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선 이후의 숲과 크라임신디케이트가 있는 지구의 어린 브루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만난다면의 이야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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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아이는 위로 치솟다 다시 땅을 향해 떨어지는 공의 움직임을 고개로 따랐다. 통, 통, 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빨간 공이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는 저택 안에서 혼자 선명하다. 브루스는 힐끔 제 옆에 있는 커다란 문을 보았다. 서재로 통하는 문이었다. 원래는 엄마와 아빠 두 사람 모두가 이용하는 공간이지만 엄마는 활동적인 사람이어서 집안에 있기보다 바깥을 나가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서재는 거의 아빠의 차지였다. 마른 체구의 아빠가 이 커다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설 때면 브루스는 아빠가 스스로 들어간다기보다 억지로 떠밀리는 것 같아서 웃기다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빠는 늘 무언가가 자신의 신경줄을 잡아채는 듯 찡그린 표정으로 부루퉁해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브루스는 저에게 돌아오는 공을 잡아 옆구리에 꼈다. 시큰둥한 얼굴로 문을 지켜보던 아이는 거리낌 없이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열린 문 사이로 착 가라앉은 서재가 드러나자 브루스는 휙 하니 그 안으로 제가 잡고 있던 공을 던졌다. 통, 통, 통통. 빨간 공이 데구루루 굴러서 방안을 활보한다. 브루스는 공을 좇아 방안으로 발을 들여 넣었다. 제 자신을 위해 준비된 놀이터로 들어서듯 브루스의 행동은 별스럽지 않았다.
눈을 뜨면 잠이 금방 들었던 것치고는 머리가 무거웠다. 브루스는 꾹 달라붙어서 쉬이 떨어질 생각을 않는 눈꺼풀을 손등으로 비비며 끙끙거렸다. 몇 번 이불 속에서 몸을 뒤치락댄 후에야 브루스의 시야가 흐리게 밝아온다. 부옇게 지나치게 높은 천장이 보였다. 집, 집이구나, 집이지... 브루스는 몸질을 멈추고 멀거니 떠있는 천장을 눈으로 더듬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충분히 지금 상황을 되새긴 다음 대강의 시간을 확인하려고 브루스가 몸을 옆으로 돌리자 눈을 감고 있는 칼이 그 자리에 있었다. 칼에 비해 한참은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있는데도 칼은 불편하지도 않은지 한 팔로 브루스의 베갯맡을 감싸고 고개는 거의 수그리지 않은 자세로 잘도 잠을 자고 있다. 브루스가 베개 위에서 고개를 젖혀 칼의 손이 제 머리 위에 있는 걸 알고 제 손을 들어 확인하며 뒹굴 몸을 뒤집었다. 칼의 손목에는 시계가 있었다. 칼이 가진 물건이 보통 그렇듯 시계도 역시 새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시계판은 거의 브루스의 손바닥만 했다. 그래도 워낙 칼은 다부져서 그게 과해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목시계에는 시간만이 아니라 달력까지 표시되었지만 그들이 표시하는 것들 중 무엇하나도 이곳과 맞는 것은 없었다.
브루스는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바동바동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브루스가 둥그런 안경 안쪽으로 손을 뻗어 꾹 감긴 칼의 눈매를 잡았다. 아이는 별안간 그의 눈꼬리를 잡고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렸다, 혹은 짝짝이로 만들었다하며 저 혼자 장난을 걸었다. 그 움직임에 뿔테안경이 달싹였다. 아, 아까 되게 웃겼어! 브루스가 입안에 꾹 웃음을 담고 제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그러다 칼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쿡쿡, 목 안으로 삼키는 진동이 손끝에 닿아오자 브루스를 얼른 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동시에 칼이 눈을 떴다.
“잘 잤니?”
“졸려.”
웃음기 서린 물음에 브루스는 시치미를 떼듯 불퉁하게 답했다. 안경알 너머에서 둥근 호선을 그리는 칼의 눈매가 조용히 브루스를 살펴보았다. 브루스가 다시 칼에게 팔을 뻗어 그의 안경알 위에 손으로 돔을 만들어 까맣게 덮어버렸다.
“열 안나. 나 괜찮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결국 칼은 하하하고 소리 내서 웃는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칼은 조심히 브루스의 손을 떼어냈다. 지금 이렇게 아침부터 저에게 장난을 치는 브루스를 보니 한시름을 덜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브루스의 열이 내린 것은 벌써 아이가 깨어나기 30분 전에도 진작 재차 확인을 마친 참이었다. 집사의 입에서 나온 불온한 단어도 있고 해서 칼은 밤 내내 브루스의 바이탈사인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이라도 브루스가 괴로운 기색이 보이면 칼은 바로 아이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브루스는 밤 동안 정말 평온하게 잠을 잤다. 예전에는 제 시선 때문에도 잠에서 일어나던 브루스였기 때문에 칼은 예민한 아이가 혹시나 간만에 찾아온 단잠을 깰까봐 최대한 제 기척을 죽였다.
“왜 그렇게 불편하게 자? 그 방 혼자 있기 무섭지?”
브루스는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어투로 칼에게 물었다. ‘무섭다’는 말이 아주 엇나간 것은 아니어서 칼은 어깨를 작게 으쓱해보였다. 브루스는 아까의 잠기색은 떨쳐낸 듯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칼 울보인거 아니까 여기 같이 있고 싶으면 그래도 되는데... 이거 봐, 넓잖아!”
브루스가 제가 앉은 침대 위를 두 손으로 팡팡 두드리며 종알댔다. 아이는 부산스럽게 제 침대의 폭신한 정도나 방에서 볼 수 있는 전망(“칼 우주선은 어떻게 된 게 창문하나 없잖아. 그렇게 답답한데 있다간 우울증에 걸릴 거야.” 브루스가 제법 걱정스럽게 덧붙였다.)이나 또 자신이 퍽 얌전한 성질이라는 점 등을 들었다. 꽤나 장황하게 제 방에 칼이 같이 있어도 되는 이유들을 늘어놓는 브루스의 말을 음악처럼 들으며 칼은 편안한 마음으로 웃었다.
“글쎄... 언제까지 네가 그 말을 해줄지 모르겠구나.”
“나 내가 한 말은 잘 지킨다고!”
한 번, 두 번 정도는 어겼지만... 작게 웅얼웅얼 덧붙이며 브루스가 볼에 바람을 가득 집어넣었다. 자신의 제안에 칼이 의문을 표하는 게 퍽 섭섭했던지 아이는 매섭게 칼을 노려보며 칼의 손등을 자근자근 꼬집었다. 그 모양이 꼭 결과 다른 방향으로 쓰다듬어 잔뜩 성이 난 고양이 같았다. 칼이 브루스를 달래듯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몇 년 뒤면 넌 혼자 있고 싶다면서 날 쫓아내게 될 걸? 그게 5년일지, 3년일지... 1년일 수도 있겠군. 아이들은 빨리 자라니까.”
그러니 처음부터 내가 머물 곳이 따로 있는 편이 좋을 거 같단다. 칼이 차분하게 말을 하자 모가 나있던 브루스의 눈이 누그러진다. 그러다가 멍하니 깜빡인다. 파란 눈동자가 도르르 구르면서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반추한다. 내가 자라? 칼이 머물 곳? 브루스가 결국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뭐?”
“너는 금방 클 테니까 내 방이 필요하단다.”
칼은 또박또박 답해주었다. 하지만 브루스의 눈에서 껌뻑껌뻑 떨어져 나오는 물음표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러다 멈칫 브루스의 생각이 어딘가 즈음에 길을 멈추고 아이의 작은 방황이 끝났다. 브루스는 파드득 침대 위에서 벗어나며 의자에 앉아있는 칼을 잡아끌었다.
“브루스?”
“나, 나! 옷 갈아입을래!”
꽤 되는 거리를 영차영차 칼을 잡아당긴 아이는 칼의 등을 밀어 제 방에서 쫓아냈다. 칼은 눈을 둥글게 뜨며 제 등 뒤로 닫힌 아이의 방문을 바라보다 다시 어깨를 으쓱한 뒤 얌전히 그 문 앞에 섰다. 브루스가 귓가가 빨개질만한 얘기를 자신이 했던가? 칼은 조용히 자신이 한 말을 되돌아보았지만 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을 닫은 브루스의 눈은 다시 바쁘게 깜빡이기 시작한다. 외계인은 시간관념이 이상한 걸까? 칼이 차고 있는 시계는 시침, 분침, 초침, 년, 월, 일 모두가 전부 엉망이었다. 그런 엉망인 시계를 보고 사는 칼이니까 브루스가 안전하겠다는 확신이 생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브루스가 예상했던 것과는 한참 다른 단위를 가진 게 이상한 건 아닌 거 같았다. 아님 그보다 사용하는 말 자체가 어딘가 이상한 걸지도 몰라. 브루스는 칼이 자신에게 했던 말에서 ‘떠난다.’는 부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갑자기 왕왕 불어난 칼의 체재기간에 당혹하고 있었다. 그게 곤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아냐, 내일이라도 내가 다 자라고 안전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브루스가 엄하게 제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다 자신이 닫은 방문을 바라본다. 문에 짚은 아이의 손은 그에 비해 훨씬 작다.
“어... 지금 이거 포함이야?”
브루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서재 안은 항상 이상하게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 덕분에 인상 탓인지 자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못해 보이는 아빠도 일단 서재 안에 있는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꽤 그럴싸한 어른이 되었다. 그도 전화 몇 통이 걸려오고 나면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브루스는 예전 같았으면 단박에 혼이 날 것을 알면서도 아랑곳없이 서재 안에서 공놀이를 했다. 어차피 주인 없는 방이었고, 설령 주인이 새로 정해졌다면 제 또래 아이가 저를 혼낼 권한은 어디 있는가 싶었다. 통, 통 이곳저곳에서 공을 튕기며 브루스는 열없는 눈길로 서재 안을 죽 훑어보았다. 위로 치솟는 공은 당연하지만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브루스에게로 돌아온다. 아니, 정말 당연한가? 브루스는 잠시 땅 위로 몸을 띄우는 칼을 생각한다. 브루스의 손이 그때 각도를 틀어서 상하로 움직이던 공의 경로를 비틀었다. 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공은 마호가니로 된 번질번질한 책상을 때린다. 의도했던 것보다도 세게 두들겼는지 마치 목재를 부술 듯이 큰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어어...”
브루스는 짧게 어깨를 떨어뜨리며 매우 유감스럽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행동이 가구에 별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공을 계속 옆으로 밀어 가구에 맞혔다. 쾅! 쾅! 쾅! 큰 소리를 내며 공이 사정없이 책상을 때렸다. 아마도 서랍들이 있을 뒷부분이었다. 몇 번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저 혼자 공을 던지던 아이가 제게 돌아오는 공을 무시하고 조르르 책상 앞으로 간다. 공이 부딪혔던 충격으로 잘 닫혀 있던 서랍들 중 하나가 아주 조금 삐져나왔다. 생각처럼은 안 되는데. 브루스가 남몰래 칫 하고 혀를 찼다. 차라리 부술 걸 그랬나? 브루스가 잠깐 생각하지만 곧 천진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며 마치 새로운 놀잇감에 정신이 팔린 산만한 아이처럼 책상의 서랍들을 전부 바닥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스탠드며 전화기, 필기구들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보고 가세요, 사세요, 웨인 씨의 유류품이랍니다!”
아이는 마치 길거리 상인이라도 된 마냥 어지럽게 널린 물건들 사이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과장스럽게 외쳤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신중한 눈으로 바닥에 널린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한다.
“흠. 종이에, 종이에, 종이뿐이잖아요.”
브루스가 온갖 문서들을 뒤적이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까탈스러운 손님을 연기했다. 익살맞은 상인이 대꾸한다.
“아니요. 안경집, 명함집, 권총집. 많은 집들도 있지요.”
빈 권총집을 확인하며 브루스는 그 크기와 모양을 유심히 살폈다. 그날 밤 브루스는 알프레드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총을 쥐고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그럼 토마스가 가지고 있던 것은 이건가? 아직도 그 총을 가지고 있을까? 역시 처분했을까? 브루스가 제 기억을 바쁘게 헤집었다. 브루스는 다른 물건으로 관심을 옮긴다. 이번에는 갈색 가죽으로 표지를 만든 다이어리였다. 브루스는 감싼 끈을 풀려고 손가락을 끈과 표지 사이에 집어넣다가 잠시 멈추며 고개를 저었다.
“손님. 고인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는 법이에요.”
그러다 브루스는 책상 아래의 작은 공간을 보며 히죽 웃는다.
“그럼 몰래 볼게요. 약속해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게요.”
브루스가 허공을 향해 엉터리로 성호를 그은 뒤 간절할 어조로 얘기하고 잠시 뒤에는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브루스는 보물찾기를 하듯 책상 아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브루스는 다이어리를 감싼 끈을 풀고 한 장 씩 사락사락 넘겨보았다. 수첩에는 날짜와 그 날의 일정 같은 것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아빠가 그 아래에 몇 마디 토를 달아놓기도 했다. 코멘트의 대부분은 욕설이었다.
브루스는 제 기억을 토대로 몇몇 날짜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이어리를 살폈다. 주주총회, OC 입장권-친절한 익명으로부터, 빌어먹을, 변상금, 법률 상담, 다시 주주총회-어떤 새끼가 계속 빼돌리는 거지?, 오. 운이 좋았어, M이 눈치 챘을까?, 영화... 등의 글귀들이 단정하지 못한 필체로 주르륵 브루스의 눈앞을 흘러갔다. 브루스는 다이어리 표지에 딸린 수납공간에서 몇몇 종이들을 찾아냈다. 대부분은 영수증이었고, 정치가나 다른 기업의 임원, 동료 의사의 명함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브루스는 회색의 반듯한 카드 하나를 발견했다. 카드 위에는 아울즈 크로가 멋들어지게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는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입장권인 모양이었다. 이게 얼마나 소중하면 입때껏 모셔두었담. 브루스는 혀를 차면서도 이런 개방된 곳에 보관한 걸 엄마가 알지 못한 정도였으니 역시 자신의 부모님은 참 정이 넘치는 사이였다고 새삼 이죽이었다. 브루스는 엄지로 양각처럼 튀어나온 마크의 인쇄면을 쓰다듬었다. 눈에 익은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이 모양을 아주 가까운 시일에 봤던 기억이 났다. 새의, 부엉이의 머리를 본뜬 복면을 쓴 사람. 그 사람이 이 저택으로 돌아오던 날에 브루스와 칼을, 정확히는 칼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가슴에 분명 이 마크와 똑 닮은 문양의 오브젝트가 있었다. 어디를 가나 부엉이투성이군. 후우- 후우- 마치 환청처럼 날짐승의 울음소리가 브루스의 귓가에 맴돌았다.
“지루하네요.”
브루스가 다이어리를 탁 소리 나게 경쾌히 닫으며 책상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대충 다시 끈으로 봉한 다이어리를 브루스는 흥미를 완전히 잃은 듯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툭 던져놓았다. 브루스는 크게 기지개를 키며 몸통을 도리도리 움직였다. 그리고 아이는 보았다. 서재의 문 위에 장식된 부엉이 조형물을. 브루스는 저가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자신이 방치해둔 빨간 공 옆으로 다가갔다. 날개를 활짝 핀 부엉이는 마치 이 방안을 감싼 듯 제 몸체를 부풀리고 있었다. 너로군. 브루스가 제 환청의 근원을 향해 비죽 웃었다. 브루스가 공을 잡았다. 통, 통, 통. 위아래로 몇 번 튕겨 본 뒤에 브루스는 공을 제 어깨보다 높이 들어올린다. 그리고 던졌다. 쾅!
“10점, 만점!”
정확히 부엉이의 부리를 맞히고 다시 땅으로 돌아와 서재 안을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공을 보며 브루스가 깔깔 웃으며 방안을 폴짝폴짝 뛰었다.
칼은 도서관 안에서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소리는 용케 삼켜냈지만 미처 수습하지 못한 진동 때문에 신문을 넘기는 칼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날짜별로 정리된 신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칼은 웨인저택에 있을 브루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칼은 병원에서 브루스의 회복상태를 확인했던 것 이외로는 브루스를 직접 투시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이의 건강상태 정도는 직접 아이의 행동으로 보거나 아이의 몸에서 나는 소리들을 듣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정보를 아이의 동의 없이 얻고 싶지 않아서 칼이 스스로에게 그어놓은 일종의 선이었다.
첫날에 불쑥 자객이 튀어나왔던 적도 있고 해서 칼은 자신을 바깥으로 보내는 브루스에게 처음에는 반발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이담에 내가 혼자 있겠다고 하면 어떡해! 그때 칼이 혼자는 싫다고 삐져서 아주 떠나버리거나 하면 곤란하단 말이야!”하면서 으름장을 놓으며 칼을 밖으로 보냈다. 나가서 바깥 공기도 쐬고, 사람 구경도 좀 하고, 할 수 있으면 총알이 남았는지 확인해달라는 게 브루스의 요구였다. “칼은 눈에 안 띄게 움직일 수 있잖아? 그렇지?” 그렇게 내보내는 와중에도 브루스는 불안한 듯 칼을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칼은 할 수 없이 대신 귀를 계속 세우고 있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브루스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표정을 굳히고 단단하게 일렀다. “절대 눈에 띄면 안 돼. 토마스나 알프레드랑은 나 없을 때는 마주할 생각도 마.”
칼은 사고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발행된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주식에서 해외 투자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만 웨인 엔터프라이즈는 최근 경기침체에 따라 하락세를 띠고 있었고 근래에 파워스 사로 일부 기술을 이전시켜버린 건수도 있어서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는 주식이 아니었으므로 차명주식을 통한 탈세 포탈이라도 마련하려는 게 아니냐는 뼈있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웨인 엔터프라이즈는 놀라울 정도로 상승세로 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익명의 주식매매는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토마스, 마사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는 회사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서 당연히 주가가 더욱 떨어졌었지만 아주 차분하게, 어린 CEO를 필두로 한 회사는 성장해나갔고 도박장이라고는 하나 고담의 랜드 마크도 인수한 후로는 그 가치를 높여가고 있었다. 아울즈 크로의 경영에 참가한 후로는 오히려 제 아버지 때보다도 더욱 성장한 기업이 된 것이다. 허, 자본이란. 칼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신문 뭉치들을 확인한 칼은 어느 새 대강의 복구 작업을 끝낸 골목으로 왔다. 얼마간 새 벽돌들을 깔고 망가진 관들을 새로 고쳐 묻은 골목을 살피던 칼은 왁자한 군중들의 소리와 그 속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한 사람의 외침을 들었다. 골목에서 빠져나와 조금 걸으면 광장이 나오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인파의 중심에서 단상에 서있는 정치가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유세를 하고 있었다. 선거캠페인을 구경하는 이들 중에는 그의 말 한마디가 끝날 때면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성난 얼굴로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의 우리 시는 아주 무능합니다!”
정치가는 호소하듯 제 팔을 넓게 벌리고 손바닥을 군중에게로 펼쳐 보이며 외쳤다.
“여기, 지금 여러분들 앞에 선 토마스 군의 부모님도 길거리 부랑자에게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지요. 하지만 우리 고담은 무엇을 했습니까?”
먼발치에서 칼은 발을 멈추고 연설을 지켜보았다. 집을 비운다 싶더니 토마스는 반듯하게 머리를 정돈한 정치가의 옆에서 주눅이 든 얼굴로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칼은 제 코트 주머니에 담은 탄피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골목길 하수도의 이제 막 복구된 벽면에 시멘트와 함께 굳은 총알을 기억했다.
“피, 필립... 저는...”
“괜찮아요, 토마스. 이렇게 제 곁에 서준 당신의 용기에 보답하겠습니다. 선량한 시민들이 시의 무능함에 상처받는 걸 더는 지켜보지 않겠어요!”
필립 핸슨이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주먹을 쥔 손을 추켜올린다.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셔터소리가 뒤섞여 포화를 이루었다. 칼은 그때 시장 후보의 반들반들한 소재로 지은 재킷에 장식된 브로치를 보았다. 브로치는 부엉이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돌길 위에서 콩콩 그려놓은 선 안을 뛰어다니던 브루스는 약간 쌀쌀한 바람에 킁 하고 마른 코를 삼켰다. 저번에 서재를 거의 뒤집어엎은 것을 보고 알프레드는 덤덤한 얼굴로 브루스가 공놀이하는 것을 금지했다. 브루스가 코로 웃으며 “무슨 권한으로?” 쌀쌀맞게 물으면 집사는 고요하게 브루스를 내려다보다가 “토마스 주인님과 직접 얘기 나누시겠습니까?”하고 되묻는다. 브루스에게 토마스의 이름을 들먹이며 제재를 가하는 것은 아주 전부터 알프레드나 엄마, 아빠가 종종 사용하던 수법 중 하나였다. 한때는 참 잘 먹혔던 훈계방법이었다. 하나 뿐인 형제이자 또 친구이기도 한 그는 어린 브루스에게 어쩔 수 없이 그 존재가 커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봤자 같은 어린애 아닌가. 브루스가 속으로 차게 웃으며 알프레드를 바라보다 제 손에 있던 공을 던져서 방금 전까지 알프레드가 정성스레 겉을 닦던 화병을 깨뜨렸다. 챙그랑 소리가 저택 안을 울리자 브루스가 생긋 웃었다. “아니.” 짧게 답한 뒤 브루스는 집사를 지나쳐 제 방으로 걸어갔다. 칼이 걱정하겠는데. 그 와중에 브루스가 생각한 것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왔던 날에는 아마도 약기운 덕분에 빠르고 깊이 잠들 수 있었지만 그 후로 브루스는 다시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칼과만 지냈을 때는 빈도나 강도가 많이 줄었던 것이 다시금 생생하게 아이의 잠자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브루스는 지칠 줄 모르고 솟아나는 과거의 파편에 짜증이 났고 무엇보다 그 상흔을 남긴 이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것을 앓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칼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보채는 브루스의 머리를 끌어안으면서 잘된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웃고만 있는 거보단 훨씬 낫구나.”
칼이 마치 자장가를 부르듯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브루스는 칼의 팔에 매달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잘 삼켜냈다. 아이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 작은 흉강의 움직임에 맞추어 칼이 브루스를 토닥였다. 벌써 새살이 차오르고 흉터만이 남은 상처부위가 아직도 신경의 끝에 고통을 간직한 채 목을 죄듯 아파왔다. 몸이 아닌 머릿속에 든 통증은 울컥울컥 제 기억을 토로했고 그 어둠 속에 칼이 함께했다. 브루스는 잠결인 듯 대수롭지 않은 양 웅얼거리면서 칼에게 물었다.
“정말, 옆에 있을 거야?”
질문이 끝난 후 아이는 문득 제 등골이 차가워서 몸을 웅크리며 눈을 꼭 감았다.
“그래.”
까만 시야에 칼의 대답이 밝았다. 왜 하고 제일 처음부터 따라다니던 의문이 지금 다시 아이의 머릿속에 차올랐지만 브루스는 잠잠히 칼의 대답에 우선 귀를 기울였다.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브루스.”
칼이 단단히 브루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정말 칼은 브루스 옆에 있었다. 브루스가 이 저택에서 다시 예전의 그 말괄량이마냥 굴 수 있는 건 다 그 덕분이었다. 혼자 덜렁 커다란 저택에서 곳곳에 널린 부엉이의 표시를 발견해도, 문득 총알에 부모님이 죽고 자신 역시도 죽을 뻔했던 날 밤의 광경이 생각나도, 죽어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토마스의 눈빛이 생생해도 브루스는 제가 혼잣말로 재잘거리면 어디선가는 그것을 들을 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칼의 존재는 단순히 브루스가 목숨을 잃을 확률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설령 브루스가 죽게 되더라도 누군가는 그 사실을 인지해주리라는 믿음이었다.
브루스는 거리낄 것 없이 제 자신을 연기했다. 굳이 지나치게 고분고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자연스럽게 브루스는 저택 안을 활보했다. 특히 가장 즐거운 부분은 집사에게 실컷 어거지를 부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브루스는 오늘 아침에는 스프그릇을 물리면서 성을 부렸다.
“콩 싫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발버둥 치는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도, 토마스도 별 반응은 없었지만 브루스는 예민하게 둘의 표정 변화를 읽었다. 그런 브루스를 끌고 식당 밖으로 나온 것은 칼이었다. 언제 소란을 부렸냐는 듯 차분한 얼굴이 된 브루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스프그릇을 엎으려고 했어.”
“그러다 다친다.”
엄한 얼굴로 브루스를 데리고 나왔던 칼 역시도 금세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어있었다.
“전에는 잘 먹었잖니.”
“칼이 억지로 먹인 거잖아.”
“다음에도 그릇은 던지지 마렴. 네가 다치면 안 되니까.”
“고려해둘게.”
브루스가 새침하게 말했다. 브루스는 자기가 변덕을 부리고 칼이 그것을 수습하는 것으로 분명 자신의 양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귀찮아할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칼을 내버려 둘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했다. 저들의 일상에 끼어드는 궂은일을 칼이 도맡게 된다면 그 편리함 때문이라도 토마스가 칼에게 트집 잡을 이유가 없어질 테니 말이다.
어째서 칼이 제 옆에 있기로 마음을 정한 건지 브루스는 아직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브루스에게야 워낙 좋은 일이라 지금도 계속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도무지 칼에게 이 모든 귀찮음을 감수할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외계인 변덕 같은 걸까. 브루스의 마음속에 남은 일말의 불안이 속삭였다. 하다못해 칼에게 계약서라도 받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칼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분명 형식적인 틀이 잡히면 웬만해서는 그걸 외면할 수 없을 테니까. 근데 외계인과는 어떤 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해야 언제고 효력이 발생할 수 있는 거지? 앞 정원의 텅 빈 공터 앞에서 맴맴 돌던 브루스가 뜀을 멈추고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정말 왜지...”
“도통 어울리지 않아서 말이야.”
“뭐?”
등 뒤로 갑자기 던져진 말소리에 브루스가 놀라 파득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고 시큰둥한 얼굴의 토마스였다. 선거캠페인에서는 잘도 우는 얼굴을 만들더니. 기다리던 사람과 한참 다른 체구의 제 또래가 나타나자 브루스는 내심 실망해서 속으로 트집을 잡았다. 그 바람에 토마스가 저에게 뭐라 했는지 놓치고 말았다.
“거기. 보기 싫어서 없앴다고.”
토마스가 한껏 자비로운 얼굴을 하면서 턱 끝으로 텅 빈 흙 밭을 가리켰다. 아, 하고 브루스가 드디어 맥락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아이는 인상을 찌푸린다. 브루스는 제 가까운 기억 속에 있는 작고 하얀 종모양의 꽃이 죽 매달려있던 꽃의 무리를 떠올렸다. 아주, 아주 가끔씩 아빠가 엄마에게 사서 안기는 꽃이기도 했다.
“진주 같아서 예뻤는데?”
“개개가 어떤 건 상관없어. 여기에 안 어울리면 소용이 없으니까.”
“...그냥 네가 거슬렸던 건 아니고?”
브루스가 떠보듯 묻자 토마스는 아무 말 없이 브루스를 바라만 보았다. 쓸데없는 걸 물어봤군. 브루스는 침묵 속에 뻔히 들려오는 대답에 흥하고 콧방귀를 쳤다. 브루스는 다시 토마스를 무시하고 분필로 그려 놓은 도형 안을 통통 뛰어다녔다. 브루스를 유심히 바라보던 토마스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네 외계인은 어디 갔어?”
탁! 조금 큰 소리를 내며 땅에 착지한 브루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는 거냐 묻는 제스처였지만 소년은 그저 더 짙게 미소를 굳힐 뿐이었다.
“외계인 말이야. 네 잘난 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브루스가 침착하게 되물었다. 아이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지만 말없이 토마스가 저를 응시하기 시작하자 잠깐의 공백 속에 제 심장소리가 귓가에 차올라 그만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칼은 은퇴한 선생님이야. 내가 말하지 않았어? 칼이 내 공부를—”
“작은 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마.”
브루스의 말을 끊으며 토마스가 얘기했다.
“놈이 인간이 아닌 거, 알아.”
입꼬리가 어색하게 떨려왔다. 브루스는 자꾸만 표정이 굳어지려는 것 같아 초조하게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못해도 심드렁한 표정이라도 만들어보려던 브루스의 노력은 이어지는 토마스의 말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꽤 재밌는 능력을 가진 거 같던데? 독도 안 듣고 말이야.”
“...뭐?”
“아, 수상하다 싶어서 그때 저녁에 차에 독을 넣었었거든.”
브루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요즘 외계인이 좀 성가시게 눈에 밟혀서 말이야. 쓸 만한 것도 같고 네 말을 잘 듣는 거 같아서 내버려뒀지만 더는 곤란해.”
점점 굳어가는 브루스와는 반대로 토마스는 더더욱 부드러운 어조로 브루스에게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말투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친절해서 브루스는 차라리 제가 듣고 있는 내용이 자신이 약한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탓에 착각하고 있다고 마저 믿고 싶었다. 그도 그럴게 눈에 밟힌다니? 브루스는 분명 칼에게 절대 자신이 없는 곳에서는 자기 집 사람들과는 마주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 했을 터였다.
“브루스, 그거 알아? 요즘 미국 내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거.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어. 캔자스 주에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DNA 샘플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그게 또 기밀이란 말이지.”
말을 이어가던 토마스가 마지막으로 더 진하게 웃으며 브루스에게 물었다. 브루스의 뇌리에 박힌 그 미소는 마치 칼날 같았다.
“궁금하지 않아? 왜 범인을 잡을 단서에 국가기밀 씩이나 붙었는지?”
브루스는 언젠가 칼이 자신은 단순히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다른 지구에서 왔다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했다. 칼이 그의 이름조차 없던 때에 그는 이미 브루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참 칼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적에는 칼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을 그의 손바닥 위에 놓고 제 목숨을 저울질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칼이 제 이름을 안다는 게 곧 그가 브루스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칼은 브루스를 알았지만 이 브루스 웨인을 아는 게 아니었다. 칼은 평행우주를 돌아다니면서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물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패턴을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게 브루스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더라도 아주 백지상태인 것보다는 브루스의 상황을 추측하는데 유용한 밑바탕이 되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이 지구에 칼이 아닌 칼이 존재할 가능성도 역시 높은 확률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토마스는 브루스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어 하고 있었다. 토마스가 괜히 방화범 이야기를 언급한 것은 칼이 범인이라고 말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설령 그런 의도가 들었다고 해도 브루스가 그게 절대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진실이 중요한가? 진실이 언제나 그 힘을 발휘하던가? 브루스는 자꾸만 골목길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라 숨이 막혔다. 이제 가끔은 총에 맞아 죽는 것이 브루스가 아닌 칼이기도 한 꿈이 지금 눈앞에 생생했다. 화가 났지만 토마스의 의도는 브루스에게 정확히 먹혀들고 있었다.
“브루스.”
침착한 목소리가 아이를 부른다. 브루스는 갑자기 화가 났다. 도대체 뭐가 좋다고 이렇게 꼬박꼬박 제 곁으로 칼이 돌아온 건지, 브루스는 이제껏 실컷 그 사실에 자신이 기뻐한 것을 알면서도 초조함에 신경질이 났다.
“내가,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브루스가 가시 돋친 말투를 숨기지 않고 딱딱하게 끊어 말했다. 브루스는 자신은 갈 수 없는 장소에 있을 증거가 궁금해서 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칼을 바깥으로 보내기도 했지만 칼이 이 도시에 함께 있게 된다면 그가 혼자서라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브루스는 이 저택 안에서 자신이 소동을 부리더라도 그것이 칼과는 무관한 일임을 얘기하기 위해서도 칼을 내보냈다. 하지만 칼은 전에도 그랬듯 아이의 불안을 해부하기에 너무나 뛰어났고, 더 나아가 이제는 브루스를 아꼈다.
“네가 주목받는 것보단 낫지.”
“첫날에 자신이 공격 받은 거 잊었어?”
“그것도 나였니? 다행이군.”
칼은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 미소까지 지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브루스는 세상에 대해 전부 알기에는 턱없이 어렸지만 지금 자신이 살아 숨 쉬는 이곳이 결코 친절한 곳이 아닌 것쯤은 알았다. 칼은 보석도 만들 수 있고, 빠르고, 감각이 예민하고, 날 수 있고, 싸울 수도 있지만 그래봐야 브루스 같은 어린애에게 지갑을 털리는 순진한 외계인이었다. 그런 그가 제가 짓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가게 될지, 아니면 외계인이라는 이유로 이상한 실험에 휘말리게 될지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정말 그 어느 지구엔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 지구가 이곳이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해주겠는가.
“칼.”
브루스가 다시 칼을 노려본다. 어째서 이렇게 번번이 미래는 머릿속에서만 여유로운 걸까.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는 건 비단 토마스만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결국 꿈같았던 차후의 기대들보다 처음에 생각했던 계획이 가장 현실적이었음을 알았다. 칼은, 무사하게 여기를 나가야한다. 지금 브루스는 제가 고집을 부리면 결국 칼은 들어주게 돼 있다는 사실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나가.”
브루스는 무표정하게 손끝으로 저 멀리에 굳게 닫힌 철문을 가리켰다. 칼은 대답 없이 아이를 바라만 보았다.
그 날, 세찬 바람 하나가 웨인저택을 뒤로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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