을 들었다. 골목에서 빠져나와 조금 걸으면 광장이 나오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인파의 중심에서 단상에 서있는 정치가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유세를 하고 있었다. 선거캠페인을 구경하는 이들 중에는 그의 말 한마디가 끝날 때면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성난 얼굴로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의 우리 시는 아주 무능합니다!”
정치가는 호소하듯 제 팔을 넓게 벌리고 손바닥을 군중에게로 펼쳐 보이며 외쳤다.
“여기, 지금 여러분들 앞에 선 토마스 군의 부모님도 길거리 부랑자에게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지요. 하지만 우리 고담은 무엇을 했습니까?”
먼발치에서 칼은 발을 멈추고 연설을 지켜보았다. 집을 비운다 싶더니 토마스는 반듯하게 머리를 정돈한 정치가의 옆에서 주눅이 든 얼굴로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칼은 제 코트 주머니에 담은 탄피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골목길 하수도의 이제 막 복구된 벽면에 시멘트와 함께 굳은 총알을 기억했다.
“피, 필립... 저는...”
“괜찮아요, 토마스. 이렇게 제 곁에 서준 당신의 용기에 보답하겠습니다. 선량한 시민들이 시의 무능함에 상처받는 걸 더는 지켜보지 않겠어요!”
필립 핸슨이 소년의 어깨를 감싸며 주먹을 쥔 손을 추켜올린다.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셔터소리가 뒤섞여 포화를 이루었다. 칼은 그때 시장 후보의 반들반들한 소재로 지은 재킷에 장식된 브로치를 보았다. 브로치는 부엉이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돌길 위에서 콩콩 그려놓은 선 안을 뛰어다니던 브루스는 약간 쌀쌀한 바람에 킁 하고 마른 코를 삼켰다. 저번에 서재를 거의 뒤집어엎은 것을 보고 알프레드는 덤덤한 얼굴로 브루스가 저택 안에서 노는 것을 금지했다. 브루스가 코로 웃으며 “무슨 권한으로?” 쌀쌀맞게 물으면 집사는 고요하게 브루스를 내려다보다가 “토마스 주인님과 직접 얘기 나누시겠습니까?”하고 되묻는다. 브루스에게 토마스의 이름을 들먹이며 제재를 가하는 것은 아주 전부터 알프레드나 엄마, 아빠가 종종 사용하던 수법 중 하나였다. 한때는 참 잘 먹혔던 훈계방법이었다. 하나 뿐인 형제이자 또 친구이기도 한 그는 어린 브루스에게 어쩔 수 없이 그 존재가 커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봤자 같은 어린애 아닌가. 브루스가 속으로 차게 웃으며 알프레드를 바라보다 제 손에 있던 공을 던져서 방금 전까지 알프레드가 정성스레 겉을 닦던 화병을 깨뜨렸다. 챙그랑 소리가 저택 안을 울리자 브루스가 생긋 웃었다. “아니.” 짧게 답한 뒤 브루스는 집사를 지나쳐 제 방으로 걸어갔다. 칼이 걱정하겠는데. 그 와중에 브루스가 생각한 것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왔던 날에는 아마도 약기운 덕분에 빠르고 깊이 잠들 수 있었지만 그 후로 브루스는 다시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칼과만 지냈을 때는 빈도나 강도가 많이 줄었던 것이 다시금 생생하게 아이의 잠자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브루스는 지칠 줄 모르고 솟아나는 과거의 파편에 짜증이 났고 무엇보다 그 상흔을 남긴 이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것을 앓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칼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보채는 브루스의 머리를 끌어안으면서 잘된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웃고만 있는 거보단 훨씬 낫구나.”
칼이 마치 자장가를 부르듯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브루스는 칼의 팔에 매달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잘 삼켜냈다. 아이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 작은 흉강의 움직임에 맞추어 칼이 브루스를 토닥였다. 벌써 새살이 차오르고 흉터만이 남은 상처부위가 아직도 신경의 끝에 고통을 간직한 채 목을 죄듯 아파왔다. 몸이 아닌 머릿속에 든 통증은 울컥울컥 제 기억을 토로했고 그 어둠 속을 칼이 함께했다. 브루스는 잠결인 듯 대수롭지 않은 양 웅얼거리면서 칼에게 물었다.
“정말, 옆에 있을 거야?”
질문이 끝난 후 아이는 문득 제 등골이 차가워서 몸을 웅크리며 눈을 꼭 감았다.
“그래.”
까만 시야에 칼의 대답이 밝았다. 왜 하고 제일 처음부터 따라다니던 의문이 지금 다시 아이의 머릿속에 차올랐지만 브루스는 잠잠히 칼의 대답에 우선 귀를 기울였다.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브루스.”
칼이 단단히 브루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정말 칼은 브루스 옆에 있었다. 브루스가 이 저택에서 다시 예전의 말괄량이마냥 굴 수 있는 건 다 그 덕분이었다. 혼자 덜렁 커다란 저택에서 곳곳에 널린 부엉이의 표시를 발견해도, 문득 총알에 부모님이 죽고 자신 역시도 죽을 뻔했던 날 밤의 광경이 생각나도, 죽어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토마스의 눈빛이 생생해도 브루스는 제가 혼잣말로 재잘거리면 어디선가는 그것을 들을 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칼의 존재는 단순히 브루스가 목숨을 잃을 확률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설령 브루스가 죽게 되더라도 누군가는 그 사실을 인지해주리라는 믿음이었다.
브루스는 거리낄 것 없이 제 자신을 연기했다. 굳이 지나치게 고분고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자연스럽게 브루스는 저택 안을 활보했다. 특히 가장 즐거운 부분은 집사에게 실컷 어거지를 부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브루스는 오늘 아침에는 스프그릇을 물리면서 성을 부렸다.
“콩 싫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발버둥 치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도, 토마스도 별 반응은 없었지만 브루스는 예민하게 둘의 표정 변화를 읽었다. 그런 브루스를 끌고 식당 밖으로 나온 것은 칼이었다. 언제 소란을 부렸냐는 듯 차분한 얼굴이 된 브루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스프그릇을 엎으려고 했어.”
“그러다 다친다.”
엄한 얼굴로 브루스를 데리고 나왔던 칼 역시도 금세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어있었다.
“전에는 잘 먹었잖니.”
“칼이 억지로 먹인 거잖아.”
“다음에도 그릇은 던지지 마렴. 네가 다치면 안 되니까.”
“고려해둘게.”
브루스가 새침하게 말했다. 브루스는 자기가 변덕을 부리고 칼이 그것을 수습하는 것으로 분명 자신의 양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귀찮아할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칼을 내버려 둘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했다. 저들의 일상에 끼어드는 궂은일을 칼이 도맡게 된다면 그 편리함 때문이라도 토마스가 칼에게 트집 잡을 이유가 없어질 테니 말이다.
어째서 칼이 제 옆에 있기로 마음을 정한 건지 브루스는 아직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브루스에게야 워낙 좋은 일이라 지금도 계속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도무지 칼에게 이 모든 귀찮음을 감수할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외계인 변덕 같은 걸까. 브루스의 마음속에 남은 일말의 불안이 속삭였다. 하다못해 칼에게 계약서라도 받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칼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분명 형식적인 틀이 잡히면 웬만해서는 그걸 외면할 수 없을 테니까. 근데 외계인과는 어떤 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해야 언제고 효력이 발생할 수 있는 거지? 앞 정원의 텅 빈 공터 앞에서 맴맴 돌던 브루스가 뜀을 멈추고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정말 왜지...”
“도통 어울리지 않아서 말이야.”
“뭐?”
등 뒤로 갑자기 던져진 말소리에 브루스가 놀라 파득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고 시큰둥한 얼굴의 토마스였다. 선거캠페인에서는 잘도 우는 얼굴을 만들더니. 기다리던 사람과 한참 다른 체구의 제 또래가 나타나자 브루스는 내심 실망해서 속으로 트집을 잡았다. 그 바람에 토마스가 저에게 뭐라 했는지 놓치고 말았다.
“거기. 보기 싫어서 없앴다고.”
토마스가 한껏 자비로운 얼굴을 하면서 턱 끝으로 텅 빈 흙 밭을 가리켰다. 아, 하고 브루스가 드디어 맥락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아이는 인상을 찌푸린다. 브루스는 제 가까운 기억 속에 있는 작고 하얀 종모양의 꽃이 죽 매달려있던 꽃의 무리를 떠올렸다. 아주, 아주 가끔씩 아빠가 엄마에게 사서 안기는 꽃이기도 했다.
“진주 같아서 예뻤는데?”
“개개가 어떻건 상관없어. 여기에 안 어울리면 소용이 없으니까.”
“...그냥 네가 거슬렸던 건 아니고?”
브루스가 떠보듯 묻자 토마스는 아무 말 없이 브루스를 바라만 보았다. 쓸데없는 걸 물어봤군. 브루스는 침묵 속에 뻔히 들려오는 대답에 흥하고 콧방귀를 쳤다. 브루스는 다시 토마스를 무시하고 분필로 그려 놓은 도형 안을 통통 뛰어다녔다. 브루스를 유심히 바라보던 토마스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네 외계인은 어디 갔어?”
탁! 조금 큰 소리를 내며 땅에 착지한 브루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는 거냐 묻는 제스처였지만 소년은 그저 더 짙게 미소를 굳힐 뿐이었다.
“외계인 말이야. 네 잘난 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브루스가 침착하게 되물었다. 아이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지만 말없이 토마스가 저를 응시하기 시작하자 잠깐의 공백 속에 제 심장소리가 귓가에 차올라 그만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칼은 은퇴한 선생님이야. 내가 말하지 않았어? 칼이 내 공부를—”
“작은 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마.”
브루스의 말을 끊으며 토마스가 얘기했다.
“놈이 인간이 아닌 거, 알아.”
입꼬리가 어색하게 떨려왔다. 브루스는 자꾸만 표정이 굳어지려는 것 같아 초조하게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못해도 심드렁한 표정이라도 만들어보려던 브루스의 노력은 이어지는 토마스의 말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꽤 재밌는 능력을 가진 거 같던데? 독도 안 듣고 말이야.”
“...뭐?”
“아, 수상하다 싶어서 그때 저녁에 차에 독을 넣었었거든.”
브루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요즘 외계인이 좀 성가시게 눈에 밟혀서 말이야. 쓸 만한 것도 같고 네 말을 잘 듣는 거 같아서 내버려뒀지만 더는 곤란해.”
점점 굳어가는 브루스와는 반대로 토마스는 더더욱 부드러운 어조로 브루스에게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말투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친절해서 브루스는 차라리 제가 듣고 있는 내용을 자신이 약한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탓에 착각하고 있다고 마저 믿고 싶었다. 그도 그럴게 눈에 밟힌다니? 브루스는 분명 칼에게 절대 자신이 없는 곳에서는 자기 집 사람들과는 마주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 했을 터였다.
“브루스, 그거 알아? 요즘 미국 내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거.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어. 캔자스 주에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DNA 샘플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그게 또 기밀이란 말이지.”
말을 이어가던 토마스가 마지막으로 더 진하게 웃으며 브루스에게 물었다. 브루스의 뇌리에 박힌 그 미소는 마치 칼날 같았다.
“궁금하지 않아? 왜 범인을 잡을 단서에 국가기밀 씩이나 붙었는지?”
브루스는 언젠가 칼이 자신은 단순히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다른 지구에서 왔다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했다. 칼이 그의 이름조차 없던 때에 그는 이미 브루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참 칼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적에는 칼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을 그의 손바닥 위에 놓고 제 목숨을 저울질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칼이 제 이름을 안다는 게 곧 그가 브루스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칼은 브루스를 알았지만 이 브루스 웨인을 아는 게 아니었다. 칼은 평행우주를 돌아다니면서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물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패턴을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게 브루스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더라도 아주 백지상태인 것보다는 브루스의 상황을 추측하는데 유용한 밑바탕이 되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이 지구에 칼이 아닌 칼이 존재할 가능성도 역시 높은 확률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토마스는 브루스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어 하고 있었다. 토마스가 아무 근거도 없이 DNA를 들먹이며 방화 사건을 자신에게 이야기할리는 없었다. 물론 그 샘플이 무엇을 말하건 간에 칼이 범인이 아님을 브루스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이 중요한가? 먼 훗날이 아니라, 브루스가 필요로 한 그 순간에 진실은 그 힘을 발휘할까? 브루스는 자꾸만 골목길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라 숨이 막혔다. 이제 가끔은 총에 맞아 죽는 것이 브루스가 아닌 칼이기도 한 꿈이 지금 눈앞에 생생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토마스의 의도는 브루스에게 정확히 먹혀들고 있었다.
“브루스.”
침착한 목소리가 아이를 부른다. 브루스는 갑자기 화가 났다. 도대체 뭐가 좋다고 이렇게 꼬박꼬박 제 곁으로 칼이 돌아온 건지, 브루스는 이제껏 실컷 그 사실에 자신이 기뻐한 것을 알면서도 초조함에 신경질이 났다.
“내가,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브루스가 가시 돋친 말투를 숨기지 않고 딱딱하게 끊어 말했다. 브루스는 자신은 갈 수 없는 장소에 있을 증거가 궁금해서 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칼을 바깥으로 보내기도 했지만 이 저택 안에서 브루스가 소동을 부리더라도 그것이 칼과는 무관한 일임을 얘기하기 위해서도 칼을 내보냈다. 하지만 칼은 전에도 그랬듯 아이의 불안을 해부하기에 너무나 뛰어났고, 더 나아가 브루스를 아꼈다.
“네가 주목받는 것보단 낫지.”
“첫날에 자신이 공격 받은 거 잊었어?”
“그것도 나였니? 다행이군.”
칼은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 미소까지 지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브루스는 세상에 대해 전부 알기에는 턱없이 어렸지만 지금 자신이 살아 숨 쉬는 이곳이 결코 친절한 곳이 아닌 것쯤은 알았다. 칼은 보석을 만들 수 있고, 빠르고, 감각이 예민하고, 날 수 있고, 싸울 수도 있지만 그래봐야 브루스 같은 어린애에게 지갑을 털리는 순진한 외계인이었다. 그런 그가 제가 짓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가게 될지, 아니면 외계인이라는 이유로 이상한 실험에 휘말리게 될지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정말 그 어느 지구엔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가 제 옆에 멈춰있는 한 그 지구가 이곳이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해주겠는가.
“칼.”
브루스가 다시 칼을 노려본다. 어째서 이렇게 번번이 미래는 머릿속에서만 여유로운 걸까.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는 건 비단 토마스만이 아니었다. 칼은, 무사하게 여기를 나가야한다. 브루스는 결국 꿈같았던 차후의 기대들보다 처음에 생각했던 계획이 가장 현실적이었음을 알았다. 지금 브루스는 제가 고집을 부리면 결국 칼은 들어주게 돼 있다는 사실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나가.”
브루스는 무표정하게 손끝으로 저 멀리에 굳게 닫힌 철문을 가리켰다. 칼은 대답 없이 아이를 바라만 보았다.
그 날, 세찬 바람 하나가 웨인저택을 뒤로하고 떠났다.
8
어느 밤의 일이다. 부모님이 부부동반 세미나로 저택을 비운 날 브루스는 토마스와 늦은 밤에 방영되는 공포영화를 보았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존재들이 발톱을 세우고 스멀스멀 그들의 영역에서 기어 나와 사람들을 사냥하고 다니는 이야기였다. 엔딩 크레딧이 오른 후에도 방안의 그림자들이 이상하게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눈꺼풀 너머에서 계속해서 재생되는 영상 탓에 등골이 오싹해진 브루스는 영화가 끝이 나고 길게 하품을 하는 토마스를 끈질기게 졸라서 그의 방에서 같이 잠을 자게 되었다.
달이 전부 차오르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달빛이 환한 날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브루스는 도중에 설게 잠에서 깨어났다. 피곤이 여전히 무겁게 아이의 눈꺼풀을 눌렀고 브루스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잠이 들 준비를 했다. 그러다 아이는 제 옆에 늘어진 그림자를 보았다. 토마스였다. 토마스가 일어나서 달이 밝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거의 미동도 없이 침대에 걸터앉은 토마스의 그림자는 기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피부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서 브루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그림자를 드리우는 광경을 확인했다. 그리고 브루스는 간신히 그것이 토마스가 아닌 토마스가 보고 있는 새 때문이라고 알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느리게 펄럭이는 커다란 날갯짓 소리와 끼룩 하고 가냘픈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밤에 어울리는 고요한 소동이었다. 깊은 밤 부엉이가 저와 같은 시간대에 생활하는 박쥐를 사냥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얇은 피막으로 되어있는 날개를 찢었고 뾰족한 부리가 검은 짐승의 목을 그었다.
“먹어, 먹어, 먹어.”
마치 주문처럼. 홀린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브루스는 눈을 꾹 감으며 의식적으로 잠이 들었다. 다행히 그 후로는 꿈조차 없는 밤이었다. 아니, 브루스는 제가 지독한 악몽을 하나 보았다고 생각하며 이 광경을 잊었다.
“드십시오.”
아침이 차려진 기다란 식탁 양 끝에 웨인가의 형제를 앉히며 알프레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적막한 식당 안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밝았지만 눅눅한 침묵으로 음침했다. 식기의 움직임이 아주 간간이 소음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토마스는 반듯하게 갓 구워진 식빵에 크림치즈를 발랐고, 브루스는 아직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콘 포타주 그릇 안을 휘저었다. 그때 토마스의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조용한 식사시간을 침범했다.
“손님은 어디 갔지?”
“갔어.”
관심이라고는 묻어있지 않는 물음에 브루스도 심드렁하게 답했다. 옥수수 알이 너무 굵어. 브루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제 앞에 있는 빵의 귀퉁이를 떼어 제 접시 위에 담았다. 뜯어진 따끈한 빵에서는 고소한 밀의 냄새가 났다. 버터 냄새가 심한 거 같은데, 브루스가 예민하게 콧등을 찡그렸다.
“갔다고?”
“몰라. 여기 없어. 갈 곳이 생겼나보지.”
“인사도 없이 섭섭한데?”
토마스가 빵의 귀퉁이를 작게 베어 먹었다. 브루스는 손에 잡은 식빵을 거의 빵가루 수준으로 접시 위에 조각조각 찢어놓았다. 맑은 새소리가 저택 너머의 숲에서 들려왔다. 잠깐 브루스는 숨을 죽이고, 총총, 다시 맑게 들리는 그 소리를 확인한 뒤에야 고루 내쉬었다. 브루스는 제 앞의 접시를 밀어내며 발랄하게 물었다.
“토미, 낮에 뭐해? 나랑 놀아.”
식탁을 짚으며 브루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제 접시를 바라보던 소년의 유리구슬 같은 동자가 힐끗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본다. 토마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바빠.”
“에에...”
브루스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야유했다.
텅 빈 저택. 귀울음과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브루스는 그 소리가 꼭 그 밤의 날짐승의 울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갈비뼈 안쪽에서 성마르게 작은 북이 울려댈 때면 브루스는 주머니에 담아 놓은 쪽지를 꺼내 읽었다. ‘괜찮니?’ 아직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따뜻한 글씨였다. 브루스가 그 위에 남은 온기를 지문 끝으로 감지하며 다시 차분하게 호흡했다.
“난 괜찮아.”
브루스가 속살거렸다. 곧 어느 식으로든 정말 괜찮아질 것이다. 브루스는 다시 주머니 속에 쪽지를 넣고 오늘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던 다락을 향해 계단을 계속 올랐다. 요 근래 브루스는 놀이를 빙자해서 저택 안의 여러 수상한 곳들을 발견했다. 칼은 오래된 저택에는 으레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미로나 비밀의 방 따위가 있기 마련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어느 곳인가는 칼의 시선에 조차 파악되지 않는 공간도 있었다. 브루스가 말만한다면 칼은 그 위치를 찾아가 이 저택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겠지만 브루스는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겼다. 칼이 해야 할 일은 그런 게 아니었으므로.
인간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보았을 때 평생을 논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햇수를 이 집에서 살아온 브루스였지만 그럼에도 ‘집’이라고 불러온 이 저택이 과거의 아이가 생각했던 것만큼 친숙한 곳이 아니라고 하루하루 깨닫고 있었다. 집을 찾아온 이들을 감시하듯 곳곳에 널려있는 부엉이의 존재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브루스는, 심지어 부모님마저도 몰랐을 법한 공간이 이곳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관심의 문제라고 하기에도 과할 정도로 이 저택은 겉과 속이 분리되어있는 마냥 두 가지의 목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택의 다락과 그 아래에 있는 층 사이에는 겉으로 보기에 제법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실제 다락으로 들어가 보면 그 높이에 맞는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칼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이 위치하고 있다. 방공호라고 생각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그 공간은 이제 브루스가 마지막으로 확인해볼 장소였다.
다락에는 아주 오래된 물건들이나 할아버지 때 까지만 쓰이던 물건들, 또는 부모님의 취향과는 맞지 않는 것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이 있는 장소치고는 다락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다락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이 집안 집사의 성미가 깐깐하기 때문이었을까? 덕분에 브루스는 물건들이 근래에 누군가에 의해 이동한 적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을 목적으로 움직인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브루스는 우선 나무 바닥에 귀를 대어 보았다. 바닥과 귓구멍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에서 메아리치는 백색 소음 밖에 들리지 않았다. 쿵쿵 바닥을 두드려 보아도 별로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여차하면 저 어디에서인가 도끼라도 가지고 와서 바닥을 부숴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괜한 위험은 감수하지 않는 게 이로웠다.
그러다 브루스는 어떤 액자 하나를 기억했다. 때는 토마스가 부엉이 법정의 동요를 알려준 다음날이었고 브루스는 그와 함께 이곳에서 잡동사니들을 뒤지며 낮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던 중 토마스는 알렌 웨인의 초상이 든 액자를 찾아냈다. 이곳에서 그 액자를 발견했을 때 토마스는 굉장히 즐거워했고, 그 후로 내내 저녁을 먹으러 내려오지도 않고 다락에만 있었다. 거기다 그때 알프레드마저 자리를 비워 부모님이 짜증을 부렸었다. 알렌은 웨인을 이 고담에 정착시킨 인물이자 그 어느 가문보다도 크게 성장시킨 사람이었다. 파티에서 어른들이 뒷말로 그 시대에 비하면 지금의 웨인은 잡상인수준이라며 비웃는 것을 브루스는 종종 듣고는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빠는 알렌이 제정신이라면 이딴 도시에 터를 잡지는 않았을 거라며 욕을 퍼부었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저택 내부의 가구들이 야금야금 토마스의 취향으로 바뀌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토마스가 발견하고 그렇게나 기꺼워하던 알렌의 초상화는 저택 복도에 걸려있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있는 액자들도 다 커튼이나 천으로 가려놓아서 언제 모두 이곳 신세가 될지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브루스는 그의 초상을 찾아 다락 물건들을 헤집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부엉이의 머리를 본뜬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있는 알렌 웨인의 초상화를. 브루스는 그 액자가 있던 아래 바닥에 누군가가 조각칼로 파낸 자국을 발견했다. 여러 번의 칼질이 만들어낸 그 모양은 브로치의 것과 거의 같았다. 토마스가 알렌의 초상화를 발견했던 날 계속 다락에 붙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싶더니 이걸 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토마스가 제 힘을 들여 어떤 일인가 했다면 그건 허투루 한 행동일리 없었다. 문양이 그려진 나무 바닥에 손을 대고 움직여보면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브루스가 바닥 사이의 홈에 손톱을 넣어 보니 쉽게 들춰졌고 그 밑에는 금속질의 바닥이 있었다.
몇몇 개의 짐들을 치워내서 나무타일을 더 들어내니 곧 그게 단순한 바닥이 아닌 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임을 알게 되었다. 손잡이로 보이는 둥그런 부엉이의 얼굴을 손으로 짚고 몇 번 돌려보자 끼익 하고 금속질의 걸림쇠로 예상되는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고 생각보다 간단하게 둥그런 모양의 문이 열렸다. 잠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열린 틈새로 보이는 실내는 어두운지 부옇게 밝은지 애매했다. 브루스는 아래를 향해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살펴보았지만 사다리나 주변에 마땅한 발판은 보이지 않았다. 브루스는 주변을 둘러보다 아주 오래된 디자인의 옷가지들이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끄집어냈다. 최대한 섬유가 단단해 보이는 옷들로만 골라 브루스가 그것들을 주욱 매듭지었다. 바로 근처 기둥에 옷으로 만든 끈을 단단히 고정시킨 뒤 아래층으로 그것들을 던졌다. 끝이 약간 부족했지만 저 정도 높이면 떨어져도 다치지는 않을 위치였다. 브루스가 옷가지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정도 높이가 남았을 즘 서로 이어놓은 드레스의 치맛자락과 촌스러운 정장 바지의 다리 한 짝의 매듭이 풀리며 브루스의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쿵하고 바닥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으, 젠장.”
브루스가 작게 욕을 뱉으며 끙끙댔다. 엉덩이가 많이 아프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브루스는 허리를 펴고 자신이 지금 막 떨어진 방의 광경을 둘러보았다. 어둑한 실내는 벽에서 새어나오는 창백한 빛으로 칙칙하게 밝았다. 눈앞에 펼쳐진 벽면의 거의 전체를 커다란 스크린이 차지하고 있었다. 네모난 화면은 또 작게 수많은 칸들로 나뉘어 있었고 그 곳에 한가득 떠올라 있는 것은 고담시의 이곳저곳이었다. 모니터 앞 책상에는 수많은 기록과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천장에서 커다란 부엉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루스가 열고 나온 곳은 부엉이의 오른쪽 눈이었다. 이곳은 부엉이의 둥지였다. 브루스가 습하니 숨을 삼켰다. 알프레드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속속들이 고담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아무리 칼의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지만 금은방을 방문하고 백화점이 있는 번화가를 돌아다닌 브루스를 찾는 것쯤 가족으로서 브루스의 동작 하나하나가 눈에 익은 그에게야 일도 아닐 것이다.
브루스는 화면 한 구석에서 원하지 않지만 눈에 익어버린 골목 하나를 발견했다. 골목 내부가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크라임앨리는 보통이면 지금쯤에나 공사가 진행될까 말까였지만 선거기간을 맞아서인지 빠르게 복구 작업이 완료되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가 크라임앨리의 귀퉁이가 부서져있었고 웬일로 폭발사고 이후 철수했던 경찰들이 그 장소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브루스는 문득 자신이 열어둔 창문으로 아주 잠깐 제 곁을 머물다 가버린 바람이 생각나 불안해졌다. 눈에 띄면 안 돼. 브루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칼은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닌 만큼 브루스 때문이 아닌 이상 이 지구의 한 지점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 이 지구에 조차 머물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브루스는 최대한 칼이 제 능력을 저를 위해 쓰기를 바랐고 브루스의 계산이 맞는다면 그런 칼이 한 곳에 멈춰있지 않는 한 누가 함부로 붙잡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보면 고담도 꽤 작지 않아?”
책상 위에 수북한 메모들을 살펴보던 브루스의 등 뒤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브루스는 침착하게 몸을 돌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토마스의 창백한 얼굴을 지켜보았다. 음영으로만 분간되는 검은 그림자에서 브루스는 희미하게 다른 통로의 존재를 알아냈다. 제대로 벽에 붙은 문이 있잖아. 브루스가 아직도 지끈지끈 아픈 제 엉덩이를 생각하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입만 웃고 있는 토마스가 브루스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발을 멈춰 세웠다.
“네가 아주 얼간이가 아닌 건 다행이지만 그동안 같잖은 연기를 지켜보느라 꽤 짜증이 났었지.”
“핸슨 옆에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짜내느라 그런 건 아니고?”
브루스가 헛웃음 섞인 투로 대꾸하자 토마스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멍청한 것들이 그게 효과적이라고 부득불 우기는데 어쩌겠어.”
“강하면 그딴 걸로 호소할 필요 없다며?”
“난 호소한 적 없어. 필요에 맞게 어울려준 거지.”
이렇게까지 쇼 비즈니스에 참여해줬는데 성과를 못 얻으면 놈은 죽은 목숨인거고. 토마스가 뒷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더욱 비죽이 웃었다. 어련하시겠어, 브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여기네? 네 멋진 둥지 말이야.”
브루스가 제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고갯짓으로 어두운 실내를 훑었다.
“좀 구차하지 않아? 어차피 고담 곳곳이 부엉이 밭이던데. 애매하게 이런 데를 만들 필요가 있어?”
“사람들은 대놓고 감시당하는 걸 알면 싫어하거든. 우리도 소모적인 소동은 지양하고 있고 말이지.”
“아하, 그래서 이 다락아래 치졸하게 숨어드셨다?”
토마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줄곧 토마스의 얼굴을 노려보던 브루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브루스가 말을 이었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재산도 퍽 필요했겠군. 전기세는 무서우니까, 안 그래?”
브루스가 눈썹을 과장스럽게 휘어보이자 토마스가 결국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난 내 것을 되찾은 거라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
“부모님이 그걸 축내고 있었고 말이지. 물론 기억해. 하지만 부엉이 법정은 아빠 대에서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죽은 토마스 웨인은 겁쟁이에 한심한 작자야. 그가 법정에서 배제된 건 합리적이고 적합한 판단이었지. 하지만 난 달라.”
유리알 같은 토마스의 눈동자 표면이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을 받고 기괴하게 빛났다. 마치 그 밤에 박쥐를 사냥하는 부엉이를 지켜보던 때처럼. 약간의 광기와 자부심이 뒤섞여서 소년은 더욱 자세를 꼿꼿이 폈다.
“네가 잘나서 부모님을 죽이고 돈을 차지했다?”
브루스가 너무 뻔해서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던진 뒤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깔깔 웃기 시작한다. 실내에서 아이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어둡게 차올랐다.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멎었지만 그새 잔상이 남았는지 허공을 여기저기 떠돌았다.
“오, 토미.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아이가 방긋 웃었다.
“넌 부모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잘 해쳐나가고 있어서 두 사람을 죽인거야.”
브루스가 느릿하게 걸음을 떼며 토마스의 주변을 가볍게 빙글 한 바퀴 돌았다. 토마스는 분명 브루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커다란 키였지만 이제는 그가 그렇게 커다랗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칼의 말대로 브루스가 금방 자라는 나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토마스가 나타났던 어둠 속에서 발을 멈추었다.
“웨인 엔터프라이즈 주식에 손을 쓴 건 너지? 애널리스트랑 파워스 사를 이용해서 보통 이상으로 주가를 떨어뜨린 거 말이야. 그리고 그때 헐값으로 지분을 빼돌려서 주주인 아빠의 영향력을 약하게 만들었지. 네 말대로 아빠는 원래 그렇게 믿음직한 임원도 아니었으니까.”
입지가 약한 임원을 쥐고 흔드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몇몇 숫자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브루스가 말을 이었다.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참담하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주가가 떨어지던 때, 그리고 파워스로의 기술 양도가 이루어지던 때, 부모님이 곧잘 싸움을 하던 때가 차례로 브루스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런 때 아빠에게 아울즈 크로를 소개한 건 네 쪽이었어. 아빠는 전에 경마로 한 몫 잡았던 적이 있으니까 도박에는 약하지. 거기다 총회가 막 끝났을 때 우리 집 분위기가 엉망이던 건 네가 모를 수 없었을 테고 말이야. 그런 시기적절한 때에 아무도 아빠에게 권하지 않았던 프리미엄 입장권을 제시할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어. 법정의 그 누구라도 말이야. 아, 끽해야 변수로 알프레드인가?”
아울즈 크로에 번번이 출입하는 알프레드의 소식을 들었던 브루스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래봤자 주인과 집사, 둘은 한 쌍이었지만.
“넌 아빠가 영영 아울즈 크로에 코가 꿸 거라고 생각했지. 그걸로 아빠는 주주에서 쫓겨나고 웨인의 재산도 법정 소유가 될 거라고 말이야. 근데 아니었어. 맙소사, 아빠가 이겨낸 거야!”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는 토마스의 앞에서 브루스가 폴짝 뛰며 마치 어떤 마법이라도 벌어진 듯 양손을 활짝 펴 보이며 외쳤다.
“물론 아빠 혼자만이 이뤄낸 성과는 아니었지. 그때 즈음 엄마가 자선 파티를 열었어. 아무도 자선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발이 넓은 사람이잖아? 여기 사람들은 인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치들이고 말이야. 결국 뒤에서 뭐라 지껄이든 모금은 성공적이었어. 그리고 그 돈이 어디로 간지는, 토미 네가 더 잘 알지?”
아빠의 다이어리를 처음 봤을 때 브루스는 아빠가 기어코 제게 일어난 문제를 엄마로부터 숨겨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갈아엎은 화단을 보고 엄마가 정말 평소의 그녀와는 맞지 않게 식물 하나를 꾸준히 좋아했던 것을 기억했고 아빠가 아주아주 가끔씩 이라지만 그 꽃을 엄마에게 안길 만큼은 둘이 부부로서 그럭저럭 해내가고 있는 파트너라는 게 생각났다. 그 뒤에야 그 즈음에 있었던 자선 파티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모인 돈은 아울즈 크로에 지불하기로 되어있던 빚과 위약금을 급한 대로 막아내기에도 충분했다.
웨인이라는 이름 아래 있는 재산은 분명 부모님의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도 그 돈의 주인임은 자명했고 둘은 그 돈을 저들을 위해 낭비하는 동시에 저들을 위해 그럭저럭 지키는 일 또한 해나가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런 부모님과 씨름하는 것이 지겨워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몫이 줄기 전에 제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마저도 결과적으로는 제 손으로 직접 해내지는 못했지만.
“있지, 토미. 박쥐무덤 기억해? 저택 저 뒤에 있는 굴 말이야. 아참. 네가 모를 리가 없구나... 거기 지금 금고였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정치인에게 소중한 것은 돈이었다. 그리고 정치가가 내세운 정책에 따라 뒷세계의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은 그 범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비록 법이라는 게 종잇장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고담이었지만 외려 권력을 쥐거나 돈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만큼 유효한 요새가 따로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유착하기 쉬웠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어떻게 둘 사이에서 힘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단순히 부엉이 법정 덕분에? 아울즈 크로를 손에 넣어서? 여기서 브루스는 토마스가 어째서 온전히 제 몫으로 웨인의 주식까지 포함한 재산이 필요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브루스는 이 저택 뒤편으로 트럭이 출입한다는 이야기를 칼로부터 들었다. 검은 봉투에 마치 불법으로 쓰레기를 유기하듯 버려지는 그 뭉치는 전부 돈이었다. 굴은 웨인의 사유지의 범위 안에 있었고 고담시경에서 설마 신고도 없었는데(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트럭의 움직임을 좇을 일은 만무했다.
“그 무덤이 지금 박쥐의 서식지가 된 거 알아? 거기 출입하던 어떤 사람이 물린 거 같다면서 징징 짜더라고.”
산책을 나간 길에 칼에게 부탁해서 그와 함께 카메라들의 사각지대를 이동하며 확인한 결과였다.
“그래서 브루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감명 받았다고 박수라도 쳐줘?”
“와, 박수 쳐달라면 쳐줄 거야?”
기괴하게 비틀어 웃으면서 짓씹어 뱉듯 말하는 토마스에게 브루스가 호들갑을 떨며 합장한 손을 입술 위에 붙였다.
“넌 죽어도 모든 걸 발톱으로 움켜쥘 수 없을 거야. 기어코 몇몇은 네 손아귀에서 벗어날 테고 넌 그때마다 미쳐 돌아가시겠지.”
그리고 긴 힘겨루기를 구상하기보다 단순히 제거하는 것을 택한 토마스 웨인 주니어는 결코 브루스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나고 영특한 수완가가 아닌 충분히 그 사고를 따라잡을 수 있는 평범한 또래의 소년에 불과했다. 이쯤이라면 브루스가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손 뒤에서 브루스는 제 기억 속에 있던 토마스의 미소를 그대로 재연해 보였다.
“어쩌니 토미.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애송이라 정말 유감이야.”
브루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브루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마스가 주먹을 휘둘러 브루스의 뺨을 내려쳤다. 온힘을 다해 휘둘러진 주먹에 브루스가 그만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런 브루스에게 토마스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계속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다 토마스가 브루스의 목을 조를 듯이 두 손으로 아이의 가는 목을 내리눌렀다.
“쥐새끼 같은 게...”
토마스가 잇새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브루스가 컥 하고 밭은 숨을 뱉었다.
“지금 네가 그 주둥이를 나불거릴 수 있는 게 누구 덕인 줄 알아? 너 같이 성가신 꼬맹이를 죽이지 않은 게 누군지 아냐고. 그래, 거 참 대단한 걸 알아냈구나. 브루스. 하지만 그게 뭐? 멍청한 놈. 그래봐야 넌 무일푼의 고아야. 넌 내가 내다버리면 제대로 갈 곳도 없는 팔푼이라고.”
기도가 위험할 정도로 좁아지자 브루스의 시야가 잠깐 핑 돌았다. 하지만 브루스는 냉랭하게 제게 악을 퍼붓는 토마스를 보았다. 고작 이런 애가 상대해주는 게 좋아서 이 사달을 만들다니. 브루스는 마음 한 구석에 끈덕지게 남았던 미련 하나를 털어내며 제 스스로를 힐난했다. 브루스는 주머니에 담아둔 칼의 시계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토마스의 턱을 힘껏 퍽하고 쳐 날렸다. 동시에 콰쾅! 둥지의 벽이 부서졌다.
“브루스!”
바깥 공기가 모든 것이 정체해있던 둥지 안을 빠르게 휘저었다. 다급하게 벽을 뚫고 들어온 칼은 차림새가 몹시 엉망이었다. 옷 여기저기가 칼날 같은 것에 의해 찢어져있었고 잘 빗어 넘기던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헝클어져서 삐쳐있었다. 심지어 그의 코트는 소매 하나가 거의 통째로 찢겨져서나간 상태였다. 브루스에게 턱을 맞아 반쯤 날아간 상태인 토마스를 칼이 저 멀리로 떨어트리며 브루스의 앞에 주저앉았다. 브루스가 쿨럭쿨럭 기침을 토하면서 터진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칼이 얼른 브루스를 지지해주었다.
“미안하다. 밖에서 조금 소동이 있어서...”
칼이 눈썹을 찡그리며 벌겋게 멍이 오르기 시작하는 브루스의 얼굴을 살펴보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브루스는 쓰라린 입으로도 히죽 웃으며 칼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칼이 쓴 안경도 여기저기가 금이 가있었다. 그래도 일단 칼 본인은 상처하나 없이 멀쩡했다. 외계인이라 다행이야. 브루스가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돈은?”
“전부 태워버렸단다.”
“그래.”
브루스가 토마스에게 주먹을 날린 탓에 손등에 뼈가 도드라진 쪽이 까져서 쓰렸지만 저와 키를 맞춘 칼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칼의 머리가 더 심하게 엉망이 되었지만 칼은 깨진 안경 너머에서 웃고만 있었다.
“전통 깊은 조직은 이래서 좋아. 관습을 고집스럽게 지키거든.”
다시 반듯한 자세로 서서 제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토마스를 브루스가 하하 웃으면서 바라보며 말했다. 토마스는 독기 서린 눈으로 그런 브루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반은 도박이었어. 네 정체를 알아내는 나를 잡는 데 주력할지, 아니면 나대신 네 소중한 역할 하나를 엉망으로 만들 칼을 잡을지 말이야.”
“건방떨지 마, 브루스. 네가 이런다고 뭔가가 달라질 거 같아?”
“내가 경찰에게나 넘기려고 이런 거 같아? 네 법정에게 변명할 거리나 신경 쓰는 게 좋을걸? 세탁이 끝나지 않은 돈들이 다 타버렸거든.”
그러고 보니 법정이니 뭐니 하는 그런 사람들은 꼭 실패를 싫어하더라고, 너처럼 말이야. 브루스가 차갑게 웃었다. 어차피 칼의 도움을 받는다지만 브루스가 법정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먼 후에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밖에서 무너뜨리기보다 그 내부를 휘저어준다면 그것은 불씨가 되어서 견고한 조직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 터였다. 특히 토마스처럼 제 자신만을 믿는 완벽주의자에게는 더없이 유효했다.
“탈론들도 오늘은 더 이상 찾아오지 못할 거다.”
브루스를 토마스의 시선으로부터 감추며 칼이 말했다. 브루스에게 위험이 생길 즘이면 칼이 어디에 있던 이곳으로 달려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부릴 수 있는 탈론 전부를 저택으로 불러들였던 건 토마스였다. 효과적으로는 당국에 신고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단 붙잡고 나서 며칠 부엉이 법정에서 굴리고 나면 괜찮은 전력이 될 것 같아 짜놓은 수였다. 자신의 수중에는 외계인에게 더없이 유효해 보이는 인질이 있었고 그 인질이라는 인물은 ‘브루스 웨인’이었다. 그게 이렇게 커다란 변수를 지닌 인자라는 것을 토마스는 짐작하지 못했다. 역시 믿지 못할 힘은 제거해버리는 편이 나았다. 토마스가 으득 주먹을 쥐었다.
“그딴 병정 몇이 어쨌다는 거죠?”
“윽!”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브루스가 제 몸통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다급하게 숨을 마신 브루스가 기침을 토하자 피가 섞여난 타액이 뱉어졌다. 경보가 전부 해제되어버린 저택의 시스템을 원상복귀 시키고 벌여진 사태들에 미봉책을 처방한 뒤 알프레드는 서둘러 이 둥지로 올라왔다. 그나마도 모든 문제에 손을 댄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매우 드물게 차림새가 단정하지 못했다.
“제가 항상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요?”
집사가 장갑 낀 손으로 리모컨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토마스가 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칼은 문득 찾아든 데자뷰에 얼굴이 창백해져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브루스를 투시했다. 그리고 위 유문부에 조금 커다란 강낭콩만한 크기의 장치가 부착된 것을 보았다. 장치에서 흘러나온 듯한 전류가 아이의 위를 손상시키고, 더불어 불수의근의 움직임을 망가뜨려놓았다. 조금씩 혈액이 내부로 유출되는 것이 보였다.
“허튼 짓을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브루스의 목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알프레드가 덤덤하게 일렀다. 브루스를 미끼로 칼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생각한 모양이었다. 납까지 대서 외부와 내부의 전파의 교란과 쓸데없는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둥지는 굳이 그가 이곳까지 리모컨을 들고 오지 않으면 브루스의 위에 장착된 장치를 작동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사실을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하는 게 칼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종종 사람들은, 사실 칼 스스로 조차도 슈퍼맨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꽤 한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고는 했다. 칼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었다. 칼의 눈이 붉게 끓어올랐다. 금이 갔던 안경을 깨뜨리며 시뻘건 시선이 똑바르게 긴 궤적을 그리고 집사의 오른손에 닿아 그의 손과 리모컨을 통째 태워버렸다. 집사는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키며 몸의 일부가 사라지는 통증에 무릎이 무너졌다. 칼이 식은땀을 흘리며 작게 경련하는 브루스의 몸을 조심히 안아 올렸다.
“만일의 일이 생기면”
칼은 이를 갈며 뒷말을 뱉었다.
“너도 네 주인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외계인은 빠르게 부엉이의 둥지를 떠나갔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한순간에 손이 타 없어진 고통에 무릎을 꿇었던 집사가 시근시근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제가... 브루스를 죽여야한다고 했었지요, 토마스 도련님?”
책망보다도 한숨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답하지 않고 어둠이 차오르기 시작한 허공만을 노려보았다.
빨리, 더 빨리. 칼은 브루스를 온몸으로 감싸 안고 공중을 날았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신음처럼 이어지며 칼은 계속해서 비행속도를 높였지만 여전히 시원치 않은 빠르기였다. 그리고 1분이 조금 덜 된 때에야 비로소 선체 내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우선 칼은 외부에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을, 전파를 포함한 어떠한 파장이나 입자 전부를 차단했다. 그리고 결코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응급챔버를 가동시켰다. 챔버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완충액의 조성 퍼센티지를 확인하며 칼은 초조하게 입술 안쪽을 씹었다.
“브루스, 브루스? 조금만 참으렴.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칼은 금방이라도 브루스의 위벽에 파묻힌 장치가 아이의 장기를 손상시키고 결국은 그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닐까 무서워졌다. 마치, 자신의 앞에서 산산이 터져서 죽었던 그처럼. 혹시라도 다른 경로를 통해 장치에 신호를 전달할까봐 확신할 수 없어서 메트로폴리스는커녕, 이 지구의 병원에는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칼은 수술을 집도하고 후에 브루스를 돌볼 이 지구의 사람들을 믿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칼은 제가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을 떠올렸다. 늘 그 궤도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언제가의 미래를 기약하던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향할 지구. 바로 그 자신이 속해있던 지구였다.
칼은 초조함을 대신해서 선내의 모든 기기들을 작동시키며 시간을 견뎌냈다. 혹시 자꾸 움직이면 브루스에게 해가될까? 하지만 내려놓았다가 아이가 차갑게 식어버리면? 칼은 자신이 무어를 잘못했는가를 생각했다. 까맣게 달려드는 탈론의 무리를 죽이지 않으려고 쓸데없이 오랫동안 시간을 끌지 말았어야했다. 괜한 메시지와 함께 크라임앨리의 지하도를 인명피해가 없을 타이밍에 부수며 경찰이 원인규명을 하기 위해 싫어도 그곳을 재조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메이저부터 마이너까지 온갖 언론사를 들쑤셔서 익명으로 칼럼 따위나 퍼다 나른 게 잘못이었다. 브루스의 말을 듣고 아이의 곁을 떠나는 게 아니었다. 브루스가 건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의심 없이 살펴보지 않은 게 문제다. 브루스가 돌아가겠다고 할 때 아이가 충분히 칼을 택해도 된다고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도 같잖게 꼴에 어울리지도 않는 양보를 했던 제 무름이 실수였다. 왜 이렇게 모든 게 바보 같은 결말로만 치닫는지 칼은 화가 났지만 닥닥 떨리는 이를 사리문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브루스. 죽... 잠들면 안 된다. 눈 뜨고 있으렴. 미안, 내가 미안해. 얘야 제발, 브루스...”
이제 조금 있으면 완충액이 완성된다. 칼의 지구로 갈 때 브루스를 이 챔버 안에 재워두면 웜홀을 통과할 때 발생할 충격은 아이의 몸에 어떤 지장도 주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길어봐야 15분. 칼이 이 비행만을 위해 남겨놓은 에너지하고도 여분이 있으니 금방이면 된다. 아직 그렇게 까지 멀리 온건 아니니까 괜찮아. 아니, 유도파장을 보다 빨리 잡을 수 있는 경로는 없나? 칼의 시선이 브루스, 응급챔버의 상태를 표시한 패널, 우주선의 경로 설정이 표시된 모니터로 계속해서 이동하며 안정될 줄 모르고 헤맸다. 브루스가 겨우 뜨고 있는 눈으로 그런 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
아이가 갈라진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다 쿨럭하고 피 섞인 기침이 나왔다. 토마스에게 맞은 부위가 퍼렇고 검게 변하고 있었다. 칼은 제가 피를 토한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칼은 브루스를 내려놓지도, 그렇다고 괜찮다 다독이지도 못하고 그저 품에만 안은 채로 서성였다.
“걱정 마.”
위를 차가운 손이 몸통을 관통하고 들어와 그대로 움켜쥐는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지만 브루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프기는 정말 아픈데, 브루스는 왜일까 겁이 나지 않았다. 또 제법 확신하고 있었다.
“나 안 죽어.”
브루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울컥하고 다시금 통증이 치밀어 기침을 뱉느라 금방 무너져버린 웃음이었지만 분명 브루스는 웃었다. 칼은 그것을 똑똑히 보고 고개를 주억이다 기어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브루스가 칼의 품으로 더 제 머리를 묻었다. 자신과 별로 크게 다를 것 없는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응급챔버에 완충액이 전부 충전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다 괜찮을 거야.”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브루스를 포근한 무언가가 감쌌다. 브루스가 정신을 잃기 마지막에 칼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브루스는 그게 자신이 한 말이었다고 착각했다. 아이에게 어둠이 찾아들고, 우주선은 지구를 떠났다.
9
웡웡, 막 와인 반잔을 비우고 침실로 향하던 로이스는 거실쯤에서 행크가 짖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 얌전하고 순하던 행크가 놀란 듯, 위협하듯 목청을 높이자 로이스는 걸음을 돌려 행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집안에서 문제가 생길만한 게 있나? 로이스가 생각하다가, 어쩌면 바닥에 충전 중이던 오래된 로봇청소기가 제멋대로 움직이기라도 했나보다 하고 추측했다.
“왜 그러니, 행—”
로이스가 바짝 경계하는 자세로 엎드린 채 짖고 있는 개의 뒤통수를 보며 말하다 우뚝 멈추었다. 테라스와 이어진 거실의 유리 너머의 집 정원 가운데에 한가득 그림자를 드리운 무언가가 소리도 없이 있었다. 추정해보건대 비행체인 것 같았다. 로이스는 나이트가운을 굳게 여미며 근처 서랍에 보관해두고 있던 리볼버를 조심스럽게 챙겨들었다. 원래 총은 로이스가 아닌 남편의 것이었지만 여태까지 그녀와 함께 남아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영부인이던 로이스에게 이 정도는 최소한이라며 집 곳곳에 몇몇 보안장치들을 설치해 놓았다. 평상시에도 경비원을 두라는 요구를 거절한 뒤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제안이었지만 그들의 기술을 믿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기술의 모토는 자신의 남편인 렉스가 발굴해낸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얼마나 유효한 가는 따지지 않아도 훤했다. 그럼에도 그 경보들 무엇 하나도 뻥끗 하니 울리지 않고 미확인 비행체가 로이스의 집 마당에 착륙해 있었다. 굳이 로이스의 집을 노릴 까닭은 있는가? 경보가 울리지 않은 것은 어떤 의도에서인가? 그에게 만약 적의가 있다면 선제공격도 없이 저렇게 있을 이유가 있는가? 온갖 질문들을 머릿속에 담으며 로이스는 바깥을 향해 조심히 나아갔다. 위험 앞에서 몸을 숨기기보다 직접 마주하고 그것을 파헤치려 드는 것은 과거 기자로 활동했던 로이스의 버릇이자 습성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금속이 대기에 긁혀 약간 시큼한 탄 냄새가 난다. 그러던 중 로이스 앞에 무언가가 훅하니 날아들었다. 아니,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였다. 로이스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두 다리로 굳건하게 버티고 섰다.
“루터부인.”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파란 눈동자가 간절하게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선체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로이스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잠깐, 날아들었다고? 로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리고 아주, 아주 낡은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하나의 존재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너무나도 낯선 모습이 되어버린 슈퍼맨이, 그만큼이나 그와는 거리가 있는 말을 했다.
노년에 들어 젊었을 때처럼 세계 곳곳을 휘저으며 돌아다니기는 녹록지 않게 된 로이스는 과거에는 외부와의 투쟁에 헌신하던 이들을 지켜보았다면 지금은 자신과의 싸움에 하루를 걸고 있는 이들을 격려했다. 렉스 메디컬 센터는 아직 그 치료법을 찾지 못한 병과 치열하게 하루를 겨루고 있는 환자와 그들을 돕고자하는 의료진과 그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 헌신하는 학생으로 붐비었다. 명실상부한 국립의료원이면서도 한 개인의 이름을 딴 이 메디컬 센터의 간판이 로이스는 조금 거북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것을 그가 온당 받아야할 트로피로 여겼다. 부드러운 조명으로 은은하게 밝은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도중에 몇몇 얼굴을 아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로이스는 그녀가 목적으로 한 개인병실에 다다랐다. 로이스는 아주 작게, 그녀 자신도 부딪힌 손마디 끝의 감각으로만 겨우 알 수 있을 만큼 작게 노크했다. 얼마 후 남자가 나왔다.
“문병 와 주신건가요?”
지지난밤에 보았을 때는 옷이 이곳저곳 찢겨져나가고 머리카락은 산발이었던 남자는 이제 수수하지만 단정한 양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여느 성실한 회사원처럼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둥그런 안경까지도 쓰고 있었다. 제복도 아니고, 이미지 선전을 위해 연출된 평상복도 아니었으며, 그의 붉은 망토도 두르지 않은 슈퍼맨은 정말이지 낯설었고 평범했다. 그 탓에 로이스는 자꾸 의구심이 들었지만 밤의 소동을 비추어보면 이 남자는 분명 슈퍼맨이었다. 로이스는 의심을 다잡으며 소곤소곤 물었다.
“아이의 상태는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내상도 말끔하게 처치되었고요.”
남자는 도중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로이스는 저가 사온 병문안 선물을 내밀었다. 깔끔한 포장지 안에는 아이가 의식을 회복한 뒤 병실 침대 위에서라도 가볍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입체퍼즐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로이스에게 들어올 것을 권하듯 살짝 발을 뒤로 물렸다. 로이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는 중인 거 같은데 소란을 부리고 싶지 않아요.”
로이스가 조용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세파가 그녀의 얼굴 위에 그대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진실을 좇는 성정이 변함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로이스가 말을 이었다.
“잠깐 산책이라도 하겠어요? 병원 내 산책길이지만 꽤 잘 꾸며놓았거든요.”
잠시 로이스를 지켜보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손에서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아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다가가 그 옆 탁상에 선물을 올려두고 몇 번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리를 떠나기 전 로이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가 아이에게 “잠깐 다녀오마.”라고 인사했던 것 같다.
“어쩌다 어린아이가 저런 부상을 입었죠?”
간호인과 환자들로 소소하게 붐비는 병원의 뜰을 지나 한적한 산책로에 다다르자 로이스가 물었다. 신원이 모호한 아이를 빠르게 수속하여 수술을 진행할 수 있게 한건 로이스였다.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가 일을 마친 후 로이스에게 연락을 하며 의아한 듯, 그리고 두려운 듯 물었다. “혹시 테러리스트라던가 불온한 집단과 관계된 걸까요? 당국에 보고하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아이의 위에서 꺼낸 흉흉한 장치를 본 연배가 꽤 있는 의사는 세계가 지금처럼 안정되기 전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때의 살풍경을 여전히 뇌리에 담고 있는 탓에 금방 그런 유의 일은 아닐지 걱정이 든 모양이었다. 비록 평화의 시기에 들었다고는 하나 결국 인간 사회에서 진정으로 조용할 날은 결코 찾아오지 않았고 분쟁의 씨앗은 찾으려면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 어쩌면 그러한 소음들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평화의 증거일지도 모르고. 로이스는 자신이 후원하는 복지시설에서 학대를 받는 아이에 대한 제보를 받았고 워낙 연고가 없는 아이라 급한 대로 자신이 직접 이 병원에 수속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의사는 놀라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아이의 위에 저런 걸 심어놓느냐고 새되게 외쳤다. 로이스는 현재 사건은 정리되고 있으며 적당한 후견인도 찾았기 때문에 아이가 놀라지 않게 회복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달라 당부했고 의사는 로이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원래대로면 보다 장황한 시나리오가 필요한 임시변통이었지만 이면에 로이스 루터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던 덕분에 퍽 손쉽게 일은 진행되었다.
로이스의 질문에 남자는 찡그린 얼굴로 입만 웃는 모양을 그린 채 느리게 답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당신의 부주의로 아이가 발전장치를 위에 담고 있었다고요? ...도통 당신에게는 평범한 일이 없군요.”
“원래 평범이야말로 가장 추상적이고 가상적이지 않던가요.”
남자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변명이라기 보단 한탄에 가까웠다. 잠시 둘 사이에 말이 사라졌고 그 사이로 느린 바람이 불었다. 산책로를 두르고 있는 가로수들의 나뭇잎이 공기의 움직임에 손을 흔들며 차락차락 소리를 냈다.
로이스가 또박또박 새로이 말을 꺼냈다.
“당신, 여태 살아있었군요.”
슈퍼맨이 걸음을 멈추었고 로이스도 그와 맞춰 발을 세웠다. 이미 온 머리가 하얗게 된 자신과는 다르게 자신의 동년배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옆머리만 살짝 희끗한 채로 한창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습 하고 깊이 공기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가슴 깊이 숨을 집어넣은 남자는 천천히 그것을 뱉어내며 얘기했다.
“부인께선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로이스면 됩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빨간 망토는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하하, 남자가 짧게 기계적으로 웃는다.
“워낙 알록달록한 세상 아닙니까.”
“이 총천연색의 세상이 오기 전 당신이 세계에 드리웠었고요.”
로이스가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로이스의 목소리는 음량이 크지 않았고, 어조도 지극히 차분했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당당한 그녀 특유의 힘이 실려 있었다. 남자는 그런 로이스를 그저 순종적으로 바라만 보았다.
“브레이니악과의 싸움에서 당신은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으로 되었어요. 우리에게는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초리 아래에서 떨던 이들, 당신에 의해 뇌에서 생각을 적출당한 이들, 당신과의 싸움에서 스러진 이들... 모두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하지만 슈퍼맨, 당신은 없었죠. 인류는 결국 죽음 앞에서 관대했고 우리는 기꺼이 당신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당신이 있어요.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하죠? 당신의 생존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하나요.”
슈퍼맨의 사후, 배트맨의 후예들이 시스템을 바로 세우기 전까지 소련과 관련 국가들에 있었던 일련의 진통들을 떠올리며 로이스는 딱딱하게 말했다. 남자는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풀의 노래만이 무성한 뒤, 조금씩 조금씩 아주 오래 돼 버린 남자의 시간이 입에서 발하는 언어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단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슈퍼맨은 죽었습니다.”
남자는 한 박자 말을 멈추고, 자신이 하는 말을 자신의 가슴 깊숙이에 담으며 이어갔다.
“그 독재자는 폭발에 휘말려 마지막에나마 영예롭게 제 몫을 해냈습니다. 앞으로의 언제라도 그는 다시 이곳에 오지 않아요. 이 세계에는 슈퍼맨이 없습니다. 필요하지도 않고요. 저는 그게 옳다고 믿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아요.”
“그럼 당신은 침묵할 생각이로군요. 법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죽음 뒤에 은닉해서 이제까지처럼 몸을 감출 셈이에요.”
“로이스 씨, 저는...”
“...그렇게 당신이 줄곧, 숨소리 하나 없이 사라진 덕에 내 남편은 존경받는 렉스 루터로서 눈을 감을 수 있었고요.”
로이스는 렉스의 마지막 인터뷰를 떠올렸다. 얼굴에 서린 주름 하나하나에 자부심을 가득 안고 자신의 ‘큰 업적’에 대해 답하며 전례 없는 득표율을 자랑했던 전 대통령은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한 사람이 저를 위대하다 만족하며 죽음에 잠기던,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가장 영광된 순간이었다. 로이스는 그날 자신이 느꼈던 안도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열정이 광기가 되지 않은 것에, 그의 싸움에 세계가 더는 용인하지 않을 범위에서 세상이 휘말리지 않게 된 것에, 그리고 그가 그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눈을 감은 것에 로이스는 감사했다.
사람들은 슈퍼맨이 외계인이기 때문에 이 지구를 휘둘렀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화약고는 인간 그 자신들이었노라고 로이스는 생각했다. 누구보다 힘을 가진 자는 거만해지기 쉬웠고 결국 그 붉은 독재의 세상은 슈퍼맨과 인간의 합작품이었다. 슈퍼맨은 공범들이 숨기기에 참으로 핑계 좋고 거대한 카무플라주였다. 그들과 같은 종족이 아니기 때문에 대립하기도 쉬웠으며 의심하기도 쉬웠다. 축제의 막이 오르듯 전쟁의 탄화대신에 폭죽이 쏘아 올라가던 하늘을 보며 로이스는 우주 어디선가 있었을 폭발을 그렸었다.
“당신은 내가 더 이상 펜을 잡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할 거예요.”
또 당신이 돌보아야할 아이도 있고요. 남자가 이제야 겨우 기껍게 웃었다. 두 사람은 다시 멈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남자가 불현듯 병원 건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던 남자가 급한 얼굴이 되어 양해를 구하려는 듯 로이스에게 입을 열었다. 로이스는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안부전해주세요. 다음에 다시 찾아갈 테지만. 아, 그리고 가기 전에.”
이제는 몸을 거의 완전히 튼 상태인 남자에게 로이스가 물었다.
“이제 당신을 뭐라 부르면 되나요.”
“칼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미소와 함께 자랑스럽게 답한 남자, 칼은 금방 로이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뒤로 남긴 바람이 로이스는 과거의 언젠가 겪었던 것도 같았고, 전혀 새로운 것도 같았다. 소련에서 미국까지 한달음에 날아와 어린아이와 엄마를 구하던 슈퍼맨은 여태까지도 로이스가 잊고 있지 않던 기억 중 하나였다.
“다시 봐서 반가웠어요.”
왜일까, 로이스는 가슴 한구석에 있던 이름 모를 짐을 덜어내며 미소 지었다.
아이의 손끝이 매트리스 위에서 까딱이는 소리를 들었다. 심장박동과 호흡수가 조금 상승하면서 아이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속도로 병실 앞에 도달한 칼은 급하게 몸을 멈추어 세우고 할 수 있는 온힘을 다해 침착하게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은 어떻게 망가뜨리지 않았지만 결국 브루스의 곁으로 다가가는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서 아이의 뺨에 그가 몰고 온 들뜬 공기가 간지럽게 부딪쳤다. 감긴 눈꺼풀이 몇 번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열리면서 그 뒤로 숨어있던 하늘이 드러났다. 칼이 커다랗게 미소 지었다. 아이의 눈도 그것을 분간해내고 그를 따라 호선을 그렸다. 아직은 메말라서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아이가 말했다.
“안녕, 칼.”
자신을 향해 뻗어지는 작은 손을 두 손으로 맞잡으며 칼은 몸을 구부려 그것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마치 감사의 기도를 올리듯, 칼이 아이의 인사에 답했다.
“안녕, 브루스.”
“춥지 않니?”
“괜찮아.”
눈으로 푹 뒤덮인 길을 걸으며 칼이 3번째로 같은 질문을 했다. 역시나 3번 같은 내용을 돌려주는 브루스의 대답은 칼이 칭칭 감아놓은 털실목도리에 막혀서 둔탁했다. 브루스는 귀까지 가리는 폭신한 빵모자에 두터운 외투를 차려입고 있었지만 칼은 결국 제 손에 들고 있던 담요를 아이에게 둘러주면서 아이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맨 처음 칼이 저를 안아들려고 하자 브루스가 질색을 하며 선내를 뛰어다니려고 했기 때문에 식겁한 칼이 어떻게 마음을 접었구나 싶었지만, 결국 칼의 고집이 이기고만 셈이었다. 으휴, 브루스가 과장스럽게 한탄했다.
나무가 빼곡한 길을 지나 작은 공터에 들어서자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나오는 단층건물이 나타났다. 뽀득뽀득 눈 알갱이를 으깨며 현관에 다다른 칼은 가볍게 발을 털어 묻은 눈을 떨어뜨렸다. 칼이 한 손으로 아이를 받쳐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잠긴 문을 열어 실내로 들어섰다. 포근한 공기가 부드러운 나무냄새를 가득안고 두 사람을 반겼다. 아이가 퇴원하기 전에 미리 집에 와서 난방을 땐 덕이었다. 하지만 칼은 지금의 온도가 브루스에게 적절한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날씨가 보다 따듯한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칼이 조심히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칼의 걱정은 브루스가 제게 둘러진 담요와 외투 등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다.
“혹시 너무 서둘러서 퇴원한건...”
“의사선생님이 몇 번이고 말했잖아. ‘아이는 괜찮습니다. 퇴원해도 좋아요.’”
브루스가 폭 한숨을 쉬며 병원에서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하던 칼에게 인내심 있게 대꾸해주던 의사의 말을 그대로 모사했다. 칼이 멋쩍게 웃으며 아이의 손에서 옷가지들을 받아들어 벽에 부착된 옷걸이에 잘 걸어놓았다.
“여긴 폐쇄된 선내가 아니라 온도가 적절한지 모르겠구나. 브루스 지금 있기 괜찮니? 춥다거나... 혹시 더우면—”
“칼.”
옷가지를 정리한 뒤에도 몇 번이고 다시 옷의 주름을 피거나 벽난로 옆에 가서 타닥타닥 불에 타는 나무들을 확인하거나 그 옆에 있는 여분의 땔감을 만지작거리거나 하면서 산만하게 움직이는 칼을 브루스가 불러 세웠다.
“진정해. 난 괜찮아.”
브루스의 말에 움직임을 멈춘 칼이 한참 뒤에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괜찮지 않단다.”
아직도 아이의 얼굴을 볼 때면 그의 옛날 속에 깊이 자리한 망령이 시니컬하게 웃어댔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았어, 잘못 행동하지 않았다고. 칼이 꿈속에서 저를 비웃는 남자에게 외쳐보았지만 그는 그래서? 하고 되물으며 비뚜름하니 웃었다. 마치 그가 다시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상에 어설프게 관여한 것부터 잘못되기라도 한 듯 죄책감이 시꺼멓게 차오르고 그 버거움에 눈을 뜨면 병실에서 아이가 눈을 감고 있었다. 잘못 행동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어떤 판단인가 잘못 내리지 않았다면 브루스가 이렇게 누워있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칼은 이 모든 게 자신의 업인 것만 같았다.
“전혀 괜찮지 않아, 브루스. 네 몸 안에서 전기가 터진 건데 괜찮을 리가 없잖니.”
“하지만 죽지 않았잖아. 알프레드도 죽일 생각이었으면 분명 단번에—”
“지금 목숨에 문제가 없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니!”
칼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자 그 성량에 오히려 자신이 놀라서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칼은 눈을 꾹 감았고, 식식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다시 차분한 얼굴이 된 칼이 입을 막던 손을 내렸다.
“...브루스, 난 네가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었어.”
말을 하는 도중에도 칼은 중간 중간 의도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죽였기 때문에 그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내가 어설프게 선을 세울 것 없이 너를 지켜봤다면 네가 네 지구를 떠나면서까지 수술을 받을 일은 없었겠지. 브루스, 난 네가 저택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어. 너도 알다시피 난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네가 그들을 쫓아내는 게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내가, 아니,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아이가 칼을 바라보았다.
“정말 칼이 모든 걸 할 수 있었어? 그럼 우리 부모님이 죽던 밤은 어때? 그때도 내 지구에 있었어? 있었으면 칼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소리도 다 들을 수 있잖아. 우리 부모님이 죽지 않을 수 있었어?”
칼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 밤에 언제쯤에 브루스의 지구를 찾아들었는지, 그가 누군가의 손에 불타버린 농장을 허망하게 바라보다 고담에 도착한 것은 언제쯤이었는지, 사건은 어느 쯤에 있었는지 등을 계산했다. 원했던 것과 영 다르게 점점 묵묵히 가라앉는 칼의 눈동자를 본 브루스가 답답한 듯 외쳤다. 브루스는 칼에게 다가가 비어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런 표정을 해... 그건 칼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었잖아! 그날 밤에 칼이 구해준 것만으로도 나한텐 충분히 기적이었다고. 다 지나버리고 나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따지자면 끝이 없어. 그렇게 치면 나야말로 처음부터 토마스의 말을 듣지 않았어야 했어. 멍청하게 알프레드가 내미는 약을 덥석 삼키지도 말았어야했고. 아님, 칼은 그걸 내 잘못이라고 할 거야?”
“그럴 리가 없잖니.”
“마찬가지야. 생각하지도 못한 일에 부주의한 건 잘못이 아니잖아. 잘못은 알프레드가 한 거지, 나도 아니고 칼도 아니야.”
브루스가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칼, 내가 뭐라고 했어. 날 너무 감싸고돌지 말라고 했었잖아. 칼은 내 말을 들은 거뿐이야. 그리고 칼이 내가 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도... 난 칼을 믿지 못했을 거야. 솔직히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걸! 어쩌면의 이야기는 결국 지금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야. 칼도 토마스랑 알프레드를 봤잖아.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건 그나마 칼이 있어서라고. 그렇게는 생각 안 해?”
브루스가 물었지만 칼은 여전히 불확실한 얼굴로 미묘한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브루스는 조금 절박하게 제가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을 마음 밖으로 꺼내기 위해 허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한탄만을 듣기에 브루스는 알아야할 게 있었다. 이것은 혼자 빙빙 생각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랬다간 칼이 또 무슨 생각을 저 혼자 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브루스는 칼의 입에서 나온 답이 필요했다.
“지난 얘기는 이만하면 됐어.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브루스에게는 이제 본인도 가늠하지 못할 기다란 시간이 앞에 텅 빈 채 남아있었다. 가능성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미궁이기도 한 시간들은 혼자가 걸어가기에는 많이 먼 거리였다. 후우, 브루스는 길게 한숨을 쉬었고 조금 긴장이 돼서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브루스가 질문을 입에 담았다.
“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타닥타닥, 거실의 벽난로에서 나무의 섬유가 불씨에 타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혼란도 자책도 분명 응당 있어야할 감정들이었지만 칼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런 감정을 겪기에는 제멋대로였고 자신을 보다 높은 위치에 두어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적으로 분류하고 믿지 않았다. 정도를 조율할 필요도 없이 충분히 구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저 그러면 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결국 무엇을 만들었는가를 떠올리면 칼은 제가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괴로웠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제했더니 이번에는 이렇다. 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슨 일이 일어난 후에는 너무 늦단다. 브루스... 또 네가 이런, 일을 겪게 된다면 나는... 그렇다고 너를 가둬두고 싶은 건 아니야. 나는 방관자가 되기에는 너무 너와 가까운 곳에 있고, 네 보호자가 되기에는 많이 미숙하단다. 하지만, 그런데도...”
한참 혼잣말처럼 단어를 굴리던 칼이 겨우야 땅을 이리저리 스치던 시선을 바로잡고 브루스를 향했다.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쥐며 칼이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랑 있어도 될까?”
자신감 없이 떨어지는 말에 계속 딱딱한 얼굴로 칼을 보고 있던 브루스가 서서히 피어나듯 환하게 웃음을 그렸다. 아이는 답싹 칼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아이가 즐겁게 외쳤다.
“싫어도 그래야지! 칼 때문에 이제 나도 외계인인걸!”
내가 로이스한테 날 설명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홍채에는 마치 별이 헤엄치듯 반짝였다. 칼이 조금 힘겹게 아이의 등을 감싸 마주 안았다. 타오르는 장작불의 열기는 알기 어려웠는데 지금 이 작은 아이가 따뜻하다는 건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결국 문제는 뿌리를 뽑지 못한 채 어느 날엔가 터오를 싹을 남기고 저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잡초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배워두었으면 좋았을걸... 칼이 문득 생각했다.
“널 병 안에 담지 않을 만큼은 너도 나를 도와주면 좋겠단다, 브루스.”
“칼이 그렇게 말한다면 고려해둘게. 하지만 여차하면 칼은 울면서도 날아올 거잖아? 난 그래서 조금 샘이 나.”
멋지기는 하지만... 브루스가 마지막쯤에 가서는 작게 말을 얼버무렸다. 짧게 시선을 돌렸던 아이는 다시금 칼과 눈을 마주쳤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아이가 발을 반걸음 쯤 뒤로 물린 뒤 인사했다. 칼이 아이와 눈높이를 같게 하며 다시 아이를 끌어안으며 꼭 같은 말을 속닥였다. 브루스가 마치 달래듯 칼의 등을 작게 토닥였다. 서로를 감싼 두 사람의 팔이 마치 죽 이어진 궤도와 같았다.
어째서 마주치게 되었는지는 여러 경로가 있다. 수많은 선택들의 집합이 만들어낸 세상 속에서 질량을 지닌 두 물체가 인력을 지니고, 우주의 무한 속에서 서로를 인지한 후로 배열된다. 이 너른 세상 위에 존재는 언제고 떠돌겠으나 분명 그 자리에 있을 서로를 붙잡듯 이어져서 흘러간다. 별은 그렇게 존재한다. 누군가의, 또는 우리의 우주 안에.
+1
몇 주 뒤면 찾아올 파종기를 대비해 시동에 자꾸 문제가 생긴다던 피트 씨 트랙터의 수리를 마지막으로 칼은 오늘의 영업을 마쳤다. 농한기라 한동안 기계의 수리보다 명절 선물로 받은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자전거를 고쳐주는 일이 많던 칼의 가게는 정비소라기 보단 잡동 수리점에 가까웠다. 가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칼은 자신의 집이 있는 동쪽을 향해 갔다. 너른 평야 위에 세워진 작은 마을은 조금만 중심지를 벗어나도 금세 한적한 풍경이 된다. 봄이 찾아오기 바로 코앞의 시기에 부는 쌀쌀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칼은 천천히 걸었다. 1년하고도 6개월 전쯤이었다면 인적 없는 곳에 다다르자마자 바로 하늘을 날아서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을 테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칼은 그저 느리게, 보통의 사람들보다도 느리게 걸으며 어서 봄이 오기를, 그래서 보다 오래 정비소 문을 열 수 있는 계절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도 아니라면 더 빨리 움직여서 차라리 쌩하니 늦여름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입에서 아직 하얗게 피어나는 김을 보았다. 이제 겨울이 두 번 지나가고 있다. 두 번이나 겨울이었다. 아니면 두 번 밖에 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가? 어떤 표현이 더 적합한가를 생각하다 칼은 문득 발을 멈추었다.
칼은 저만치쯤에 있는 자신의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어느 방에도 불이 들어와 있지는 않았지만 칼이 한두 번 정도는 구색에 맞춰 작동시켰다가 언제부턴가는 필요를 잊고 때지 않던 난방이 돌아가고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장작을 때는 집은 아무리 아날로그적인 면모가 남아있는 스몰빌이라도 드물었지만 칼은 역시 이런 구식에는 구식 나름의 미학이 있는 법이라고 지금 순간에 생각한다. 겨울의 첫 번째 눈송이를 봤을 때도 아무런 마음이 들지 않다가 별안간 칼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나가 공중을 걸었다. 그리고 금방 날아서 제 집 현관에 다다랐다. 칼은 현관문을 여는 제 손의 움직임이 턱 없이 느리다고 생각했다.
끼이, 문을 열고 늦은 오후의 그림자 속에서 집안의 풍경은 잠잠했지만 실내를 오가는 열기는 한참은 되었는지 포근하게 칼을 맞이하고 있었다. 벽난로의 따뜻한 소음과 라디에이터 관을 따라 스팀이 부딪히는 소리가 어울러났다. 칼은 현관문 앞에서 두둥실 떠 있는 공간의 왜곡을 보았다. 두 공간 사이의 거리를 잘라 서로를 이어놓은 포털이 이 한적한 스몰빌, 그 중에도 꽤 외곽지에 위치한 칼의 집안에 심상하게 열려있었다. 그 너머로 언뜻 잘 정돈된, 삭막하게도 보이는 작은 방이 보였다. 칼은 곧 시선을 돌리고 뒤로 이어진 집의 풍경을 확인했다. 우선은 겉옷이 벗어져 있었다. 그리고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윗옷이 떨어져 있고 욕실 문 앞에는 부츠와 바지가 있다. 제 움직임을 설명해놓은 듯 어지럽게 탈의된 옷들을 주워 모으며 칼은 잠깐 웃다가 이제는 욕실과 요 1년 6개월간 그 주인이 비워놓았던 방 사이 즈음에 떨어져있는 바스타월을 보았다. 칼은 잠깐 숨을 낮추었다. 오랜만에 귀를 기울이자니 칼의 몸속의 장기들이 여간 시끄러워서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진정할 요량으로 문 너머로 소리를 먼저 확인하려했던 것을 포기하고 칼은 조심히 브루스의 방문을 열었다.
온화한 어둠 속에서 요간 줄곧 평평하게 정돈되어 있던 이불이 알맹이를 하나 품에 안고 새근새근한 숨소리와 함께 느릿하니 움직이고 있었다. 칼은 브루스의 옷을 방 한쪽에 정리해 둔 다음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히 그 옆으로 다가갔다. 이불 속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잠이든 브루스는 마치 그 동안에도 계속 그랬던 것처럼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키가 좀 더 컸나? 뺨이 야윈 것도 같은데.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칼은 습관적으로 맨 어깨가 드러난 브루스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협탁 위에 브루스가 끼고 갔던 손목시계를 보았다. 칼의 시계와 꼭 같은 시간과 날짜로 맞춰놓은 시계였다. 칼은 문득 오늘이 며칠인지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잠이 든 상태의 브루스를 이불 째로 끌어안으며 인사했다.
“어서 와.”
칼은 1년 6개월 만에 제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탐사대에 참가하면 어떻겠냐고 제안 받았어.”
아삭아삭 샐러드를 씹던 브루스가 어금니로 잘게 찢은 채소를 삼킨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브루스의 접시에 새로 미트로프 조각을 담아주던 칼이 잠시 손을 멈추며 눈을 껌뻑였다. 브루스의 접시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천천히 거두며 칼은 지나가듯 물었다.
“어느 탐사?”
브루스가 포크를 쥐지 않은 손을 뻗어 천장, 그 너머를 가리켰다. 실은 묻지 않아도 브루스가 어떤 일을 제안 받은 건지 아이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나 요즘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상기해보면 뻔히 알 수 있었다.
“알버트가 추천서를 넣어준다고 했어.”
“...그랬구나.”
자신의 접시로 돌아온 칼의 손이 몇 번 허공을 해매다 우뚝 멈추었다. 숨을 한 번 삼키고 차분하게 시원치 않은 맞장구를 한 칼은 제 옆에 있는 물 잔을 비웠다. 브루스는 힐끔 곁눈질로 칼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칼이 덜어준 미트로프의 귀퉁이를 포크로 떠서 먹었다. 토마토소스가 브루스의 취향대로 달았고, 고기는 향긋한 허브솔트 덕분에 잡내 없이 깔끔했다.
“칼이... 하고 싶은 말 없어?”
“내가 말참견을 할 일이 아니잖니. 브루스, 네가 결정해야할 일이지.”
칼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다만 느릿한 어조로 질문을 던진 브루스에 비해 그의 대답이 지나치게 빨라서 균형이 맞지 않아 둘의 대화는 어색한 침묵으로 이어졌다. 마치 브루스가 테미스키라의 원더우먼에게서 무술을 배우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와도 같았다. 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으로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 일이라면 굳이 마음이 그에 토를 달 필요는 없을 텐데. 칼은 비어버린 잔에 물을 채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곁눈으로 바라보는 브루스의 얼굴은 이제 앳되다기보다 성인 남성이라 해야 할 완연한 청년의 것이었다. 콧등이 그리는 선이 매끄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몰래 칼의 움직임을 살피는 브루스의 머리카락을 부엌으로 향하는 길에 조심히 쓰다듬었다. 브루스의 눈가에서 긴장이 풀어지며 살며시 눈꼬리가 접히는 것을 보았다. 그 미세한 변화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으며 칼은 가슴이 따끔했다.
파도와 함께 검고 고즈넉한 밤이 수평선에서부터 섬을 향해 흘러왔다. 솨아아, 싱그러운 함성과 같은 바다의 소리를 들으며 한참 위와 아래의 경계를 잃고 하나로 섞이는 풍경을 바라보던 파라다이스 섬의 주인은 대번에 불쾌한 얼굴이 되었다. 다이애나는 딱딱하게 말했다.
“당신, 생각보다 정말 뻔한 사람이네.”
단단히 팔짱을 끼고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소리 없이 이 섬으로 찾아온 슈퍼맨이, 아니 지금은 칼이라고 했던가?(다이애나는 그것이 그렇게 탐탁지는 않았다.), 묵묵히 서있었다. 오래된 친우를 방문하듯 그의 입술이 제법 호의적인 모양새를 그리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 숨은 푸른 눈이 무쇠처럼 단단하리라는 사실은 굳이 저 하늘 위에 둥글게 뜬 달이 아니더라도 뻔했다. 예의 전쟁 이후로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가 된 다이애나는 최근 로이스의 아들이 대학교 총장으로서 자문한 어느 사안에 대해서 언질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게 어제의 일이었으니 이쯤이면 뻔하기도 뻔하지만 참을성도 형편없는 남자다. 다이애나는 비웃듯 픽하니 콧방귀를 친 뒤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칼에게 물었다.
“브루스가 떠나기로 결정했대?”
“아직.”
한 마디의 화두도 꺼내지 않았는데 바로 맥락을 잡고 신랄하게 이야기하는 다이애나를 경계하듯 바라본 칼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안을 받았다더군. 가겠다는 얘기는 아니었어.”
“그 애는 우주에 관심이 많잖아. 좋은 기회 아니야? 세계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하면 더 제 분야의 사람들과도 교류할 수 있고 말이야. 무엇보다 영리한 아이니까. 언제까지 집안에만 붙박여 두긴 당신도 아까울 텐데?”
칼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시 묵언 시위를 시작한 듯 다이애나를 바라만 볼 뿐 아무 얘기도 하고 있지 않은 칼을 보며 다이애나는 신경줄이 팽팽해지는 것만 같았다.
“뭐가 불만이라서 여기에 온 거야? 당신과 내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잖아.”
“딱히 나는 당신을 적대하지 않아.”
“곁다리는 집어치워. 본론을 말해.”
다이애나가 사납게 말했다. 둘 사이에 잠시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밤벌레의 울음이 차오르고, 그 짧은 침묵을 푹 내쉬는 한숨으로 거두며 칼이 딱딱하게 이야기했다.
“알버트에게 왜 브루스를 추천한 거지?”
“내가 같은 말을 두 번 해야 할 이유가 뭐야?”
“브루스가 뛰어난 건 나도, 내가 제일 잘 알아. 하지만 우주란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건 학계 트렌드 같은 거 아닌가? 인간들은 이제 지구 너머의 별도 제게 맞춰 개간하고 싶어 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학생은 당신의 나라 쪽에도 있었을 텐데? 바네사... 였던가? 그런데 왜 굳이 브루스지?”
“바네사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메카닉 쪽이지 탐사가 아니야. 알버트는 내게 가장 적합한 인재를 물었고 나는 그에게 추천한 것뿐이라고.”
“브루스의 신분은 위장된 거야. 그런 탐사에 참여했다 전산 상에서 발각되기라도 하면 문책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고.”
“그 위장은 미국으로 간 당신을 위해서 로이스 루터가 손수 마련한 거야. 설마 그녀도 못 믿겠다는 거야? 아님, 당신이 감싸고 돌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다니 마음이 언짢으신가?”
“나랑은 상관없어! 난 브루스가―”
“브루스를 내세울 생각 마. 당신은 당신 문제로 나한테 날아온 거야.”
칼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얘기하는 다이애나를 노려보던 칼이 무표정이나마 가장하던 얼굴에서 이제는 아예 적의를 감추지 않으며 외쳤다.
“이게 내 문제라면, 좋아. 다이애나. 당신은 내가 이걸 내 문제로 받아들일 걸 알고 있었군. 날 괴롭히고 싶은 거라면 내게 직접 와! 브루스를 끌어들이지 말고 나와 대면하라고!”
그리고 칼이 말을 끝내자마자 다이애나가 주먹으로 칼의 뺨을 쳐 날렸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제 손의 뼈가 나갔겠지만 신의 힘을 담은 단단한 테미스키라 주인의 주먹은 그대로 외계에서 내려온 철의 남자의 얼굴에 꽂혀 그를 저 멀리로 날려버렸다.
“감히”
열을 토하며 다이애나가 이를 갈듯 말했다.
“감히 지금 내가 당신과의 시답잖은 과거 감정에 내 제자를 이용했다고 말하는 거야?”
찢어진 볼 안쪽에서 피가 차올라 퉤하고 모래바닥 위에 그를 뱉어낸 남자는 비틀비틀 몸을 가누며 자리에 앉았다. 눈동자를 새파랗게 불태우며 칼을 내려다보는 섬의 주인의 얼굴에 칼은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칼은 비뚤어진 안경을 바로 고쳐 쓰면서 힘없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 하필 우주야.”
다이애나가 다시 픽하니 웃었다. 결국 우는 소리나 하려고 왔군. 아이가 처음 제게 제자를 자청하며 왔을 때와 같았다. 다이애나는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어떻게 젊은 시절의 자신은 그렇게도 마치 그가 어떤 이상의 현신인 것 마냥 바라볼 수 있었는지 터무니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그를 보고 있자면 그 세월도, 그의 죽음-비록 가장된 것이었지만-으로 부전승처럼 얻은 승리도 다 하찮게 보였다. 그게 어떤 앙금을 남기는 것 자체가 허무할 정도로. 그래서 다이애나는 미움도, 사랑도 모두 털어버렸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가뿐한 마음으로 남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옆에 있는 게 브루스에게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해? 브루스가 바란다면 난 그 애가 독립해서 살아도 괜찮아.”
“하하.”
다이애나가 크게 웃었다.
“독립이라 했어 지금? 이 지구 안에서? 당신으로부터?”
“...지구도 꽤 넓다고.”
“좁다고 다들 나가는 마당에 잘도 말하네.”
“내 말은... 내가 문제라면 날 통제하면 될 일이지 브루스가 이방인처럼 떠돌아다닐 필요는 없다는 거야.”
다시 푹 한숨을 쉬더니 칼은 제 머리카락을 벅벅 한 손으로 헤집었다. 브루스의 일이 되면 지나칠 정도로 소심해지는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고 그의 과거를 비춰보면 묘하게 안심이 들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칼의 옆에 나란히 앉으며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불퉁하니 쳤다.
“내 말을 어디로 듣는 거야. 브루스를 인선에 추천한 건 그 애가 자격이 돼서지 다른 의미는 없어. 그 애가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면 돼.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으면 그 아이가 어떨 거 같아?”
“...나도 알아.”
칼은 별이 무수한 하늘을 헤아렸다. 저 먼 어딘가에는, 이곳에서 칼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 어딘가에는 아이의 지구가 있다. 자신이 브루스를 이 지구로 데려온 걸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칼이 최대한의 신뢰를 가지고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 길 밖에 없었으니까. 다만, 브루스를 구하고자 했던 일이 시간이 흐르면서 칼에게 행복들을 쥐어주기 시작하자 불안해졌다. 자신은 브루스와 만나고 비로소 이 세상을 ‘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는데 자신은 브루스를 그의 고향과 몇 광년은 한참 떨어진 곳으로 허겁지겁 데려와 버렸다. 브루스가 싸움을 배우고, 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우주에 흥미를 느낄 때면 칼의 마음속에 깊이 묻어놨던 바늘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브루스가 혹시 발밑이 그 어느 곳에도 고정되지 않은 부유감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사실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아이를 이 지구에 매어놓은 것은 아닐까하고. 그러면서도 이제 칼은 자신의 욕심이 없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고 감히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함부로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이 행복은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브루스가 옆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무서워, 다이애나.”
찌르찌르, 벌레의 울음소리에 섞어 칼이 볼품없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브루스의 삶이야. 그 애를 믿는 거 외에 당신에게는 어떤 권리도 없어.”
브루스 앞에서는 내숭 잘 떨잖아, 계속 어른스럽게 굴라고. 역시나 원더우먼의 충고는 가차가 없다. 칼이 그녀를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녀의 이런 단호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슈퍼맨의 환상에 속았다가 진상을 직면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결코 자신에게 유하지 않을 테니까. 칼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돈했다.
“내 우주선에 있던 장치를 휴대형으로 만든 포털이란다.”
둥근 모양의 손바닥만 한 장치를 브루스에게 내밀며 칼이 이야기했다.
“크립토나이트 방사능이면 작동할 수 있단다. 어차피 우주와 우주 사이를 뛰어넘을 일은 없을 테니까 궤도를 별도로 찾지 않아도 우리 집에 있는 유도포털이면 24시간 정도는 네가 있는 곳과 여기를 연결할 수 있을 거야.”
“차라리 나한테 유도포털을 주고 칼이 내 쪽으로 건너오면 되잖아.”
“내가 크립토나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잘 알잖니.”
칼이 눈썹을 휘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칼은 만약의 일을 대비해 브루스가 열여섯이 되던 날 브루스에게 초록빛이 영롱한 광석으로 만들어진 반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광석이면 자신을 제지할 수 있다고 손수 설명해주었고 실제로 크립토나이트의 영향 아래서 칼은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듯 쇠약해졌기 때문에 그가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님은 알았다.(처음 반지를 받던 날 브루스는 칼의 변화를 보고 얼른 납상자의 뚜껑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브루스도 크립토나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루스는 흠하고 그런 칼의 얼굴을 다른 목적이 있지는 않은지 조사하듯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날 너무 믿지 마렴. 탐사선에 무단승차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 거 같니.”
“관계자는 문책되겠지.”
브루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칼이 건네는 장치를 받아들었다.
“나가면 2년 뒤에나 다시 돌아올 텐데 한 번이면 될까?”
“거기가 별로면 돌아온 뒤 다시 안 나가면 돼.”
“실종자가 발생하는 거야말로 큰일 아니야?”
기가 막힌다는 투로 묻는 브루스에게 칼은 태연하게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횟수를 늘리면...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나한테 이걸 주는 이유는?”
“...짓궂어졌구나.”
“칼 덕분에.”
브루스가 가볍게 대꾸했다. 잠시 자신의 방안을 차례 없이 훑어보던 브루스가 칼의 얼굴에 곧은 시선을 주며 또박또박 물어보았다.
“괜찮겠어?”
“괜찮다고 네게 말할 수 있어야 옳은 거겠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안 괜찮으면 안 괜찮은 거지. 그래도 별 수 없기는 하지만.”
“그럼 내게 물을 이유가 없지 않니?”
칼이 서운한 척 얼굴을 찌푸리고 물으면 브루스는 진지한 얼굴로 답한다.
“칼이 불안한 게 뭔지는 알 수 있잖아.”
칼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칼이 그에게 얹어주고 싶지 않았던 걱정이 숨어있었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브루스에게 내숭을 떤다고 했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칼은 브루스 앞에서 쪼그려 앉아 눈물을 보인 후로 본의든 아니든 한심한 모습조차 아이에게 내보이며 살아왔고 브루스는 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눈치가 빨랐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고 칼은 자신이 브루스를 염려하는 만큼 브루스도 그에 대해 답하려 한다는 것을 안다. 아이를 보호하려는 보호자로서는 실격이었지만 애초에 칼에게는 아이의 보호자가 될 만한 지혜도 없었다. 그저 같이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만이 있을 뿐. 브루스의 눈 속에서 하늘을 헤아리다가 칼은 마르는 입술을 짧게 축였다.
“혹시”
칼은 브루스가 그의 지구가 아닌 곳에서도 위화감 없이 머물렀으면 했고, 스스로가 ‘외계인’이라는 생각을 상시 달고 살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가 외롭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칼은 제가 오래 지내왔던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내려왔고 로이스와 다이애나의 도움을 받아 아이가 보다 이 세상에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다만 어째서 해가 바뀌면 바뀔수록 자신이 이렇게 겁쟁이가 될 만큼 행복해진 건지... 칼은 브루스에게 받은 것들이 불현듯 벅차서 가슴에 큰 숨을 들이며 천천히 말을 고르며 물었다.
“이곳에 온 걸 후회하니?”
“아니.”
브루스의 답은 칼이 불안할 틈도 없이 빨랐다.
“난 칼이 좋아.”
입을 한일자로 다문 칼은 이제는 자신과 키가 거의 같은 아이의 몸을 끌어안았다. 브루스의 손이 토닥토닥 칼의 등을 언제나처럼 두드려주었다. 무서워도, 정말 모든 게 괜찮았다.
어둠 속에서 브루스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지금 머물고 있는 행성에서 브루스가 원하는 시간대를 비워두기 위해 스몰빌로 돌아오기 바로 직전까지도 브루스는 제출해야하는 보고서들로 정신이 없었다. 탐사든 연구든 거의 세상 모든 일의 마지막은 종이업무라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브루스는 저를 끌어안은 자세로 누워있는 칼을 보았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그가 안경을 쓴 채 누워있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어떤 위장이라기보다 그의 일부가 되어버린 물체였다. 조금... 살이 빠졌나? 브루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태양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그의 몸 역시도 스러질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괜히 광대가 도드라져 보이는 그의 뺨이 마음에 밟혔다. 몸을 뒤척이지 않고 브루스는 한참 칼을 보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그러고 보니 몇 시지? 브루스는 지금 시간이 궁금해져서 협탁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그때 불현듯 브루스를 끌어안던 칼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새벽 12시 16분이란다.”
“오.”
여전히 편리하네. 작게 키득키득 웃은 브루스가 말했다.
“생일 축하해, 칼.”
“네 생일은 두 번이나 있었는데 오지 않더니.”
한적한 풀길을 걸으며 칼이 툴툴거렸다. 흠. 칼이 둘둘 둘러준 옷가지 속에 파묻혀 심드렁하게 브루스가 흘려보내듯 대꾸했다. 피곤했던 데다 몸에 딱 달라붙는 유니폼을 착용하고 일을 했던 탓에, 탄소 배열을 조금만 신경 썼어도 충분히 보다 나은 착용감이었을 테지만 브루스는 그와 관련된 비용 문제를 감안하고 속으로 헐뜯는 정도로 끝낼 만큼은 너그러웠다, 집에 돌아오고 난방을 돌린 브루스는 옷을 벗어던지고 씻은 뒤 바로 잠이 들었다. 그 바람에 알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브루스의 몸에서 칼은 어둠속에서도 옆구리나 등에 남은 상처들을 발견했다. 탐사지에 있던 생물체나 또는 그에 거주하는 주민들과의 마찰로 생긴 흔적들이었다. 과거 원더우먼의 아래서 한창 넘어지고 구르며 체술을 배우기 시작하던 시절 처음 난 상처로 칼이 자신의 스승과 어떤 실랑이를 벌였는지 아는 브루스는 그저 혀를 찼다.
“4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이잖아.”
“나는 네 생일에 아무 것도 못했는데.”
“내 생일 때는 나도 아무것도 안했어.”
물론 탐사대에서 대원들을 관리하는 바바라로부터 브루스의 생일을 전해들은 리처드가 미국 시간으로 생일이 된 것을 알고 그 밤에 과자나 음료를 바리바리 들고 와서 소란을 부리려하긴 했지만 바로 문 앞에서 거절하고 돌려보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다음날 아침 리처드가 의기소침해있는 탓에 바바라까지 해서 나란히 셋이 카페테리아에 앉아 손바닥만 한 초코케이크를 공략해야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디저트의 목적은 삐진 리처드를 달래기 위함이지 순수하게 브루스의 생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역시 거짓말은 아니다.
“1년 쯤 되면 올 줄 알고 기다렸더니. 내 생일이 조금만 더 흔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카-알.”
브루스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칼의 앞에 섰다. 이럴 때 보면 칼은 정말 아이 같다. 브루스는 최대한 칼이 마음에 들어 할 법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 안 반가워?”
고개를 갸웃하고 묻는 브루스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던 칼이 겨우야 제 손을 뻗어 브루스의 손을 잡았다. 보통 때보다도 센 악력이었지만 브루스는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같이 산책을 하다가 두 사람은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비교적 큰 규모로 지어진 창고의 안쪽에는 오래전 칼이 타고 다니던 우주선이 태연하게 주차되어있다. 칼이 우주선의 문을 열고 브루스는 거의 12년 만에 우주선에 들어왔다. 여전히 상아빛에 깔끔한 실내였다. 모니터 앞에 있는 책상을 제외하면은. 이것저것 키들을 작동시키면서 화면을 띠우는 칼을 보던 브루스는 그 위에 어질러진 종이들을 훑어보았다. 계산식으로 빼곡한 메모는 전부 칼의 손 글씨였다. 그리고 브루스는 수많은 기호와 숫자를 따라가다 그들이 만드는 의미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칼.”
“네 지구를 찾고 있었지.”
브루스는 모니터에 떠오른 궤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확장계수가 달라져서... 아직 완벽한 건 아니란다. 내가 여길 떠날 때는 이 지구에 유도포털을 심어놔서 바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네 지구는 직접 새로 찾아내야 해. 한 며칠, 몇 달... 어쩌면 일 년 정도는 직접 항해하면서 조정해야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거야.”
칼이 머쓱하게 제 뒷목을 긁었다. 브루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하고 제 손에 든 공식들과 화면만 자꾸 보았다.
“브루스. 난 내가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감추고 살지만 널 돕지 않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란다. 네게 필요한 일이라면 난 할 거야.”
브루스는 이 지구로 온 후로도 이따금씩 꾸준하게 악몽을 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꿈은 단순히 과거의 상흔만이 아닌 미래에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까지 잇닿아있었다. “나도 결국 토마스의 동생이니까.” 조금 피곤한 얼굴로 악몽에서 깬 브루스가 말했었다. 브루스는 항상 무언가를 대비하듯 칼에게 과학을 배웠고, 다이애나로부터 무술을 배웠으며, 로이스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깨쳐갔다. 칼은 브루스가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할 만큼 행복했으면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그리고 칼은 브루스의 미래를 재단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브루스를 제 욕심 안에 가두는 꼴이 될 테니까. 브루스는 칼이 자신을 이 지구로 데려온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칼이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거라면, 칼은 모든 불안과 욕심을 뒤로하고 브루스가 바라는 것을 이뤄줘야 했다.
“칼은 바보야.”
한참 모니터만 바라보던 브루스가 칼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브루스의 얼굴은 옛날에 봤던 표정처럼 복잡했다. 기쁜 것도 같고, 혼란스러운 것도 같고, 심지어 울 것도 같은 표정이었다. 칼은 긴장했다. 결코 브루스에게 자신이 그를 내치려는 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브루스가 먼저 칼의 품에 안겼다. 칼과 몸집이 비슷해진 후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만 브루스는 칼이 제가 그의 품에 들어가 있으면 안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생일날에 선물을 주면 어떡해.”
몸을 물린 브루스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한 가지 줄곧 마음에 걸렸던 사실이 있다. 어느 방화범에 대해 들먹였던 토마스는 분명 칼이 다른 차원에서 온, 확률상의 도플갱어와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을 거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이 지구에서 브루스는 모든 확률의 시작, 원시지구에 대한 이론을 알게 되었다. 이 넓은 우주 어딘가에 있을 모체의 우주, 0과 1이 시작되는 지점에 대한 가설이었다. 브루스는 탐사 중 만난 그린랜턴에게서 들었던 소문 하나를 떠올리며 칼에게 조금 후에 있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포털이 일그러지려 할 때 쯤 브루스는 다시 탐사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브루스가 요리를 해주겠다는 말을 꺼내서 거의 5년 만에 칼을 긴장시키기도 하고, 탐사를 다니면서 있었던 일이나(“정부쪽 생각은 식민지나 뭐 그런 식으로인 것 같지만 지성체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건 언젠가는 큰 비용이 돌아와. 칼한테 진작 배웠을 텐데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 투덜거리는 브루스에게 칼은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아니면 그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며(“하도 성가시게 굴어서 주먹으로 미간을 날렸어.” “...그린랜턴의 미간을?” “미간을.” 브루스가 결연히 답했다. 칼은 다이애나가 생각이 나 어째서인지 불안해졌다.) 있다 보니 벌써 24시간이 다 돼가는 모양이었다. 포털 앞에 서있던 브루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6개월만 있으면 되네.”
“그래.”
칼은 돌아온 브루스가 곧 다시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을 짐작하면서도 부러 모르는 척 밝게 답했다.
“갈게.”
짧게 인사한 브루스가 포털을 향해 걸어갔다. 거의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버티고 있었는지 포털은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그때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참, 칼도 떠날 준비해둬.”
“음?”
고개만 조금 돌린 채 칼을 바라보는 브루스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하늘을 담은 눈이 예쁘게 휘어있었다.
“나중에 칼이 날 병에 가두지 않으려면 내가 칼을 챙겨야 하잖아. 요 1년 6개월도 조금 걱정됐거든. 실종신고가 뜨면 안 되니까 돌아가지만 그래도 다시 이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하던 브루스가 거의 포털이 사라질 때쯤에, “아, 그리고 말이야.”하고 운을 떼며 아주 작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보고 싶었어.”
그리고 포털의 연결이 끊어졌다. 온기와 함께 침묵 속에 남은 칼이 멀거니 눈만 깜빡였다. 이쯤이면 거의 통보 아닌가. 따뜻하게 웃는 얼굴로 말한다고 강제가 권유가 되는 건 아닐 텐데. 역시 브루스는 제멋대로다. 칼은 없는 마음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꼭 그만큼 구원받는다. 칼이 숨을 쉬듯 웃었다.
+2
브루스는 도서관 열람실 내에 볕이 포근한 자리에 앉아 펜대를 돌리고 있었다. 교양교과 시간에 과제로 받은 ‘레드선 시대가 가능했던 이유’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 중이던 브루스는 한참 도서관의 책상마다 자료 검색을 위해 비치된 컴퓨터의 터치스크린을 훑다가 내리 쬔 햇빛 속에서 떠다니는 먼지들을 하나하나 펜 끝으로 건들었다.
주제 자체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레드선 시대, 여기 지구가 소련을 주축으로 체제를 편성했을 적의 이야기는 크게든 작게든 브루스를 싱숭생숭하게 했다. 그건 브루스가 이 먼 역사의 유물이자 상흔과 같은 인물로 인해 어린 시절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그에게 브루스가 꽤나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거진 8년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 그런 마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도 그랬고, 그가 현재 브루스의 동거인이기 때문에도 그랬다. 칼은... ‘적당히’를 잘 모르는 것 같단 말이야. 톡톡 건들던 빛 먼지 하나를 저 멀리로 튕겨내며 브루스는 눈앞에 펼쳐진 어느 역사가의 기록을 보았다. 사실 칼이 가지고 있는 ‘적당히’라는 기준은 이 지구의 일반사람들이 가진 그것과 같아지기에 조정 범위가 너무나도 넓어서 그가 인류와 발을 맞추어 가기란, 특히 슈퍼맨이라는 이름 위에 거의 신격화 되다시피 하던 세상에서는 더더욱, 많은 노력을 요하는 것이었지만 여하튼 로마에 온 이상 존재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하는 법이기에 이나저나 칼이 지독하게 제멋대로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뒷감당을 어쩌려고 슈퍼맨을 단순한 자원봉사자가 아닌 체제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서 추앙할 수 있던 거지? 완전무결한 초인의 통치란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도 가능할 리가 없었고 계급이 발생한 이래 인류는 줄곧 그와 관한 문제로 싸워왔을 텐데도 말이다. 소련에서 슈퍼맨을 그의 태생이 부여한 의미 이상의 존재로서 치켜세운 것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평생의 권력을 거머쥐고 싶었던 수뇌부에서 제 편이 가진 절대적인 힘에 안도하고 숭배마저 하던 보통의 사람들 전부. 그들의 소박한 바람에서부터 진득한 욕망까지 온갖 것들이 뭉쳐 붉은 태양은 떠올랐고 자신의 욕심과 더불어 끝 모르고 부풀다가 스스로 구르고 굴러서 산산이 산화하며 저물었다. 역사의 흥망성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시나리오였다.
세계는 각종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허기짐으로 허덕이는 중 스탈린은 한 나라를 자신의 기념비로 삼고 싶어 했고 가뜩이나 두 축으로 나뉜 세상에서 그가 절대적인 힘을 원하는 건 자명했다.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과학을 연구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언론을 통해 그것을 연일 설파했다. 그러는 중 소련에서 이 지상에는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슈퍼맨이 태양처럼 떠오른 것은 거의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힘에 목을 매는 세계는 지극히 근시안적이었고 자신이 성배를 들었는지, 독배를 들었는지 분간할 재간이 없었다. 아님 어찌되어도 상관이 없었거나. 기껏 과거에 황제를 없앴던 국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에 이어 슈퍼맨을 기쁘게 자신들의 지도자로서 맞이했다. 브루스는 이 점이 이해가 되는 한편 이해할 수 없었다. 레드선이 떠오르기보다 전, 슈퍼맨이 지도자 이상의 독재자로서 자리할 수 있기 전에 닦였던 배경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것도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어떤 계급보다도 극명한 우상이 탄생한다는 건 도통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제 아무리 윤리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정의를 가치로 내세우던 사람도 거대한 힘을 쥐고 주변의 잡음이 멎으면 그는 엇나갈 가능성으로 무궁무진해진다. 스스로가 필요하다면 가족이라 이름붙인 사람에게도 총부리를 겨누고 위에 폭탄 쯤 아무렇지 않게 심을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존재인데 그 본성을 알면서도 단 하나의 지도자를 내세우는 순진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사의 고뇌를 알기보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 교육을 받고 국가에 한 몫을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며 자신의 행동에 강한 자신감을 가진 슈퍼맨이 우두머리가 되고 끝내 독주를 벌였던 것이 특별하게 이 지구의 계를 벗어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지닌 힘은 그냥 둬도 오만으로 이어지기 쉬웠고 브루스는 그런 점에서 슈퍼맨은 외계의 초인이기보다 오히려 평범한 이 지구의 사람에 지극히도 가깝다고 평가했다. 비록 그의 힘과 인류의 것과는 달라 보이는 파란 눈동자에 덜컥 믿음을 주기 쉽더라도 말이다. 사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눈앞 외계의 존재에게 슈퍼맨이라는 명함을 안기고 안주해서 믿어버리면 그만큼 쉽고 속편한 일도 없을 테다. 만약의 경우에는 외계의 존재는 역시 외계의 것이었다고 개탄하면 그만이니까. 브루스는 솔직히 자신이 칼과 같은 지구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완전 별개의 차원의 존재로서 만난 것이 여러 가지의 의미에서 다행스러웠다. 슈퍼맨은 생각 외로 흔한 인간상이었고 세계는 그저 흐름 속에서 자신의 도구를 발굴해냈을 뿐이었다. 어쩌면 레드선 시대가 가능했고 동시에 실패한 이유는 꼭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모니터에 손을 뻗어 화면을 다음 페이지, 또 다음 페이지로 넘긴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칼에게 묻는 것만큼 생생한 것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관점에 있어서는 객관성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칼의 목소리로 치환되어 듣는 역사는 거기에 브루스의 감정이 곧잘 뒤섞여 지독히 낭만적인 서사가 되어버린다. 브루스가 굳이 역사 수업을 챙겨듣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칼을 좋아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였다. 혹시 만약의 일이 생겨서 지금에라도 칼이 과거의 일로 인해 법정에 서게 되고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면 생활환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이 지구에서 브루스는 칼을 반드시 빼돌릴 테지만 감옥에 가게 되는 정도라면 옥바라지쯤은 할 수도 있겠지 싶었다. 이쯤의 선을 브루스는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반은 과거 남자의 첫 목소리를 기어코 기억해버리는 브루스의 본성 때문이었고, 반은 칼 자신에게 치명적인 초록빛 광석이 박힌 반지를 굳이 브루스에게 선물하는 칼의 태도 때문이었다. 만약 칼이 자신에 대한 판단을 브루스에게 일정부분 맡겨두었다면 브루스는 그만큼 그에 대해 알아야했다.
한참 무심하게 화면을 넘기던 브루스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브루스는 눈을 깜빡이며 자기 앞에 떠오른 한 신문 자료를 멀뚱히 바라본다. 브루스는 검지와 엄지로 신문기사 이미지를 확대시켰다. 러시아어로 된 아주, 아주 오래된 흑백신문이었다.
“우와...”
저도 모르게 브루스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순간 귀에 들린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목을 움츠린 브루스는 좌우를 급히 살핀 뒤 입을 꼭 다물었다.
‘은둔의 테미스키라, 소비에트의 오른편에 서는가’라는 제목을 확인한 브루스는 그 아래 커다랗게 실린 춤을 추는 중인 남녀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았다. 서로를 마주한 채 은은하게 웃고 있는 두 초인은 주변의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홀연히 당당해보였다. 여신과 구원자라 불리는 외계의 남자. 기사 자체를 뜯어 읽어보면 슈퍼맨의 날을 기념하는 파티에 참석한 테미스키라는 결국 중립국임을 밝히는 입장이었지만 이 기사를 접한 이라면 누구라도 둘의 사진을 본 순간 그런 그들의 입장은 지극히 외교적인 화술에 불과하다고 으레 짐작할 것이 뻔했다. 브루스가 눈으로 보는 사진은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기술적으로도 요즘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조잡해서 화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있는 두 사람이 브루스가 알고 있는 지금의 그들보다도 훨씬 젊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단지 얼굴과 그들이 두르는 아우라 만으로도 브루스는 이들이 당시의 세계의 주역이었음을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고작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실제 이들을 눈앞에 뒀던 이들은 어땠을까. 이쯤이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숭배의 문제였겠는걸. 브루스는 내심 감탄하면서 리포트 작성에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신문 자료를 자신의 태블릿에 다운로드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은 이 시대 얘기는 정말 싫어하시던데... 칼도 숨기려 드는 건 아니지만 크게 달가워하지는 않았다.(정확히는 못 견디도록 부끄러워한다는 게 더 맞는 것 같지만) 뭐, 후에 칼을 약 올릴 때라도 쓰면 될 소재니까. 브루스는 괜히 자기 혼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리포트를 도서관에서 다 끝내는 편이 좋았을까. 저녁을 칼 혼자 먹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참고문헌들을 정리해서 집으로 돌아온 브루스는 도통 끝나지 않는 과제에 혀를 차며 다시 다음 자료를 뒤적였다.
레드선 시대가 가능했던 이유, 라고 하면 마치 그 시대가 특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브루스는 그게 썩 와 닿지 않았다. 레드선 이후 렉스 루터는 예술가, 작가, 철학자, 과학자들의 정부를 만들었다. 슈퍼맨을 무너뜨리고 외계의 침공을 막아낸 세계다운 파격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는 신정부였다. 지구 외의 것까지 폭넓게 받아들인 기술과 더불어 인류의 지성들로 축조한 세계는 그야말로 형형색색 눈이 부셨고 이 호황은 저물 줄 모르는 것 같다. 이 세계는 한껏 종족적 우월감에 도취 되어있고 ‘틀린다’는 말을 모른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끝이 있을까? 타자를 누르던 손가락을 멈춘 브루스는 잠시 자신이 쓴 활자를 몇 번이고 되짚으며 멍하니 생각한다. 후우, 후우.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작게 물어뜯던 브루스는 문득 머릿속에 새소리를 듣고 빠르게 자신이 속한 현실로 돌아온다. 등에 소름이 돋은 브루스는 의식의 흐름에 맞추어 이어지던 문장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과제의 주제에서 엇나간 부분은 제거하고 문단을 한두 마디의 문장으로 압축했다.
그나저나 분량도 분량이지만... 하기 싫어, 과제. 으으, 한참 타자를 치던 브루스가 어깨를 축 늘이며 고개를 책상 위에 묻었다. 옆에 둔 태블릿에 다운 받아둔 자료들을 의미 없이 시큰둥한 눈길로 훑어보다 브루스가 신문의 캡처 화면, 왈츠를 추는 칼과 스승의 모습이 실린 기사에서 손을 멈춘다. 브루스는 한동안 그것을 보다 “흠...”하고 엎드린 채로 조금 웃으면서 다시 감탄한다. 뭔가 믿어지지 않는 기분이다. 사진 속 말끔한 소련의 제복을 입고 있는 칼은 지금은 스몰빌의 정비소에서 헐렁한 체크무늬 셔츠차림에 기름 때 묻은 목장갑을 끼고 농기구의 기능을 지나치게 보강하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기술과 최대한의 정성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다이애나는 브루스의 몇 번의 부탁으로 인해 결국 한정된 장소에서나마 정말 전사로서 싸우는 법을 그에게 가르쳐주고 있으며(처음 다이애나에게 부탁하러 갔을 때는 브루스의 존재가 파라다이스 섬에 닿은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기 때문에 브루스는 거의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명예교수로서 대학교 내의 학생들의 멘토가 되어주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며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두르고 자신들만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커다란 세상 속에 녹아들듯 속해있는 그들에 대해 브루스는 생각해보았다. 그러다보니 레드선 시대에 보이는 그들의 반응도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어서 브루스는 다시 조금 웃는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스승님도 칼도 좀 더 서로 달가워해도 괜찮을 텐데. 브루스는 얼마 전 칼이 스승과 불같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이유는 다이애나가 브루스와 겨루게 한 전사가 검을 놓치고 쓰러진 브루스에게 그대로 칼을 겨누고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막 브루스를 마중하기 위해 도착했던 칼은 그 장면을 보고(그날은 노동절로 정비소가 쉬는 날이라 칼의 마중이 평소보다 훨씬 빨랐다.) 주저 없이 대련을 막아섰다. 미리 준비해두고 있던 쇠줄로 제 목으로 달려드는 칼날을 막아낼 태세를 취하고 있던 브루스조차도 칼의 등장에는 아연하고 말았다. 그리고... 낮게 목소리를 깔기 시작한 칼도 칼이었지만 스승님이 정말 무서웠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좀 스승님을 믿어도 좋을 텐데. 브루스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 눈을 뜨니 다시 태블릿 화면 가득 떠오른 둘의 모습이 보였다. 믿어도― 칼의 어깨에 다정하게 얹어진 다이애나의 손이나, 스승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에스코트하는 칼의 팔이. ―좋을 텐데, 아마도.
브루스가 답싹 상체를 일으켰다. 뭐지, 과제 때문인가? 갑자기 가슴에 무언가가 뭉친 듯 답답해진 브루스는 자기 눈앞 컴퓨터 화면에서 벌써 15페이지에 달하고 있는 리포트를 쏘아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드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사고가 지나치게 뻗어간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춤... 춤 때문일지도. 브루스가 팔을 쭉 뻗어 길게 기지개를 켠 뒤 가볍게 손목을 털며 목을 스트레칭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한참 전이 되어버린 옛날. 브루스가 자신의 지구에서 웨인저택의 막내아들로서 지냈던 적에 브루스도 사교댄스를 배운 적이 있었다. 웨인으로서의 허영심만큼은 충만하던 부모님은 토마스와 브루스에게 상류사회 예절에 필요한 덕목이라면 빠삭하게 익히도록 교육시켰었고 토마스 역시도 그런 격식에서 뒤떨어지는 것을 결벽증적으로 싫어해서 브루스도 설게나마 익혔던 것이었다. 엄청나게 지루하고,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인데다 이런 게 뭐가 재밌다고 배우는지 브루스는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저절로 무성의하게 박자를 밟았고 그 때문에 레슨 때마다 깐깐한 교사에게 가느다란 회초리로 손등을 맞곤 했다.
브루스는 한참 이어폰을 통해 듣고 있던 음악을 클래식으로 바꾸고 먼 기억을 더듬어 자세를 잡아보았다. 분명 팔은 이쯤에 두고, 시선은 바르게, 발사이의 간격은 어깨너비를 넘지 않게. 이렇게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희미한 기억을 토대로 스텝을 밟으면서 브루스는 허공에 있는 가상의 인물과 왈츠를 밟았다. 그 정도로 설게 배우고 이만큼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매를 맞을 필요는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그러다 한 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돌린 순간.
“뭐, 뭐야?!”
브루스가 깜짝 놀라 얼른 귀에 꼽은 이어폰을 빼며 새된 소리로 자신의 방에 들어온 칼에게 외쳤다. 다 마른 빨래를 잘 개어서 가지고 온 칼도 놀랐는지 두세 번 눈을 깜빡이다 곧 빙긋 웃었다. 브루스의 얼굴로 홧홧한 열기가 올랐다.
“노크했는데... 듣지 못했구나?”
음악 너무 크게 들으면 귀 상한다. 다정하게 충고하면서 칼은 브루스의 옷장에 가지고온 옷들을 넣었다. 정말로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의 브루스는 자신의 방문을 잠그거나 아주 집을 나가곤 했으므로 칼이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게 불쾌한 건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민망했다.
“갑자기 춤?”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묻자 브루스는 도저히 지금의 대화 주제를 견딜 수가 없어서 벌써 써먹기는 아깝지만 급한 대로 불쑥 책상 위에 두었던 태블릿을 잡고 칼의 코앞에 기계의 화면을 들이밀었다. 브루스가 혈색이 붉게 도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키며 뜬금없이 물었다.
“칼. 이 제복 아직 가지고 있어?”
브루스의 손끝에 걸린 흑백사진 속의 낡은 인물을 둥근 안경 너머로 한참 살펴보던 칼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없지. 내가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 없잖니.”
저런 오래되고 낡아빠진... 칼은 뒤에 따라붙는 자신의 감상을 입속으로 삭이며 브루스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조심히 받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브루스에 의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사진 속의 인물이 자기 자신이었는지조차도 신경에 두지 않고 넘길 참이었다.
칼의 행동을 지켜보던 브루스는 속으로 한숨을 쉰다. 일단 대화 주제를 돌린 건 좋은데... 브루스는 그러고 보면 칼의 과거에 대해서 그의 입을 빌린 언어의 단편이나 역사서에 쓰인 몇몇 평론가적인 문장과 그와 더불어 실린 사료로 밖에는 파악하지 못했다. 브루스에게 있어 유의미한 과거는 그 시작부터 칼이 연관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도. 물론 칼이 그 자신의 옛 행적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나 감추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처럼 솔직하면서도 베일에 싸여있을 수 있다는 건 어떤 조화일까 싶었다. 브루스는 이래저래 칼은 모순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춤이라...”
“응?”
한참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브루스가 칼의 낮은 목소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칼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브루스에게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브루스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자 칼이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고 브루스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얼결에 브루스의 팔도 그와 같은 자세를 잡았다. 자연스레 둘은 서로를 마주한 채로 춤을 출 자세가 되었다. 브루스가 당황해서 말했다.
“나 대충 배워서 잘 기억 안 나.”
칼은 눈에 잡힌 주름을 좀 더 깊이 하면서 조용히 발을 움직인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칼이 경쾌한 스타카토처럼 숫자를 읊었고 그 박자에 맞춰 두 사람의 발이 잘 닦인 나무 바닥 위를 움직이며 타박타박 고즈넉한 소음을 만든다. 시선을 바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브루스는 칼의 발을 살피느라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렇게 한참 칼과 자신이 만드는 모양새를 살펴보다가 브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면 서로의 눈에 바로 시선이 마주 닿을까 궁금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정도 가까워져있다.
“뭐야, 이거 순 엉터리...”
브루스가 자신의 어렴풋한 기억 속 동작과는 전혀 맞지 않은 그저 박자만 정확할 뿐인 춤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야유했다. 자기 좋을 대로 동작을 지어내던 칼은 브루스가 콕 집어 말하자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사실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한단다.”
너무 오래됐거든. 칼이 속삭이듯 말을 이으면 흥하고 콧방귀 친 브루스가 이번에는 스스로 다음 동작을 이끌었다. 칼이 조용히 웃으며 그에 따라 준 다음 브루스가 웃는 얼굴이 되었을 때쯤에 조심히 거리를 벌리며 떨어졌다. 브루스도 그것을 신호로 춤을 멈추었다. 그리고 둘의 손끝만이 이어져 있을 때 칼이 허리를 숙이며 다정히 잡고 있던 브루스의 손을 살짝 들어 그의 손끝에 닿을 동 말 동한 거리에서 쪽 하고 입맞춤을 남긴 다음 그를 놓아주었다. 그 손을 자신에게 되돌린 뒤 잠깐 살펴본 브루스가 뚱하게 말했다.
“칼. 가끔 되게 썰렁한 거 알아?”
제 귀가 온통 발갛게 된 것도 모르고 힐난하는 아이를 보며 칼이 장난기 서린 눈웃음으로 마주해주었다. 안경알 너머에 있는 바다가 경쾌하게 반짝였다. 못 말려, 정말... 브루스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우선 이 이야기가 유료발행이었을 적에 구매해주셨던 분들께 다시 인사올립니다. 제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했어야 했는데 번복하여 그로인해 구매해주신 분들께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 글을 구매해주셨던 것에 대해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 환불을 받으시지 못한 포스타입 닉네임 ㅇㄹㅇ님께서는 번거로우시겠지만 공지(http://znfnxh2.postype.com/post/448824/)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환불의 문은 제가 확인이 가능한한 언제나 열려있으니 주저 마시고 콕콕 찔러주세요.
날조와 짧은 지식으로 가득했던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기(http://sowhat42.tistory.com/28)에서부터 생각하게된 글이 어떻게 이렇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위의 글이 시작이기는 하지만 저 때와 떠돌이 별은 설정이 조금 달라요. 별로 티는 안나지만 특히 브루스의 성격이 저 때보다 이 글에서 좀더 깨발랄(...)합니다. 전에는 미지의 무언가를 살려서 칼이 다친 브루스를 데리고 기본지구의 숲뱃을 찾아가는 것도 생각했었지만 파기되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처음 글은 없던 일이 되었어요.
또 여담을 붙이자면, 요리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어느 날 브루스가 자신이 집안일 중에서 요리만은 해보지 않은 게 문득 생각이나 부엌에 들어가게 된다는 그런게 있습니다. 무언가를 팬 안에서 조리하는 중, 그러고 보니 비린내/잡내를 잡기 위해 화이트와인(전에 칼이 동네사람에게 받은 것)으로 어쩌고 하는 게 생각이 난 브루스는 와인의 4분의 1 정도를 팬 안에 붓게 됩니다. 와인과 함께 보글보글 재료는 익어가고... 브루스는 이거 알코올이 빠르게 날라가면서 냄새도 잡는 거 아닌가, 뭔가 팬 안에서 갑자기 불이 나고 그랬던 거 같은 데 그게 맛의 비결 같은 건가 하는 심정으로 알코올과 재료가 끓는 팬 안에 불을 지릅니다.(...) 바로 그 때 텃밭에서 샐러드용 방울토마토를 따온 칼이 그 장면을 정면으로 목격하게 되고 너무 놀란 나머지 "브-"하고 말을 삼키며 굳어버립니다. 아연실색한 칼에게 불기둥이 치솟은 팬을 앞에 두고 브루스가 "아, 조금 있으면 다 돼."하고 세상 평화로운 얼굴로 방긋 웃어줍니다. 그리고 그날 칼은 브루스에게 평생 요리는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진지하게 프러포즈 한다는 훈훈한 일화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그럼 커피 정도는..."하고 마음 쓰는 브루스 덕에 칼은 최대한 손이 덜 가는 커피를 집에 들이게 된다던가 말이죠.) 글로 쓰려니 진이 빠져서 그냥 이렇게 남겨두는 걸로 자기만족할게요☆
떠돌이 별은 '이거 참 아웃인데'라는 생각이 많이 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아웃이란 생각이 들면 들수록 청개구리 심보인지 자기혼자 우다다 신나서 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글을 이든저든 마무리를 지을 수 있어서 허전가뿐하고 기쁩니다. 다시 한 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언제나 좋은 일, 행복한 일들이 곁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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